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그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세 사람 모두 알았다. 섬이, 섬에 있는 ‘그들’이 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분노했다. 격한 소란이 일었고 그 여파가 바람과 파도의 형태로 배를 덮쳤다. 잎새와 은아가 최대한 노력해 가벼운 진동으로 그쳤으나 그 잠깐 사이에 하루가 바다에 던져졌다. 그리고 은아는,
“찾아올게.”
“안 돼.”
눈이 시뻘개져 있었다.
우연은 당장 바다에 뛰어들 기세인 은아를 붙들고 선장을 향해 외쳤다.
“빨리 가주세요. 섬에 가서 구조를 요청해야겠어요.”
“아니, 조금만 기다리면….”
“어서요!”
선장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우연을 노려보다가 결국 돌아섰다. 언젠가부터의 사람을 가리지 않고 제 발언권이 꽤 강하다는 것을 느꼈는데, 바로 지금 같은 순간이 있어서였다. 우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정신차려, 임 은아. 네가 지금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는 거 알잖아.”
“내가 못 찾을 리가 없어.”
“지금 못 하고 있잖아.”
“지금이 아니면 못 구할 수도 있어.”
우연의 입이 딱 다물렸다. 잠깐 멈췄던 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진 건 평범한 사람이야. 내가 아니라고.”
은아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우연은 저게 평범한 걱정이 아니라는 걸 안다. 아마 걱정보다는 자존심에 입은 상처가 더 큰 이유일 테지만 저 말은 맞았다. 은아는 바다 속에서 십 분을 넘게 버티고 섬에서 여기까지 혼자 헤엄쳐 올 수도 있었지만 하루는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섞여지낸다고 해서 자기가 평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이 갑자기 뼈저렸다.
우연은 은아를 놓았다.
“다녀와.”
“부탁해.”
“어떻게든 해볼게.”
은아가 잎새를 보며 눈짓했다. 당장 행동에 나선 건 은아지만 정말 위험한 게 잎새라는 건 우연도 알았다. 은아가 설렁설렁 몸을 풀었다. 연아는 천천히 잎새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첨벙 소리와 함께 은아가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잎새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은아가 갔어.”
“괜찮을 거야.”
“알지?”
잎새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 몸짓으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눈을 꽉 감고 있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주변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몸이 빠르게 가라앉고 있었다.
- 정말 내 얘기를 들어줄 거야?
목소리가 물었다. 하루는 강하게 생각했다.
그래. 들어줄테니까 말해봐. 숨이 차기 전에. 누군가가 찾으러 오기 전에.
- 괜찮아. 아무도 오지 않을거야.
어떻게? 아니, 그 전에 그럼 나는 어떡해.
- 걱정 마. 너는 죽지 않을테니까.
뭐?
그 순간 갑자기 몸을 감싸는 압력이 사라졌다. 놀라서 저도 모르게 입을 땠다가 황급히 다물었다. 그런데 물이 들어오지 않았다.
어라.
- 눈을 떠.
천천히, 눈을 뜬다. 눈 앞은 어두웠지만 물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숨을 뱉는다. 숨이 쉬어졌다. 주변을 둘러본다. 하루는 여전히 물에 가라앉고 있었다. 뭔가 물 같지는 않은 것이 하루를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공기와 거의 유사했지만 하루는 이게 공기가 아니라고 직감했다. 일단 이게 정말 공기방울이면 물에 가라앉을 리가 없으니까. 그럼 왜 숨이 쉬어지지?
- 숨이 뭔지 알아?
무슨 말이야?
분명히 소리를 내서 말했다. 그런데 제 귀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목소리가 웃었다.
- 네 생각이 맞아. 이건 공기가 아니야. 너는 숨을 쉬고 있는 것도 아니지.
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하루가 조금 짜증스레 말했다.
- 숨은 생명이야. 살아있는 것은 모두 각자의 숨을 가지고 있어. 물에도 흙에도 자기만의 숨이 있단다.
그게 뭐야. 그럼 내가 죽었단 거야?
- 그런 셈이지.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소리 내어 웃었다.
- 내 이름은 죽음이야. 반가워. 은 하루.
그 말과 함께 사방이 돌에서 뻗어나온 어둠으로 물들었다.
제 손과 발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어둠이었다. 하루는 손에 쥐고 있던 돌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촉감으로만 확인한 돌은 분명 그 자리에 있었지만, 뭐랄까, 느낌이 좀 달랐다. 숨결이 느껴진다고 해야할까.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 생각이 맞아.”
죽음이 말했다.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커다란 동굴 안에 있는 것 같은 소리였다.
“나는 지금 숨을 쉬고 있어. 오직 이곳에서만 가능한 일이지.”
“숨을 쉬는 건 살아있다는 뜻이라고 하지 않았어?”
하루가 물었다.
“맞아. 나는 살아있지.”
“근데 왜 죽음이야?”
후후.
“그건 이 곳이 곧 죽음이기 때문이지.”
하루가 눈살을 찌푸렸다.
“짜증내지 마. 설명해줄게.”
죽음의 이야기는 이랬다.

태초에 삶과 죽음이 있었다.
삶은 늘 넘치는 숨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그것을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다. 숨을 얻은 생명들은 날고 뛰며 치열하게 살아갔다. 숨이 있는 곳은 어디나 전쟁터였다.
죽음은 늘 숨이 모자랐다. 모두가 뱉은 숨을 받아먹었지만 죽음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죽음은 다른 생명이 가진 숨을 탐낸 나머지 곧잘 그들이 가진 숨을 모조리 빨아먹었다. 가진 숨을 모두 빼앗긴 생명은 빠르게 무너졌다. 그들이 구가하던 치열한 삶도, 숨을 받아마실 몸뚱어리도 모두 무너졌다.
생명들은 죽음을 두려워했다. 숨을 빼앗긴 뒤의 변화가 그만큼 급격했기 때문이고, 더는 치열하지 않게 된 자신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줄을 타는 생활은 불안했다. 이에 생명들은 삶에게, 정확히는 다양한 모양을 가진 삶의 대리인들에게 죽음을 물리쳐달라고 빌었다.
여러 대리인을 통해 더는 죽음에게서 달아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소망을 전달받은 삶은 고민했다. 삶과 죽음은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딱히 나쁘지도 않았다. 삶에게는 숨이 넘치게 많았으므로 죽음이 숨을 좀 탐한다고 하여 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생명에게 숨은 하나였고,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하여 가여워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삶은 죽음과 대화를 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성사된 적 없는 대담이었다.
< 죽음이여. 나의 오랜 동족이여. >
< 삶이여. 나의 오랜 형제여. >
<< 우리가 이렇게 한 자리에 모였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
삶과 죽음은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서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달았다. 둘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수없이 숨이 교차했다. 뿜어내고 빨아들이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 같았다. 아니 폭발이었다. 거대한 세상의 시작이었다.
그 후로는 어떤 생명도 삶과 죽음을 볼 수 없었다.
“정확히는 너무 잘게 흩어져서 누구도 그들을 알아볼 수 없었지.”
죽음이 나른하게 말했다.
“이곳은 죽음의 조각 중 하나야. 나는 그 속에 남은 삶의 씨앗이지.”
“씨앗?”
하루가 물었다.
“그래, 씨앗. 살아있기는 한데 아직 삶의 모양은 갖출 수 없는 발아하지 못한 씨앗이야. 숨은 충만하지만 몸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라고 할까.”
이런 씨앗이 지구 곳곳에 숨어있다고 죽음은 말했다.
“삶과 죽음이 서로 뒤섞일 때 떨어져나온 조각이 모두 나같은 형태인 건 아니야. 반대인 곳도 있고 섞여있지 않은 것도 있어. 그런 경우는 보통 티가 나니까 대부분은 알려져.”
자기처럼 애매하게 삶과 죽음이 균형을 이루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죽음이 말했다.
“그럼 너는 죽음이 아니네?”
“눈치챘구나. 맞아. 나는 삶이야. 정확히는 삶 쪽의 조각이지. 그래도 크게 다르지는 않아. 애초에 삶과 죽음은 쌍둥이처럼 닮았기도 하고, 나는 죽음과 거의 한 몸이니까.”
“그럼 너를 뭐라고 불러야할까?”
“편할 대로 해. 죽음이라고 불러도 좋고 삶이라고 불러도 좋아.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흠. 하루는 신음했다.
“그건 그렇다치고. 할 이야기는 이게 다야?”
돌멩이를 흔든다. 혹시 목소리라도 흔들릴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아니. 이제 시작이야.”
죽음 혹은 삶이 흔들림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은아는 곧장 하루가 빠진 곳으로 향했다. 그곳이 어디인지 아무리 물이 흐르고 위치가 변해도 은아는 알 수 있었다. 문제는 하루가 어디있느냐는 것이다. 물 속에 빠지는 것을 눈으로 보고 어딘지 가늠까지 했는데 물에 빠진 순간부터 줄곧 하루가 어딨는지 느껴지지가 않았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이 물 속에 있는 것에 대해 모른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이곳저곳 수소문해보았지만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몰랐다. 물속에 깃든 영 중 아무도 하루의 위치를 몰랐다.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 그보다 들어봐.
그들이 말했다. 그들은 늘 이랬다. 인간의 사정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듯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기에 바빴다. 누군가는 은아에게 정령의 축복을 받았다고 하지만, 은아는 수다쟁이 친척들이 잔뜩 있는 집의 아이와 자신이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 아까 무서운 게 들어왔어. 봤어?
순간 귀가 확 트였다. 온갖 소음 속에서 그 목소리를 찾아 매달렸다.
“어디서? 어디서 봤어?”
- 여기서. 여기서 봤어.
목소리의 주인이 까르르 웃었다. 은아가 제게 말을 걸어준 게 기뻐서였다.
- 아래로 쭉 떨어졌어.
- 아까부터 쭉 아래로 떨어져.
- 엄청 빠르게 떨어지고 있어.
- 언제까지 떨어지는 걸까?
- 돌아오기는 하는 걸까?
- 다시는 안 왔으면 좋겠다.
그치? 그치. 하고 서로 주고받는다. 재잘대는 소리들이 한꺼번에 귀로 밀려왔지만 은아는 능숙하게 그 속에서 필요한 정보를 걸러냈다. 이 아래로 쭉 떨어졌다. 물 속에 빠진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그 돌 때문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걸 예상해야 했다. 은아는 이를 악물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은 있었지만 설마 사고가 날까 싶었다. 아무리 마을 일이 급하다고 해도 사람을 죽일 수는 없었다. 은아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구해야 한다. 이 순간까지도 멍청하게 돌멩이를 꽉 쥐고 있는 저 순진한 아이를. 제 손으로 사지로 밀어넣은 생명을 구해야 했다. 은아는 몸을 돌려 거의 일직선으로 바다 밑바닥을 향해 헤엄쳐갔다. 베일듯이 날카로운 수영이었다.

죽음 혹은 삶은 말했다.
“네 몸을 빌리고 싶어.”
하루가 대답했다.
“싫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아, 좀!”
“아, 싫다고!”
벌써 몇 번째 주고받은 공방이었다. 둘 다 물러섬이 없었다. 죽음 혹은 삶이 땡깡부리는 어린아이처럼 볼멘소리를 냈다.
“네 몸을 함부로 움직이거나 하는 게 아니라니까? 그냥 같이 다니자고. 네 몸에 깃들게만 해줘.”
“싫어. 그래놓고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하루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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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이 무색하게도, 늘 보던 그 장소에 도착하자 잎새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잘못된 장소로 갔어도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신출귀몰했다. 마음이 가는 곳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럴 리는 없지만.
하루는 손을 흔들었다. 잎새가 쫑쫑 뛰어왔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그만 웃고 만다. 그러다가 한참 거리를 두고 우뚝 멈춰선다. 어리둥절한 체 쳐다보다가 문득 깨닫는다.
아차, 돌.
하루는 손을 내려다보곤 괜히 등 뒤로 숨겨본다. 잎새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안녕.”
하루가 울상을 짓고 인사했다. 잎새는 그런 하루를 말끄러미 쳐다보다가 앞서 걸었다. 저번보다 거리가 한껏 멀어진 것이 아쉬워서 가슴이 허해진다.
잠깐의 산책 후 도착한 곳은 우연과 미래의 집이었다. 잎새가 손을 들어 하루를 세우고는 홀로 집으로 들어갔다. 서운한 마음에 입술을 삐죽이며 기다리고 있으니 우연이 나왔다. 뒤따라 빼꼼 잎새가 고개를 내민다.
“미안. 가까이 갈 수가 없어서 여기서 대화해도 괜찮을까?”
“네, 뭐….”
불만스러운 어투에 우연이 픽 하고 웃는다. 잎새가 뒤에서 눈을 깜빡이고, 그 얼굴에 마음을 가라앉힌 하루가 차분히 오늘 생긴 일들을 설명했다. 우연의 얼굴이 차츰 굳어갔다.
“이상하네요.”
“그쵸.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가요?”
“아뇨, 그게 이상한 게 아니에요.”
우연이 깊게 한숨을 뱉었다.
“하루양, 몸은 괜찮아요?”
네?
눈을 끔뻑인다.
“괜찮아요.”
“정말 이상해요. 그게 인체에 영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만약 있는 거라면…. 하루양은 왜 멀쩡할까요?”
하루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라, 그런가?
생각해보니 그랬다. 동생의 방은 하루의 방과 벽을 하나 두고 옆에 있다. 베란다는 하루 방 입구 근처에 있었다. 둘 다 하루의 방과 가까웠다. 하룻밤 사이에 탈이 난 곳이 모두 하루의 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손에 든 돌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평범한 까만 돌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까기 까만 돌을 주변에서 발견하기는 의외로 쉽지 않다는 점만 제외하면 이상할 것 없는 돌이었다. 하지만 하루는 기억한다. 이것을 처음 발견했을 때 뿜어져 나오던 기이한 빛을.
“하루양과 연결된 끈이 모두 느슨해졌어요.”
우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굵고 강하던 끈들이 모두 축 늘어졌어요. 옆에서 잎새가 속삭인다.
“바람이 멈췄어.”
“하루양의 존재가 옅어졌어요.”
우연과 잎새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톱니바퀴가 돌기 시작했다. 그래. 그랬구나. 수상했던 것들이 한 번에 짜맞춰졌다. 어제부터 기이할 정도로 사람들과 자주 부딪힌 것도, 인사를 받아주지 않던 가족들도, 유난히 조용한 밤이라고 느껴진 것도, 모두 이 돌덩어리 때문이었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은 거죠, 하루양?”
물어도 알 리 없었다. 하루는 이 기이한 돌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과 싸우기 시작했다.
상황이 급해졌다. 이걸 계속 집에 둘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도 없었다. 서울에만 이런 장소가 다섯은 된다는데 대체 그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 거야? 하루가 투덜거렸더니 옆에서 우연이 설명했다. 그런 곳에서 귀신이 들었단 소문이 나곤 하지요.
세 사람은 급히 은아의 집으로 왔다. 골목 건너 건너 정도로 가까워서 금방이었다. 오는 길에 우연이 전화를 해서 은아가 건물 앞에 나와있었다.
“어떻게 할래요?”
은아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하루가 대답했다.
모르겠다. 우연은 자신들의 마을로 함께 가자고 제안했지만, 동시에 망설였다. 마을은 멀었고 내일은 월요일이었다. 하루에게 선택권이 넘어왔다. 하지만 하루도 결정하지 못 했다. 고민이 깊어갔다.
어지간해선 입을 열지 않는 잎새를 제외한 세 사람, 은아와 우연, 하루가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우선은 은아의 차 트렁크에 보관하기로 했다. 빌라에는 화단이 없었고, 차고에서 밤을 지새우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대신 하루는 다음 주말에 함께 섬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부모님의 허락을 반드시 받아야한다는 문제가 남아있긴 했지만 마땅한 다른 대책이 없었다.

하루는 한 주를 붕 뜬 기분으로 날려보냈다. 잎새를 처음 만났던 순간처럼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쉬이 침착해지지가 않았다. 수험생이 수능 앞두고 잘 하는 짓이라며 몇 번이나 잔소리를 들었지만 결국 허락도 얻어냈다. 그치만요, 엄마. 내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다니까요? 물론 그렇게 말하진 않았다.
은아는 결국 그 주 내내 차를 움직이지 못 했다. 트렁크에 넣어뒀으므로 운전석에 앉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거부감이 들었단다. 그래서 결국 차를 버리다시피 방치해두었다는 이야기에 하루는 마음이 급해졌다. 얼른 돌을 내다 버리고 싶었다.
“그걸로 뭘 한다고 했지?”
“…그들에게 겁을 줄거야.”
잎새가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바다로 건너가 달라고 아무리 부탁해도 들어주지 않으니 약간 강압적인 수를 쓰는 거랬다. 베란다의 식물이 하루만에 시드는 모습을 본 하루로서는 정말 그게 ‘약간’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렇다는데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참고로 베란다의 식물들은 그 날 후로 열심히 회복하고 있었고, 동생의 감기는 하루가 떠나자마자 나아졌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걱정이 들었다. 이걸 가져다 정령들을 겁 주는 데다 쓴다고 치고, 그리고 그게 마을의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치자. 그럼 그 후에는? 이걸 다시 원래 자리에 돌려놓나? 바다에 던져버리나? 둘 다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도 식물도 살 수 없는 땅에서 뭐가 살 수 있을까. 아무리 영향을 끼치는 범위가 좁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해도 소용 없는 고민을 하는 사이 주말이 찾아왔다.
토요일 이른 아침에 일어나 은아의 집으로 갔다. 이번에도 미래가 빠지고 은아와 우연, 잎새가 함께 가기로 했다. 본래라면 다다음 주에나 내려가기로 되어있던 것을 땡겨 가는 것이었다.
트렁크에 실은 돌멩이를 한 차례 확인하고 차에 올랐다. 긴 여정이 준비되어 있었다. 차라리 기차에 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먼 길이었지만 사람이 많은 곳에 끼어있을 수가 없었다.
“그게 그런 식으로 발견될 줄은 몰랐어.”
우연이 말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잠시 어물거리는 사이 말이 이어졌다.
“돌 말이야. 당연히 그 자리에 그냥 있을 줄 알았거든.”
우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돌이켜보면 처음 발견했을 때도 그런 돌은 보지 못했는데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어.”
그게 또 이상하다고 우연이 말했다.
“그런 장소는 다 직접 발견한 거라고 했지?”
“맞아. 찾으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알 수 밖에 없었으니까.”
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돌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마을에 전해내려오는 노래가 있다고 우연이 말했다.
“이제는 문헌으로 밖에 남아있지 않아서 가락은 잊혀졌지만, 공인된 사료에 남아있는 거니까출처는 명확해.”
앞부분 몇 구절을 기억하고 있다며 우연이 중얼거리듯 읊조린다.

어디서 굴러왔나
검고 작은 돌멩이
빗발치는 아우성은
여기서 시작됐나
폭풍이 부네
파도가 치네

“대충 이랬던 것 같은데 좀 틀렸을거야.”
워낙 오래 전에 읽었다며 웃는다. 그러면서도 못내 표정이 불편한 것이 트렁크에 있는 돌덩이가 신경쓰이는 듯했다.
중간중간 휴게소에 들르고 네 시간 가까이 달려서야 겨우 섬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나마도 돌멩이를 가지고 타는 것이 불안해서 어떻게 섬에 들어갈지 격렬한 토론을 마친 후였다. 어차피 섬으로 갈 수단도 배 밖에 없었으니 무의미한 토론이었으나 결론은 났다. 은아가 있으니 괜찮다. 아무리 이게 위험해도 물의 아이인 은아를 두고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 거라는 게 세 사람의 의견이었다. 하루는 그렇구나, 하고 넘겼다. 바다에서 물의 아이가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아는 것은 세 사람 뿐이었다.
몸을 실은 것은 흔들림이 온 몸으로 느껴지는 쪽배였다. 근처 바다에 고기 잡으러 갈 때 쓰는 작은 배였지만 섬에 가기에는 충분했다. 섬은 육지에서 육안으로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배 타는 건 처음이네.”
배에 오르며 하루가 중얼거렸다. 혼잣말이었다.
“처음이야?”
잎새가 물었다.
“응. 이렇게까지 흔들리는구나.”
좀 불안하다며 하루가 웃었다. 앞서 배에 탄 잎새는 돌멩이를 든 하루와 조금 거리를 두고 서있었다. 둥근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걱정 마. 내가 지켜줄게.”
그렇게 말하는 잎새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믿음이 가는 동시에 가지 않았다. 돌맹이 때문이었다. 이걸 들고 있으면 근처에도 못 오면서 그렇게 말해도. 지금 상황은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하루는 별 말 없이 웃었다.
배는 금방 바다로 나갔다. 날씨도 좋았고 바다도 잔잔했다. 바다 한 중간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섬 쪽에서 갑작스런 돌풍이 몰아쳤다. 바다가 울렁이며 흔들렸다. 진동은 크지 않았으나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었고 한 손에 돌을 단단히 쥐고 있던 하루는 잡을 곳을 잃었다.
“은 하루!”
하루는 잎새가 저렇게 큰 소리도 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대로 물속에 잠겼다.
풍덩.
부르르르….

바닷속은 꽤나 시끄러운 곳이었다. 물에 가라앉는 하루의 고막으로 온갖 소리가 들려왔다.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이 뱉는 비명소리로 추정되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한 손에는 돌멩이를 꽉 움켜쥐고 하루는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떨어지는 순간 숨을 깊게 들이쉰 덕분에 아직 숨은 차지 않았다. 이제 발버둥쳐 나가면 된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바다가 그렇게 거친 것도 아니었다. 할 수 있었다. 하면 됐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하루는 들었다. 소음 속에서 전해지는 희미한 목소리를.
- 가지 마.
가지 말라는 애원을.
- 아직 안 돼. 가지 마.
애절한 부탁을.
- 제발 내 목소리를 들어줘!
그래. 들어줄게. 말해봐.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루는 바닷속 어둠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배 위에 남은 사람들의 허망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은아의 얼굴이 창백했다. 바다에 대고 소리치다가 무너지듯 주저앉은 잎새의 표정은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은아가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 기세여서 아무것도 모르는 배의 선장이 은아를 말리고 있었다.
“여기 얕아. 금방 나올 거야. 조금만 기다려.”
그럴 리 없었다. 은아는 알았다. 지금 저기 얕은 바다에 하루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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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였을까. 의심과 싸우던 하루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부모님과 함께 차 타고 멀리 나간다는 게 기뻐서 신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다. 그때의 하루는 꼭 우연처럼 눈을 빛냈었다. 이제는 멀어져버린 흐린 기억 속 추억.
그런 생각이 드니 왠지 우연이 나쁘게 보이지가 않았다. 어쩌면 신종 사기 수법일지도 모르지만 돈도 없고 나이도 어린 자길 데려다 뭐에 쓰겠는가. …까지 생각하고 보니 어쩌면 납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자신과 싸우고 있는 하루를 보고 우연이 키득거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제가 잘한 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요.”
흐음. 우연이 작게 신음했다.
“그러게요. 우연씨에게는 딱히 좋을 게 없는 일이네요.”
“납치만 아니면 좋겠어요.”
하루가 솔직하게 고백하자 우연이 다시 킥킥 웃었다.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군요?”
“네…. 좀 무서운 것도 같고.”
흘긋 운전대를 잡은 은아를 보고, 우연에게로 돌아온다. 피식 웃는다.
“이걸 제가 말하니 좀 웃기긴 하네요.”
“왜요?”
우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가자고 했거든요.”
하루는 그렇게 말하곤 의자에 등을 기댔다. 갑자기 방금까지 하던 모든 걱정이 바보 같아졌다. 그래, 내가 가자고 했었지. 난 뭘 걱정한 거람.
하루는 흘긋 잎새를 바라보았다. 저 애를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잎새는 존재 자체로 신비 그 자체였지만, 신기할 정도로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우연도 은아도 미래도 믿을 수 없지만 잎새는 믿을 수 있었다. 하루는 잎새를 통해 이 사람들을 믿기로 했다.
“하루양이 먼저 말씀해주셨군요. 그럴 거라곤 생각하지 못 했는데요.”
우연이 놀랍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하루는 빙긋이 웃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도로가 뒤로 힘차게 달려가고 있었다.
“제가 좀 행동파라서요. 그건 그렇고….”
“네?”
“전부터 궁금했는데 저한테 계속 존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존대하고 있기는 한데요.”
왜 그러시는 거예요?
하루가 물었다. 하루라고 꼭 나이가 어리면 말을 편하게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잎새는 처음 보자마자 말이 짧았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을 높이니 뭔가 이상했다.
“불편한가요?”
우연이 물었다.
“조금요.”
어쨌든 하루는 고등학생이다. 대학생이면 나이차가 많이 나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어른이었고, 하루는 어른에게 존대받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우연은 가만히 하루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 편하게 할게. 다른 친구들도 그렇게 해주는 게 낫겠어?”
“네.”
“그럼 하루도 편하게 말해주겠니?”
하루는 잠시 고민했다.
“응.”
한 번 더 고민한다.
“언니…?”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아.”
우연이 말했다. 하루가 어색하게 웃는다. 그게 더 힘들 것 같은데…. 머리를 한 번 긁적인다.
“알았어.”
이름을 잘 기억해둬야겠다. 하루는 생각했다.

우연과 대화하는 것도 다소 지루해질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차가 멈췄다. 하루로서는 처음 보는 장소였지만 그다지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 낮은 건물이 굴곡진 땅 위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낮고 창백했으며, 길이 좁았다.
다른 사람들을 따라 언덕을 올랐다. 빼곡한 집들 사이로 난 골목을 걸었다. 주말 오후 시간대의 주택가라 붐비지는 않았지만 인적이 드문 것도 아니었다.
“높네.”
하루가 말했다.
“응.”
잎새가 대답했다.
“좀 그러네.”
우연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얼마나 더 가야해?”
하루가 물었다.
“거의 다 왔어.”
은아가 말했다.
“저 골목.”
잎새가 가리킨다.
잎새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주변 집들에 비해 높은 건물이 있다. 오 층 가량 되는 깨끗한 건물이었다. 다가가보니 골목은 중간에 막혀있다. 흔한 건물과 건물 사이의 무의미한 틈이었다.
“…거기서 뭐해?”
골목을 다 살피고 돌아선 하루의 질문이었다. 멀찍이 선 세 사람이 하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가시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손을 팔랑거리던 잎새가 말했다.
“안 된대.”
“우리는 그 쪽으로 가기가 힘들어.”
우연은 미안한 표정이었다. 하루는 그제야 겨우 아까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다. 맞다. 가까이 가기 힘들다고 했지.
“그 안에 있을거야. 부탁할게.”
하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큼 골목에 들어선다. 아무것도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그늘에 들어서니 조금 서늘해졌을 뿐이다. 문제는…,
“돌멩이 같은 건 없어.”
골목은 너무 깨끗했다. 돌은 커녕 담배꽁초 하나 없다. 새로 지은 건물이라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모양이라고 하루는 생각했다. 뒤에서 은아와 우연이 당황하는 게 보였다.
“어떻게 해?”
하루가 물었다.
“그럴 리 없어.”
“분명 뭔가 있을 거야. 자세히 봐줘.”
은아와 우연의 말이었다. 하루는 고개를 저었다.
“거기서도 대충 보이잖아. 아무것도 없어.”
그 말은 부정할 수 없는지 두 사람이 조용해졌다. 심각해진 표정을 보니 안쓰러웠지만, 없는 걸 어쩌겠는가. 하루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골목을 둘러보고 나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신중하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본다. 어차피 보이는 건 없지만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시늉이라도 하자는 생각이었다. 반듯한 회색의 돌벽과 울퉁불퉁한 하얀 돌바닥의 대비가 낯익었다. 반대편에는 옆 건물 벽이 있고 정면에는 벽돌색 담장이 있다. 울퉁불퉁한 바닥 사이에 뭔가 껴있기는 했지만 자갈이나 먼지에 가까운 것을 가져다 달라고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한 바퀴 휘 둘러보고 나니 볼 게 없었다. 하루는 몸짓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표시를 했다. 은아와 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는 그대로 골목을 빠져나왔다.
아니, 빠져나오려고 했다.
골목에서 나오는 순간, 강렬한 예감 같은 것이 뇌리를 스쳤다. 하루는 뭔가에 잡아끌리듯 뒤를 돌아보았다. 있었다. 새카만 돌. 검게 빛이 나는 듯한 기이한 돌. 이런 것을 못 보고 지나쳤을 리가 없었다. 없던 것이 생겼다. 하루는 성큼성큼 다가가 돌을 집어들었다. 손에 들린 돌은 좀 검을 뿐 평범했다. 빛나던 것도 사라졌다. 이해할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이거다.
하루는 돌을 들고 돌아섰다. 세 사람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루를 보고 있었다. 하루는 자신있게 다가가 돌을 내밀었다.
“자.”
“이건….”
한 손에 꽉 차고도 남는 크기의 돌을 골목 한 가운데서 주웠다. 그 자리에 없던 것이 생겼다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은아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인상을 찌푸리고 잎새가 달아나듯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우연이 돌을 받아들려다가 손을 움켜쥐었다.
“미안. 잠깐 들고 있어줄래?”
하루는 그러겠다고 했다.
하루는 손에 쥔 돌을 가만 쳐다보았다. 검고 큰 돌멩이다. 표면이 거칠고 묵직하다. 이걸 어떡하면 좋을까. 고민한다. 아무래도 저들에게 넘기는 건 힘들어보이는데. 잠시 고민하는 사이 은아와 우연이 말을 맞췄는지 하루에게 조금 다가왔다. 겨우 대화하기에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였다.
“미안. 그걸 우리가 들고 갈 수는 없을 것 같아.”
미리 생각했어야 하는데 미안하다는 말이 이어졌다.
“괜찮으면 그걸 가지고 있어 줄래?”
하루는 별 생각 없이 그러마 했다. 설마 그게 이런 요절복통으로 이어질 줄은 모르고 내놓은 대답이었다.

돌멩이를 트렁크에 싣고 은아네 집으로 돌아와서 하루는 돌멩이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들고 가는 동안은 별 문제가 없었다. 몇 번 길 가던 사람들과 부딪힐 뻔 했을 뿐이다. 오늘따라 유난하네,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집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들어가며 인사를 했는데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집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아는 척하는 사람이 없는 게 이상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인사 좀 못할 수도 있지. 방에 들어가 돌덩이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날이 어두워 저녁 시간이 다 된지라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은데 엄마가 하루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언제 왔어?”
“아까 왔는데?”
세상에. 간 떨어질 뻔 했네. 엄마가 가슴을 끌어내렸다. 식탁에는 하루의 밥이 없었다. 하루는 직접 밥을 퍼와서 저녁 식사를 했다.
자고 일어난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다. 아침부터 엄마의 비명소리에 잠을 깼다. 졸린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가니 엄마의 서러운 목소리가 하루를 반겼다.
“얘들아.”
베란다에 있는 작은 정원에서 엄마가 주저앉아있었다.
“뭐야? 왜 이래?”
하룻밤 사이에 생기 넘치던 정원이 누렇게 죽어있었다. 하루도 깜짝 놀라 베란다로 나가 화분 상태를 살폈다. 파릇파릇하던 잎과 가지가 다양한 형상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나 감기 걸린 거 같아.”
뒤늦게 나온 동생이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배를 내놓고 잤나. 배탈 기미도 있다며 동생이 제 배를 어루만졌다. 하루는 엄마를 부축해 안으로 모시고, 동생에게 감기약을 챙겨주었다. 일요일에 여는 병원도 없으니 상비약으로 버텨야했다. 내일도 안 좋으면 병원에 가보자고 이야기하는 새 갑자기 돌멩이가 떠올랐다.
만물에 깃든 힘인 정령이 살기 힘든 땅. 거기에서 발견한 수상한 돌멩이.
동생이 감기에 걸린 것뿐이라면 의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건강하긴 하지만 여름 감기 정도야 운이 좀 나쁘면 누구라도 걸릴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엄마의 정원은 달랐다. 어제까지 생생하던 걸 분명 확인했다. 엄마가 물을 주면서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니까.
“나 잠깐 나갔다 올게.”
하루는 급하게 옷을 챙겨입었다.
“또 어디 가.”
엄마가 말했다.
“금방 올게!”
돌멩이를 챙겨서 구르듯 집안을 빠져나왔다. 내가 생각보다 큰 일을 맡아버린 게 아닐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들을 찾아가려고 했으나 은아의 집도 우연의 집도 정확히 위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작정 돌덩어리를 안고 집을 빠져나온 하루는 아파트 입구에서 고민하다가 잎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세 번째가 되어서야 겨우 전화를 받는다. 하루는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도 휴대폰을 두고 다닐 때가 대부분인 잎새니 밖에 있었으면 전화를 안 받았을 게 틀림없었다.
- 여보세요.
간신히 들리는 크기로 잎새가 말했다.
“지금 어디야?”
- 집.
“나 좀 데리러 와. 당장 할 얘기가 있어.”
- 응.
묻지도 않는다. 당연하다는 듯한 답 뒤로 전화가 끊겼다. 어디서 만날지도 정하지 않은 채 끊긴 전화에 잠시 황당했지만 매번 만나던 곳으로 간다. 거기가 아니면? 다시 연락해봐야지, 뭐. 태평스럽게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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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사는 주민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대한민국 땅에 있는 대부분의 시골이 그렇듯이 정령의 아이만 아니었다면 이곳도 젊은 피라고는 볼 수 없는 노인들의 땅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섬에 남은 노인들은 정령의 아이를 귀여워하면서 동시에 미워했다.
굉장한 이유는 없었다. 섬에 남아있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사랑을 잊지 못 했다는 의미였을 뿐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더 많이 사랑받는 이를 부러워하다 못해 질투에 빠지고 마는 건 흔한 일이었다.
섬에 남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다. 나이도 성별도 상관없었다. 선망하고 부러워하며 동시에 미워했다. 정령의 아이는 정령의 아이대로 문제였다. 가족보다 그들을, 사람보다 자연을 더 가깝게 여기다보니 인간 사회에 어울리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섬 사람들은 정령의 아이를 한 데 모아 기르기로 했다.
그렇게 아이들은, 그러니까 미래와 우연, 잎새와 은아, 서담과 다른 남자아이 셋은 거의 공동체처럼 자라게 되었다. 가족보다도 더 가족 같은 사이였다.

은아는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표정이 오묘했다. 기분이 나쁜 듯도 했지만 아까까지의 거친 모습과는 달랐다. 하루가 어리둥절한 기색을 보이니 옆에서 미래가 웃었다.
“신경쓰지 마세요. 제가 마저 이야기할게요.”
미래는 상냥하게 웃으며 제 잔에 차를 따랐다. 아까부터 끓인 물을 붓고 잎이 우러나는 과정을 지켜보는 얼굴이 제법 밝았다.

아이들의 가족, 그러니까 혈육 중에서 섬에 사는 이는 많지 않았다. 여덟 명의 아이들 중에 가족과 함께 사는 아이는 하나 뿐이었다. 보통은 주말이나 달에 한 번씩 찾아왔지만, 거의 들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들은 마을 어른들과 아이들보다 두어 세대 앞서 태어난 정령의 아이, 그러니까 이미 성인이 된 정령의 아이에게 돌봄 받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들과의 사이도 멀어지기 마련이라 비록 부릴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지만, 아이들을 이해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어른들이었다.
섬의 모든 것은 아이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이의 존재 자체가 재해와 같았기에 사람들은 전력을 다해 아이들의 안정을 꾀했다. 작은 변덕만 부려도 풍파가 이니 어찌 재해라 하지 않을까.
정령의 아이 주변에는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어리고, 그들은 아이들의 모든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물의 아이가 울면 비가 내리고, 바람의 아이가 화를 내면 강풍이 몰아쳤다. 인연의 아이가 장난삼아 묶은 매듭에 천년의 원수가 합방을 하고, 초목의 아이가 기뻐하면 꽃이 피었다.
그토록 특별한 삶이었다. 어딘가 고장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곁에서 아무리 붙들고 말해보아도 바로 귓가에서 속삭이는 그들의 목소리를 이길 수는 없었다. 화를 내도 소용 없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한 아이들이 불안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품어보려 해도 무리였다. 그들보다 아이들을 사랑으로 감쌀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사소한 변화에도 일일히 반응해주고 귀 기울여주는 대상이 있는 상황에서 어린이는 무적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가족과 헤어져도 크게 상처받지 않았다. 의젓하게, 어쩌면 시큰둥하게 배웅할 뿐이다. 아이들의 진짜 부모는 그들이었으니까.
물론 아이들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안 받는 것은 아니다. 가족과 사이가 좋다고 해서 친구와 싸우지 않는 것은 아니듯, 아이들은 지난하기만 한 인간관계에 힘겨워했다. 그들과의 편안한 소통이 있기에 더욱 힘들었다.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것들이 사람에게는 무슨 수를 써도 전달되지 않았다.

찻잔에서 뜨거운 김이 아른아른 올랐다. 미래는 차가 식는 것을 기다리며 찻잔을 손으로 건드려보고 있었다. 얇은 도자기 잔에서 전달되는 열기가 다소 침착해지기를 기다리며 입을 뗀다.
“처음엔 저도 많이 힘들었어요. 특히 처음 중학교에 갔을 때는 심했죠.”
중학생 때 처음으로 섬 밖에 나가게 되거든요. 미래가 말했다.
“가족들이 데리고 나가는 게 아니고서는 그래요. 그것도 보통은 말리죠. 사고가 나면 수습할 수가 없으니까. 보셨다시피 저희들은 서울까지 와서도 제법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서요.”
미래가 때마침 방에서 나오는 잎새를 흘긋 쳐다보았다.
“나영도가 어디 있는데요?”
하루도 잎새를 보았다. 딱히 차림이 바뀐 것도 아니고 빈 손으로 들어갔다 빈 손으로 나왔다. 뭘 하고 나온 걸까?
“한참 남쪽.”
은아가 대답했다.
“나중에 검색해보세요.”
차가운 어조였다. 미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아졌던 기분이 단번에 나빠졌다. 잎새가 빈 자리의 의자를 빼 앉았다.
“그래서 마을 이야기는 뭔가요?”
하루가 물었다.
“그건….”
“내가 얘기할게.”
은아가 미래의 말을 막았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은아의 말이었다.

그래.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섬 사람들이 할 수 없었을 뿐이다. 순수한 호감으로 도와줄 이를 찾지 못해서 그저 방치해두었을 뿐인, 그런 일. 당장 위험하진 않으니까 괜찮다면서 미뤄온 일이었다.
언젠가부터였다. 그들, 그러니까 정령들이 바다를 건너지 못하게 되었다. 마을은 점차 그들이 뿜어내는 힘에 어지러워졌다. 모든 자연물에 생기가 돌았고, 그만큼 모든 게 거칠어졌다. 그리고 그만큼 바다가 메말랐다.
마을 사람들은 원인을 찾아 헤맸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터지는 사소한 해프닝들은 참아 넘길 수 있었지만 바다가 마르는 건 큰 문제였다. 섬마을에서 바다에 의존하지 않고 사는 건 불가능했다. 몇몇은 섬 생활을 포기하고 육지로 올라갔다. 결국 정말로 섬을 떠날 수 없을만큼 늙은 노인들과 정령의 아이 일부를 제외하고는 주민이 없을 정도로 사람이 줄었다.
끝내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도해볼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세상에는 정령이 살기 힘든 땅이 있다. 정령마다 좋아하는 장소는 다르지만 모든 정령이 꺼리는 곳이 이따금 있었다. 아주 특별한 장소도 아니었다. 얼핏 보기엔 평범한 땅이었다. 그러나 낮에는 해가 들지 않고 밤에는 희미하게 밝으며 바람도 불지 않고 땅은 부서질 듯 건조한, 그런 곳이 있다. 인간의 관심도 거의 끌지 않기 때문에 아주 관찰력이 좋지 않으면 이상하다는 사실조차 알아채기 힘든 그런 장소였다.

“그 땅에 들어가주세요.”
은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작아졌다.
“그게 저희의 부탁입니다.”
살며시 내리깐 눈. 무언가를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루는 고개를 갸웃했다.
“들어가서 뭘 해야하는데요?”
“돌을 가져와주세요.”
 미래가 말했다.
“돌이요?”
하루가 물었다. 미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하겠지만 평범한 돌은 아니에요. 그건….”
미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정령을 쫓아내는 돌이에요.”
아하. 하루가 작게 감탄사를 냈다.
“맞아요. 그 땅, 저희가 사막이라고 부르는 그런 땅은 바로 그 돌 때문에 만들어져요. 그리고 저희는 거기 들어갈 수 없죠.”
왜요, 라고 물으려던 하루가 말을 삼킨다. 왠지 알 것도 같았다. 이 사람들이 사실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면, 평범한 땅을 평범하게 대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어려워요. 그들이 질색팔색을 하고 말리기도 하거니와 저희에게는 거부감이 너무 심해요.”
마을 사람들은 다들 그렇죠, 라고 미래가 덧붙였다.
“그래서 부탁하는 거예요. 그들을 보지도 듣지도 못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거예요. 외부인에겐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거든요. 그저 인지하기 힘들 뿐이에요.”
미래가 매달리듯, 사정하듯 말했다. 하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어려운 일은 아니네요.”
그리고는 말했다.
“그럼 당장 출발하죠.”
네? 이번에는 은아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순진한 사람들 같으니. 하루는 웃는다.
이런 사정 설명 없이 게임처럼 내기를 건다거나 그냥 부탁해도 돌덩이 하나 정도는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이렇게 사정사정하며 설명하고 있는 게 괜히 우스웠다.
“가자니까요. 어서 출발해요. 바로 끝내버리죠.”
은아와 미래, 잎새가 모두 당황해서 하루를 보고 있는 사이 하루는 문 앞에 섰다. 그 순간 삐삐거리는 소리가 문에서 울렸다. 곧 문이 열렸다.
“여기서 뭐해요?”
우연이었다. 집에 있던 정령의 아이들은 잠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은아가 앞장을 섰다. 우연은 짐을 두고 그대로 일행에 합류했다.

적극적으로 앞서 나오기는 했지만,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랐다. 하루는 건물을 빠져나와 잠시 멍청하니 서있었다. 뒤따라 나온 이들이 이쪽이라며 가리키는 방향으로 따라가자 동그란 차가 하나 있었다. 연한 푸른색을 띄는 차는 다소 좁아보였지만, 다섯이 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운전석에 은아가 탔다.
“타세요.”
미래가 등을 떠밀었다. 하루는 잠시 고민했다.
“여기 다같이 타는 거예요?”
미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저는 안 가요. 다녀오세요.”
하루가 잠시 말을 잃은 사이 세 사람이 착석했다. 조수석에서 고개를 빠꼼 내민 잎새가 속삭이듯 말했다.
“하루, 타.”
하루는 미래를 한 번 쳐다보고 잎새를 한 번 쳐다보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루가 타자 차가 출발했다. 우연이 미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차가 출발하자마자 우연이 물었다.
“이야기는 다 들은 건가요?”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뜬 얼굴이 어쩐지 기대에 차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면서 하루가 대답했다.
“아마도요? 저는 모르죠.”
“저희 부탁을 수락하신 건가요?”
“네.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요.”
하루가 편하게 대답했다. 우연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럼 지금 어디 가는 지도 알겠네요?”
“돌 찾으러 가는 거 아니에요?”
맞아요! 잔뜩 격양된 목소리로 우연이 말했다. 뺨이 발그레하게 붉어진 것이 어지간히 신난 게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결정한 거예요? 저희 이야기 정말로 다 믿는 거죠?”
어…. 하루가 눈을 깜빡였다.
글쎄. 믿나? 그렇게 물으니 어려웠다. 믿는다 안 믿는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루는 그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를 생각했을 뿐이다. 별로 어렵지 않았고,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여기 어울리면 재밌을 것 같았다. 그게 다였다.
“아마도…요.”
눈을 끔뻑이며 대답하자 우연이 손을 모아쥐며 활짝 웃었다. 그렇게 좋은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뭐, 좋아하면 좋지.
“하루양이라면 승낙해줄 줄 알았어요. 고마워요.”
“아뇨. 별 것도 아닌데요….”
이렇게까지 기뻐하니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신종 사이비 종교에 걸린 게 아닐까? 처음 잎새를 따라갈 때 들었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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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생각했다. 세상에. 아무래도 영화 속에 들어온 게 틀림없었다. 한국에 숨겨진 작은 마을이 있고 거기에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같은 학교 학생이래. 어느날 갑자기 버스 추락 사고로 이세계에 전생해도 이보다 놀랍지는 않겠다.
그래서 하루는 제 팔을 꼬집어보았다. 겁나니까 세게는 아니고 살짝.
“아오.”
아프다. 그럼 꿈은 아니라는 건데.
우연과 미래가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며 웃었다. 하루는 머쓱해 뒷머리를 긁었다.
“제가 알아들은 게 맞다면 세상에 정령이라는 게 있단 거지요?”
“그렇게 부르고 싶지는 않지만, 네. 맞아요. 제가 보는 끈이란 것도 조금 특수한 종류일 뿐 그 일부니까요.”
사람과 사람 혹은 사람과 사물 사이를 잇는 영(靈)이라고 하면 좋을까요, 라며 우연이 덧붙였다.
“그런 것에도 영혼이 있군요.”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투로 하루가 말했다.
“무당들이 바로 그 목소리를 듣는 거예요. 저는 그걸 눈에 보이는 형체로 보는 것뿐이고요. 그 끝에 걸린 사람 자체를 신으로 섬기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건 전 잘 모르겠네요.”
제 눈에 그저 사람들이 모두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보이니까요.
우연의 담담한 목소리에 하루가 갸웃거렸다.
“그럼 우연씨는 항상 눈 앞이 온통 거미줄 같겠네요? 불편하지 않으세요?”
아, 하며 우연이 웃는다.
“그렇진 않아요. 집중하지 않으면 흐려지거든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주의가 산만하긴 해요.”
저희끼리는 다 비슷해서요.
‘그렇지?’하고 우연이 미래를 바라보았다. 미래는 ‘아무래도.’라며 얼버무렸다.
“계속 신경쓰고 있지 않으면 엉뚱한 목소리에 답을 하거나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 걸 잡으려고 할 때가 있거든요. 그러다보니 밖에 나와서는 산만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지금이야 적응했지만 다들 한 번씩은 힘들어했던 시기가 있네요.”
우연이 말을 마치고 목을 축였다. 그제서야 정신이 든 하루도 휴대폰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저런.”
미래가 안쓰럽다는 듯 중얼거리고, 하루가 허둥지둥 가방을 챙겼다. 부재중 전화가 7통. 난 죽었다.
“감사했습니다! 저 가볼게요!”
“다음에는 시간 여유있을 때 와요. 식사라도 대접할게요.”
하루를 마중하며 미래가 말했다. 뒤에 선 우연이 손을 흔들었다. 잎새는 두 사람에게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하루는 그게 아쉬웠지만 발길을 멈출 수는 없었다. 다음 전화가 오기 전에 먼저 전화를 걸어야했다.

시간은 흐른다. 아무리 하루가 성실하지 않는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다고는 해도 수험생이었다. 학교와 학원으로 빼곡한 시간표에 비일상의 신비가 스며들 틈이 없었다. 잎새와는 이따금 쉬는 시간에 만나 이야기를 하곤 했지만, 이 애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과묵해서 한껏 부푼 호기심을 채울 수가 없었다.
이런 식이다.
“마을을 구해달라는 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무슨 위험이나 위기가 있는 거야?”
“응.”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글쎄.”
순진한 눈망울에 한숨을 푹 내쉰 하루가 기지개를 쭈욱 폈다. 두 사람은 더위를 감수하고 사람이 드문 벤치에 앉아있었다. 뒤늦게 알게 된 거지만 잎새는 조심성이라고는 없는 아이였다. 사람이 있건 없건 아무 때나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해서 붙잡고 주의를 줘야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래서야 지금까지 들키지 않은 게 아니라 다들 보고도 못 믿은 게 틀림없었다.
“미래씨랑 우연씨도 걱정이 많겠다.”
왜? 라고 묻는 듯한 얼굴로 잎새가 하루를 바라보았다. 하루는 피식 웃으며 잎새의 머리를 헝클었다. 잎새는 얌전히 손길을 받아들이곤 손이 치워지자 눈 앞을 가리는 머리카락만 대충 치웠다. 하루는 그걸 보며 낄낄거린 후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주말에 놀러가도 돼?”
“응.”
잎새가 고개까지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하루가 웃으며 잎새를 끌어안았다. 에구, 귀여운 거. 잎새가 몸을 조금 움츠렸다가 팔을 뻗어 마주 끌어안는다. 하루가 장난스레 웃으며 꽉 힘주어 끌어안자 잎새가 허둥거렸다. 다시 깔깔 웃으며 놓아준다.
“그럼 내일 봐.”
하루가 손을 반짝반짝 흔들었다. 잎새가 어색하게 따라하곤 달아나듯 뛰어 건물로 들어갔다.

그 주 토요일, 하루는 아침 일찍 약속 장소로 향했다. 휴대폰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잎새 덕분에 간신히 잡은 약속이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생각하고 느긋하게 있었더라면 만나지 못 했을 것을 다행인지 불행인지 미리 연락처를 받아두지 않은 덕에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전화만 겨우 받을 줄 알고 제 연락처도 기억하지 못 하는 걸 보고 할머니가 절로 떠올랐더랬다. 요즘 애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새삼스럽게 신기한 애라고 생각하며 하루는 흥얼흥얼 길을 걸었다.
오늘은 드디어 호기심을 푸는 날이다. 잎새와의 답답한 대화도 끝이었다. 잎새와 친구가 된 건 좋지만 그 애는 결코 좋은 대화 상대가 아니었다. 모든 대화가 단답이나 몸짓으로 끝나는 사람이 어딨어요, 세상에! 그런데 그런 사람이 옆에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친구들이 꼬시는 것도 다 물리치고 노는 건데 너무하지 않아? 하루는 피식 웃었다. 어쩌면 잎새는 그런 점까지 매력일지도 모른다.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기이함이 좋았다. 얼마나 좋은지 근래 잎새와 어울리느라 친구들에게 짜증 섞인 불평을 들어도 그렇게 서운하지가 않았다. 이전이었다면 제법 상처를 받았을 법한데, 잎새를 만나면서부터 세상이 180도 달라진 느낌이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잎새가 먼저 나와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약속 시간이 되기까지 15분은 남아있었다.
“언제 왔어?”
잎새가 고개를 갸웃했다. 모른다는 뜻이리라. 하루는 어깨를 으쓱했다.
“가자.”
“응.”
잎새가 앞장서고 하루가 뒤따른다. 다시 한 번 두 사람이 길을 나선다. 자그만 잎새의 머리칼이 하늘하늘 흔들리고 뜨거운 공기가 흐른다. 하루는 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다는 이유 모를 환상에 휩싸였다.
“하루양?”
의아한 낯으로 걱정스레 자신을 쳐다보는 미래와 마주할 때까지.

잎새의 뒷모습만 보고 걷다보니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있었다. 분명한 건 저번과는 다른 장소라는 것이었다. 이번에 도착한 곳은 저번의 그 집보다 조금 넓었고, 훨씬 삭막했다. 식물이라곤 하나도 없고, 그저 책, 그리고 또 책 뿐이었다. 책으로 가득찬 건 아니지만 책 말곤 있는 게 없었다. 하루는 어리둥절한 채로 집에 들어섰다. 잎새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우연이는 조금 늦어요. 편히 앉아요.”
우리집도 아니지만, 하고 미래가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편해보인다. 하루는 조금 당황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미래씨. 저번에 하던 이야기 말인데요.”
안내받은 대로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하루가 꺼낸 말이었다. 미래가 실소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얘기해줄 사람이 올테니까.”
그 말은 사실이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굳게 닫혀있던 방문이 열리고 사람이 나타났다. 사납다고 느낄만큼 형형한 눈빛이 인상적인 여자였다.
“저 사람이야?”
그가 물었다. 미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해, 하루씨야. 잎새 친구분.”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씨, 이쪽은 은아예요. 임 은아.”
“처음 뵙겠습니다.”
하루가 고개를 숙였다. 은아가 식탁 반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쏘아보는 듯한 시선이 매서웠다. 하루는 슬쩍 미래를 보았다가 난감하게 웃는 얼굴을 보곤 다시 당당하게 은아를 마주보았다. 은아는 말없이 그대로 하루를 노려보다가 자세를 조금 바꾸었다.
“친구들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잎새가 당신을 데려왔다고요.”
“데려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같이 놀기로 해서요.”
은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신이 조금 특별하다고 들었는데요.”
“그렇대요.”
하루가 아무렇잖게 말했다. 은아의 얼굴이 점점 굳어가는 것을 본 미래가 안절부절 못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료수 가져올게.”
은아가 어찌나 화난 것처럼 보이는지, 하루는 자기가 뭘 잘못했나 잠시 고민해보았다. 당연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이제 막 만나서 인사했을 뿐이니 잘못이랄 게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숙이고 들어갈 필요 있나.
“잎새는 아직 어려요. 게다가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편이죠.”
“네?”
저보다 한 살 밖에 안 어린데요. 황당해하는 하루의 반문에 은아는 잠시 말을 멈춘다. 미래가 건넨 물 한 잔을 받아들고서 깊게 한숨을 내쉰다.
“당신이 나설 문제가 아니에요. 그 말을 하려고 했어요.”
“다른 분들은 아닌 거 같던데요.”
하루가 불퉁하게 말했다.
“어디까지 참견할 생각인데요? 수험을 포기하고 집을 떠나기라도 할 건가요?”
“그건 들어봐야 알죠.”
결국 하루가 짜증을 냈다.
“은아야.”
미래가 조용히 불렀다. 은아가 입술을 꾹 깨문다.
“그럼 들려줄게요.”
은아가 차갑게 얼어붙은 눈으로 하루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루는 삐딱하게 앉은 채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나영도는 한때 정령의 섬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지금이나 그때나 한적한 시골이긴 마찬가지였지만 조금 더 신성하게 여겨진 적이 있다나 뭐라나. 아직 서양의 과학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전의 일이었다.
그때까지만해도 섬 사람들은 섬 밖으로 멀리 나가서도 그들이 목소리를 듣고 신비한 힘을 행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영도 사람들은 섬에서는 일개 서민이지만 섬 밖에 나가면 어지간한 무당보다 신비로운 존재였다.
그 힘이 약해지기 시작한 건 정확히 일제 치하의 일이다. 일본이 무엇을 잘했고 못 했고를 떠난 문제였다. 일본이 국토를 해치기 시작하면서부터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어쩌면 단순히 국토의 문제가 아닐지도 몰랐다. 그저 그들의 힘이 약해진 것이 모든 것의 원인인지도.
분명한 것은 섬에서 벗어나면 그들의 목소리가 점차 들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떠난 사람부터, 조금씩 가까운 곳으로 영역이 줄어들었다. 요즘은 섬에 사는 주민 중에도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사실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게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시절이 갈수록 섬 사람들의 독특함은 그들을 사회에서 유리시켰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부릴 수 없는 것을 부리는 것을 좋게 보는 사람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규격에 맞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목소리가 섬 내부에서도 점점 커졌다. 그래서 섬을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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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침묵이 흘렀다. 우연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심각하게 노려보다가 고개를 들어 하루를 보았다.
“당신이이 여기 온 것도 우연은 아닐 거예요. 어쩌면….”
눈을 감는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침묵한 우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루양이 원한다면 모든 걸 이야기해줄게요. 우리들의 이상한 힘에 대해서도, 그리고 어쩌면 당신에게 닥칠지 모르는 운명에 대해서도.”
바람이 불었다. 이번에는 하루의 마음 속에서 부는 바람이었다. 왠지 파도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우연의 집은 동네에서 거리가 좀 떨어진 외딴 곳이었다. 정확히는 우연의 스승이자 현시점 보호자인 현철의 집이다. 우연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부터 현철의 집에 드나들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동안에만 해도 학교가 파한 후 저녁을 먹기 전까지 시간을 보내거나 주말을 함께 보내는 게 전부였으나 중학교에 올라가고 나서부터는 함께 살게 되었다. 반 정도는 우연의 사정 때문이었고, 나머지 반 정도는 현철을 걱정한 어른들의 안배였다.
현철을 처음 본 게 언제적 일이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우연은 아마 제가 태어나자마자 그가 찾아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현철 성격에 결코 스스로 원해서는 아니겠지만 그것이 현철의 의무였으니까.
우연이 혼자서 나다닐 수 있게 되자마자 현철의 집에 매일 찾아간 것처럼, 우연이 혼자서 돌아다닐 수 없는 미취학 아동 시절에는 매일 현철이 우연의 집에 찾아오곤 했었다. 빠지는 날은 거의 없었다. 우연에게 현철의 얼굴은 부모만큼이나 익숙했다. 그는 매일 찾아와 우연이 꼬아놓은 끈들을 풀고, 때로는 끊어놓은 끈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린아이 눈에 반짝이는 끈들은 좋은 장난감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걸 만지는 게 위험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부모님이 이혼한 뒤였다. 어린 우연이 아무것도 모르고 얽어놓은 끈들은 당연하게도 우연에게서 가장 가까운 이들의 것이었다. 잦은 싸움, 닳고 닳아서 가늘어진 끈과 숨 죽이고 결과를 기다려야만 했던 순간들.
부모님의 이혼이 결정되고 나서 우연은 현철 앞에서 펑펑 울었다. 내 탓이냐고 물었다. 현철은 깊게 한숨을 쉬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대답했다. 아니다. 그 대답으로 충분했다. 모든 게 우연의 잘못이었다. 우연은 그날부터 부모님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한동안은 부모님을 만나지도 않았다. 현철의 집에서 울며 잠드는 날이 많아졌다.
어른들은 우연을 보며 혀를 찼다. 부모님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인연의 아이가 태어난 가정은 불행해진다. 부모님이 이혼한지 한참이 지나서, 더는 밤마다 눈물이 나지 않게 된 어느날 들은 말이었다. 현철과 마을 어른의 대화였다. 그 후로 우연은 눈물을 잃어버렸다. 모든 게 자신의 탓이었다. 타고나길 그렇게 났다. 가식적인 눈물은 그만 흘리자. 그렇게 생각했다.
대신 우연은 친구들 사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되도록 인연의 끈은 건드리지 않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손을 대었다. 위아래를 모르고 까부는 또래의 장난꾸러기들에게는 말과 행동만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우연이 통제력을 손에 넣은 것만으로도 교실은 평화를 찾았다. 이따금 소란이 일기는 했지만 전처럼 요절복통은 아니었다. 조그만 교실 안에서 뜬금없이 불이 난다거나 폭풍이 휘몰아치는 일은 사라졌으니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선생님은 우연을 안쓰러워하면서도 고맙게 여겼다. 우연의 가슴 한 구석에 피어난 죄책감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좋았다.
현철이 여느 때처럼 우연의 앞에 술상을 차려놓고 안주도 없이 속을 버리던 어느 저녁이었다. 빨간 노을이 창틀을 넘었다. 우연은 현철의 얼굴이 붉어진 것이 술기운 탓인지 노을 탓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삼촌.”
우연이 불렀다.
“어.”
현철이 대답했다. 우연은 잠시 뜸을 들이다 물었다.
“삼촌도 가족이 없어요?”
“어.”
현철은 우연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고, 우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삼촌도 그랬어요?”
“어.”
카. 현철은 독한 소주를 단번에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렇구나.”
우연이 중얼거렸다. 그 뒤로 우연은 결코 현철에게 술을 줄이라는 잔소리를 입에 담지 않았다.

하루는 결연한 얼굴을 한 우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잘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 보는 잎새를 덥석 따라나선 것도, 낯선 이들의 낯선 행동에 이렇게 귀를 기울이며 앉아있는 것도. 그런데도 하루는 이 모든 게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저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루하루 지루하기만 하던 나날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하루는,
“말해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할게요.”
망설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날부터다. 우연이 삶에서 현실감을 느끼지 못 하게 된 것은.
처음에는 약간의 전능감을 느끼기도 했다. 끈. 그거 하나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일이니까. 그러나 이것을 통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시도한 모든 일들이 실패로 돌아갔다. 혹은 전혀 예상치 못한 부차적인 결과를 들고 왔다. 그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죽어!”
눈을 시뻘겋게 뜬 은아가 이를 갈며 외쳤다. 창문에는 서리가 끼고, 당장이라도 덤벼들 듯 허우적거리는 은아를 붙든 이들의 손 끝이 파랗게 멀어붙었다.
건너편에 선, 그러니까 은아가 덤벼들려고 하는 상대인 서담 쪽에서는 반대로 뜨거운 열기가 솟고 있었다. 은아의 냉기보다는 덜 격렬하지만 충분히 뜨거움이 느껴지는 온도로 공기가 들끓었다. 덕분에 교실 안에는 바람이 휘돌기 시작했다. 미래가 황급히 창문을 닫았다. 휘몰아치려던 바람이 조금 얌전해졌다. 우연은 얼굴을 감싸쥐고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겨우 가라앉혔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다. 그냥, 그냥 조금. 은아와 잎새의 거리를 줄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끈은 튼튼하고 굵었지만 은아가 너무 끌려다니는 경향이 있어서 잎새 쪽의 끈을 조금 잡아당겼을 뿐이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우연은 몰랐다. 그러니 그저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연에겐 보인다. 은아와 서담 사이의 뒤엉킨 실들 사이에는 원래 저 끈이 섞여있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얽힌 건지 모르겠을 정도로 단단히 꼬여버린 두 끈 사이에 하나의 새로운 끈이 걸려 있었다. 잎새와 은아 사이를 연결하는 끈이었다. 이 일은 틀림없이 커질 것이다. 그런 예감, 아니, 경험에 의한 확신이 들었다.

우연은 하루의 대답이 무척 기뻤지만, 동시에 당혹스러웠다. 대체 하루라는 이 아이가 무슨 생각인지도 알 수 없었고, 그 이전에 외부인에게 자신들의 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도 몰랐다. 믿어서는 안 된다는 상식적인 판단과 이 끈은 믿어도 된다는 경험적인 판단이 부딪혔다. 머릿속이 쉽게 정리가 되지 않았다.
“하루양의 믿음은 옳아요.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그것들은 의지를 가지고 있고, 지성도 있지요. 네, 살아있어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지만 그 무엇보다 당연한 모양으로요.”
말을 하면서도 생각한다. 이게 무슨 소리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요정이니 도깨비니 하는 것들은 정확한 설명이 되지 못 한다. 굳이 따지자면 정령이겠지만….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니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 질문해주세요.”
네. 씩씩한 대답이 뒤따랐다. 우연은 한숨처럼 웃어버렸다.
“바람에도 목소리가 있고 물에도 뜻이 있지요. 우리 마을에는 그걸 들을 수 있는 사람이 한 세대에 하나씩은 꼭 있어왔어요. 대충 이십년에 한 번씩이었죠.”
그 정도는 아니라도 어느정도 대부분은 자연과 친해요. 말이 이상하지만….
우연이 망설이는 톤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하루양이 느끼고 있을 기이한 끌림을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줄곧 느끼고 있다고 하면 조금은 이해가 갈까요.”
마치 하루의 마음 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우연은 그렇게 말했다. 하루는 눈만 끔뻑였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방어적이에요. 아무래도 외부인들과는 소통하기 힘들거든요. 외부인은 이해할 수 없고,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지금도 그래요, 라고 우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루양.”
“네.”
“우리 마을을 구해주세요.”
우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령. 만물의 근원을 이룬다는 신령스러운 기운 또는 산천초목이나 무생물에 깃들어있는 혼령을 이른다. 나영도(島)와 줄곧 함께 해온 것은 그런 것이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몰랐다. 마을에 남은 기록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조선시대 것이었지만, 그때가 시작은 아니었다. 분명한 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과 이십여년에 한 번씩 유독 그들의 사랑을 받는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이다. 마을에서는 그 아이들을 ‘정령의 아이’라고 불렀다.
사람도 몇 없는 마을이다. 마을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언제고 한 손에 꼽혔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도시로 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따금 돌아오는 경우가 있기는 했다. 바로 정령의 아이를 낳은 부모였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섬을 벗어나면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다. 때로 그들과 유난히 친밀해서 뭔가 부탁을 하고 특수한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섬 바로 근처까지는 몰라도 멀리 나가면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을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서는 간혹 정령의 아이가 태어나곤 했다. 그런 아이들은 섬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이의 주변에서 자꾸만 이상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미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부모는 아이를 감당하지 못 했다. 대부분은 위탁이라는 이름으로 마을에 아이를 맡겼고, 극히 일부는 돌아왔고, 나머지는 아이를 버렸다.
아이들은 어리면 어릴수록 사람의 목소리보다 그들의 목소리를 가깝게 들었다. 사람의 말이 그들의 목소리에 묻혀서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나 불의 아이인 서담과 물의 아이인 은아가 심했다. 그 애들이 타인의 말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된 것은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의 일이었다.
아마 바람의 아이인 잎새도 그랬을 테지만 우연은 잘 몰랐다. 그 애는 정말로 다른 사람과 교류라는 걸 하지 않았으니까. 잎새는 오로지 은아와만 이야기하고 은아와만 눈으르 맞추는, 지독히 폐쇄적인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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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바람이 불었다. 그때도, 이번에도. 조금 이상한 바람이.
하루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칼이 뺨을 간지럽혔다. 못 박힌 시선은 잎새를 향해있다. 흔들린다. 머리카락이. 그리고.
“다들 네가 좋대.”
속삭인다.
바람의 목소리였다. 하루의 눈이 흔들렸다.

폭풍이 가까운 밤이었다. 우연은 그리 넓지 않은 탁자 위에 찻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물을 끓이고, 다기를 데우고, 차를 덜고, 우린다. 따른다. 천천히 입에 가져다 댄다. 향을 맡는다. 뜨거운 김을 한숨 식히고 호로록 빨아들인다. 뜨겁다.
“하아.”
긴 숨이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슬픈 눈이 출입문을 향한다. 굳게 닫힌 문짝은 움직일 기미가 없다. 우연은 빈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차를 따랐다. 오늘도 당신은 돌아오지 않는구나.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이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은 무겁고 또 외로운 일이었다. 그 무게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생각일 뿐. 익숙해질만하면 늘어나는 무게에 어깨는 쳐지기만 한다. 우연은 찻잔을 들어 향을 맡고는 그대로 내려놓는다. 유난히 기다림이 버거운 밤이었다.
끝 모를 버거움을 알기에 우연은 은아를 탓하지 않았다. 으르렁거리는 바다의 울부짖음도,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폭풍우도 이 마음에 비하면 잔잔할 터였다.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관계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두려움의 파도는 높고 거셌다.
오늘은 또 얼마나 늦게 들어오려나.
우연은 다시 찻잔을 입에 댔다. 따끈한 물이 입술을 넘어가 목구멍을 데웠다. 속이 서서히 따뜻해진다.
긴 밤이었다. 결국 우연은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거실로 나왔다. 널부러진 그가 보였다. 어제도 얼마나 마셨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우연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불을 올렸다. 끓여둔 국에서 보글보글 소리가 나면서 맛있는 냄새가 퍼졌다. 그가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물….”
우연이 미리 준비해둔 물잔을 건네었다. 그가 푸석한 얼굴로 물을 마셨다.
“저녁 먹고 들어올거야.”
“…왜?”
“마을 어른들하고 식사하기로 했어.”
“나는?”
“오고 싶으면 오래.”
그는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가 눈만 몇번 꿈뻑거리고는 식탁에 앉았다. 우연은 그가 힘없는 몸짓으로 수저를 드는 것을 보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갈 준비를 마치고 다시 거실로 나오자 그는 밥그릇을 비우고 물을 마시고 있었다. 희미하게 돌아온 생기에 우연은 작게 웃고는 집을 나섰다.
“다녀올게요.”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잎새가 하루를 보고 웃었다. 벌써 두 번째 일이었다. 왜 이렇게 매번 심장이 떨리는 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는 잎새의 가느스름해진 눈과 발그레한 뺨, 둥글게 말린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리고.
“어머.”
조그만 목소리가 하루를 깨웠다. 미래가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너 웃기도 하는구나?”
미래가 감탄인지 어이없어하는 건지 분간하기 힘든 어조로 말했다. 곧장 잎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깜빡. 눈동자가 왼쪽으로 돌아갔다가. 깜빡.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응….”
평소보다 한층 더 속살거리는 대답이었다.
하루는 미래의 놀란 얼굴과 수줍은 듯 내리깐 잎새의 눈꺼풀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웃어버렸다. 그렇구나. 이 애 잘 웃는 편이 아니구나. 그게 왠지 기뻐서 함께 수줍어졌다.
미래가 한참 잎새의 얼굴을 살피는 사이 발소리가 들렸다. 집을 향해 올라오는 소리였다. 잠시 후 삐록거리는 도어락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미래가 일어나 반기고 하루도 일어나려다 미래의 제지에 주저앉았다.
색소가 연한 머리칼을 어깨까지 길러 단정하게 묶은 여자가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 반팔 티셔츠와 청바지를 걸친 편안한 차림에 배낭을 매고 있었다. 손님을 보자마자 가느스름히 휘어지는 눈이 유독 크고 둥글었다.
“안녕하세요?”
낯을 전혀 가리지 않는 듯 목소리는 친근했다.
“잎새 친구분이야. 은하루양.”
미래가 말했다.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여자가 하루를 향해 웃었다.
“저는 우연이에요. 정 우연. 반가워요.”
짐만 놓고 오겠다며 우연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미래가 빈 잔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집 주인들이 바지런히 움직이는 사이 하루는 잎새를 관찰했다. 그 애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루는 웃어보였다. 곧 우연이 다가왔다.
“저 애가 친구를 데려올 줄은 몰랐어요. 같은 반…은 아닌 것 같고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우연이 하루의 명찰을 보고 급하게 말을 바꾸었다. 멋쩍은 듯 웃는 낯이 친근했다. 미래가 쥬스 잔을 하나 더 들고 와 앉았다.
“아, 저는….”
대답을 하려고 보니 할 말이 궁색했다. 하루는 머뭇거렸다. 어제 만난 사인데요. 서로 아무것도 몰라요. 평소처럼 편하게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 참았다. 그리고 잠시 돌이킨다. 어제 만나서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된 게, 어쩌다 이렇게 된 거더라?

어제, 바람이 윙윙대던 그 때 이후의 일이다.
“나는 잎새야. 잘 부탁해.”
그렇게 말하며 웃는 잎새 앞에서 하루는 멍하니 서있었더랬다. 바람이 그렇게 부는데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도 신기했고 사람이 공중에 뜬 모습도 신기했지만, 가장 신기한 것은 왠지 이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자신이었다. 왜일까. 하루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어처구니 없을 만도 한데 왠지 그렇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하루는 잠시 고민하다가 손을 내밀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잎새가 그 손을 잡았다. 바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떠오른 잎새의 발도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찢어질 듯이 휘날리던 옷자락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윙윙거리는 소리도 줄어들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눈을 맞춘 채 서있었다.
“어때?”
하루가 물었다.
“뭐가?”
잎새가 되물었다.
“나는 거.”
하루가 대답했다.
“좋아.”
잎새가 배시시 웃었다.
“좋겠다.”
하루가 말했다. 잎새는 웃었다. 그 말이 기분 좋다는 듯이 줄곧.
그대로 손을 잡고 두 사람은 걸었다. 잎새는 인적이 드문 길을 잘 알았다. 이끄는 대로 가니 거의 사람이 없는 길로만 가게 되었다. 그 애는 걷는 도중에 이따금 중얼거렸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었으며, 허공을 쳐다보았지만, 하루는 거기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 행동들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걸어서 도착한 곳은 하루의 집앞이었다. 잎새가 손을 놓았다. 하루는 다급하게 다시 붙들었다. 어리둥절한 눈빛이 와닿았다.
“다시 볼 수 있는 거지?”
잎새가 갸웃했다.
“도와줄거야?”
무슨 말인지는 이해하지 못 했다. 하지만 끄덕였다. 그 말에 끄덕이지 않으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응. 도와줄게.”
잎새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2교시 끝나고 거기에서.
잎새가 속삭였다. 바람의 속삭임이었다.

“팬이에요.”
하루가 말했다. 미래와 우연의 눈이 커다래졌다. 저런 미인의 놀란 얼굴을 하루에 두 번이나 볼 수 있다니 귀한 일이라고 하루는 생각했다. 그렇게 따지면 애초에 미래를 만난 것부터가 엄청난 행운이긴 하겠지만.
“팬이요?”
우연이 물었다. 하루는 어깨를 으쓱했다.
“만난지 하루 됐고, 아무것도 모르고. 하지만 전 잎새가 마음에 들어요.”
그러니까 팬이에요, 라고 아무렇지 않은 듯 둘러댄다. 꽤나 그럴듯한 단어를 골랐다는 생각에 조금은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당당한 하루의 말에 미래와 우연은 서로를 잠시 쳐다보았다. 이게 무슨 소린지 알아? 아니, 몰라. 그런 대화가 눈빛으로 오갔다. 결국 미래와 우연의 시선이 다시 하루와 잎새를 향했다. 잎새는 지금 오가는 대화를 듣지 못하기라도 했다는 듯 태연했고, 하루도 만만찮게 당당했다.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요?”
우연이 물었다. 미래가 입을 때는 것과 동시에 하루가 말했다.
“우리 얘기 했어.”
“도와드리려고 왔어요.”
우연의 커다란 눈이 몇 번 깜빡이더니 이내 잔잔하게 웃음이 번졌다.
“뭐라고요, 하루양?”
“도와드리려고 왔어요.”
그 뒤를 이어 미래가 말했다.
“우리 얘기 했어.”
그래? 하며 우연이 자세를 바로했다. 여전히 웃는 낯이었지만 어딘가 깊어진 눈빛에 하루는 조금 긴장했다.
“어디까지 얘기했는데?”
미래는 고개를 저었다.
“별 얘기 안했어. 좀 보여드린 정도야.”
아. 우연이 짧게 탄성을 뱉더니 다시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뭐라 말하기 힘든 간극이 있었지만 이 자리에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미래가 조금 어색하게 웃기는 했지만, 적어도 하루는 신경쓰지 않았다.
“잎새 너는?”
우연이 물었다. 잎새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우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둘 다 나중에 얘기 좀 하자.”
그렇게 말한 우연이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하루를 바라보았다. 하루는 왠지 아까보다 태연해졌다. 왜였을까. 어쩐지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어제부터 그런 것이 너무 많았다.
“하루양은 믿으세요? 요정이나 도깨비, 유령, 그런 거요.”
우연이 물었다.
“네.”
하루가 대답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산타 할아버지도요?”
우연이 작게 웃었다. 하루도 웃었다.
“네.”
우연이 조금 킥킥거렸다. 하루는 더 웃지 않았다. 그 모습에 우연이 다시 웃음기를 거두었다.
“저는 안 믿어요. 산타 할아버지.”
우연이 말했다.
“왜요?”
하루의 질문이었다.
“한 번도 끈을 본 적이 없거든요.”
“끈?”
하루가 되물으며 흘긋 곁눈질을 했다. 미래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있었다. 여전히 잎새는 태연한 낯이었지만, 하루까지 태연하게 있기에는 분위기가 무서웠다.
우연은 살짝 시선을 내리깔고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더니 허공을 건드렸다. 우연의 손이 닿는 곳이 순간적으로 희게 빛나며 어떤 실 같은 것이 보이다가 사라졌다.
“이게 끈이에요. 나와 당신을 잇는 끈.”
우연이 말했다. 조금 슬픈 듯한 표정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굵고 튼튼하네요. 그리고 밝아요. 이유 없이 당신에게 호감을 느끼게 될 정도로.”
조금 낮아진 목소리에 하루는 입을 다물었다.
“당신에게로 이어진 끈이 많아요. 모두 굵고 탄탄하네요. 단순히 깊은 인연이라기엔 이상해요. 너무 많아요.”
우연의 손이 조금 더 허공을 맴돌았다. 스치는 자리에 이따금 아까처럼 빛이 보이며 실 같은 것이 스쳐갔다. 하루의 시선이 우연의 손을 따라 흘렀다.
“하루양은 어깨가 무겁겠어요.”
그렇게 속살거리듯 우연이 말했다.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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