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이상하다면 캐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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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송태원은 침잠한 눈을 무의미하게 들었다. 아롱거리는 빛무리가 시선을 현혹하려 들었다. 그것을 어렵지 않게 무시하며 똑바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본다. 연한 갈색 눈이 장난스레 휘어졌다.
“언제까지 그렇게 딱딱하게 있을거야. 좀 쉬라니까.”
“지금이 편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그의 시선은 한 손에 든 와인잔을 향해 있다. 은은하게 밝혀둔 조명 탓에 검게도 붉게도 보이는 와인을 가는 눈으로 바라보며 기분 좋게 웃는다. 어지간히도 기분이 좋은가보다. 하기사 그렇겠지. 그야 늘 그랬으니까.
송태원은 그저 위험분자를 지켜보아야한다는 의무감으로 그를 주시했다. 눈빛은 무심하다. 흔들리지 않는 것은 기술이다. 폭풍우 속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똑바로 서는 것과 같다. 세상은 어지러히 출렁여 멀미가 나는 정도라면 훌륭한 선원이 될 수 있었다.
다행히. 다행히도.
송태원은 타고난 선원이었다. 그는 갑판에서 떨어져나가는 승객을 붙들어 아래층으로 내려보낼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말아쥐었나보다. 눈치채는 것과 동시에 금빛 사슬이 목을 노리고 있었다.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흥을 돋구는 것도 좋겠지.”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성현제는 와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취하지도 않을 술을 마시며 멋을 부리는 낭비를 즐기는 자였다.
“잠시 딴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
재미없다는 듯 그가 실망한 낯을 했다. 한없이 가볍다. 경거망동한다. 그것이 싫었다. 싫지 않았다.
송태원은 눈을 짧게 감았다 떴다. 사슬이 존재감을 감추었다. 무척이나 무료하고 나른한 표정을 한 남자가 고급스러운 호텔에 반쯤 벗은 차림으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이런 장소에 서있는 것도 이제는 익숙했다.
“꼭 조각상이랑 같이 있는 것 같군 그래.”
성현제가 한탄하듯 말했다.
“제가 돌아가겠습니다.”
“그건 안 되지.”
느물거리는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반쯤 떨어졌던 엉덩이가 도로 붙었다. 그가 저리 반응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송태원은 그렇게 했다.
“보고만 있어도 갑갑한 정장은 정말 어떻게 안 되나?”
“제가 나가면 보지 않아도 되실 겁니다.”
“내가 사준다니까.”
“법에 저촉됩니다.”
“까짓거 금액 맞춰주지.”
이번엔 참지 못 했다. 저도 모르게 기분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성현제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길게 눈을 감았다 뜬다. 다시 평온을 찾는다.
“맞출 수 있어. 못할 것 같나? 최소한 색이라도 바꿔보지. 당장 장례식에서 상주를 설 법한 옷만 입지 말자고.”
“더이상 상주 설 일은 없으니 상관없습니다.”
“매일 서고 있는 게 아니고?”
몹쓸 농담이다.
송태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말 없는 비난에 성현제가 어깨를 으쓱한다.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말하지 마십시오.”
“그걸 자네가 책임질 필요는 없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설득할 필요도 없고 설득할 이유도 없었다. 설득한다고 들어줄 상대도 아니었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그 때는 아직, 그래도 조금은, 적어도 지금보다는 그가 연약하고 파괴적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속이 답답해졌다.
그리고 멍청한, 아니, 철없는, 아니, 상냥한 남자는 그런 송태원의 기색을 세심하게 알아차린다. 가만히 닿아있는 시선이 마치 쓰다듬는 듯하다. 송태원은 닿지 않은 온기를 외면하듯 눈길을 돌렸다. 시야에서 남자가 사라지기 전에 그가 일어나 다가온다. 반쯤 외면한 고개를 부드러운 손길로 감싸 돌린다. 손은 그리 따듯하지 않지만,
…….
“송태원.”
“왜 그러십니까.”
아주 조금의 틈새도 들켜선 안 된다. 하지만 틈새가 있다면 어디든 들어오고 마는 것이다. 어두운 새벽의 달빛. 어스름하지만 섬세한. 철저하게도 가냘픈.
갈색 눈동자가 반쯤 가려진다. 그 눈이 살풋 휘었다.
“스읍, 하. 스읍, 하.”
“……뭐하시는 겁니까.”
“어허, 따라해야지. 스읍, 하아. 스읍 하아.”
“떨어지십시오.”
하하. 꾸며낸 기색을 숨기지 않는 웃음소리와 함께 그가 견딜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활짝 웃었다. 뺨을 감싼 손에 약간 힘이 들어간다.
태원아.
귀엽기도 하지. 그런 속삭임이 귓가를 스친다. 못 들은 걸로 쳤다.
“놓지 않으시면 가만히 있지는 않겠습니다.”
“그래?”
그럼 뭘하게? 성현제가 히죽거렸다. 나랑 싸울건가? 도심 한복판에서? 빌딩 24층인데?
안 될 것도 없지. 속으로 생각하며 그저 뒤로 한발짝 물러섰다. 정확하게 동시에 성현제가 한발짝 다가온다. 송태원의 미간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적당히 하십시오.”
“싫은데?”
그가 이죽거렸다. 불쾌한 건지 즐기는 건지 분간하기 힘들다. 둘 다겠거니 하며 조금 빠르게 이번엔 세발짝 물러선다. 역시나 같은 속도로 성현제가 따라붙는다. 뺨에 늘어붙은 손바닥도 그대로였다. 슬슬 맞닿은 피부에서 온기가 전해져온다.
“저도 화낼 줄 압니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가소롭다는 듯 성현제가 비웃었다. 송태원은 답하지 않는다. 그래서? 답할 말은 없었다. 직접 채운 자신의 족쇄. 사랑하는, 나의 무게추.
그저 조금 더 가라앉을 뿐이다.
말이 없어진 송태원을 보고 성현제가 보란 듯이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손이 떨어진다. 미지근한 온기가 뺨에 남았다. 치가 떨리는, 따스한, 손.
규칙적으로 숨을 쉰다. 성현제가 다시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이 되어 휙 돌아선다. 그대로 두어발짝 걷는가 싶더니 번개같이 덮쳐온다. 옷깃이 잡아당겨지고, 몸뚱아리가 맞부딪히고, 뜨거운 체온이 전해진다. 굵은 손마디가 남자의 목을 쥐었다. 박동하는 생명이었다. 명줄을 붙잡힌 남자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놔.”
“…….”
숨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아주 찰나였다. 지독하게 길었다. 천천히 손을 내려놓았다. 손바닥이 화끈거린다. 그가 으르렁거리더니 갑자기 얼굴이 가까워졌다. 무심코 피하는 것을 그가 따라왔다.

하아.

뜨거운 숨이.
얼굴을.
어디를?
깜빡.

세상이 가볍게 멈추었다.

*
입을 맞댄 채로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체감상으로는 영원이 흐른 것만 같았다. 송태원은 그대로 입술을 벌리려다, 그러니까 말을 하려다, 입 속으로 파고든 것에, 그러니까, 뜨거운 열기에, 아.
사고가 얼어붙었다.
그것은 유린의 경험이었다. 갑작스러운 재해에 당황한 사이 해집어놓는다. 그것은 축축하고, 뜨거웠고, 그리고,
싫다.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이곳이 어딘지, 상대가 누군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한 채로 그를 밀어냈다. 전력이었다.
남자의 손이 미련처럼 송태원을 붙들고 있다가 떨어지고, 몸이 하늘을 날고, 창문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비산했다. 황금빛 사선이 차르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뻗었다. 콰드득거리는 소리. 남자의 몸이 다시 튕기듯 돌아왔다. 생각이란 걸 할 겨를도 없이 몸을 피했다. 무너진다. 비명소리. 그제서야 제가 저지른 것을 깨닫고 만다.
파하하하.
그가 웃고 있었다. 기뻐 죽겠다는 듯이. 환희에 찬 얼굴이 빛난다. 송태원의 얼굴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거침없는 공격을 피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의 것과는 완전히 달라진, 괴물의 반사신경.
붕괴는 이제 시작이었다.
송태원의 무딘 뇌가 고민을 거듭하는 사이에도 주먹이 쏟아졌다. 주먹과 사슬만이 오가는 것으로 보아 남자도 진심은 아니었으나….
늦었다.
송태원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그 자리에 엎드렸다. 남자의 주먹도 사슬도 피하지 않았다. 더는 호텔이라고 부를 수 없는 돌더미 위에 납작 엎드렸다. 쇄도하던 강맹함이 그에게 닿기 직전에 멈추었다. 미풍 같은 것이 그의 곰 같은 거죽에 닿았다. 송태원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 했다.
“죄송합니다.”
“……이런 결말이군.”
그 목소리는 마치 실망한 것처럼 들렸다. 그런 거였을까? 송태원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들을 구해주십시오.”
“나는 성자가 아니야.”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영웅도 아니고.”
“괴물이 되지 말아주십시오.”
“사람보다는 괴물에 가깝지 않나?”
“부탁입니다.”
“…….”
달각거리며 돌이 굴러 떨어진다. 남자의 발에 채인 것일 터였다. 그가 다가와 송태원의 머리맡에 섰다. 그걸 느낄 수 있었다.
바로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
툭. 머리 위로 손이 얹어졌다. 힘없는, 어쩌면 다정한 손이었다.
“일어나주지 않겠나?”
슬픈 것도 같다. 비참하도록 외로운 괴물의 음성. 그것이 너무 쓸쓸해서 송태원은 그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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