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 사이에 찾아온 점심시간이었다. 사야는 식사를 하러 옹기종기 모여 나가는 사람들의 흐름을 거슬러 사무실로 돌아왔다. 실내 촬영이어서 기뻤다. 조금이라도 익숙한 공간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건 반가운 일이었다. 누군가 먹자고 제안하지 않으면 식사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 사야에게는 식사시간은 그저 휴식시간일 뿐. 자리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결국 엎드려 눈을 감았다. 잠은 잘 수 없지만 눈을 감고 있는 것만으로도 날카로워진 신경을 가라앉히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멀리서 들려오는 기계음과 가끔 복도를 지나는 발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던 공간에 낯선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사야는 언제부터 시작한 것인지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그 흥얼거림을 뒤늦게서야 알아차렸다. 낮게 울리는 허밍이 기분 좋았다. 귓가를 간질이는 부드러운 소리가 자장가 같아서 어쩐지 진짜 잠이 들어버릴 것 같았다. 결국 사야는 어거지로 눈을 떴다. 점심 시간은 그다지 짧지 않지만 깊이 잠들었다가 깨어나면 오히려 피로만 더해줄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눈을 뜨고도 여전히 잠자는 것 같은 상태로 사야는 멍하니 앉아있었다. 계속해서 노래가 들려왔다. 발소리와 무언가 쓸리는 소리가 함께 들린다는 걸 깨달은 것은 잠시 후였다. 누구지. 그제야 궁금해졌다. 어차피 방송국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회사마냥 정규적인 스케쥴에 맞추어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다들 일하느라 자리를 비운 복도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람. 복도에서 할 게 뭐가 있다고? 사야는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라도 소란스러우면 그대로 가버릴 지 누가 알까.

 "음, 음, 음~."

 창가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하게 빛나는 사람이 거기 있었다. 아직 잠에 취한 체인 멍한 머리로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야는 그저 움직이는 그림같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뒤돌아 있던 그가 고개를 돌리더니 웃는 얼굴로 인사해왔다.

 "안녕하세요, 사야씨. 식사는 하셨나요?"

 반짝반짝―, 눈이 부셨다. 손을 들어 그에게 화답하다가 문득 그가 사야씨는 빛나시네요,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말도 안 돼. 당신이 훨씬 빛나고 있잖아. 사야는 생각했다. 활짝 웃는 것이 조금 어색한 듯 무뚝뚝한 인상이었지만 그가 보여주는 순수한 호의와 열심을 다한 성의는 어색한 표정을 흠으로 느껴지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조금 표현에 서투른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듯 했다. 저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바른 눈빛을 마주하는 것은 힘들었다. 사야는 고개를 끄덕이는 척 시선을 피했다. 다시 사람좋은 미소가 따라왔다.

 "다들 바쁘신 모양이네요. 스텝 사무실이 텅 비어있고."

 그는 하하, 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아무도 없는 시간에 잠깐 쓸어둘까 해서 올라왔어요."

 깨끗한 환경에서 쉬는 것이 효율이 더 좋겠죠, 라고 덧붙이며 웃는 눈을 마주볼 수 없어서 사야는 대신 그의 코를 바라보았다. 정말 자신의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고작 청소일 뿐인데. 남들은 천대하는 직업인데.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그는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는 딱딱한 얼굴을 젊은 청소부라는 인상에 재미로 다가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 피하는 듯 했지만 이제는 그가 청소를 하고 있으면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사람이 더 많았다. 게다가 더 신기한 것은 그가 이렇게 많은 방송국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히 외우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평소 다들 출입증을 차고 다니기는 하지만 처음 대화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는 딱히 출입증을 보는 것 같지 않았다. 심심할 때 사람을 관찰하는 버릇이 있는 사야는 그가 청소를 하다가 인사하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수를 세어보다가 이내 인사하지 않는 사람의 수를 세는 것으로 바꾸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인사한 사람의 수든 인사하지 않은 사람의 수든 지금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지만 그만큼 그가 아는 사람이 많다는 건 확실했다. 더구나 그는 인사할 때 꼭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아까처럼.
 잠시 그는 사야에게 요즘 복도에 버려진 담배꽁초가 늘어서 치우는 데 힘이 든다던지 그래도 빛나는 분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다면 자기는 얼마든지 힘을 낼 수 있다는 이야기 등을 했다. 그 외에도 희야의 안부라던가―어느샌가 그는 희야의 이름마저 기억하고 있었다―날씨 얘기를 덧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길지 않은 사야의 대답 탓인지 그는 금새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물러났다.

 "그럼 저는 이만 마저 쓸러 가볼게요. 빨리 하고 저도 밥먹어야 해서."

 그렇게 돌아서는 그의 등을 보고 있자니 미안한 일을 한 것 같았다. 조금 더 친절하게 대응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사야는 그런 건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임을 잘 알았다. 사야에게 가능한 건 이정도 였다.

 "밥 맛있게 먹어."

 그가 돌아보았다. 웃고 있었다. 착각인지 모르지만 기뻐보이는 얼굴로 그가 손을 흔들었다.

 "네, 사야씨도 일 열심히 하세요!"

 그 말에는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손만 흔들어 주었다. 그런데도 그는 즐거워보였다. 그는 빠르게 복도를 쓸며 멀어져갔다. 복도와 사무실에는 하나 둘 사람이 늘어나고 있었다. 슬슬 점심시간도 끝나가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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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야, 22세. SBL 방송국에 영상일로 지원했다. 가족사항은 쌍둥이 여동생 뿐. 방송국에 취직했는데 어째서인지 일거리가 없다는 것만 빼면 현 생활에 아무런 불만도 없는 소시민. 그래, 문제는 그 것이었다. 다행히 자신만 그런 것은 아닌 듯 하지만 어쩜 이렇게 일이 없을까. 이래도 방송이 나간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 날도 결국 할 일 없이 휴게실 소파에 늘어붙어 지루함에 몸을 맡기고 있을 때였다. 재밌어보이는 것이 눈앞을 지나갔다. 닌자 차림을 하고 표창을 날리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만큼 눈에 띄는 것은 아니지만 사야가 보기엔 충분히 특이한 사람이 자판기 앞에 서있었다. 그는 자판기를 사용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듯이 기기를 발로 걷어차고 있었다.

 "씨발, 왜 안나와, 이거. 썅, 돈 먹었네."

 뭐라고 더 꽁알거리는 것 같기는 했지만 온통 욕투성이. 사야는 귀로 들어오는 소리는 한 귀로 흘리며 그를 살폈다. 신기할 정도로 동그란 뒤통수. 옷에는 날개가 달렸다. 저거 저렇게 세워서 고정시키려면 옷에 공 좀 들였겠는데. 그 것만으로도 충분히 독특했는데 거기에 더해 신경질적으로 휘두르는 손목에는 수갑으로 보이는 쇠뭉치가 대롱거렸다. 몇가지 독특한 차림만으로 충분히 흥미가 동해 사야는 그를 제대로 관찰하기로 했다. 상대방이 시선을 느끼는 지 따위는 사야가 알 바가 아니었다.
 여전히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절반이 욕이었다. 별 의미없이 습관적인 것인 듯 했지만 언어청정구역에서 살아온 사야로서는 귓가에 맴돌뿐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도 가끔은 재미있다. 자주 듣기에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겠지만서도. 평균보다 조금 작은 키. 몇번이나 자판기를 더 걷어차고서야 한쪽 눈썹을 잔뜩 찡그린 체 돌아선 그의 얼굴은 매끄러웠다. 하얀 안대가 한쪽 눈을 덮고 있어 제대로 살필 수는 없었지만 꽤나 귀여운 얼굴일 거라고 생각했다. 헤에―, 다시 시선이 갔다. 파랗고 노란 상의. 무려 보색의 조합. 거기에 얼굴을 감싼 바가지머리가 잘어울렸다. 이걸 그냥 독특하다고 해도 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런 색다른 아이템들이 한 곳에 모여서 어색하지 않다면 그대로 패션이라고 이름 붙여도 되지 않을까.

 "뭘 봐."
 "……."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성큼 앞에 선 그가 사야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먼저 보인 것은 출입증.

 "김 재하."
 "뭐?!"

 협박이라도 하듯 찡그린 얼굴이 오히려 재미있기만 했다. 탁. 사야는 손을 뻗어 주름진 미간을 누르려 했지만 먼저 잡혀버렸다. 강한 악력에 의해 손이 꺾였다. 아프다. 작게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이놈 새끼가 왜 꼬라보고 지랄이야. 눈 안 깔어?"
 "기왕이면 손은 놓고…."
 "새꺄, 어딜 주둥이를 나불대. 씨발. 눈 깔라고."
 "……."

 대체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조용히 하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사야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가 그냥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그게 또 불만인 모양이었다.

 "썅, 너 나 놀리냐?"

 팽개치듯 손이 풀려났다. 다른 손으로 저린 손을 쥐어 주물렀다. 아, 피곤해. 어쩐지 머리가 아파왔다. 소란스러운 사람은 질색. 심심한 것보다는 나았지만 시비가 걸리는 것은 싫었다. 요즘 급 늘어버린 한숨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눌러 참았다. 그럼 또 무슨 소리가 튀어나올지 몰랐다.

 "아이, 씹, 자판기는 돈을 먹고 옆에 있던 새끼는 꼬라보고 오늘 일진 죽여주는데."

 그 뒤로는 듣지 않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졌다. 사야가 아무 말이 없자 마치 패기라도 할 것같은 기세였던 그는 혼자서 욕을 씨부렁 거리다 물러났다. 그래도 반항기 청소년들이 모인 학교가 아니라 직장인 탓일까. 한 대도 얻어맞지는 않았다. 유난히 저런 타입의 사람들과 상성이 맞지 않는 사야는 툭하면 시비가 붙었었다.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느니 걸리적거린다느니 핑계는 많았다. 대부분 얻어맞아야 끝이 나곤 했었는데.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었다. 희야에게 멍을 감추기 위해 애 쓰지 않아도 된다니 그것만도 감사했다. 사야는 그가 빠져나간 휴게실 문을 바라보았다. 다시 지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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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을 꾸었다. 무슨 꿈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혹시나 기억이 날까 하고 휴식시간에 짬을 내어 옥상에 올라왔다. 구름없이 파란 하늘을 보고 싶었는데 무슨 조화인지 오늘은 구름이 한가득. 하늘이 깨끗한 걸 보면 조금 떠오르지 않을까 생각했거늘 세상사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사실, 이렇기를 바라고 올라온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구름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시야에 하늘 외에 다른 것이 잡히지 않자 손이 닿을 것만 같았다. 한번 손을 뻗어보았다. 닿는 것이 있었다.

 "뭐해, 삐돌이?"
 "……."

 불쑥 들이밀어진 얼굴을 보며 떠오르는 말은 없었다. 왜 왔어, 라고 한마디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몸을 일으켜 나란히 앉았다. 하령은 사야의 옆에 주저앉아 언제나와 같은 미소로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 미소가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건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사야는 무릎을 세워 다리를 끌어안았다.

 "하늘 예쁘다아―."
 "그래?"
 "그 시큰둥한 감상은 뭐야 대체."

 뾰루퉁하게 하령이 입을 내밀었다. 그 모습을 흘깃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하령이 베싯 다시 웃음지었고, 사야는 늘 그렇듯이 그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은 잠시 그렇게 바라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다시 한 사람은 하늘 한 사람은 허공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며 자연스럽게 하령의 머리를 쓸어내리던 사야의 손도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대화 한마디 없는 조용한 시간이 구름처럼 흘러갔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하령이 일어나 몸을 털었다. 사야는 그것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하령이 그를 보고 웃으며 사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커피 마시고 싶어졌어. 이만 내려갈래."
 "아, …잘 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응, 하고 대답하고 하령은 옥상을 빠져나갔다. 사야는 자신이 있는 옥상 주변에 아무도―담배피러 온 사람들 마저도―없다는 것에 감사하며 웅크리고 앉아 눈을 감고 몸을 스치는 바람에 마음을 실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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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체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었을까.

 "끼야, 보들보들해, 몽실몽실 솜털 같아요! 머리 관리 어떻게 해요?"
 "딱히 관리 같은 건 하지 않아요."
 "정말이예요? 이럴수가, 세상의 가장 귀중한 정보 중 하나가 여기 감춰져 있었어! 있죠, 괜찮다면 제가 당신을 잠깐 실험해보면 안될까요?"
 "네, 넷?! 아뇨아뇨아뇨, 그건 조―옴!"
 "안타까워라. 이렇게나 감촉이 좋은데요."
 "하으―…, 가능하면 조금 떨어져 주시면 안될까요…."

 애러랫은 자신의 머리칼을 붙들고 행복한 듯이 만지작 거리고 있는 분홍머리칼의 아가씨 곁에서 가능한 떨어지기 위해 조금 더 몸을 사렸다. 느닷없이 만나 느닷없이 대화를 나누게 된 이 사람은 만나자마자 대뜸 자신의 이름을 홍 분이라고 소개하더니 이내 눈을 반짝이며 머리칼을 붙들었다. 뭔가 다른 이유로 말을 걸었다는 느낌이었지만 애러랫에게는 그걸 따질만한 용기가 없었다. 머리가 길어서 거리를 꽤 벌릴 수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눈을 똑바로 마주쳐 오며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 이 사람에게서 도망갈 길이 없어 곤란했을 터였다.
 그러고보니 조금 이상하긴 했다. 흘끔거리며 살짝 올려다본 눈이 매번 마주치는 것도 그렇고 이 분이라는 사람은 신기할 정도로 입안에서 웅얼거리는 애러랫의 말을 알아들었다. 처음에는 답답한지 크게 말하라고 하더니 지금은 전혀 무리 없이 알아듣고 있었다. 몇번을 얘기해도 부족할 정도로 신기한 일이었다. 혹시 도깨비들은 귀가 좋은걸까, 라고 생각했지만―얼핏 올려다 보았을 때 머리에 달린 뿔이 보였다―딱히 그렇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냥 이 사람의 특징인걸까. 그게 아니면 애러랫의 말을 들으려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도망가려고만 했던 자신이 떠올라 굉장히 죄송해졌다.
 이럴수가, 죄송합니다. 습관적으로 손등을 꼬집었다. 옆에서 높은 목소리가 울렸다.

 "어마! 손은 왜 꼬집으세요! 아프겠다―."
 "엣, 아뇨, 그렇지 않아요, 아프지 않아요."
 "빨개졌는데 아프지 않다니, 말도 안돼요."
 "진짠데…."

 아픈 것이 일상이라 아프나 안아프나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분이는 다른 화제를 꺼내고 있었다.

 "이름이… 뭐랬죠?"
 "애러랫―입니다."

 먼저는 잘 듣지 못한 것 같다고 느꼈는데 역시, 였던 듯 했다.

 "그럼 애러랫씨. 있죠, 시간 있어요?"

 시간? 애러랫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여졌다.

 "에, 네, 있어요."
 "그럼 저랑 같이 식사 안하실래요?"

 그녀는 아까부터 몇번이나 보여준 환한 미소를 보여주곤 애러랫의 손을 이끌었다. 분이는 말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유쾌한 어조는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지만 애러랫으로서는 전혀 템포를 따라갈 수 없었다. 이런 식이었다.

 "제 머리색 예쁘지 않아요? 원래 빨강머리인데 염색한 거예요."
 "예쁘네요. 염색인 줄 몰랐어요."
 "제가 생각해도 확실히 전 빨강머리보다 분홍머리가 더 잘어울리는 것 같아요. 뭔가 머리가 더 가벼워진 느낌? 색만 바꾼 것 뿐이지만 기분이 가볍잖아요."
 "그, 그렇군요."
 "그러고보니 머리에 뿔이 있다는 게 가끔은 불편할 때도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달려있는 거니까 딱히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아니지만 뿔이 있는 쪽의 머리는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잖아요? 할 수 없는 머리모양을 보면 속이 상하기도 하죠."
 "예―…."

 빨랐다. 정말 지나치게 빨랐다. 여자들은 다 이런 것일까, 아니면 그녀만 그런 것일까. 여자들끼리 이야기하는 걸 보면 이게 보통인 것 같았다. 점점 할말이 없어지면서 어쩐지 애러랫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이제까지 얼떨떨해서 나지 않던 눈물이 이제야 한꺼번에 몰려오는 느낌. 전부 내 탓이야.

 "저,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요?"

 동그랗게 뜬 붉은 눈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예요. 갑자기 할일이 생각나서 가보겠습니다."
 "할일이 있다면 별수 없지만 아쉽네요. 그럼 다음에 또 뵈요!"
 "안녕히 계세요."

 다행히 그녀와 멀어질 때까지는 멀쩡한 얼굴이었던 듯 했다. 잰 걸음으로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들자 그제야 눈물이 났다.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대체 왜 우는 건지 스스로에게 반문하면서도 울음이 멈추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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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야야, 일어나봐. 별일이네, 네가 늦잠을 다 자고. 역시 어제는 많이 피곤했어?

 훗,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꿈이 몸을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듯 온 몸이 나른하고 무거워서 그 눈부신 목소리의 주인공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 힘들었다. 부탁대로 그녀가 깨워주었으니 얼른 일어나야 할텐데. 그래야 하는데. 벌어지지 않으려는 눈꺼풀을 어거지로 밀어올렸다. 커튼이 젖혀진 창해서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에 눈이 시려왔다. 빛을 접하자 반사적으로 감기는 눈을 치켜 떴다. 유난히 밝은 듯한 아침이었다. 밝기에 적응하지 못한 탓에 한순간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가 서서히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평소처럼 즐거워 보이는 미소를 띈 그녀의 얼굴이…….




 "헉!!"

 하얀 커튼 너머로 엷은 햇빛이 어두운 방을 밝혔다. 창가 침대에 누워있던 청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헉, 헉,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대체 무슨 꿈을 꿨는지 못 볼 것을 본 듯 경악한 표정이었다. 한계까지 치뜬 눈 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굴러떨어졌다. 호흡에 맞춰 양 어깨가 들썩였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익숙한 방의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청년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순 떠오른 것은 세상 끝을 본 듯한 절망. 그러나 이내 사라졌다. 그 다음 얼굴을 스치는 것은 놀라움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곧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청년은 슬픈 듯 안타까운 듯 애절한 표정을 보였다가 고개를 떨궜다. 핏기가 가신 손가락은 서서히 혈색이 돌아오는 듯 하더니 다시 구깃, 이불을 쥐었다. 그 손이 알콜 중독이라도 걸린 사람마냥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하얀 이불 위로 툭, 눈물이 떨어졌다. 청년은 어깨를 움츠리고 몸을 숙였다. 소리없는 울음을 감추기 위해 자신을 숨겼다. 손에서 시작된 떨림은 팔로, 어깨로, 이어 온몸으로 번졌다. 그는 아무런 소리도 없이 그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보이지 않는 것일까.

 사야는 울컥 하고 올라오는 뜨거운 것을 억지로 억눌렀다.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누르는 데 성공한 대신 눈물이 그만큼 왈칵 쏟아졌다.

 자꾸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꿈을 꾸었다. 목소리는 일어나도 결코 잊혀지지 않았다. 매번 다른 꿈을 꾸지만 목소리는 그녀의 것이었다.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녀가 웃는 것도 보였다. 발랄한 몸짓이 보였고 좋아하는 음식도 물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만은 아무리 애를 써도 알 수 없었다. 보기 전에 깨어나거나, 혹은 분명히 꿈 속에서는 보았는데도 깨어나는 순간 잊어버렸다. 마치 지우개로 그 부분만 깨끗이 지워낸 듯 그녀의 얼굴은 하얀 백지로만 남아있었다. 어째서인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알 수 없었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의 꿈을 꾸고 있을 때는 행복했다.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사랑하는 여동생, 희야의 곁에 있는 것보다도 더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세상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뒤집혔다. 심장을 도려내는 듯 가슴이 아팠다. 희야의 죽음을 목격한다 해도 이보다는 더 슬플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가 옆에 없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희야보다도 더 보고 싶고, 그리웠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사야는 들리지 않는 비명을 계속해서 게워내고 있었다. 혹시나 이른 새벽에 피곤한 희야가 잠을 깰까 울음 소리도 죽였는데 비명을 지를 수는 없었다. 아니, 그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희야는 오늘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소리내어 울 수 조차 없는 자신을 위한 핑계였다. 구토감이 느껴졌다. 빈 속에 신물이 올라왔다. 격하게 몸을 숙이면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이미 무릎깨를 덮은 이불은 눈물로 축축했다.
 자신의 손으로도 감싸지 못한 청년의 어깨가 그저 안타깝고 애처로왔다. 어느 주말, 사야는 신음소리조차 없는 서러운 울음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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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러랫은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나무 문에 조심스레 손을 올려보았다. 적당히 서늘한 나무 특유의 감촉이 느껴졌다. 이 앞에서 서성인 것이 벌써 몇 시간째인줄 몰랐다. 사람이 지나가면 재빨리 딴짓하는 척 하긴 했지만 이제 안에 있는 사람들도 눈치를 채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더더욱 문을 열기가 힘들었다.

 "하우."

 작은 한숨으로 새어나오려는 눈물을 눌렀다. 대체 뭘 했다고 눈물이 난단 말인가. 자신이 한심스러운 것은 하루이틀일이 아니었지만 나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더욱 서글퍼졌다. 애러랫은 어깨를 움츠렸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가슴 위에 얹었다. 힘이 들어있지 않은 손이 그의 옷자락을 구기며 꼭 쥐어졌다. 침을 꿀꺽 삼키고, 소년은 속으로 숫자를 셌다.

 '10, 9, 8, 7, ……으앗.'

 지나가는 사람을 피해 얼른 복도 창가로 몸을 피했다. 다행히 문에 기대어 있던 것을 보인 것 같지는 않았다. 놀란 마음을 심호흡으로 가라앉히고 소년은 다시 문앞에 섰다. 살짝 열린 문 틈새로 의자에 기대어 있는 사람이 보였다. 잠깐 휴식 중인 듯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다시 침을 삼켰다. 유난히 침 삼키는 소리가 큰 것 같았다. 애러랫은 다시 숫자를 셌다.

 '10, 9, 8, 7, 6, 5.'

 혹시 누가 오지 않나 유심히 귀를 귀울였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4, 3, 2, 1, 에잇.'

 두 눈을 꼭 감고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실례하겠습니다!!!"

 방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다아―, 아―, 아.' 애러랫은 자기 목소리에 놀라 힉 하고 숨을 들이키며 몸을 움츠렸다. 조심조심 주변을 살폈지만 다행히 그다지 큰 영향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안에 있는 것은 한 사람 뿐이었으니까. 좁은 문틈으로는 거의 보이는 것이 없어서 그렇지 몇사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긴장했던 애러랫은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발소리를 죽여 방안의 유일한 사람의 옆으로 다가갔다. 아직 깨지 않은 건지 그냥 모른척 해주는 건지 그는 움직임이 없었다.

 "저기―."

 목소리가 다시 기어들어갔다. 애러랫은 고개를 휘휘 젓고 조금 큰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번엔 손을 뻗어 어깨도 건드려보았다.

 "저, 죄송합니다. ―으에?!"
 "으음."

 살짝 건드렸는데, 진짜로 손을 댄 것에 불과 했는데!!! 애러랫의 눈이 동그레졌다. 넘어가는 사람이 애러랫보다 덩치가 커서 잡기가 쉽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혹시 어디 아프신가, 어, 저, 이럴 땐 어떻게 해야되지. 흐우."

 상대방에게 한 말이었지만 목소리는 입안에서 웅얼거리는 정도였다. 마음이 급하니 평소 말하던 대로 혼잣말처럼 나와버린 것을 애러랫은 알지 못했다. 간신히 끙끙거리며 의자에 다시 앉혀놓고 난 후에야 애러랫의 눈에 상대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길게 기른 은발, 그 틈새로 삐져나온 긴 귀.

 '엘프구나.'

 그러고보니 해솔원에는 온갖 종족들이 다 있었다. 변두리 마을에서만 틀어박혀 살았던 애러랫은 같은 화인들 외에는 전부 처음 보는 이들이었으나 겁이나서 제대로 본적도 없었다. 어찌보면 이것이 처음인 셈이다. 뒤늦게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을 걱정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있고 애러랫은 관찰에 빠졌다. 의식이 없는데도 살짝 웃는 듯한 표정을 보니 좋은 사람일거라는 인상을 받았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해솔원 교복, 느근히 안고 있는 책의 제목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거기까지 본 애러랫은 아무리 상대방이 인식하지 못한다 한들 이렇게 쳐다보는 것은 무례라 생각하고 관찰을 그만두려고 했다. 그것을 발견하기 전이었다면 그대로 깔끔하게 그만두었을 것이다. 새끼손가락 아래로 자란 작은 날개가 호흡에 맞추어 느릿하게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었다. 애러랫은 눈을 크게 뜨고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만져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호아, 하고 작게 감탄해버린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관찰하고 있던 사람이 눈을 떴다는 것도 몰랐다.

 "아버지께서 천족이셔서요."

 느긋한 목소리가 들렸을 때도 '그렇군요,'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들려올 타이밍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건 손의 움직임에 맞춰 날개가 함께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였다.

 "……에…?"

 부드럽게 웃는 얼굴과 눈을 마주치고 애러랫은 그대로 얼어버렸다. 입을 벌렸지만 뻐끔 거릴 뿐이었다.

 "왜 그러시죠?"

 갸우뚱 기울어지는 고개와 그에 맞춰 작게 움직이는 귀를 올려다보았다. 애러랫은 이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자는 사람을 관찰하던 걸 본인에게 들켰다! 자그마한 그의 몸이 튕겨오르듯 섰다. 그 반동에 두어발짝 뒤로 물러서면서 애러랫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쳐다보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저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당황하는 상대를 뒤로하고 애러랫은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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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콜릿 냄새. 미세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사야는 고개를 들어 냄새의 시작점을 찾았다. 희야가 치과를 다닐 때 단걸 먹지 못하게 하려고 온 신경을 집중했던 일이 있었다. 그 후로 초콜릿이나 과자를 처음 뜯었을 때나 조금 날듯 말듯한 희미한 달콤한 향을 같은 방에서는 맡을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징하다고 생각했다. 복도에 있었기 때문에 방을 찾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다. 하지만 찾았다. 너무도 행복해 보이는 표정으로 초콜릿을 뜯고 있는 여자아이. 언제나 생각하지만 여자들은 너무 어려보였다. 노화의 증거인 주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다들 그냥 어려보였다.

 "왜 그렇게 보죠?"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그냥 고개를 저었다. 딱히 대답할 이유는 없었다. 초콜릿 냄새가 나서 왔다는 말을 한들 먹힐 것 같지도 않았다. 앉아있는 그녀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부담스러웠던 걸까, 그녀는 조금 곤란해보이는 표정으로 방향을 돌려앉았다. 어쩐지 그냥 지나가고 싶지 않아졌다.

 "초콜릿 좋아해?"
 "무슨 상관이죠!?"

 귓가에 속삭이자 놀랐는지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버릇대로 머리를 쓸어주고 그녀가 들고 있던 초콜릿의 윗부분을 잡아 힘을 주었다. 똑,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새겨진 모양의 첫줄이 떨어져 나왔다. 이로 그 중에서도 한조각만 떼어 입안에서 굴렸다.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특유의 맛이 확 퍼졌다. 이게 맛있나.

 "맛있네."
 "…뭐하는 짓이예요! 남의 초콜릿은 왜 뺏어먹어요!?"
 "맛있어?"
 "예?!"

 황당했는지 초콜릿을 가져가는 데도 움직이지 않던 그녀가 그제야 항의했다. 그냥 또 머리를 만져 주었다. 토닥토닥. 이번에는 머리를 헝크러뜨린다고 시끄러웠다. 남은 초콜릿을 전부 입에 넣었다.

 "나중에 또 봐."

 가끔은 먹을만한 것도 같았다. 초콜릿맛 여자아이. 그런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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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걱정이 담긴 목소리에 괜찮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말이 되어 나오는 것은 '죄송합니다,'라는 도움되지 않는 한마디 뿐. 다른 말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살짝 눈을 떠보니 아까 부딪힌 분의 신발이 여전히 앞에 서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생각나지 않고 이대로 돌아 도망가버린다면 상대방이 당황할 거라고 생각하니 도망갈 수도 없었다. 계속되는 고민이 손으로 표현되어 애꿎은 허벅지를 꾹 눌렀다. 아까 멍든 자리를 쥐었는지 일순 눈물이 비져나올 만큼 시큰한 고통이 일었다. 의도치 않았지만 눈물이 나고 나니 괜히 울음이 터질 것 같아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자리에 서있으려니 땅이 푹 꺼져서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만 가득했다. '저기-,'라는 말이 들려와 뭔가 대답을 하려고 했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눈물을 본다면 당황해 하실거라 생각해 그냥 고개만 숙인 체 얼른 지나가시기를 빌었다. 눈물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눈을 부릅뜨고 바지를 손으로 꼭 쥐어 구기며 기다렸다. 그렁그렁 고인 눈물 탓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잠깐 실례할게요."
 "아…?"

 상대방이 손을 잡았다는 사실에 놀라 눈을 깜빡였더니 눈물이 뚝 떨어졌다. 알아차리셨으면 어쩌지, 불안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래서 평소같으면 반사적으로 손을 뺐을테지만 이번에는 이끄는 힘에 그대로 끌려가고 말았다.

 "불편하면 말해주세요. 지금부터 어디 있는지 모르는 양호실에 갈 거 거든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대꾸 하는 것 같이 들릴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양호실? 양호실에는 왜? 그런 의문이 애러랫의 머리 속을 가득 채웠다. 얼떨떨하니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서 상황파악을 하려고 애를 썼지만 대체 뭘 보고 양호실에 가자고 하신 건지 알 수 없었다. 돌아보지 않는 사이에 올려다보니 생전 처음보는 분이라 입술이 말라왔다. 그토록 다짐하고 왔는데 여전히 첫대면의 사람앞에서 자동으로 몸이 얼어버리는 건 그대로였다.
 그런데-, 문득 그 사실이 떠올랐다. 그런데 위치를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나? 그럼 어디로 가고 있는거지? 건물들과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자 저도모르게 다급히 앞서 가시는 분의 옷자락을 잡았다. 돌아보시는 눈과 잠시 마주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침을 꼴깍 삼키고 조심조심 말을 꺼냈다.

 "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심호흡을 했다. 후, 하, 후, 하. 어떻게 보고 계실지 불안해서 빠르게 심호흡을 하고 마찬가지로 빠르게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문득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은빛 눈이 떠올랐다.

 '너, 긴장해서 말하면 너무 말이 빨라서 알아들을 수가 없어.'

 그래도 알아듣던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지금 가고 있는 방향에 양호실이 있는 건가요? 어쩐지 학교 밖으로 나가고 있는 것 같은데, 저쪽은 교문 쪽이 아닌가요?"

 알아들으셨기를 바라고 슬쩍 올려보았지만, 아아, 표정이 복잡했다. 또 말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머리가 아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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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향기가 나는 소년이었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두리번거리며 걷는 폼이 영 불안했다. 사방을 살피다가 정작 발 밑의 돌맹이 하나를 보지 못해 넘어져버릴 것 같은 자세랄까. 교복 소매 아래로 드러난 창백한 팔뚝이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눈먼 공에 맞아도 부러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가늘었다. 그는 털실뭉치마냥 보들거리는 머리카락에 산들바람이 스치는 것에조차 몸을 떨며 눈치를 살폈다. 사람이 없는 작은 나무 곁에 섰다가 다른 은폐물이 있는 곳까지 달리듯이 종종거리며 걸었다. 배경을 무시하고 보면 지나가면 안되는 곳에 숨어든 거라고 오해받을만한 행동이었다.

 "행정실, 행정실."

 입 안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밖에까지 들리지 않았다. 소년 쪽에서도 그다지 누군가가 들어주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겁내는 그의 성격 상 이곳에서도 친구를 사귀기는 힘드리라. 하지만 역시 누군가 들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그에게 자동으로 길찾는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길치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길을 잘 찾는 편도 아니었다. 오히려 한두번 가본 길은 전혀 기억하지 못해서 어찌어찌 찾아간 곳에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헤메는 경우도 잦았다. 그런 그에게 넓은 해솔원은 미로나 다름없었다.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입학신청을 하면서 분명히 한번 들렀건만 행정실이 어딘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허둥거리다 바보같이 가방을 두고 온 자신이 한심해 죽을 지경이었다. 자책한다고 가방이 저절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건만 소년은 속으로 계속 자신을 나무랐다. 그 와중에 신나게 꼬집은 손등과 허벅지에는 벌써 멍이 들었건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저 건물이던가-…."

 어쩐지 한번 본 것 같은 건물 앞에 서서 소년은 신음하듯 혼잣말을 내뱉었다. 맞는 건 같긴 한데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들어가는 것도 무서웠다. 결국 또 버릇대로 문 앞에서 뱅글뱅글 맴을 돌았다. 잠깐 돌다보니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불편할거라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화다닥 옆으로 물러가려는데,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탓에 발밖에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와 부딪혔다는 것만 확실할 뿐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애러랫은 두 눈을 꼭 감으며 급히 허리를 숙였다. 크게 말한다고 목소리를 키웠지만 제대로 상대방에게 들렸는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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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의 시작은 어딘지 알 수 없는 숲이었다. 밤인지 어두침침한 숲은 어딘지 익숙해서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본다. 기억이 있는 듯 없는 듯 하지만 친숙한 곳이다. 앞서 걷던 검은 로브의 누군가는 청년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함께 멈추었다. 발길을 멈추게 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지 쯧, 하고 혀를 찬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일이지만 일단 목소리가 낮은 걸 보아 남자인 듯한 누군가─는 청년의 앞에 되돌아와 팔짱을 꼈다. 가만히 노려는 시선이 검은 로브에 가려 얼굴도 보이지 않는데도 강렬하게 느껴진다. 조금 섬찟하다고 생각하며 청년은 헤죽, 웃었다.

 "안녕?"

 검은 로브에 휩싸여 있는 반응을 정확히 살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불쾌해 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거이거, 뭔가 잘못한건가? 작게 한숨 소리가 난 것도 같았다.

 "귀찮아졌군."

 뭐가 귀찮아졌다는 것일까. 이해는 가지 않지만 청년은 상대방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상대방이 무엇을 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말그대로 '아무것도 알고 있는 것이 없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이곳이 어디인지 하는 문제는 미뤄놓고라도 일단 자신의 이름부터 기억나지 않아서야. 하지만 청년의 앞에 선 그는 그런 사정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조금 빠르게 말했다..

 "내 이름은 게이트(Gate). 다른 세계에서 넘어오는 자들을 안내하기 위한 사자다."
 "여기가 어딘지 궁금하겠지. 이 곳의 이름은 웨버랜드(W.ever Land)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상식이니 기억해두도록."

 에헤. 청년은 다시 히, 하고 웃어보였다. 어찌보면 그냥 바보같아 보이는 표정에 게이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로브 탓에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게이트는 청년도 알아차릴 정도로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죽, 말을 늘어놓았다.

 "그대가 살던 세계는 어떤지 모르나 웨버랜드에는 여러 종족이 있지. 요정족으로 페어리와 드워프, 임프. 그리고 수인족이라 하는 동물과 융합한 사람들이 있다. 요정족의 페어리는 15~25cm정도 되는 작은 키의 소인족으로 밝고 낙천적인 성격에 진지해지질 못하는 소란스러운 종족이지. 동정심이 많아서 사람들 부탁을 잘 들어주긴 하지만 사고체계가 어떻게 된건지 일반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대책을 내놓기 때문에 가능하면 부탁하지 않는 쪽이 좋다. 드워프는 손재주가 굉장히 뛰어난 난쟁이족이다. 평균 키가 120cm정도 밖에 안되지. 다들 수염마니아에 술을 좋아하지. 드워프들이 만드는 것들은 기능성도 내구성도 좋다. 임프는 페어리보다는 조금 크지만 50cm를 넘지 않는다. 작지. 박쥐날개에 푸른색이나 녹색계열 피부색을 가졌다. 위험한 장난을 좋아하니 가능하면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아. 수인족은 말그대로 인간과 동물이 합체된 형태인데 주로 육지형, 조류&파충류형, 해양형으로 분류된다. 이쪽은 대충 들으면 어떤 기준인지 알겠지? 육지형은 육체파, 해양형은 마법파, 조류&파충류형은 그 중간으로 원거리 공격 무기도 선호한다."

 다다다다다다 내뱉어진 긴 설명에 청년의 눈이 크게 뜨였다. 흐에─, 하고 운을 떼더니 한마디 한다.

 "숨 안차?"
 "그래서,"

 청년의 말 뒤로 곧장 즉각적으로 다시 말이 이어진다. 아무래도 그냥 숨을 고른 것 뿐인 모양이었다. 청년은 얼떨떨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서?"
 "지금부터 골라라. 어떤 모습으로 갈 것인가. 네가 이 쪽을 구경하고 고르겠다고 했지만 그냥 지금 하는 게 나을 듯 하다."

 청년은 질문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두 눈을 껌뻑였다. 바보같이 벙찐 얼굴로 쳐다보는 모습에 게이트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네가 원하는 걸 고르면 돼."
 "모르겠는데."
 "…끙."

 게이트는 고민에 잠겼다. 청년이 멀뚱멀뚱 쳐다보고 침묵이 지났다.

 "아."
 "응?"
 "지금 그대로 가는 것도 괜찮다."

 다시 껌뻑껌벅. 청년의 시선에 게이트는 또 끙, 앓는 소리를 했다. 뭔가 설명방법을 찾는 지 말이 없는 게이트를 향해 청년은 툭 한마디 내뱉었다.

 "그냥 갈래."
 "하?"
 "간다구."
 "……좋아, 그럼 됐다."

 푹, 하고 한숨쉬는 게이트를 청년은 의아한 얼굴로 올려다 보았다. 괜히 짜증스레 흥, 하고 콧방귀를 뀐 게이트는 청년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그리고는 잠시 멈춘다.

 "왜?"
 "보기보다도 가늘군."

 헤, 청년이 웃는다.

 "그래?"

 그리고는 자기도 한번 잡아보았다. 오오, 하고 혼자 감탄하는 바보짓에 게이트는 다시 절래절래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이만 보내주지. 하지 마라!"

 신기한 듯 로브를 들춰보는 청년의 손을 탁 쳐내고 게이트는 다시 팔짱을 꼈다. 여전히 싱글거리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기억도 없는 게 너무 당당하잖아.

 "가면 뭐 좋은 거 있어?"
 "모른다."
 "그럼 나 여기 있으면 안 돼?"
 "……."

 게이트의 시선이 얼굴에 곧장 느껴져서 청년은 괜히 어깨를 으쓱하며 시선을 피했다.

 "네 이름은 에스트다. 에스트 아이렌."
 "에?"
 "나이는…원래는 20살이라고 들었던 것 같군. 지금은 17~8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그 정도다."
 "어떻게 알아?"
 "다 방법이 있다."

 부. 청년의 볼이 부었다. 어떤 사정으로 넘어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선한 미소를 가졌던 청년은 자신의 이름을 에스트 아이렌이라고 소개했었다. 장난기 가득한 눈빛이 아니면 표정 탓에 나이가 많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갓 스무살이 넘은 청년이라고 보기엔 너무…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띄고 있었다. 차근히 설명을 듣고 곰곰히 생각한 뒤 대답하는 모습은 누가보아도 믿음이 갈만한 청년이었다.
 완전히 이 곳으로 넘어오자 외양부터 훨씬 가늘어진데다가 이제보니 기억도 잃었지, 하는 짓도 어린애 같아져서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이제 헤어질 시간.

 "웨버랜드가 네게 즐거운 곳이 되길 바라지."
 "될거야."

 자신만만하게 웃는 얼굴은 조금 전과 닮은 것도 같다.

 "이대로 죽 가면 작은 마을이 나온다. 열심히 돌아다녀봐라. 도와줄 사람이 있을테니. 부탁이니 말썽은 부리지 말도록."

 에스트는 그대로 사라지는 게이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쩐지 웃은 것 같은데. 아닌가?"

 고민해 보아도 대답해 줄 사람은 모습을 감추었다. 에스트는 흠, 하고 게이트처럼 팔짱을 끼었다가 발을 땠다.

 "가면 뭔가 있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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