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같은 사람이 연인이라면 좋겠네요. 부러워요. 아차, 애인 없다고 했죠?"
수아는 쓰게 웃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미성년이지만 손에 든 것은 알콜이 듬뿍 들어간 독한 위스키. 이런 것을 주문하는데도 잠시 주인 대신 가게를 봐주고 있다는 그녀는 수아를 말리지 않았다. 그런 점이 좋았다. 수아도 주인이 있을 때는 시키지 않는 메뉴를 자유롭게 시키고 남들 앞에서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러면 그녀는 언제나처럼 편한 미소로 수아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그런 점이 미안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듯 수아는 그녀가 있는 시간에 가게를 찾았다. 오늘처럼 단 둘이 있는 일은 드물었지만 자주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 좋았다. 단지 그것만으로 어딘가 구원받은 기분이었다.
수아의 넌지시 떠보는 말에도 그녀는 웃기만 했다. 머리카락과 같이 고운 적회색 눈썹이 상냥하게 굽어졌다.
"수아씨는 사귀는 사람 없어요?"
그녀가 물었다. 수아는 픽 웃었다.
"있어보이나요?"
"네. 미인이고 능력도 있고. 인기 많을 것 같아요."
그녀의 대답과 함께 넘어가는 위스키가 썼다. 수아는 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세상에 여자가 자기보다 능력있는 걸 좋아하는 남자는 없어요."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가요?"
그렇게 말하고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잘 모르니까요."
그녀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수아는 그녀의 붉은 눈을 지긋이 살폈다. 아름다운 눈. 무엇을 보려고 했던 것인지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순진무구한 사람이었다.
"미기."
수아는 그 순간 자신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말할 타이밍이 아니었는데.
"나랑 사귀지 않을래요?"
미기는 또 웃었다. 이번엔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명랑하게 카페를 울렸다. 수아는 그녀가 대답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누구라도 이런 갑작스런 이야기에는 할 말이 없겠지.
그리고 긴장했다. 어차피 허락받지 못할 걸 알면서도 마음이 그리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가게를 나서면 울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딱딱해졌다.
미기는 한참을 웃었다. 수아가 지칠 때까지 웃었다. 수아는 차마 그녀를 제촉하지 못했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좋아요. 그럼 오늘부터 1일이네요? 나 100일이니 투투니 챙기는 거 해보고 싶었어요. 발렌타인 데이도요."
정말로 무너질 줄은 몰랐었지만 그 정도로 긴장한 것이 사실이었다. 수아는 자기가 대답할 수 없게 될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몰랐다. 어리벙벙하니 미기를 바라보기만 했다. 미기는 또 웃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가 뭔가 잘못 말했나요?"
그러더니 그제야 표정이 바뀌며 허둥거렸다.
"어머, 농담인데 진지하게 대답했나 봐요. 미안해요. 그런 게 어려워요. 다들 하는 농담 같은 것 말이에요."
미기는 어쩔줄 몰라하다가 여전히 굳어있는 수아를 보고는 이번에는 다른 사과를 했다.
"웃은 것 때문이에요? 미안해요. 비웃은 게 아니에요. 마침 저도 비슷한 생각을, 사귄다는 건 아니었는데 수아씨가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웃겼거든요. 농담이라면 성공이었어요."
그 말에도 수아는 조용했다. 미기는 정말로 당황했는지 표정이 나빠졌다. 수아는 무언가 말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정말로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수아가 한 말은 고작 이 한마디였다.
"좋아해요."
왈칵 눈물이 났다. 갑자기 왜인지 몰랐다. 미기는 뜬금없는 그 말과 당황한 수아의 얼굴을 눈만 깜빡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급히 냅킨을 찾아 눈꺼풀을 누르는 수아를 살피듯 보았다. 수아는 조용하면 안될 것 같은 느낌에 급히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하는 지 몰랐다.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신경쓰였어요. 미기랑 친한 사람이랑 있는 것도 신경쓰이고, 늘 미기가 오는 날에 맞춰서 찾아오고, 미기가 혼자 있을 거라기에 오늘은 화장도 하고, 이런 못난 얼굴 보여주려고 한 게 아닌데.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나도,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스스로 들어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말이 빠르게 나왔다. 수아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한탄만 하는데도 늘 들어주고, 나랑 같이 있어줘서 고마워요. 미기랑 같이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계속, 계속 생각했는데, 오늘은 이런 말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안 될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치만 하더라도 이렇게 엉망으로 하면 안 됐는데, 너무 엉망이어서 미기가 실망했을 게 틀림 없다고 분명히 생각했는데, 그치만…."
수아는 눈을 들었다. 미기와 눈이 마주쳤다. 손이 따뜻했다. 미기의 손이다. 쉼없이 돌아가던 혀가 겨우 멈춰주었다. 그녀는 또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정말 예쁜 눈이었다. 보석 같은 붉은 눈. 수아는 분명히 팬더같은 얼굴이 되어있을 자기 눈가를 생각하며 부끄러워졌다. 거울을 찾을 수도 없었고, 손은 미기가 잡고 있기도 했다.
미기는 수아의 반대편 손까지 끌어당겨 꼭 쥐었다. 따뜻하다. 수아는 미기의 손을 쳐다보았다. 손가락이 길죽하니 예쁜 손이지만 손톱은 뭉툭하고 굳은살이 눈에 띄었다. 곱지만은 않은 손이다.
"수아."
미기는 조용히 수아를 불렀다. 수아는 머뭇거리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미기는 어쩐지 조금 기뻐보였다.
"나도 수아가 좋아요."
그렇게 말해주었다.
"수아랑 처음 이야기했을 때 기억하고 있어요. 얼마나 친구들을 생각하는 사람인지도 알고 얼마나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인지도 들었는걸요."
차분한 미기의 음성이 수아를 진정시켰다. 수아는 부끄럽고 미안하고 고마웠다. 눈도 돌릴 수 없었다. 그녀의 손, 제 손의 물기까지 분명하게 느껴졌다.
"걱정이에요. 수아는 나에 대해 그만큼 많이 알지 못하니까요. 나에 대해 알게 되면 수아는 나를 싫어하게 될지도 몰라요. 하지만 수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죠? 그렇게 말했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수아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거예요."
미기의 얼굴에서는 서서히 웃음이 사라졌다. 진지한 얼굴이 아름다웠다. 수아는 홀려버린 것 같았다. 그렇게 둘은 눈을 마주했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수아는 자기 얼굴이 바보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기는 그저 아름다웠다. 정신을 차리라는 이성의 외침도 속절없이 아름다워서, 수아는 또 눈물이 났다. 이번에는 눌러 참았다. 수아가 그렇게 잘 우는 사람은 아니다.
"미기."
부르자 대답해온다.
"네, 수아."
수아는 미기가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살짝 빼서 그녀를 마주 잡았다.
"내일도 또 와도 될까요?"
미기는 푸훗, 하고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가늘게 휘어지는 눈, 말려 올라가는 입술, 한껏 솟아오르는 광대, 살짝 움츠리는 어깨, 흔들리는 머리카락. 그녀에게서 향기가 났다. 어디선가 맡아본 듯한, 향과 비슷한 냄새.
"물론이에요. 또 와주세요."
미기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건강한 피부. 아기처럼 보드라워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햇빛과 바람에 거칠어진 풍아와는 전혀 다르다. 탱탱하니 건강함을 뽐내고 있는 피부에서는 모공도 찾을 수 없다.
"내일도 있나요?"
바로 지근거리에서 본 미기의 눈은 멀리서 볼 때보다 아름다웠다. 카페라떼에 올라간 휘핑같이 따스한 적회색. 빠르게 깜빡이더니 천천히 눈꺼풀이 내려왔다.
"물론이에요."
자연스러운 살냄새가 기분 좋았다. 수아는 후회했다. 화장하지 말걸. 미기가 불쾌할까 걱정스러웠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순간은 영영 잊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입술은 피부가 얇다더라니 방금 보고 맡은 것의 열 배로 미기가 느껴졌다. 미기가 여기 있었다. 수아는 땀이 찬 손을 살짝 떼며 그녀를 느꼈다. 또 눈가가 아찔해졌다. 오늘따라 눈물샘이 고장난 것 같았다.
눈물을 참자 호흡이 거칠어졌다. 훅, 콧김을 뿜게 되었다. 미기가 풋하고 웃었다. 수아는 비어있는 손을 꼭 쥐었다. 멋쩍게 입술을 떼고 물러난다. 미기는 뭐가 재밌는지 쿡쿡거리고 웃고 있었다.
크흠. 수아는 헛기침을 했다.
미기는 그제야 그녀를 보며 웃음을 멈추었다. 눈이 마주쳤다. 수아도 웃어버렸다.
미기가 수아의 손을 잡았다. 미기의 손은 보송보송했다. 수아는 새삼 땀이 차는 제 손이 미워졌다. 둘은 또 별다른 말도 없이 손만 만지며 서로를 보았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미기였다.
"시간이 늦었네요."
수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카운터에서는 시계가 한 눈에 보이지만 바에 앉아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어있었다. 미기는 그 말을 하고는 조용했다. 수아는 미기를 한번 보고 아쉽게 손을 뺐다.
"내일 또 올게요."
"언제든지 오세요. 내일은 계속 있을 거예요."
수아는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살폈다. 끔찍하게 엉망이었다. 눈은 온통 시커멓고, 입술은 다 날아가고, 얼굴은 눈물 자국대로 허옇게 떠있었다. 미기는 수아의 표정을 보더니 또 쿡쿡거리고 웃었다.
"씻고 올게요."
수아는 한숨을 섞어 말했다. 미기는 다녀오라고 말하며 자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를 정리하려는 모양이었다.
수아는 화장실로 들어가며 그녀를 돌아보고 문을 닫았다. 거울을 앞에 두자 웃음이 나왔다. 고백했다. 사귀기로 했다.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수아는 노숙자 분장을 한 것 같은 얼굴로 행복하게 웃는 자신을 마주보며 울고 웃었다. 소리가 들릴까 입을 틀어막고 수도를 열어놓고 훌쩍훌쩍 울었다. 너무 행복해서 나는 눈물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아 수아는 그냥 울었다. 크게 울진 못했지만 꽤 오래 울었다.
한참 울고보니 씻을 시간이 모자랐다. 화장실에는 클렌징 폼이 있어서 지우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미기가 이상하게 생각할까 급히 얼굴을 씻었다. 손잡이를 잡으니 맨얼굴인데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화장품을 들고 다니지 않는 수아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왜 여자들이ー특히 목아가ー그 조그만 핸드백 가득 화장품만 넣어가지고 다니는지 처음으로 이해가 됐다.
화장실에서도 소리가 들리니 알고 있었지만 카페에는 여전히 손님이 없었다. 원래 이렇게 손님이 없는 카페가 아닌데 하늘이 도운 걸까. 다 울고 나니 절로 웃음이 났다. 수아는 실실 웃음을 지었다가 급히 얼굴을 굳혔다. 바보같아 보일 게 뻔했다. 미기는 그런 수아를 보고 또 웃었다.
"오래 걸렸네요."
미기가 말했다.
"얼굴이 워낙 엉망이어서요."
수아가 대답했다.
수아는 일어날 준비를 하고 미기는 구경했다. 카페는 아직 문을 닫을 때가 되지 않았고 슬슬 주인이 돌아온다던 시간이었다. 수아는 주인 얼굴까지는 보고 싶지 않아서 손을 빠르게 했다. 세수를 했지만 얼굴에는 울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수아가 가방을 들고 일어서자 미기가 따라 일어났다. 처음이었다. 수아는 의아해했다. 미기는 카운터를 나와 수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문 앞까지 마중을 나왔다.
"내일 봐요."
그렇게 말하고 뺨에 입을 맞췄다. 수아는 미기 얼굴만 쳐다봤다.
"내일 봐요."
앵무새처럼 그녀의 말을 따라한다. 미기는 또 쿡쿡 웃으며 손을 꼭 잡아주었다. 따뜻한 기운이 물씬 올라오는 손길. 수아는 그제야 따라 웃으며 미기의 뺨과 눈가에 입 맞췄다.
"꼭 올게요."
그렇게 덧붙였다. 미기는 "네,"하고 대답하고 수아의 손을 놓아주었다. 수아는 아쉽게 따라 놓으며 카페를 나섰다. 몇걸음 가서 돌아보자 미기는 수아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아는 살며시 손을 흔들었다. 미기도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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