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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 타입 자캐 커미션입니다

1편

2편

3편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나더라도 이전과 같은 관계는 되지 못할 것을 각오했다. 마음이 아파 끝까지 숨길 수가 없어서 뱉고만 고백이었다. 그 애가 동성 간의 연애감정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다. 다 거짓말이다. 자만하고 있었다. 설득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편견은 있어도 내 말만은 들어주리라고 차분히 대화할 여유가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착각이었다. 내 고백에 그 애는 안색이 변했다. 충격에서 차츰 혐오로 물들어가는 그 애의 얼굴을 보며 직감했다. 이 관계는 끝이 났구나, 하고. 내 오만이었다. 나는 도망가듯 떠나는 그 애를 붙잡을 수 없었다.

 벌써 한 달이 넘었다. 힘들었다. 취해보기도 하고, 미친 듯이 공부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아직도 잠깐 휴식을 취할 때면 경멸 어린 눈동자가 떠올랐다. 어째서 좀 더 참지 못했을까.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만나면 뜯어말릴 텐데, 시간의 벽을 넘을 수가 없다. 아무리 후회해도 과거는 변치 않는다. 소용이 없다.

 누워있으니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바로 잠들 줄 알고 누웠는데 역시 오늘은 너무 여유로웠다. 공부도 운동도 하지 않았으니 피곤할 리가 없었다. 바람이라도 쐬고 들어와야지. 그래도 잠이 안 오면 차라리 공부하는 게 낫겠다.

 여름밤은 후덥지근하다. 예전엔 이 정도로 덥지는 않았는데 요새는 밖에 나간다고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후줄근한 복장이지만, 밤이니까 괜찮다고 변명하며 편의점을 찾아 발을 틀었다. 한데 곧장 보이는 골목에 익숙한 그림자가 있다.

 “……유하야?”

 가로등 불 아래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 애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렇게 느리진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내게만 느리게 흐른 것 같다. 빨갛게 물든 눈가가 어두운 밤거리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그 애에게 달려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어깨를 붙들고 그 애를 돌려세웠다. 특별히 운동을 한 것도 아니라는데 딱딱하게 근육이 잡힌 탄탄한 어깨가 눈에 띄게 처져 있었다. 그 애는 당황한 얼굴로 내게서 눈을 피했다.

 “유하야. 사고라도 났어? 세하한테 무슨 일 있는 거야?”

 그 애는 갑자기 왈칵 눈물을 쏟아낸다.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양손으로 닦아내려고 해보지만, 손으로 막아질 리 없다. 힘들게 맞췄다는 정장을 망치지 않으려고 무던 애를 쓰는 게 보였다. 이러면 안 된다. 격렬한 거부의 눈길을, 분노를 잊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도 선명하게 봤는데, 그런데도 그냥 둘 수가 없다. 미안해.

 나는 속으로 사과하며 그 애를 끌어안았다. 품에 얼굴을 묻고 울 수 있도록. 자다가 막 나온 터라 옷을 아낄 필요는 없으니까 괜찮다. 고작 옷 때문에 마음 편히 울지도 못해서야 되겠는가. 그냥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그렇게 매정할 수는 없었다.

 그 애는 끝내 소리 내 울지 않았다. 소리를 삼킨 울음이 맞닿은 부분을 통해 떨림으로 전해졌다. 섣불리 울지 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 애는 내 품속에서도 외로워했다. 혼자 있는 것처럼 외롭게 흐느꼈다.

 “죄송해요.”

 겨우 울음을 그친 그 애가 처음으로 뱉은 말이었다. 목소리가 잠겨있었다. 오는 길부터 울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걸까.

 “들어가자.”

 그 애는 한 박자 늦게 괜찮다고 대답한다. 가로등 밑에 못 박힌 것처럼 우두커니 서서 땅만 보고 있었다.

 “이대로 널 보내면 나는 마음이 편하겠니. 들어가자. 세수라도 해야지. 차도 없잖아. 그대로 걸어갈 거야?”

 말없이 고개를 젓는다.

 “들어가자.”

 가볍게 잡아끌자 저항 없이 따라온다. 손을 내밀지 않으면 기댈 줄도 모르는 이 애를 어떻게 해야 좋을까. 여기까지 찾아와서 연락도 하지 않은 고집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세상이 이제 겨우 성인이 된 어린애를 여기까지 몰아넣었다. 사람의 악의는 어디까지 뻗어있는 걸까.

 그 애는 처음 찾아왔을 때처럼 문가에 서 있었다. 들어가도 되냐고 허락이라도 해줘야 하는 걸까. 돌이켜보면 비단 첫 방문에만 그런 건 아니었다. 그 애는 잠시 기다렸다가 실례한다고 인사를 하고서야 방에 발을 들였다. 오늘은 그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나눈 대화의 여파인지도 몰랐다.

 “씻고 있어. 갈아입을 옷 줄게.”

 그제야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서는 걸 보고 있으려니 속이 복잡하다. 나는 저 애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

 세수를 마치고 나온 그 애에게 잠옷으로 쓸만한 편한 옷을 건넸으나 받아들질 않는다.

 “저기.”

 “차도 다 끊겼어. 자고 가.”

 고민하는지 한동안 말이 없더니 이내 고맙다는 인사가 돌아왔다. 내내 고개를 숙인 상태라 눈 한 번 마주치기가 힘들다.

 “유하야.”

 “…….”

 “무슨 일인지 털어놔도 괜찮아. 네가 거절한 건 내 연심이지 우정이 아니잖아.”

 그 애는 말없이 옷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기다리니 옷을 갈아입은 그 애가 방에서 나왔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흐트러진 차림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늘 반듯한 모습만 보아온 터라 낯설고, 섹시하다. 쇄골까지 드러난 차림을 보게 될 걸 예상하고 준 건 아니었는데.

 헛기침으로 주의를 환기한다. 그 애가 불안하게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익숙한 눈빛이다. 연아가 자주 나를 저렇게 쳐다봤었다. 소중한 동생, 연아가.

 “얘기해줄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애는 망설였고 나는 기다렸다. 한 번도 자기가 힘든 이야기를 제대로 한 적이 없었기에 큰 기대는 없었다. 피한다면 보내줄 생각이었다.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했어요.”

 담담하게 시작된 이야기는 꽤 심각한 것이었다. 얼마 전부터 담당하는 연예인이 휴식기에 들어가 사무실 업무를 하게 되었는데, 반드시 환심을 사둬야 하는 무대 감독이 그 애를 희롱한다는 거였다. 회사에 말을 하면 사람을 바꿔줄 테지만, 복귀 무대에 신세를 져야 할 뿐더러 앞으로도 계속 마주칠 사람이라 무작정 피할 수가 없다는 거였다. 기가 막힌 건 이게 처음이 아니라는 거였다. 아무리 일이 중요해도 그런 식으로 따낸 자리는 옳지 않고 담당하는 가수라고 반가워하겠느냐는 말에 그 애는 반쯤 넘어온 것 같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우겼다. 이게 처음이 아니니까 견딜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내가 화를 내지 않은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나는 정말 화가 많이 났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 일이에요.”

 만고의 인내심을 발휘해 화를 내지도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추궁하지도 않고 있던 내 모습이 어떻게 보였는지 그 애는 자진해서 과거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중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몰랐던 건 이면의 이야기였다.

 미성년자가 일할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중학생이면 말할 것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가능한 곳은 패스트푸드점 정도인데 당시 거주지 근처에 마침 일할 수 있는 가게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 택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나이를 속이는 것. 신분증까지 확인한다는 걸 몰랐기 때문에 시도한 일이었다. 물론 들켰다. 나이 차가 나는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따로 도움을 받을 곳도 없었다. 유하는 마지막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인정에 매달렸다.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양육 가능한 피보호자가 있어서 생활 수급 대상자는 되지 못하지만, 정작 그 피보호자가 연락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힘겹게 털어놓았다. 어찌나 울었는지 그 이후로도 그때만큼 울어본 적이 없다고 그 애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주인은 걸리면 성공적으로 나이를 속였다고 하자며 그때까지 써주겠다고 했다. 그 애는 그걸 믿은 자기가 너무 순진했다고 고백한다. 세상 물정을 아는 사람이 보기엔 터무니없는 계약이었지만, 그때는 상황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사달은 거기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슬금슬금 엉덩이나 허벅지를 더듬는 정도였다. 당혹스럽고 불편했지만, 못 견딜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당장 쌀이 모자랐고, 가끔 건드리는 정도지 심하게 주무르는 것도 아니었다. 실수 같기도 했다. 실제로 주인은 고의가 아니라고 잡아떼었다고 한다. 그러던 게 점점 수위가 높아지더니 결국에는 직접적인 폭력으로 이어졌다. 그 애는 천천히 말했다. 한 호흡에 한 문장씩. 창고에서 재고를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닫히며 몸을 덮쳐온 그림자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현실에 짓눌려 반항할 수 없었던 그 애가 계속된 폭력에서 벗어난 건 이 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 애를 붙잡아놓기 위해서 편의점 사장은 남들보다 봉급을 높게 쳐줬다. 그래 봐야 편의점 월급이었지만, 선택할 수 있었던 다른 선택지보다는 확실히 금액이 높았다. 그래서 고등학생이 되고서도 벗어날 수 없었다. 피보호자에게 계속 연락이 되지 않아 동의서를 받을 수 없으니 일이 잘못될 것도 두려웠다. 그 애를 구한 건 동생 세하였다. 정확히 어떻게 들켰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쯤의 일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게 많다고. 어쨌든 상황을 동생에게 들켰고, 그가 한달음에 달려가 사장의 어금니를 뽑았다. 평소 워낙 성적이 좋고 평판도 좋았으니 망정이지, 그대로 소년원에 끌려갈 수도 있었다. 세하를 아끼던 은사님이 도와줬다고 한다.

 “그때 당했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버틸 만 합니다.”

 그게 진심이라는 게 가장 큰 문제라는 걸 이 애는 알까. 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탓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입을 열면 무슨 말을 하게 될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 애는 연우가 말이 없자 이야기가 끝났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얘기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먼저 잘게요.”

 그 애는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곧 난처한 듯 나를 보았다.

 “유하야.”

 “네.”

 “다른 사람으로 바꿔 달라고 하자.”

 “안 돼요. 이 일은 제가…….”

 “부탁할게. 그렇게 하자.”

 그 애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안타깝게도 어떻게 위로하고 다독여줄 여유가 없었다. 나는 그를 고소하게 만들 방법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보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충격이 심해 눈물을 보인 애를 더 몰아붙이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다른 계획을 세웠다. 어떻게든 잡아 가두면 그만이다. 그리고 성폭행범을 고소할 방법은 그 외에도 있었다. 성폭행은 재발률이 높은 범죄다.

 “침대에서 자. 내가 소파에서 잘 테니까.”

 “하지만…….”

 “손님이잖아. 내 말 들어.”

 그 애는 입을 앙다물었지만, 고집을 피우진 않았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침실로 들어간다. 확답은 받지 못했지만,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으려고 하면 먹히지 않으리란 걸 안다. 그 질긴 버티기를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나는 공부할 상황이 아니라는 걸 빠르게 받아들였다. 침실에 교재가 있기도 했고 머리가 복잡했다. 뭘 봐도 들어올 리 없었다. 캄캄한 천장을 올려다보며 몇 번이고 상상 속에서 얼굴도 모를 범죄자들을 찢어발겼다. 아직도 멀쩡하게 살아있겠지. 그때 그자도, 이번에 나타난 그자도.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자 현실적인 대책이 떠올랐다. 차근차근 계획을 세운다. 우선은 관련인 중 특별한 이유 없이 협업을 거부한 사람을 찾는다. 사유를 묻는다. 또다시 찾는다. 사유를 묻는다. 찾는다. 묻는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을 쓰는 것도 물론 생각해본다. 계획이 원하는 대로 다 풀리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불행히도 다양한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지 않은 계획은 대다수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만다. 아버지께 연락해서 기업 쪽 연줄을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리라. 모든 예술가는 후원이 필요한 법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천장에 눈을 굴리며 메모를 했는지 눈이 뻐근하게 시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몰랐다.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새벽 네시가 넘어있었다. 오늘은 한숨도 못 자려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저도 모르게 발길이 침실로 향했다. 이러면 안 된다고 양심이 경종을 울리는 것을 무시하고 침대 옆에 걸터앉는다. 그 애는 발소리를 들었는지 조금 뒤척였지만, 괜찮다고 속삭이자 도로 잠에 빠졌다. 잠귀가 밝다고 세하가 불평하는 걸 얼핏 들은 적이 있는데 사실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잠든 얼굴 윤곽을 잡아냈다. 한참을 옆에 앉아 들여다보았다. 짙은 눈썹과 속눈썹, 한국인 같지 않은 반듯한 콧날, 제법 단단한 턱선과 얇은 입술. 늘 찌푸리고 다니는 탓인지 자면서도 미간을 모으고 있는 게 우스웠다. 손을 대자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여 얼른 떼었다. 드러난 목에 시선이 간다.

 만지고 싶은 욕구를 눌러 참는다. 건드리면 깨어날 기색이 역력해서 일어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무게가 줄며 매트리스가 출렁이자 뺨이 움찔거린다. 그 모습이 귀여워 픽 웃음이 났다. 아침에 먹일만한 게 있었던가 모르겠다. 냉장고를 비워놓지는 않았는데 요즘 식사를 부실이 했더니 뭐가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났다. 상한 음식은 없는지 확인할 겸 오랜만에 먹을만한 요리를 해야겠다. 혼자 나와 살기 시작한 뒤로 누군가와 함께 먹는 아침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연아는 잘 지내고 있을까. 괜한 걱정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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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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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 타입 자캐 커미션입니다




 맹세해도 좋다. 오성급 호텔 프런트에서 이름을 말하는 건 일평생 가장 특별한 일일 것이다. 교통편을 찾기 위해 켠 지도 앱에서 오성급 호텔이라는 정보를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던가. 그때부터 이미 겁이 났다. 미사키 씨는 언제나 새로운 경험의 장을 소개해주는 사람이었지만, 이번 건 도가 지나쳤다. 오성급 호텔이라니.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걸까. 이런 곳은 한 끼 식사만 해도 어마어마한 액수가 적힌 영수증이 나온다고 했다. 무서워서 방 가격은 조사해볼 생각도 들지 않았다.

 호텔 직원의 안내를 받아 이동하면서도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가격은 알 수 없지만, 높은 천장이나 심미적인 면모를 충분히 고려해 배치된 실내장식만 봐도 일상적으로 접하던 장소와는 격이 다르단 느낌이 왔다.

 “이 방입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두리번거리느라 호텔 직원이 멈추는 것을 보지 못하고 부딪힐 뻔했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직원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왔던 길을 돌아갔다. 저런 것도 프로 정신일까. 알 수 없다.

 이제 이 문만 열면 미사키 씨가 있는 방이다. 여기 도착하는 길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갑자기 눈가가 시큰거렸다. 호텔 이름 하나만 적혀있던 문자, 상상도 해보지 못한 스케일의 건물, 로비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서 있는데 호텔 직원이 찾아와 말을 걸던 순간, 프런트 데스크에서 제 이름을 말해버린 부끄러움……. 작게 심호흡을 하고 똑똑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익숙한 목소리에 안심이 되는 동시에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언제 보아도 긴장되는, 좋아하는 건지 무서운 건지 알 수 없는 사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상상보다는 평범한 방이었다. 스위트룸이라는 말에 천장에 샹들리에가 달려있을 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미사키 씨의 방과 비슷했다. 일본 전통 가옥을 모던하게 표현한 느낌의 방이었다. 바닥에는 뜻밖에 제대로 된 다다미가 깔려있다.

 “이쪽이야.”

 룸에 딸린 미니 바에 앉은 미사키 씨는 방금 씻었는지 젖은 머리에 샤워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속옷을 걸치지 않아 자연스럽게 벌어진 가슴선이 샤워가운 사이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안녕하세요.”

 차마 계속 쳐다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넓은 창 너머로 도쿄의 야경이 아름답다. 검은 하늘 위로 수 놓인 도시의 은하수가 미사키 씨의 검은 머리카락처럼 눈부시게 빛난다.

 “이리 와.”

 부드럽고 단호한 명령이었다. 어떻게 그의 곁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 바닥의 무늬를 세며 미사키 씨가 내어준 옆 자리에 앉았다. 달콤한 와인향이 났다.

 “어디 보는 거야?”

 “네? 글쎄요.”

 테이블 재질이 참 고급이다. 미사키 씨 집에 있는 가구들과는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지만 모던한 생김 덕에 집에 있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날 봐야지.”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미사키 씨는 데이트 중에도 기분이 나쁘면 곧잘 심술을 부리곤 했다.

 “저 내일은 일이 있어요.”

 “알아.”

 역시 내일이 메이저 데뷔 일인 건 모르는 모양이다. 조금 김이 샜다. 모르고 있을 거라고 뻔히 짐작하고 있었는데 왜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지 몰랐다. 그렇겠지. 미사키 씨는 바쁘니까 렌게 하나가 데뷔하는 데에 신경 쓸 수는 없었다. 그런 건 사장인 미사키가 아니라 담당 프로듀서가 할 일이었다.

 “날 보라니까.”

 미사키 씨는 자기 말에 복종하지 않는 걸 아주 싫어한다. 짜증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심장이 쿵쾅거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대로 눈을 들어도 되는 걸까.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언제나 미사키 씨는 오성급 호텔 프런트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여자다.

 “실례합니다.”

 눈꺼풀이 절로 떨렸다. 희고 매끈한 다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흘러내린 검은 샤워가운과 그 사이로 드러난 흰 피부가 뇌리에 그대로 박히는 것 같다. 울고 싶어졌다.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 위에서 찰랑거리는 붉은 와인과 빙그레 미소 짓는 붉은 입술이 보였다. 미사키 씨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기특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 괜찮냐고 다시 눈을 돌려도 되냐고 묻고 싶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지만, 미사키 씨의 눈에는 마력이 있다. 영혼을 사로잡힌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힘. 젖은 머리카락과 하얗게 드러낸 피부가 너무도 자극적이라서 눈을 뜨고 있는 게 죄스럽다. 눈을 감을 수도 뜰 수도 없는 곤경 속에서 결국 눈물이 앞을 가렸다.

 “죄, 죄송해요.”

 “울지 마.”

 상냥하게 속삭이며 미사키 씨가 뺨에 입을 맞췄다. 달콤한 냄새. 벌써 꽤 많이 마신 모양이었다. 미사키 씨는 스치듯 나를 지나쳐갔다. 눈물을 닦느라 그가 무얼 하는지 몰랐다. 늘 그래왔듯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그가 돌아와 자리에 앉았을 때에서야 겨우 눈물이 멈춰서 앞을 볼 수 있었다. 눈물의 여파로 멍해 있는 내게 미사키 씨가 말한다.

 “입어봐.”

 뭘요? 하는 물음이 입술까지 차올랐다. 간신히 이성을 붙잡고 주변을 둘러보자, 붉은 옷감이 눈에 들어왔다. 저렇게 튀는 색인데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바보 같다. 여전히 드러나 있는 미사키 씨의 살결에 시선을 빼앗긴 탓이었다.

 “이게 뭔가요?”

 차마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아 우선 물었다. 예상대로 미사키 씨는 답이 없다. 그는 일에 관련된 것이 아니고서는 설명하는 일이 없었다.

 사락거리는 천이 펼쳐지지 않도록 양손으로 집었다. 매끄러운 감촉은 만지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다.

 “잠깐.”

 다음 병을 열어 새 와인을 음미하던 미사키 씨가 말했다.

 “그건 놔두고 먼저 씻어.”

 “네.”

 오늘은 자고 가라는 것일까? 데이트가 끝나면 그때그때 집에 돌려보내 줬기 때문에 미사키 씨의 집에 들렀을 때도 따로 씻어본 적은 없었다. 낯설다. 욕실 방향을 가르쳐준 미사키 씨는 마지막으로 한가지 지시를 덧붙였다.

 “샤워가 끝나면 알몸으로 여기로 돌아와.”

 “……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니, 이해하지 못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가 잘못 말했을 리는 없으니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뭐해. 어서 씻어.”

 미사키 씨는, 미사키 야스하는 두 번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결코 설명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몇 번이고 그를 거스르려 노력했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미사키 씨는 언제나 상냥하고 친절했는데 어째서일까. 나는 결국 제대로 되물어보지조차 못한 체, 뒤로 돌아섰다.

 샤워실은 룸 안의 다른 공간처럼 호화롭고 아름다웠다. 입고 있던 옷을 개워넣으면서도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쓸데없는 고민이다. 아무리 고민해도 결국 미사키 씨가 원하는 대로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알몸이라니.

 따뜻한 물에 몸을 맡기고 서있자니 문득 이곳이 호텔이라는 사실이 떠오른다. 설마? 그럴 리 없다. 아직도 미사키 씨는 중학생이고, 나는 이제 겨우 열여섯인데. 설마 그럴 리 없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왜 호텔로 불렀을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렇게 잡생각이 많으니 씻는 둥 마는 둥 할 수밖에 없었다. 비누거품이 다 쓸려내려가고 나서야 제대로 문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라 새로 몸을 씻어야 했다. 머리를 감고 몸을 씻어내다가 또 멈칫거렸다. 결국엔 욕실에서 나갈 순간이 두려워 조금이라도 더 오래 씻기 위해 다시 온몸을 씻어낸다.

 아무리 노력해도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어서 결국에는 욕실 문 앞에 서고 말았다. 옷에 손을 대었다 떼기만 서너 번. 결국 마지막 타협점을 붙잡았다. 몸을 가리면 안 된다고는 하지 않았으니 수건을 둘렀다. 호텔에서 준비한 수건은 크고 보드라워서 한 바퀴 둘러도 가슴부터 허벅지까지 넉넉하게 가려졌다.

 “미사키 씨.”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는 홀로 흥취를 즐겼는지 발갛게 뺨이 달아올랐다. 평소에 볼 수 없는 가볍게 흐트러진 모습이 색다르고 매력적이라 눈을 뗄 수 없다.

 미사키 씨는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건 전적으로 복장 탓이었다. 미사키 씨가 앉은 자리 앞에는 전면 유리창이 야경을 아름답게 담고 있었다. 걸음걸음이 무거워서 그의 손에 닿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아!”

 수건을 던져버리고 허리를 붙드는 미사키 씨의 손길에 온몸의 근육이 바짝 굳어버린다. 몸이 맞닿는 것과 동시에 입술이 합쳐지고 아아. 미사키 씨의 입에 남은 와인이 조금 흘러 넘어왔다. 향은 그렇게 달착지근했는데 생각보다 쓰다.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 하는 키스도 아닌데 알코올 때문인지 아찔했다.

 미사키 씨는 만족스러울 때까지 머릿속을 휘젓고 떨어졌다. 그의 뺨에 오른 흥취가 내게도 옮아있겠지. 눈을 뜨는 게 무서웠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추위를 호소했다.

 “눈 떠.”

 미사키 씨가 명령했다. 그가 명령하면 따를 수밖에 없다. 나는 눈을 뜨고 탁자에 얌전히 놓여있던 붉은 천이 하공에 펼쳐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미사키 씨는 붉은 미니 드레스를 손에 쥐고 내게 입 맞췄다.

 “입어봐.”

 “지금요?”

 “응.”

 속옷도 입지 않고 드레스를? 물을 순 없는 질문이 입안을 맴돌았다. 나는 그냥 조용히 그의 말에 순종했다. 미사키 씨가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브래지어도 걸치지 않았으니 태가 날 리 없다. 예쁠 리가 없는데 미사키 씨는 흡족해 보였다. 이거면 된 걸까. 어쨌든 그가 만족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면 벗을 수 있겠지.

 “저, 미사키 씨.”

 “음?”

 “이 옷은 뭔가요?”

 “선물이야.”

 미사키 씨는 아찔한 미소를 짓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독히도 잔혹한 그 미소는 꼭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였다.

 “메이저 데뷔 선물.”

 “알고 계셨어요?”

 “당연하지. 누가 잡은 날짠데.”

 이건 정말로 놀랐다. 미사키 씨가 내 데뷔 일을? 직접 정했다고? 말도 안 돼. 우습게도 거짓말일 것 같았다. 미사키 씨는 단 한 번도 내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왜. 놀랐어?”

 그는 상냥하게 웃으며 내 허리를 안아 침실로 이끌었다. 나는 어물어물 아니라고 답한다.

 “내가 직접 스카우트한 아이돌이야. 이 정도도 챙기지 않을 거라면 뭐하러 그런 짓을 했겠어.”

 안 그래? 하고 미사키 씨는 내 뺨에 입을 맞췄다. 화끈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랬다. 미사키 씨는 오디션 결과를 거부한 나를 집까지 찾아와 스카웃했다. 스카우터도 아니고 사장이 직접. 돌이켜보면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게 미사키 씨가 회사를 맡은 뒤에 처음으로 열린 오디션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오디션을 참관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설령 참가했다고 하더라도 사장이 직접 스카우트하기 위해 나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미사키 씨.”

 “쉿.”

 퍼부어지는 키스에 놀라서 붙잡아보려 했지만, 간단히 거부당했다. 조금씩 조금씩 상체가 기울어진다. 마침내 키스 공세가 끝난 것은 침대에 완전히 드러누운 뒤였다.

 “자, 잠깐만요.”

 “렌게.”

 귓가에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 나는 직감했다. 이건 피해갈 수 없겠구나.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의 뜻대로 될 것이다. 그렇게 하고 말리라. 나는 두 눈을 감았다. 모든 걸 미사키 씨의 손에 맡기면 파도도 잠잠해질 것이다. 어떻게든 될 것이다. 틀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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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 타입 드림 커미션입니다





 미쿠니 히사오미와 아케미 마리는 소리 없는 술렁임 속에 서있었다. 학생들이 눈치껏 두 사람을 구경하느라 자리를 뜨지 않아 캠퍼스에 점점 사람이 몰리고 있었다. 시선에 익숙한 두 사람이 의식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이걸 당신이 주웠다고요?”

 히사오미가 물었다. 오늘도 그는 반듯하게 각이 잡힌 정장 바지와 셔츠에 계절에 어울리는 산뜻한 색으로 맞춰 입은 니트 조끼가 잘 어울리는 근사한 모습이었다. 입은 옷은 물론이고 차고 있는 시계와 구두까지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만한 고급 제품이었으니 그가 근사해 보이지 않는다면 장인들의 자존심이 울고 갈 판이었다.

 “네.”

 그에 반해 히사오미에게 응대하고 있는 마리 쪽은 별로 보기 좋은 차림은 아니었다. 때는 끼지 않았지만 다리기는 한 건지 구깃거리는 셔츠가 눈에 띄었다. 긴 머리카락은 겨우 빗기만 했는지 정전기에 중간중간 일어나 있다. 매고 있는 조그만 핸드백은 시장에서 파는 보세 상품이 분명했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음에도 별로 격차가 나 보이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마리의 미모 덕분이었다. 창백한 뺨에 까만 생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마리는 꾀죄죄한 차림에도 불구하고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을만한 미인이었다. 조그만 얼굴에 오밀조밀 자리 잡은 이목구비, 히사오미의 가슴께에나 오는 아담한 키, 가느다란 팔과 허리까지 마치 잘 만든 일본 인형 같다. 한 가지 흠이라면 여자다운 풍만함이 모자란다는 것인데, 마리 정도의 미모라면 그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 남자들이 곳곳에 널렸으리라.

 히사오미는 마리로부터 지갑을 받아 품에 넣었다. 새빨갛게 물들었던 마리의 뺨이 거의 원래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확인은 안하시나요?”

 마리가 물었다. 히사오미는 아차 하며 지갑을 도로 꺼냈다. 지폐와 동전, 신분증 따위를 확인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아무 이상 없네요. 확인까지 시켜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마리는 히사오미가 지갑을 넣는 것까지 확인하고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

 “잠깐만요.”

 마리는 돌아서다 말고 히사오미를 보았다.

 “그렇게 가시면 곤란합니다. 사례는 하게 해주셔야죠. 지금 바쁘신가요?”

 마리는 잠시 고민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히사오미는 웃는 낯이었다.

 “아뇨. 바쁘지는 않습니다.”

 “그럼 점심을 대접하고 싶은데, 함께 가시겠어요?”

 히사오미가 상냥하게 말했다. 마리는 히사오미 뒤에 있는 친구들을 눈짓했다.

 “괜찮습니다. 일행도 계신데요.”

 “친구들과는 매일 함께 식사하는 사이입니다. 어차피 지갑을 찾아주시지 않았으면 식사도 못 할 뻔했는걸요.”

 “낯선 사람과 함께 식사하는 건 불편해서요.”

 마리는 곤란 해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히사오미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럼 친구들을 무르겠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대접하는 거로 하지요. 그럼 괜찮으십니까?”

 “그것도 좀…….”

 그 순간 마리의 얼굴이 다시 새빨갛게 물들었다. 히사오미도 눈을 크게 떴다. 꼬르륵. 작은 소리가 마리의 배에서 울린 탓이다. 다행히 주변에는 들리지 않을만한 작은 소리였다. 마리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뵙도록 하지요. 안녕히 가세요.”

 히사오미가 얼떨떨해 있는 사이 마리는 자리를 벗어났다. 시선이 마리를 따라왔지만, 사람들이 흩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마리는 제 이름을 크게 부르는 소리에 멈춰섰다. 히사오미였다.

 “아케미 씨!”

 “무슨 일이신가요.”

 히사오미는 부드럽게 웃었다. 타고난 얼굴은 아니지만, 제법 준수하다고 여학생들 사이에서 제법 말이 많은 그 미소였다.

 “함께 식사하십시다. 배 많이 고프신 것 같은데 저 때문에 지체됐으니까요. 지갑도 찾아주셨는데 그냥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분들은요?”

 “먼저 보냈지요. 미인과 함께 식사한다고 아주 부러워하던데요.”

 히사오미가 하하 소리내 웃었다. 마리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한 번만 신세 질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깍듯하게 안 하셔도 돼요. 이쪽으로 가시죠. 맛있는 집을 압니다.”

 히사오미가 마리를 이끌었다. 그 가벼운 만남이 두 번, 세 번 이어져 결국은 무언가를 바꿔놓을 것이라고는 두 사람 모두 상상하지 못한 늦은 여름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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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커미션에서 이어집니다






 “웃어봐요.”

 야스하가 명령했다. 렌게는 눈만 깜빡였다.

 “어서.”

 렌게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이 사람 기분이 상했구나. 렌게는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이렇게 근사한 슈트를 입은 사람이 렌게의 방에서 자신을 해칠 리 없다고 이성이 말하고 있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잘했어요.”

 야스하는 살갑게 웃는 얼굴 그대로 렌게에게 다가와 상체를 기울여 얼굴을 가까이했다. 렌게는 핀에 꽂힌 개구리처럼 얼어붙었다. 미소를 유지하는 것도 버거워 필사적이 되었다.

 “이렇게 예쁜데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줘야죠. 세상에는 예쁜 걸 보고 숭상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주 많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가 알아서 준비할 테니까. 요시노양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쉿.”

 렌게는 붉은 입술이 속삭이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꺼낼 수 있는 반론조차 없었지만, 할 말이 있었더라도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야스하는 아름답고 절대적이었다. 렌게는 야스하의 시선에 포박당한 채 방향키를 내어주고 말았다.

 “아침 아홉시에 기획사로 찾아오세요. 오디션 합격자라고 하면 안내해줄 겁니다.”

 “네.”

 야스하는 눈을 가늘게 뜨곤 귓속말이라도 하듯 렌게의 뺨 근처로 입술을 가져왔다. 뜨듯한 바람이 느껴져 렌게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코웃음 소리가 났다. 야스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스쳐 갔다. 렌게는 돌아볼 수조차 없었다.

 “나올 거죠?”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 렌게는 허공에서 흔들리는 시선을 붙들며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았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내일은 학교에 가야 하는데요.”

 희미하게 들린 건 분명 혀를 차는 소리였다. 렌게는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오디션에 합격했다고 하면 결석으로 처리되지는 않겠죠. 렌게양은 모범생이니까요.”

 허락한 적도 없는데 이름을 부른다. 렌게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야스하와 등지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담임 선생님께도 회사에서 연락해야 하는 건 아니겠죠?”

 ‘설마,’ 하는 빈정거림이 들리는 것 같아 솜털이 쭈뼛 섰다.

 “아니에요. 그럼 내일, 내일 뵈어요.”

 “고작 연습생 수업에 사장이 일일이 참관할 필요는 없겠죠. 푹 주무세요. 내일은 고단한 하루가 될 테니.”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다정하지만 비참한 말을 남기고 야스하는 방을 나갔다. 부모님 쪽은 이야기가 쉽게 풀리지 않는지 점점 언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렌게처럼 호락호락할 리 없는 부모님이었다.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부부는 대개의 고학력자가 그렇듯이 학구열이 높은 것은 물론 보수적이고 깐깐하기까지 한 사람들이었다.

 렌게는 최대한 바깥소리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쓰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잠잠해지질 않았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마음을 가라앉혀보려는 렌게를 방해했다.

 “렌게양.”

 문이 열리더니 야스하가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자연스럽게 웃어 보이는 눈매가 예뻤다. 렌게가 얼이 빠져 있으니 야스하가 손을 잡아끌었다.

 “해줘야 할 얘기가 있어요. 당신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렌게는 부모님과 키쿠치 앞에 세워졌다. 겁먹은 렌게가 야스하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물어보세요. 렌게양이 제게 말했으니까요.”

 “저게 정말이니?”

 아버지가 역정을 냈다. 렌게는 당황했다.

 “뭘요?”

 “저 사람이 네가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했다는구나.”

 어머니도 한마디 거들었다. 렌게는 놀라서 야스하를 쳐다봤다.

 “꼭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했잖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야스하는 여전히 친절하게 웃고 있었다. 어깨를 붙든 손에 힘이 느껴지지 않았더라면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항변할 뻔했다. 렌게는 부모님을 보았다가 엄한 눈초리에 기가 꺾였다.

 “정말이에요. 저 아이돌이 되고 싶어요.”

 야스하가 부드럽게 어깨를 토닥였다. 어머니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아버지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

 “학업이 중요하다는 두 분 말씀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젠 아시겠지요. 따님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언 지를요. 렌게양은 워낙 모범생이고, 두 분의 의견을 존중하니까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몰래 오디션을 본 거죠. 따님의 꿈을 기어이 막으셔야만 행복하시겠습니까. 렌게양에게도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주셔야지요.”

 아버지는 긴 침음성을 뱉었다. 끝내 이긴 것은 야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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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절히 바라던 꿈이 정작 현실이 되면 뜻밖에 달갑지 않은 경우가 있다. 현실이 버겁기 때문인가. 어쩌면 정말 바라는 꿈이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의심은 변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점차 자라나고 있었다.

 요시노 렌게는 갓 데뷔한 아이돌이다. 아직 얼굴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서 자기 홍보를 위해 들어오는 일이라면 길거리 판촉이라도 마다할 수 없는 무명 아이돌. 렌게에겐 길게만 느껴지지만, 남들은 금세 데뷔했다고 부러워하는 연습생 기간을 거쳤다. 예쁜 아이들이 수도 없이 모여있는 아이돌 기획사에서도 눈에 띄는 미모 덕인지 먼저 오디션에 합격한 선배들을 제치고 데뷔가 결정됐다.

 오디션을 본 건 우연이었다. 소심하고 눈치를 많이 보는 렌게가 처음부터 아이돌을 꿈꿨던 게 아니었다. 길을 가다 스카우터에게 명함을 받았고, 그걸 누가 봤는지 학교에 온통 렌게가 아이돌 오디션을 본다는 소문이 퍼져서 차마 생각이 없다고 답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준비한 것도 없는데 붙어버릴 줄 알았다면 무슨 핑계를 써서라도 빠졌을 것이다.

 놀라운 일은 그때부터다. 합격 통지와 함께 소집일을 통보받았지만, 렌게는 나가지 않았다. 오디션을 위해 무대에 섰을 때도 심장이 떨려 혼났는데 그런 일을 일상적으로 해야 한다니 끔찍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기획사 관계자가 렌게네 집을 방문했다.

 렌게에게 명함을 건넸던 스카우트와 채용 담당자라는 사람, 그리고 렌게 또래 아이가 있었다. 놀랍게도 그 애는 자신을 기획사 사장이라고 소개했다. 렌게는 물론 부모님까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찾아온 용건은 간단했다. 자기들이 렌게를 데뷔시키겠다는 거였다. 렌게의 부모님은 둘 다 학술계 종사자로 방송계를 곱게 바라본다고 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었다. 부모님 설득은 채용 담당자라고 밝힌 키쿠치가 도맡았다. 렌게의 마음을 돌린 건 사장, 미사키 야스하였다.

 거실에서 어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렌게와 야스하는 렌게의 방으로 이동했다. 딱 맞는 검은 수트를 갖춰 입은 야스하에게서는 당당함과 품위가 느껴졌다. 야스하와는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방이었음에도 특유의 아름다움은 빛을 잃지 않았다. 렌게로서는 마주하는 것만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왜 나오지 않았죠?”

 야스하가 물었다. 오디션 본 기획사에서 나왔다고 했을 때부터 예상하던 질문이었다. 다행히도.

 “제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니까요.”

 렌게는 애써 눈을 피하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자리도 권하지 않았는데 야스하는 렌게의 책상 의자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합니까.”

 책망조로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야스하는 그저 궁금한 듯했다. 이유까진 생각해두지 않았던 렌게는 조금 당황했다.

 “무대에 서는 건 저한테 무리예요. 노래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춤도 못 추고, 사람들이 좋아할 리 없어요.”

 “오디션에 합격했잖아요?”

 “네?”

 “오디션에 합격했다는 건 당신이 매력적이라는 의미죠. 우리는 스타를 키워내는 일을 합니다. 그 정도는 알아볼 수 있어요.”

 야스하는 온화하게 웃었다. 날카로운 인상이 미소에 살그머니 누그러졌다. 렌게는 왜 이 사람이 아이돌을 하지 않는 걸까 의문스러웠다.

 “아니면 전문가의 판단을 의심하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에요.”

 렌게는 곤혹스레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뭔가 다른 이유라도?”

 “그게…….”

 렌게는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만한 좋은 대답을 고민했다. 건강이 안 좋아서? 학업에 전념하고 싶어서? 그도 아니면 아이돌이 적성에 맞지 않아서? 어느 쪽이라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뭐라고 대답하면 야스하가 화내지 않을까. 전부 그럴듯하지만 뭐라고 해도 진짜 이유가 아니라는 걸 들킬 것만 같았다.

 “주목받는 게 무서운가요?”

 “……!”

 다른 모든 상황을 가정했지만, 이것만은 생각하지 못했다. 렌게는 호된 꾸중을 들은 어린애처럼 얼어붙었다. 야스하는 그런 렌게를 달래듯이 부드럽게 물었다.

 “사람들이 당신을 쳐다보는 게 싫습니까? 지금도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 그건…….”

 변명이라도 해볼 참으로 입을 열었지만, 그럼 그렇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렌게는 애꿎은 손끝만 쥐어뜯었다.

 “절 보세요.”

 야스하가 말했다.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오해의 여지 없는 명령조였다. 렌게는 머뭇머뭇 야스하를 쳐다보았다. 야스하는 다 이해한다는 듯 따뜻한 시선으로 렌게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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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케미 소이치로는 제집 거실에 앉아 비 오는 날 유리창처럼 주룩주룩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는 소년을 난감하게 쳐다보았다. 이러려고 건넨 말이 아니었음은 물론이오, 그가 이토록 무방비하게 눈물을 보일 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소리도 없이 설피 우는 그를 마땅히 달랠 말이 없기도 하였다. 얼핏 보기엔 어른 같지만, 아직 세상과 맞서기에는 너무 어린 소년이 대체 무슨 사정으로 이 자리에 앉아 무심한 말에 울음을 터뜨리게 되었는지 아는 바가 없었다. 소이치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옷을 적시지 않도록 손수건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뿐이었다.

 소년, 미쿠니 오리코는 소이치로와 소이치로의 사랑하는 조카, 아케미 호무라의 단란한 가정에 갑자기 끼어 들어온 불청객이었다. 그는 두 사람 모두에게 달갑지 않은 존재였지만, 부모를 잃고 홀로 남은 소년을 기어이 길거리로 내쫓을 만큼 얄미운 상대도 아니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군식구치고는 꽤나 성실한 일꾼이라는 점도 아케미 부녀―소이치로와 호무라는 비록 친 부녀관계는 아니지만, 서로를 진짜 부모와 자식처럼 언급하곤 했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챙겨줘야 하는 것이 많은 호무라를 살뜰하게 챙기고 집안일을 돌볼 틈이 없는 소이치로를 대신해 잡일을 도맡아 하니 이전보다 생활이 훨씬 편했다. 벌이가 넉넉하지는 않지만 한 사람 더 먹여 살릴 만큼은 되고, 소이치로가 바빠 잘 챙겨주지 못하는 호무라의 생활까지 챙겨주니 소이치로로서는 입이 늘었다고 불평할 상황은 아니었다.

 문제는 호무라였다. 호무라는 처음부터 오리코를 탐탁지 않아 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오리코가 일을 잘한다고 하나 소이치로는 가사도우미를 고용한 게 아니었다. 오리코는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호무라는 그가 보이는 족족 훼방을 놓지 못해 안달이었다. 오리코가 치우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어지르고, 오리코가 한 반찬과 소이치로가 한 음식이 함께 올라오면 노골적으로 오리코가 만든 접시를 밀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어른으로서 두 아이의 사이를 중재하는 것이 바른 행동이겠지만, 몸도 약하고 예민한 호무라에게 뭔가를 참으라고 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소이치로는 호무라가 얼마나 많은 것을 참아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친엄마인 누이 마리보다도 소이치로가 호무라의 병세를 잘 알았다. 그걸 위해 의사가 된 것이기도 했다. 저 작은 아이가 지금의 절반도 안 되는 몸집이었을 때부터 병원의 거대한 기계와 끔찍한 치료를 어떻게 견디는지 보아왔다. 그런 호무라에게 참으라고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소이치로는 마음속에 조용히 엑스 표시를 했다.

 그런 이유로 소이치로는 지금까지 오리코를 향한 호무라의 심술을 한 번도 말려본 적이 없었다. 놀라운 것은 호무라와 나이 차도 얼마 나지 않는 오리코가 그런 상황을 그저 묵묵히 견뎌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호무라를 나무라지도, 소이치로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고 말없이 그런 상황을 견뎌내고 있었다. 소이치로에게는 답답하고 화가 나는 광경이기도 했다.

 소이치로는 부당한 현실은 자기 손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죽은 누이가 일생을 지켜온 좌우명이기도 했다. 소이치로의 누이는 자신과 수많은 약자를 위해, 곧장 이룰 수는 없지만 멈추지 않고 싸울 것을 맹세한 사람이었다. 소이치로가 아직 사리분별도 하지 못하던 어린 시절부터 누이는 그를 붙잡고 몇 번이고 다짐하듯 이야기하곤 했다. 그것이 누이 자신을 향한 연설이었는지, 소이치로를 위한 연설이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소이치로는 그런 누이의 사상에 감복해버렸고, 누이가 죽은 지금은 자신의 생각이라고 해도 좋았다. 누이는 몰랐겠지만, 누이가 세상을 바꾸는 동안 쓰러지지 않도록 최고의 매니저가 되자는 생각으로 불태운 젊은 시절이었다.

 아마 누이에게도 그랬을 테지만, 소이치로가 보기에 오리코는 패기가 없었다. 부모가 저지른 죄에 발목을 잡혀 가정이 망가진 것도, 이런 낯선 곳에서 홀대받는 것도 모두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지 않다면 호무라가 저리도 자신을 박대하는데 화 한 번 내지 않고 버틸 리 없었다. 어리석은 일이었다. 소이치로는 어쩐지 냉소적이 되어있는 자신을 자각했다.

 그랬기에 오늘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오리코를 발견하고 올 것이 왔노라 생각해버린 것이다. 소이치로는 그가 드디어 화를 내리라고 짐작했다. 그래서 퇴근 후 피곤한 몸이었지만, 일부러 그의 앞에 앉아서 티비조차 틀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오리코가 입을 열었을 때, 그가 꺼낸 말은 전혀 예상외의 것이었다.

 “소이치로씨.”

 오리코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요즘 아이들 같지 않은 곧은 자세로 소파에 똑바로 앉아있는 모습이 다소 어색했다.

 “사랑해본 적 있으세요?”

 소이치로는 당황해 잠시 말을 잃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소중한 얼굴이 떠올라 머릿속에서 흩어버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건 왜 물어보니?”

 “그냥요. 궁금해서요.”

 오리코는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고 눈을 살며시 내리깔았다.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어른스러움이었다. 그 표정이 소이치로의 마음 한구석을 들쑤셨다. 저 어린아이가 저렇게 그늘진 미소를 짓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까 생각하면 한없이 가여웠다. 제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지만 이토록 가슴 아픈 모습을 보면 하늘도 조금쯤은 도와주리라.

 “무슨 일이 있었니?”

 소이치로가 다정하게 물었다. 오리코는 눈을 똑바로 뜨고 소이치로를 보더니 이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끔 괜한 생각이 들 때가 있잖아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 이 넓은 지구에 홀로 남은 것처럼 가슴이 허전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가슴이 찌르르 아픈 날이요. 그런 날이라서 그래요.”

 차분한 어조로 마치 시라도 외듯 읊조리는 오리코의 시선이 먼 창밖으로 향해 있었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아득한 눈이었다. 소이치로는 문득 그 방향으로 쭉 가면 친구가 사는 집이 나온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시답잖은 생각이었다.

 “오리코양.”

 “네.”

 소이치로는 오리코의 잔잔한 얼굴을 살폈다. 그는 정말로 여상한 날을 보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얇고 투명한 가면인지 이 아이는 알고 있을까.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네?”

 “억지로 힘내려고 하지 않아도 돼. 오리코양도 아직은 중학생이야. 애는 애답게 가끔은 울어도 괜찮아. 그러려고 어른들이 있는 거니까.”

 초조와 불안은 온몸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법이다. 오리코는 성인들도 어려워하는 수준으로 자신을 제어하는 놀라운 재주가 있었지만, 자신을 억누르는 것에도 한계는 있었다. 가장 먼저 고장 난 것은 자율신경인 눈물샘이었다.

 “어라.”

 오리코는 한 손을 들어 뺨을 매만졌다. 눈꼬리에서 흘러내린 물기가 턱을 타고 굴러떨어졌다. 곧은 허리와 허벅지 위에 움켜쥔 손은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눈꺼풀이 움직일 때마다 눈물 줄기는 굵어져 사방으로 새 길을 냈다.

 뻐끔거리는 입술이 몇 번이고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생기 넘치는 몸 안에서 죽은 듯이 자고 있던 격정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오리코는 남은 한 손도 들어 눈물을 훔쳤다. 이미 터진 둑은 양손으로 막을 수 없었다.

 오리코가 주체할 수 없는 강을 흘려보내기 시작하자 소이치로는 난감해졌지만, 제 앞에서 우는 아이를 모른 척하지는 않았다. 호무라와 달리 벌써 여자 티가 나는 몸에 손을 대는 것이 저어돼 겨우 티슈를 챙겨준 것이 다였지만, 서럽게 우는 오리코를 두고 달아나진 못했다.

 한쪽 구석에서 호무라가 숨어 지켜보다가 소이치로와 눈이 마주치자 잽싸게 달아났다. 소이치로는 오리코와 이야기하려고 호무라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주지 못했단 걸 깨달았다. 어쩐지 호무라는 불퉁한 표정이었다. 소이치로는 호무라가 잠든 뒤에라도 꼭 굿나잇 키스를 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몇 번이나 말을 하려다가 울음 섞인 신음만을 뱉은 오리코는 더이상 얼굴을 들고 있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소리를 내지 않으려 숨을 죽이고 입을 막은 것이 그간 보아왔던 오리코다웠다. 소이치로는 어깨너머 시계를 확인했다. 바늘은 저녁 열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늦지는 않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오리코와 자리를 함께했다. 오리코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눈물을 그쳤다. 길고 긴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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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 타입 자캐 커미션입니다






 1982년의 어느 여름이었다. 에리카는 런던 근교에 위치한 작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 놀랍게도 그곳은 마법이라고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장소였는데,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녀를 불러낸 것이 순혈가문 마법사라는 점이었다.

 가게에는 손님이 두 팀밖에 없었다. 에리카와 그 일행을 빼면 한 테이블밖에 사람이 없었다는 소리다. 카운터 근처에 있는 맥주 통을 보아 날이 저문 뒤가 본격적인 영업일 수도 있었다.

 창밖에는 오후의 태양이 뜨거운 빛을 내리쬐고 있었다. 센스있게 창가를 살짝 피해 자리를 잡은 건 에리카의 일행, 오웬 허츠였다.

 그는 에리카와 처음 인연을 맺은 학생 때도 참 사려가 깊었다. 사소한 행동에도 적절한 배려가 담겨있어서 언제 만나도 편안했으며, 함께 있는 시간이 제법 즐겁기까지 했다. 타고난 외모와 특출한 친구 덕분에 잠시라도 마음 놓고 쉴 시간이 없었던 에리카에게 그건 정말 특별한 일이었다. 덕분에 두 사람의 인연은 길게 이어졌다.

 연인이라고 하기엔 너무 멀고, 친구라고 하기엔 너무 가까운 애매한 관계로 이 년을 보냈다. 에리카는 그 외에도 만나는 사람이 있었지만, 오웬은 에리카뿐이었다.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에리카에게 하는 걸 보면 여자를 만나지 못할 인물도 아니건만 그 옆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소문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오웬은 끝내 에리카에게 고백하지 않았다. 그 흔한 좋아한다는 말조차 거의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예의 바르게 식사나 차를 제안하기는 했으나 그뿐이었다. 두 사람이 만나서 한 것은 공부와 공부에 필요한 대화가 다였다. 무뚝뚝한 남자를 만나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웬은 정도가 심했다.

 오늘도 오웬의 과묵함에는 변함이 없었다. 점심나절에 들어와서 벌써 한 시간 가량 지났건만 그는 음료를 주문한 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에리카가 용건을 물으려 하자 다른 메뉴가 필요하냐고 묻기까지 했다. 겨우 메뉴판을 요청하려는 오웬을 말리고 용건을 묻는 데 성공했지만, 오웬은 ‘음,’하는 짧은 신음성을 내고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에리카는 고민 끝에 그의 뜻을 앞서 짐작해보았다. 즐기는 자리라면 아무리 침묵이 길어도 괴롭지 않을 테지만, 의중을 짐작할 수 없는 남자와의 대면 하에 길어지는 침묵은 달가울 수가 없다.

 “오웬.”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자 오웬이 에리카를 쳐다보았다. 그는 마치 학생 때로 돌아간 듯 이름을 부르는 행위에 적잖이 놀란 게 틀림없었다. 흔들리는 눈빛을 마주하고 에리카는 그림으로 그린 듯 상냥한 미소를 머금었다.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는 오후 다섯 시의 일인가요?”

 오후 다섯 시라는 말에 오웬의 뺨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눈을 갑자기 두어 번 깜박이는 것이 당황스러운 심정을 여실히 비췄다. 에리카는 입을 다물고 그저 웃어 보였다. 오웬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지만, 시선을 돌리지 않고 에리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엌 쪽에서 달그락거리며 설거지하는 소리, 바람에 삐걱대는 창문틀, 건너편 테이블에서 펜촉과 종이가 맞물리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시간을 타고 평화롭게 지나갔다. 오웬은 가볍게 입술을 한 번 열었다 닫더니 물을 찾았다. 진작 비워버린 잔을 들고 벌건 얼굴로 종업원을 부르려는 것을 에리카가 제 물을 넘겨주고 진정시켰다.

 “당신이 이런 가게를 알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에리카가 말했다. 오웬은 잔을 반이나 비우고서야 입을 열었다.

 “조용히 만나고 싶었소.”

 오웬은 물잔을 테이블에서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에리카는 잔잔하게 미소 지은 체 테이블 아래로 도망치는 손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눈치챈 오웬의 뺨이 다시 붉어졌다.

 “잘 지냈소?”

 에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

 오웬은 눈을 가만두지 못하고 창 쪽을 보았다가 눈을 세 번이나 깜빡이며 카운터를 돌아보았다.

 “최근에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 들었소.”

 에리카는 고개를 살며시 기울였다.

 “특별히 마음에 둔 분이 없을 뿐이에요.”

 그 말에 오웬은 또다시 불편한 듯한 신음을 뱉었다. 에리카는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당신 친구, 벨리니 양은 혼사를 치렀다 들었는데―그는 또 작게 헛기침했다―당신, 그라우플뤼겔양은 아무런 계획이 없다고?”

 에리카는 눈썹을 모으며 곤란한 기색을 띄웠다. 오웬은 계속해서 눈을 피하며 에리카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좋은 분을 알아보고 있어요. 누구보다 절 아껴주고 또 제가 헌신할만한 믿음직한 분을요. 마음이 맞는 이가 없는데 어찌 혼사부터 염려하겠어요.”

 오웬은 침통하게 ‘그렇군,’ 하고 대답했다. 카페 문턱을 넘는 손님이 있어 날이 좋은 오후라 영 의욕이 없어 보이는 종업원이 느릿느릿 둘의 옆을 지나갔다.

 “그렇다면 마음에 두고 있는 후보는 있겠지.”

 “글쎄요. 제게 구애하시는 분들은 다들 훌륭하지만, 진정으로 저를 원하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네요.”

 “진정으로 당신을 원해?”

 “좋은 말씀은 많이들 해주시지요. 하나 사랑의 불꽃이란 덧없는 하루살이 같은 것인지라 어디까지 믿으면 좋을는지 혼란스럽네요.”

 오웬은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에리카는 우아한 손길로 차게 식은 커피잔을 한쪽으로 옮겨두었다.

 “사랑이 믿을 수 없어 혼인하지 않는다는 건가.”

 “그럴 리가요. 그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는 제 어리석음 탓이지요.”

 에리카는 눈동자로 빛 그림자를 쫓았다. 날이 저물기 시작하는지 볕 드는 자리가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오웬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네?”

 그는 실수했다는 표정을 했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라우플뤼겔양이 어떻게 해야 진심을 믿을 수 있는지 모르겠소.”

 에리카는 두 번,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곧 꽃처럼 화사하게 미소가 피어났다.

 “저를 좋아하나요?”

 에리카가 물었다. 오웬은 저 바닥으로 시선을 떨군다.

 “아니.”

 그는 말했다.

 “사랑하오.”

 에리카는 진한 웃음을 띤 체 가슴 앞에 손을 모았다.

 학창시절 두 사람의 약속 시간은 항상 오후 다섯 시였다. 저녁 식사를 하기 전 약 한 시간 정도 함께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장소는 거의 같은 곳이었지만, 가끔은 정원을 거닐거나 도서관에 들렀다. 에리카가 만난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오웬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함께하는 것이라고는 공부뿐인데 레번클로 출신 누군가처럼 지식을 자랑하지 않았고, 슬리데린의 한 남학생처럼 혈통과 재산을 뽐내지도 않았다. 그리핀도르지만 무모한 행동을 한 적이 없으며, 그들이 졸업한 뒤로도 꾸준히 재생산되고 있는 뿌리 깊은 기숙사 이미지와 달리 소란스러운 걸 좋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후플푸프 기숙사 한구석에 틀어박힌 몇몇 부류처럼 조용히 학교생활을 마치기만 기다리는 것 같았다.

 오웬은 정중히 인사를 하고, 의례적인 인사말을 주고받고 나면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곤란한 모습을 보면 도와주겠다고 말을 걸었고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했지만, 그 외에는 각자 공부하며 시간을 보낸 게 다였다.

 그런 오웬이 에리카에게 직접 감정을 직접 감정을 표현한 적이 딱 두 번 있었는데, 첫째가 처음 함께 공부하지 않겠냐고 말을 걸었을 때고 둘째가 오웬의 졸업식 날이었다.

 첫눈에 반했으니 함께 공부하자는 제안을 했던 첫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에리카를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 오웬이 졸업식을 마치고 만취한 상태로 레번클로 기숙사를 찾아왔다. 그리핀도르고 레번클로고 가리지 않고 사랑 냄새를 맡은 하이애나들이 몰려와 소란스러웠다.

 에리카는 친구들에게 등을 떠밀리다시피 포도주 통 앞으로 나갔다. 주변은 축제 분위기고 오웬은 제대로 몸도 가눌 수 없을 만큼 취해서 에리카는 주방 밖으로 끌려 나온 집요정마냥 어색하게 서 있었다.

 “그라우플뤼겔양.”

 평소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는 오웬이 그렇게 커다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에리카는 환호성에 묻혀 들리지도 않는 대답을 했다.

 “사랑합니다.”

 또다시 환호성이 터지고 휘파람 소리에 귀가 따가웠다. 에리카는 오웬의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결혼해주십시오.”

 환호성은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남학생들이 우악스러운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고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울렸다. 오웬은 뭐라고 더 말했지만, 어찌나 시끄러운지 그 뒤로는 거의 들리질 않았다. 에리카는 그저 웃기만 했다.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들린 말이라고는 승낙 어쩌고 하는 것뿐이었고 그 일 이후로 오웬은 한 번도 에리카 앞에 얼굴을 비춘 적이 없었다. 그렇게 오웬은 첫 번째 고백은 학창 시절의 해프닝으로 넘어갔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오웬이 에리카에게 고백하는 장소로 친구―마법사―들이 없는 한적한 곳을 고른 것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물론 머글이 운영하는 가게를 찾아 머글 사회에 적합한 의상을 찾아 거리를 헤매는 모습을 생각하면 우습기는 했다.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순혈 마법사가 좋아하는 여인에게 고백하겠다고 머글 세계의 옷을 찾아다닌 것이다.

 에리카는 레이스가 달린 블라우스 소매를 살짝 어루만졌다. 오웬이 약도와 함께 동봉한 옷이었다. 마법사 사회에서 자라 마법사로 자란 그가 머글 카페에 어울리는 옷을 알아내서 찾아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했다. 게다가 놀랍게도 제법 그럴듯하게 잘 어울리는 옷을 보낸 덕분에 에리카는 더하고 뺄 것도 없이 장신구만 골라 나온 것이다.

 오웬은 심호흡을 하더니 자진해서 에리카와 눈을 마주했다. 드디어 오늘 에리카를 불러낸 이유를 말할 마음이 생긴 모양이었다.

 “에리카 그라우플뤼겔양. 지금부터 그대에게 일생일대의 부탁을 할 것이오. 부디 딱 잘라 거절하지 말고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 주길 바라오.”

 오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무 받침을 댄 의자가 뒤로 밀리며 거북한 소리가 났다. 그는 의자를 제대로 자리에 돌려놓고는 에리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손에는 작은 벨벳 상자를 쥐고 있었다.

 “나 오웬 제시 허츠는 에리카 이리스 그라우플뤼겔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지난 이 년간 우리가 함께 정을 쌓으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시간이 있었기에 그대의 마음이 내 마음과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라우플뤼겔양, 저와 결혼해주지 않겠소?”

 오웬은 에리카의 손등에 입 맞췄다. 그가 열어 탁자에 올린 상자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티아라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반지가 들어있었다.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결혼식에 썼던 예물이오. 당신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 꼭 선물하고 싶었어. 받아주시오.”

 에리카는 보석이 발하는 영롱한 빛과 오웬을 번갈아 보았다.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이 둘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에리카는 오웬이 그녀를 이 년 만에 처음 만났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진 않았는지 궁금했다. 에리카는 제 손을 쥔 오웬의 손을 양손으로 마주 잡았다.

 “일어나세요.”

 에리카는 꼼짝 않는 오웬을 일으켰다. 그는 석연치 않은 얼굴을 하면서도 에리카가 하는 대로 따랐다.

 “당신 졸업식 날을 기억하나요?”

 오웬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 나한테 고백한 뒤에 무슨 말을 했나요? 너무 시끄러워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어요.”

 “그건….”

 오웬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오.”

 “대답해주세요.”

 에리카가 말했다. 오웬은 망설였다.

 “대답하지 말라고 했소.”

 “왜요?”

 “나는 이제 겨우 학교를 졸업하는 몸이고 당신은 학생인데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소.”

 “그럼 지금은 괜찮은가요?”

 “불편하오?”

 에리카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벌써 이 년이나 지났어요. 그동안 나도 당신도 많이 변했을지 몰라요. 그런데도 나와 결혼하고 싶은가요?”

 “당신은 여전히 아름답소.”

 “당신도 여전히 서투르네요.”

 두 사람은 조용히 서로를 마주 보았다. 눈동자에 비친 서로의 모습은 이년 전과 아주 달라져 있었다. 완전히 아가씨가 다 된 에리카도, 사회인의 풍모가 물씬 풍기는 오웬도 학창시절의 그 사람이 아니었다.

 “받아주시겠소?”

 오웬이 물었다. 에리카는 살풋 미소 짓는다.

 “물론이에요.”

 “에리카.”

 박수가 터졌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내는 소리였다. 승낙이 날 때까지 숨죽이고 쳐다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점은 호그와트 시절 학생들보다 훨씬 낫다. 잘 고른 가게였다.

 “우선은 조금 더 서로를 알아갈 시간을 가져도 괜찮겠죠?”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두 사람은 다시 마주 앉았다. 종업원이 서비스라며 샴페인을 가져왔다. 벌써 주점을 열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식사도 하고 가시겠어요?”

 종업원이 물었다. 오웬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날래게 메뉴판을 가져왔다. 에리카는 마음에 찰 때까지 보석을 감상했다. 오웬에게 돌려주자 그가 의견을 물어왔다. 어둑해진 바깥 풍경과 함께 가게는 사람이 들어차기 시작해 점점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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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타입 드림 커미션입니다 (아케미 호무라)





 의사라고 하면 보통은 놀고먹으며 많이 버는 직업이라고 생각하지만―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는가―그건 어느 직업에나 마찬가지로 극히 일부의 이야기다. 조금이라도 편히 일하는 건 개인 병원을 가진 일명 “사장님”의 이야기고 그나마도 담당 과에 따라 개인 병원을 차릴 수 있는지 없는지가 달라지며, 수입 역시 과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대부분의 의사는 꿈결처럼 흘러가야 할 젊은 시절을 희멀건 건물에 틀어박혀 환자―악취와 흉한 꼴은 당연한 옵션이다―와 씨름하며 보내고, 나이를 먹어 경력을 쌓는다 해도 편안하고 넉넉한 노후가 보장되지는 않는다.


 ‘대신 그만큼 보람은 있는 일이야.’


 사토 케이코는 생각했다. 그 역시 혈기 넘치는 젊은 시절을 병원과 환자들에게 모두 쏟아내고 있는 젊은이였다. 곧 서른이 다가오는 나이는 일반적으로 독립된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발전하는 시기지만 병원의 시간은 더디게만 간다. 특히나 사람 수만큼이나 위계도 많은 종합병원에서 일하는 사토에게는 더욱 그랬다.


 수련의 시절부터 줄곧 같은 병원에서 근무한 탓인지 사토는 요새 권태감을 느꼈다. 무력감이라고 해도 좋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사토의 팔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학생 때, 혹은 수련의 시절에 진로를 바꿔 자유로운 인생을 사는 친구들을 보면 무기력함은 더 강해졌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들 무언가 돌아오기는 할까. 그런 생각이 하루에도 열 번씩 마음을 스쳤다.


 이토록 날씨가 좋은 탓인지도 몰랐다. 바람에는 꽃내음이 섞여 있었다. 병원에는 다양한 환자가 있으므로 정원에도 가능하면 꽃을 두지 않지만, 어디서 실려 왔는지 모를 향기가 감미로웠다. 온종일 병원에 갇혀있으니 데이트는 물론이고 간단히 차려입고 놀러 나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휴일이면 밀린 집안일이며 휴식을 취하느라 늘어져서 몸을 꾸밀 여력도 없었다. 간혹 동료 의사들이나 간호사 중에 어마어마한 병원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풀메이크업에 예쁜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대단함에 입이 떡 벌어졌다. 그 사람들이라고 사토보다 특별히 여유가 있지는 않을 테니 그저 그만큼 절박한 것일 테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평소라면 의사에게만큼은 관심이 없다고 큰소리를 치던 사토가 동료 의사에게 눈길을 빼앗긴 이유는. 청춘의 에너지를 모두 병원에 쏟느라 인생의 즐거움이 모자란 나머지 절박해진 탓이다. 사토는 그렇게 생각하며 뇌리에 아른거리는 ‘그’의 형상을 지웠다.


 그는 한 달쯤 전에 전근을 온 흉부외과의였다. 요즘은 심장 쪽에 집중해서 그쪽 일을 더 많이 맡는다고 했던가. 제법 실력이 좋아 심장외과에서 탐낸다는 소문을 들었다. 흉부외과와 소아청소년과의 거리는 병동 위치만큼이나 멀어 사토가 그와 친해질 만한 계기는 전혀 없었다. 어느 날 그가 부탁해오지만 않았다면 아마도 병원을 그만두는 그 날까지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토 케이코 씨죠?’


 조심스럽게 여직원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방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자 멋쩍은 듯 수줍게 웃었다.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러죠, 뭐.’


 친한 동료들이 웃으며 쳐다보는 이유를 뻔히 알고 있기에, 사토는 어깨를 으쓱이며 방을 나섰다. 그는 얼마나 마음이 급했는지 복도에 나서자마자 사토를 붙잡고 본론을 꺼냈다.


 ‘사토 씨. 다음 주에 있는 예약 환자 말인데요.’


 이야기는 이런 거였다. 그가 직접 예약을 넣은 환자가 조만간 진료를 받으러 올 예정인데, 심장에 지병이 있는 청소년 환자로 아주 어릴 때부터 같은 병을 앓았다고 했다. 최근까지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신학기에 맞춰 겨우 퇴원한 모양으로 본인은 괜찮다고 하지만, 몸이 약해 걱정이 된단다. 그러니 소아청소년과 의사인 사토가 아이를 설득해달라는 거였다. 고집이 센 편이라 자신의 말만으로는 듣지 않을지도 모른다면서.


 ‘그걸 왜 제가요?’


 사토는 황당해하며 물었다. 다른 소아청소년과 의사들도 마찬가지 같았지만, 사토 역시 그와는 안면조차 없는 사이였다.


 ‘아, 그게.’


 그는 당황한 듯했다. 한참을 얼버무리다가 어렵게 아이가 어려워하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이라서란다. 기가 막혔지만, 애절한 표정이 안타까워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아이들을 상대하는 건 좋아하니까 아주 싫은 제안도 아니었다.


 그때부터 그는 뻔질나게 소아청소년과를 드나들며 사토를 괴롭혔다. 그놈의 호무라―아이의 이름이었다―라는 이름이 그가 없을 때도 귓가에 맴돌 정도였다. 대체 무슨 사이기에 이토록 정성인 건지 궁금해 물어보았더니 빙긋이 웃기만 했다. 듣자 하니 미혼이라던데 사고라도 쳤나?


 어쨌든 사토는 그의 소중한 ‘아케미 호무라양’에 대해 단시간에 어마어마한 지식을 갖추게 되었고―어찌나 자랑을 하는지 영 신뢰가 가지는 않았지만―인제 와서는 어서 호무라양이 병원에 찾아오기만 바라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더는 그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어째서인지 자꾸만 그의 얼굴이 머릿속을 아른거리는 것이었다.


 “바보 같아.”


 사토는 얕게 한숨을 쉬었다. 밤 산책이 길었는지 어느새 병원 입구가 코앞이었다.


 “어라?”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중학생 여자아이의 실루엣이 자꾸만 눈앞을 맴도는 누군가와 겹쳐 보였다.


 “설마.”


 사토는 바삐 로비로 향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거기 앉아있는 소녀는 사토가 계속해서 떠올리고 마는 그, 아케미 소이치로와 똑 닮아있었다. 생머리를 길게 길렀다는 소이치로의 묘사와도 일치했다.


 과연 자랑할만한 미모기는 했다. 소이치로도 전혀 꾸미지 않는 것치고는 무척 미남인데, 이 여자아이는 중학생 특유의 앳됨과 피로 없는 젊음까지 겹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사토는 새삼 중학생의 깨끗한 피부에 감탄하며 인사했다.


 “안녕?”


 호무라는 무심한―약간 멍해 보이는―표정으로 사토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병원에 오래 다녔다더니 모르는 의사가 인사를 해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누구 기다리니?”

 “……가족이요.”


 호무라는 고민하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대답했다. 가족이라. 설마 정말 딸인가? 사토는 생각했다. 하기야 딸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정성스러운 것도 이상하기는 했다. 세상일은 모르는 거라지만, 나이차가 몇인데 동생일 리는 없었다. 사토는 수수한 미남 외과의의 과거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가 아는 분인 것 같은데, 퇴근까진 아직 좀 걸릴 거야. 먼저 돌아가지 않고 기다리니?”

 “기다리기로 했어요. 게다가 어두우면 위험하니까요.”


 호무라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나이 차이가 한참 나는 사토와 대화하면서도 어색한 느낌이 없었다. 어른과 대화하는 것이 어색한 아이는 종종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불안해한다. 중학생쯤 되면 귀찮아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릴 때부터 병원에 다니며 늘 어른들과 마주쳐야 했을 호무라를 생각하니 안쓰러워졌다.


 “그렇구나. 그럼 어쩔 수 없지. 내가 친구 해줄게.”


 그렇게 말하며 사토는 비어있는 호무라의 옆자리에 궁둥이를 붙였다.


 “얘, 네가 기다리는 게 아케미 소이치로씨 맞지? 흉부외과의.”

 “네, 맞아요.”

 “어쩜 이렇게 똑 닮았니. 똑같이 생겨서 못 알아보기가 어렵겠다.”

 “그런가요.”


 호무라는 마치 처음 만났을 때의 소이치로처럼 수줍게 웃었다. 그 미소에서 또 소이치로의 얼굴이 겹쳤다. 사토는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애 딸린 남자에게 연애감정이라니. 친구가 이런 이야길 했으면 꿈도 꾸지 말라고 엄포를 놓을 텐데 감정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좋겠다. 누구는 이렇게 귀여운 딸도 있고. 나도 직장까지 와서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데.”

 “남자친구 없으세요?”

 “의사는 말이지. 연애도 못 해. 병원에서 나가야 연애를 하건 말건 할 거 아니니. 있던 애인도 떨어져 나가게 생겼는데 무슨 수로 애인을 만들겠어. 넌 의사는 꿈도 꾸지 말렴.”


 호무라는 배시시 웃었다. 웃겨서 웃는 건지, 어른이 우스갯소리를 하니까 웃어주는 건지 모르지만 어쨌든 예쁘긴 예뻤다. 그리고 그 미소를 닮은 소이치로의 미소도.


 “호무라.”


 그래, 바로 저 표정이다. 로비로 나온 소이치로가 호무라와 완전히 똑같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호무라가 사토를 넘어 의자를 빠져나갔다. 달음박질치듯 다가가 손을 잡은 소이치로와 호무라는 스쳐 간 세월의 흐름만이 다른 얼굴로 활짝 웃고 있었다. 행복한 가족이로군. 사토는 웃었다. 일평생 자기는 부모님과 연출해본 적이 없는 광경이다. 물론 사토는 부모님과 사이가 좋았고 두 분을 사랑하지만, 십 년 떨어져 살다가 만난 것 같은 얼굴로 서로를 맞은 적은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소이치로와 호무라는 서로 손을 꼭 잡았다가 끝내는 진한 포옹을 끝내고서야 떨어졌다. 정확히는 소이치로 쪽이 바로 섰다고 하는 게 맞다. 호무라는 여전히 소이치로의 한쪽 팔에 매달려있었으니까.


 “오늘이었어요?”

 “미안해요. 연락을 해야 하는데, 수술이 세 건이나 있어서 잊어버렸지 뭐예요.”

 “괜찮아요. 그렇게 자랑하던 호무라도 봤고.”


 사토가 쳐다보자 호무라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대롱대롱 매달린 모양으로 인사만 챙기는 게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들어가서 쉬어요. 힘들겠다.”

 “당직인가 봐요. 수고하세요.”

 “안녕히 계세요.”


 사토는 손을 흔들어 두 사람을 배웅했다. 사람이 드문 로비에는 또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 정말 싫다.”


 사토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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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타입 자캐 커미션이었습니다.






 아이카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노을지는 태양과 훈훈한 바람이 어우러져 사색에 잠기기 좋은 날이었다. 좋아하는 카페 야외 테이블에 앉아 한가로이 아이스티를 저으며 생각에 잠긴 유우키 아이카. 사랑스러운 풍경이었다.


 아이카가 눈을 깜빡이자 돌돌 말려 올라간 긴 속눈썹이 함께 흔들렸다. 정성들여 티나지 않을 정도로만 마스카라를 바른 결과물이었다. 파운데이션으로 피부톤을 정리하고 가볍게 볼터치도 했지만, 아이카는 또래 중학생 여자아이들이 그렇듯이 엄마 화장품을 빌려 소꿉놀이라도 한 듯 부자연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한듯 안 한듯 자연스러운 내추럴 메이크업으로 곱게 단장한 아이카는 아이돌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예뻤다.


 외모에 자신을 가지는 것은 타고난 재능 없이는 힘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카는 행운아였다. 아름다운 얼굴, 중학생 같지 않은 늘씬한 몸매, 거기에 넉넉한 재력과 스스로를 가꿀 스킬까지 갖춘 아이카는 어딜가도 시선을 받는 예쁜 소녀였다.


 지금도 그랬다. 카페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 날이 좋아 야외 테이블을 찾아 나온 사람들이 한 번씩 아이카를 곁눈질했다. 자신을 보며 소곤거리는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아이카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아이카는 제 미모가 주는 뿌듯함에 젖어 취한 듯한 기분으로 저 멀리 길 건너편으로 시선을 던졌다. 학원 수업이 끝나면 함께 돌아가기로 한 친구가 슬슬 나올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카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두 명의 소녀가 있었다. 한 아이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음꽃이 활짝 피었고, 다른 아이는 고개를 돌리고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허리까지 닿는 긴 생머리가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 옆모습이 시선을 떼기 힘들만큼 아름다웠다.


 아.


 아이카는 무심코 아름답다고 생각해버린 자신의 멍청함에 화가 났다. 아름답다니. 대체 무얼 보고 그런 생각을 해버린 건지.


 정정한다. 두 소녀는 아주 예뻤다. 제 미모에 눈이 높아져 함부로 예쁘다는 평가를 내리지 않는 아이카가 인정할 정도로 충분히 예뻤다. 키가 조금 작고, 웃는 얼굴이 귀여운 쪽은 좀 더 다듬어줄 필요가 있어보였지만―아이카는 소녀의 크고 순한 눈망울을 돋보이게 할 아이라인을 생각하다가 제 허벅지를 꼬집었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남의 얼굴을 장식해서 뭐에 쓰려고?―키가 조금 더 크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을 한 소녀는 또래―소녀들은 미타키하라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교복이 예뻐서 기억하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삼십분도 넘게 가야하는 곳이었지만―라는 것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자세한 건 좀 더 가까이 와봐야 알겠지만 일단 몸매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조그만 얼굴에 오밀조밀 수놓인 이목구비는 굳이 화장품을 댈 필요도 없어보였다. 이미 화장을 한 건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그것대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아이카는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카는 문득 자신이 건널목 쪽으로 상체를 한껏 내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고작 남을 쳐다보기 위해 창피한 모습을 보이다니 스스로를 믿을 수 없다. 아이카는 의식적으로 자세를 바로하고 앉아 얼음이 녹아 밍밍해진 아이스티를 빨아들였다. 그런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조금은 속상함이 가셨다.

 아이카가 쳐다보건 말건 두 소녀는 건널목을 건너서 아이카가 앉아있는 카페로 다가왔다. 아이카는 모른 척했지만, 다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다가올수록 사람들의 시선의 방향이 쏠리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들이 카페에 들어가려고 한다는 것을 확신했을 때, 아이카는 호기심에 지고 말았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마치 그저 친구가 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것처럼 시선을 돌려 소녀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


 아이카는 멍청하게도 못 박히고 말았다. 가까이서 보니 무표정하던 소녀는 딱딱하다기보다는 그저 멍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매가 날카로워 힘을 풀고 있어도 차갑게 보이는 모양이다. 깨끗한 피부 어디에서도 화장품 냄새는 풍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콧날이며 선명한 입술색이 맨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세워도 괜찮겠다 싶었다.


 “여기 키위 주스가 맛있대. 전부터 꼭 먹어보고 싶었어. 카나도 그렇지? 에리카랑 같이 나눠 마시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카가 예의를 잊고 만 것은 소녀의 미모 탓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아이카는 스스로도 이유를 몰랐다. 어렵게 시선을 떼어 컵을 내려다보니 아직도 반 이상 남은 아이스티가 보였다. 얼음이 녹아서 양이 불어있었다. 버려야지. 아이카는 생각했다.


 “오늘 메뉴는 딸기스무디네. 나 이거 먹고 싶어. 좋아. 그럼 카나가 키위 주스고 에리카가 딸기 스무디야.”


 아까부터 웃는 얼굴로 쉼없이 뭔가를 말하던 아이가 조잘거렸다. 다소 코맹맹이 소리가 나기는 하지만, 이정도는 애교있는 수준임에도 아이카는 짜증이 났다. 애먼 빨대만 손톱으로 자근자근 구겼다.


 “있잖아, 카나.”


 그 말을 끝으로 소녀들은 유리문 너머의 세계로 사라졌다. 아이카는 겨우 자신을 다잡고 입술을 삐죽이 내밀었다. 아직도 오지 않은 친구가 원망스러웠다.


 “아이카.”


 놀라서 돌아보니 젖은 머리카락을 제대로 말리지 않았는지 착 달라붙은 머리를 한 친구, 우메가 서있었다. 아이카는 볼멘소리로 왜이렇게 늦었냐고 불평했다.


 “안 늦었는데? 끝나자마자 나온거야. 그러는 너야말로 답장 안했잖아.”


 그렇게 말하며 우메는 옆 의자에 가방을 놓았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문자 메세지가 세개나 와있었다.


 『나 끝났어. 금방 갈게』

 『어디야?』

 『보인다. 갈게』


 아이카는 할 말이 없어졌지만, 여전히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아이카에게는 길게만 느껴진 시간이 우메에게는 잠깐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치만 굳이 면박 줄 필요는 없잖아. 아이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입 넣어. 못 생겨보여.”


 우메가 말했다. 아이카는 반사적으로 입술을 양쪽으로 당겼다. 그건 우메가 삐친 아이카를 움직이게 하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스스로 움직여놓고도 아이카는 불만스런 소리를 냈다. 우메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가자. 밥 먹어야지. 배고파.”


 우메는 잠깐 앉을 생각도 않고 아이카를 제촉했다. 아이카는 투덜거리며 일어났다. 우메가 기다리는 동안 물이나 다름 없어진 아이스티를 버리려고 카페에 들어왔다가 아이카는 또다시 아까 그 소녀들을 발견했다. 창가에서 약간 떨어진 자리에 앉은 그들은 여전히 한 사람이 말하고 한 사람은 듣기만 하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아이카는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본 과거는 잊고, 참 희안한 애들이라고 생각하며 돌아섰다. 그들의 테이블에는 반쯤 빈 딸기스무디와 겨우 맛만 본 것 같은 키위주스가 놓여있었다.


 “카나는 미타키하라 교복이 정말 잘 어울린다. 귀여워.”


 흥. 아이카는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 학교 교복이 훨씬 예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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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말라.


무심코 물을 찾아 고개를 들었다. 케일의 등에서 그림자가 늘어져 오리아나를 가렸다. 키는 훌쩍 크지만 넓지는 않은 소년의 어깨가 며칠사이 듬직하게 변해있었다.


처음 겪는 일이 너무 많아서 집을 떠나온 지 한 달은 된 것 같았다. 언젠가는 내 일이 될지도 몰라서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일들이 차례차례 현실이 되는 것은 신기한 느낌이었다. 본 적도 없는 좋은 음식을 대접받으며 어린 동생의 뺨보다 부드러운 옷을 입고 알록달록 기상천외한 사람들 사이를 내달렸다. 마치 동화 속 공주님이나 용감한 기사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오리아나는 어쩌면 캐피톨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헝거 게임에 참가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며, 그 우승자는 판엠의 영웅일지도 모른다고. 적어도 그 환상적이고 놀라운 도시에서는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리아나는 그런 생각이 자신의 느긋한 환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리아나를 쳐다보는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울고, 어떤 것은 웃고, 또 어떤 것은 화를 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말은 모두 하나였다.


‘너는 곧 죽을 거야.’


오리아나는 눈동자 하나하나에 대답해주었다.


‘그래도 좋아. 이걸로 가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그걸로 좋아.’


무시무시한 날붙이를 휘두르는 사람도 굶주린 사냥개처럼 눈을 빛내는 사람도 있었다. 공동훈련에서는 정말로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가르쳤다. 배울 생각은 없었지만 케일을 따라다니며 주워들은 살인 기술은 요리를 위해 고기를 손질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리아나와 똑같이 웃고, 울고,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그랬다.


요리에 대해 생각하자 엄마가 떠올랐다. 오리아나가 엄마를 도와 부엌에 서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병으로 쓰러지신 뒤로는 더욱 그랬다. 엄마는 발전소를 쉬는 대신 집안일은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했지만 오리아나는 차마 엄마가 창백한 안색으로 불 앞에 서있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다.


엄마를 생각하자 연달아 아빠와 동생들 얼굴이 떠올랐다. 오리아나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케일.”


오리아나가 부르자 앞서가던 소년의 등이 움찔거렸다.


“우리 엄마랑 아빠 얼굴 기억해요? 동생들도.”


평화롭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케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걸음은 그대로. 조금도 느려지거나 빨라지지 않았다. 잠시라도 멈추었다가는 등 뒤에서 칼이 날아올 것이다.


“당연히 기억하지.”


내키지 않는 듯 퉁명스럽게 케일이 대답했다. 오리아나는 산들바람처럼 상쾌하게 웃었다. 케일이 불편해하는 기색이 등으로 전해졌다. 웃음은 금세 기가 죽었다. 배가 고프니 웃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넌 우리 부모님 얼굴 기억하냐. 형이나 동생 놈들도?”


웃음이 누그러지자 케일이 물었다. 방금 전과는 확연하게 톤이 달랐다. 잠긴 것처럼 낮아진 목소리였다. 먹먹하게 공기가 젖어들었다.


“물론이죠.”


오리아나는 활짝 웃었다. 케일이 우울해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곧 죽을 거라면 마지막까지 행복하길 바랐다. 어딘가에서 그들을 바라볼 카메라를 향해서도 웃어보였다. 틀림없이 지켜보고 있을 가족에게 전하고 싶었다.


‘나는 괜찮아요.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오리아나를 보면 엄마는 울어버릴 테지만 아빠도 있고 동생들도 있으니 괜찮다. 오리아나는 엄마를 위해 웃었다. 엄마도 똑같이 웃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케일이 그런 오리아나를 보고 투덜거렸다. 오리아나는 케일을 향해 다시 한 번 웃었다. 만약 케일이 살아남는다면 오리아나를 웃는 얼굴로 기억해주었으면 했다. 케일이라면 가족에게도 전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오리아나는 사랑하는 엄마, 아빠와 동생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있어서 기뻤다고, 위대한 헝거 게임의 우승자로 돌아가 오리아나를 잃고 슬퍼하는 오리아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위로해줄 것이다. 그런 믿음이 있었다.


오리아나는 케일에게 맡기기로 했다. 미래를,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을 향한 마음을. 오리아나가 겪어온 케일이라면 자기 자신보다 소중하게 지켜줄 게 틀림없다.


“나 참.”


케일이 툴툴거렸다.


“하여간 실없는 소리는 잘도 해요.”


오리아나는 멋쩍게 눈을 돌리는 소년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기도했다. 케일이 살아남기를.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기를.


안온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곳은 영예로운 헝거 게임장. 침묵과 평화는 사신을 소환하는 제물이었다.


폭발이 일었다. 지척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케일은 식은땀을 흘리며 오리아나를 잡아끌었다. 깡마르고 단단한 손 안쪽이 축축하게 젖었다.


“야, 등신아. 봤지? 그만 처웃고 가자.”


케일의 목소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어디에 붙었는지 무시무시하게 불길이 올랐다. 화염은 두 사람이 있는 자리까지 날아들었다. 곧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대포 소리였다. 헝거 게임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별똥별 대신 대포가 하늘을 달린다. 오리아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케일이 이끄는 대로 달린다. 어디를 얼마나 달렸는지 몰랐다. 숲 속에서 눈을 감고 달리니 발을 헛디디기 일쑤였다.


“씨발! 미친. 미친놈. 미친 건 알았는데. 미쳤잖아.”


미친, 미친하는 케일의 혼잣말이 노래 같다. 시야는 붉고 어두웠다. 감은 눈꺼풀 너머로 불타는 코뉴코피아가 떠올랐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걸음, 어눌한 발음.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곧 그는 붉은 화염 속에 시커먼 잿덩이가 되어버린다. 약에 의존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소년에게는 죽음이 구원이었을까. 눈물 한 방울이 기어코 눈꺼풀을 비집고 흘러내렸다.


“등신아, 울긴 왜 울어.”


언제 그만큼 달렸는지 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알 수 있는 것은 달려서 뜨거워진 체온과 차고 축축한 케일의 손, 헐떡이는 것이 숨소리인지 훌쩍임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얼굴을 감싼 손에 물기라곤 없었다.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없는 몸에 눈물은 메마른지 오래였다.


“케일.”


거친 손을 다정하게 붙들었다. 집에서는 일하느라, 이곳에 와서는 흙을 해치느라 쉬어본 적이 없는 손이었다.


“징그럽게 왜 이래?”


케일이 기겁했다.


준비팀이 정성들여 씻긴 보람도 없이 삼일동안 야생에서 뒹군 오리아나의 얼굴은 시커멓고 지저분했다. 환한 미소 위로 눈물길이 트였다. 씰룩이는 뺨을 따라 꿈틀꿈틀 춤을 춘다. 오리아나는 꿈지럭거리는 케일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차가운 손가락에 온기가 돈다.


흙먼지에도 색이 바래지 않은 푸른 눈이 살풋 휘어졌다. 오리아나는 공장에서 술래잡기 하던 때를 떠올렸다. 케일은 체력이 좋고 달리기도 빨라서 오리아나가 술래일 때 케일을 잡아본 적은 거의 없었다.


“바보바보 케일 리거!”


심하게 싸운 다음날이었다. 점심 식사 후 아이들끼리 가지는 놀이 시간, 오리아나는 누구보다 먼저 케일을 발견했다. 머뭇거리는 사이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케일 생각만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술래가 되어있었다. 아이들이 일제히 오리아나에게서 멀어졌다. 그 순간 케일이 눈앞에 있었던 건 우연이었을까. 있는 힘껏 손을 뻗으니 케일이 잡혔다.


케일은 그때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불퉁하게 부은 볼에 찌푸린 눈썹, 어딘가 안심한 듯한 눈빛.


“뭐야,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오리아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피 헝거 게임, 케일. 확률의 신이 언제나 케일 편이길 바라요.”


“……야, 등신아. 너 지금…….”


“나 물마시고 싶어요.”


오리아나는 나무에 기대섰다. 빛이 드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카메라가 있다면 저쪽이리라. 마지막까지 웃는 얼굴로 잡아주세요. 속으로 빌었다. 케일이 신경질적으로 ‘뭐야?’하고 물었다.


“뛰다가 발목을 삐끗했어요. 잠깐 쉬면 괜찮을 것 같은데 목이 너무 말라요.”


땅으로 떨어지는 고개를 억지로 들어 케일과 눈을 맞췄다. 케일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잘 숨어있을게요. 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다리가 떨리는 정도는 틀림없이 케일에게도 보일 것이다. 케일의 얼굴은 투명한 호수처럼 소년의 머릿속을 훤히 비춰주었다. 오리아나는 쓰게 웃었다.


“조금만 기다려.”


대답을 듣자 더는 마주보고 있을 힘이 없었다. 오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땅을 쳐다보았다. 다리가 볼썽사납게 후들거렸다.


“등신아, 잘 숨어 있어. 훤히 보이는데 서있지 말고 앉아서!”


오리아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서 있을 기운도 없어요.


케일이 멀어지는 소리가 났다.


오리아나는 눈을 감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일을 할 때 친구들과 함께 부르던 노래였다. 지루하고 힘든 일을 함께 이겨낼 수 있게 도와주는 노래였다. 나뭇가지에 쓸린 팔꿈치와 등이 따가웠다. 쓰러지지 않고 주저앉는 것만도 힘에 겨웠다. 아까는 나지 않았던 눈물이 이번에는 나올 것 같기도 했다.


사박사박 풀을 밟는 소리가 났다. 나뭇가지 하나 부러지지 않는다. 오리아나는 그게 그녀가 잘 훈련받은 덕인지 몸무게가 가벼운 덕인지 궁금했다.


“기다렸니?”


간신히 오리아나가 볼 수 있는 자리에 그녀가 있었다. 또렷한 시선이 지친 오리아나를 후벼 판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삼일을 숲속에 있었던 건 그녀도 마찬가지일 텐데 오리아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말끔한 모습이다.


“안녕하세요, 이브.”


인형처럼 무표정하던 얼굴이 피어나는 꽃처럼 화사해졌다. 오리아나는 마주 웃으며 그녀를 맞았다. 이브, 첫 번째 여인. 죄의 희생자인 그녀는 오리아나의 사신이었다.



강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렇게 불안한지. 케일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서있던 오리아나가 눈에 밟혔다. 대포 소리가 울릴 때마다 서럽게 울던 소녀는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물기 하나 없는 얼굴에 흙먼지로 그려진 우는 표정은 잘못 만들어진 피에로처럼 기괴했다. 웃는 얼굴이 절규하는 것처럼 보였다.


두 걸음에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폭발 속에서 오리아나가 그랬던 것만큼 발을 헛디뎠다. 이대로는 자신마저 움직일 수 없게 될지 몰랐다. 케일은 돌아보기를 그만두었다.


강에 도착했는데 물을 뜰 그릇이 없었다. 그릇을 만들려고 했더니 재료가 보이지 않았다. 겨우 나뭇잎을 모아오니 빨리 걸을 수가 없었다.


“더럽게 차갑네.”


나뭇잎 그릇은 작아서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물이 넘쳤다. 오리아나에게 돌아가는 길이 멀고 멀었다. 씨발, 씨발. 욕을 해도 흘러넘친다.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빨리. 마음만큼 발은 빠르질 않다. 하늘에는 어느 샌가 노을이 졌다. 강물도 붉게 물든다. 찰랑찰랑 흘러넘친다.


‘안녕, 케일. 꼭 살아남아야 해요.’


태양은 사뿐사뿐 떨어진다. 먼 별에 사는 조그만 생명들이 살고 죽고 울부짖는 것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발걸음이 가벼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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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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