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18'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4.02.18 [ 정령의 아이 ] 10화 - 돌의 목소리 1
  2. 2024.02.18 [ 정령의 아이 ] 9화 - 도심의 사막 3

걱정이 무색하게도, 늘 보던 그 장소에 도착하자 잎새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잘못된 장소로 갔어도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신출귀몰했다. 마음이 가는 곳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럴 리는 없지만.
하루는 손을 흔들었다. 잎새가 쫑쫑 뛰어왔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그만 웃고 만다. 그러다가 한참 거리를 두고 우뚝 멈춰선다. 어리둥절한 체 쳐다보다가 문득 깨닫는다.
아차, 돌.
하루는 손을 내려다보곤 괜히 등 뒤로 숨겨본다. 잎새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안녕.”
하루가 울상을 짓고 인사했다. 잎새는 그런 하루를 말끄러미 쳐다보다가 앞서 걸었다. 저번보다 거리가 한껏 멀어진 것이 아쉬워서 가슴이 허해진다.
잠깐의 산책 후 도착한 곳은 우연과 미래의 집이었다. 잎새가 손을 들어 하루를 세우고는 홀로 집으로 들어갔다. 서운한 마음에 입술을 삐죽이며 기다리고 있으니 우연이 나왔다. 뒤따라 빼꼼 잎새가 고개를 내민다.
“미안. 가까이 갈 수가 없어서 여기서 대화해도 괜찮을까?”
“네, 뭐….”
불만스러운 어투에 우연이 픽 하고 웃는다. 잎새가 뒤에서 눈을 깜빡이고, 그 얼굴에 마음을 가라앉힌 하루가 차분히 오늘 생긴 일들을 설명했다. 우연의 얼굴이 차츰 굳어갔다.
“이상하네요.”
“그쵸.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가요?”
“아뇨, 그게 이상한 게 아니에요.”
우연이 깊게 한숨을 뱉었다.
“하루양, 몸은 괜찮아요?”
네?
눈을 끔뻑인다.
“괜찮아요.”
“정말 이상해요. 그게 인체에 영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만약 있는 거라면…. 하루양은 왜 멀쩡할까요?”
하루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라, 그런가?
생각해보니 그랬다. 동생의 방은 하루의 방과 벽을 하나 두고 옆에 있다. 베란다는 하루 방 입구 근처에 있었다. 둘 다 하루의 방과 가까웠다. 하룻밤 사이에 탈이 난 곳이 모두 하루의 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손에 든 돌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평범한 까만 돌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까기 까만 돌을 주변에서 발견하기는 의외로 쉽지 않다는 점만 제외하면 이상할 것 없는 돌이었다. 하지만 하루는 기억한다. 이것을 처음 발견했을 때 뿜어져 나오던 기이한 빛을.
“하루양과 연결된 끈이 모두 느슨해졌어요.”
우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굵고 강하던 끈들이 모두 축 늘어졌어요. 옆에서 잎새가 속삭인다.
“바람이 멈췄어.”
“하루양의 존재가 옅어졌어요.”
우연과 잎새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톱니바퀴가 돌기 시작했다. 그래. 그랬구나. 수상했던 것들이 한 번에 짜맞춰졌다. 어제부터 기이할 정도로 사람들과 자주 부딪힌 것도, 인사를 받아주지 않던 가족들도, 유난히 조용한 밤이라고 느껴진 것도, 모두 이 돌덩어리 때문이었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은 거죠, 하루양?”
물어도 알 리 없었다. 하루는 이 기이한 돌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과 싸우기 시작했다.
상황이 급해졌다. 이걸 계속 집에 둘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도 없었다. 서울에만 이런 장소가 다섯은 된다는데 대체 그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 거야? 하루가 투덜거렸더니 옆에서 우연이 설명했다. 그런 곳에서 귀신이 들었단 소문이 나곤 하지요.
세 사람은 급히 은아의 집으로 왔다. 골목 건너 건너 정도로 가까워서 금방이었다. 오는 길에 우연이 전화를 해서 은아가 건물 앞에 나와있었다.
“어떻게 할래요?”
은아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하루가 대답했다.
모르겠다. 우연은 자신들의 마을로 함께 가자고 제안했지만, 동시에 망설였다. 마을은 멀었고 내일은 월요일이었다. 하루에게 선택권이 넘어왔다. 하지만 하루도 결정하지 못 했다. 고민이 깊어갔다.
어지간해선 입을 열지 않는 잎새를 제외한 세 사람, 은아와 우연, 하루가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우선은 은아의 차 트렁크에 보관하기로 했다. 빌라에는 화단이 없었고, 차고에서 밤을 지새우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대신 하루는 다음 주말에 함께 섬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부모님의 허락을 반드시 받아야한다는 문제가 남아있긴 했지만 마땅한 다른 대책이 없었다.

하루는 한 주를 붕 뜬 기분으로 날려보냈다. 잎새를 처음 만났던 순간처럼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쉬이 침착해지지가 않았다. 수험생이 수능 앞두고 잘 하는 짓이라며 몇 번이나 잔소리를 들었지만 결국 허락도 얻어냈다. 그치만요, 엄마. 내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다니까요? 물론 그렇게 말하진 않았다.
은아는 결국 그 주 내내 차를 움직이지 못 했다. 트렁크에 넣어뒀으므로 운전석에 앉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거부감이 들었단다. 그래서 결국 차를 버리다시피 방치해두었다는 이야기에 하루는 마음이 급해졌다. 얼른 돌을 내다 버리고 싶었다.
“그걸로 뭘 한다고 했지?”
“…그들에게 겁을 줄거야.”
잎새가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바다로 건너가 달라고 아무리 부탁해도 들어주지 않으니 약간 강압적인 수를 쓰는 거랬다. 베란다의 식물이 하루만에 시드는 모습을 본 하루로서는 정말 그게 ‘약간’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렇다는데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참고로 베란다의 식물들은 그 날 후로 열심히 회복하고 있었고, 동생의 감기는 하루가 떠나자마자 나아졌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걱정이 들었다. 이걸 가져다 정령들을 겁 주는 데다 쓴다고 치고, 그리고 그게 마을의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치자. 그럼 그 후에는? 이걸 다시 원래 자리에 돌려놓나? 바다에 던져버리나? 둘 다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도 식물도 살 수 없는 땅에서 뭐가 살 수 있을까. 아무리 영향을 끼치는 범위가 좁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해도 소용 없는 고민을 하는 사이 주말이 찾아왔다.
토요일 이른 아침에 일어나 은아의 집으로 갔다. 이번에도 미래가 빠지고 은아와 우연, 잎새가 함께 가기로 했다. 본래라면 다다음 주에나 내려가기로 되어있던 것을 땡겨 가는 것이었다.
트렁크에 실은 돌멩이를 한 차례 확인하고 차에 올랐다. 긴 여정이 준비되어 있었다. 차라리 기차에 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먼 길이었지만 사람이 많은 곳에 끼어있을 수가 없었다.
“그게 그런 식으로 발견될 줄은 몰랐어.”
우연이 말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잠시 어물거리는 사이 말이 이어졌다.
“돌 말이야. 당연히 그 자리에 그냥 있을 줄 알았거든.”
우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돌이켜보면 처음 발견했을 때도 그런 돌은 보지 못했는데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어.”
그게 또 이상하다고 우연이 말했다.
“그런 장소는 다 직접 발견한 거라고 했지?”
“맞아. 찾으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알 수 밖에 없었으니까.”
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돌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마을에 전해내려오는 노래가 있다고 우연이 말했다.
“이제는 문헌으로 밖에 남아있지 않아서 가락은 잊혀졌지만, 공인된 사료에 남아있는 거니까출처는 명확해.”
앞부분 몇 구절을 기억하고 있다며 우연이 중얼거리듯 읊조린다.

어디서 굴러왔나
검고 작은 돌멩이
빗발치는 아우성은
여기서 시작됐나
폭풍이 부네
파도가 치네

“대충 이랬던 것 같은데 좀 틀렸을거야.”
워낙 오래 전에 읽었다며 웃는다. 그러면서도 못내 표정이 불편한 것이 트렁크에 있는 돌덩이가 신경쓰이는 듯했다.
중간중간 휴게소에 들르고 네 시간 가까이 달려서야 겨우 섬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나마도 돌멩이를 가지고 타는 것이 불안해서 어떻게 섬에 들어갈지 격렬한 토론을 마친 후였다. 어차피 섬으로 갈 수단도 배 밖에 없었으니 무의미한 토론이었으나 결론은 났다. 은아가 있으니 괜찮다. 아무리 이게 위험해도 물의 아이인 은아를 두고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 거라는 게 세 사람의 의견이었다. 하루는 그렇구나, 하고 넘겼다. 바다에서 물의 아이가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아는 것은 세 사람 뿐이었다.
몸을 실은 것은 흔들림이 온 몸으로 느껴지는 쪽배였다. 근처 바다에 고기 잡으러 갈 때 쓰는 작은 배였지만 섬에 가기에는 충분했다. 섬은 육지에서 육안으로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배 타는 건 처음이네.”
배에 오르며 하루가 중얼거렸다. 혼잣말이었다.
“처음이야?”
잎새가 물었다.
“응. 이렇게까지 흔들리는구나.”
좀 불안하다며 하루가 웃었다. 앞서 배에 탄 잎새는 돌멩이를 든 하루와 조금 거리를 두고 서있었다. 둥근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걱정 마. 내가 지켜줄게.”
그렇게 말하는 잎새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믿음이 가는 동시에 가지 않았다. 돌맹이 때문이었다. 이걸 들고 있으면 근처에도 못 오면서 그렇게 말해도. 지금 상황은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하루는 별 말 없이 웃었다.
배는 금방 바다로 나갔다. 날씨도 좋았고 바다도 잔잔했다. 바다 한 중간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섬 쪽에서 갑작스런 돌풍이 몰아쳤다. 바다가 울렁이며 흔들렸다. 진동은 크지 않았으나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었고 한 손에 돌을 단단히 쥐고 있던 하루는 잡을 곳을 잃었다.
“은 하루!”
하루는 잎새가 저렇게 큰 소리도 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대로 물속에 잠겼다.
풍덩.
부르르르….

바닷속은 꽤나 시끄러운 곳이었다. 물에 가라앉는 하루의 고막으로 온갖 소리가 들려왔다.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이 뱉는 비명소리로 추정되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한 손에는 돌멩이를 꽉 움켜쥐고 하루는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떨어지는 순간 숨을 깊게 들이쉰 덕분에 아직 숨은 차지 않았다. 이제 발버둥쳐 나가면 된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바다가 그렇게 거친 것도 아니었다. 할 수 있었다. 하면 됐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하루는 들었다. 소음 속에서 전해지는 희미한 목소리를.
- 가지 마.
가지 말라는 애원을.
- 아직 안 돼. 가지 마.
애절한 부탁을.
- 제발 내 목소리를 들어줘!
그래. 들어줄게. 말해봐.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루는 바닷속 어둠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배 위에 남은 사람들의 허망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은아의 얼굴이 창백했다. 바다에 대고 소리치다가 무너지듯 주저앉은 잎새의 표정은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은아가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 기세여서 아무것도 모르는 배의 선장이 은아를 말리고 있었다.
“여기 얕아. 금방 나올 거야. 조금만 기다려.”
그럴 리 없었다. 은아는 알았다. 지금 저기 얕은 바다에 하루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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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였을까. 의심과 싸우던 하루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부모님과 함께 차 타고 멀리 나간다는 게 기뻐서 신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다. 그때의 하루는 꼭 우연처럼 눈을 빛냈었다. 이제는 멀어져버린 흐린 기억 속 추억.
그런 생각이 드니 왠지 우연이 나쁘게 보이지가 않았다. 어쩌면 신종 사기 수법일지도 모르지만 돈도 없고 나이도 어린 자길 데려다 뭐에 쓰겠는가. …까지 생각하고 보니 어쩌면 납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자신과 싸우고 있는 하루를 보고 우연이 키득거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제가 잘한 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요.”
흐음. 우연이 작게 신음했다.
“그러게요. 우연씨에게는 딱히 좋을 게 없는 일이네요.”
“납치만 아니면 좋겠어요.”
하루가 솔직하게 고백하자 우연이 다시 킥킥 웃었다.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군요?”
“네…. 좀 무서운 것도 같고.”
흘긋 운전대를 잡은 은아를 보고, 우연에게로 돌아온다. 피식 웃는다.
“이걸 제가 말하니 좀 웃기긴 하네요.”
“왜요?”
우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가자고 했거든요.”
하루는 그렇게 말하곤 의자에 등을 기댔다. 갑자기 방금까지 하던 모든 걱정이 바보 같아졌다. 그래, 내가 가자고 했었지. 난 뭘 걱정한 거람.
하루는 흘긋 잎새를 바라보았다. 저 애를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잎새는 존재 자체로 신비 그 자체였지만, 신기할 정도로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우연도 은아도 미래도 믿을 수 없지만 잎새는 믿을 수 있었다. 하루는 잎새를 통해 이 사람들을 믿기로 했다.
“하루양이 먼저 말씀해주셨군요. 그럴 거라곤 생각하지 못 했는데요.”
우연이 놀랍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하루는 빙긋이 웃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도로가 뒤로 힘차게 달려가고 있었다.
“제가 좀 행동파라서요. 그건 그렇고….”
“네?”
“전부터 궁금했는데 저한테 계속 존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존대하고 있기는 한데요.”
왜 그러시는 거예요?
하루가 물었다. 하루라고 꼭 나이가 어리면 말을 편하게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잎새는 처음 보자마자 말이 짧았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을 높이니 뭔가 이상했다.
“불편한가요?”
우연이 물었다.
“조금요.”
어쨌든 하루는 고등학생이다. 대학생이면 나이차가 많이 나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어른이었고, 하루는 어른에게 존대받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우연은 가만히 하루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 편하게 할게. 다른 친구들도 그렇게 해주는 게 낫겠어?”
“네.”
“그럼 하루도 편하게 말해주겠니?”
하루는 잠시 고민했다.
“응.”
한 번 더 고민한다.
“언니…?”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아.”
우연이 말했다. 하루가 어색하게 웃는다. 그게 더 힘들 것 같은데…. 머리를 한 번 긁적인다.
“알았어.”
이름을 잘 기억해둬야겠다. 하루는 생각했다.

우연과 대화하는 것도 다소 지루해질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차가 멈췄다. 하루로서는 처음 보는 장소였지만 그다지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 낮은 건물이 굴곡진 땅 위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낮고 창백했으며, 길이 좁았다.
다른 사람들을 따라 언덕을 올랐다. 빼곡한 집들 사이로 난 골목을 걸었다. 주말 오후 시간대의 주택가라 붐비지는 않았지만 인적이 드문 것도 아니었다.
“높네.”
하루가 말했다.
“응.”
잎새가 대답했다.
“좀 그러네.”
우연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얼마나 더 가야해?”
하루가 물었다.
“거의 다 왔어.”
은아가 말했다.
“저 골목.”
잎새가 가리킨다.
잎새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주변 집들에 비해 높은 건물이 있다. 오 층 가량 되는 깨끗한 건물이었다. 다가가보니 골목은 중간에 막혀있다. 흔한 건물과 건물 사이의 무의미한 틈이었다.
“…거기서 뭐해?”
골목을 다 살피고 돌아선 하루의 질문이었다. 멀찍이 선 세 사람이 하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가시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손을 팔랑거리던 잎새가 말했다.
“안 된대.”
“우리는 그 쪽으로 가기가 힘들어.”
우연은 미안한 표정이었다. 하루는 그제야 겨우 아까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다. 맞다. 가까이 가기 힘들다고 했지.
“그 안에 있을거야. 부탁할게.”
하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큼 골목에 들어선다. 아무것도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그늘에 들어서니 조금 서늘해졌을 뿐이다. 문제는…,
“돌멩이 같은 건 없어.”
골목은 너무 깨끗했다. 돌은 커녕 담배꽁초 하나 없다. 새로 지은 건물이라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모양이라고 하루는 생각했다. 뒤에서 은아와 우연이 당황하는 게 보였다.
“어떻게 해?”
하루가 물었다.
“그럴 리 없어.”
“분명 뭔가 있을 거야. 자세히 봐줘.”
은아와 우연의 말이었다. 하루는 고개를 저었다.
“거기서도 대충 보이잖아. 아무것도 없어.”
그 말은 부정할 수 없는지 두 사람이 조용해졌다. 심각해진 표정을 보니 안쓰러웠지만, 없는 걸 어쩌겠는가. 하루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골목을 둘러보고 나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신중하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본다. 어차피 보이는 건 없지만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시늉이라도 하자는 생각이었다. 반듯한 회색의 돌벽과 울퉁불퉁한 하얀 돌바닥의 대비가 낯익었다. 반대편에는 옆 건물 벽이 있고 정면에는 벽돌색 담장이 있다. 울퉁불퉁한 바닥 사이에 뭔가 껴있기는 했지만 자갈이나 먼지에 가까운 것을 가져다 달라고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한 바퀴 휘 둘러보고 나니 볼 게 없었다. 하루는 몸짓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표시를 했다. 은아와 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는 그대로 골목을 빠져나왔다.
아니, 빠져나오려고 했다.
골목에서 나오는 순간, 강렬한 예감 같은 것이 뇌리를 스쳤다. 하루는 뭔가에 잡아끌리듯 뒤를 돌아보았다. 있었다. 새카만 돌. 검게 빛이 나는 듯한 기이한 돌. 이런 것을 못 보고 지나쳤을 리가 없었다. 없던 것이 생겼다. 하루는 성큼성큼 다가가 돌을 집어들었다. 손에 들린 돌은 좀 검을 뿐 평범했다. 빛나던 것도 사라졌다. 이해할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이거다.
하루는 돌을 들고 돌아섰다. 세 사람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루를 보고 있었다. 하루는 자신있게 다가가 돌을 내밀었다.
“자.”
“이건….”
한 손에 꽉 차고도 남는 크기의 돌을 골목 한 가운데서 주웠다. 그 자리에 없던 것이 생겼다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은아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인상을 찌푸리고 잎새가 달아나듯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우연이 돌을 받아들려다가 손을 움켜쥐었다.
“미안. 잠깐 들고 있어줄래?”
하루는 그러겠다고 했다.
하루는 손에 쥔 돌을 가만 쳐다보았다. 검고 큰 돌멩이다. 표면이 거칠고 묵직하다. 이걸 어떡하면 좋을까. 고민한다. 아무래도 저들에게 넘기는 건 힘들어보이는데. 잠시 고민하는 사이 은아와 우연이 말을 맞췄는지 하루에게 조금 다가왔다. 겨우 대화하기에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였다.
“미안. 그걸 우리가 들고 갈 수는 없을 것 같아.”
미리 생각했어야 하는데 미안하다는 말이 이어졌다.
“괜찮으면 그걸 가지고 있어 줄래?”
하루는 별 생각 없이 그러마 했다. 설마 그게 이런 요절복통으로 이어질 줄은 모르고 내놓은 대답이었다.

돌멩이를 트렁크에 싣고 은아네 집으로 돌아와서 하루는 돌멩이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들고 가는 동안은 별 문제가 없었다. 몇 번 길 가던 사람들과 부딪힐 뻔 했을 뿐이다. 오늘따라 유난하네,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집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들어가며 인사를 했는데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집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아는 척하는 사람이 없는 게 이상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인사 좀 못할 수도 있지. 방에 들어가 돌덩이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날이 어두워 저녁 시간이 다 된지라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은데 엄마가 하루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언제 왔어?”
“아까 왔는데?”
세상에. 간 떨어질 뻔 했네. 엄마가 가슴을 끌어내렸다. 식탁에는 하루의 밥이 없었다. 하루는 직접 밥을 퍼와서 저녁 식사를 했다.
자고 일어난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다. 아침부터 엄마의 비명소리에 잠을 깼다. 졸린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가니 엄마의 서러운 목소리가 하루를 반겼다.
“얘들아.”
베란다에 있는 작은 정원에서 엄마가 주저앉아있었다.
“뭐야? 왜 이래?”
하룻밤 사이에 생기 넘치던 정원이 누렇게 죽어있었다. 하루도 깜짝 놀라 베란다로 나가 화분 상태를 살폈다. 파릇파릇하던 잎과 가지가 다양한 형상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나 감기 걸린 거 같아.”
뒤늦게 나온 동생이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배를 내놓고 잤나. 배탈 기미도 있다며 동생이 제 배를 어루만졌다. 하루는 엄마를 부축해 안으로 모시고, 동생에게 감기약을 챙겨주었다. 일요일에 여는 병원도 없으니 상비약으로 버텨야했다. 내일도 안 좋으면 병원에 가보자고 이야기하는 새 갑자기 돌멩이가 떠올랐다.
만물에 깃든 힘인 정령이 살기 힘든 땅. 거기에서 발견한 수상한 돌멩이.
동생이 감기에 걸린 것뿐이라면 의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건강하긴 하지만 여름 감기 정도야 운이 좀 나쁘면 누구라도 걸릴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엄마의 정원은 달랐다. 어제까지 생생하던 걸 분명 확인했다. 엄마가 물을 주면서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니까.
“나 잠깐 나갔다 올게.”
하루는 급하게 옷을 챙겨입었다.
“또 어디 가.”
엄마가 말했다.
“금방 올게!”
돌멩이를 챙겨서 구르듯 집안을 빠져나왔다. 내가 생각보다 큰 일을 맡아버린 게 아닐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들을 찾아가려고 했으나 은아의 집도 우연의 집도 정확히 위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작정 돌덩어리를 안고 집을 빠져나온 하루는 아파트 입구에서 고민하다가 잎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세 번째가 되어서야 겨우 전화를 받는다. 하루는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도 휴대폰을 두고 다닐 때가 대부분인 잎새니 밖에 있었으면 전화를 안 받았을 게 틀림없었다.
- 여보세요.
간신히 들리는 크기로 잎새가 말했다.
“지금 어디야?”
- 집.
“나 좀 데리러 와. 당장 할 얘기가 있어.”
- 응.
묻지도 않는다. 당연하다는 듯한 답 뒤로 전화가 끊겼다. 어디서 만날지도 정하지 않은 채 끊긴 전화에 잠시 황당했지만 매번 만나던 곳으로 간다. 거기가 아니면? 다시 연락해봐야지, 뭐. 태평스럽게 생각하며.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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