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시 드림

the other world 2020. 2. 5. 12:16

날이 개었다. 수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하늘은 맑고 창창하기만 했다. 그것이 너무 이상해서 미캉은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돌아갈 거야?”
아라시가 물었다. 언제나 건강하고 활달하던 소년의 목소리는 어딘가 풀이 죽어있었다. 미캉은 그것이 아라시의 본심이라는 걸 알았다.
중앙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소년이 얼마나 안절부절 못했는지 미캉은 알고 있었다. 기쁜 일에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하고 자신이 떠나가버릴까 노심초사하는 것을 알았다. 아라시는 매사에 솔직하고 직설적인 아이였지만 어쩐지 애정표현에만큼은 서투른 면이 있었다.
“남아있길 바라?”
미캉이 물었다. 아라시가 움찔 하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상관없어. 가고 싶으면 가던가.”
미캉은 희미하게 웃었다.
“연화가 있잖아. 넌 혼자가 아니야.”
“딱히 외롭다거나 가지 않길 바란다거나 하는 건 아니거든!”
아라시는 씩씩거리더니 투덜거렸다.
“네가 있든 없든 우리는 잘 살 수 있어. 집도 있고 돈도 충분하고. 우리는 아무것도 모자라지 않단 말이야. 동방거리 사람들과도 친해졌으니 같이 놀 사람도 있어.”
어째서일까. 아라시는 말을 하면 할수록 시무룩해졌다. 고개는 땅으로 떨어지고 입꼬리가 쳐졌다. 늘 기세등등한 소년의 낯이 밤하늘처럼 어둡게 물들었다. 며칠 보지 않았지만, 미캉은 그것이 얼마나 큰 슬픔의 표현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입을 열고 말았다. 입에 담지 않으려고 줄곧 고생했던 말이었다.
“동방거리로 이사하는 건 어때.”
“싫어!”
과연. 즉답이 돌아왔다. 미캉은 왠지 그것이 기꺼워 또다시 작게 웃고 말았다. 아라시와 함께 있으면 반쯤 죽었다고 생각한 감정이 일부 돌아온다. 아라시는 정말이지 에너지가 넘치고 활달한 소년이었다. 그가 가진 에너지는 옆에 있는 사람마저 산자의 생기로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을만큼 크고 강렬했다.
'네가 산 사람이 아니라는 게 이상한 일이지.'
미캉은 생각했다.
“동방거리 사람들은 좋아.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줬고, 누나도 받아들여줬으니까. 나도 그들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좋고, 좀 더 자주 만나고 싶어. 그러기에 항구 도시가 먼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아라시는 잠시 우물거린다.
“나랑 누나는 이 집이 마음에 들었단 말이야. 이곳은 무척 정답고 아름다워. 동방거리를 다 둘러봐도 이곳 같은 집은 없었어.”
속상한 듯 말하는 아라시의 눈빛에는 옅게 물기가 어려있었다. 그가 동방거리에서 집을 찾은 것은 미캉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함께 돌아다니기도 했으니 모를 리 없었다. 아라시는 정말로 동방거리에 살고 싶어했고, 동방거리 식구들도 그랬다. 하지만 지금 사는 그 집만큼 아라시의 마음을 흔든 곳은 없었다. 미캉은 그것을 보고 집이 때로는 고향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라시.”
미캉이 말했다.
“내겐 의무가 있어.”
“알아.”
아라시가 침통하게 대답했다. 그는 이제 반쯤 울고 있었다.
“알고 있어. 누나도 그렇게 말하면서 시집을 갔는걸.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의무를 가지고 있어. 누리는 것만큼 책임을 다해야한다고, 사부님도 말씀하셨어.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
미캉은 고민했다. 일렁이는 소년의 눈가를 손으로 훔쳐주고 싶었다. 눈물은 흘러넘쳐 거의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자신이 이런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낯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지휘사는 세상을 구하고, 황실의 여인은 시집을 가는 게 의무일까? 그럼 나는? 내가 가진 의무는 뭐지? 난 이제 살아있지도 않아. 신기사가 되었으니 세상을 구해야할까? 누나나 미캉, 네가 위험해진다고 해도? 그런 게 의무인 거야?”
고민하는 사이, 아라시의 붉은 눈동자에서 붉은 것이 뚝 떨어졌다. 곧 색을 잃은 그것은 바닥에 부딪혀 부서진다.
“그게 옳은 일이겠지.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정말 모르겠어. 의무가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지켜야하는 것이라면, 사람은 대체 무얼 위해 사는 거야?”
“아라시.”
언제 열렸는지 문이 열려 있었다. 그 자리에 서있던 전통복 차림의 고운 여인의 손이 떨렸다. 찻잔이 놓인 쟁반이 달그락거렸다. 연화는 서둘러 방안의 탁자에 쟁반을 올렸다.
“아라시.”
죽은 자는 눈물이 많아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연화의 눈에도 어느샌가 눈물방울이 데롱데롱 매달려있었다. 미캉은 조용히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누나. 누나. 울먹이는 소년의 목소리가 발목을 잡아 끌었다. 그 목소리에 떠밀리듯 방을 나왔다. 문을 닫고도 한참이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미캉은 얼어붙은 듯 문 앞에 서서 남매의 울음에 귀를 기울였다.

그날 이후, 아라시는 종종 중앙청을 찾았다. 때로는 맛있는 음식을, 때로는 예쁜 옷과 장신구와 함께였다. 가끔은 연화가 동행하기도 하고 동방거리 사람들을 동원할 때도 있었다. 목적지는 언제나 같았다. 중앙청 회의실 지하였다. 이름 없는 공헌자는 그곳에서 아라시를 맞아 때로는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다투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긴 시간을 함께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제법 사이가 좋았고, 함께 있는 것을 기꺼워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아라시는 그의 친구가 밖으로 나오기를 바랐지만,
글쎄. 때로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는 법이다.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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