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청년이 황제의 앞에 섰다. 그녀의 지위에 따른 권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화려한 드레스 자락 앞에 허리를 숙이고 담담하게 말을 꺼낸다. 체구에서 짐작할 수 없는 베이스 톤의 목소리가 조용히 집무실의 공기에 녹아들었다.

 “내일 오후 1시쯤 도착한다는 소식입니다.”
 “고맙다. 이만 들어가 쉬도록.”

 전혀 돌아볼 생각도 않는 황제의 뒤에 보이지 않는 인사를 하고 물러나며 살짝 허리를 든 리넨은 이내 허리를 곧게 펴고 말았다. 창밖에서 들어온 밝은 빛에 까맣게 보이는 황제의 뒷모습이 가녀렸다. 그녀는 뛰어난 황제지만 동시에 한 사람의 여인이기도 한 것이다. 황제의 드레스 자락을 밟을 수는 없었기에 어깨에 손을 얹어 끌어당겼다. 황제의 날씬한 어깨는 그다지 체격이 큰 편이 아닌 리넨의 품에도 아무런 부담이 없다. 아찔한 높이의 힐 탓에 리넨보다도 키가 커 보이지만 그렇다고 쓰러져서야 여황제의 보좌로서 가치가 없다.

 “누가 황제의 몸에 손을 대도 좋다고 했지, 리넨 니르안 데 페르샤인?”

 권위 있는 목소리에는 명령을 내리는 사람 특유의 분위기가 여실히 배어 있었지만 이미 신하에서 오랜 친구로 돌아선 리넨은 웃었다. 수많은 장신구 때문에 가볍게 잡은 어깨에만 손을 붙여 그녀를 끌어안은 체 말을 잇는다.

 “매번 느끼지만 옷 정말 무겁다. 이걸 입고 어떻게 하루 종일 서있는 거야?”
 “여자들은 다 해. 네 덕분에 하녀들이 4시간동안 꾸며준 머리가 엉망이 됐잖아.”
 “어차피 더 이상 일정 없잖아. 이러고 있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인데 조금은 놀란다거나 반가워해봐.”

 말하는 중에 어느 샌가 볼멘소리로 바뀐 리넨의 목소리에 아실리아는 풋, 하고 웃고 말았다. 아까보다 편안해진 듯 한 모습에 리넨의 얼굴에도 미소가 돌아왔다. 노리고 만들어낸 상황인 양 보였지만 그것은 그저 두 사람의 일상이었다.

 “힘들 때는 조금 우는소리도 해봐. 넌 너무 강한 척 하려고만 해서 문제야.”
 “너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하다 돌아서서 한꺼번에 징징거리는 건 사양인데.”
 “이봐.”

 아실리아는 리넨의 팔을 톡톡 쳐 포옹에서 벗어났다. 받쳐준다고 해도 무릎을 꺾은 체 서있는 일은 굉장히 힘들었다. 그것도 십일 센티 짜리 힐을 신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그것도 편한 신발이라고 신은 것이지만. 황제는 책상 위에 놓인 거울을 보며 잠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돌아섰다. 그렇게 그 날 하루 중 처음으로 아실리아와 리넨의 눈이 마주쳤다. 뚱한 표정이던 리넨은 그녀의 미소 앞에서 팔짱을 풀고 자세를 바로 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그녀의 신하로서 운명 지어진 리넨에게 저 위풍당당한 얼굴이 위력을 잃는 일은 결단코 없으리라. 아실리아의 영롱한 푸른 눈동자가 리넨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 이름은 아실리아 루 엘 하르미안. 이 하르미안 제국의 황제이자 제국 내 셋 뿐인 소드마스터의 일인.”

 연지를 발라 붉디붉은 입술이 요염한 색을 머금었다.

 “나는 고작 내 신하에게 염려 받을 정도로 약하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리넨 니르안 데 페르샤인 공작?”

 리넨은 한 손을 가슴에 얹고 다시 허리를 굽혔다. 짙은 청색 머리칼이 귀를 넘어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Yes, Her Majesty the Queen Asillia."

 자연스럽게 내민 손을 받아 키스하며 리넨은 다시 한 번 그녀에게의 충성을 다짐했다. 아실리아가 허리를 숙인 리넨을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씩, 장난스럽게 웃었다.

 “물론, 친구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그리고 자기 손으로 리넨을 일으키고는 매달려 안긴다. 리넨은 자신의 목을 꼭 끌어안은 황제의 등을 같이 끌어안아 주었다. 그녀의 등이 작게 떨리고 있는 것은 모르는 척 그렇게.




 하늘하늘, 소년이 발을 뗄 때마다 화사한 적금발이 휘날렸다. 일부러 그렇게 날리라고 해도 나오지 않을 듯한 이상적인 흩날림에 지나던 하녀들의 시선이 흘끔흘끔 모이는 것은 당연했다. 왕궁의 복도를 소년처럼 뛰어다니면 보통은 꾸중을 듣기 마련이지만 그 넓은 제국 안에도 그를 막을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소년의 이름은 슈베린 루이얀 엘 하르미안. 현 황제 아실리아 루 엘 하르미안의 친동생인 황자이다. 올해로 19세. 이리 경거망동했다가는 후에 쏟아질 잔소리가 왕실 창고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남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슈베린의 호기심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재밌는 것이 들어오는 날이었다.
 어릴 적부터 탐험이랍시고 이 잡듯이 돌아다닌 성안을 날듯이 뛰어 알현실로 향하는 코너에 들어섰다. 거대한 알현실의 문이 눈에 들어오자 슈베린의 얼굴에 떠있던 홍조와 미소가 한층 진해졌다. 신나게 달려드는 슈베린을 경비들이 막으려 했으나 한낱 경비의 신분으로 황제가 지극히 아끼는 동생에게 제대로 손을 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슈베린은 간단히 경비들을 제치고 알현실의 문을 양손으로 떠밀고 들어갔다.
 붉은 융단이 문에서부터 황제가 앉은 옥좌가지 길게 이어져 있는 알현실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융단의 좌우로 많은 수는 아니지만 관리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장대한 풍경이었지만 슈베린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고 융단 위를 빠르게 달렸다. 높은 옥좌에 앉은 누이들을 바라보느라  주변 신하들의 당황한 표정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누님, 누님. 지금이지? ‘루니안’의 ‘남자’사제가 온다는 거!”

 슈베린의 반짝이는 두 눈이 아실리아를 향했다. 황제는 얼굴을 굳혔다. 사랑하고 사랑하는 동생이지만 사랑할수록 엄할 때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진작 시종을 보내서 알렸건만 어째서 이제야 온 거니?”

 딱딱한 목소리에 슈베린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고개가 땅으로 꺼지고 시선이 사방을 배회한다.

 “그게……, 잠깐 일정을 벗어나서 시종이 나를 못 찾은 듯 하달까…, 그러니까…….”
 “하여간 어린애라니까. 또 시종들하고 숨바꼭질이라도 한 거겠지. 됐으니까 빨리 비켜. 네가 거기서 그러고 있는 사이에 도착하면 어떻게 할 거야.”

 아실리아의 것 좌우에 조금 낮게 자리한 두 옥좌 중 한 곳에 앉아있던 여인이 고고한 자세로 슈베린을 내리깔아보았다. 아실리아 못지않게 따가운 독설을 내뱉은 여인, 아니 여인이라기엔 소녀 테가 나는 여성은 으르릉 거리며 노려보는 슈베린을 본척만척 입을 가리던 부채를 살며시 흔들었다. 금을 녹여 실을 자은 듯 샛노란 금발을 양쪽으로 여러 가닥 땋아 말아 올린 아이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 선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미묘한 풋풋함을 온몸으로 뽐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샤린 카르센 엘 하르미안. 아실리아 루 엘 하르미안의 동생이자 슈베린 루이얀 엘 하르미안의 쌍둥이 동생. 어릴 적부터 도도한 장미로 이름 높았던 소녀는 이제 곧 그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해 흐드러지게 피어날 터였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슈베린과 샤린은 극도로 사이가 나빴다. 슈베린이 예쁜 입술을 오물거리며 삐죽였다.

 “말 되게 예쁘게 한다. 그래서야 나중에 결혼이나 제대로 하겠어?”
 “걱정 마. 나 좋다는 남자 많아.”

 남매의 독기어린 말싸움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문무백관이 다 집합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벌어진 왕자와 공주의 어린애 같은 싸움질에 아실리아의 짙은 눈썹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황제가 손짓하자 옥좌 뒤에 서있던 리넨이 앞으로 나섰다.

 “자, 자. 두 분. 아랫것들이 보기에 과히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일단 황자님께서도 올라와 앉으시지요. 곧 귀빈들께서 도착하실 시간입니다.”

 샤린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 슈베린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체였지만 싸움을 이어가지는 않았다. 슈베린이 옥좌에 앉고 리넨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자 기다렸다는 듯 경비병의 목소리가 들렸다.

 “달의 여신 ‘루니안’님의 사제 분들의 도착입니다!”

 거대한 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품위 없어.”

 슈베린과 샤린의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손님의 모습이 드러났다. 거리가 워낙 멀어서 인원이 셋이고 모두 하얀 옷을 입었다는 것 외에는 알 수 없었다. 그나마 한 사람이 유난히 키가 작다는 것 정도가 얻을 수 있는 정보의 다였다.

 “에이씨, 융단은 왜 저리 긴 거야.”

 만족스럽게 보이지 않자 짜증스러워진 슈베린의 투덜거림이었다. 샤린도 별말은 없었지만 손님들의 느릿한 걸음이―걸음이 느린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거리가 긴 것이 문제였지만―불만스러운지 부채를 접어 손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솔직한 두 사람의 반응에 리넨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본디는 짧지만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길디 긴 시간이 지나고 세 명의 사제가 옥좌 앞에 섰다. 신을 모시는 몸, 사제들은 허리만을 숙여 인사했다.

 “대 제국 하르미안을 향한 달빛의 가호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달빛의 반짝임이 이곳에 직접 닿음에 감사하오. 갑작스러운 방문에 많은 것을 준비하지는 못했지만 잠시 머무르는 동안 즐겁기를 빌겠소.”

 형식적인 인사가 오갔다. 지금 이 홀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하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었다. 그들은 홀 안을 가득 메워 인간 벽을 이룰 숫자의 신하들에 멋있는 식사에 귀족들이 모두 모일 연회까지 마련하느라 눈코 뜰 새도 없을 것이다. 긴급히 소집된 탓에 이 자리에 집결한 신하들도 절반이 체 못되는 수였다. 새벽에 갑자기 도착한 전갈에 성의 모든 고용인들은 고양이 손이 급할 상황이었다. 피부미용을 위해 오후까지 푹 자야한다는 게으름뱅이 귀족 아가씨들도 오늘만은 아침 해를 보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화려한 하르미안의 수도가 온통 뒤집힌 셈이었다. 이 자리에 선 세 사람을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움직였다.
 한데, 이어진 사제의 말은 기다린 사람들에게는 뜻밖의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씨익 웃는 입술이 베일 아래로 아스라니 비쳐보였다.

 “저희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여신을 모시는 몸, 오래 성지를 떠나있을 수는 없는 것이기에.”

 당황한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샤린의 눈이 동그래졌고 슈베린의 발간 뺨이 부풀었다. 리넨은 티는 내지 않았지만 얼굴에선 놀란 기색이 엿보였다. 침착한 것은 어깨 앞으로 흘러내린 짙은 보랏빛 머리칼을 하얀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고 있던 황제 아실리아 뿐이었다.
 소란에도 불구하고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말을 했던 사제도 황제도 침묵했다. 다들 자기들끼리 소곤거리긴 해도 대뜸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것도 이내 리넨의 제지에 조용해졌다.

 ― 사락.

 얇은 천이 끌리는 소리가 침묵 속에 흐릿하게 들렸다. 이런 소리가 들릴 곳은 단 한 곳뿐이기에 얼핏 들은 사람들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듣지 못한 사람들도 옆 사람을 따라 시선을 고정시켰다. 베일 너머로 빠져나온 가냘픈 손이 마법처럼 주의를 끌었다. 홀 안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그 작은 손이 무슨 기적이라도 되는 양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반 어른들의 절반 정도 밖에 안 되어 보이는 작은 키의 사제가 다른 두 사람의 앞에 섰다. 속삭이는 듯 숨소리가 섞인 고운 목소리였다. 다들 숨조차 죽이고 있지 않았다면 아무도 듣지 못했을 작은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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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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