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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타락」

the other world 2014. 10. 16. 23:29

 불타오르는 듯한 열기 속에서 나는 모노리스에서 자아를 잃은 리피우스와 로피를 생각했다. 그들이 겪은 것도 이와 같은 것일까. 용암에 지지 않는 뜨거운 목소리로 가하람은 말했다. 아니, 절규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미쳤다고. 내 딸을 살리기 위해 한 사람의 운명을 뒤트는 것 쯤이야. 그 웃명으로 인해 세계의 뒤틀림이 생기는 것 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요! 선지자를 약하게 만들든, 선지자를 괴물로 만들든 말입니다."


 상냥한 그녀의 눈이 무서웠다. 그래, 그때처럼 무서웠다. 이 여행길의 시작에서 보았던 그 얼굴처럼 무서웠다. 영영 잊을 수 없을 내 '단 하나뿐인 가족'. 붉은 빛을 띤 판자 아래서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던 그 눈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그 눈과 마주치자 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붉은 용암 사이에 서있는 여인은 환영이던가. 눈섞인 찬바람이 심장 한가운데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녀가 계속되는 비극과 악몽에도 지지 않고 강해지려고 했다면 강해졌을 것을, 역시 환경을 조금만 건드려도 사람은 참으로 약해지는군요."


 처음 만났을 때는 듬직하기까지 했던 가하람의 침착한 목소리가 이제는 두렵다.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나리지의 눈보라가 심장을 얼리고 손발을 묶고 혀를 붙든다. 눈으로 가하람의 옅은 갈색 눈을, 이마의 장식을, 입가를 가린 베일을 샅샅히 훑을 뿐이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가하람의 입술은 멈추지 않는다. 베일이 씰룩이며 가하람의 입가에 맺힌 미소를 그려보였다.

 나는 저 눈을 안다.


 "이것보세요."


 그만.


 "이렇게나 힘든 일을 거치고도 그대는 이렇게나 선한 모습으로 서있는데,"


 그만해.


 "결국 마음을 다잡지 못한 선지자가 잘못한 겁니다."


 가하람은 고통스럽게 내뱉는다. 바늘이라도 꽂혀있는 것처럼 괴롭게 그녀는 웃었다. 그만하라는 마음의 소리는 그녀에게 들리지 않는다. 나는 더듬더듬 힘겹게 할 말을 찾았다. 머릿속이 비어버린 것 같아서 나도 무슨 말을 하는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가하람의 미소가 유일하게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사람과 겹쳐 보인 것은 우연일까.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순간 형님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사실 하나 뿐이었다.


 「너는 너의 길을 가거라.」


 형님입니까. 지금 제 앞에 있는 것은 형님입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이렇게 무서운 말씀을 하시는지요. 저는 당신이 용추종자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 것만으로 충분히 힘들었습니다. 당신이 더는 제 곁에 계시지 않다는 사실 하나로 충분히 괴로웠습니다. 어찌하여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요. 여신님의 뜻인가요? 그래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건가요. 대답해주세요, 제이크 형님.

 잔인한 침묵으로 돌려받고 싶지 않아 멈추었던 질문이 다시금 터져나왔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형님과 닮아있는 것은 여신께서 주시는 시련인지도 몰랐다. 여신이시여, 제가 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보십니까. 저는 그렇게 강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가하람은 나를 향해 웃어보였다. 그 미소가, 두렵기만 하던 미소가 어쩐지 다정하게 보여서 눈물이 날 것 같다.


 "작별이 다가오는군요."


 작별이라니요.


 "너무나도 당연한 댓가입니다. 어둠에 먹혀야할 혼들을 운명을 어기고 구해냈으니, 곧 찾아올 무지막지한 복수자에게 산산조각으로 찢겨버리겠군요."


 가는 겁니까. 당신은 정말로 형님을 닮았군요. 당신이 구하고자 했던 그람자 선지자라는 자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 설명도 없이 그렇게 가버리는군요.


 "지금 그걸 걱정해주는 겁니까. 역시 그대는 올곧군요. 제가 비뚤어지고 미쳐있다는 게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나는 타락해 죄없는 그대를 뒤틀린 운명에 던져넣고 말았는데요. 당신을 괴롭힌 자의 딸이니 더 미워해도 될 것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걸 바라고 이 모든 일을 꾸민 게 아닙니까.


 "이 얼마나 선하고 따뜻한 말입니까."


 울고 싶은 것은 나인데 어째서 당신이 우는지 모르겠습니다. 가하람의 두 눈에서 맑고 투명한 눈물이 차올라 베일을 적셨다. 형님, 당신도 울고 싶으셨습니까. 용추종자가 된 것을 후회하셨습니까.


 "수천년을 살아온 제 혼은 이제야 따스함을 느낍니다. 참으로 안심입니다. 그대의 신념대로 걸어가십시오."


 또 같은 말이다. 여행의 시작부터 들어온 그 말을 나는 또 듣고 있다. 가하람은 행복한 얼굴로 신기루처럼 덧없는 말을 계속한다. 그녀의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눈보라가, 불고 있다.


 "그대의 신념. 선하고 아름다우며 고통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형님과 함께했던 마지막 여행길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흰 눈이 쌓인 길을 나란히 걸으며 마나리지가 어떤 곳인지에 대해 이야기 했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도, 몬스터가 있으니 주의하라는 말도 들었었다.


 "그것이 새로운 운명이 되어 역사가 될 것이니,"


 현재 교단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대로 교황님이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할 것인지 말해주었었다. 그래서 형님은 주교의 밑에 들어간 것인가. 용추종자들의 사도인 이그나시오의 명을 따라 가버리신 겁니까. 당신 말대로 저를 위해서 그리한 것입니까.


 "그대의 운명은 세계의 운명마저 뒤틀고,"


 어쩌면 그가 나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형님을 닮은 자를 보게 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운명적이다. 아니, 내가 형님을 그녀에게 겹쳐보는 것은 과한 자만일지도 모른다. 가하람은 세계를 뒤틀었다. 천년을 넘게 살아온 강력한 고대인과 형님을 겹쳐보는 것은 세상에 대한 실례일지도 모른다.


 "그대는 여신의 미소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신이여. 제게 있어 형님은 세계 전부와도 맞바꿀 하나뿐인 가족이었습니다. 제게는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는 제것이 아니며 형제는 꿈 같은 것이었습니다. 뒤늦게 만난 어머니는 신기루처럼 제 앞에 나타났다가 목도 축이기 전에 사라지셨고 제가 추억할 수 있는 가족이라고는 오로지 형님 뿐입니다. 제게 있어서는 선지자보다도 귀한 가족입니다.

 가하람의 미소는 진정 온화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안녕을 고했고 나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또 한번 듣는 그 말.



 "제 역할은 이걸로 끝. 제 욕심으로 비롯된 일이 뜻하지 않은 운명을 이끌었던 것처럼, 그대의 힘으로 그대의 길을 나아가십시오."


 형님, 부족한 아우여서 미안합니다.


 - 여신이여, 길을 열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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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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