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를 달구던 여름 태양이 바다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한나 수녀는 창밖을 넘어다보며 중심가는 한창 북적이겠구나 생각했다. 여름 축제를 즐기는 시민들과 관광객이 어울리는 광경이 눈에 선했다. 그에 반해 한나가 근무하는 변두리 성당은 축제의 여파마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적막했다. 한나는 창가에서 멀어져 실내로 들어갔다.

오늘은 한나가 성당을 지키는 날이었다. 성당은 워낙 변두리에 조그맣게 자리 잡아 지역 주민이 아니면 존재조차 몰랐다. 때문에 지나는 사람이 들르는 일은 거의 없고 주말 미사 시간 외에는 거의 신부님과 둘이 보낼 때가 많았다. 오늘은 마침 신부님도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성당에는 한나 혼자였다.

한나는 예배당 안쪽에 있는 조그만 휴게실로 들어갔다. 좋아하는 장소였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투과해 떨어지는 오색 빛이 예배당을 아름답게 물들이면 이곳으로 들어가면서 살짝 돌아보는 게 좋았다. 성당에 가득한 신의 축복을 육안으로 목격하는 기분이었다.

워낙 작아 조금만 움직여도 할 일이 사라지는 성당에서 한나는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이런 시간, 한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사람이 없으면 신부님도 빈 공간을 찾아 들어가고 한나는 주로 책을 읽었다. 가끔은 음악을 듣기도 했다. 나이 지긋한 신부님은 아직 어린 한나가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도록 배려해주었다. 그게 외롭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한나는 오늘은 무얼 할까 고민하며 서성이다가 겨우 책을 한권 뽑아들었다. 마음도 싱숭생숭하니 즐거운 것으로 뽑았다. 그때 본당에서 인기척이 났다.

계세요?”

한나는 탁자에 책을 올려놓고 나갔다.

하루를 끝내고 돌아가는 햇빛에 예배당이 온통 붉었다. 나란히 놓인 긴 의자들 사이로 이상한 사람이 서있었다. 한나는 기묘한 복장에 잠시 말을 잃었다. 전신을 가리는 로브는 밤하늘 같은 남빛이었고 머리에는 마녀를 연상시키는 뾰족 모자를 썼다. 한나는 그가 축제를 즐기는 중인가보다 생각했다. 방문자는 한나를 향해 거침없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그는 모자를 들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창백한 금발이 반짝였다.

여기에 편지를 맡겨두었다고 들었습니다. 제 이름은 아서 홈즈예요.”

앳된 뺨을 붉게 물들인 방문자는 선명한 초록빛 눈을 빛내며 한나를 바라보았다. 한나는 어리둥절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뒤늦게 박수를 쳤다. 기억이 있었다. 그건 일 년 전 일이었다.

그날도 한나는 혼자서 성당을 지키고 있었다. 기묘하게도 조용한 여름밤이었다. 신부님은 출장을 나가 없었고 오랜만에 자유를 누리겠다며 늦은 시간에 간식을 먹었더니 눈이 말똥말똥해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잠깐 산책이라도 할까 싶어 밖으로 나가는데, 본당에 사람이 있었다.

동네 주민으로는 보이지 않는 낯선 사람은 소리도 없이 앉아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손을 모으고 있었지만 기도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한나는 그를 여행하는 수도사라고 생각했다. 먼지 쓴 칙칙한 로브를 두르고, 후드를 썼다가 벗은 것처럼 머리가 지저분했다.

안녕하세요?”

한나가 인사하자 수사가 돌아보았다. 노란 빛이 감도는 초록 눈은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빛났고 깊은 슬픔에 잠겨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묻자 그는 다시 십자가를 보았다.

사람을 만나러 왔습니다.”

낯선 수사는 잠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굳게 다물려 있음에도 어딘가 장난스럽게 보이는 입매가 마음을 삼키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한나는 그의 곁에 앉았다.

주님은 늘 당신 곁에 있습니다.”

일렁이는 불빛에 수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애도 그 곁에 있겠죠.”

수사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물기가 어렸다.

작년 겨울이었어요. 학교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아이를 급히 병원으로 옮겼다고 하더군요.”

수사는 아찔한 듯 눈을 감았다 떴다.

들려준 이야기는 이랬다. 그에게는 딸이 있었다. 성적은 중간 정도였지만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건 물론, 가정 사업까지 상당부분 돕는 똘똘한 아이였다. 기숙학교에 다녔고 교우관계가 좋지 않다는 평가를 받곤 했지만, 큰 사건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워낙 야무져 끊임없이 같은 평가가 쓰여 있어도 수사는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런 애가 몇 달 전 갑자기 학교에서 폭행으로 경고를 받았고 사태는 점차 심화되어 다른 학생의 목숨이 위험할 지경에 이르렀다. 담당 교사는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아이를 병원으로 이송시켰다. 일이 크게 번질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피해 학생은 딸을 용서했다.

딸아이는 겨울부터 정신 착란을 호소해왔다고 했다. 수사는 크게 놀랐다. 딸은 방학에 집에 돌아와서 한 번도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었다. 방학 때면 늘 그래왔듯 수사에게 잔소리를 하고 집안을 정리하고 일을 했다. 어지간히 놀란 걸로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아이였지만 수사는 딸이니까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딸을 입원시킨 병원에서 의사그는 치료사라고 했다는 말했다. 파악은 불가능하지만 일종의 저주한나는 이 말이 이상하다는 걸 알았지만 그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 끼어들지는 않았다에 걸린 것 같다고 했다. 의사치료사는 당장 지금부터 격리수용해야한다고 말했지만 면회는 허락해주었다.

방학 이후 거의 반년 만에 만난 딸은 평소와 전혀 다름이 없었다. 흐트러진 붉은 머리에 옷은 구겨져있었지만 수사를 닮은 초록 눈만은 총명하게 빛났다. 낯선 장소에서 지팡이어린아이가 지팡이를 짚는다? 이 역시 한나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말을 막지는 않았다를 빼앗겼음에도 집에서와 전혀 다름없는 웅크린 자세로 책을 움켜쥐고 있었다. 수사가 인사하자 책 너머로 흘깃 보더니 고개만 대충 끄덕여 답하는 것도 똑같았다.

무슨 사고를 쳤어?”

수사는 언제나 그랬듯이 친구처럼 다가가 딸아이가 앉은 침대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딸애는 귀찮다는 듯 손짓했다. 한창 책에 빠져있는 중에 말을 걸면 보이는 손짓이었다. 할 수 없이 수사는 기다렸다. 희고 환한 불빛 아래 딸의 얼굴은 해쓱해보였다. 그렇게 보니 안 그래도 마른 몸이 한층 가벼워진 것도 같았다.

딸애가 입을 연건 십여 분이 지난 뒤였다. 읽던 부분에 손가락을 끼운 채로 책을 덮고 수사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아빠.”

딸은 말했다. 그 이후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수사는 아이를 독촉하고 화도 내봤지만 굳건히 닫힌 입은 열리지 않았다. 아이의 이야기는 의사를 통해서나 겨우 들을 수 있었다. 딸은 심각한 정신착란 증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낮에는 멀쩡하지만 밤만 되면 악몽을 꾸고 깨달았다. 꿈 내용은 늘 같았다. 매일 학교에서 누군가 사람이 죽는다. 딸과 친구들은 교사들의 지도아래 탈출 방법을 찾았지만, 결국 상당수가 죽음을 맞았다고 했다. 꿈속에서 딸은 죽었던 모양인지 계속해서 자신이 살아있는지를 확인하고, 살아있음을 확인해주면 잠시 침착해졌다가 자살을 시도한다고 했다.

책임감 때문입니다.”

의사치료사는 말했다. 악몽 속에서 딸은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고한나는 수사가 잘못 말한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꿈이라서 그런 듯했다더 이상 다른 사람들이 죽지 않도록 안간힘을 다했다. 그 생각이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 낮에 침착하게 대화했을 때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했다.

이 사건을 얼른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위해서라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하겠다고요.’

의사는 딸과의 대화를 기록한 차트를 보여주었다.

낮에는 놀라울 정도로 얌전합니다. 밤에 이성을 잃고 날뛰는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죠. 정신병자들이 원래 그렇습니다만.”

꿈속에서 느낀 압박감이 지금도 딸을 누르고 있다.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걱정 받고 싶지 않다고 발언했다. 의사는 덧붙였다.

학교에서도 이성이 있을 때는 교수나 친한 사람들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게 끝이었다. 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딸은 하루하루 증상이 심해졌다. 어쩌다 우연히 딸이 발작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딸은 아버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도망치라는 처절한 비명이 수사의 심장에 새겨졌다.

어제 딸을 묻고 왔습니다.”

수사는 그 말을 끝으로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한나는 차마 그에게 더 이상 말을 걸 수 없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는 이미 새벽이었다. 한나는 수사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는 아침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지막 보았을 때, 그는 한나에게 편지를 한통 맡겼다.

이 편지를 찾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전해주세요.”

편지 봉투에는 ‘Rory A. Holmes’라는 이름이 필기체로 적혀있었다.

아서 홈즈라고 자신을 밝힌 소년은 과연 그때의 수사와 닮아있었다. 밀 빛에 가까운 어두운 금발이었던 수사와 달리 투명하게 빛나는 플라티나 블론드와 험지를 다닌듯한 수사와 달리 고급스러운 옷이었지만 인상적인 초록 눈은 동일인물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법했다.

잠시만 기다려요.”

한나는 소년을 두고 다시 본당 뒤로 들어갔다. 오랜 시간 찾아오지 않아 깊숙이 들어가 버린 편지를 찾으며 당시에는 이름도 묻지 못했지만 소년이 그토록 수사를 닮은 것을 보면 혈연관계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한참을 편지를 찾아 헤매다가 겨우 찾아 돌아섰을 때, 홈즈는 한나의 뒤에 서있었다. 한나는 놀라서 넘어질 뻔 했다.

오래 걸려서 들어왔어요.”

홈즈는 당황하며 한나를 부축했다. 가까이서 보자 무척 예쁘장한 소년이었다. 성장기가 아직인지 한나보다 작았는데 풍성한 속눈썹과 고운 선이 여자아이 같기도 했다. 청량한 향기가 났다.

너무 오래 넣어놨더니 어디 있는지를 잊었지 뭐예요.”

한나는 편지를 건네며 홈즈에게 차를 권했다. 소년은 망설이는 듯 했지만 제안을 수락했다.

한나는 홈즈에게서 뾰족 모자를 받아 옷걸이에 걸고 차를 준비했다. 소년은 자리에 앉아 편지를 읽었다. 얼핏 보니 세장쯤 되어보였다. 한나가 다과를 준비해 돌아왔을 때, 홈즈는 침울해진 얼굴로 편지를 넣고 있었다.

좋은 내용은 아닌가보네요.”

소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나도 차를 따르고 맞은편에 앉았다. 홈즈는 의자에 앉으면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양손으로 찻잔을 꼭 쥐었다.

홈즈는 생각에 잠긴 눈으로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았다. 한나 역시 침묵했다. 홈즈가 수사의 가족이라면 일 년 전 그 밤 수사가 해준 이야기와 관련이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편지를 읽은 소년이 말을 잃는 것도 이해가 갔다.

찻잔을 반쯤 비웠을 때였다. 홈즈가 입을 열었다.

이 편지를 받을 때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까?”

한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자신이 들은 것도 간략하게 전했다. 소년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생각에 잠겨 입을 다물었다.

그럼 궁금하시겠군요.”

홈즈가 말했다.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소개했지만 저는 아서 홈즈입니다. 당신이 만난 사람은 브라이언 홈즈. 제 아버지입니다.”

홈즈는 이렇게 운을 떼었다.

홈즈가는 총 네 명이었다. 한나가 만났던 수사, 브라이언과 그의 아내 그리고 두 자식이었다. 첫째는 죽은 딸, 이름은 아멜리아라고 했다. 아서보다 두 살 많은 누이였다.

부부는 서로 원해서 결혼한 게 아니었다. 정은 있었지만 사랑 정도는 아니었다. 그건 일종의 정략결혼이었다. 부와 혈통을 지키기 위한 결혼. 촌수는 멀지만 두 사람은 친척이었다. 사이는 나쁘지 않았으니 불만은 없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브라이언은 삼 대째 이어오는 고서점을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것은 그의 취미인 동시에 업이었다. 일하지 않아도 부유했지만 브라이언은 서점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아마 머글 때문이었겠죠.”

홈즈는 말했다. 한나는 낯선 단어에 질문을 던졌다. 홈즈는 당신 같은 사람을 칭하는 말이라고 했다. 한나는 그게 수도사를 의미하는 일종의 은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머글을 좋아했죠.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돈과 물건에 특히 관심이 많았습니다.”

홈즈는 질색하며 말했다. 못마땅해 하는 것 같았다.

머글 경매에 참여해 물건을 따오기도 하고 우리 세계에서 유출되어도 문제가 없는 것들을 팔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골동품이니 망정이지요. 옛 물건 중에는 우리의 것이 많으니 필요한 일이었지만 하필 그걸 왜 아버지가 하는지 어머니는 불만이었습니다. 아무리 필요한 일이라도 머글과 직접 교류하다니, 집안 망신입니다.”

한나는 머글이란 말이 수도사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불쾌해야하는지 그냥 들어야하는지도 모호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에게서 떠났습니다. 지금도 아버지를 싫어하지는 않으시지만 그 집에 살았던 건 수치스럽게 여기고 계세요. 제가 보바통학교 이름입니다에 입학한 해에 아버지와 크게 싸우고 갈라섰지요. 아멜리아는 아버지와 함께 남고, 제가 어머니를 따라갔습니다.”

홈즈는 어쩌면 그게 불행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그 뒤로는 거의 연락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가끔 부엉이참을 수 없어진 한나는 질문했지만 무시당했다를 주고받는 정도였죠. 그러다가 연락이 온 게 작년이었습니다. 누이가 죽었다는 말만 남기고 아버지는 사라졌습니다. 어떤 설명도 없었죠. 본래도 무책임하고 떠돌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때만큼 최악인 건 처음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놀라서 달려갔지만 고서점은 단단히 잠겨 들어갈 수 없었고 그 뒤로 아버지는 연락이 된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영리한 부엉이를 보내도 찾지 못했죠. 그러다가여기서 홈즈는 잠시 망설였다어제 겨우 머글의 거리로 난 입구에서 메시지를 찾았어요. 우리는 그런 곳에 뭔가를 숨겨놨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죠.”

홈즈는 다시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리석은 아버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침통했다.

이곳에 편지를 맡겼다. 중요한 내용이니 찾아가라. 그게 다였습니다.홈즈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아멜리아의 유언장이군요.”

소년은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깍지 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한나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집어 들었다. 홈즈는 한나가 편지를 읽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한나는 반듯하게 접힌 낡은 종이를 펼쳤다.

틀림없이 엉망으로 지내고 계실 아버지께.

안녕, 아빠. 에이미예요. 얼마 전에는 못 볼 걸 보고 가셨다죠? 미안해요.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네요. 참을 수 없는 시간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제정신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나 말고도 증언해줄 사람은 많겠지만 아빠에겐 직접 말해야겠죠. 악몽이요. 그건 분명 꿈이 아니에요. 미친 사람의 헛소리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그게 꿈이라면 갈수록 기억이 선명해질리 있나요. 그런 꿈은 없어요. 어떤 책에도 그런 말은 없었어요. 저주는 모르겠네요.

나는 죽어있어요. 기숙사가 모두를 쫓아내고 친구들이 죽어가요. 어제 웃으며 인사했던 아이가 오늘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고 나는 그걸 두 손 놓고 방관하죠. 무얼 할 수 있겠어요. 죽었는걸요. 지팡이를 휘두를 수도 없고, 마법도 쓸 수 없어요. 열심히 해온 모든 게 물거품이 되었어요.

재밌는 건 내 죽음은 하나도 고통스럽지 않았다는 거예요. 모두가 혼란스러워하고 고통 속에 죽어 가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어요. 잠들었는데 일어나보니 죽어있었죠. 초록 불빛조차 보지 못했어요. 어떻게 죽었는지 알았느냐고요? 옆에 내 몸이 있었는걸요.

그날 밤에 나는 내일을 불안해하며 잠들었지만 내가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내일 할 일을 생각하며 잠들었을 뿐이에요.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끔찍한 선택을 했어요. 평소처럼 잠에서 깨어났죠. 깨어난 것뿐인데, 그만 현세에 남아버린 거예요. 내가 선택했다는 사실조차도 나는 몰랐어요.

기억해요. 죽음 말이에요. 투명한 손과 괴로워하는 친구의 손을 잡아줄 수 없었던 무력감, 발이 닿지 않는 대지. 막을 수 없었던 비극. 그때의 내가 어떤 생각으로 움직였는지 난 모르겠어요. 나는 그때 내가 아니었어요. 평소의 나라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있을 수 없었겠죠. 태연한 얼굴로 돌아다니면서 친구들을 독려했던 기억이 나요. 대체 난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기억나는 건 선명한 죽음의 감각, 그것 하나밖에 없어요.

아마도 나는 그때 이미 미쳐버린 거예요. 그곳을 견딜 수 없어서 있는 힘껏 달아났어요. 그때 내게 누군가 물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강할 수 있느냐고요. 나는 아마 이렇게 대답했을 거예요. 슬픔에 다리를 붙들리느니 달리겠다고. 당시의 내가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대답이었겠죠. 거짓말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네요.

무서웠어요. 너무 무서워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어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친구들이 죽었다는 사실도, 누군가 곧 다치거나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견딜 수가 없었어요. 미쳤던 거예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꿈은 끝이 났어요. 소중하게 생각하던 사람이 광소를 터뜨리며 사라졌지요. 나에게 강하다고 말했던 사람이 내가 너흴 죽였노라고 말하고 사라졌어요. 영혼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어요.

우스워요. 죽는 건 그렇게 무서웠는데 날 죽인 사람은 전혀 밉지가 않아요. 너무 좋아했던 걸까요? 하지만 그렇게 아끼지 않는 사람이 말했어도 화는 나지 않았어요. 그저 그 사람을 잃어버린 게 너무 슬퍼서, 죽을 것 같았어요. 이미 죽었는데도 죽을 것 같았어요.

루시엔 콥, 첸 린, 프레데릭 모런. 세 이름을 잊을 수가 없네요. 이 편지를 보고 그들을 찾아가진 말아요. 이미 다른 사람이니까. 우리가 악몽을 꾸게 된 원흉일수는 있지만 적어도 그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요.

괜찮으면 내 이야기를 전해줄래요? 셋 다 무척 좋아했노라고.

루시와 이름을 나눴을 때, 나는 의지해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아빠에게도 의지하지 못하는데 말이에요. 서운하게 생각지는 말아요. 사춘기에는 또래에게 의지한다고 하잖아요. 어쨌든 그는 유령으로 돌아왔고, 나를 비웃었지요. 비웃어도 상관없었어요. 내 이름을 불러주기만 했다면 용서했을 거예요. 아마도 루시의 앞에서라면 울 수 있었을지 몰라요. 그랬으면 지금 같은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알 수 없는 일이죠. 나는 바로 그를 잘라내 버렸어요. 쳐다보지도 부르지도 않았어요. 감당할 수 없었거든요.

첸은 가면을 쓴 배우예요. 이야기책에 나오는 것 같죠? 실제로도 그런 말투와 몸짓을 가졌어요. 나도 모르게 상상해버렸죠. 제대로 된 무대에 선다면 어떨까. 분명 멋있을 거야, 하고요. 그래서 그만 끔찍한 짓을 저질렀어요. 그가 처형장에 섰을 때, 처형장이라는 건 범인을 잡기 위해 투표하던 거예요. 호그와트가 시켰거든요. 배신자를 처단하라고. 그래서 모두가 투표를 했어요. 누가 범인인지. 그날은 첸이 선 날이었지요. 나는 놀랍게도 어서 처형장에 오르라고 등을 떠밀었어요. 단두대에 목을 올리고 대사를 읊어보라고 했지요. 제정신이었을까요? 아니었을 거예요. 그는 그렇게 죽었어요.

나는 대체 그 사람들에게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요. 나도 친구들도 죽었는데. 왜 그들을 옹호한 걸까요. 아니, 그게 옹호였나? 모르겠어요. 좀 더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당신이 궁금했는데 왜 죽어야 했을까요.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혼란이 커져가요. 침착하게 나를 다독이는 나와 죽음에 지배당한 내가 있어요. 점차 죽어버린 내가 커져서 이성을 가진 나는 자리를 잃고 쫓겨나요. 초조하고 불안해서 내가 무얼 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네요. 여기가 후플푸프 기숙사던가요? 아빠가 없으니 그런 거겠죠.

밤이 무서워요. 잠드는 순간 나는 죽어있고 한기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것과는 다른 기이한 감각이 전신을 덮어요. 아빠는 죽어봤어요? 그건 정말 참을 수 없는 느낌이에요. 깨어나면 내겐 살이 있고 온기가 있는데 그게 또 소름끼치게 무서운 거예요. 악몽 속에서 보았던 장면이 눈앞을 가득 메워요.

자지 않으면 어떻게든 견딜 수 있는데 대신 쓰러지면 견딘 시간만큼 발작이 심해지나 봐요. 그런 날이면 돌봐주는 치료사가 유독 지쳐버리거든요. 미안할 따름이에요. 순서가 엉망이긴 하지만 기억도 있어요. 죽으려고 온갖 수를 다 쓰고 치료사 목을 조른 적도 있죠. 정말로 죽이려고 했어요. 이 손으로 사람을 죽이려고 했어요.

아빠, 내가 없어져도 잘 버텨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떠나겠어요. 다시 돌아오고 싶진 않아요. 그런 끔찍한 감각은 한번으로 족해요.

모런 선배에 대해서 안 썼죠? 지금은 행복해 보였어요. 그는 다정하고 어른스러워요. 나는 단 한번, 그 앞에서 울었고 결코 무너지지 않겠다고 약속했죠. 선배는 내 대답에 만족했을까요. 모든 일을 꾸민 사람이 선배였는데 말이에요. 왜 나를 죽였을까요. 왜 모든 일을 시작했을까요.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는 달아나버렸어요. 죽음 속의 죽음으로 떠나버렸어요. 차마 지금의 선배에겐 물을 수 없었네요. 그렇게 밀어붙일 거였으면 마지막까지 당당하지 왜 떠나버린 걸까요. 나는 선배가 행복하기를 바랐는데 선배는 살아있는 게 고통이었나 봐요.

오늘은 저녁 식사 시간이 되기 전에 잠들 것 같아요. 벌써 삼일 째 뜬 눈으로 버티고 있거든요. 치료사들 몰래 자지 않고 버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아빠가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불길한 예감이 들거든요.

잘 자요, 아빠. 사랑해요.

1974, 8. 4.

아빠를 사랑하는 에이미로부터

한나는 편지를 내려놓았다. 홈즈가 한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졸린 것처럼 내리뜬 눈이 정확히 한나의 눈을 마주보고 있어서 심장이 선뜩해졌다.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었군요. 마법에 유령. 미친 게 분명하네요.”

한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홈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웅해드릴게요.”

한나는 늘어진 상을 뒤로 하고 일단 소년을 따라 나섰다. 밖으로 통하는 문에 이르기까지 홈즈는 말이 없었다.

당신입니까?”

뭐가 말인가요?”

아버지를 만난 것 말입니다.”

, 저예요. 우연히도 그때나 지금이나 저 혼자네요.”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도 했습니까?”

글쎄요. 신부님께는 했었나? 안했던 것 같아요. 어딘가 이상한 이야기라서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그거 다행이군요.”

홈즈는 품을 뒤졌다. 한나는 그가 사례라도 하려나 생각하고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편지를 전해드렸을 뿐인데요.”

그래요. 그게 문제지요.”

?”

소년의 손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나무 막대가 들려 있었다. 새를 훈련시킬 때 사용한다는 막대기랑 비슷해보였다. 한나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눈만 깜빡였다.

조금 주무십시오.”

막대 끝이 자신을 가리켰을 때, 한나는 수사가 말했고, 편지에 쓰여 있던 지팡이라는 문구를 기억해냈다. 설마?

오블리비아테. 스투페파이.”

홈즈가 뾰족한 모자를 바로하고 지팡이를 도로 품에 넣는 모습이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어렴풋이 보였다. 그가 홱 돌아서자 남빛 망토가 근사하게 퍼졌다. 한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 사람도 수사는 아니었을지도 몰라.

해는 어느 샌가 지고,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열린 예배당 문 앞에 쓰러진 한나에게 근처에 사는 아주머니가 달려왔다.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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