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2_amelia_H @SN2__Master


 타닥타닥. 푸른 어둠이 내려앉은 휴게실에 빨갛게 불티가 튀었다. 다른 기숙사라면 벌써 벽난로는 꺼지고 집요정만 소리 없이 드나들 고요한 새벽, 노랗게 타오르는 불꽃을 등지고 앉은 소녀가 있었다. 탁탁탁, 불 튀는 소리와 함께 사각사각, 깃펜 소리가 섞였다. 소파에 몸을 파묻듯이 앉아 무릎에 책을 올리고 바쁘게 양피지에 무언가를 옮겨 적었다. 탁자에는 시야를 밝히는 램프가 있고, 옆에는 책이 쌓였다.

 “윙가르디움 레비오우사, 루모스 솔렘, 인센디오…….”

 제게만 겨우 들릴 작은 중얼거림이 깃펜의 움직임에 맞춰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계속되었다.

소녀는 몇 시간 전 죽음의 소식을 들은 참이었다. 막 악몽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렸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끊임없이 목숨을 위협하는 무언가가 다가오는 평범한 악몽. 놀랍게도 현실과 맞닿아있던 그 꿈은 눈을 뜬 순간 벽장에서 뛰쳐나와 모두를 덮쳤다. 무섭고 끔찍한 꿈이었지만, 여기서 열심히 주문을 적고 있는 에밀리아 혹은 에이미라고 불리던 여자아이는 눈물 한번 보이지 않았다. 불안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름과 얼굴을 외운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놀라워만 했다. 소녀에게 있어선 처음으로 보는 죽음이었다. 그 이름은 하염없이 멀기만 해서 소녀는 아직도 꿈결인가 생각했을 정도였다.

 사망통지로 기숙사는 혼란에 빠졌다. 어두운 꿈에서 빠져나온 학교는 한껏 근육을 수축해 긴장해 있었다. 소녀만이 습기를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워 통행금지 시간이 가까웠는데도 느긋하게 옮기던 걸음은 주변을 낯설게 만드는 암흑의 마법에 방향을 잃었다. 기껍게, 그러나 꺼림칙하게 헤매는 소녀를 바보같이 사람만 좋던 선배가 숨 가쁘게 달려서 찾으러왔다. 왜 그렇게 급하게 뛰어왔냐고 물었더니 화를 냈다.

 “멍청아, 너를 혼자 두고 내가 어떻게 가!”

 처음 보는 모습이라서 놀랐다.

 기숙사에 돌아온 소녀를 기다리는 것은 악몽이었다.

 “두 명이 죽었다는구나.”

 이름은 외웠지만 제대로 부른 적이 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사감 교수님이 말했다. 죽은 건 슬리데린의 라올리 데니우, 레번클로의 비비안 듀폰트란다. 그 말이 아득하게 들렸다. 소녀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필기가 걸렸다. 돌려주었어야 했던 필기.

 그건 악몽이 시작되기 전날의 일이었다. 한심스러운 장난이었다. 소녀는 심심했고 심심한 소년소녀가 모이면 시답잖지만 즐거운 놀이가 시작되는 법이다. 벌칙은 손목을 묶고 하루 동안 시간을 지내는 것이었다. 참가자 모두가 받아야하는 벌칙이었다.

 짝은 슬리데린의 남학생이었다. 성실과 정의, 공평함으로 세워진 후플푸프에서 가장 거리가 멀지도 모르는 기숙사였다. 교활하고 고귀하며 아름다운 슬리데린. 소녀는 라올리 데니우를 만났다.

 그는 고운 사람이었다. 곱상한 얼굴에 나른한 태도였지만 우아했다. 소녀는 순수혈통을 지켜온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이 귀족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막내로 태어나 제멋대로 살아온 아버지가 집에 데려가는 일이 없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질려 동생만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일에 서툴고 철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대대로 유지해온 고서점에서 성장했다. 책을 읽고, 일을 배웠다. 어릴 때부터 집안일도 가게일도 대부분 소녀의 몫이어서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그나마 집요정이 있고 두 식구 살림이 단출한 게 다행이었다.

 그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절대 스스로는 풀 수 없도록 준비된 수갑을 풀기 위해 손목을 끊겠다고 날뛰었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사람을 해치는 이야기를 했다. 무서워 떨고 있으니 상냥하게 말을 걸어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의외로 즐거웠고, 그만큼 무서웠다. 대화 사이사이 예고 없이 터져 나오는 말들은 당황스럽고 소름끼쳤다. 그러다가 울고, 위로받고, 함께 식사했다. 소녀는 그가 자신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말은 오래 갈고 닦은 사회 적응 스킬의 일환일 뿐임을 느끼고 있었으면서도 그가 마음에 들었다.

길디 긴 하루가 끝나고 헤어지면서 그는 소녀에게 빚을 졌다고 했다. 그런 것을 신경 쓰는 마음은 알 수 없었지만 소녀는 이해했다. 소녀는 그것을 호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필기를 빌렸다. 다음날 돌려주마 했다. 그날은 악몽이 찾아온 날이었다.

 “레파로, 익스펠리 아르무스, 아리스토 모멘텀…….”

 소녀는 깃펜을 지팡이처럼 휘둘렀다. 저승에는 아무것도 들고 갈 수 없다. 이제 와서 필기를 옮겨봐야 돌려줄 수는 없었다. 나이어린 소녀도 그 정도는 알았다. 그래서 베끼지 않았다. 하지만 돌려줘야한다고 생각했다.

 악몽 속에서 소녀는 용을 만났다. 무시무시한 소리가 섬세한 고막을 찢고 먼 하늘에서 용을 불러왔다. 사람이 바람 만난 낙엽처럼 흩어지던 풍경이 선명했다. 꿈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건 현실이었다.

 혼란 속에서 소녀를 잡아준 사람이 있었다. 귀가 아파 일어서지도 못하는 소녀를 붙들어준 다른 소년. 금발에 제법 근사한 얼굴을 했지만 얼굴 이상으로 입이 방정인 소년. 친해질 생각조차 없었지만 늦은 밤 함께 나눈 대화가 즐거웠다.

 악몽 속에서 소년이 바쁘게 움직일 때 소녀는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바쁘게 움직이며 돌아다녔던 것 같은데 어느 샌가 흐릿해져 있었다. 과연 꿈이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그게 꿈이라면 붙들어 주었던 따뜻한 손도 꿈이었을까.

 “이모뷸러스, 잉고르지오, 카르페 레트락툼…….”

 그 꿈에서 누군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다치고 고통 받는 친구들을 보았었다. 소녀는 딱히 할 것이 없어서 혼란에 빠진 후배를 달래고, 적당히 주변을 돌며 잔심부름을 했다. 상황을 살피러 오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있더라고 간단한 소식을 전하는 역할도 맡았다. 아무것도 않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했다.

 꿈에서 죽은 사람은 분명 소녀가 아는 사람이었다. 금발에, 괜찮은 얼굴과 자아도취까지 소녀를 돌봐주었던 소년과 닮은꼴인 남학생이었다. 연회장에서 만나 인사를 했고, 소개도 하지 않았는데 소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악몽을 만들어낸 범인. 그렇게 말하며 사람들이 남학생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소녀는 듣기만 했다. 생각한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악몽이 끝나고 남학생은 하하 웃으며 화를 내고 있었다. 큰 소리가 오갔다. 소녀는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소녀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글래이셔스, 아씨오, 디펄소…….”

 비비안 듀폰트는 돌이켜볼 것이 없을 정도로 기억이 희미했다. 그녀를 본 기억은 있었지만 이야기해본 기억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학교 스타에 흠뻑 빠져 있었다. 멀리서 보기엔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소녀는 깃펜을 내려놓았다. 일학년부터 지금까지, 약 오년 가까운 시간동안 배운 주문을 모두 한 자리에 모았다. 이게 쓸 일이 있을까? 모른다. 대부분 손 아프게 베낀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무의미하게 잊힐 거라는 사실 아닌 사실만 분명했다.

 양피지를 훑는 초록 눈동자가 램프 불빛을 따라 흔들렸다. 스코지파이, 레파로, 테르지오, 아씨오 대신 프로테고, 피안토 듀리, 익스펠리아르무스를 외운다. 에피스키와 페룰라도 연습했다. 배우면서도 쓸 일이 없겠거니 대충 넘어갔던 주문들을 뇌리에 새기듯 반복했다. 인카서러스. 내 입으로 외우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주문. 엉킨 실타래 위에 가지런히 주문이 새겨졌다.

 소녀는 시간을 되새겼다. 온실에서 수업을 듣고 다과를 마시던 날. 몰래 교수님 흉을 봤다가 울음을 터뜨리고 만 날. 아아, 되돌아보면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능력은 모자라고 개성도 없는 쓸모없는 기숙사라는 아이들끼리의 흉에도 진심으로 화를 내며 후플푸프 학생들을 감싸주던 사감 교수님. 언제나 근사한 모습으로 여학생들의 동경을 한 몸에 받아가던 슬리데린 사감 교수님. 무책임한 발언을 일삼아 늘 소녀를 화나게 하던 그리핀도르 사감 교수님. 늘 공정한 태도로 학생을 대하느라 정작 제 기숙사 점수를 깎아먹던 레번클로 사감 교수님. 장난인지 진심인지 분간할 수 없는 말을 하던 교장 선생님과 각 과목을 맡아 가르치던 교수님들. 아무 쓸모없는 잡담으로 지새우던 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도서관에서 버티려고 숨을 곳을 찾던 시간도. 돌이킨 모든 것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소녀는 생각했다. 워커 교수님, 당신은 알까요. 일부러 당신 이름을 틀렸다는걸. 곤란해 하는 표정도, 정정해주는 말도 좋아서 몇 번이고 바꿔 불렀다는 것. 페이튼 교수님, 당신은 모르겠죠. 내가 일부러 당신에게 말을 걸었다는 것. 아빠를 닮은 당신이 너무 싫고, 그런데도 좋아서 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것. 아스트라 교수님, 퀸스틸러 교수님.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늘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요. 당신의 시선이 느껴졌으니까요. 그런 당신들에게 내가 힘이 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고요한 후플푸프 기숙사 휴게실에 바람이 불었다. 소녀는 느끼지 못한 듯 고요했다. 시간이 생각에 잠겨 손을 멈춘 소녀를 가로질렀다. 사각사각, 다시 깃펜이 움직였다.

 소녀는 날이 밝은 호그와트 연회장에 서있었다. 바쁘게 무언가를 적고, 누군가를 붙잡고 이야기하고, 때로 주변을 살폈다. 근처 테이블에는 책이 쌓여있었다. 밤중에 소녀 곁에 흩어졌던 교과서가 아닌 화사한 표지의 동화책과 소설책이었다. 소녀는 끊임없이 움직였지만 책 곁에서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다. 기둥에 묶인 망아지처럼 한곳을 맴돌았다.

 소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떠나는 누군가의 등을 떠밀며 조그만 수첩에 필기를 했다.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를 준다. 소녀는 자신의 무력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가질 수 없는 것에 절망하지 않는다.

 “디터니 원액을 만들려면 증류를 할 물건이 필요한가. 이쪽으론 영 관심이 없으니, .”

 온실로 조사를 다녀온 교수님이 중얼거렸다.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섰다.

 “제대로 된 도구가 있으면 좋겠지만 없다면 뚜껑을 씌워서 증기를 모은 후에 다른 그릇에 받으면 돼요.”

 교수님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방법을 확실히 아는 게 아니니 있어보자꾸나.”

 소녀는 동의했다. 디터니 용액은 꼭 필요한 약이었지만, 독과 약은 한 몸이었다.

 부상자가 생겼다. 도서관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탐구욕으로 파랗게 불타는 눈을 가진 레번클로의 아이. 창공을 나는 독수리처럼 뛰어난 두뇌를 빛내는 조그만 소년. 소녀에겐 그런 탐구심은 없었지만 함께 책 이야기를 했었다. 소녀는 뜨겁게 달아오른 손바닥을 안고 돌아온 아이를 멀리서 지켜보았다. 다행히 상처는 크지 않았다.

 한참을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모두 지쳐 쉬는 시간. 소녀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그란 안경이 귀여운 천진한 여자아이. 연회장에 홀로 별을 뿌리는 그녀를 붙들고 조잘조잘 떠들었다. 가볍게 웃고 떠드는 사이 흐릿한 머릿속이 살짝 개었다.

 공기에 비린내가 섞인 것은 푸른 얼굴에 활기가 돌아올 무렵이었다. 같은 넥타이를 맨 선배가 사색이 되어 뛰쳐나갔다. 아아, 피다. 새빨간 자국이 파란 넥타이로 퍼졌다. 누군가 말했다. 디터니 용액이 필요해! 소녀는 생각했다. 그런 거 없어.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말이 입술 사이로 샜다.

 “마법의 약 교실 비품 창고는 역시 위험한 곳이었나 보네.”

 계속해서 출입을 거부하던 위험한 장소에서 돌아온 것은 소녀의 친구였다. 갓 인쇄한 책에 그려진 삽화처럼, 선명한 색으로 물든 친구. 소녀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지켜주었던 친구. 누구하고나 잘 어울리는 똑똑한 친구. 따라다니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아보였다.

 이해하건 그러지 못하건 상관없이 소녀는 움직였다. 머리가 멈춰도 손과 발은 멈추지 않는다. 소녀는 급하게 디터니 용액 제조법을 찾았다. 차게 식은 손끝에는 감각이 없었다. 누군가가 제조법을 찾아왔다.

 “인센디오!‘

 급하게 불을 붙였다. 장작이 없어 책으로 대신했다. 다시는 못 구할 품절본이 끼어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어차피 소녀가 가진 책은 대부분 희귀본이다.

 떨리는 손으로 물을 휘저었지만 아아, 알고 있었다. 될 리가 없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아아아, 아까운 꽃박하. 푸른 별이 하늘로 둥실 떠올랐다. 소녀는 생각했다. 아까 가져온 쑥과 박하, 당장 만들어놓자. 분명히 쓸 일이 생길거야. 쓸 곳이 생긴 뒤에 찾으면 늦어. 당장, 지금 당장.

 소녀는 외면했다. 다시없을 친구의 몸을 깨끗하게 정돈하고 망토를 벗어 얼굴 위에 덮었다. 봤지? 할 수 없었어.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 무능한 아멜리아. 생각은 짧게 가슴은 무디게. 잘 가, 록시. 너란 사람을 알아서 무척 기뻤어. 짧은 대화라도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어. 부러웠어. 동경했어. 고이 잠들길.

 집보다도 좋았던 학교는 건초를 얹은 지옥이었다. 개구리를 넣은 물을 약한 불로 끓이면 다리가 익어 달아나지 못한다지. 소녀는 웃었다. 훌륭한 함정이었어, 호그와트.

 소녀는 걸었다. 결코 멈추지 않았다. 웃고 떠들고 움직이고 달렸다. 슬픔이 나를 짓누른다면 그대가 오기 전에 달아나리라. 멈춰버릴 다리를 나는 가지고 있지 않아. 더 멀리, 더 멀리. 이것이 꿈이라면 깨어날 때까지. 언덕길을 구르는 눈덩이가 얼마나 커지더라도 상관하지 않겠어. 짓눌릴 바에는 달아나리라.

 소녀는 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주고 웃는 아이에게는 칭찬을 주었다. 그대가 빛나고 있어. 아름다운 그대가. 연약한 마음은 입에 발린 소리에도 눈물을 흘렸다. 처진 등을 보고 싶지 않았다. 서글픈 눈물도 보고 싶지 않았다. 쫓아오는 눈덩이가 세상 무엇보다 두려웠다. 그를 닮은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차가운 손끝을 만지고 싶지 않았다. 한번 시작된 달리기는 멈출 줄을 몰랐다.

 어둠이 내려앉았다. 시간을 태운 바람은 돌고 돌아 모닥불이 타는 따뜻한 휴게실로 돌아왔다. 타닥타닥 불티가 튀고 사각사각 깃펜이 춤추는 곳. 혼란스럽고 눈물이 가득한 그곳과는 달리 평화로운 후플푸프 기숙사. 안개처럼 흩뿌린 엷은 슬픔이 소녀를 떠밀고 있었다. 천천히 걷기 시작한 발은 언제쯤 멈추게 될까.

 “에피스키, 브리키움 엠멘도, 페룰라, 레너베이트…….”

 짧게 스쳐간 악몽 속에서 능숙하게 치료마법을 사용하던 선배가 있었다. 소녀와 똑같은 노란 넥타이를 매고 늘 단정한 차림이 믿음직스러웠다. 도닥여주는 손은 따뜻하고 말씨는 상냥했다. 악몽이 아니었어도 소녀는 그를 좋아했지만 악몽이 아니었다면 그가 그렇게 유능한 줄은 몰랐을 것이었다. 혼란 속에서 눈길을 잡아끌던 근사한 지팡이를 소녀는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곁은 지켜줄게. 눈에서 물이 나올 것 같으면 와도 좋아.”

 그가 소녀를 위로하며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깃펜을 쥐고 허공을 휘젓는 소녀는 마치 소리 없는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자 같았다. 불티가 손짓을 따라 튀어올랐다. 긴 소매가 프리마돈나였다. 심취한 어둠이 어깨를 흔들었다.

 소녀는 책을 내려놓고 소파 앞을 걸어 다녔다. 여전히 입으로는 주문을 외우고 손은 깃펜을 휘두르며. 소녀는 자신에게 물었다. 뭔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소녀는 대답했다. 아니. 그럴 리 없어. 그러면서도 생각했다. 그래도 무사했으면 좋겠다. 무사하게 해주고 싶다.

 곧잘 웃고 천진난만한 같은 기숙사의 여자아이는 오늘도 소녀를 붙들어 주었다. 소녀에게는 없는 것을 모두 가진 그녀가 처음에는 참 부담스러웠다. 그토록 사랑스러운 여자아이에게서 소녀가 느끼는 건 질투뿐이다. 하지만 소녀는 오늘도 그 보드라운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녀는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내일이 오는 게 무서워. 오늘 꾼 꿈인지 환상인지 모를 그것처럼 다들 다치고 사라질까봐.”

 소녀는 기도했다. 부디 내일이 오지 않기를. 내가 가질 수 없는 미소를 질투할 수 있게 해주기를.

 그래, 당신도 있었다. 소녀는 떠올렸다. 오늘 처음으로 색다른 모습을 본 바보 같은 선배. 바보라고 생각하면서도 기대고 있었다. 마음이 불안하면 찾았다. 속없는 웃음은 꽉 찬 달 같아서 길이 보이지 않을 때면 찾고 있었다. 당신을 보면 길이 보일 것 같았다.

 “난 네 선배잖아? 후배를 챙기는 일은 당연한 거야.”

 곧잘 덜 떨어진 소리를 하면서 그런 말은 잘도 했다.

 미소로 울던 교수님. 소녀는 읊었다. 교수님은 소녀를 보면 늘 울었다. 한 번도 그런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단단히 굳은 어깨를 소녀는 보았다. 그래서 기대지 않았다. 짐을 얹어주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그랬고, 어머니에게 그랬듯이.

 “, 난 그저 힘없는 약초학 교수란다. 물론 내 아이들이 다치게 놔두진 않겠지만.”

 그 말을 믿어요. 교수님.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러고 있었는지 희미하게 날이 밝아왔다. 창문 너머가 환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큰일이야, 페리. 오고 있어. 오게 두고 말았어. 네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내일을 허락하고 말았어.

 소녀는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자신도 내일을 두려워했던 게 아니었을까. 언제나처럼 늦게 잠드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니었는지도 몰라. 이 해가 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깃펜을 쥐었는지도 몰라.

 소녀는 멈춰 섰다. 이 어둠 속에서 구해주세요. 무서워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불안해요. 죽고 싶지 않아요. 아픈 것도 싫어요. 노란 불꽃이 아우성쳤다. 소녀는 해 뜨는 창밖을 얼빠진 얼굴로 지켜보았다. 내일이 오고야 말았다.

 타닥타닥, 불티가 튀었다. 초록빛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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