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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7.04.12 텟님 커미션 (4)
  3. 2017.04.03 커미션 불발. 아케미 마리씨 이야기

에리카 타입 드림 커미션입니다





 미쿠니 히사오미와 아케미 마리는 소리 없는 술렁임 속에 서있었다. 학생들이 눈치껏 두 사람을 구경하느라 자리를 뜨지 않아 캠퍼스에 점점 사람이 몰리고 있었다. 시선에 익숙한 두 사람이 의식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이걸 당신이 주웠다고요?”

 히사오미가 물었다. 오늘도 그는 반듯하게 각이 잡힌 정장 바지와 셔츠에 계절에 어울리는 산뜻한 색으로 맞춰 입은 니트 조끼가 잘 어울리는 근사한 모습이었다. 입은 옷은 물론이고 차고 있는 시계와 구두까지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만한 고급 제품이었으니 그가 근사해 보이지 않는다면 장인들의 자존심이 울고 갈 판이었다.

 “네.”

 그에 반해 히사오미에게 응대하고 있는 마리 쪽은 별로 보기 좋은 차림은 아니었다. 때는 끼지 않았지만 다리기는 한 건지 구깃거리는 셔츠가 눈에 띄었다. 긴 머리카락은 겨우 빗기만 했는지 정전기에 중간중간 일어나 있다. 매고 있는 조그만 핸드백은 시장에서 파는 보세 상품이 분명했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음에도 별로 격차가 나 보이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마리의 미모 덕분이었다. 창백한 뺨에 까만 생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마리는 꾀죄죄한 차림에도 불구하고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을만한 미인이었다. 조그만 얼굴에 오밀조밀 자리 잡은 이목구비, 히사오미의 가슴께에나 오는 아담한 키, 가느다란 팔과 허리까지 마치 잘 만든 일본 인형 같다. 한 가지 흠이라면 여자다운 풍만함이 모자란다는 것인데, 마리 정도의 미모라면 그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 남자들이 곳곳에 널렸으리라.

 히사오미는 마리로부터 지갑을 받아 품에 넣었다. 새빨갛게 물들었던 마리의 뺨이 거의 원래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확인은 안하시나요?”

 마리가 물었다. 히사오미는 아차 하며 지갑을 도로 꺼냈다. 지폐와 동전, 신분증 따위를 확인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아무 이상 없네요. 확인까지 시켜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마리는 히사오미가 지갑을 넣는 것까지 확인하고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

 “잠깐만요.”

 마리는 돌아서다 말고 히사오미를 보았다.

 “그렇게 가시면 곤란합니다. 사례는 하게 해주셔야죠. 지금 바쁘신가요?”

 마리는 잠시 고민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히사오미는 웃는 낯이었다.

 “아뇨. 바쁘지는 않습니다.”

 “그럼 점심을 대접하고 싶은데, 함께 가시겠어요?”

 히사오미가 상냥하게 말했다. 마리는 히사오미 뒤에 있는 친구들을 눈짓했다.

 “괜찮습니다. 일행도 계신데요.”

 “친구들과는 매일 함께 식사하는 사이입니다. 어차피 지갑을 찾아주시지 않았으면 식사도 못 할 뻔했는걸요.”

 “낯선 사람과 함께 식사하는 건 불편해서요.”

 마리는 곤란 해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히사오미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럼 친구들을 무르겠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대접하는 거로 하지요. 그럼 괜찮으십니까?”

 “그것도 좀…….”

 그 순간 마리의 얼굴이 다시 새빨갛게 물들었다. 히사오미도 눈을 크게 떴다. 꼬르륵. 작은 소리가 마리의 배에서 울린 탓이다. 다행히 주변에는 들리지 않을만한 작은 소리였다. 마리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뵙도록 하지요. 안녕히 가세요.”

 히사오미가 얼떨떨해 있는 사이 마리는 자리를 벗어났다. 시선이 마리를 따라왔지만, 사람들이 흩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마리는 제 이름을 크게 부르는 소리에 멈춰섰다. 히사오미였다.

 “아케미 씨!”

 “무슨 일이신가요.”

 히사오미는 부드럽게 웃었다. 타고난 얼굴은 아니지만, 제법 준수하다고 여학생들 사이에서 제법 말이 많은 그 미소였다.

 “함께 식사하십시다. 배 많이 고프신 것 같은데 저 때문에 지체됐으니까요. 지갑도 찾아주셨는데 그냥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분들은요?”

 “먼저 보냈지요. 미인과 함께 식사한다고 아주 부러워하던데요.”

 히사오미가 하하 소리내 웃었다. 마리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한 번만 신세 질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깍듯하게 안 하셔도 돼요. 이쪽으로 가시죠. 맛있는 집을 압니다.”

 히사오미가 마리를 이끌었다. 그 가벼운 만남이 두 번, 세 번 이어져 결국은 무언가를 바꿔놓을 것이라고는 두 사람 모두 상상하지 못한 늦은 여름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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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커미션에서 이어집니다






 “웃어봐요.”

 야스하가 명령했다. 렌게는 눈만 깜빡였다.

 “어서.”

 렌게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이 사람 기분이 상했구나. 렌게는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이렇게 근사한 슈트를 입은 사람이 렌게의 방에서 자신을 해칠 리 없다고 이성이 말하고 있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잘했어요.”

 야스하는 살갑게 웃는 얼굴 그대로 렌게에게 다가와 상체를 기울여 얼굴을 가까이했다. 렌게는 핀에 꽂힌 개구리처럼 얼어붙었다. 미소를 유지하는 것도 버거워 필사적이 되었다.

 “이렇게 예쁜데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줘야죠. 세상에는 예쁜 걸 보고 숭상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주 많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가 알아서 준비할 테니까. 요시노양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쉿.”

 렌게는 붉은 입술이 속삭이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꺼낼 수 있는 반론조차 없었지만, 할 말이 있었더라도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야스하는 아름답고 절대적이었다. 렌게는 야스하의 시선에 포박당한 채 방향키를 내어주고 말았다.

 “아침 아홉시에 기획사로 찾아오세요. 오디션 합격자라고 하면 안내해줄 겁니다.”

 “네.”

 야스하는 눈을 가늘게 뜨곤 귓속말이라도 하듯 렌게의 뺨 근처로 입술을 가져왔다. 뜨듯한 바람이 느껴져 렌게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코웃음 소리가 났다. 야스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스쳐 갔다. 렌게는 돌아볼 수조차 없었다.

 “나올 거죠?”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 렌게는 허공에서 흔들리는 시선을 붙들며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았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내일은 학교에 가야 하는데요.”

 희미하게 들린 건 분명 혀를 차는 소리였다. 렌게는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오디션에 합격했다고 하면 결석으로 처리되지는 않겠죠. 렌게양은 모범생이니까요.”

 허락한 적도 없는데 이름을 부른다. 렌게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야스하와 등지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담임 선생님께도 회사에서 연락해야 하는 건 아니겠죠?”

 ‘설마,’ 하는 빈정거림이 들리는 것 같아 솜털이 쭈뼛 섰다.

 “아니에요. 그럼 내일, 내일 뵈어요.”

 “고작 연습생 수업에 사장이 일일이 참관할 필요는 없겠죠. 푹 주무세요. 내일은 고단한 하루가 될 테니.”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다정하지만 비참한 말을 남기고 야스하는 방을 나갔다. 부모님 쪽은 이야기가 쉽게 풀리지 않는지 점점 언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렌게처럼 호락호락할 리 없는 부모님이었다.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부부는 대개의 고학력자가 그렇듯이 학구열이 높은 것은 물론 보수적이고 깐깐하기까지 한 사람들이었다.

 렌게는 최대한 바깥소리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쓰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잠잠해지질 않았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마음을 가라앉혀보려는 렌게를 방해했다.

 “렌게양.”

 문이 열리더니 야스하가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자연스럽게 웃어 보이는 눈매가 예뻤다. 렌게가 얼이 빠져 있으니 야스하가 손을 잡아끌었다.

 “해줘야 할 얘기가 있어요. 당신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렌게는 부모님과 키쿠치 앞에 세워졌다. 겁먹은 렌게가 야스하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물어보세요. 렌게양이 제게 말했으니까요.”

 “저게 정말이니?”

 아버지가 역정을 냈다. 렌게는 당황했다.

 “뭘요?”

 “저 사람이 네가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했다는구나.”

 어머니도 한마디 거들었다. 렌게는 놀라서 야스하를 쳐다봤다.

 “꼭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했잖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야스하는 여전히 친절하게 웃고 있었다. 어깨를 붙든 손에 힘이 느껴지지 않았더라면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항변할 뻔했다. 렌게는 부모님을 보았다가 엄한 눈초리에 기가 꺾였다.

 “정말이에요. 저 아이돌이 되고 싶어요.”

 야스하가 부드럽게 어깨를 토닥였다. 어머니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아버지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

 “학업이 중요하다는 두 분 말씀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젠 아시겠지요. 따님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언 지를요. 렌게양은 워낙 모범생이고, 두 분의 의견을 존중하니까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몰래 오디션을 본 거죠. 따님의 꿈을 기어이 막으셔야만 행복하시겠습니까. 렌게양에게도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주셔야지요.”

 아버지는 긴 침음성을 뱉었다. 끝내 이긴 것은 야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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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랍이라 오타 검수 안함.






 수업은 기어코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고서야 끝이 났다. 학생들이 앓는 소리를 하며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텅 빈 강의실에 혼자 남은 마리는 멍하니 앉아 다음 스케줄을 생각했다. 수업은 이걸로 끝이지만 하루 일정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지금이 오후 한시 반이니까 세시까지 식사를 하고 이동해야한다. 사무실은 학교에서 멀지 않았지만, 수업이 늦게 끝나는 바람에 시간이 빠듯해졌다. 당장 달려나가도 식당에서 제대로 식사를 할 수 있을까? 샌드위치나 김밥을 사서 당장 버스를 타면 겨우 숨 돌릴 틈이 남겠지.

 마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저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고 어서 일어나라고 외치는 마음 속 목소리와 기운이 없으니 조금만 더 여유를 가지자고 칭얼거리는 몸의 어리광이 맹렬하게 맞부딪혔다. 아무리 현실이 고달프더라도 타협하느니 죽겠다고 다짐한 마리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타고난 지병으로 오랜 투병 세월을 보낸 마리가 스무해를 살아오며 체득한 것은 그뿐이었다. 그 어떤 위대한 뜻도 신체의 저항을 이겨낼 수는 없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짧은 경험을 통해 체득한 것이 세상의 진실은 아니다. 마리는 자신의 꿈이 그렇게 쉽게 좌절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공부를 통해 배웠다. 비록 마리가 지식을 얻은 경로 역시 마리가 타파해야할 부조리일지라도 말이다.

 하아.

 인간이라는 소음 발생기가 싹 치워진 강의실에서는 희미한 한숨 소리도 존재감이 남는다. 마리는 제 한숨을 신호탄 삼아 몸을 일으켰다. 쓰레기 같은 음식으로 연명하는 하루하루는 고단하기 짝이 없었다. 우스운 건 몸이 약한 마리가 제 몸을 망치지 않는 범위에서 벌 수 있는 금액이란 그런 음식으로 하루를 떼우기에도 모자라다는 점이다.

 몸 상태에 주의하며 느릿느릿 일어나는 마리의 시야에 이질적인 것이 잡혔다. 백색조 석조 바닥에 마치 눈에 띄라고 일부러 고른 것처럼 검은 물건이 놓여 있었다. 마리가 평소 남이 두고 간 물건까지 꼬박꼬박 챙겨줄 정도로 인정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모른 척 넘어가기에는 다소 중요한 것이었다.

 ‘그 사람 거네.’

 마리는 곱게 무두질된 진짜 가죽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놀랍게도 마리가 주인을 아는 물건이었다. 전공이 다르고 수업도 거의 겹치지 않지만, 기억하고 있는 얼굴이 지갑 속에서 튀어나왔다. 꽤 근사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오히려 기분 나빴던 미쿠니 히사오미였다.

 미쿠니의 희고 깨끗한 피부, 매끈한 얼굴과 곧은 자세, 남성미가 느껴지는 세련된 향수 냄새까지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만드는 요소를 발견할 때마다 마리는 불쾌해졌다. 미쿠니는 본가에서 매순간 느껴야만 했던, 느낄 수 밖에 없었던 자본과 착취의 흔적을 덕지덕지 두르고 있었다. 자기혐오와 불합리한 세상에 대한 분노로 제 몸을 깎아먹는 일임을 알면서도 안락을 버리고 자유를 택한 마리에게 미쿠니는 존재만으로 물리쳐야할 악이나 다름없었다.

 증오는 때로 사랑보다 강렬하다. 항상 사람에 둘러싸인 미쿠니를 먼 발치에서 스치면서 마리는 학교에서 만난 누구보다도 미쿠니를 잘 알게 되었다. 미쿠니가가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지, 미쿠니의 아버지가 어떤 사업을 하는지, 그 집안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강한 입김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보지 않으려고 해도 눈에 뜨였고, 듣지 않으려고 해도 소문이 들렸다. 그리고 이 지갑은 마리가 갓 입학했을 무렵부터 그가 쓰던 것이었다.

 마리는 무심히 지갑을 주워 가방에 넣었다. 다른 마음은 없었다. 미쿠니에게 돌려줘야하니까 챙긴 것뿐이다. 바로 지갑을 두고 갔다는 걸 깨닫고 돌아올 시간은 이미 지났고, 지폐로 빵빵한 지갑을 사람 없는 강의실에 두고 가기엔 불안했다. 마리만해도 빽빽한 종이뭉치를 보며 이번 주까지 내야하는 공과금을 떠올렸을 정도니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마리는 인류의 희망찬 미래를 믿었지만, 인간 개인의 성실성에 기대 일을 그르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먹을 걸 사서 출근하는 길에 경찰서에 지갑을 맡기기로 하고 강의실을 나설 때까지는. 마리는 가난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싸구려 음식조차 없어서 급여일을 앞두고 물로만 연명할 때도, 전기가 끊겨 책을 읽기 위해 집 근처 마트 불빛에 의지해야했을 때도, 심지어 고된 생활로 거의 잊고 있던 지병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도 그랬다. 어떤 생활고도 마리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고, 마리는 그게 자신의 가장 큰 재산이라는 걸 알았다.

 “아케미 씨, 잠깐만요.”

 “네?”

 학교를 빠져나가는 마리를 조교가 붙들었다. 마리는 시간에 맞추려면 점심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가는 길은 삼십분 정도였지만 중간에 버스를 갈아타야하는데다 교통이 불안해 버스가 제때 온다고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환승 정류장 근처에 음식을 파는 곳이 있으면 좋겠지만, 도로 한복판이었다.

 “행정실에서 전화가 왔어요. 내일까지 꼭 들르라던데요.”

 조교는 마리를 벽으로 끌어당기더니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마리는 파리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어제도 왔었는데 아케미 씨 항상 금방 가버리니까 전해줄 수가 없었어요.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라고 내일까지 꼭 오래요.”

 그러고보니 바쁘다는 핑계로 며칠째 우편함을 확인하지 못했다. 들어찬 종이뭉치를 대충 서랍장에 던져놓고 잊어버렸는데 거기 학교에서 보낸 우편물이 섞여있었던 모양이다. 마리는 아찔한 감각을 견뎌냈다.

 “괜찮아요?”

 조교가 걱정스레 물었다. 마리는 정신을 수습했다.

 “괜찮아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딱딱하게 짧은 대답만을 남기고 마리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등뒤로 조교가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마리는 점심을 포기하고 회사로 달려갔다. 버스가 제시간에 도착해서 지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규 출근시각보다 이르게 도착한 덕분에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마리는 지친 몸을 잠시 쉬게 해주기보다는 곧장 사장실로 달려가는 쪽을 택했다.

 “부탁드립니다.”

 다짜고짜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숙인 마리를 앞에 두고 사장은 곤란한 듯 한숨지었다.

 “갑자기 그런 부탁을 해도 곤란해.”

 어차피 이판사판이니 억지로라도 고집을 피워보는 수밖에 없다. 마리는 사장이 승낙하기 전에는 고개를 들지 않을 셈이었다.

 영세 출판사에서 급여를 가불하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임은 잘 알고 있었다. 마리가 일하는 출판사는 임금과 상품 양쪽 면에서 양심이 있는 회사였다. 좋은 상품을 제공하고 직원들이 보다 편안하게 일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노력하는 사장은 인간적으로 존경할만한 사람이었다. 좋은 우두머리 아래에 모인 사람들은 다들 뜻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마리는 여기서 긴 세월을 기약할만한 친구를 몇 만들었다.

 인물됨은 인적 자산을 끌어모으나 물적 재산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회사는 항상 자금 사정이 빠듯하고 살림에 여유가 없었다.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부탁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지만, 지금은 도리가 없었다. 마리는 염치불구하고 고개를 숙이며 마음 속으로 칼을 갈았다.




 




이건 삭제 분량





 마리가 일하는 사무실은 영세한 규모의 출판사였다. 번역일을 받아하는 동시에 사무보조를 겸하고 있었는데 비교적 일이 편하고 즐거운 대신 급여는 얼마 되지 않았다. 겨우 식비를 해결하고 나면 남은 게 없어서 옷도 사입을 수 없었지만, 마리는 그걸로 좋았다. 좋은 집과 옷을 탐냈다면 법적 성인이 되자마자 양친의 집을 뛰쳐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리가 원한 건 오로지 자치권과 악랄한 자본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부모인 아케미 부부는 부유한 사업가여서 마리는 모자람을 모르고 자랐다. 심장에 병을 타고난 탓에 어릴 때부터 병원을 집처럼 드나든 마리의 병수발을 들면서도 가족 모두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고 즐기고 싶은 것을 즐기지 못할 때가 없었다. 아케미가의 사업은 위기조차 없이 순조롭게 성장해 이제는 일본 굴지의 대기업이 되었으니 마리가 얌전히 집에 붙어있기만 했다면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 값싸게 부려질 일은 없었다.

 그러나 마리는 집을 뛰쳐나왔다. 모든 것이 보장된 삶이었다. 부모님의 심기를 크게 거스르지만 않아도 평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가난의 고달픔도 깎여나가는 신체도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할 몸이라면 정신만큼은 오염되지 않곘노라고 맹세했다. 돈으로 산 안락에서는 돼지 지린내가 났다.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자본이 어떻게 형성되어 누구에게 얼마나 분배되는지. 그 과정에서 몇 명이나 부당한 피해를 당하는지. 그게 가진 자에게 어느 정도의 이익으로 돌아오는지. 마치 내 일처럼 알고 있었다. 사장인 어머니는 호탕한 성격이라 그런 걸 자식들에게 숨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자세한 회사 일을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총명한 마리는 걸려오는 전화와 부모님간의 대화만으로도 많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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