서문

이것은 자신의 목숨과 바꿔서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자 했던 누군가의 기록이다. 자신의 위대함에 가려져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의 기록이기도 하다. 모자란 내 글솜씨로 담아내기에는 복잡하고 수수께끼 같은 구석이 많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시도하지 않으면 이 일은 시간 속에 묻혀버릴 것이 분명하기에 미진한 솜씨나마 글쓰기에 매진해본다. 이 글을 읽는 이가 부디 이 기록이 사건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평생 음악만을 바라보고자 했던 내 글솜씨는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어 도무지 전말을 제대로 전할 자신이 없다.

 

*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백지를 두고 오랜 시간 고민을 거듭했다. 나는 이 일의 직접적인 관계자도 아닐 뿐더러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정렬하는 데에 애를 먹고 있다. 그렇다고 시간 순으로 있었던 일을 나열할 뿐이라면 이 사건에 얽힌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겪었고, 얼마나 서로를 아끼고 있으며, 서로를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지 전달되지 않겠지. 그래서는 이 기록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 내게 선택지는 하나 뿐이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낮이면 쥐죽은 듯 고요해지는 사쿠마 저택에 손님이 찾아왔다. 깨어있는 이가 없어 그 손님은 뙤약볕 아래 오랜 시간을 서있었다. 어찌나 더웠는지 줄줄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다가 끝내는 잠시 자리를 비우기까지 했다. 두어시간 후 나타난 그의 손에는 얼음으로 꽉 채운 일회용 컵이 들려있었다. 찰랑이는 것은 붉은 기운이 도는 투명한 액체다. 그는 높은 대문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한 번 침착하게 초인종을 눌렀다. 집 안에서 종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전자기기가 내보내는 음이라기엔 지나치게 고전적이고 으스스한 소리였다.

이번에도 기척은 없었다. 손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찰나, 그제서야 집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딸깍하고 문이 열린다. 다른 집에 비해 두 배는 넓은 현관 위 차양이 길게 그늘을 드리웠다. 현관 문을 열고 나오는 이의 팔이 창백했다. 먼저 튀어나온 것은 검은 양산이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낮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새카만 어둠 속에서, 붉은 빛이 번쩍 빛났다.

손님은 순간 놀라 눈을 부빈다. 천천히 문이 닫히며 짙은 어둠이 물러갔다. 여전히 그늘 아래 선 이는 등지고 있는 어둠과 비견될만한 검은 머리칼을 어깨 위에 흩어놓은 채 양산을 폈다. 검은 양산이 펼쳐지며 그 주인을 가렸다가 올라갔다. 머리 위에 그늘을 얹고 그가 다가왔다. 붉은 눈동자가 똑바로 앞을 향한다. 철창 너머에 선 손님은 꿀꺽 침을 삼켰다. 이슬 맺힌 컵을 다른 손으로 바꿔쥔다.

“어서오시게나. 이렇게 이른 시간에 손님이 찾아올 줄은 몰라 실례를 범했구려.”

살풋 휘어진 눈꼬리가 야살스럽다. 기이한 분위기를 버티지 못 하고 손님은 뒷목을 더듬는다. 분명 더위 탓에 맺힌 땀방울이 싸늘했다. 붉은 입술이 저주인지 유혹인지 모를 속삭임을 뱉어낸다.

“보아하니 본인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인 듯 한데, 무슨 일인고? 이 사쿠마 레이에게 남몰래 구하고 싶은 조언이라도 있는가? 보아하니 우리 리츠를 찾은 건 아닌 듯하고.”

얇은 입술 사이로 빨간 혀가 튀어나왔다. 슥 훑는다.

“이 몸에게 피라도 바칠 요량으로 찾아왔는가?”

히죽. 웃는 모양새가 아찔하리만치 매혹적이었다.

 

그, 아니 그것은 지독하게도 향이 진하다. 낯선 이가 그 자 앞에서 완전히 굴복하고 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그를 동정한다. 나 역시 사쿠마 레이 앞에 서본 일이 있기에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자 앞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틀림없이 많은 것을 각오하고 준비했겠지만, 사쿠마 레이라는 마성은 모든 각오와 준비를 무용하게 한다. 나를 믿어라. 나는 그 자 밑에서 몇 년을 굴렀다. 세상 어느 누구도 사쿠마 레이가 무심히 흘리는 한 마디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손님, 아니, 이제는 제대로 이름을 불러주자. 다카기 사토시는 그 날 처음으로 사쿠마 레이를 보았다. 희고 창백한 메마른 소년. 무성한 소문으로 이루어져 있던 사쿠마 레이라는 존재의 실체였다. 짙은 어둠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요괴 같기도 하고 그저 평범한 또래의 소년 같기도 한 그가 거기 있었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희고 창백한 몸체에 붉은 눈과 입술이 선명했다.

반기는 듯도 하고 경계하는 듯도 한 오묘한 미소가 철창 바로 건너편에 섰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다카기는 순간 빈 손을 움켜쥐었다. 충동적으로 올라가는 손을 거머쥐고서야 겨우 입을 뗀다.

“잠깐 시간을 내…줘.”

어물어물 목소리가 작아졌다. 이렇게 얕보이려 온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선을 빨아들이는 요물 앞에서 어떤 머리가 제정신을 차릴 수 있으랴. 다카기는 순간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러 왔는지조차 잊을 뻔했다는 사실을 깨닫곤 깜짝 놀랐다. 입이 구걸한 것은 그와 보내는 시간이었다. 사쿠마 레이라는 환상종의 요괴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 것은 몸인가 마음인가. 분명한 것은 이렇게 흘러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다카기는, 아직 성인이 되기엔 너무 앳된 소년은 남몰래 혀를 깨물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꼭 전해야할 말이 있어. 날 들여보내줘.”

흘긋. 주변을 살피는 눈길이 초조하다. 붉은 눈이 그 모양을 가만 지켜본다. 얄궂게도 매혹적인 시선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다카기의 전신을 훑었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가늘고 섬세한 것이 훑어내리는 듯한 감각에 그가 부르르 떨었다. 사로잡힌 듯 옴쭉달싹할 수 없다. 식은땀과 이슬로 눅눅해진 홀더 너머로 녹은 얼음이 무너지며 작은 파도가 일었다.

“그럼세. 학우를 문전박대할 수야 없지.”

활짝 웃는 얼굴이 꽃처럼 화사했다. 붉은 눈동자, 그 붉고도 아찔한 시선 위로 검은 속눈썹이 드리웠다. 흐읍. 다카기는 헐떡였다.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숨이 찼다. 검은 양산이 느리게, 어쩌면 그저 그렇게 느껴질 뿐인지도 모르지만, 사쿠마 레이의 얼굴을 감췄다. 희고 날카로운 턱과 가느다란 목이 검은 차양막 아래로 사라진다. 검은 셔츠 아래로 하얀 팔이 늘어졌다. 골반께에서 주름진 티셔츠 아래로 조그만 엉덩이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무엇하는가. 들어오지 않고.”

붉은 입술이 웃고 있었다. 언제 열렸는지도 모를 대문 너머로 발을 뻗는다. 보이지 않는 선을 넘는 순간 다카기는 깨달았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버렸다.

무심코 돌아보았다. 햇살이 따가웠다.

 

*

분명히 언급해둔다. 나는 이 일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모든 상황에 함께하지도 못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을 남기는 것은 이 일이, 그의 희생이 알려져야 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내게는 사쿠마 레이, 그가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는지 알려야만 하는 의무가 있다.

 

사쿠마 저택은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만큼 어두웠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모조리 차단되어있는 탓이라고 그가 설명했다.

“거동하기 쉽지 않겠지. 미안하네. 빛을 들일 수가 없어. 이 이상 소란을 피웠다가는 모두의 잠을 깨우게 될 게야. 자네도 소란을 원치 않는 듯하니 양해 부탁함세.”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의 하얀 손 밖에 없고 들리는 것이라고는 그의 목소리 뿐이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울렸다. 제 귀 밖으로 나갈 리 없는 소리임에도 조마조마하다. 그가 키득키득 웃었다.

“이거 곤란하구만.”

목소리에 숨결이 섞여있었다. 하아. 옅게 퍼지는 숨소리에 뒷목이 바짝 당겼다.

“진정하게.”

숙녀를 에스코트하는 점잖은 신사처럼 가볍게 받치고 있던 손이 갑자기 다카기의 손을 덮었다. 차고 메마른 손이었다. 긴장으로 달아오른 손의 열기를 앗아가듯 위아래로 싸늘한 냉기가 서렸다.

“혈기왕성하구만.”

분명 다카기에게 한 말은 아니었다. 그는 마치 할머니가 손주에게 하듯 한 손으로 부드럽게 다카기의 손등을 쓸어내렸다. 다독이듯 다정한 손길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희미하게 들리는 건 어쩌면 입맛을 다시는 소리일까.

차가운 손가락이 팔목을 타고 올라왔다. 서늘한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다카기가 몸을 움츠리자 그가 웃는다. 바로 옆에서 웃음 소리가 들렸다. 뱉어진 숨이 귓가를 때렸다.

“그렇게 심장을 울리지 말아주게. 일족이 모조리 피냄새를 맡고 깨어나면 자네한테도 좋을 게 없지 않겠나.”

깊게 숨을 들이켰다. 보이지 않는 그를 똑바로 바라본다.

“장난치지 마. 이럴 시간 없어.”

손등을 쓰다듬던 손이 멈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재미없기는.”

묘하게 투덜거리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그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둠이 이어졌다.

 

사쿠마 저택에는 나도 가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내가 보았던 풍경과 다카기가 보았던 풍경은 다르리라 확신한다. 내가 그 집을 찾은 건 저녁이 한참 지난 시각이었고, 그 시간대의 사쿠마 저택은 여느 현대인의 저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내부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시대를 착각한 듯한 복장을 하고 거무죽죽한 얼굴을 하고 있기는 해도 말이다.

 

후.

일렁인다.

붉은 것이 아릿하게 눈 속을 파고들었다. 흔들리는 것은 시선일까 불꽃일까. 다카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촛불 하나는 이토록 밝은 것이었나. 낯선 눈부심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손님을 접대하기에는 변변치 않지만 용서해주게나. 손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집일세.”

다카기를 앉혀두고 어딘가로 사라졌던 레이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투명한 컵에 붉은 액체가 출렁였다. 다카기는 잔을 질린 듯이 바라보았다. 흡혈귀의 일족이라는 명성이야 익히 들어왔지만 도가 지나친 게 아닌가 생각하고 만다.

“그런 표정하지 말게.”

레이가 웃었다. 그는 소리 없이 다카기와 제 앞에 잔을 내려두고 쟁반을 거두었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료라네. 아무리 나라도 외부인에게 피를 내놓지는 않아.”

씩 웃는 입술이 너무 붉어서 다카기는 차라리 잔을 내려다보았다. 같은 붉음에 같은 촛불 아래인데도 홀로 유난히 더 생기 넘쳐보이는 입술이 기이했다.

살짝 손을 뻗어 잔을 들어올린다. 시원한 유리가 손끝에 달라붙었다. 손목을 돌리자 액체가 함께 빙글 돈다. 잔을 입에 댄다. 입술에 시원한 기운이 퍼졌다. 가만히 내려놓았다.

“토마토로군.”

“마음에 드는가? 내 가장 좋아하는 음료수라네.”

어느새 등받이에 몸을 푹 파묻고 다리를 꼰 레이가 다카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세가 실로 오만하다. 다카기는 잠시 그와 눈을 맞추고 의미없는 눈씨름을 했다. 레이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저 재밌다는 듯 상냥한 눈빛으로 다카기를 어루만질 뿐이었다.

갑자기 잔을 움켜쥔 다카기가 주스를 들이킨다. 농밀한 액체가 목구멍을 넘어가며 머리를 울린다. 싸늘한 한기가 목을 타고 내려가 심장을 관통했다. 잔을 탕하고 내려놓았다. 꿀렁이는 울대와 목덜미를 집요하게 담아내던 시야에 소년의 물기 어린 얼굴이 들어찼다. 마치 야수같은 눈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다카기가 말했다.

“무얼?”

레이가 물었다. 시뻘겋게 불이 붙은 눈동자가 시선을 살랐다.

“날 도와라, 사쿠마 레이.”

흡혈귀의 입가에 짙은 핏물이 베어든다. 사르르 녹아내린 눈가가 제게 쏘아진 불을 머금었다. 아니다. 그것은 불이 아니었다. 나무에 열린 채 과숙되어 끝내는 썩어버린 토마토의 악취였다. 썩어문드러진, 검게 물든, 존재를 상실한 것.

“애송이가 제법 패기가 있구나.”

그것이 말했다. 입가는 여전히 둥글린 채다. 가느다란 상체를 굽혀 잔을 집어든다. 하얀 손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유리잔 표면에 맺힌 이슬이 스며들어 영롱하기까지 하다. 일렁이는 불빛. 흔들리는 초상. 목이 타 잔을 찾았다가 빈 것을 깨달았다.

“어디 말이라도 해보게나. 귀 기울일 가치가 있는지는 들어보고 판단하도록 하지.”

섬찟할 정도의 위압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디선가 풍겨오던 썩은 내가 사라지고, 어지럽게 흔들리던 시야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고요해졌다. 다카기는 숨을 크게 들이켠다. 소리라도 날까 조심스런 심호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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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린네  (0) 2019.08.06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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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린네

드랍 2019. 8. 6. 17:45

멜님 자캐로 쓰던 건데 쓰다보니 귀찮아서 드랍.

뭐든지 완성하려고 하는 쪽이 나한테 더 나쁜 거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쓰다가 지겨워지면 드랍하기로 했음. 그래서 카테고리도 만들었으니 이쪽이 자주 업로드 될 예정. 내가 쓰고 싶어지던지 누가 기다리면 더 쓸 수도 있겠지, 뭐.

 


뒤에서 보자니 무척 새까맣다. 반들반들한 것이 동그랗기까지 하니 만져보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솟았다. 무심코 손이 올라가는 것을 꾹 참았다. 어쩌다 한 번 본 후로 친밀하게 인사 한 번 제대로 나누지 않았는데 머리에 손을 댈 수는 없었다.

시선이 강했던 것일까. 뒤통수 마냥 동그란 한 쌍의 눈이 마리아를 향했다.

"왜 그러세요?"

린네가 물었다. 빠르게 깜빡이는 눈꺼풀 사이로 푸른 눈동자가 싱그럽다.

"그냥. 귀여워서."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머리에 손을 올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손바닥이 닿았을 자리에 뭉툭한 것이 얹어졌다.

"마리아에게는 아직 그렇게 보이는군요."

린네는 불편한 기색도 없이 수줍게 뺨을 붉힌다. 마리아는 욕망을 담아 린네의 머리칼을 살짝 흩뜨렸다. 매끄러운 검은 머리가 마리아의 손길을 따라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 모양을 흡족하게 바라보곤 팔을 내린다.

"아직이라니?"

"아, 그게."

린네는 어색하게 눈을 돌린다. 마리아는 그 순간 린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아차렸다. 먼 곳을 향하는 시선에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실려있었다.

찰랑이는 단발머리를 한 이 어린 숙녀는 경건한 마음가짐을 위해 준비된 예복을 마구 더럽히며 뛰어다니던 철부지 시절부터 마리아를 알았다. 마리아도 아직 오동통한 뺨을 하고 있던 해맑은 여자아이를 기억했다. 몇 년 사이 세상 모든 일을 달콤한 사탕처럼 여기던 소녀는 교단의 핵심 인사로 떠올랐다.

그저 단 한 번의 여행이었다.

그 한 번의 여행이 모든 것을 바꿨다. 그저 조금 착하고 순진한 것 외에는 크게 눈에 뜨일 것 없던 여자아이는 귀한 능력자가 되어 돌아왔다. 희귀한 재능은 기회를 바라는 이들의 시각을 바꿔놓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자 소녀가 받는 대우도 달라졌다. 돈과 권력이 오가는 복잡한 흐름 속에 린네 그라임스라는 이름의 바람이 불었다. 그 변화의 흐름을 타고 무언가를 바꿔보고자 하는 자들이 생겼다. 어느새 교회에는 폭풍우가 불고 있었다. 그런 때였다.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를 타고 린네는 어느샌가 커다란 배의 선장이 되어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발랄하고 천진난만했으나 아무도 그런 모습을 좋게 보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어깨에는 무거운 돌덩어리가 하나씩 얹어졌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린네의 얼굴에서는 차츰 웃음기가 사라졌다.

마리아가 안전한 곳에서 숨을 죽이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동안 린네의 빛나는 눈동자는 침착하고 어질어졌다. 마리아가 제 몸을 보전하기 위해 비굴함을 무릅쓰는 동안 린네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개를 꼿꼿이 들고 서있었다. 마리아가 살아간다는 기쁨을 되찾기를 포기하게 되는 동안 린네는 많은 이들의 삶을 구하고자 백방으로 뛰었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이었다. 마리아는 어째서 이 여자아이가 눈에 밟히는지 몰랐다. 친한 것도 아니고 이렇다할 연이 있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제님."

린네가 마리아를 불렀다. 동그란 눈이 상냥하게 접혔다. 웃는 빈도는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진심으로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진지한 눈빛이 마리아를 향했다.

"기억하세요? 여기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이에요."

수줍게 웃으며 예배당을 둘러보는 린네의 눈빛은 아련한 추억에 젖어있다. 마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억하고 있다.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러나 기억할 이유도 없었다.

선명한 풍경은 아니지만 마리아는 분명 린네가 이 곳에서 개구쟁이처럼 웃던 순간을 기억했다. 어째선지 린네에게도 기억에 남아버린 모양이다. 교회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는 일이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일까요.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린네는 그렇게 말하고는 마리아를 향해 성표를 보였다. 마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받는다. 아무리 유명인사가 되었어도 린네는 아직 평사제였다. 교회의 직급은 능력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닌 탓이다.

뺨을 붉히고 뛰듯이 달려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리아는 살며시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속으로 찬찬히 셋을 센다. 그리고 돌아서 숙소로 향했다. 뒤에서 린네의 목소리가 청명하게 들려왔다.

린네 그라임스는 기분이 좋았다. 남몰래 동경하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것이 즐거웠던 탓이다. 함박웃음이 걸린 소녀의 얼굴을 보곤 동료가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내왔다.

"저 사제님이랑 친해?"

"그건 아니고."

조금 아는 사이야. 린네가 수줍게 대답했다. 소녀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린네는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앉아 책을 펼쳤다. 친구들이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주변의 눈총을 받곤 입을 다문다. 그러거나 말거나 린네는 관심이 없었다.

눈은 책에 두고 린네는 방금 전의 만남을 되짚었다. 독서 시간이 되어 방을 나서는데 문 앞에 마리아가 있었다. 마치 린네를 기다린 듯한 모습이었다. 무슨 일로 여기 계시냐는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고 마리아는 스치듯 걸음을 옮겼다. 그게 마침 같은 방향이었다.

일정을 아무리 되짚어봐도 이쪽에 마리아가 올만한 일이 없는데 무슨 일일까 고민하며 말 없이 걷는데 마리아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어딜 가느냐는 질문이었다. 린네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 뒤에 마리아가 린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곧 헤어졌다. 그게 다였다. 린네는 그게 너무 기뻤다.

어째서 마리아 루첼라이를 존경하느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주제 넘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린네는 진심으로 마리아를 존경했다.

장애 때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것 때문에 시선이 갔으니까. 손이라는 중요한 부위가 없는데도 남들과 똑같이 평범하게 살고 있는 점이 멋있었다. 몇 가지 노동에서 제외되는 점이 멋있게 느껴진 시기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독특한 분위기도 좋았다.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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