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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29 긴 꿈. 2

 피곤했다. 푹 잠들었던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푹 자지 못해도 좋으니 꿈을 꾸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눈만 감으면 하나의 꿈을 꾸었다. 아주 오래도록 꾸어온 꿈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 어린시절부터 꾸었던 꿈.  언제나 이렇게 잦은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일년넘게 꾸지 않기도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것이기에 이리도 괴롭히는 걸까 생각했다. 그는 나와 함께 자랐고 그에게 큰일이 생길 때는 꿈을 꾸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리고 그럴 때면 내 인생에도 커다란 바람이 불었다. 그와 같은 방향으로. 그의 뒤를 쫓듯이.

 거울 속의 남자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싶을 정도로 검은 빛에 휩싸여 있었다. 단정히 묶은 새카맣고 긴 머리칼, 검은 신부복은 전신을 덮어 드러난 곳이 없었다. 온통 검기만 하여 답답할 정도였다. 안그래도 창백한 피부가 그 검은 빛에 대비되어 파리하게 보였다. 대낮이지만 조명이 필요할 어두운 방안에서 얼굴과 손만이 하얗게 도드라졌다. 텅 빈 무표정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빠져나온 팔이 허리를 끌어당겼다. 기대라는 의도가 분명한 당김을 무시했더니 그 쪽에서 몸을 붙여왔다. 거울에는 그의 얼굴이 비추고 있었다. 텅 빈 무표정에 눈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바리톤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웃었다. 조금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나?"
 "아무것도."

 남자의 뜨거운 숨에 귓가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음험한 목적을 가진 손이 목끝까지 올라오는 신부복 위를 더듬고 있었다. 끔찍했다. 이 몸뚱아리는 결코 남자의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받은 것이 아닐터인 것을. 거기까지 생각하고 다시 거울을 보았다. 포주에게 부탁해 굳이 들여놓은 전면거울은 반짝이며 방안의 풍경을 비추었다. 그 안에 보이는 것은 남자의 손에 몸을 맡긴 신의 지팡이. 여인의 몸이라도 허락받지 못한 일을 남자인 자신이 행하고 있었다. 아아, 신의 노여워 하시는 음성이 머리 속을 웅웅 울리는 듯 하였다.

 "사제님께서는 나르시스트였군."
 "전혀. 아니야."
 "이런."

 그가 또 웃었다.

 "싸늘하군. 좀 더 기분좋은 말 해줄 생각 없어?"
 "당신은 그런 말을 즐기는 타입이 아니지 않았던가."
 "잘 아는군. 네 맞춤 서비스에는 늘 감사하고 있어."

 문득 큭큭거리고 웃는 잘생긴 얼굴이 너무도 익숙하다는 것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한 지 몇 년째더라? 갑자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팔을 강하게 잡혀 근육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올라왔다. 섹스 후에 남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었다. 정신적인 수치심과 절망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인 신체의 비명소리. 그것에 빠져 타락할 수 없는 것이 잘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옷을 벗겨주는 것을 좋아하는 손님의 취향에 맞춰 그의 옷을 벗기며 손끝에 감각이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감각이 없어도 벗기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눈앞이 흐려도 넘어지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바래왔던 것이기에 불만은 없었다. 그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었다. 이 한번 악물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력으로 움직일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이런 몸뚱아리따위 이런 정신따위 더더욱 망가져버려라. 그녀가 건강하고 행복하기 위해서 치르는 값이 고작 이런 것이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신께서 두 사람에게 이런 운명을 내린 것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임에 틀림없었다. 자신을 모두 그녀에게 바치라고 만든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세상에게 축복받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으니까 그 불공평한 분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희생을 필요로 했겠지. 그것도 자의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더더욱 부족함이 없으리라.


 감은 눈 너머로 아득하게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햇살이 눈부신 초록빛 벌판. 맑은 웃음소리가 서늘한 공기를 타고 퍼졌다. 반짝거리는 금발이 흔들리고 하얀 사제복이 흔들렸다. 돌아선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눈이 시릴만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 얼굴만을 꿈처럼 그리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목소리만이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잠에서 깨어났다. 손가락만 까닥해도 전신을 울리는 고통에 일어날 수가 없었다.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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