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담장이 보인다.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언제나 그랬다. 바깥 풍경은 언제나 삼엄한 철창 너머에 있었다.
출입이 불가능했던 건 아니다. 마리아 루첼라이는 원할 때면 언제든 외출을 하고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가 더 자주 나가기를 원했다. 신전과 공방에 갇힌 듯이 살고 있는 딸이 안쓰러운 탓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창가에 우두커니 앉아 바깥 풍경을 보는 일을 더 좋아했다. …좋아했다.
마리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다. 고요히 앉아있는 모습은 마치 잘 만들어진 인형 같다. 공방에서는 누구보다 바쁘게 일하는 그지만, 집에서는 마치 영혼이 빠진 듯 그렇게 앉아있을 때가 많았다. 바깥 일에 지친 탓이다. 어머니는 그런 딸을 볼 때마다 깊은 시름에 신음하곤 했다. 마리아는 종종 그 고통스러운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나곤 했다.
“마리아.”
루첼라이 부인이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아는 천천히 일어나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괴로워하는 어머니의 뺨에 입을 맞추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미의 무릎에 뺨을 대자 루첼라이 부인의 따뜻한 손이 마리아의 머리 위에 얹혔다. 마리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정적 속에서 시간이 흐른다. 루첼라이 모녀는 그렇게 말 없이 함께 시간을 보냈다.

마리아 루첼라이는 루첼라이 가문의 양녀다. 루첼라이 부인은 제 배 아파 낳지 않은 소녀를 무척이나 아꼈다. 마리아는 그런 어머니를 극진히 따랐다. 교회일도 공방일도 어머니 말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무척이나 순종적인 딸이었고 마음씀씀이가 섬세했다. 루첼라이 부인의 마음이 상할 일은 하지 않았고, 기뻐할만한 일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했다. 불행한 사고로 두 손을 잃지만 않았어도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딸이었으리라.
루첼라이 부인은 종종 마리아의 잃어버린 두 손을 붙들고 오열하곤 했다. 그런 부인을 마리아는 냉랭한 표정으로 바라보곤 했는데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함께 아파하는 것으로 어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섬세한 배려였다. 마리아는 손이 없어도 바느질을 하고 기도를 할 수 있었다. 저에게 아무것도 아닌 일들을 어미가 아파하는 것을 두고 보기 마음 아파 그토록 차갑게 구는 딸이었다. 루첼라이 부인은 때로 그런 마리아의 눈초리에 속상해하곤 했지만 근본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마리아는 병약했다. 곧잘 앓았지만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공들여 분을 칠해 핏기 없는 뺨을 숨겼고 아프고 힘들어도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남 몰래 앓는 소녀의 진정한 모습을 아는 것은 고작해야 어미인 루첼라이 부인이 다였다. 부인은 자존심 강한 딸의 의사를 존중해 바깥으로 마리아가 아프다는 소문이 돌지 못하도록 하인들을 단속했다. 정기적으로 몸상태를 살피러 오는 의사는 신심 깊은 루첼라이 부인이 교회에서 구한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마리아는 어머니의 꼼꼼한 배려 속에서 외부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고 살았다. 루첼라이 부인의 바람대로 정원에 나가 바람을 쐬기는 했다. 외출은 자유로웠으나 나가고 싶지 않았다. 신심 깊은 세르미어의 신자들이 사는 마을에서 피라도 토했다가는 눈도 깜빡하기 전에 소문이 퍼질 터였다. 손이 없는 양녀를 거둔 어머니는 마리아가 몸도 연약하다는 사실에 가여운 시선을 받을 터였다. 자존심 강한 어머니가 그런 소리를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는 자명했다.
처음에는 자상하게 물을 것이다. 어쩌다 밖에서 피를 토했니. 많이 힘들었니. 왜 내게 말해주지 않았니. 마리아는 순종적으로 대답할테지만 그 어떤 대답도 어머니를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에게 뭇 부인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은 너무도 중요해서 조금이라도 나쁜 이야기가 돌면 크게 마음이 상했다. 그럴 때는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었다. 마리아는 침묵을 지키다가 어머니가 조금 진정되면 연신 사죄를 하곤 했다.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 말고는 어떤 행동도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외출을 좋아하지 않았다. 밖에 나가는 것보다 저택에 앉아 평온하게 바깥을 바라보는 것이 훨씬 좋았다.

몇 년 전의 일이다. 마리아 루첼라이는 여신 세르미어의 지팡이이자 재봉사였으므로 때로는 신의 사도다운 일을 해야할 때가 있었다. 시계탑 공방에 앉아 아름다운 옷을 자아내는 것으로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때로는 죽음과 마주해야하는 험한 일을 하기 위해 어머니의 곁을 떠난 적이 있었다. 어머니와 떨어져 지낸 것이 실로 얼마만의 일이었는지 마리아는 알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어머니가 그립지 않았다는 사실 뿐이었다.
험난한 모험이었다. 환자를 치료하다가 피를 쏟기도 하고, 위기 끝에 목숨을 잃을 뻔한 일도 있었다. 죽음이 제 코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마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살아남겠다. 살아남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했다.
왜 그렇게 살고 싶었는지는 몰랐다. 그저 살고 싶었다. 죽음보다 못한 삶일지라도 살아 숨쉬고 싶었다. 아픔이 오히려 살아있다는 감각을 생생하게 일깨워주었다. 어머니 곁에서는 느끼지 못한 삶이었고, 일상 속에서 잊고 있던 생이었다. 살고 싶었다.
거친 바람 탓이었을까. 죽음이 너무 가까워 위기의식이 느껴졌기 때문일까. 아니, 그저 비린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한 가지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주 강렬하고 지극히 단편적이고 의미 없는 기억이었다. 그는 새카만 파도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인지 물인지 분간하기 힘든 거센 폭풍우, 뇌까지 흔들리는 듯한 파도,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입 안을 가득 매운 소금기가 기억이 났다. 그저 그 뿐이었다. 무엇을 하는 도중이었는지, 어째서 배에 올랐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 기억이 아직까지도 떠올랐다. 근 오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었다. 마리아는 당장 배 위에 서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생생한 기억을 곱씹으며 눈을 깜빡였다. 정갈하고 아름다운 세르미어의 화원에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오늘 마리아는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왔다. 주일 예배를 막 마친 참이었다. 사제인 마리아보다도 교회 일에 적극적인 루첼라이 부인이 자리를 비웠고, 마리아는 먼저 집으로 돌아갈지 어머니를 기다릴지 고민하고 있었다. 정원을 산책하기로 한 것은 순전히 바람이 쐬고 싶어서였다. 그러니 마리아가 그 아이를 만난 것은 전적으로 우연의 일치였다.
단아한 세르미어의 정원에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주일이고 루첼라이 모녀가 다니는 이 곳은 세르미어 교단의 총본산으로 근방에서 가장 큰 교회니 당연한 일이었다. 마리아는 인파를 피해 구석진 곳으로 들어갔다. 사람을 피하다보니 정원을 가로질러 건물 뒤쪽 으슥한 곳에 발길이 닿았다. 일꾼들이나 오가는 이런 곳은 인적이 드물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때로 기묘한 상황에 놓이게 되기도 한다. 바로 지금처럼.
“사제님!”
저를 보자마자 울먹이며 달려온 여자아이를 마리아는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짧은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다가온 소녀는 마리아보다 머리 반개는 작았고 앳된 뺨에는 붉은 생기가 감돌았다. 소녀는 동그란 눈 가득 두려움을 일렁이고 있었는데, 마리아는 그런 모습이 불쾌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마리아는 소녀의 애타는 손길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손은 떨리고 있었지만, 옷 위로 전해지는 체온은 따뜻했다. 그 느낌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어머니의 손은 늘 건조하고 차가웠고, 같이 일하는 동료나 환자와 손을 맞잡을 일도 없었다. 마리아에게는 위로를 건낼 손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 정말 토벌대에 끼게 되는 건가요?”
“…….”
“그렇군요. 정말로 용 토벌전에 참가하게 되는 거군요.”
소녀는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마리아는 말 없이 소녀를 바라보았다. 예비 사제에게 주어진 복장을 단정히 갖춘 모습을 보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직 어린아이한테 너무 심한데요.'
'메디치 가문의 일입니다. 저희도 손 쓸 방도가 없군요.'
'자질이 풍부한 아가씨를 이렇게 보내다니….'
루첼라이 부인이 저택을 찾은 사제와 나눈 대화였다. 마리아는 어머니에게 절대 거역하지 않는 딸이었기에 부인은 마리아 앞에서 숨기는 것이 없었다.
린네 그라임스라고 했던가. 마리아는 루첼라이 부인이 언급한 이름을 잊는 법이 없었다. 그것이 어머니의 입에서 다시 나올 이름이건 그렇지 않건 그랬다. 그 이름이 어머니의 입에 올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억할 가치는 충분했다.
저승길에 등을 떠밀린 소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어깨를 떨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는 어깨를 마리아는 말 없이 지켜만 보았다. 자신을 누구로 착각했는지 몰라도 이 아이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운명이란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을.
린네는 그저 서있을 뿐인 마리아의 앞에서 제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여전히 마리아의 팔목을 붙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커다란 초록색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어 보석처럼 빛난다.
“많이 고민했어요. 부모님은 사제 같은 거 그만두라고 하셨거든요.”
린네는 코를 훌쩍였다.
“사실 그렇잖아요. 목숨만큼 중요한 건 없는 거잖아요. 저도 알아요. 제 실력에 가서 도움이 될지도 알 수 없다는 거요.”
마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딱히 할 말도 없었고, 괜히 입을 열었다가 분위기를 망치는 것이 꺼려졌다. 만날 사람이 누구였건 이 아이가 사지로 떠나야한다는 사실은 변할 리 없으니 잠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치만요.”
린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저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마리아도 눈을 깜빡였다. 앳된 소녀의 얼굴이 점멸했다.
“여기서 도망치는 건 제가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것들을 모두 부정하는 것만 같아서 그러고 싶지 않아요.”
“세르미어께서는 늘 말씀하셔요. 배움을 두려워하지 말라. 앎은 곧 선이니. 두려움은 무지에서 오느니라. 저는 앞으로 제게 올 미래를 알지 못해요. 그러니 배워야해요. 앞길에 무엇이 있든, 배우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어요.”
“사악한 용을 물리치고 무지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사제의 일이겠지만, 제게는 아직 그 자격이 없어요. 저는 아마 이 일을 해내지 못할 거예요.”
“죽을 생각은 없어요. 그저 제 힘이 모자랄 뿐이죠.”
“하지만 사제님.”
마리아는 문득 린네의 눈동자가 봄날에 돋아나는 새 이파리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은 여리고 연약하지만, 질기게 성장할 어린 잎사귀.
“저는 악의 위협에 굴복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게 하고 싶어요. 변명하듯 덧붙인 마지막 말은 혼잣말처럼 작았다. 마리아는 그런 린네를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소녀는 헤헤 웃더니 뒤늦게 부끄러워했다.
“아이참. 제가 너무 감상적이었죠.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이만 해야할 일이 남아있어서 가볼게요.”
린네는 새삼스럽게 두 손으로 마리아의 팔목을 꼭 붙들고 몇 번이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마리아는 뛰어가는 린네의 치맛자락을 시야 한 구석에 담으며 제 팔목을 내려다보았다. 화끈거리는 열기가 사라지질 않았다. 귓가에서 바람이 웅웅거렸다.

마리아는 곧 그 일을 잊어버렸다. 시계탑의 일상은 매일 정신없이 바빴고, 마리아는 몸이 좋지 않아서 사소한 일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루첼라이 부인은 린네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마리아가 기억의 바다 속에서 린네의 이름을 재발견한 것은 순전히 시계탑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토벌대에서 발생한 부상자가 시계탑에 실려왔다는 소리다.
“사제님.”
토벌대에서 떨어져나와 시계탑에 눌러앉은 환자는 흰 머리가 제법 근사한 중년의 남자였다. 그는 어디서 들었는지 마리아가 이전 토벌대에서 환자를 돌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꾸만 말을 거는 그를 매번 쫓아내기도 귀찮아서 대충 이야기를 받아주었더니 이제는 마리아를 찾아오는 지경이 되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그게…….”
무어라 떠드는 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수선에 매진하는 마리아의 귀가 익숙한 이름을 잡아냈다.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이번 토벌대는 확실히 지원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어찌나 밥이 맛이 없던지….”
“그거 말고요.”
“네?”
그는 마리아가 반응을 보이자 눈에 띄게 기뻐했지만, 마리아가 무엇에 관심을 보인 건지 몰랐다. 한참을 끙끙거린 끝에 겨우 두 사람은 이야기를 맞춰갈 수 있었다.
“아아, 린네라는 아이 말이군요. 참 귀여운 애였죠. 너무 어려서 걱정했는데 제법 솜씨가 좋더군요.”
“그런가요.”
“어린 여자애가 그런 험지를 돌아다니니 다들 안쓰러워 많이 챙겨줬지요. 불행한 사고만 없으면 살아 돌아올 겁니다.”
그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마리아는 왠지 그 말에 가슴이 일렁이는 묘한 경험을 했다. 환자는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지만 마리아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토벌대가 돌아왔다. 마리아는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토벌대의 귀환을 보기 위해 처음으로 혼자 외출을 했다. 본관 앞 정원은 토벌대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고, 한쪽에선 시계탑과 협력하는 사제들이 환자를 돌볼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마리아는 자연스럽게 시계탑 공방의 사제들과 섞였다. 토벌대는 늦은 저녁에 도착했다. 멀리서부터 소란이 번졌다. 마리아는 이유 모를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환자들이 다른 토벌대원들보다 빠르게 이송되어 왔다. 시계탑의 천막은 분주해졌다. 마리아는 차분하게 환자를 보면서 정문을 흘끔거렸다. 마리아만의 일은 아니었다. 토벌대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는 아마도 모두가 그럴 것이다.
대부분의 응급조치가 끝나갈 무렵, 토벌대 본대가 정원에 들어섰다. 사방에서 우는 소리와 비명 소리, 가족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마리아는 상대적으로 상처가 가벼운 환자를 보면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엄마, 아빠!”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마리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인지 잊지 못한 목소리와 얼굴이 거기 있었다. 울먹이는 소녀가 짐을 내팽개치고 달려갔다. 곱게 차려입은 중년 부부가 마찬가지로 울먹이며 소녀에게 달려들었다. 마리아는 세 가족이 서로를 부둥켜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진찰을 받던 환자가 마리아를 부를 때까지 계속 그랬다.
세 가족은 곧 마리아의 앞을 떠나갔다. 토벌대를 위한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외침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마리아는 그들이 곁을 떠나는 것을 어쩐지 아쉽게 느끼며 환자를 보았다. 린네는 다친 곳이 없는 듯했다. 진찰을 받아보자는 부모의 요청에도 돌아오는 길에 검사를 받았다며 사양했다. 마리아는 왜 가슴이 술렁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만찬이 시작되자 시계탑의 천막은 금방 한가해졌다. 본대까지 걸어올 수 있는 환자 중에 중환자는 없었고, 그나마도 처치를 끝내놓으니 다들 천막을 떠났다. 마리아는 빈 천막에 앉아있었다. 만찬이 끝나고 천막을 걷으면 시계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마리아.”
낯익은, 아니, 친숙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그는 갈등했다. 아까부터 술렁이던 가슴이 폭풍우를 만난 듯 날뛰고 있었다.
“얘, 마리아.”
루첼라이 부인은 그가 제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여겼는지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가 아주 멀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파도가 높게 일고, 바람인지 파도인지 분간하기 힘든 폭풍우가 몰아쳤다. 배가 뒤집히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어서 손에 들고 있는 것이 검인지 총인지도 몰랐다. 바다는 목숨을 탐내 날뛰었고, 그는 살아남기에 바빴다.
“마리아. 대답을 해야지!”
마침내 루첼라이 부인이 소리를 쳤다. 늘 우아하고 차분한 부인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는 그제서야 자신을 부른 것이 루첼라이 부인임을 알아챘다.
아, 그랬다. 루첼라이 부인이었다. 그 날 자신을 건져낸 것은.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비로소 얼굴을 마주한 루첼라이 부인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정신을 빼놓고 있구나. 불렸으면 대답을 하렴.”
그는 침묵했다. 루첼라이 부인의 고운 이마에 주름이 졌다.
“저는 마리아가 아니에요.”
그가 말했다. 루첼라이 부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부인은 당황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무슨 소리니, 얘야.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보구나.”
그는 처음으로 부인 앞에서 인상을 찌푸렸다. 루첼라이 부인, 아니, 자케트 루첼라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래도 네가 많이 아픈가보구나.”
자케트가 말했다. 노부인의 눈빛은 장군과도 같았다. 데일 듯이 뜨겁게 타오르는 눈길을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아니요. 루첼라이 부인. 저는 아프지 않아요.”
“마리아!”
“당신의 마리아는 죽었습니다, 부인.”
그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 떴다. 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석양을 받아 붉게 빛났다.
“나는 이리누슈카(Иринушка). 바다와 겨루고 바다를 다루는 어부입니다.”
바람이 불었다. 파도는 거칠었다. 양손에는 장총과 검의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거대한 괴물이 배 밑에서 맴돌았다. 두려웠다. 그리고 즐거웠다. 바다와의 목숨을 건 사투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리누슈카의 삶이었고, 모든 것이었다. 소녀는 여인이 되었다.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리누슈카는 파도 앞에 섰다. 바다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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