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에 해당되는 글 166건

  1. 2009.06.15 Secret Boys Love :: [이 사야] 08. 마음에 내리는 비

 비가 오고 있었다. 마냥 창밖을 바라보았다. 촉촉한 공기가 기분 좋았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넋놓고 있는 것을 보다 못했는지 누군가 다가왔다. 발소리는 들었지만 굳이 돌아볼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비오는 창밖 풍경 쪽이 훨씬 더 신경쓰였다.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아오는 팔에 그제서야 그가 누군지를 알았다. 이렇게 접근하는 사람은 오로지 한사람 뿐이었다.

 "변태씨, 손 풀지?"
 "에이, 튕기긴."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았다. 굳이 볼 필요도 없이 언제나 그랬으니까. 저렇게 웃음기 섞인 목소리라면 정말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목이 넓은 셔츠 사이로 입을 맞추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전 같으면 바로 옷깃 사이로 손이 파고들어왔을 텐데 그는 그냥 조용히 사야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움직임이 없었다. 요새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붙는 일도 드물어서 사실은 그의 체온에 조금 안도감을 느낀다고 하면 뭐라고 대답할까. 이상한 욕심이었다. 싫지만 싫지 않았다.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반발하는 사람이 많으니 슬슬 없애야하는 습관인데 쉽지가 않았다.
 먹구름에 하늘이 까맸다. 창문에 한가득 빗방울들이 선을 그었다. 만져보고 싶어 창문에 손을 대었다. 당연히 물방울은 만질 수 없었다. 서늘한 냉기만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유리 아래로 떨어져내리는 저 빗방울을 받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창문을 열면 빗방울이 들이닥칠테지. 이것 역시 모순이었다. 이렇게나 가까운데 빗줄기에 온 몸을 내놓지 않으면 창에 흐르는 빗물을 만질 수 없었다. 하지만 밖에 나가면 이내 손끝의 물기는 감각할 수 없을 만큼 흠뻑 젖게 될 것이었다. 손 끝에 흐르는 물방울만 느낄 수 없다는 그 작은 사실이 사야에게는 거대한 벽으로 다가왔다. 이걸 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깨가 서늘해졌다. 그곳을 통해 이어져 있던 체온이 떨어져 나갔다. 그저 따뜻하던 것이 없어진 것 뿐이었지만 커다란 한기로 느껴졌다. 공허한 마음이 싸늘해졌다.

 "또 손가락."

 어느샌가 또 아득아득 씹고 있는 손가락을 흑류의 입에서 빼내었다. 딩―, 작게 소리가 울렸다. 얇은 벽을 통해 심장 깊은 곳까지 바람이 들었다. 추운 것이 아니었다. 허전했다. 그새 또 입에 넣은 다른 손도 뺏어 양 손에 그의 두 손목을 하나씩 쥐었다.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다.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부탁이니까, 하지 말라니까."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세상이 서늘하게 물기를 머금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흑류의 눈을 마주보았다. 불만스러운 표정인 그의 이마를 꽁 들이받았다. 가슴은 여전히 메말라 있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그저 텅 비어있었다. 이따금 휑하니 바람이 불었다. 눈 앞의 이 사람도 그런 가슴을 가지고 있을까? 그래서 그토록 애정을 갈구하는 것인가? 알 수 없었다. 그저 머릿속을 두드리는 것은 그가 사야에게서 위안을 얻는 것은 길지 않을 거라는 생각 뿐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사야 역시 마찬가지. 연인인 양 행동하는 긴 원나잇. 그런 느낌이었다. 그저 서로의 체온에서 잠시간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면 좋으리라.
 입 속으로 뭔가 꿍얼거리는 그를 두고 고개만 돌려 다시 창 쪽을 바라보았다. 슬슬 빗줄기가 약해지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더 쏟아붓게 하고 싶었다. 장마철에 나다니는 것은 싫지만 시원스러운 빗줄기는 좋았다. 비야 내려라. 주룩주룩 내려라. 세상이 온통 물에 잠겨버릴 만큼 주룩주룩 내려라. 저 비가 사야 자신의 마음도 축여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리고 이 사람의 마음도. 문득 다시 시선을 돌려 흑류를 바라보았다. 그는 생각에 잠긴 사야를 보지 않고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그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하도 자주 당하니 그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얌전했다.
 그의 이야기를 끌어낸 것은 의도적이었다. 사야는 마음을 기댈 곳을 찾고 있었다. 흑류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애정을 줄 사람이 누구라도 좋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야가 마음을 기대고자 하는 사람 역시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때마침 있었던 것이 흑류였을 뿐이었다. 마음이 외로운 사람은 조금만 애정을 보이면 속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이용했을 뿐이었다. 지금 그는 사야가 자신의 마음을 다 내줄 연인이라도 되는 듯 행동했지만 사야가 보기에 이건 아주 일시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장단을 맞추는 것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사야는 혼자 서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그의 마음이 머무는 시간이 길기를 바랐다. 하지만 연인은 아니었다. 결코 진짜 연인은 될 수 없었다. 둘 다 나눠줄 줄이라고는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비를 모두 마시면 마음이 채워질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마음에 비가 내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메마른 가슴에서 싹이 틀 수 있도록.

Posted by fa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