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2_amelia_H @SN2__Master


 타닥타닥. 푸른 어둠이 내려앉은 휴게실에 빨갛게 불티가 튀었다. 다른 기숙사라면 벌써 벽난로는 꺼지고 집요정만 소리 없이 드나들 고요한 새벽, 노랗게 타오르는 불꽃을 등지고 앉은 소녀가 있었다. 탁탁탁, 불 튀는 소리와 함께 사각사각, 깃펜 소리가 섞였다. 소파에 몸을 파묻듯이 앉아 무릎에 책을 올리고 바쁘게 양피지에 무언가를 옮겨 적었다. 탁자에는 시야를 밝히는 램프가 있고, 옆에는 책이 쌓였다.

 “윙가르디움 레비오우사, 루모스 솔렘, 인센디오…….”

 제게만 겨우 들릴 작은 중얼거림이 깃펜의 움직임에 맞춰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계속되었다.

소녀는 몇 시간 전 죽음의 소식을 들은 참이었다. 막 악몽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렸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끊임없이 목숨을 위협하는 무언가가 다가오는 평범한 악몽. 놀랍게도 현실과 맞닿아있던 그 꿈은 눈을 뜬 순간 벽장에서 뛰쳐나와 모두를 덮쳤다. 무섭고 끔찍한 꿈이었지만, 여기서 열심히 주문을 적고 있는 에밀리아 혹은 에이미라고 불리던 여자아이는 눈물 한번 보이지 않았다. 불안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름과 얼굴을 외운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놀라워만 했다. 소녀에게 있어선 처음으로 보는 죽음이었다. 그 이름은 하염없이 멀기만 해서 소녀는 아직도 꿈결인가 생각했을 정도였다.

 사망통지로 기숙사는 혼란에 빠졌다. 어두운 꿈에서 빠져나온 학교는 한껏 근육을 수축해 긴장해 있었다. 소녀만이 습기를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워 통행금지 시간이 가까웠는데도 느긋하게 옮기던 걸음은 주변을 낯설게 만드는 암흑의 마법에 방향을 잃었다. 기껍게, 그러나 꺼림칙하게 헤매는 소녀를 바보같이 사람만 좋던 선배가 숨 가쁘게 달려서 찾으러왔다. 왜 그렇게 급하게 뛰어왔냐고 물었더니 화를 냈다.

 “멍청아, 너를 혼자 두고 내가 어떻게 가!”

 처음 보는 모습이라서 놀랐다.

 기숙사에 돌아온 소녀를 기다리는 것은 악몽이었다.

 “두 명이 죽었다는구나.”

 이름은 외웠지만 제대로 부른 적이 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사감 교수님이 말했다. 죽은 건 슬리데린의 라올리 데니우, 레번클로의 비비안 듀폰트란다. 그 말이 아득하게 들렸다. 소녀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필기가 걸렸다. 돌려주었어야 했던 필기.

 그건 악몽이 시작되기 전날의 일이었다. 한심스러운 장난이었다. 소녀는 심심했고 심심한 소년소녀가 모이면 시답잖지만 즐거운 놀이가 시작되는 법이다. 벌칙은 손목을 묶고 하루 동안 시간을 지내는 것이었다. 참가자 모두가 받아야하는 벌칙이었다.

 짝은 슬리데린의 남학생이었다. 성실과 정의, 공평함으로 세워진 후플푸프에서 가장 거리가 멀지도 모르는 기숙사였다. 교활하고 고귀하며 아름다운 슬리데린. 소녀는 라올리 데니우를 만났다.

 그는 고운 사람이었다. 곱상한 얼굴에 나른한 태도였지만 우아했다. 소녀는 순수혈통을 지켜온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이 귀족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막내로 태어나 제멋대로 살아온 아버지가 집에 데려가는 일이 없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질려 동생만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일에 서툴고 철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대대로 유지해온 고서점에서 성장했다. 책을 읽고, 일을 배웠다. 어릴 때부터 집안일도 가게일도 대부분 소녀의 몫이어서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그나마 집요정이 있고 두 식구 살림이 단출한 게 다행이었다.

 그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절대 스스로는 풀 수 없도록 준비된 수갑을 풀기 위해 손목을 끊겠다고 날뛰었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사람을 해치는 이야기를 했다. 무서워 떨고 있으니 상냥하게 말을 걸어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의외로 즐거웠고, 그만큼 무서웠다. 대화 사이사이 예고 없이 터져 나오는 말들은 당황스럽고 소름끼쳤다. 그러다가 울고, 위로받고, 함께 식사했다. 소녀는 그가 자신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말은 오래 갈고 닦은 사회 적응 스킬의 일환일 뿐임을 느끼고 있었으면서도 그가 마음에 들었다.

길디 긴 하루가 끝나고 헤어지면서 그는 소녀에게 빚을 졌다고 했다. 그런 것을 신경 쓰는 마음은 알 수 없었지만 소녀는 이해했다. 소녀는 그것을 호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필기를 빌렸다. 다음날 돌려주마 했다. 그날은 악몽이 찾아온 날이었다.

 “레파로, 익스펠리 아르무스, 아리스토 모멘텀…….”

 소녀는 깃펜을 지팡이처럼 휘둘렀다. 저승에는 아무것도 들고 갈 수 없다. 이제 와서 필기를 옮겨봐야 돌려줄 수는 없었다. 나이어린 소녀도 그 정도는 알았다. 그래서 베끼지 않았다. 하지만 돌려줘야한다고 생각했다.

 악몽 속에서 소녀는 용을 만났다. 무시무시한 소리가 섬세한 고막을 찢고 먼 하늘에서 용을 불러왔다. 사람이 바람 만난 낙엽처럼 흩어지던 풍경이 선명했다. 꿈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건 현실이었다.

 혼란 속에서 소녀를 잡아준 사람이 있었다. 귀가 아파 일어서지도 못하는 소녀를 붙들어준 다른 소년. 금발에 제법 근사한 얼굴을 했지만 얼굴 이상으로 입이 방정인 소년. 친해질 생각조차 없었지만 늦은 밤 함께 나눈 대화가 즐거웠다.

 악몽 속에서 소년이 바쁘게 움직일 때 소녀는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바쁘게 움직이며 돌아다녔던 것 같은데 어느 샌가 흐릿해져 있었다. 과연 꿈이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그게 꿈이라면 붙들어 주었던 따뜻한 손도 꿈이었을까.

 “이모뷸러스, 잉고르지오, 카르페 레트락툼…….”

 그 꿈에서 누군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다치고 고통 받는 친구들을 보았었다. 소녀는 딱히 할 것이 없어서 혼란에 빠진 후배를 달래고, 적당히 주변을 돌며 잔심부름을 했다. 상황을 살피러 오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있더라고 간단한 소식을 전하는 역할도 맡았다. 아무것도 않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했다.

 꿈에서 죽은 사람은 분명 소녀가 아는 사람이었다. 금발에, 괜찮은 얼굴과 자아도취까지 소녀를 돌봐주었던 소년과 닮은꼴인 남학생이었다. 연회장에서 만나 인사를 했고, 소개도 하지 않았는데 소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악몽을 만들어낸 범인. 그렇게 말하며 사람들이 남학생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소녀는 듣기만 했다. 생각한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악몽이 끝나고 남학생은 하하 웃으며 화를 내고 있었다. 큰 소리가 오갔다. 소녀는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소녀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글래이셔스, 아씨오, 디펄소…….”

 비비안 듀폰트는 돌이켜볼 것이 없을 정도로 기억이 희미했다. 그녀를 본 기억은 있었지만 이야기해본 기억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학교 스타에 흠뻑 빠져 있었다. 멀리서 보기엔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소녀는 깃펜을 내려놓았다. 일학년부터 지금까지, 약 오년 가까운 시간동안 배운 주문을 모두 한 자리에 모았다. 이게 쓸 일이 있을까? 모른다. 대부분 손 아프게 베낀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무의미하게 잊힐 거라는 사실 아닌 사실만 분명했다.

 양피지를 훑는 초록 눈동자가 램프 불빛을 따라 흔들렸다. 스코지파이, 레파로, 테르지오, 아씨오 대신 프로테고, 피안토 듀리, 익스펠리아르무스를 외운다. 에피스키와 페룰라도 연습했다. 배우면서도 쓸 일이 없겠거니 대충 넘어갔던 주문들을 뇌리에 새기듯 반복했다. 인카서러스. 내 입으로 외우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주문. 엉킨 실타래 위에 가지런히 주문이 새겨졌다.

 소녀는 시간을 되새겼다. 온실에서 수업을 듣고 다과를 마시던 날. 몰래 교수님 흉을 봤다가 울음을 터뜨리고 만 날. 아아, 되돌아보면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능력은 모자라고 개성도 없는 쓸모없는 기숙사라는 아이들끼리의 흉에도 진심으로 화를 내며 후플푸프 학생들을 감싸주던 사감 교수님. 언제나 근사한 모습으로 여학생들의 동경을 한 몸에 받아가던 슬리데린 사감 교수님. 무책임한 발언을 일삼아 늘 소녀를 화나게 하던 그리핀도르 사감 교수님. 늘 공정한 태도로 학생을 대하느라 정작 제 기숙사 점수를 깎아먹던 레번클로 사감 교수님. 장난인지 진심인지 분간할 수 없는 말을 하던 교장 선생님과 각 과목을 맡아 가르치던 교수님들. 아무 쓸모없는 잡담으로 지새우던 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도서관에서 버티려고 숨을 곳을 찾던 시간도. 돌이킨 모든 것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소녀는 생각했다. 워커 교수님, 당신은 알까요. 일부러 당신 이름을 틀렸다는걸. 곤란해 하는 표정도, 정정해주는 말도 좋아서 몇 번이고 바꿔 불렀다는 것. 페이튼 교수님, 당신은 모르겠죠. 내가 일부러 당신에게 말을 걸었다는 것. 아빠를 닮은 당신이 너무 싫고, 그런데도 좋아서 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것. 아스트라 교수님, 퀸스틸러 교수님.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늘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요. 당신의 시선이 느껴졌으니까요. 그런 당신들에게 내가 힘이 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고요한 후플푸프 기숙사 휴게실에 바람이 불었다. 소녀는 느끼지 못한 듯 고요했다. 시간이 생각에 잠겨 손을 멈춘 소녀를 가로질렀다. 사각사각, 다시 깃펜이 움직였다.

 소녀는 날이 밝은 호그와트 연회장에 서있었다. 바쁘게 무언가를 적고, 누군가를 붙잡고 이야기하고, 때로 주변을 살폈다. 근처 테이블에는 책이 쌓여있었다. 밤중에 소녀 곁에 흩어졌던 교과서가 아닌 화사한 표지의 동화책과 소설책이었다. 소녀는 끊임없이 움직였지만 책 곁에서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다. 기둥에 묶인 망아지처럼 한곳을 맴돌았다.

 소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떠나는 누군가의 등을 떠밀며 조그만 수첩에 필기를 했다.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를 준다. 소녀는 자신의 무력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가질 수 없는 것에 절망하지 않는다.

 “디터니 원액을 만들려면 증류를 할 물건이 필요한가. 이쪽으론 영 관심이 없으니, .”

 온실로 조사를 다녀온 교수님이 중얼거렸다.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섰다.

 “제대로 된 도구가 있으면 좋겠지만 없다면 뚜껑을 씌워서 증기를 모은 후에 다른 그릇에 받으면 돼요.”

 교수님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방법을 확실히 아는 게 아니니 있어보자꾸나.”

 소녀는 동의했다. 디터니 용액은 꼭 필요한 약이었지만, 독과 약은 한 몸이었다.

 부상자가 생겼다. 도서관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탐구욕으로 파랗게 불타는 눈을 가진 레번클로의 아이. 창공을 나는 독수리처럼 뛰어난 두뇌를 빛내는 조그만 소년. 소녀에겐 그런 탐구심은 없었지만 함께 책 이야기를 했었다. 소녀는 뜨겁게 달아오른 손바닥을 안고 돌아온 아이를 멀리서 지켜보았다. 다행히 상처는 크지 않았다.

 한참을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모두 지쳐 쉬는 시간. 소녀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그란 안경이 귀여운 천진한 여자아이. 연회장에 홀로 별을 뿌리는 그녀를 붙들고 조잘조잘 떠들었다. 가볍게 웃고 떠드는 사이 흐릿한 머릿속이 살짝 개었다.

 공기에 비린내가 섞인 것은 푸른 얼굴에 활기가 돌아올 무렵이었다. 같은 넥타이를 맨 선배가 사색이 되어 뛰쳐나갔다. 아아, 피다. 새빨간 자국이 파란 넥타이로 퍼졌다. 누군가 말했다. 디터니 용액이 필요해! 소녀는 생각했다. 그런 거 없어.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말이 입술 사이로 샜다.

 “마법의 약 교실 비품 창고는 역시 위험한 곳이었나 보네.”

 계속해서 출입을 거부하던 위험한 장소에서 돌아온 것은 소녀의 친구였다. 갓 인쇄한 책에 그려진 삽화처럼, 선명한 색으로 물든 친구. 소녀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지켜주었던 친구. 누구하고나 잘 어울리는 똑똑한 친구. 따라다니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아보였다.

 이해하건 그러지 못하건 상관없이 소녀는 움직였다. 머리가 멈춰도 손과 발은 멈추지 않는다. 소녀는 급하게 디터니 용액 제조법을 찾았다. 차게 식은 손끝에는 감각이 없었다. 누군가가 제조법을 찾아왔다.

 “인센디오!‘

 급하게 불을 붙였다. 장작이 없어 책으로 대신했다. 다시는 못 구할 품절본이 끼어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어차피 소녀가 가진 책은 대부분 희귀본이다.

 떨리는 손으로 물을 휘저었지만 아아, 알고 있었다. 될 리가 없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아아아, 아까운 꽃박하. 푸른 별이 하늘로 둥실 떠올랐다. 소녀는 생각했다. 아까 가져온 쑥과 박하, 당장 만들어놓자. 분명히 쓸 일이 생길거야. 쓸 곳이 생긴 뒤에 찾으면 늦어. 당장, 지금 당장.

 소녀는 외면했다. 다시없을 친구의 몸을 깨끗하게 정돈하고 망토를 벗어 얼굴 위에 덮었다. 봤지? 할 수 없었어.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 무능한 아멜리아. 생각은 짧게 가슴은 무디게. 잘 가, 록시. 너란 사람을 알아서 무척 기뻤어. 짧은 대화라도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어. 부러웠어. 동경했어. 고이 잠들길.

 집보다도 좋았던 학교는 건초를 얹은 지옥이었다. 개구리를 넣은 물을 약한 불로 끓이면 다리가 익어 달아나지 못한다지. 소녀는 웃었다. 훌륭한 함정이었어, 호그와트.

 소녀는 걸었다. 결코 멈추지 않았다. 웃고 떠들고 움직이고 달렸다. 슬픔이 나를 짓누른다면 그대가 오기 전에 달아나리라. 멈춰버릴 다리를 나는 가지고 있지 않아. 더 멀리, 더 멀리. 이것이 꿈이라면 깨어날 때까지. 언덕길을 구르는 눈덩이가 얼마나 커지더라도 상관하지 않겠어. 짓눌릴 바에는 달아나리라.

 소녀는 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주고 웃는 아이에게는 칭찬을 주었다. 그대가 빛나고 있어. 아름다운 그대가. 연약한 마음은 입에 발린 소리에도 눈물을 흘렸다. 처진 등을 보고 싶지 않았다. 서글픈 눈물도 보고 싶지 않았다. 쫓아오는 눈덩이가 세상 무엇보다 두려웠다. 그를 닮은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차가운 손끝을 만지고 싶지 않았다. 한번 시작된 달리기는 멈출 줄을 몰랐다.

 어둠이 내려앉았다. 시간을 태운 바람은 돌고 돌아 모닥불이 타는 따뜻한 휴게실로 돌아왔다. 타닥타닥 불티가 튀고 사각사각 깃펜이 춤추는 곳. 혼란스럽고 눈물이 가득한 그곳과는 달리 평화로운 후플푸프 기숙사. 안개처럼 흩뿌린 엷은 슬픔이 소녀를 떠밀고 있었다. 천천히 걷기 시작한 발은 언제쯤 멈추게 될까.

 “에피스키, 브리키움 엠멘도, 페룰라, 레너베이트…….”

 짧게 스쳐간 악몽 속에서 능숙하게 치료마법을 사용하던 선배가 있었다. 소녀와 똑같은 노란 넥타이를 매고 늘 단정한 차림이 믿음직스러웠다. 도닥여주는 손은 따뜻하고 말씨는 상냥했다. 악몽이 아니었어도 소녀는 그를 좋아했지만 악몽이 아니었다면 그가 그렇게 유능한 줄은 몰랐을 것이었다. 혼란 속에서 눈길을 잡아끌던 근사한 지팡이를 소녀는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곁은 지켜줄게. 눈에서 물이 나올 것 같으면 와도 좋아.”

 그가 소녀를 위로하며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깃펜을 쥐고 허공을 휘젓는 소녀는 마치 소리 없는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자 같았다. 불티가 손짓을 따라 튀어올랐다. 긴 소매가 프리마돈나였다. 심취한 어둠이 어깨를 흔들었다.

 소녀는 책을 내려놓고 소파 앞을 걸어 다녔다. 여전히 입으로는 주문을 외우고 손은 깃펜을 휘두르며. 소녀는 자신에게 물었다. 뭔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소녀는 대답했다. 아니. 그럴 리 없어. 그러면서도 생각했다. 그래도 무사했으면 좋겠다. 무사하게 해주고 싶다.

 곧잘 웃고 천진난만한 같은 기숙사의 여자아이는 오늘도 소녀를 붙들어 주었다. 소녀에게는 없는 것을 모두 가진 그녀가 처음에는 참 부담스러웠다. 그토록 사랑스러운 여자아이에게서 소녀가 느끼는 건 질투뿐이다. 하지만 소녀는 오늘도 그 보드라운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녀는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내일이 오는 게 무서워. 오늘 꾼 꿈인지 환상인지 모를 그것처럼 다들 다치고 사라질까봐.”

 소녀는 기도했다. 부디 내일이 오지 않기를. 내가 가질 수 없는 미소를 질투할 수 있게 해주기를.

 그래, 당신도 있었다. 소녀는 떠올렸다. 오늘 처음으로 색다른 모습을 본 바보 같은 선배. 바보라고 생각하면서도 기대고 있었다. 마음이 불안하면 찾았다. 속없는 웃음은 꽉 찬 달 같아서 길이 보이지 않을 때면 찾고 있었다. 당신을 보면 길이 보일 것 같았다.

 “난 네 선배잖아? 후배를 챙기는 일은 당연한 거야.”

 곧잘 덜 떨어진 소리를 하면서 그런 말은 잘도 했다.

 미소로 울던 교수님. 소녀는 읊었다. 교수님은 소녀를 보면 늘 울었다. 한 번도 그런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단단히 굳은 어깨를 소녀는 보았다. 그래서 기대지 않았다. 짐을 얹어주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그랬고, 어머니에게 그랬듯이.

 “, 난 그저 힘없는 약초학 교수란다. 물론 내 아이들이 다치게 놔두진 않겠지만.”

 그 말을 믿어요. 교수님.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러고 있었는지 희미하게 날이 밝아왔다. 창문 너머가 환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큰일이야, 페리. 오고 있어. 오게 두고 말았어. 네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내일을 허락하고 말았어.

 소녀는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자신도 내일을 두려워했던 게 아니었을까. 언제나처럼 늦게 잠드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니었는지도 몰라. 이 해가 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깃펜을 쥐었는지도 몰라.

 소녀는 멈춰 섰다. 이 어둠 속에서 구해주세요. 무서워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불안해요. 죽고 싶지 않아요. 아픈 것도 싫어요. 노란 불꽃이 아우성쳤다. 소녀는 해 뜨는 창밖을 얼빠진 얼굴로 지켜보았다. 내일이 오고야 말았다.

 타닥타닥, 불티가 튀었다. 초록빛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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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서 뚝, 사람이 떨어졌다. 허둥지둥 팔을 휘저으며. 하늘을 날 줄 아는 생물의 행동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멍하니 생각했다. 놀라운 상황이라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떨어진 그는 한참을 데굴데굴 구르더니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지 무사히 일어났다. 그는 한참 자신의 몸을 살피며 인상을 찌푸린 체 무언가 말을 했지만 뭐라고 하는 지는 몰랐다.
 그리고 다가온다. 에? 

 "안녕, !@$#^$%^$%" 

 인사 외에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말해야할까? 아, 아?
 그가 내 반응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다행히 그는 그대로 가버리지 않고 다시 말을 걸어주었다. ―사실, 도망가고 싶었지만. 사람은, 무섭다. 착해보이는 사람도 착하지 않다. 하지만 그는 하늘에서 떨어졌다. 사람 같지만, 정령일까? 모르겠다. 이 곳까지 데려다준 그녀는 정령인 줄 알았지만 용이었다. 

 "음, 저$(#&*하나?#(@&^*!)#$#&*린! 리그오빠라고 불러주면#$%%^$^!!#$%$%^돼?" 

 대답을 할 수 없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리그오빠는 말했다. 아까보다 더 아픈 얼굴이었다. 괜찮아? 걱정이었다. 

 "이름, 말해주면 안될까?" 

이번에는 알았다. 이름? 내 이름? 뭐였지? 기억해내는데 한참, 그리고 말하는데 한참. 말하는 것은 어렵다. 

 "……에어트…베레."
 "에어트베레? 예쁜 이름이네. 딸기―라고 불러도 돼?" 

 딸기? 딸기? 그 빨갛고 달콤한 것 이름. 왜 딸기지?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다. 상냥하게 말을 건다. 

「네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니?」 

 몰라. 근데 누구야? 풍경이 흐릿하다. 리그오빠가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답해야 해. 

 "응." 

그리고 그 짧은 말을 힘겹게 내뱉는 사이 어렴풋이 떠올랐던 영상은 사라져버렸다. 리그오빠가 웃었다. 같이 살짝 입꼬리가 올라간다. 웃어도 되나? 바짝 앞에 앉아서 눈이 맞았다. 리그오빠는 키가 크다. 

 "그런데 다친 데는 없어? 일단 내가 피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묻는거야." 

 이번에는 조금 천천히. 내가 말을 잘 못한다는 것을 안 것 같다. 친절한 사람. 리그오빠는 친절한 사람. 

 "다친 데? 아니." 

 고개를 젓는다. 

 "없어."
 "없어? 그럼 다행이다." 

 그리고 리그오빠는 활짝 웃었다. 예쁘다. 같이 웃었다. 어쩐지 마음이 편했다. 괜찮아. 리그오빠는 착한 사람이니까 괜찮아. 에, 근데 착한 사람은 뭐였지? 생각하는 사이 리그오빠가 머리를 붙들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괜찮아? 떨어져서 아픈가봐. 아프면 고쳐야돼. 아파? 아! 

 "팔…."
 "응?"
 "팔에, 피나."
 "아아, 괜찮아. $$%$ 튼튼하거든. 건강하고 %$$^^빼면 시체야. 걱정하지마." 

 그의 팔에 긁힌, 아니 긁혔다기엔 커다란 상처가 있었다. 아까 데굴데굴 굴러가면서 생겼다. 뭔가 말하지만, 다 모르겠어. 그치만 아파보여. 아파. 리그오빠는 웃는다. 안 아파? 괜찮아? 시체는 죽은 거잖아. 죽는거야? 

 "치료 해야 돼."
 "괜찮…. 알았어, 알았어. 그럼 저 집에서 치료 받을 테니까 같이 갈래?"
 "같이……?" 

 같이? 같이? 뭐더라? 같이? 리그오빠가 무언가 손짓 발짓으로 설명을 한다. 말은, 거의 못 알아들었다. 미안하다. 

 "#%$^& 갈 데 있다면 #$#% 바이바이 해야겠지만." 

 아냐, 나 갈 데, 없어. 

 "갈 데 없어."
 "그럼 같이 갈래?" 

 아, 같이. 같이. 알았다, 같이. 

 "응."
 "그래. 그러면 가자." 

 같이 가자. 같이 가! 조금 행복해져서, 베시시 웃어서. 얼굴을 숙였다. 못봤나? 리그오빠는 언덕 꼭대기에 있는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가슴이 싸늘하다. 응, 그래도 좋아. 같이 가자.
 문은 닫혀 있었다. 어떻게 해야하지? 문을 열까? 물어보려고 리그오빠를 보았다. 리그오빠는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문을 두드린다. 똑똑, 하고 나무 소리가 난다. 왜 무서워해? 리그오빠의 얼굴이 굳어있다. 무서워? 이 집 무서워? 나오는 사람도 목소리도 없었다. 리그오빠가 무서워보여서 가자고 할까 했는데 뭐라고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어서 옷을 잡아당기려고 리그오빠와 잡고 있는 반대편 손을 들었다. 그런데 리그오빠가 다시 똑똑 소리를 낸다. 왜? 그리고 사람이 나왔다. 

 "음…, 저기…."
 "외부인…?"
 "예? 아, 예에."
 
 집에서 나온 사람은 여자였다. 온통 새카맣다. 머리도 옷도 그리고 뒤에 달린 날개도. 정령인가? 날개. 바람의 정령? 하지만 바람의 정령은 까맣지 않아. 그럼 누구지? 용인가? 하지만 그녀는 까맣지 않았어. 

 "들어오세요. 메리아 어머니, 외부인이 오셨어요." 

 그리고 리그오빠는 여자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난 그 뒤를 따라 간다. 무섭지 않아? 리그오빠 얼굴이 더 꽝꽝 얼었다. 아픈데 무서운 데. 괜찮아? 아픈 것 나빠. 무서운 것도 나빠. 나쁘고 나쁜데 괜찮아?
 집 안에는 아주머니가 계셨다. 안경을 쓰고 숄을 두른 다정한 얼굴의 아주머니. 무서운 곳 아닌가봐. 하지만 모른다. 날 보고 얼굴이 찌그러지고 화를 낼지도 몰라. 리그오빠 뒤에 꼭 붙어있는다. 

 "어서오세요. 외부인이라고 하셨지요. 나는 암룡술사 메리아. 이쪽은 내 보좌룡인 라루카. 그쪽은?"
 "아, 저는 리버그린입니다. 이쪽은 에어트베레.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실례? 에? 실례는 음, 잘못했을 때. 왜 실례? 에? 하지만 리그오빠가 하니까. 해야할 것 같아. 다들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는다. 리그오빠는 허리를 숙이고 실례합니다, 라고 했다. 

 "실례합니다…." 

 들렸을까? 목소리가 작아서 안 들릴 것 같아. 무섭다. 리그오빠 옆에 더 바짝 붙어 선다. 하지만 아줌마 웃는다. 화 안내? 

 "흠, 두 사람 다 좀 씻는 게 좋겠네요."
 "아하하. 좀 그렇긴 하네요." 

 씻어? 씻는 건 물에 씻는 거. 기분 좋아. 그치만 리그오빠 아파. 

 "리그오빠, 팔."
 "어, 나? 아, 맞다, 맞다. 잊어버리고 있었네. 그러고 보니 다쳤었지." 

 리그오빠 웃는다. 말이 빨라서 알아들었나 몰랐나 모르겠는 기분. 리그오빠 상처는 피가 나서 아까보다 아파보인다. 

 "아프지 않아?" 

 사실은 더 물어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말하는 법 배우고 싶어. 리그오빠가 머리를 토닥토닥 해준다. 오빠도 많이 해줬었어. 응? 오빠? 누구지? 몰라. 잘 기억 안나. 그치만 기분 좋다. 곧 아줌마와 여자가 와서 리그오빠 상처를 치료해준다. 다행이야. 안 아플거야. 옆에 꼭 붙어 있으면 아플 것 같아서 얌전히 있었다. 괜찮지? 하얗고 얇은 옷으로 오빠 상처를 감아준다. 상처에도 옷을 입히는구나. 

 "그럼 두 사람 다 이제 씻도록 하세요."
 "예입. 딸기야. 씻고 와―."
 "리그오빠도…." 

 큰 소리로 말을 하는 건 조금 쑥스럽다. 까만 여자를 따라서 간다. 하얀 방. 미끌미끌하다. 어떻게 해야하지? 물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 가만히 있었다. 어떻게 하지? 

 "왜 그래요?" 

 까만 여자가 말을 건다. 이름이? 이름이? 

 "몰라. 어떻게?"
 "…아…." 

 여자는 잠시 나갔다가 오더니 나를 붙들었다. 에? 왜? 혼나? 혼나? 

 "물은 여기. 비누는 여기." 

 비누?
 눈만 깜빡깜빡. 물로만 여자를 보며 조심조심 씻기 시작한다. 그녀는 잠깐 지켜보다가 말한다. 

 "죄송합니다." 

 뭐가? 잘못했어? 그녀는 나를 잡고, 씻겨주었다. 창피하다. 하지만 기분 좋아. 작게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많이 들었던 노래. 익숙한 노래. 흥흥흥, 소리만 있는 노래. 

 "……."
 "……?"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자 그녀가 어느샌가 손을 멈추고 나를 보고 있었다. 노래 부르면 안돼? 조용히 해. 

 "예쁜 목소리." 

 작게 그녀가 중얼거렸다.
 다 씻고 나가니까 리그오빠가 있었다. 아까랑은 다른 옷. 그런데 이상하다. 뭐가 이상하지? 모르지만 이상했다. 재밌어 보인다. 나도 해볼까? 하지만 어떻게 하는 지 모르겠다. 리그오빠와 아주머니는 무언가 얘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잘 모르겠어. 빨라. 

 "딸기야―, 같이 갈래?" 

 다른 건 다 못 알아들었지만 이것만은 알았다. 응! 같이 갈래. 

 "응." 

 리그 오빠의 손을 잡는다. 같이 가자. 어디론가 같이 가자.
 어디선가 노래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다.

「딸기야, 같이 노래할까?」
「응! 노래! 노래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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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하늘을 나는 사이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 잠깐 사이 꿈을 꾼다. 분홍빛 하늘을 헤엄치는 꿈. 그 곳에는 천사가 날았고 달콤한 향이 났다. 그 환상 같은 꿈에서 채 깨어나지 못한 아이의 어깨를 감싸 안는 손이 있었다. 

 “괜찮니?”

 상냥한 목소리에 아이는 반짝 눈을 뜬다. 코끝에 아직도 감도는 꿈속의 향기.

 “자는 걸 깨워서 미안해.”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하나도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아이는 그런 것은 제대로 눈치 채지 못한 듯 멍한 얼굴로 여인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입. 아이는 입을 벌려 소리를 내려고 노력한다. 쉽게 되는 일은 아닌 듯 바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 하지만 아이는 포기하지 않고 입을 뻐끔거리다 드디어 소리를 낸다. 여인은 그것을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어차피 날아가는 중이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기는 했겠지만.

 “괜찮아. 안 졸려.”

 더듬거리며 이어지는 말에 여인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렸다. 아이의 목소리는 작고 가늘었지만 카나리아처럼 고왔다. 그녀는 아이를 끌어당겨 머리를 쓸어주었다. 산과 숲에서 혼자 자란 아이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어 붙들고 있는 어깨도 다른 손에 닿은 머리카락도 흙투성이였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지 말 했던가?"

 아이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코세르테르로 가고 있어."
 
 "코세르테르?"

 아이의 흙먼지나는 몸에서 유일하게 맑게 제 빛을 내는 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주목했다. 여인은 웃으며 설명한다.

 "들어본 적 없니?  거기엔 정령들이 있고 수인과 어린 용들, 그리고 선생님인 용술사들이 있지. 사실 나도 가보는 건 이게 처음이야. 코세르테르에 대해서는 인간 세상에서도 전설처럼 전해온다고 하던데."

 아이는 대꾸가 없었다. 전혀 달라진 것 없는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는 아이의 눈빛에서 제촉이 느껴졌다.

 "하긴 넌 모를 수도 있겠구나."
 "용, 이야?"

 응? 하고 여인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앞뒤 설명이 없는 아이의 말을 잠시 알아듣지 못한 여인이었지만 곧 스스로 답을 찾아낸다.

 "나 말이니?"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당황했다가, 이내 웃어버린다.

 "아아, 그러고보니 용을 본 적은 없겠구나."

 그리고는 까르륵 하늘 저 멀리까지 퍼져나갈 웃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아이는 얼굴이 발갛게 되었다.

 "바람 정령―, 이라고 생각했어. 날개 없어서 이상했지만…."
 "그럼 날개 없는 바람의 정령이 어디있니."

 그리고 다시 깔깔거리는 웃음이 이어진다. 그리고 여인의 웃음소리가 이어질수록 아이의 어깨는 움츠러들었다. 한참을 웃다가 서서히 웃음을 멈춘 여인은 아이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아이가 고개를 들자 여인의 은빛 눈과 마주쳤다. 세로로 긴 동공이 인상적이다.

 "그래, 나는 네가 있던 숲 근처에 살던 풍룡이란다. 내가 널 이대로 데리고 살수도 있겠지만―, 역시 인간의 아이를 데리고 사는 건 마을 사람들이 찬성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게 얘기하고 여인은 아이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덧붙였다.

 "그리고 너도 적으나마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게 좋겠지."

 아이는 얼핏 듣고 고개를 갸웃 했지만 여인은 이내 아래를 가리켰다. 저 아래, 벌써 코세르테르가 보인다. 자라고 싶었던 장소, 축복받은 땅. 이 인간의 아이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어린 시절을 가질 수 있을거야. 그녀는 빠르게 땅으로 떨어졌다. 아이가 무서운 지 그녀의 옷자락을 꼭 붙들었다. 가까운 집 앞에 내려주고 이윽고 아이와 작별. 아이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를 붙들지는 않았다. 이름도 묻지 않고 헤어지는 것은 더 정을 붙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짧은 만남에 큰 아쉬움은 너무 슬프니까.

 아이, 에어트베레라는 이름의 소녀가 처음으로 이름을 말할 상대를 만난 것은 그리고 조금 후. 그녀가 떠나간 하늘에서 떨어진 소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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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와 변함없는 하루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잤다.
 언제나와 변함없는 하루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잤다.
 언제나와 변함없는 하루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잤다.

 언제나와 조금 다른 하루였다. 하늘을 날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하늘을 보는 것. 울창한 나뭇잎을 해치고 올라가 막 동이 트기 시작하는 붉은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하루의 시작. 땅에 내려오면 아직 어두운 숲 속을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찾는다. 천천히 걸으면서 구석구석 살피다보면 먹을 것이 있다. 나무 뿌리 사이에 숨은 버섯, 먹을 수 있는 꽃, 나무 열매. 아직 여름이 깊지 않은 때여서 종류만 잘 가리면 풀이나 나뭇잎도 먹을 수 있는 것이 많다.
 낮이 되면 적당히 배를 채운 후 햇볕이 따뜻한 자리에서 노곤노곤 낮잠을 잔다. 요즘은 아직 덥지 않아서 낮에 움직이는 것이 훨씬 먹을 것이 많지만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자는 낮잠을 포기할 수 없다. 이제 여름이 되면 더워서 할 수 없을테니까.

 「일어나, 일어나라니까」

 흔드는 손에 눈을 뜨니 눈앞에는 나무의 정령. 요 몇일 뿌리를 배게삼아 잠들었던 나무의 정령이었다. 그의 옆에는 성인 여자의 모습을 한 바람의 정령이 있었다. 한참 빠르게 말하는 것을 쳐다보고 있으니 나무의 정령이 천천히 말을 걸어왔다.

 「혼자 살지?」

 끄덕 끄덕.

 「사람들하고 같이 살고 싶지 않아?」

 도리 도리.

 「왜? 사람들하고 같이 살면 안 굶어도 되고 편하잖아」

 도리 도리.

 「왜? 힘들면 천천히 말해봐」
 「으…」

 두 정령은 기다려 주었다. 천천히 말을 찾을 수 있었다. ―말한 것이 언제적 일이더라?

 「무서…워」
 「무서워? 사람이?」

 끄덕 끄덕. 무서워. 사람들은 무서워. 그러니까 마을에는 가면 안돼.

 「무슨 일이 있었니?」

 사람들은 침을 뱉고, 때리고, 무서운 눈으로 쳐다본다. 그러니까 무서워. 그렇지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설명을 하려다가 무서워졌다. 정령들은 자기들끼리 빠르게 무언가를 얘기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얘 떨고 있어요」
 「그럼 그만 두죠. 이정도면 괜찮다고 보는데. 이대로 혼자 생활하게 두는 것도 불쌍하니까 데려가 주세요」
 「그러게요. 이런 모습을 보고 이대로 두는 것도 그 나름대로의 죄겠지요」

 그리고 여자가 다가왔다.

 「나랑 같이 가자. 혹시 높은 곳 무서워해?」

 도리 도리.

 「자, 그럼 손 잡고」

 여자의 손은 따뜻했다. 조금 신기하고 어색해서 손을 움츠리자 더욱 세게 잡아왔다. 여자는 나무의 정령에게 인사를 하더니 나와 눈을 맞추고 웃었다. 예쁜 사람이었다.

 「가자」

 하늘을 날았다. 처음으로 가까워진 하늘은 생각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날아갈 수 있다면 금방 닿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하늘은 높고, 또 넓었다. 바람이 시원했고, 꼭 잡은 여자의 손은 따뜻했다. 발 아래 넓은 세상은 아래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숲도 도시도 그저 신기하기만 할 뿐. 그 커다랗던 나무가 내 발보다도 작아보였고 도시의 사람들은 너무 작아서 보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오랜 시간 비행하는 동안 나뭇잎 아래서 보던 것과는 달리 뚜렷하게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높디 높은 산맥을 넘어 도착한 작은 마을에는 상냥한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그 날은 처음으로 행복을 느낀 날이자 처음으로 무섭지 않은 사람을 만난 날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것은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만남이자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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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르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이상하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당연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다른 이들에게 이상하게 생각된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소년은 말가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드높게 펼쳐진 푸른 하늘은 그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처럼 뛰어놀지 못했다. 하늘 아래 서있는 것만으로도 무서웠으니까. 이렇게 그늘에 숨어야지만 간신히 바라볼 수 있었다. 비웃어도 괜찮았다. 하늘보다는 덜 무서웠으니까.
  연녹빛으로 물든 넓은 평야도 무서웠다. 숨을 곳 하나 없이 광활한 대지는 소년에게 사지가 얼어붙는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래서 가끔 어른들이 거래를 위해 산을 내려갈때면 방안에서 창문 밖으로 눈만 내놓고 같이 가게 해달라고 때쓰는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그런 곳이 무에 좋아서 저토록 가고 싶어하는 지 소년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땅의 낮음에 반항하듯 치솟은 산꼭대기도 무섭기만 했다. 70년을 산속에서 살았지만 소년은 사방 막힌 것 하나 없이 세상과 직접 닿을 수 있는 산의 정상에는 단 한번밖에 오르지 못했다. 오른다고 생각만 해도 숨이 가빠올 지경이었다.
  소년은 전방에 뭐가 펼쳐진지도 알 수 없을만큼 울창한 숲이 좋아했다. 그대로 녹아서 숲과 하나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기왕이라면 화인이 아니라 나무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어두움이 안락함이었고 조용한 소란이 자장가가 되어 소년의 발목을 잡는 곳이었다. 그래서 소년은 숲에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 너무 좋아서 무서웠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게 만드는 쓴 것을 좋아했다. 가끔은 씁쓸함이 과해 기침이 났지만 그것도 좋았다. 간식으로 단 과자나 빵 같은 것이 나오면 소년은 근처 숲으로 나와 쓴 풀을 씹었다. 단 것은 냄새만 맡아도 질렸다.

  그래서였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소년을 타겟으로 한 것은. 그녀는 어쩌면 소년의 이런 본질을 한눈에  꿰뚫어 보았을지도 몰랐다.

  그것은 아주 평범한 일상의 어느 날 찾아온 것이었다. 낯선 이가 마을 한복판을 걷고 있었다. 이웃마을―산을 세개쯤 넘어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에서 가끔 찾아오는 다른 화인족이 아니었다. 여인과 아이, 모녀로 보이는 두 사람은 마을 사람들 중 누구도 본 적이 없는 확실한 외부인이었다. 시원하게 틀어올린 머리 탓에 여인의 뾰족하게 솟은 귀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보다도 눈길을 끄는 것은 아이의 등에 달린 새하얀 날개. 걸음에 맞춰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모두들 시선을 빼앗겼지만 아무도 말을 걸지는 못했다. 어른들은 지켜보고 아이들은 주위를 맴돌았다. 10년에 한번도 볼 수 없는 외부인, 그것도 다른 종족에게 면역이 없는 건 어른이나 아이나 똑같았다. 그나마 이럴 때에는 아이들 쪽이 조금 더 대응이 빠른 법이었다.
  한 아이가 용감하게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두 사람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아이들이 뒤를 졸졸 쫓아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지만 부릅 뜬 눈과 마주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주먹을 불끈 쥔 아이의 모양새가 우스웠다.

  "네, 네놈들은 누구냐! 이 마을엔 왜 왔지!"

  아이는 긴장한 듯 목소리는 떨렸지만 말은 분명하게 했다. 아이를 걱정해서였을까 조금씩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잠시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두 이방인 중 한 사람이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뜨리기 전까지는. 발작적으로 웃기 시작한 그녀는 땅바닥을 구를 듯한 기세였다. 아직 조그마한 그녀의 딸이 말렸지만 전혀 그칠 기미가 없었다.

  "푸흐크하하하하하학, 쟤, 쟤, 얼굴, 으하하, 푸크크크크큿, 히히힉."
  "어머니. 그만 하세요. 어머니!"

  작게 한숨을 쉰 소녀는 미소를 띄고 사람들 앞에 허리를 숙였다. 못난 어머니 때문에 죄송합니다, 라고. 그것이 이 작은 산골 마을과 그들 모녀와의 첫만남이었다.

  어미의 이름은 에피, 딸의 이름은 라파엘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오랜 여행에 지쳤을 사람들을 환영하지 못하고 경계한 것에 대한 사과로 할수 있는 한 두 사람을 후하게 대접했고 심지어 한동안 머물 수 있는 방까지 마련해주었다. 그들은 사양하지 않고 2-3일 머물다 가기로 했고 그 사이  두 사람은 마을의 인기인이 되었다. 에피의 세상 이야기는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귀를 기울이는 여흥거리였고 라파엘은 눈에 띄는 흰 날개 덕에 아무 말 없이 서있기만 해도 아이들이 모였다. 그 뿐 아니라 라파엘은 덜렁거리는 어머니를 챙기는 착실한 아이로 어른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산골밖에 모르는 순박한 사람들에게는 사근사근 상냥한 말씨는 세련됨으로 단정한 몸가짐은 귀족적인 품위로 보이기에 무리가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 에피도 털털했지만 도시 사람의 분위기가 풍겼다. 라파엘은 마을 사람들에게 마지막까지 마음 착하고 성실한 아이로 떠나갔다.

  마을 사람들의 부탁으로 모녀가 일주일째 마을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와장창,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모여들었다. 어른 없이 아이들만 잔뜩인 그 곳은 일명 '선생님'의 집이었다. 선생님은 마을에 정착한 외부인으로 밖에서는 무언가의 학자라고 했지만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는 약을 지어주는 의사였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돌발 상황이 닥쳤을 때 조언을 구하러 가는 사람이기도 했다. 낮이면 일에 바쁜 어른들을 도울 수 없는 어린아이들이 그의 집에 모여 옛날 이야기를 듣고 주변 식물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는 했다. 선생님이 자리를 비워도 아이들은 그의 집 주변에 모여 놀았다. 그 날은 선생님이 산을 오르는 날이었다. 즉,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의 집을 한가득 메운 화분 중 서너개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라파엘이 쓰러져 있었다. 그 앞에는 아이들이 모이자 어쩔 줄 몰라 눈만 데록데록 굴리는 소년이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애러랫. 그는 아무 생각없이 숨을 곳을 찾아 발을 떼었다가 화분의 파편을 밟고 주저앉았다. 파악하기 힘든 상황에 웅성거리기만 하던 아이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선생님을 불러와. 개중에서 나이가 많은 아이였다. 그제야 주섬주섬 아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째서 라파엘이 쓰러졌는 알 수 없었지만 화분을 깨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비를 들고와 바닥을 쓸어냈다. 몇몇 여자아이들이 라파엘을 일으켰다.

  "라파엘, 어디 다쳤어?"
  "…응…, 여기…어디."
  "선생님 댁이야. 괜찮아?"
  "머리가 조금 아파. 그치만 아마 괜찮을거야."
  "다행이다, 어디 다친 줄 알았어."
  "화분에 머리를 얻어맞긴 했는데……."
  "히?!"

  아이들이 라파엘의 머리카락을 들춰보고 피가 난다며 야단이었다. 라파엘은 얌전히 앉아 곤란한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라파엘에게 쏠린 사이 애러랫은 잘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숨어 들었다. 낑낑거리며 발에 박힌 화분의 파편을 빼냈다. 흙먼지가 앉은 맨발에 빨간 피가 베어나왔다. 왈칵 눈물이 솟는 것을 소매로 문질렀다. 이정도 아픈 건 당연한 거야. 바보같이 화분이 깨진 곳을 맨발로 걸어다녔는걸.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애러랫은 그대로 웅크린 체 소란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고개를 내밀어 살피기도 무서워 구석에 틀어박힌 체 라파엘과 아이들이 나가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저…, 아까 그 애는 어디로 간거야?"

  조용한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애러랫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왜? 왜 나를 찾지? 아이는 당황해서 더욱 어둠이 깊은 곳으로 기어들어갔다.

  "누구?"
  "애러랫이라면 몰라. 어딘가 숨어있겠지. 맨날 구석에 틀어박혀 있어."
  "좀 이상한 애야, 신경쓰지마."
  "그치만……."

  구석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귀를 틀어막았다. 무슨 말이 이어질지 듣고 싶지 않았다. 라파엘이라는 여자아이는 분명히 마을 사람들 전부의 신뢰를 얻을 만큼 착하고 그냥 보더라도 믿음이 가도록 예뻤지만 어째선지 애러랫은 그녀가 무서웠다. 하늘을 닮은 푸른 두 눈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는 날개 탓일지도 몰랐다.
  이유야 어찌되었 건 애러랫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녀 앞에 서자 몸이 굳었다. 그리고 그런 애러랫을 보고 라파엘은 웃었다. 평소랑 다름없이, 그저 예쁘게. 다가오지도 않고 모른 척하지도 않고 똑바로 바라보며 웃었다. 얼어붙은 애러랫을 앞에 두고 감상하기라도 하듯 상냥하게 웃고만 있었다. 누군가 그녀를 부르기까지 짧은 순간 동안 두 사람은 그렇게 서있었었다.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몇일이나 지났다고 또 그녀와 단 둘이 있어야 했다. 애러랫은 그 사실이 너무 버거웠다. 그래서 눈물을 꾹 참았다. 어째서 그래서인지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눈을 뜨니 석양이 드리운 하늘이 보였다. 애러랫은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어질,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선생님의 침실이었다. 몸이 약한 탓에, 그리고 애러랫이 그나마 친하게 지내는 유일한 사람이 선생님인 탓에 자주 누워있었던 곳이라 금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있었다.
  푸른 하늘을 닮은 눈을 가늘게 뜨며 라파엘이 웃었다.

  "안녕?"

  다정한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평소였다면 은폐물을 찾아 숨을 준비부터 했을텐데 그녀 앞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몸은 움직여지지 않는 대신 와들와들 떨리기만 했다. 저것과 똑같은 얼굴로 자신의 손가락을 화분에서 떼어내던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그 화분은 그대로 떨어져 라파엘의 머리에 맞았었다. 놀란 애러랫이 사다리에서 내려오다 화분을 두개나 더 깼다.

  "왜 그렇게 떠니?"

  걱정스러운 표정에 마찬가지로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 선생님이 들어와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애러랫에게도 몇가지 물어왔지만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라파엘의 눈치를 보았지만, 그녀는 애러랫에 대해 미안한 감정만 비쳤다. 자신의 실수로 애러랫이 화분을 놓쳤노라고 말하고 있었다. 애러랫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선생님이 눈에 띄게 떨고 있는 애러랫을 걱정했지만 그는 그저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 라파엘은 애러랫에게 거듭 사과했다. 선생님은 양쪽 모두 실수일 뿐이니 서로 사과하고 넘어가라며 두사람 사이를 중재했다. 애러랫은 계속 고개만 끄덕였다.
  그 날 밤, 애러랫은 무서운 것 목록에 새로운 것을 추가했다. '상냥한 말씨, 친절한 미소.' 1순위에 올려놓은 그 것이 가까운 곳에 보인다면 바로 도망가자고 몇번씩 다짐했다. 하지만 애러랫은 반년 가까운 시간 동안 단 한번도 그것을 실천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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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사를 제공받고 따뜻한 물에 몸을 씻을 수 있게 되자 그제야 살았다, 라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이 폐만 끼치는 비루한 생명이 그다지 오래살기를 바라지는 않았으나 살아있다는 당연한 본능인지 분에 넘치게 편안한 삶을 살아온 탓인지 저도 모르게 편한 것을 찾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쉬이 이곳을 떠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이것저것 베풀어준 미류씨와 풍룡 꼬마들에게는 미안하게 되었다. 당분간 계속 민폐를 끼치게 될 것 같은데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어서 거듭 사과하자 이 속 좋은 사람들은 큰소리로 경쾌하게 웃어버렸다. 그저 웃음소리만 들었을 뿐인데도 같이 웃게 되고 마는 밝은 사람들이었다.
  기운찬 아이들에게 이끌려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복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는데 집안을 이곳저곳 헤집고 다니게 되었다. 죄송한 마음에 슬쩍 미류씨 눈치를 보자 오히려 그는 젠이라는 아이에게 혼나고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옷에 이상한 거 묻히면 안돼."

  간신히 아이들에게서 벗어나 옷차림을 정돈하는데 제인이라는 발치에밖에 안오는 작은 아이가 옆에 와있었다.

  "아, 이건…, 더러운 게 아니예요. 옷에 바르는 것도 아니고요."
  "그럼?"

  고개를 기웃거리는 아이의 머리를 쓸어주자 아이가 헤헤, 소리내어 웃었다.

  "뭔가 냄새가 난다!"
  "박하향이예요. 시원하지요?"
  "응! 어떻게 나는 거야?!"
  "향수예요. 박하민트의 향을 담은거지요."
  "헤에―."

  자그마한 병을 보이자 섬세하게 세공되어 빛을 산란시키는 유리가 시선을 끌었던지 아이는 향수병에서 떼지 못했다. 아이에게 넘기니 작게 환호성을 질렀다. 가서 다른 아이들에게 보여주어도 되냐고 묻기에 고개를 끄덕였더니 작은 발을 놀려 포르르 방을 빠져나갔다.
  가방 깊숙히 손을 넣어 뒤지자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옷들을 헤치고 끌어낸 병에는 투명한 술이 반쯤 차 찰랑였다. 살짝 웃음이 피는 것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 살짝 문밖의 사정을 살피고 아무도 없는 새 조심스레 집을 빠져나왔다. 어쩐지 아이들이 많은 집에서 술을 꺼내는 것 자체가 범죄 같아 당당해질 수 없었다. 아마 금새 들어올 테니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잠깐 둘러본 것 뿐이었지만 이 작은 마을은 어딜가나 나무가 우거져 경치가 좋았다. 파릇한 풀위에 앉아 느긋하게 마시는 술은―, 안타깝게도 여전히 썼다. 코를 시큰하게 울리는 알콜 특유의 향에 인상이 자동으로 찌푸려졌다. 그래도 기분은 괜찮았다. 작게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가락을 흥얼거렸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지나가던 정령들이 기웃거리길래 인사하자 자연스럽게 같이 인사해왔다. 이 곳 정령들은 사람을 겁내지 않는구나. 친근하게 옆에 앉아서 말을 걸어오는 정령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가 제 갈길을 찾아간다. 하나가 떠나면 하나가 말을 걸어와 제법 오래 대화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결국 다들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조금 어둑어둑해진 듯해 미류씨나 젠이라거나 걱정하지 않을까 싶긴 했지만 나같은 걸 누가 일일히 기억하고 있겠어. 한모금 밖에 마시지 못한 술병을 다시 들었다. 크리스탈 잔에 또로록 떨어지는 방울이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 아름다웠다. 어차피 이 한잔 비우고 나면 제정신이 아니겠지만서도, 아무렴 어떠랴.
  쭈욱 들이켰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감각이 기분 좋았다. 벌러덩 드러누웠다가 한잔 더 마셔야지 싶어서 옆으로 돌아누웠다. 에, 술병을 어디다 뒀더라? 더듬더듬 더듬어 찾았다. 술병이 잡히자 안도감에 헤헤 웃어버렸다. 하지만 눈물이 나는 건 어째서? 훌쩍훌쩍 혼자 울다가 어느 샌가 까빡 그곳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미류씨께 잠깐 나왔노라고 말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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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루나.

  안녕, 루나. 결코 네게 보낼 수 없는 편지가 이로써 몇통째인지 모르겠구나. 용기라고는 네 예쁘게 다듬은 새끼 발톱만큼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이런 것 뿐이지. 이만큼 쓸 수 있는 것도 네가 볼 수 없기 때문이니까. 못본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넌 아직도 매력적 일거야. 눈앞에 아른아른 네 모습이 보이는 것 같구나.

  사실은 여행을 잠시 멈추게 되었어. 다시 시작하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여비도 슬슬 떨어져 가니까…. 잡일이라도 하고 싶지만 너도 잘 알다시피 나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결국 아무것도 안하느니만 못하게 될테니까. 사실 그래서 돌아갈 여유도 안되고 어딘가 머문다는 것도 불가능해서 이래저래 걱정이었는데 이 곳 사람들은 다들 마음씨가 좋아서 애보는 것만 좀 도와준다면 얼마든지 머물다 가도 좋다고 말해주었어. 산속에 고립된 마을인 탓일까, 다들 눈이 선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어. 이 마을 이름이 「코세르테르」래. 동화 속에 등장하던 전설의 도시. 처음에는 그냥 그 도시의 이름을 따서 세워진 마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놀랍게도. 어떻게 아냐고? 지금 내 옆에서 불만스러운 얼굴로 툴툴거리고 있는 꼬마아이가 용이래. 내 앞에서 날아다니는 걸 보았어. 신기하지 않나? 아까 다른 아이가 스승이라는 사람을 소개해 주었는데 용술사라더라. 일순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걸까 생각했단다. 너라면 그냥 웃어버릴 지도 모르겠지만….

  너도 친구들도 이곳에 올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우리가 함께 모여 공부하던 그 때처럼―. 하지만 무리겠지. 다들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무엇보다도 이 곳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모양이니까. 이렇게 평화로운 곳에서 다시 같이 지낼 수 있다면, 하고 자꾸만 아쉬움이 생긴다.  인간의 힘으로는 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험한 산세너머 자리잡은 전설의 장소에 모두를 초대하고 싶은데 말이지. 솔직히 그런 사실이 전혀 믿어지지 않는 평범한 시골 마을의 풍경이긴 하지만 말이야.

  마을에 관해서 바깥에 알려지면 곤란하다고 몇번이나 주의를 들었어. 소중한 아이들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다들 애쓰고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져. 나도 모르게 우리들의 고향이, 아니, 네게는 고향이 아니겠지만. 어쨌든 생각나 버리더라. 어쩌다 내가 이 곳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이것도 필시 무언가의 인연이겠지.

  그러니까 뭔가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 처음에는 그냥 엄청 높은 산이 옆에 있구나, 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나무가 많은 곳 특유의 생동감이 넘치는 산이었다. 아니 생동감이 넘치는 정도를 넘어 험하기가 과할 정도였다. 가브리엘은 멀리서 보던 까마득한 높이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일부에 침묵이 생긴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나 커다란 산이니 말이다. 가브리엘은 잠시 위쪽 오르막을 바라보다가 이내 눈앞의 상대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안녕?"

  베시시, 가브리엘은 어린아이마냥 헤설프게 웃었다. 바보같아 보였으려나, 걱정했지만 바람의 정령인 듯한 꼬마는 그저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빤히 그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손바닥만한 꼬마가 공중에 둥실둥실 뜬 체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지만―, 가브리엘은 '당신은 뭐야?'라고 묻는 듯한 시선에 결국 버티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아하하, 어색하게 소리내어 웃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몇일씩 관리하지 못해 부스스한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에 감겼다. 이거야 원, 애들이 보면 난리가 나겠는데. 머릿결이 조금만 상해도 호들갑스럽던 그녀들을 떠올리니 절대 그리워 할일은 없을 줄 알았던 집이 그리워졌다. 추억에 잠기는 것이 무서워 가브리엘은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타고 아이의 투명한 날개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가브리엘은 조심스레 손을 뻗다가 멈칫, 이내 거두었다. 닿기는 커녕 제대로 알아차리기에도 먼 거리에서 손을 물린 터라 바람의 정인 작은 아이는 그제야 깨닫고는 두 눈을 깜빡이며 가브리엘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포르르 날개를 흔들며 날아가버렸다. 가브리엘은 쓰게 웃으며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다시 발길을 떼었다. 일단 마을이 나와야 주린 배를 채울텐데, 하는 현실적인 생각만을 머리에 가득 담은 체.

  굶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현기증이 일었다. 가브리엘은 나무에 기대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뭇가지 너머로 보이는 파란 하늘은 엷은 흰 구름이 군데군데 깔린 것 외에는 도화지마냥 깨끗했다. 가을처럼 짙푸른색은 아니지만 저 엷은 쪽빛마저도 눈이 부셔서 가브리엘은 힘겹게 눈을 감았다. 어쩐지 몸이 무거웠다.

  '여기서 자면 안되는데…….'

  그리고 눈을 뜬 곳에서는,

  "스―승―님―! 손님이 일어났어요―!"
  "젠, 스승님이 또 요리해!"
  "말려야지~!"

  고양이마냥 길쭉한 세로 동공의 실버블루빛 두 눈을 바라보며 가브리엘은 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가 뾰로통하니 쏘아붙였다.

  "이봐요, 괜찮아요?"
  "아, 네…, 아마."
  "식사는 할 수 있겠어요?"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는 알았다는 듯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바깥은 여전히 소란스럽기만 했다. 아무도 이곳이 어딘지, 어쩌다 그가 이곳에 있게 되었는지 설명해주지 않은 체 가브리엘은 덩그러니 방안에 혼자 남겨졌다. 어리벙벙했지만 늘 그렇듯 그러려니 하고 그는 침대 곁의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뒤로도 식사니 뭐니 소란은 계속 되었고, 덕분에 가브리엘이 정신을 차리고 가방 안에 고이 보관해둘 편지를 쓸 수 있게 된 건 깨어나고 약 하루가 지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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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러랫은 욕실에 서, 벽면을 가득 채운 거울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뿌연 김이 서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몸을 적시고 있는 뜨거운 물의 방향을 돌려 거울에 흩뿌렸다.  물방울이 매끄러운 면을 타고 흐르며 하얀 벽 안에 주변 풍경이 담기었다. 하얀 곱슬머리를 엉덩이까지 늘어뜨린 계집애 같은 남자아이가 서있었다. 아니, 남자아이라기보다는 바짝 마른 어린아이. 눈썹을 일그러뜨린 곤란한 얼굴로 애러랫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노란 두 눈과 마주보는 것이 싫어 조용히 눈을 피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짜증이 올라왔다. 거울 안에 서있는 바싹 마른 소년의 몸은 오랜 흉터자국, 고작 3시간 전에 만든 새파란 멍 자국에 멀쩡한 피부가 이상해보일 정도로 엉망이었다.

  “저는, 언제나 한심하기 그지없네요.”

  늘 그렇듯 목소리는 희미하게 목 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애러랫은 시퍼렇게 된 팔뚝의 멍을 손톱으로 꾹 눌렀다. 시린 아픔에 눈썹이 꿈틀, 일그러졌다. 아이는 선명하게 남은 손톱자국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살짝 입술이 벌어져 파란 것을 머금었다. 연인에게 하듯 강하게 빨아들였다. 베어 나온 체액에 반들반들해진 멍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애러랫의 입이 미묘하게 움직였다가 이내 살짝 벌어진 체 멈추었다. 할짝, 붉은 혀가 입술을 핥았다. 가볍게 내리깐 두 눈이 다시 거울을 향했다. 거울에는 다시 김이 끼어 모습을 뿌옇게 밖에 비추지 못하고 있었다. 애러랫은 조용히 팔을 씻고 욕실을 빠져나왔다.




  하얀 목욕가운을 두른 체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민폐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침대에 앉았을 때였다. 똑똑똑. 문을 통통 두드리는 소리였다. 룸메이트들이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모두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들려온 노크소리였다. 애러랫은 종종걸음으로 달려 문을 열었다. 습관적으로 내뱉은 신원확인의 말은 그저 습관적인 것. 당연히 아이는 룸메이트 중 한사람, 혹은 몇 사람일거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앞에 선 것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키가 한참이나 컸기 때문에 얼굴을 확인하는 것만도 고개를 뒤로 꺾어 올려보아야 했다. 약간 딱딱한 표정을 한 거친 갈색 머리칼에 짙은 색의 피부를 가진 청년이었다. 가끔 다른 사람들 속에 섞여 보았던 사람이었다. 직접 대화해본 기억도 드문 사람.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바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 아…….”

  애러랫은 상대가 느린 말버릇의 탓이라고 생각해주길 간절히 빌었다. 손톱을 세워 손등을 꼬집었다. 얇은 피부가 금새 빨갛게 달아올랐다. 생각이 나지 않으니 몸이 안달하여 입만 뻐끔뻐끔 벌어졌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테, 테나, 씨…께서, 이, 이 밤, 중에 무슨 일, 이신, 가요?”

  흘깃 바라보니 이름이 틀린 것 같지는 않았다. 힘이 과하게 들어가 손톱이 엇나가며 손등의 피부가 찢어졌다. 혹시나 테나씨가 눈치 챌까 손을 몸 쪽으로 끌어당겨 손톱으로 상처를 헤집었다. 손이 작게 떨렸지만, 늘 있는 일이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아, 앞에, 세워, 두, 다니, 죄, 죄송, 합, 니다.”
  “아니, 그냥 좀……, 방문…….”

  그냥 방문. 다른 룸메이트들을 찾아온 것인지 애러랫을 찾아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방에 찾아온 것은 분명한 듯 했다.

  “드, 들어, 오세요―.”

  애러랫은 문을 열고 문 옆에 서서 그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테나가 완전히 들어오기를 기다려 문을 닫자 그제야 공기가 매우 어색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제대로 대화해 본 적도 없는 사람과 좁은 공간에 단 둘. 심장이 쿵, 쿵, 무겁게 뛰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애러랫은 정신없이 자리를 벗어날 방법을 찾기 위해 정신없이 생각을 거듭했다.

  “차―, 차, 내올게요!!!”
  “넌.”
  “에?!”
  “참 방어의식이라든지 그런 게 없구나. 이 방에는 너와 나 둘뿐인데 말이야.”
  “네…….”

  둘뿐. 둘이 있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의미심장해 보이는 말에 애러랫은 잠시 행동을 멈추었다. 둘, 둘이라서, 방어의식이 발동할 만한 것.

  “에, 에, 넷?!”

  테나가 픽, 웃었다. 애러랫은 급히 그렇지 않다고, 테나씨가 혹여 라도 나쁜 짓을 할리 없지 않느냐고 그렇게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할 수 없었다. 테나가 어쩐지 기분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애러랫의 둥근 두 눈이 깜빡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직접 마주쳤다.

  “……해줄게. 그러니깐, 나랑 형제하자.”
  “…….”
  “어리바리하니 있지 않아도 돼. 음, 나도 좀, 창피하긴 하다. 아, 혹시 싫다거나?”
  “흐엣, 그, 그런, 그런 것 아니예요!! 저, 저는 그, 그저 황송할, 뿐, 인, 걸요…….”

  테나가 조금 멋쩍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드럽게 웃는 얼굴은 어딘가 편안해 보였다. 애러랫은 한손으로 피가 터진 손등을 덮어 쥐고 테나의 눈치를 살폈다. 말을 해도 되는 것인지 고민스러웠다.

  “에, 저….”
  “음?”
  “그러……, 니까…….”

  신 것도 없는데 고인 침이 꼴깍, 목을 타고 넘어갔다. 어쩐지 저 만족스러워 보이는 테나에게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잠깐, 말하지 않는 건 괜찮, 겠죠? 금방 알게 될 테니까요…….’

  테나의 손이 애러랫의 어깨를 도닥였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아, 아뇨. 딱히…그, 그냥, 죄, 죄송…하다, 구, 요….”
  “뭐가 죄송하다는 거야.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에, 에,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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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러랫은 고개를 푹 숙인 체 바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심장이 격하게 뛰고 있었다. 이대로 평생 뛰기로 정해진 횟수를 다 뛰고 멎어버릴 것 같이 빨랐다. 실종된 학생회장이 남긴 편지, 학교를 점령한 슬라임들, 학교에서 제작해둔 슬라임 제거제. 그것을 가지고 뭘 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그 규모의 거대함만으로도 너무 무서워서 몸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어디든지 구석에 숨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었다. 사람이 많았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이봐, 괜찮나?”

“헉……!”


갑자기 팔을 잡아오는 손에 애러랫은 급히 숨을 들이켰다. 눈을 크게 뜨니 해솔원의 교복이 보였다. 고개를 드니 인상을 찌푸린 붉은 눈과 마주쳤다. 애러랫은 앞뒤 가리지 않고 상대방에게 매달려버릴 뻔했다 정신을 차렸다. 붉은 눈에 키가 큰 그 사람은 애러랫이 익히 잘 아는 두 사람 중 누구도 아니었다. 동생인 다크군보다도 키가 컸고, 성연양만큼이나 꼬리가 치켜 올라간 눈을 사납게 찌푸리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밤하늘에 녹아드는 새카만 머리칼을 지닌 두 사람과는 정반대로 달빛에 반짝이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졌다. 그의 머리 뒤로 뜬 노란 달을 보고 애러랫은 한순간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고 말았다. 그는 달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달 옆에 세워두기 위해 만들어낸 조각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달빛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애러랫은 그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서야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정말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아름다웠다. 어울렸다.


“정신 차려. 넋 놓고 있지 말고.”

“아…, 죄, 죄송합니다!”

“…….”


찌푸린 두 눈이 자신을 향하기 전에 작은 소년은 몸을 웅크렸다. 붉은 눈의 낯선 이는 말이 없었다. 굳게 다물려있던 핏기 없는 입술이 빠끔하니 벌어졌다. 잔뜩 움츠러든 애러랫의 어깨에 차가운 손이 닿았다. 아이는 놀라 눈을 질끈 감았지만 그 손은 애러랫의 어깨를 붙들어 바르게 세울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눈물에 반짝이는 금빛 눈을 바라보던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어 쉬고 잔뜩 인상을 쓴 얼굴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자리를 옮기자. 그리고 부탁이니 진정해.”




하야르 유테, 지금은 해솔원의 입학신청생. 그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내내 미간에 주름이 진 체였지만 의외로 그는 느릿하게, 종종 멈춰가며 이어지는 애러랫의 태도에 화를 내지 않았다. 신경이 예민한 것은 분명해보였지만 그것이 결코 눈앞의 상대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애러랫은 조금씩 깨달아갔다. 공격적인 말투였지만 애러랫이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모습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안절부절 못하고 금방이라도 뭐라 잔뜩 쏘아붙일 줄 알았지만 오히려 애러랫보다 진득하게 그의 말을 기다려주었다. 애러랫은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 할 수 있었다. 그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게 된 거였나.”

“에, 모, 모르, 셨나요?”

“전혀.”

“그, 방금, 다들, 모인 곳에서, 말씀, 하…셨는, 데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나중에 여쭤보려고 했었다.”

“그렇군요…….”


유테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애러랫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도 내내 생각에 잠긴 눈으로 호수를 바라보았다. 더듬더듬, 느리게 말이 시작되면 눈을 마주쳤다가 어느 순간 올려다보면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을 듣지 않는 걸까, 라고 당황하면 더 미간을 찌푸린 표정으로 차근히 그 전 이야기를 언급한 후 뒷이야기를 물었다. 화내는 줄 알았으나 곤란함의 표현이었다. 유테에게는 심각한 현 상황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중요한 고민이 있는 모양이라고 애러랫은 생각했다. 애러랫도 호수를 바라보았다. 똑같은 곳을 바라보면 조금은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대체 무엇 때문에 유테씨가 슬픈 얼굴로 호수를 바라보는 걸지, 조금은 알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아? 무, 무슨, 일이세요?!”

“뭐긴, 가야지.”


애러랫은 갑자기 벌떡 일어선 유테를 따라 섰다. 문득 유테가 크다고 생각했다. 아니, 분명히 크기는 했었다.


“에, 에, 예?”

“슬라임 제거제를 가져와야 한다면서. 가자.”

“아와, 지, 지금, 요!? 지금, 하, 한밤중 이예요!”

“하?”


붉은 두 눈과 마주한 순간 애러랫은 가슴을 움켜쥐며 고개를 숙였다. 눈빛이 찔러왔다, 그런 기분이었다. 미쳤냐, 라고 되묻는 듯한 시선에, 목소리에 가슴이 욱신, 아파왔다. 문득 눈가를 비비니 물기가 베어 나왔다.


“아, 아니. ……."


작게 발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애러랫이 물러나는 것을 유테가 붙들고 있었다.


“준비하러 가자는 거다. 울지 마.”


그의 찌푸린 눈은 곤란한 듯 애러랫을 마주 보지 않았다.




유테는 옆에 선 애러랫을 한번 돌아보고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을 데리고 슬라임 천국인 해솔원에 들어가서 상자를 구해 와야 했다. 막막한 심정이었다. 만약을 대비해 마법반 선생님께 들러 실드 아이템을 여러 개 구해왔지만 실제로 시험해 본 적이 없으니 어느 정도까지 버티는 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촉박해 실험해볼 수도 없었다. 출발하기에 자꾸만 거리낌이 드는 것은 이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을 멀리서 봐도 노란색으로 가득한 저 곳에 끌고 가도 되는 지에 대해 회의감이 드는 탓이리라. 유테는 조심스럽게 애러랫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뭘 해도 바로 옆에서 천둥이라도 친 듯 화들짝 놀라는 건 처음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였다.


“일단 들어가면 행동을 같이할 테니까, 위험하니 가능한 내 옆에 꼭 붙어있어.”

“네, 네……."


가늘디가는 몸이 벌써부터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한번 들어갔다더니 그것이 그리도 어려웠을까. 하긴, 무기가 통하지 않는 적만큼 두려운 것도 없었을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비전투원이었다. 가능하다면 이 떨림을 먼저 진정시키고 출발하고 싶었으나 유테는 자신이 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바람을 일으켰다. 둥실, 몸이 떠올랐다. 본디 순수한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자리에 마법이라는 힘을 빌려 설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미묘한 쾌감. 유테의 입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있었다.

계획은 이랬다. 마법반의 D.시드미안 선생님께 지급받은 실드 스크롤을 이용해 두 사람의 신체 주변에 보호막을 치고 마법을 통해 비상해 제 2행정실과 연구반 교실로 직접 돌입하는 것. 공격조가 없는 마법반과 치료반의 두 사람이 미션을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것만이라면 다른 방법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사람이 뛸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것이 유일하다고 보였다. 실드는 마나를 주입하자마자 시동되는 것으로 유지시간은 풀로 마나를 주입했을 때 약 10여분. 반지름 2미터의 반구형으로 강도는 직접 슬라임과 대치했던 D.시드미안 선생의 말로는 슬라임의 통상 공격에는 깨지지 않는 정도였다. 스크롤은 당연하지만 전부 일회성이며 개수는 총 열한 개. 유테가 일곱 개, 애러랫이 네 개를 챙겼다. 혹시라도 두 사람이 떨어질 경우 애러랫이 전투도 도주도 불가능 하다는 점을 생각해 유테는 애러랫에게 가능한 많은 수의 스크롤을 쥐어주려 했으나 소심하기만 하던 애러랫은 강경한 태도로 그 이상 받는 것을 거부했다.

까마득한 상공을 날아가니 슬라임들의 정황은 보지 않아도 되었지만 대신 애러랫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유테는 핏기가 사라진 애러랫의 어깨를 바짝 끌어당겨 감싸 쥐고 아래를 살폈다. 비행 시의 이동속도는 걷는 것과는 계산이 안 되는 수준이기에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본관 위에 떠있었다.


“여, 여기가 본관, 이예요.”

“제 2행정실이 3층이라고?”

“네.”

“어느 쪽인지 아나?”

“……아뇨, 죄송합니다. 그것까진 모르겠네요….”

“흠.”


마력이 요동치며 실드의 투명한 막이 두 사람을 감쌌다. 비행 고도가 낮아지고 있었다. 혹시라도 벽에 달라붙어 있는 슬라임이 있을까, 유테는 신중을 기했다. 창가에 접근하면서 가까이 노란 것이 보이지 않는지 유심히 살폈다. 갑자기 창문에서 슬라임이 튀어나올까, 바닥에서 발견하고 올라오지는 않을까. 3층도 낮은 것 같아 고도를 조금 높게 유지했다. 신경이 끊어질 것 같이 머리가 아파왔다. 잘 알지도 못하는 장소에서 마법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며 버티는 전투는 힘겨웠다.


“여기가 행정실 맞나?”

“어, 아, 저, 저도, 잘…….”

“쯧.”

“죄송합니다!”

“안이나 살펴.”

“네, 넷.”


아래쪽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다른 팀들이 오는 것일까. 슬라임들이 조금씩 움직이더니 뭉치는 것이 보였다. 유테의 심장박동이 가빠졌다.


“안쪽은 괜찮나?”

“예, 에, 아마도…, 으악!!”

“큭?!”


창문이 갑자기 안에서부터 깨어지며 슬라임이 튀어나왔다. 단단한 것이 실드에 맞고 튕겨 나가며 3층높이의 건물에서 노란 덩어리가 떨어져 내렸다.


“젠장, 그냥 간다!”

“으으아와?!?!?”


한계시간이 다다른 실드가 윙,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그 순간 빠른 속도로 유테와 애러랫의 몸이 창을 넘었다. 아직 바닥에 닿지 않은 발 아래로 노란 것이 넓게 퍼져있었다.


“이거, 스, 슬라임이예요!!!”

“내리는 건 안 되겠군. 꽉 잡아라.”

“흐이, 흐이에―!”


쾅, 폭음과 함께 멀리 있던 문과 책장이 터져나갔다. 바닥에 깔려있던 슬라임이 일어섰다. 새로운 실드를 치는 것과 슬라임이 그들을 덮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으악―!!!!”

“시끄러!”


실드가 슬라임을 밀어내고, 쏘아지는 화살마냥 두 사람의 몸이 문 밖으로 튕겨 나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애러랫은 유테의 팔에 매달려 지금 있는 장소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퍼펑, 다시 한 번 굉음과 함께 몸이 쏘아졌다. 온몸을 잡아당기는 듯 한 감각이 애러랫을 괴롭혔다. 뭔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간신히 이동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애러랫은 유테의 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균형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몸이 흔들렸다. 소년은 서류장을 짚고 서서 어지러움이 가라앉기까지 기다렸다. 그제야 간신히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둥근 벽면이 온통 서류로 뒤덮인 방이었다. 구석에 아래로 통하는 계단이 보였고 평소라면 직원들이 사용하고 있었을 책상들이 몇 개 보였다. 유테는 그 중 한 책상 위에 놓인 상자를 들추고 있었다.


“그게 슬라임 제거제인가요?”

“응, 쓰여 있다. 친절하게 상표도 붙어있군.”


유테의 손에 들린 병에는 노란 로고가 넓게 붙어있었다. 애러랫은 작게 웃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유테의 시선이 똑바로 애러랫을 향했다. 애러랫은 주춤 뒤로 물러났다.


“왜, 왜, 그렇게 보시죠?”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아, 그, 치만, 목표하던 것도 찾았고, 마, 마음이 놓여서…!”

“저걸 눈앞에 두고 마음이 놓이다니, 대담하군.”

“에?”


잔뜩 찌푸린 유테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자료실로 보이는 작은 방이 보였다. 방안의 물건은 온통 무너져 내려 길을 막고 있었다. 열린 공간이 지극히 좁아 슬라임은 스믈스믈 느릿하게 빠져나오고 있었다. 애러랫의 얼굴에서 다시 하얗게 색이 빠졌다.


“저, 저거, 피, 피해야, 하지, 않, 나요?!”

“응, 피해야지. 미안하지만.”

“에에?!”

“들어라. 지금부터 연구반에 갈 때까지 만이라도 놓치지 마.”

“으와악!!”


애러랫에게 대뜸 슬라임 제거제 박스를 안겨준 유테는 애러랫을 옆으로 안아들었다. 여자아이 같은 폼으로 안긴 애러랫이 비명을 지르는 것도 무시하고 윙, 다시 실드가 생겨났다. 가볍게 유테의 발이 바닥에서 떠올랐다. 잠시 공중에 둥실 떠있던 몸이 빠르게 계단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아래도 슬라임이 그득했다. 어째서 제 2행정실이 비어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귀를 울리는 폭발음이 서너 번 울리고 아까 같이 총알 같은 속도로 두사람의 몸이 쏘아져 나갔다. 유리창은 실드에 닿기도 전에 산산조각이 났다.


“큭, 저놈이.”


공중으로 높게 날아오르자 후두둑 슬라임이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전면의 시야를 가리는 곳에 얇게 슬라임이 붙어 있었다. 곧 슬라임의 일부가 송곳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저, 저렇게 가까우면 위험해요!”

“알고 있어.”


비행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뒤를 향하는 바람에 눈이 따가웠다. 슬라임의 송곳이 실드를 뚫기 위해 뒤로 한껏 젖혀졌다.


“왁!!!!!!!”


슬라임이 허공에 노란 점을 찍었다. 유테는 으득, 이를 갈았다.


“아까운 실드 스크롤을 버렸잖아.”


어느 샌가 뒤로 향하고 있던 비행 방향을 돌려 유테는 동관을 향했다. 동관에도 슬라임이 득시글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온통 노랗게 물든 바닥을 보기가 겁나 애러랫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또 펑, 소리와 함께 연구실의 창문이 깨졌다. 슬라임들이 꿈틀거렸지만 아직 높은 곳에 자리한 두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다. 유테가 말했다.


“귀 조심해.”

“네?”


무서운 바람 소리가 귀를 울려 애러랫의 입에서는 비명은커녕 신음도 나오지 않았다. 실드에 한 꺼풀 덮였지만 무서운 속도였다.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창문을 통해 연구반에 들어섰다.


“여, 여기, 도, 슬라임 천국, 이네요.”

“슬라임이 없는 곳이 없군.”

“그, 그래도 바닥은 멀쩡, 하네요.”

“상자가 저 모양인 게 문제군.”


도구가 들어있으리라 짐작되는 상자가 노란 것에 덮여 있었다. 문제라고 말하면서도 유테는 태연하게 상자 앞에 섰다. 실드는 사라져 있었다. 유테는 손을 애러랫 쪽으로 들이밀었다.


“열어봐.”

“에, 이것, 제거제?”

“그래.”

“쓰, 쓰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다’쓰면 안 된다는 거였어. 네가 전하고 모르나.”

“그, 그런….”

“어쨌든 열어.”

“네―엣!……."


제거제의 뚜껑이 열리자 안에서 내부 물질이 떠올랐다. 액체덩어리가 공중에 떠있는 것은 신비한 모습이었다. 갑자기 뿌연 안개가 끼고, 약이 슬라임 위로 분사되었다. 유테는 슬라임이 사라진 상자를 한 팔로 들었다.


“악! 유테씨, 저쪽!!!”


갑자기 구석에 있던 작은 슬라임이 공격해왔다. 급조한 실드는 한 번의 기습을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유테는 다시 실드 스크롤을 발동시켰다. 조금 늦었다.


“큿.”


퍼퍼펑! 슬라임이 공중분해 되었다. 애러랫의 눈이 동그래졌다. 두 사람의 주위에는 투명한 방패가 떴다. 펑,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연구반을 빠져나왔다. 하늘로 몸이 솟구쳐 올라갔다. 지상이 까마득할 지경이 되어서야 유테는 달아나기를 멈추었다. 애러랫은 눈을 꼭 감고뜨지 않았다. 유테는 나쁘지 않은 속도로 호수를 향해 하강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미션이 끝이 났다. 달이 예쁜 밤, 어제 만났던 그 시각에, 둘은 나란히 침낭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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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오고 있었다. 마냥 창밖을 바라보았다. 촉촉한 공기가 기분 좋았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넋놓고 있는 것을 보다 못했는지 누군가 다가왔다. 발소리는 들었지만 굳이 돌아볼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비오는 창밖 풍경 쪽이 훨씬 더 신경쓰였다.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아오는 팔에 그제서야 그가 누군지를 알았다. 이렇게 접근하는 사람은 오로지 한사람 뿐이었다.

 "변태씨, 손 풀지?"
 "에이, 튕기긴."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았다. 굳이 볼 필요도 없이 언제나 그랬으니까. 저렇게 웃음기 섞인 목소리라면 정말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목이 넓은 셔츠 사이로 입을 맞추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전 같으면 바로 옷깃 사이로 손이 파고들어왔을 텐데 그는 그냥 조용히 사야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움직임이 없었다. 요새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붙는 일도 드물어서 사실은 그의 체온에 조금 안도감을 느낀다고 하면 뭐라고 대답할까. 이상한 욕심이었다. 싫지만 싫지 않았다.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반발하는 사람이 많으니 슬슬 없애야하는 습관인데 쉽지가 않았다.
 먹구름에 하늘이 까맸다. 창문에 한가득 빗방울들이 선을 그었다. 만져보고 싶어 창문에 손을 대었다. 당연히 물방울은 만질 수 없었다. 서늘한 냉기만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유리 아래로 떨어져내리는 저 빗방울을 받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창문을 열면 빗방울이 들이닥칠테지. 이것 역시 모순이었다. 이렇게나 가까운데 빗줄기에 온 몸을 내놓지 않으면 창에 흐르는 빗물을 만질 수 없었다. 하지만 밖에 나가면 이내 손끝의 물기는 감각할 수 없을 만큼 흠뻑 젖게 될 것이었다. 손 끝에 흐르는 물방울만 느낄 수 없다는 그 작은 사실이 사야에게는 거대한 벽으로 다가왔다. 이걸 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깨가 서늘해졌다. 그곳을 통해 이어져 있던 체온이 떨어져 나갔다. 그저 따뜻하던 것이 없어진 것 뿐이었지만 커다란 한기로 느껴졌다. 공허한 마음이 싸늘해졌다.

 "또 손가락."

 어느샌가 또 아득아득 씹고 있는 손가락을 흑류의 입에서 빼내었다. 딩―, 작게 소리가 울렸다. 얇은 벽을 통해 심장 깊은 곳까지 바람이 들었다. 추운 것이 아니었다. 허전했다. 그새 또 입에 넣은 다른 손도 뺏어 양 손에 그의 두 손목을 하나씩 쥐었다.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다.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부탁이니까, 하지 말라니까."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세상이 서늘하게 물기를 머금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흑류의 눈을 마주보았다. 불만스러운 표정인 그의 이마를 꽁 들이받았다. 가슴은 여전히 메말라 있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그저 텅 비어있었다. 이따금 휑하니 바람이 불었다. 눈 앞의 이 사람도 그런 가슴을 가지고 있을까? 그래서 그토록 애정을 갈구하는 것인가? 알 수 없었다. 그저 머릿속을 두드리는 것은 그가 사야에게서 위안을 얻는 것은 길지 않을 거라는 생각 뿐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사야 역시 마찬가지. 연인인 양 행동하는 긴 원나잇. 그런 느낌이었다. 그저 서로의 체온에서 잠시간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면 좋으리라.
 입 속으로 뭔가 꿍얼거리는 그를 두고 고개만 돌려 다시 창 쪽을 바라보았다. 슬슬 빗줄기가 약해지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더 쏟아붓게 하고 싶었다. 장마철에 나다니는 것은 싫지만 시원스러운 빗줄기는 좋았다. 비야 내려라. 주룩주룩 내려라. 세상이 온통 물에 잠겨버릴 만큼 주룩주룩 내려라. 저 비가 사야 자신의 마음도 축여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리고 이 사람의 마음도. 문득 다시 시선을 돌려 흑류를 바라보았다. 그는 생각에 잠긴 사야를 보지 않고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그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하도 자주 당하니 그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얌전했다.
 그의 이야기를 끌어낸 것은 의도적이었다. 사야는 마음을 기댈 곳을 찾고 있었다. 흑류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애정을 줄 사람이 누구라도 좋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야가 마음을 기대고자 하는 사람 역시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때마침 있었던 것이 흑류였을 뿐이었다. 마음이 외로운 사람은 조금만 애정을 보이면 속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이용했을 뿐이었다. 지금 그는 사야가 자신의 마음을 다 내줄 연인이라도 되는 듯 행동했지만 사야가 보기에 이건 아주 일시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장단을 맞추는 것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사야는 혼자 서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그의 마음이 머무는 시간이 길기를 바랐다. 하지만 연인은 아니었다. 결코 진짜 연인은 될 수 없었다. 둘 다 나눠줄 줄이라고는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비를 모두 마시면 마음이 채워질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마음에 비가 내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메마른 가슴에서 싹이 틀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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