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情靈兒:前代'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8.19 [가브리엘] 꿈을 꾸었다.
  2. 2009.08.14 [가브리엘] 메르헨.

  식사를 제공받고 따뜻한 물에 몸을 씻을 수 있게 되자 그제야 살았다, 라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이 폐만 끼치는 비루한 생명이 그다지 오래살기를 바라지는 않았으나 살아있다는 당연한 본능인지 분에 넘치게 편안한 삶을 살아온 탓인지 저도 모르게 편한 것을 찾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쉬이 이곳을 떠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이것저것 베풀어준 미류씨와 풍룡 꼬마들에게는 미안하게 되었다. 당분간 계속 민폐를 끼치게 될 것 같은데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어서 거듭 사과하자 이 속 좋은 사람들은 큰소리로 경쾌하게 웃어버렸다. 그저 웃음소리만 들었을 뿐인데도 같이 웃게 되고 마는 밝은 사람들이었다.
  기운찬 아이들에게 이끌려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복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는데 집안을 이곳저곳 헤집고 다니게 되었다. 죄송한 마음에 슬쩍 미류씨 눈치를 보자 오히려 그는 젠이라는 아이에게 혼나고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옷에 이상한 거 묻히면 안돼."

  간신히 아이들에게서 벗어나 옷차림을 정돈하는데 제인이라는 발치에밖에 안오는 작은 아이가 옆에 와있었다.

  "아, 이건…, 더러운 게 아니예요. 옷에 바르는 것도 아니고요."
  "그럼?"

  고개를 기웃거리는 아이의 머리를 쓸어주자 아이가 헤헤, 소리내어 웃었다.

  "뭔가 냄새가 난다!"
  "박하향이예요. 시원하지요?"
  "응! 어떻게 나는 거야?!"
  "향수예요. 박하민트의 향을 담은거지요."
  "헤에―."

  자그마한 병을 보이자 섬세하게 세공되어 빛을 산란시키는 유리가 시선을 끌었던지 아이는 향수병에서 떼지 못했다. 아이에게 넘기니 작게 환호성을 질렀다. 가서 다른 아이들에게 보여주어도 되냐고 묻기에 고개를 끄덕였더니 작은 발을 놀려 포르르 방을 빠져나갔다.
  가방 깊숙히 손을 넣어 뒤지자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옷들을 헤치고 끌어낸 병에는 투명한 술이 반쯤 차 찰랑였다. 살짝 웃음이 피는 것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 살짝 문밖의 사정을 살피고 아무도 없는 새 조심스레 집을 빠져나왔다. 어쩐지 아이들이 많은 집에서 술을 꺼내는 것 자체가 범죄 같아 당당해질 수 없었다. 아마 금새 들어올 테니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잠깐 둘러본 것 뿐이었지만 이 작은 마을은 어딜가나 나무가 우거져 경치가 좋았다. 파릇한 풀위에 앉아 느긋하게 마시는 술은―, 안타깝게도 여전히 썼다. 코를 시큰하게 울리는 알콜 특유의 향에 인상이 자동으로 찌푸려졌다. 그래도 기분은 괜찮았다. 작게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가락을 흥얼거렸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지나가던 정령들이 기웃거리길래 인사하자 자연스럽게 같이 인사해왔다. 이 곳 정령들은 사람을 겁내지 않는구나. 친근하게 옆에 앉아서 말을 걸어오는 정령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가 제 갈길을 찾아간다. 하나가 떠나면 하나가 말을 걸어와 제법 오래 대화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결국 다들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조금 어둑어둑해진 듯해 미류씨나 젠이라거나 걱정하지 않을까 싶긴 했지만 나같은 걸 누가 일일히 기억하고 있겠어. 한모금 밖에 마시지 못한 술병을 다시 들었다. 크리스탈 잔에 또로록 떨어지는 방울이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 아름다웠다. 어차피 이 한잔 비우고 나면 제정신이 아니겠지만서도, 아무렴 어떠랴.
  쭈욱 들이켰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감각이 기분 좋았다. 벌러덩 드러누웠다가 한잔 더 마셔야지 싶어서 옆으로 돌아누웠다. 에, 술병을 어디다 뒀더라? 더듬더듬 더듬어 찾았다. 술병이 잡히자 안도감에 헤헤 웃어버렸다. 하지만 눈물이 나는 건 어째서? 훌쩍훌쩍 혼자 울다가 어느 샌가 까빡 그곳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미류씨께 잠깐 나왔노라고 말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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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루나.

  안녕, 루나. 결코 네게 보낼 수 없는 편지가 이로써 몇통째인지 모르겠구나. 용기라고는 네 예쁘게 다듬은 새끼 발톱만큼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이런 것 뿐이지. 이만큼 쓸 수 있는 것도 네가 볼 수 없기 때문이니까. 못본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넌 아직도 매력적 일거야. 눈앞에 아른아른 네 모습이 보이는 것 같구나.

  사실은 여행을 잠시 멈추게 되었어. 다시 시작하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여비도 슬슬 떨어져 가니까…. 잡일이라도 하고 싶지만 너도 잘 알다시피 나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결국 아무것도 안하느니만 못하게 될테니까. 사실 그래서 돌아갈 여유도 안되고 어딘가 머문다는 것도 불가능해서 이래저래 걱정이었는데 이 곳 사람들은 다들 마음씨가 좋아서 애보는 것만 좀 도와준다면 얼마든지 머물다 가도 좋다고 말해주었어. 산속에 고립된 마을인 탓일까, 다들 눈이 선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어. 이 마을 이름이 「코세르테르」래. 동화 속에 등장하던 전설의 도시. 처음에는 그냥 그 도시의 이름을 따서 세워진 마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놀랍게도. 어떻게 아냐고? 지금 내 옆에서 불만스러운 얼굴로 툴툴거리고 있는 꼬마아이가 용이래. 내 앞에서 날아다니는 걸 보았어. 신기하지 않나? 아까 다른 아이가 스승이라는 사람을 소개해 주었는데 용술사라더라. 일순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걸까 생각했단다. 너라면 그냥 웃어버릴 지도 모르겠지만….

  너도 친구들도 이곳에 올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우리가 함께 모여 공부하던 그 때처럼―. 하지만 무리겠지. 다들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무엇보다도 이 곳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모양이니까. 이렇게 평화로운 곳에서 다시 같이 지낼 수 있다면, 하고 자꾸만 아쉬움이 생긴다.  인간의 힘으로는 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험한 산세너머 자리잡은 전설의 장소에 모두를 초대하고 싶은데 말이지. 솔직히 그런 사실이 전혀 믿어지지 않는 평범한 시골 마을의 풍경이긴 하지만 말이야.

  마을에 관해서 바깥에 알려지면 곤란하다고 몇번이나 주의를 들었어. 소중한 아이들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다들 애쓰고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져. 나도 모르게 우리들의 고향이, 아니, 네게는 고향이 아니겠지만. 어쨌든 생각나 버리더라. 어쩌다 내가 이 곳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이것도 필시 무언가의 인연이겠지.

  그러니까 뭔가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 처음에는 그냥 엄청 높은 산이 옆에 있구나, 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나무가 많은 곳 특유의 생동감이 넘치는 산이었다. 아니 생동감이 넘치는 정도를 넘어 험하기가 과할 정도였다. 가브리엘은 멀리서 보던 까마득한 높이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일부에 침묵이 생긴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나 커다란 산이니 말이다. 가브리엘은 잠시 위쪽 오르막을 바라보다가 이내 눈앞의 상대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안녕?"

  베시시, 가브리엘은 어린아이마냥 헤설프게 웃었다. 바보같아 보였으려나, 걱정했지만 바람의 정령인 듯한 꼬마는 그저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빤히 그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손바닥만한 꼬마가 공중에 둥실둥실 뜬 체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지만―, 가브리엘은 '당신은 뭐야?'라고 묻는 듯한 시선에 결국 버티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아하하, 어색하게 소리내어 웃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몇일씩 관리하지 못해 부스스한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에 감겼다. 이거야 원, 애들이 보면 난리가 나겠는데. 머릿결이 조금만 상해도 호들갑스럽던 그녀들을 떠올리니 절대 그리워 할일은 없을 줄 알았던 집이 그리워졌다. 추억에 잠기는 것이 무서워 가브리엘은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타고 아이의 투명한 날개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가브리엘은 조심스레 손을 뻗다가 멈칫, 이내 거두었다. 닿기는 커녕 제대로 알아차리기에도 먼 거리에서 손을 물린 터라 바람의 정인 작은 아이는 그제야 깨닫고는 두 눈을 깜빡이며 가브리엘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포르르 날개를 흔들며 날아가버렸다. 가브리엘은 쓰게 웃으며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다시 발길을 떼었다. 일단 마을이 나와야 주린 배를 채울텐데, 하는 현실적인 생각만을 머리에 가득 담은 체.

  굶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현기증이 일었다. 가브리엘은 나무에 기대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뭇가지 너머로 보이는 파란 하늘은 엷은 흰 구름이 군데군데 깔린 것 외에는 도화지마냥 깨끗했다. 가을처럼 짙푸른색은 아니지만 저 엷은 쪽빛마저도 눈이 부셔서 가브리엘은 힘겹게 눈을 감았다. 어쩐지 몸이 무거웠다.

  '여기서 자면 안되는데…….'

  그리고 눈을 뜬 곳에서는,

  "스―승―님―! 손님이 일어났어요―!"
  "젠, 스승님이 또 요리해!"
  "말려야지~!"

  고양이마냥 길쭉한 세로 동공의 실버블루빛 두 눈을 바라보며 가브리엘은 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가 뾰로통하니 쏘아붙였다.

  "이봐요, 괜찮아요?"
  "아, 네…, 아마."
  "식사는 할 수 있겠어요?"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는 알았다는 듯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바깥은 여전히 소란스럽기만 했다. 아무도 이곳이 어딘지, 어쩌다 그가 이곳에 있게 되었는지 설명해주지 않은 체 가브리엘은 덩그러니 방안에 혼자 남겨졌다. 어리벙벙했지만 늘 그렇듯 그러려니 하고 그는 침대 곁의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뒤로도 식사니 뭐니 소란은 계속 되었고, 덕분에 가브리엘이 정신을 차리고 가방 안에 고이 보관해둘 편지를 쓸 수 있게 된 건 깨어나고 약 하루가 지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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