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에 해당되는 글 166건

  1. 2009.07.23 해솔원 :: [애러랫] 어쩌면 새로운 만남

  애러랫은 욕실에 서, 벽면을 가득 채운 거울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뿌연 김이 서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몸을 적시고 있는 뜨거운 물의 방향을 돌려 거울에 흩뿌렸다.  물방울이 매끄러운 면을 타고 흐르며 하얀 벽 안에 주변 풍경이 담기었다. 하얀 곱슬머리를 엉덩이까지 늘어뜨린 계집애 같은 남자아이가 서있었다. 아니, 남자아이라기보다는 바짝 마른 어린아이. 눈썹을 일그러뜨린 곤란한 얼굴로 애러랫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노란 두 눈과 마주보는 것이 싫어 조용히 눈을 피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짜증이 올라왔다. 거울 안에 서있는 바싹 마른 소년의 몸은 오랜 흉터자국, 고작 3시간 전에 만든 새파란 멍 자국에 멀쩡한 피부가 이상해보일 정도로 엉망이었다.

  “저는, 언제나 한심하기 그지없네요.”

  늘 그렇듯 목소리는 희미하게 목 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애러랫은 시퍼렇게 된 팔뚝의 멍을 손톱으로 꾹 눌렀다. 시린 아픔에 눈썹이 꿈틀, 일그러졌다. 아이는 선명하게 남은 손톱자국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살짝 입술이 벌어져 파란 것을 머금었다. 연인에게 하듯 강하게 빨아들였다. 베어 나온 체액에 반들반들해진 멍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애러랫의 입이 미묘하게 움직였다가 이내 살짝 벌어진 체 멈추었다. 할짝, 붉은 혀가 입술을 핥았다. 가볍게 내리깐 두 눈이 다시 거울을 향했다. 거울에는 다시 김이 끼어 모습을 뿌옇게 밖에 비추지 못하고 있었다. 애러랫은 조용히 팔을 씻고 욕실을 빠져나왔다.




  하얀 목욕가운을 두른 체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민폐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침대에 앉았을 때였다. 똑똑똑. 문을 통통 두드리는 소리였다. 룸메이트들이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모두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들려온 노크소리였다. 애러랫은 종종걸음으로 달려 문을 열었다. 습관적으로 내뱉은 신원확인의 말은 그저 습관적인 것. 당연히 아이는 룸메이트 중 한사람, 혹은 몇 사람일거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앞에 선 것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키가 한참이나 컸기 때문에 얼굴을 확인하는 것만도 고개를 뒤로 꺾어 올려보아야 했다. 약간 딱딱한 표정을 한 거친 갈색 머리칼에 짙은 색의 피부를 가진 청년이었다. 가끔 다른 사람들 속에 섞여 보았던 사람이었다. 직접 대화해본 기억도 드문 사람.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바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 아…….”

  애러랫은 상대가 느린 말버릇의 탓이라고 생각해주길 간절히 빌었다. 손톱을 세워 손등을 꼬집었다. 얇은 피부가 금새 빨갛게 달아올랐다. 생각이 나지 않으니 몸이 안달하여 입만 뻐끔뻐끔 벌어졌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테, 테나, 씨…께서, 이, 이 밤, 중에 무슨 일, 이신, 가요?”

  흘깃 바라보니 이름이 틀린 것 같지는 않았다. 힘이 과하게 들어가 손톱이 엇나가며 손등의 피부가 찢어졌다. 혹시나 테나씨가 눈치 챌까 손을 몸 쪽으로 끌어당겨 손톱으로 상처를 헤집었다. 손이 작게 떨렸지만, 늘 있는 일이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아, 앞에, 세워, 두, 다니, 죄, 죄송, 합, 니다.”
  “아니, 그냥 좀……, 방문…….”

  그냥 방문. 다른 룸메이트들을 찾아온 것인지 애러랫을 찾아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방에 찾아온 것은 분명한 듯 했다.

  “드, 들어, 오세요―.”

  애러랫은 문을 열고 문 옆에 서서 그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테나가 완전히 들어오기를 기다려 문을 닫자 그제야 공기가 매우 어색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제대로 대화해 본 적도 없는 사람과 좁은 공간에 단 둘. 심장이 쿵, 쿵, 무겁게 뛰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애러랫은 정신없이 자리를 벗어날 방법을 찾기 위해 정신없이 생각을 거듭했다.

  “차―, 차, 내올게요!!!”
  “넌.”
  “에?!”
  “참 방어의식이라든지 그런 게 없구나. 이 방에는 너와 나 둘뿐인데 말이야.”
  “네…….”

  둘뿐. 둘이 있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의미심장해 보이는 말에 애러랫은 잠시 행동을 멈추었다. 둘, 둘이라서, 방어의식이 발동할 만한 것.

  “에, 에, 넷?!”

  테나가 픽, 웃었다. 애러랫은 급히 그렇지 않다고, 테나씨가 혹여 라도 나쁜 짓을 할리 없지 않느냐고 그렇게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할 수 없었다. 테나가 어쩐지 기분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애러랫의 둥근 두 눈이 깜빡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직접 마주쳤다.

  “……해줄게. 그러니깐, 나랑 형제하자.”
  “…….”
  “어리바리하니 있지 않아도 돼. 음, 나도 좀, 창피하긴 하다. 아, 혹시 싫다거나?”
  “흐엣, 그, 그런, 그런 것 아니예요!! 저, 저는 그, 그저 황송할, 뿐, 인, 걸요…….”

  테나가 조금 멋쩍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드럽게 웃는 얼굴은 어딘가 편안해 보였다. 애러랫은 한손으로 피가 터진 손등을 덮어 쥐고 테나의 눈치를 살폈다. 말을 해도 되는 것인지 고민스러웠다.

  “에, 저….”
  “음?”
  “그러……, 니까…….”

  신 것도 없는데 고인 침이 꼴깍, 목을 타고 넘어갔다. 어쩐지 저 만족스러워 보이는 테나에게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잠깐, 말하지 않는 건 괜찮, 겠죠? 금방 알게 될 테니까요…….’

  테나의 손이 애러랫의 어깨를 도닥였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아, 아뇨. 딱히…그, 그냥, 죄, 죄송…하다, 구, 요….”
  “뭐가 죄송하다는 거야.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에, 에, 예….”

Posted by fa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