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시작은 어딘지 알 수 없는 숲이었다. 밤인지 어두침침한 숲은 어딘지 익숙해서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본다. 기억이 있는 듯 없는 듯 하지만 친숙한 곳이다. 앞서 걷던 검은 로브의 누군가는 청년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함께 멈추었다. 발길을 멈추게 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지 쯧, 하고 혀를 찬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일이지만 일단 목소리가 낮은 걸 보아 남자인 듯한 누군가─는 청년의 앞에 되돌아와 팔짱을 꼈다. 가만히 노려는 시선이 검은 로브에 가려 얼굴도 보이지 않는데도 강렬하게 느껴진다. 조금 섬찟하다고 생각하며 청년은 헤죽, 웃었다.

 "안녕?"

 검은 로브에 휩싸여 있는 반응을 정확히 살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불쾌해 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거이거, 뭔가 잘못한건가? 작게 한숨 소리가 난 것도 같았다.

 "귀찮아졌군."

 뭐가 귀찮아졌다는 것일까. 이해는 가지 않지만 청년은 상대방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상대방이 무엇을 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말그대로 '아무것도 알고 있는 것이 없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이곳이 어디인지 하는 문제는 미뤄놓고라도 일단 자신의 이름부터 기억나지 않아서야. 하지만 청년의 앞에 선 그는 그런 사정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조금 빠르게 말했다..

 "내 이름은 게이트(Gate). 다른 세계에서 넘어오는 자들을 안내하기 위한 사자다."
 "여기가 어딘지 궁금하겠지. 이 곳의 이름은 웨버랜드(W.ever Land)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상식이니 기억해두도록."

 에헤. 청년은 다시 히, 하고 웃어보였다. 어찌보면 그냥 바보같아 보이는 표정에 게이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로브 탓에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게이트는 청년도 알아차릴 정도로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죽, 말을 늘어놓았다.

 "그대가 살던 세계는 어떤지 모르나 웨버랜드에는 여러 종족이 있지. 요정족으로 페어리와 드워프, 임프. 그리고 수인족이라 하는 동물과 융합한 사람들이 있다. 요정족의 페어리는 15~25cm정도 되는 작은 키의 소인족으로 밝고 낙천적인 성격에 진지해지질 못하는 소란스러운 종족이지. 동정심이 많아서 사람들 부탁을 잘 들어주긴 하지만 사고체계가 어떻게 된건지 일반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대책을 내놓기 때문에 가능하면 부탁하지 않는 쪽이 좋다. 드워프는 손재주가 굉장히 뛰어난 난쟁이족이다. 평균 키가 120cm정도 밖에 안되지. 다들 수염마니아에 술을 좋아하지. 드워프들이 만드는 것들은 기능성도 내구성도 좋다. 임프는 페어리보다는 조금 크지만 50cm를 넘지 않는다. 작지. 박쥐날개에 푸른색이나 녹색계열 피부색을 가졌다. 위험한 장난을 좋아하니 가능하면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아. 수인족은 말그대로 인간과 동물이 합체된 형태인데 주로 육지형, 조류&파충류형, 해양형으로 분류된다. 이쪽은 대충 들으면 어떤 기준인지 알겠지? 육지형은 육체파, 해양형은 마법파, 조류&파충류형은 그 중간으로 원거리 공격 무기도 선호한다."

 다다다다다다 내뱉어진 긴 설명에 청년의 눈이 크게 뜨였다. 흐에─, 하고 운을 떼더니 한마디 한다.

 "숨 안차?"
 "그래서,"

 청년의 말 뒤로 곧장 즉각적으로 다시 말이 이어진다. 아무래도 그냥 숨을 고른 것 뿐인 모양이었다. 청년은 얼떨떨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서?"
 "지금부터 골라라. 어떤 모습으로 갈 것인가. 네가 이 쪽을 구경하고 고르겠다고 했지만 그냥 지금 하는 게 나을 듯 하다."

 청년은 질문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두 눈을 껌뻑였다. 바보같이 벙찐 얼굴로 쳐다보는 모습에 게이트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네가 원하는 걸 고르면 돼."
 "모르겠는데."
 "…끙."

 게이트는 고민에 잠겼다. 청년이 멀뚱멀뚱 쳐다보고 침묵이 지났다.

 "아."
 "응?"
 "지금 그대로 가는 것도 괜찮다."

 다시 껌뻑껌벅. 청년의 시선에 게이트는 또 끙, 앓는 소리를 했다. 뭔가 설명방법을 찾는 지 말이 없는 게이트를 향해 청년은 툭 한마디 내뱉었다.

 "그냥 갈래."
 "하?"
 "간다구."
 "……좋아, 그럼 됐다."

 푹, 하고 한숨쉬는 게이트를 청년은 의아한 얼굴로 올려다 보았다. 괜히 짜증스레 흥, 하고 콧방귀를 뀐 게이트는 청년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그리고는 잠시 멈춘다.

 "왜?"
 "보기보다도 가늘군."

 헤, 청년이 웃는다.

 "그래?"

 그리고는 자기도 한번 잡아보았다. 오오, 하고 혼자 감탄하는 바보짓에 게이트는 다시 절래절래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이만 보내주지. 하지 마라!"

 신기한 듯 로브를 들춰보는 청년의 손을 탁 쳐내고 게이트는 다시 팔짱을 꼈다. 여전히 싱글거리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기억도 없는 게 너무 당당하잖아.

 "가면 뭐 좋은 거 있어?"
 "모른다."
 "그럼 나 여기 있으면 안 돼?"
 "……."

 게이트의 시선이 얼굴에 곧장 느껴져서 청년은 괜히 어깨를 으쓱하며 시선을 피했다.

 "네 이름은 에스트다. 에스트 아이렌."
 "에?"
 "나이는…원래는 20살이라고 들었던 것 같군. 지금은 17~8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그 정도다."
 "어떻게 알아?"
 "다 방법이 있다."

 부. 청년의 볼이 부었다. 어떤 사정으로 넘어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선한 미소를 가졌던 청년은 자신의 이름을 에스트 아이렌이라고 소개했었다. 장난기 가득한 눈빛이 아니면 표정 탓에 나이가 많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갓 스무살이 넘은 청년이라고 보기엔 너무…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띄고 있었다. 차근히 설명을 듣고 곰곰히 생각한 뒤 대답하는 모습은 누가보아도 믿음이 갈만한 청년이었다.
 완전히 이 곳으로 넘어오자 외양부터 훨씬 가늘어진데다가 이제보니 기억도 잃었지, 하는 짓도 어린애 같아져서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이제 헤어질 시간.

 "웨버랜드가 네게 즐거운 곳이 되길 바라지."
 "될거야."

 자신만만하게 웃는 얼굴은 조금 전과 닮은 것도 같다.

 "이대로 죽 가면 작은 마을이 나온다. 열심히 돌아다녀봐라. 도와줄 사람이 있을테니. 부탁이니 말썽은 부리지 말도록."

 에스트는 그대로 사라지는 게이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쩐지 웃은 것 같은데. 아닌가?"

 고민해 보아도 대답해 줄 사람은 모습을 감추었다. 에스트는 흠, 하고 게이트처럼 팔짱을 끼었다가 발을 땠다.

 "가면 뭔가 있겠지, 뭐."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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