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날이 좋았다. 햇빛이 쨍쨍하고 땀이 줄줄 흘러도―노엘이라면 오분만 있어도 현기증을 일으키겠지만―언제까지고 바깥을 뛰어다닐 수 있는 맑은 날이 좋았다.
 비 오는 날이 좋았다. 하루종일 빗속을 돌아다니다가 노엘에게 혼이 나고 호된 감기에 걸려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메마른 땅과 공기를 촉촉하게 적시는 비 내리는 날이 좋았다.
 흐린 날이 좋았다. 회색 구름이 파란 하늘을 덮으면 풀밭에 드러누워 시간가는 줄도 모른 체 흘러가는 구름을 헤아릴 수 있는 흐린 날이 좋았다.

 그 어떤 날씨도 좋아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은 하늘이 깨끗한 깊은 밤. 유진은 달과 별이 반짝이며 빛나는 어두운 푸른 빛의 밤하늘을 제일 좋아했다. 소중한 것과 닮아 있기 때문일까? 문득 돌아보니 노엘이 서있다. 언제나 눈에 닿는 곳에 있는 사랑하는 동생. 밤 하늘과 같은 빛을 띤 긴 머리칼이 바람에 하늘거렸다. 어쩐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 나 teacher Eli한테 가봐야해. 저번에 우산 빌린 거 안 가져다 드렸다!"
 "그래? 그럼 들렀다 가."

 진홍빛 두 눈이 싱긋 웃었다. 노엘은 엘리 선생님 출장 때 잠시 양호실을 공부방으로 쓰더니 어느샌가 매일같이 양호실에 들르고 있었다. 평소 한 사람과 오래 지내는 일이 없는 노엘이 엘리 선생님과 친해진 것은 형으로써 반갑기도 하고 조금 아쉽기도 하다. 웃으면서 양호실로 향하는 복도. 햇빛이 따뜻했다.




 엘리엇 워커(Eliot Walker)는 지금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어떤 곤란한 상황이냐 하면―,

 "이건, 이건 설마……!!"

 평소 제법 친밀하게 지내고 있는 제자―양호선생과 학생도 사제간이라 칭할 수 있다 가정한다면―가,

 "숨겨둔 딸! 엘리 선생님이 독신인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국가가 아는데! 옛날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을 하더니 '나, 네 딸을 낳았어,'라며 덥썩 애를 떠맡겼다거나!"
 "진정해…."
 "요새 매일매일매일매일 노엘이하고 같이 지내더니 혹시 '나는 차가운 도시남자. 임신 쯤은 아무 것도 아니지,' 라고 노엘이랑 샤바샤바해서 애를 낳았다거나!!! 그런거죠? 그렇죠?!"
 "그만 좀 해, 진아…."

 이렇게 복도에까지 다 울릴 큰 소리로 말도 안되는 오해성 발언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치만 봐봐. 머리색은 너랑 똑같고 지금 찌푸린 표정은 엘리 선생님이랑 꼭 닮았잖아.'라며 유진이 동갑내기 제 동생을 향해 신나게 떠드는 목소리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헛소리도 이 정도 되면 수준급이다. 노엘과 자신의 아이라니, 말이 되는 농담을 해야지. 구제불능 바보는 전용 조련사에게 맡겨두면 알아서 진정이 될테니 내버려두고 대신 엘리엇은 혹여 사랑하는 조카의 교육에 해가 될까 싶어 얼른 아이의 몸을 끌어당겼다.

 "린, 저런 것은 그냥 무시하면 된단다."
 "……."

 아이의 표정이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 걸린 시간 3초. 화가 났달지 뭔가 잔뜩 불만스러워 보이는 리니아는 자신의 말을 못들은 듯 하였다. 어찌해야할까 엘리엇이 고민하는 사이에도 유진의 어쩐지 즐겁게 들리는 음성은 계속 이어진다.

 "요즘 도시 남자는 임신도 할 수 있어. 영화에서 나왔다구!"
 "대체 언제적 영화를 본거야…."

 그러게 말이다. 엘리엇은 머리가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유진을 상대하고 있는 노엘은 이미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표정이었다. 청산유수로 쏟아져 나오는 유진의 말을 어떻게하면 아이가 듣지 못하게 할까 고민하는 새 리니아는 조심스럽게 엘리엇의 팔을 빠져나갔다. 허리에 두 손을 얹은 자세가 당당하기도 하다.

 "엘리 삼촌은 삼촌이지 아빠가 아니야. 제멋대로 오해해서 말을 부풀리지 마!"

 신나게 혼자 떠들던 유진이 말을 멈추고 노엘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선명한 진홍빛 눈 두 쌍이 동시에 바라보면 수그러들만도 한데 아이는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게다가 엘리 삼촌은 남자고 임신 같은 건 못해. 애초에 남자가 어떻게 임신을 해? 오빠 바보지?"

 빠르게 이어지는 말에 잠시 어른들이 말을 잃은 사이 아이는 자신의 말을 마무리 했다.

 "바―보!"

 베, 하고 혀를 내민다. 잠시 후, 양호실에서 발작하듯 커다란 웃음 소리가 터져나와 복도를 지나던 사람들이 놀라 미끄러지거나 물건을 놓친다거나 하는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나 뭐라나.




 밤하늘 빛 머리카락이 굉장히 예쁜 아이였다. 보는 순간 당장에 귀엽다고 생각했다. 엘리 선생님의 딸이 아니냐고 바보같은 소리를 꺼낸 것은 순전히 그 애 탓이었다. 조금 놀려주려는 마음이었다. 엘리 선생님이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닌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냥 아이의 반응이 궁금했다. 뭐, 이렇게 삐져버려서 이름조차 직접 들을 수 없는 상황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결과는 제법 기분이 좋다. 아이는 화가 나서 울그락 불그락 한 얼굴도 귀여웠다.
 삼촌을 기다리는 건지 눈조차 마주치지 않겠다는 의지인지 고집스레 문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를 관찰하고 있자니 시간가는 것이 지겹지 않았다. 아직 12살이랬던가―, 어리다. 조금 더 나이가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자세히 살펴보면 키가 조금 크다 뿐이지 마냥 귀여운 인상이었다. 강아지마냥 커다란 검은 눈에 젖살이 떨어지지 않은 뺨이 아까의 소동으로 발그레하게 물들어 깨물어주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노엘보다는 약간 색이 옅은 듯한 밤하늘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려다 손을 물린 것이 몇번째인지 몰랐다. 자꾸만 시선이 가고 손을 뻗게 되는 것은 노엘과 닮은 머리칼 때문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노엘을 연상시키는 밤하늘 아래 아이의 생동감 넘치는 표정은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노엘이 아이의 반이라도 닮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과 함께가 아니면 한꺼풀 얇은 막을 씌운 듯 표정이 사라지는 노엘을 볼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함께 있어도 언제나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해서 보이지 않으면 사라진 것이 아닐까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곤 했다. 노엘이 자신의 시야 밖에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노엘의 붉은 눈이 이 꼬마처럼 자신을 똑바로 바라봐온다면―,

 "풋."
 "뭐, 뭐야! 왜 웃어!"

 일순, 아까의 상황이 생생하게 떠올라 웃어버린 유진이었다. 털을 곤두세운 고양이마냥 잔뜩 긴장해 있던 아이가 놀랐는지 당장에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아, 뭐야. 역시 귀엽잖아. 정말 귀여워. 와락 껴안아서 부비부비 해주고 싶어!

 "……."
 "…왜 그래?"

 자신의 생각에 질려 머리를 감싸쥔 유진을 향해 아이가 다가왔다. 숙인 시야 아래로 자그마한 손이 들어왔다. 나는 로리콘이 아니야. 마음 속으로 열번씩 외우고 고개를 들었다. 까만 두 눈이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
 "으왓?! 뭐, 뭐하는거야!!"

 아이를 꼭 끌어안고 토닥토닥해주었다. 당황한 듯 바둥거리는 것조차 그저 귀엽다고 하면 정말 변태가 되는걸까.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으로 한숨이 멈추질 않았다.

 그래, 귀여우면 됐지.

 "자장, 자장. 착한 어린이는 잘 시간이야. 자자. 자장자장."
 "뭐?! 아직 5시밖에 안됐다구! 왜 벌써 자! 역시 오빠 바보지?"

 바락 소리를 지르는 것도 귀엽다. 으와아아, 계속 귀엽다는 생각만 하고 있어! 유진은 계속 한숨을 쉬면서도 아이를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해 와락 끌어안고 부빗거리자 아이가 으부부 하며 손을 휘둘렀다. 손이 제법 맵다. 아파―라고 칭얼거리듯 말해보았다. 그러니까 놔, 라며 당장에 땍땍거리는 대꾸가 날아왔지만, 뭐 어떠랴. 성희롱이라고 선생님한테 혼나기 전에 놓아주면 되겠지. 그치만 귀여운 걸―….
 



 "이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집에 가려면 둘 다 깨워야 겠죠?"
 "…그래야지."

 붉은 노을이 하얀 양호실의 침대를 물들인 풍경 속에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잠든 소년과 아이는 분명히 사랑스러웠지만―, 얼굴이 굳어진 선생님의 표정에 어쩐지 뒷일이 걱정되는 노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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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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