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은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가 놀라고 말았다. 작업을 시작한 건 시계바늘이 막 열두 시를 지나간 오후였는데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 사방이 어둑해져 있었다. 하늘 높이서 빛나던 태양은 꺼져가는 촛불이 되어 가라앉고 있었고, 밖으로 난 창이 작아 낮에도 빛이 잘 들지 않는 연구실ー빌의 기준에는 사무실에 가까운ー은 벌써a 밤이 찾아온 듯 어두웠다.

 어쩐지 눈이 따갑더라. 빌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모니터를 돌아보았다가 미간을 팍 찌푸렸다. 백라이트가 눈부셨다. 얼마나 열중하고 있었는지 지금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빌은 모니터에서 고개를 돌리고 고민했다. 조금 더 버텨볼까? 몇 시간씩 쉬지도 않고 시뮬레이션한 덕분에 뭔가 감이 잡히는 느낌이었는데 놓치기는 아까웠다. 하지만 당장 모니터를 보고 싶지도 않았다.

 더듬더듬 왼손 근처에 두었던 물컵을 들었다. 한 모금 들이키자 바짝 말라 텁텁하던 입 안이 시원해졌다. 미지근한 물이 달게만 느껴졌다. 입에 머금자마자 떠오른 사실은 잊기로 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떠와서 뚜껑도 없이 먼지 많은 연구실에 방치되어 있었던 물이지만 이미 마셔버렸으니까. 빌은 내일은 꼭 뚜껑 달린 컵을 사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직도 반 이상 차있는 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흘끔 모니터를 내려다 보고 망설인다. 도로 주저 앉았다. 빌은 다시 마우스를 잡고 작업 중이던 프로그램을 확인했다. 찌르는 듯한 빛에 눈꺼풀이 절로 닫혔다.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니까 찔끔 눈물이 났다. 그제야 눈이 떠졌다.

 손수 창을 하나하나 닫고, 빌은 마지막으로 전원 버튼을 두고 한 번 더 생각했다. 끌까? 컴퓨터마저 물었다. 종료하시겠습니까? 그는 종료를 눌렀다. 평소에는 손도 대지 않는 모니터 전원까지 눌러주었다.

 컴퓨터가 꺼지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면서 등받이에 기대 앉았다. 콧잔등을 누르는 안경이 무거웠다. 빌은 눈을 감고 축 처지는 팔을 들어 안경을 벗었다. 보지도 않고 안경을 적당히 책상에 내려놓는다. 손을 떼려다가 문득 가슴 한 구석이 철렁해지는 느낌에 제대로 놓여있나 눈을 떠 확인한다. 빌은 이런 사소한 일에도 대범해지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앉아서 쉴 마음도 사라져ー너무 오래 앉아있었기 때문에 앉아있는 게 오히려 힘들기도 했다.ー 빌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을 먹기엔 이르지만 속이라도 채워야겠다 싶어 탁자에 널려있는 전단지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글씨는 커녕 그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문지르며 불을 켰다. 오래된 형광등이 한참을 깜빡이더니 힘겹게 켜졌다. 글씨는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눈이 나빠질 것 같은 밝기였다.

 빌은 찡그린 얼굴로 전단지를 들여다보며 안경을 찾아 컴퓨터 앞으로 돌아왔다.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돌아보자 부시시한 머리에 바지는 외출복에 위는 민소매 나시 하나만 걸친 남자가 소파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덩치가 크고 다부진 몸을 가진 단단한 인상의 남자였다. 다듬지 않은 수염이 부숭부숭하고 찌든 얼굴에 몰골은 지저분했지만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깔끔하게 꾸미면 태가 날 것 같았다. 살이 붙긴 했어도 근육량이 만만치 않았다. 운동을 꽤 했던 사람임에 분명했다.

 "식사는 했나요?"

 빌은 한참 고민하다가 물었다. 남자는 뒷목을 긁으며 일어나 냉장고를 뒤졌다.

 "아니. 뉴스는."

 "아침 뉴스라면 결국 방송에…."

 "그건 봤어."

 남자는 시큰둥하게 빌의 말을 잘랐다. 빌은 할 말이 없었다.

 "지금 밥 시킬 건데, 먹을겁니까?"

 허둥이던 빌이 찾은 화제는 결국 저녁 식사였다. 남자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시계를 보더니 빌을 무시해버렸다. 빌과 남자의 대화는 늘 이랬다.

 남자는 텅 빈 냉장고를 뒤적이다 포기하고 생수통을 꺼내 통째로 들이켰다. 물병에 입을 대는 걸 보고 빌은 속이 불편해졌다.

 "토니 스타크는 뭐하고 있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빌의 목소리에는 불만이 묻어있었다. 남자는 전혀 신경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것에 화를 냈다.

 "내가 감시하라고 했잖아!"

 남자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토니 스타크 뉴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수로요."

 빌은 짜증스레 대답했다가 미간을 문질렀다.

 "잘났다는 해킹으로 어떻게든 해봐. 보안 카메라 있을 거 아냐."

 빌은 어이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그렇게 만만한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이 가는 모든 길목에 카메라가 놓여있을 리도 없어요. 게다가 시간도 없다고요. 어제는 이걸,"

 여기서 빌은 컴퓨터 쪽을 가리켰다.

 "제대로 만들어놓으라고 했잖아요."

 "그럼 그걸 제대로 만들어 놓으라고!"

 남자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빌은 흠칫하고 반보 물러섰다. 남자는 빌의 거의 두배나 되는 덩치였다. 그는 성격이 급해서 쉽게 울컥했고 주변 물건에 그 화를 푸는 일도 많았다.

 "너!"

 남자는 빌에게 삿대질을 했다. 찌르기라도 할 듯한 손가락에 빌은 긴장했다.

 "넌 분명히 나한테 만들어 주겠다고 했어. 토니 스타크를 이기게 해주겠다고 했단 말이야. 근데 이게 뭐지? 벌써 일 년이 지났어. 일 년. 그래, 일 년이나 지났다고."

 남자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아직도 고물이야. 전선을 달고 그 토니 스타크를 이기겠다고? 내내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더니 머리가 이상해졌나?"

 그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계약은 이런 게 아니었어. 이렇게 못할 줄 알았으면 다른 사람을 찾았을 거야."

 마침내는 호통치듯 버럭 소리를 지른다. 빌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거의 완성이에요. 일 년 밖에 안 지났는데 그렇게 쉽게…."

 "시끄러워!"

 남자는 물통을 쥔 팔을 휘둘렀다. 빌은 사색이 되어서 뒷걸음질 쳤다.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았는지 물이 좀 튀었다.

 "내가 지금까지 대준 돈이 얼만데. 그게 어디 땅파서 나오는 금액이 아니란 말이야. 돈을 받았으면 일을 제대로 해야될 거 아냐!"

 남자는 씩씩거렸다. 빌은 종일 쌓인 피로가 어깨를 무겁게 누르는 걸 느끼며 다시 미간을 문질렀다.

 "그 엉터리 기계로 충분히 벌어먹었을 텐데."

 빌은 거의 넘어질 뻔 했다. 남자가그의 멱살을 낚아챈 것이다. 얼굴을 가까이 하자 남자에게선 시큰한 술 냄새가 났다.

 "입 닥쳐."

 남자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방금 전 소리칠 때보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경고했다. 빌은 대꾸하지 않았다. 남자는 빌을 밀치듯 멱살을 놓고 구석에 걸쳐둔 웃옷을 낚아챘다. 그는 옷을 걸치지도 않고 연구실을 나가버렸다. 빌은 문이 닫힐 때까지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빌은 소파를 보았다. 안그래도 피곤한 와중에 말다툼까지 했더니 퍼지고 싶었다. 남자, 로널드의 몸에서 나던 술냄새가 문득 떠올랐지만 그냥 앉았다. 잠깐 고민하다가 그와 마찬가지로 드러눕는다. 근육의 긴장이 풀리면서 한결 편해졌다. 빌은 눈을 감았다가 아직도 한 손에 쥐고 있는 식당 전단지를 들었다. 그 순간, 방 구석에 있는 스피커에서 소리가 났다.

 "정문이 열렸습니다. 보안에 위해가 갈 소지가 있습니다. 폐쇄할까요?"

 인간미 없이 기계적인 여성의 목소리였다. 빌은 흘깃 컴퓨터 쪽을 보고 미적미적 소파에서 내려왔다. 그는 휴대폰을 가지고 돌아와 등받이에 늘어져 앉는다. 뭔가 조작하는 듯 하더니 마이크에 대고,

 "그렇게 해."

 하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전단지를 집어들었다.

 한참 종이를 바라보다가 내려놓았다. 저녁 메뉴 두 개를 놓고 고민하다가 포기했다. 전혀 생각이 나아가지 않고 있었다.

 전단지에서 떠난 빌은 무심코 한 곳을 바라보았다. 사무실 한 구석, 눈도 잘 가지 않는 어두운 곳이었다. 잡다한 물건을 넣어두는 사물함 옆 빈공간에 조각상 비슷해보이는 것이 검은 천을 둘러쓰고 있었다. 잠시 후 빌은 그 앞에 섰다.

 발 밑에는 전선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옆에 있는 컴퓨터 전선과 섞여 정신이 없었다. 먼지 덩어리 같은 것도 굴러다녔지만 누구 하나 치우는 사람이 없었다. 빌은 주의깊은 손길로 천을 걷었다.

 꿀꺽. 평범하게 침을 삼켰을 뿐인데 그 소리가 크게 들렸다.

 거기에 있는 건 사람 정도 크기의 기계였다. 생김새도 닮아있었으니 인간형 로봇이라고 하는 게 맞는지도 모른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머리, 형형한 눈, 붉은색과 금색으로 칠해진 몸통. 누가봐도 요즘 유명한 미국의 영웅, 아이언맨이 생각나는 모양의 금속 인간이었다.

 빌은 방탄 유리로 덧대어진 가슴의 판에 손을 올렸다. 하루종일 매달린 작업의 성과를 확인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시뮬레이션 했을 때, 이 배터리가 버텨준 건 고작해야 5분 남짓. 본래의 아이언맨 아머가 가진 손바닥만한 원자로에 비하면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머는 빌에게 없는 특별함을 요구했다.

 특별함. 빌이 갖지 못한 것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거리가 먼 것이었다.

 아머는 쉴 틈 없이 닦고, 광 내고, 꼼꼼히 덮어둔 덕분에 반짝거렸다. 군데군데 상해서 칠이 벗겨지거나 장갑이 우그러졌던 흔적이 보였지만 눈에 크게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수리되어 있었다. 빌은 상했던 자리를 눈으로 쫓았다.

 제대로 된 기능을 한다고는 차마 제작자인 빌도 말하지 못하는 아머였다. 그러나 빌의 고용주는 인내심이 한도에 달한 모양이었다. 로널드 레너드. 그는 결국 목적했던 기능의 반의 반도 제대로 활용할 수 없는 아머를 입고 말았다. 말렸지만 비행만으로 삽십 분을 채 못 넘길거라는 말은 로널드를 잡을 수는 없었다.

 한 발짝 물러섰다. 아머는 그대로 서있었다.

 빌은 검은 천을 털었다. 먼지 바람이 불었다. 창문을 열어둬도 제대로 환풍이 되지 않는 작은 공간이었다. 참으려고 해봤으나 결국 재채기를 하고 말았다.

 "흐엣취."

 손을 휘휘 저으며 먼지를 조금 물렸다. 천을 아머에 씌우고 나서야 창문을 열었다. 먼지 쌓인 창틀은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어차피 환기는 되지 않았지만 잠깐이나마 맑은 공기를 마시니 기분이 한결 나았다. 피곤했지만 나가서 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 저녁 시간 뉴욕 풍경을 감상하고 빌은 창가에서 떨어졌다. 저도 모르게 다시 아머에 시선이 간다. 핸드폰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자주 있던 일이라 거의 외워버린 동작이었다.

 "주문하고 싶은데요."

 나가서 먹기로 했다는 사실을 떠올린 건 그렇게 말한 다음이었다. 빌은 후회했지만 끊어버리지는 못했다. 같이 식사할 사람이 없다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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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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