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를 제공받고 따뜻한 물에 몸을 씻을 수 있게 되자 그제야 살았다, 라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이 폐만 끼치는 비루한 생명이 그다지 오래살기를 바라지는 않았으나 살아있다는 당연한 본능인지 분에 넘치게 편안한 삶을 살아온 탓인지 저도 모르게 편한 것을 찾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쉬이 이곳을 떠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이것저것 베풀어준 미류씨와 풍룡 꼬마들에게는 미안하게 되었다. 당분간 계속 민폐를 끼치게 될 것 같은데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어서 거듭 사과하자 이 속 좋은 사람들은 큰소리로 경쾌하게 웃어버렸다. 그저 웃음소리만 들었을 뿐인데도 같이 웃게 되고 마는 밝은 사람들이었다.
  기운찬 아이들에게 이끌려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복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는데 집안을 이곳저곳 헤집고 다니게 되었다. 죄송한 마음에 슬쩍 미류씨 눈치를 보자 오히려 그는 젠이라는 아이에게 혼나고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옷에 이상한 거 묻히면 안돼."

  간신히 아이들에게서 벗어나 옷차림을 정돈하는데 제인이라는 발치에밖에 안오는 작은 아이가 옆에 와있었다.

  "아, 이건…, 더러운 게 아니예요. 옷에 바르는 것도 아니고요."
  "그럼?"

  고개를 기웃거리는 아이의 머리를 쓸어주자 아이가 헤헤, 소리내어 웃었다.

  "뭔가 냄새가 난다!"
  "박하향이예요. 시원하지요?"
  "응! 어떻게 나는 거야?!"
  "향수예요. 박하민트의 향을 담은거지요."
  "헤에―."

  자그마한 병을 보이자 섬세하게 세공되어 빛을 산란시키는 유리가 시선을 끌었던지 아이는 향수병에서 떼지 못했다. 아이에게 넘기니 작게 환호성을 질렀다. 가서 다른 아이들에게 보여주어도 되냐고 묻기에 고개를 끄덕였더니 작은 발을 놀려 포르르 방을 빠져나갔다.
  가방 깊숙히 손을 넣어 뒤지자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옷들을 헤치고 끌어낸 병에는 투명한 술이 반쯤 차 찰랑였다. 살짝 웃음이 피는 것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 살짝 문밖의 사정을 살피고 아무도 없는 새 조심스레 집을 빠져나왔다. 어쩐지 아이들이 많은 집에서 술을 꺼내는 것 자체가 범죄 같아 당당해질 수 없었다. 아마 금새 들어올 테니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잠깐 둘러본 것 뿐이었지만 이 작은 마을은 어딜가나 나무가 우거져 경치가 좋았다. 파릇한 풀위에 앉아 느긋하게 마시는 술은―, 안타깝게도 여전히 썼다. 코를 시큰하게 울리는 알콜 특유의 향에 인상이 자동으로 찌푸려졌다. 그래도 기분은 괜찮았다. 작게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가락을 흥얼거렸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지나가던 정령들이 기웃거리길래 인사하자 자연스럽게 같이 인사해왔다. 이 곳 정령들은 사람을 겁내지 않는구나. 친근하게 옆에 앉아서 말을 걸어오는 정령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가 제 갈길을 찾아간다. 하나가 떠나면 하나가 말을 걸어와 제법 오래 대화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결국 다들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조금 어둑어둑해진 듯해 미류씨나 젠이라거나 걱정하지 않을까 싶긴 했지만 나같은 걸 누가 일일히 기억하고 있겠어. 한모금 밖에 마시지 못한 술병을 다시 들었다. 크리스탈 잔에 또로록 떨어지는 방울이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 아름다웠다. 어차피 이 한잔 비우고 나면 제정신이 아니겠지만서도, 아무렴 어떠랴.
  쭈욱 들이켰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감각이 기분 좋았다. 벌러덩 드러누웠다가 한잔 더 마셔야지 싶어서 옆으로 돌아누웠다. 에, 술병을 어디다 뒀더라? 더듬더듬 더듬어 찾았다. 술병이 잡히자 안도감에 헤헤 웃어버렸다. 하지만 눈물이 나는 건 어째서? 훌쩍훌쩍 혼자 울다가 어느 샌가 까빡 그곳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미류씨께 잠깐 나왔노라고 말해야 하는데…….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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