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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 타입 자캐 커미션입니다

1편

2편

3편




 예상은 했지만, 조금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행동에 웃음이 나왔다. 기껏 이인분 아침 식사를 준비했는데 손도 대지 않고 가버리다니 매정한 녀석.

 「시간이 늦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유하가 남기고 간 쪽지였다. 아침 식사를 준비해놓고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게 깊이 잠들어버렸다. 아직 여덟시도 되지 않았는데 어디가 늦었다는 거야. 한 시간도 잠들어있지 않았는데 사라진 걸 보면 눈을 뜨자마자 부리나케 챙겨서 나간 듯했다. 불륜 현장도 아니고 이렇게 달아나는 게 더 수상해 보인다고는 생각도 못 했겠지.

 ‘요령이 없다니까.’

 쪽지를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오늘도 피할 수 없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만날 수 없지만, 사랑은 그리움으로 한층 깊이를 더해가겠지.

 정확히 사흘이 지난 후 점심, 유하에게서 전화가 왔다. 평소보다 조금 늦다. 바빴던지, 연락하기가 어려웠던 거겠지. 전화 한 통에 만감이 교차했다.

 「안녕하세요. 저 유하예요.」

 수화기를 들자마자 의미 없는 자기소개가 날아왔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가라앉은 게 아무래도 바빴던 모양이다.

 「오늘 저녁에 시간 되세요?」

 스케줄을 확인한다. 아슬아슬하게 저녁이 비었다. 선배가 저녁에 못 나온다고 했을 때는 야속하게만 느껴졌는데 이제 보니 천만다행이었다. 입가가 간지럽다.

 “마침 딱 저녁이 비네. 밥 사려고?”

 「네. 언제쯤 찾아뵈면 될까요?」

 유하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런 목소리마저 귀엽게 느껴지는 건 동생 연아에게 익숙해진 탓일지도 몰랐다. 그런 점은 참 많이 닮았다. 아마도 그게 원인이었다. 유하를 처음 만났을 때 느껴지던 묘한 친근감의 정체. 따져보면 생긴 것부터 재능, 취미, 가치관까지 하나도 닮은 게 없는데도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

 “어디서 볼래?”

 「제가 찾아갈게요.」

 “운전할 거야?”

 「네.」

 친동생이 연상되는 연하를 상대로 욕정 하는 건 금기된 사랑을 꿈꾸고 있었다는 증거일까. 이유야 어찌 되었든 동생이 아닌 다른 사람을 원하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일까. 거절당해 받은 상처를 이런 식으로 외면하고 싶은 걸지도 몰라.

 의미 없는 상념이 유하의 목소리와 함께 수신이 끊어진 휴대폰 근처를 맴돌았다. 이러지 않으려고 공부에 매달렸는데 사랑은 쉽게도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연우는 떨떠름하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한 곳에 전화해보고, 세 사람에게 이메일을 돌리면 일단 오늘 할 수 있는 건 끝난다.

 멍한 상태로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음이 흘러가는 동안 또 다른 상념, 후회가 밀려든다.

 지난겨울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삼십여 년간의 후회를 한꺼번에 해결하기라도 하려는 듯 사건이 몰아쳤다. 여린 동생들 앞에서는 내색하지 못할 무거운 죄책감이 어깨를 눌렀다. 그리고 그럴 때면 그 연약한 소년에게 기대고자 하는 자신이 괘씸해서 그게 또 견딜 수가 없다.

 온전히 자책의 물결에 휩쓸리기 전에 신호가 끊어졌다. 다이얼 화면으로 돌아온 휴대폰을 들고 이번에는 문서 어플을 켜서 이메일 초안을 작성한다. 세 사람이 아니라 네 사람에게 보내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하는 일은 비슷했다. 조그만 액정을 붙들고 문서를 작성하는 게 답답하긴 해도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점심에서 저녁이 되기까지 여섯시간 남짓. 하루가 너무 길었다. 시곗바늘이 어찌나 느리게 움직이는지 직접 돌려놓고 싶을 정도였다.

 이메일 네 통을 보내는 일은 순식간에 끝났다. 말을 고르고 고르느라 문서를 작성하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그나마도 며칠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내용이라 문장만 다듬으면 됐다. 한 시간 남짓 걸려 본문을 작성하고, 고스란히 옮겨 전송 버튼을 누르자 더는 할 게 없었다. 유하가 아무리 일찍 퇴근해도 앞으로 다섯시간 안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공부를 해야 했다. 유하와 약속을 잡아둔 상태로 공부하는 건 고문에 가까운 일이었다. 글자가 하나도 뇌리에 들어오지 않아서 몇 리터씩 물을 마시고, 그만큼 화장실에 드나들었다. 방금 읽은 문장이 기억나지 않아 다시 읽기를 반복하다 보니 책이 넘어가질 않았다. 챕터와 과목을 바꿔보고 바람도 쐐봤지만, 결국 유하에게 연락이 올 때까지 계획한 진도를 마치지 못했다.

 유하는 약속대로 차를 끌고 나타났다. 평범한 청바지에 반소매 차림이었다. 편한 차림인데도 주름 없이 빳빳하게 당겨진 티와 몸에 잘 맞는 바지가 깔끔한 인상을 준다. 낮이 길어져 저녁임에도 쨍쨍한 태양 아래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서 있는 모습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유하는 전속 운전기사마냥 문을 열어주었다. 심지어 앉으라고 열어준 좌석은 운전석 뒷자리. 이런 것도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일 것이다. 괜찮다고 옆에 앉겠다고 하자 뒤늦게 깨달았는지 서둘러 차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어차피 같이 타야 한다는 건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차를 타자마자 서둘러 출발한다. 창밖으로 익숙한 건물들이 멀어졌다. 말을 걸어도 되겠지만 고요한 게 마음에 들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 갈망이 채워진다. 보고 싶었다. 네가 보고 싶었다. 꾹꾹 눌러 담았던 그리움이 새봄을 맞은 눈처럼 녹는다. 조바심이라는 발자국에 검게 물들었던 마음이 조금씩 본래 색을 되찾아간다. 사랑은 상대방의 마음도 현재 상황도 개의치 않고 제멋대로였다.

 차가 멈춘 곳은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오가기로 유명한 번화가였다. 능숙하게 주차장을 찾아 핸들을 꺾는다. 유료 주차장이라는 간판이 높게 솟아있었다.

 “조금 걸어야 해요.”

 유하가 말했다.

 금요일 오후지만 시간이 일러서인지 자리가 넉넉했다. 유하가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덕에 저녁식사를 하기에는 어정쩡한 시간에 도착한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유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주차장을 빠져나와 내게 물었다.

 “바로 식사하긴 그러니 카페라도 들어갈까요?”

 오랜만에 느긋하게 마시는 샴페인이 끌리는 날이었지만, 기꺼이 유하를 따라간다. 저녁 식사도 할 수 없는 시간에 여는 바가 없을뿐더러 유하가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만날 때 자주 오는 거리였지만, 이곳도 많이 변했다. 고시 준비한다며 틀어박혀 있는 동안 공사하는 것조차 본 적 없는 대형 빌딩이 잔뜩 들어섰다. 특히 지하철역 위에 들어선 대형 영화관은 뜻밖의 장소였다. 묘한 기분이 들어 간판을 쳐다보고 있으니 유하가 흘끔 쳐다보았다.

 “영화 보실래요?”

 그동안 놓친 영화가 몇 편이더라. 영화를 특별히 즐기는 건 아니지만, 친구들과 대화하기에 이만큼 무난한 소재가 없는지라 기대작은 반드시 톡방에 올라왔다. 개중에는 간절히 보고 싶었던 것도 있는지라 가끔 기분을 바꾸고 싶은 날에는 핑계 삼아 보러 간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니야. 어디 들어가서 앉자.”

 이 분위기에서 유하랑 영화를 보러 갔다간 내용이 귀에나 들어올지 모르겠다. 유하도 예의상 물어봤을 뿐인지 별말 없이 영화관이 있는 건물을 지나쳤다.

 골목으로 파고든다. 계획되지 않은 도시가 대개 그렇듯이 이 거리도 작은 건물들 사이로 집과 가게가 엉켜 있다. 사람들은 거미줄처럼 엉킨 골목길 사이를 재주 좋게 누비며 놀이를 즐겼다. 미로 같은 길거리를 헤매며 새로운 풍경을 찾아내는 걸 즐기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유하는 앞서 걸으며 길을 안내했다. 거세게 흐르는 강물 같던 인파가 잔잔한 시냇물로 변한다. 멈춰선 유하가 두 블록 떨어진 건물 간판을 가리키며 예약해준 식당이라고 했다. 한식 코스 요리 ○○반상. 유하다운 메뉴 선정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조그만 카페로 들어갔다. 유하는 메뉴판 앞에서 생각에 잠겨있었다. 뒤에서 보니 새삼 자세가 곧다. 상의 실루엣으로 언뜻언뜻 비치는 척추가 곧게 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여긴 내가 살게.”

 “아뇨. 제가 부탁드린 거니까 제가 낼게요.”

 “밥 사는 사람이 차까지 내는 거 아니야.”

 유하는 더 말이 없었다. 먼저 앉으라는 뜻으로 유하의 어깨를 두드렸다. 유하는 못내 불퉁하게 우유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고 물러났다. 식전에 달콤한 간식을 먹는 게 의외였다. 그러고 보니 밖에서 뭘 먹은 적이 없었다. 유하에게는 갑작스러운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인제야 들었다.

 주문을 마치고 테이블에 앉은 유하에게 말을 걸었다.

 “유하야.”

 “저기.”

 동시에 말을 꺼내고 동시에 입을 닫는다.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재빨리 순서를 양보했다. 유하는 머뭇머뭇했다.

 “고맙습니다.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죠.”

 “침대 비워준 정도로 인사는.”

 “그런가요.”

 유하는 옅게 웃었다.

 “일은 어때?”

 “똑같죠. 오늘은 성야 일정이 있어서 데려다주느라 빨리 끝났어요.”

 “사무실엔 안 나갔고?”

 “쇼 프로 녹화가 있어서 이번 주엔 더 안 갈 것 같아요. 쫓아다니다 보면 퇴근이니까요.”

 “다행이네.”

 안심했다. 당분간 성추행범과는 만나지 않는다는 소리다. 손을 빨리 쓰면 추가 피해는 막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한 사람을 점 찍으면 집요하게 손을 대는 자였다. 유하가 일을 그만두거나 남에게 넘기지 않는 이상 아예 만나지 않는 게 가장 좋다.

 “할 말 있는 거 아니었어요?”

 유하가 물었다.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유하가 알아봐야 좋을 게 없었다. 도움받는 걸 끔찍이 싫어하는 유하였다. 홀로 긴 시간을 버텨온 사람은 다들 그렇게 되는 걸까. 소중한 얼굴이 연달아 떠올랐다.

 음식이 나와서 각자 자기가 시킨 걸 끌어당겼다. 유하는 아이스크림, 나는 아메리카노였다. 평범하게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을 뿐인데 그게 귀여워서 한참을 쳐다보았다. 유하가 뭐 묻었냐고 물어볼 때까지.

 “아니야. 네가 식전에 아이스크림 먹을 줄은 몰라서 신기했어.”

 “아.”

 유하는 망설이다가 들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았다.

 “먹어. 방해하려던 게 아니야.”

 “요즘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줄이려고 하는 중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반쯤 남은 아이스크림 위에 수저를 놓고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정말로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난처하게 됐다. 괜히 나도 미안해서 커피에서 손을 뗐다.

 잠깐 침묵이 돌았다. 각자 핸드폰을 꺼내서 시간을 확인한다. 새로운 메일이나 전화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것도 없었다. 유하는 뭔가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세하에게 보내는 저녁 잔소리일 거라고 지레짐작해본다. 저 형제가 어떤 관계를 쌓고 있는지는 대략 정보가 있다.

 각자 동생과 가족들, 뉴스에 대해서 대화하다 보니 삼십여 분은 금방이었다. 슬슬 저녁을 먹어도 무리가 없을 거라고 판단한 우리는 카페에서 일어나 식당으로 이동했다. 음식을 남기지 못하는 유하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결국 아이스크림을 끝까지 먹었다. 내 커피는 반 이상 남았다.

 아직 저녁도 아닌데 대기자가 있었다. 다행히 한 팀. 카페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없었던 줄이라 바로 올 걸 그랬나 하는 이야기를 했다. 유하도 놀란 얼굴이었다.

 “주말에는 온 적이 없어서 몰랐네요. 평일 오전에는 한 번도 대기줄을 본 적이 없어요.”

 시간에 맞춰 예약석은 비어있었다. 입구로 들어가니 대기하던 사람이 부럽다는 듯 쳐다본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 사이 대기 줄은 두 팀이나 불어났다. 바로 들어온 건 좋지만, 느긋하게 먹기는 힘들겠다.

 주문은 유하에게 맡겼다. 내 입맛도 가게도 잘 알고 있는 유하니까 알아서 잘 골라주겠지. 내가 고른 건 와인뿐이었다. 아까부터 줄곧 와인 향기가 코끝을 맴돌아서 모른 척 넘어갈 수가 없었다.

 “자주 오는 곳이야?”

 “몇 번 왔어요. 성야가 이 근처를 좋아해서요.”

 유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음식점에서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한국 노래가 나왔다. 인디 음악 같은 걸까. 제목은 알 수 없었지만, 식사하면서 분위기를 즐기기에 좋은 선곡이었다.

 “여러모로 감사드려요.”

 유하가 말했다.

 “세하 일도, 저한테 신경 써주신 것도 전부 다요.”

 “아까 얘기 끝난 거 아니었어?”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대꾸했다. 유하는 소리 없이 고개를 젓는다.

 “그동안에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신세 진 게 워낙 많아서 따로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세하의 무례를 용서해주신 것 정말 감사합니다.”

 유하는 식탁 위로 고개까지 숙여 인사했다. 너무 정중해서 당황스럽다.

 “유하야.”

 “형으로서 동생의 행동을 잘 단속했어야 했는데 고생하시게 해서 죄송해요. 요즘도 제멋대로라서 면목이 없습니다.”

 “유하야 잠깐만.”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식탁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하를 일으켰다. 때맞춰 나온 첫 번째 코스가 세팅되는 사이에 생각을 정리했다. 몰아붙이면 안 된다. 그렇게 되뇌었다.

 “요전에는 내가 성급했지. 부담스러웠으면 미안해.”

 음식만 쳐다보고 있던 유하가 날 바라본다.

 “나는 우리가 충분히 유대를 쌓았다고 생각했어. 널 불편하게 하려던 게 아니야. 나도 너희보다는 나이가 많지만, 평범한 사람이라서 실수를 했나 봐.”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아 무서웠다. 그때는 바로 굳어지는 게 보여서 상처받았는데 이번엔 조용해서 무섭다니. 자신의 옹졸함에 수치심마저 들었다.

 “못 들은 거로 해줄래. 지금까지처럼 지내자. 친구로, 친한 형 동생으로. 응?”

 유하의 곧은 시선이 나를 원망하는 듯했다. 그럴 거면 대체 왜 말을 해서 괴롭혔냐고. 그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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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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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 타입 자캐 커미션입니다

1편

2편

3편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나더라도 이전과 같은 관계는 되지 못할 것을 각오했다. 마음이 아파 끝까지 숨길 수가 없어서 뱉고만 고백이었다. 그 애가 동성 간의 연애감정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다. 다 거짓말이다. 자만하고 있었다. 설득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편견은 있어도 내 말만은 들어주리라고 차분히 대화할 여유가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착각이었다. 내 고백에 그 애는 안색이 변했다. 충격에서 차츰 혐오로 물들어가는 그 애의 얼굴을 보며 직감했다. 이 관계는 끝이 났구나, 하고. 내 오만이었다. 나는 도망가듯 떠나는 그 애를 붙잡을 수 없었다.

 벌써 한 달이 넘었다. 힘들었다. 취해보기도 하고, 미친 듯이 공부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아직도 잠깐 휴식을 취할 때면 경멸 어린 눈동자가 떠올랐다. 어째서 좀 더 참지 못했을까.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만나면 뜯어말릴 텐데, 시간의 벽을 넘을 수가 없다. 아무리 후회해도 과거는 변치 않는다. 소용이 없다.

 누워있으니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바로 잠들 줄 알고 누웠는데 역시 오늘은 너무 여유로웠다. 공부도 운동도 하지 않았으니 피곤할 리가 없었다. 바람이라도 쐬고 들어와야지. 그래도 잠이 안 오면 차라리 공부하는 게 낫겠다.

 여름밤은 후덥지근하다. 예전엔 이 정도로 덥지는 않았는데 요새는 밖에 나간다고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후줄근한 복장이지만, 밤이니까 괜찮다고 변명하며 편의점을 찾아 발을 틀었다. 한데 곧장 보이는 골목에 익숙한 그림자가 있다.

 “……유하야?”

 가로등 불 아래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 애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렇게 느리진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내게만 느리게 흐른 것 같다. 빨갛게 물든 눈가가 어두운 밤거리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그 애에게 달려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어깨를 붙들고 그 애를 돌려세웠다. 특별히 운동을 한 것도 아니라는데 딱딱하게 근육이 잡힌 탄탄한 어깨가 눈에 띄게 처져 있었다. 그 애는 당황한 얼굴로 내게서 눈을 피했다.

 “유하야. 사고라도 났어? 세하한테 무슨 일 있는 거야?”

 그 애는 갑자기 왈칵 눈물을 쏟아낸다.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양손으로 닦아내려고 해보지만, 손으로 막아질 리 없다. 힘들게 맞췄다는 정장을 망치지 않으려고 무던 애를 쓰는 게 보였다. 이러면 안 된다. 격렬한 거부의 눈길을, 분노를 잊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도 선명하게 봤는데, 그런데도 그냥 둘 수가 없다. 미안해.

 나는 속으로 사과하며 그 애를 끌어안았다. 품에 얼굴을 묻고 울 수 있도록. 자다가 막 나온 터라 옷을 아낄 필요는 없으니까 괜찮다. 고작 옷 때문에 마음 편히 울지도 못해서야 되겠는가. 그냥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그렇게 매정할 수는 없었다.

 그 애는 끝내 소리 내 울지 않았다. 소리를 삼킨 울음이 맞닿은 부분을 통해 떨림으로 전해졌다. 섣불리 울지 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 애는 내 품속에서도 외로워했다. 혼자 있는 것처럼 외롭게 흐느꼈다.

 “죄송해요.”

 겨우 울음을 그친 그 애가 처음으로 뱉은 말이었다. 목소리가 잠겨있었다. 오는 길부터 울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걸까.

 “들어가자.”

 그 애는 한 박자 늦게 괜찮다고 대답한다. 가로등 밑에 못 박힌 것처럼 우두커니 서서 땅만 보고 있었다.

 “이대로 널 보내면 나는 마음이 편하겠니. 들어가자. 세수라도 해야지. 차도 없잖아. 그대로 걸어갈 거야?”

 말없이 고개를 젓는다.

 “들어가자.”

 가볍게 잡아끌자 저항 없이 따라온다. 손을 내밀지 않으면 기댈 줄도 모르는 이 애를 어떻게 해야 좋을까. 여기까지 찾아와서 연락도 하지 않은 고집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세상이 이제 겨우 성인이 된 어린애를 여기까지 몰아넣었다. 사람의 악의는 어디까지 뻗어있는 걸까.

 그 애는 처음 찾아왔을 때처럼 문가에 서 있었다. 들어가도 되냐고 허락이라도 해줘야 하는 걸까. 돌이켜보면 비단 첫 방문에만 그런 건 아니었다. 그 애는 잠시 기다렸다가 실례한다고 인사를 하고서야 방에 발을 들였다. 오늘은 그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나눈 대화의 여파인지도 몰랐다.

 “씻고 있어. 갈아입을 옷 줄게.”

 그제야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서는 걸 보고 있으려니 속이 복잡하다. 나는 저 애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

 세수를 마치고 나온 그 애에게 잠옷으로 쓸만한 편한 옷을 건넸으나 받아들질 않는다.

 “저기.”

 “차도 다 끊겼어. 자고 가.”

 고민하는지 한동안 말이 없더니 이내 고맙다는 인사가 돌아왔다. 내내 고개를 숙인 상태라 눈 한 번 마주치기가 힘들다.

 “유하야.”

 “…….”

 “무슨 일인지 털어놔도 괜찮아. 네가 거절한 건 내 연심이지 우정이 아니잖아.”

 그 애는 말없이 옷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기다리니 옷을 갈아입은 그 애가 방에서 나왔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흐트러진 차림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늘 반듯한 모습만 보아온 터라 낯설고, 섹시하다. 쇄골까지 드러난 차림을 보게 될 걸 예상하고 준 건 아니었는데.

 헛기침으로 주의를 환기한다. 그 애가 불안하게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익숙한 눈빛이다. 연아가 자주 나를 저렇게 쳐다봤었다. 소중한 동생, 연아가.

 “얘기해줄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애는 망설였고 나는 기다렸다. 한 번도 자기가 힘든 이야기를 제대로 한 적이 없었기에 큰 기대는 없었다. 피한다면 보내줄 생각이었다.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했어요.”

 담담하게 시작된 이야기는 꽤 심각한 것이었다. 얼마 전부터 담당하는 연예인이 휴식기에 들어가 사무실 업무를 하게 되었는데, 반드시 환심을 사둬야 하는 무대 감독이 그 애를 희롱한다는 거였다. 회사에 말을 하면 사람을 바꿔줄 테지만, 복귀 무대에 신세를 져야 할 뿐더러 앞으로도 계속 마주칠 사람이라 무작정 피할 수가 없다는 거였다. 기가 막힌 건 이게 처음이 아니라는 거였다. 아무리 일이 중요해도 그런 식으로 따낸 자리는 옳지 않고 담당하는 가수라고 반가워하겠느냐는 말에 그 애는 반쯤 넘어온 것 같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우겼다. 이게 처음이 아니니까 견딜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내가 화를 내지 않은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나는 정말 화가 많이 났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 일이에요.”

 만고의 인내심을 발휘해 화를 내지도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추궁하지도 않고 있던 내 모습이 어떻게 보였는지 그 애는 자진해서 과거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중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몰랐던 건 이면의 이야기였다.

 미성년자가 일할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중학생이면 말할 것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가능한 곳은 패스트푸드점 정도인데 당시 거주지 근처에 마침 일할 수 있는 가게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 택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나이를 속이는 것. 신분증까지 확인한다는 걸 몰랐기 때문에 시도한 일이었다. 물론 들켰다. 나이 차가 나는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따로 도움을 받을 곳도 없었다. 유하는 마지막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인정에 매달렸다.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양육 가능한 피보호자가 있어서 생활 수급 대상자는 되지 못하지만, 정작 그 피보호자가 연락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힘겹게 털어놓았다. 어찌나 울었는지 그 이후로도 그때만큼 울어본 적이 없다고 그 애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주인은 걸리면 성공적으로 나이를 속였다고 하자며 그때까지 써주겠다고 했다. 그 애는 그걸 믿은 자기가 너무 순진했다고 고백한다. 세상 물정을 아는 사람이 보기엔 터무니없는 계약이었지만, 그때는 상황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사달은 거기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슬금슬금 엉덩이나 허벅지를 더듬는 정도였다. 당혹스럽고 불편했지만, 못 견딜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당장 쌀이 모자랐고, 가끔 건드리는 정도지 심하게 주무르는 것도 아니었다. 실수 같기도 했다. 실제로 주인은 고의가 아니라고 잡아떼었다고 한다. 그러던 게 점점 수위가 높아지더니 결국에는 직접적인 폭력으로 이어졌다. 그 애는 천천히 말했다. 한 호흡에 한 문장씩. 창고에서 재고를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닫히며 몸을 덮쳐온 그림자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현실에 짓눌려 반항할 수 없었던 그 애가 계속된 폭력에서 벗어난 건 이 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 애를 붙잡아놓기 위해서 편의점 사장은 남들보다 봉급을 높게 쳐줬다. 그래 봐야 편의점 월급이었지만, 선택할 수 있었던 다른 선택지보다는 확실히 금액이 높았다. 그래서 고등학생이 되고서도 벗어날 수 없었다. 피보호자에게 계속 연락이 되지 않아 동의서를 받을 수 없으니 일이 잘못될 것도 두려웠다. 그 애를 구한 건 동생 세하였다. 정확히 어떻게 들켰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쯤의 일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게 많다고. 어쨌든 상황을 동생에게 들켰고, 그가 한달음에 달려가 사장의 어금니를 뽑았다. 평소 워낙 성적이 좋고 평판도 좋았으니 망정이지, 그대로 소년원에 끌려갈 수도 있었다. 세하를 아끼던 은사님이 도와줬다고 한다.

 “그때 당했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버틸 만 합니다.”

 그게 진심이라는 게 가장 큰 문제라는 걸 이 애는 알까. 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탓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입을 열면 무슨 말을 하게 될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 애는 연우가 말이 없자 이야기가 끝났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얘기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먼저 잘게요.”

 그 애는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곧 난처한 듯 나를 보았다.

 “유하야.”

 “네.”

 “다른 사람으로 바꿔 달라고 하자.”

 “안 돼요. 이 일은 제가…….”

 “부탁할게. 그렇게 하자.”

 그 애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안타깝게도 어떻게 위로하고 다독여줄 여유가 없었다. 나는 그를 고소하게 만들 방법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보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충격이 심해 눈물을 보인 애를 더 몰아붙이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다른 계획을 세웠다. 어떻게든 잡아 가두면 그만이다. 그리고 성폭행범을 고소할 방법은 그 외에도 있었다. 성폭행은 재발률이 높은 범죄다.

 “침대에서 자. 내가 소파에서 잘 테니까.”

 “하지만…….”

 “손님이잖아. 내 말 들어.”

 그 애는 입을 앙다물었지만, 고집을 피우진 않았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침실로 들어간다. 확답은 받지 못했지만,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으려고 하면 먹히지 않으리란 걸 안다. 그 질긴 버티기를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나는 공부할 상황이 아니라는 걸 빠르게 받아들였다. 침실에 교재가 있기도 했고 머리가 복잡했다. 뭘 봐도 들어올 리 없었다. 캄캄한 천장을 올려다보며 몇 번이고 상상 속에서 얼굴도 모를 범죄자들을 찢어발겼다. 아직도 멀쩡하게 살아있겠지. 그때 그자도, 이번에 나타난 그자도.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자 현실적인 대책이 떠올랐다. 차근차근 계획을 세운다. 우선은 관련인 중 특별한 이유 없이 협업을 거부한 사람을 찾는다. 사유를 묻는다. 또다시 찾는다. 사유를 묻는다. 찾는다. 묻는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을 쓰는 것도 물론 생각해본다. 계획이 원하는 대로 다 풀리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불행히도 다양한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지 않은 계획은 대다수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만다. 아버지께 연락해서 기업 쪽 연줄을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리라. 모든 예술가는 후원이 필요한 법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천장에 눈을 굴리며 메모를 했는지 눈이 뻐근하게 시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몰랐다.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새벽 네시가 넘어있었다. 오늘은 한숨도 못 자려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저도 모르게 발길이 침실로 향했다. 이러면 안 된다고 양심이 경종을 울리는 것을 무시하고 침대 옆에 걸터앉는다. 그 애는 발소리를 들었는지 조금 뒤척였지만, 괜찮다고 속삭이자 도로 잠에 빠졌다. 잠귀가 밝다고 세하가 불평하는 걸 얼핏 들은 적이 있는데 사실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잠든 얼굴 윤곽을 잡아냈다. 한참을 옆에 앉아 들여다보았다. 짙은 눈썹과 속눈썹, 한국인 같지 않은 반듯한 콧날, 제법 단단한 턱선과 얇은 입술. 늘 찌푸리고 다니는 탓인지 자면서도 미간을 모으고 있는 게 우스웠다. 손을 대자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여 얼른 떼었다. 드러난 목에 시선이 간다.

 만지고 싶은 욕구를 눌러 참는다. 건드리면 깨어날 기색이 역력해서 일어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무게가 줄며 매트리스가 출렁이자 뺨이 움찔거린다. 그 모습이 귀여워 픽 웃음이 났다. 아침에 먹일만한 게 있었던가 모르겠다. 냉장고를 비워놓지는 않았는데 요즘 식사를 부실이 했더니 뭐가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났다. 상한 음식은 없는지 확인할 겸 오랜만에 먹을만한 요리를 해야겠다. 혼자 나와 살기 시작한 뒤로 누군가와 함께 먹는 아침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연아는 잘 지내고 있을까. 괜한 걱정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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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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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 타입 자캐 커미션입니다




 맹세해도 좋다. 오성급 호텔 프런트에서 이름을 말하는 건 일평생 가장 특별한 일일 것이다. 교통편을 찾기 위해 켠 지도 앱에서 오성급 호텔이라는 정보를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던가. 그때부터 이미 겁이 났다. 미사키 씨는 언제나 새로운 경험의 장을 소개해주는 사람이었지만, 이번 건 도가 지나쳤다. 오성급 호텔이라니.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걸까. 이런 곳은 한 끼 식사만 해도 어마어마한 액수가 적힌 영수증이 나온다고 했다. 무서워서 방 가격은 조사해볼 생각도 들지 않았다.

 호텔 직원의 안내를 받아 이동하면서도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가격은 알 수 없지만, 높은 천장이나 심미적인 면모를 충분히 고려해 배치된 실내장식만 봐도 일상적으로 접하던 장소와는 격이 다르단 느낌이 왔다.

 “이 방입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두리번거리느라 호텔 직원이 멈추는 것을 보지 못하고 부딪힐 뻔했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직원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왔던 길을 돌아갔다. 저런 것도 프로 정신일까. 알 수 없다.

 이제 이 문만 열면 미사키 씨가 있는 방이다. 여기 도착하는 길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갑자기 눈가가 시큰거렸다. 호텔 이름 하나만 적혀있던 문자, 상상도 해보지 못한 스케일의 건물, 로비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서 있는데 호텔 직원이 찾아와 말을 걸던 순간, 프런트 데스크에서 제 이름을 말해버린 부끄러움……. 작게 심호흡을 하고 똑똑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익숙한 목소리에 안심이 되는 동시에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언제 보아도 긴장되는, 좋아하는 건지 무서운 건지 알 수 없는 사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상상보다는 평범한 방이었다. 스위트룸이라는 말에 천장에 샹들리에가 달려있을 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미사키 씨의 방과 비슷했다. 일본 전통 가옥을 모던하게 표현한 느낌의 방이었다. 바닥에는 뜻밖에 제대로 된 다다미가 깔려있다.

 “이쪽이야.”

 룸에 딸린 미니 바에 앉은 미사키 씨는 방금 씻었는지 젖은 머리에 샤워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속옷을 걸치지 않아 자연스럽게 벌어진 가슴선이 샤워가운 사이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안녕하세요.”

 차마 계속 쳐다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넓은 창 너머로 도쿄의 야경이 아름답다. 검은 하늘 위로 수 놓인 도시의 은하수가 미사키 씨의 검은 머리카락처럼 눈부시게 빛난다.

 “이리 와.”

 부드럽고 단호한 명령이었다. 어떻게 그의 곁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 바닥의 무늬를 세며 미사키 씨가 내어준 옆 자리에 앉았다. 달콤한 와인향이 났다.

 “어디 보는 거야?”

 “네? 글쎄요.”

 테이블 재질이 참 고급이다. 미사키 씨 집에 있는 가구들과는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지만 모던한 생김 덕에 집에 있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날 봐야지.”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미사키 씨는 데이트 중에도 기분이 나쁘면 곧잘 심술을 부리곤 했다.

 “저 내일은 일이 있어요.”

 “알아.”

 역시 내일이 메이저 데뷔 일인 건 모르는 모양이다. 조금 김이 샜다. 모르고 있을 거라고 뻔히 짐작하고 있었는데 왜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지 몰랐다. 그렇겠지. 미사키 씨는 바쁘니까 렌게 하나가 데뷔하는 데에 신경 쓸 수는 없었다. 그런 건 사장인 미사키가 아니라 담당 프로듀서가 할 일이었다.

 “날 보라니까.”

 미사키 씨는 자기 말에 복종하지 않는 걸 아주 싫어한다. 짜증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심장이 쿵쾅거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대로 눈을 들어도 되는 걸까.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언제나 미사키 씨는 오성급 호텔 프런트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여자다.

 “실례합니다.”

 눈꺼풀이 절로 떨렸다. 희고 매끈한 다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흘러내린 검은 샤워가운과 그 사이로 드러난 흰 피부가 뇌리에 그대로 박히는 것 같다. 울고 싶어졌다.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 위에서 찰랑거리는 붉은 와인과 빙그레 미소 짓는 붉은 입술이 보였다. 미사키 씨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기특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 괜찮냐고 다시 눈을 돌려도 되냐고 묻고 싶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지만, 미사키 씨의 눈에는 마력이 있다. 영혼을 사로잡힌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힘. 젖은 머리카락과 하얗게 드러낸 피부가 너무도 자극적이라서 눈을 뜨고 있는 게 죄스럽다. 눈을 감을 수도 뜰 수도 없는 곤경 속에서 결국 눈물이 앞을 가렸다.

 “죄, 죄송해요.”

 “울지 마.”

 상냥하게 속삭이며 미사키 씨가 뺨에 입을 맞췄다. 달콤한 냄새. 벌써 꽤 많이 마신 모양이었다. 미사키 씨는 스치듯 나를 지나쳐갔다. 눈물을 닦느라 그가 무얼 하는지 몰랐다. 늘 그래왔듯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그가 돌아와 자리에 앉았을 때에서야 겨우 눈물이 멈춰서 앞을 볼 수 있었다. 눈물의 여파로 멍해 있는 내게 미사키 씨가 말한다.

 “입어봐.”

 뭘요? 하는 물음이 입술까지 차올랐다. 간신히 이성을 붙잡고 주변을 둘러보자, 붉은 옷감이 눈에 들어왔다. 저렇게 튀는 색인데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바보 같다. 여전히 드러나 있는 미사키 씨의 살결에 시선을 빼앗긴 탓이었다.

 “이게 뭔가요?”

 차마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아 우선 물었다. 예상대로 미사키 씨는 답이 없다. 그는 일에 관련된 것이 아니고서는 설명하는 일이 없었다.

 사락거리는 천이 펼쳐지지 않도록 양손으로 집었다. 매끄러운 감촉은 만지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다.

 “잠깐.”

 다음 병을 열어 새 와인을 음미하던 미사키 씨가 말했다.

 “그건 놔두고 먼저 씻어.”

 “네.”

 오늘은 자고 가라는 것일까? 데이트가 끝나면 그때그때 집에 돌려보내 줬기 때문에 미사키 씨의 집에 들렀을 때도 따로 씻어본 적은 없었다. 낯설다. 욕실 방향을 가르쳐준 미사키 씨는 마지막으로 한가지 지시를 덧붙였다.

 “샤워가 끝나면 알몸으로 여기로 돌아와.”

 “……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니, 이해하지 못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가 잘못 말했을 리는 없으니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뭐해. 어서 씻어.”

 미사키 씨는, 미사키 야스하는 두 번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결코 설명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몇 번이고 그를 거스르려 노력했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미사키 씨는 언제나 상냥하고 친절했는데 어째서일까. 나는 결국 제대로 되물어보지조차 못한 체, 뒤로 돌아섰다.

 샤워실은 룸 안의 다른 공간처럼 호화롭고 아름다웠다. 입고 있던 옷을 개워넣으면서도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쓸데없는 고민이다. 아무리 고민해도 결국 미사키 씨가 원하는 대로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알몸이라니.

 따뜻한 물에 몸을 맡기고 서있자니 문득 이곳이 호텔이라는 사실이 떠오른다. 설마? 그럴 리 없다. 아직도 미사키 씨는 중학생이고, 나는 이제 겨우 열여섯인데. 설마 그럴 리 없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왜 호텔로 불렀을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렇게 잡생각이 많으니 씻는 둥 마는 둥 할 수밖에 없었다. 비누거품이 다 쓸려내려가고 나서야 제대로 문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라 새로 몸을 씻어야 했다. 머리를 감고 몸을 씻어내다가 또 멈칫거렸다. 결국엔 욕실에서 나갈 순간이 두려워 조금이라도 더 오래 씻기 위해 다시 온몸을 씻어낸다.

 아무리 노력해도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어서 결국에는 욕실 문 앞에 서고 말았다. 옷에 손을 대었다 떼기만 서너 번. 결국 마지막 타협점을 붙잡았다. 몸을 가리면 안 된다고는 하지 않았으니 수건을 둘렀다. 호텔에서 준비한 수건은 크고 보드라워서 한 바퀴 둘러도 가슴부터 허벅지까지 넉넉하게 가려졌다.

 “미사키 씨.”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는 홀로 흥취를 즐겼는지 발갛게 뺨이 달아올랐다. 평소에 볼 수 없는 가볍게 흐트러진 모습이 색다르고 매력적이라 눈을 뗄 수 없다.

 미사키 씨는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건 전적으로 복장 탓이었다. 미사키 씨가 앉은 자리 앞에는 전면 유리창이 야경을 아름답게 담고 있었다. 걸음걸음이 무거워서 그의 손에 닿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아!”

 수건을 던져버리고 허리를 붙드는 미사키 씨의 손길에 온몸의 근육이 바짝 굳어버린다. 몸이 맞닿는 것과 동시에 입술이 합쳐지고 아아. 미사키 씨의 입에 남은 와인이 조금 흘러 넘어왔다. 향은 그렇게 달착지근했는데 생각보다 쓰다.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 하는 키스도 아닌데 알코올 때문인지 아찔했다.

 미사키 씨는 만족스러울 때까지 머릿속을 휘젓고 떨어졌다. 그의 뺨에 오른 흥취가 내게도 옮아있겠지. 눈을 뜨는 게 무서웠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추위를 호소했다.

 “눈 떠.”

 미사키 씨가 명령했다. 그가 명령하면 따를 수밖에 없다. 나는 눈을 뜨고 탁자에 얌전히 놓여있던 붉은 천이 하공에 펼쳐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미사키 씨는 붉은 미니 드레스를 손에 쥐고 내게 입 맞췄다.

 “입어봐.”

 “지금요?”

 “응.”

 속옷도 입지 않고 드레스를? 물을 순 없는 질문이 입안을 맴돌았다. 나는 그냥 조용히 그의 말에 순종했다. 미사키 씨가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브래지어도 걸치지 않았으니 태가 날 리 없다. 예쁠 리가 없는데 미사키 씨는 흡족해 보였다. 이거면 된 걸까. 어쨌든 그가 만족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면 벗을 수 있겠지.

 “저, 미사키 씨.”

 “음?”

 “이 옷은 뭔가요?”

 “선물이야.”

 미사키 씨는 아찔한 미소를 짓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독히도 잔혹한 그 미소는 꼭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였다.

 “메이저 데뷔 선물.”

 “알고 계셨어요?”

 “당연하지. 누가 잡은 날짠데.”

 이건 정말로 놀랐다. 미사키 씨가 내 데뷔 일을? 직접 정했다고? 말도 안 돼. 우습게도 거짓말일 것 같았다. 미사키 씨는 단 한 번도 내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왜. 놀랐어?”

 그는 상냥하게 웃으며 내 허리를 안아 침실로 이끌었다. 나는 어물어물 아니라고 답한다.

 “내가 직접 스카우트한 아이돌이야. 이 정도도 챙기지 않을 거라면 뭐하러 그런 짓을 했겠어.”

 안 그래? 하고 미사키 씨는 내 뺨에 입을 맞췄다. 화끈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랬다. 미사키 씨는 오디션 결과를 거부한 나를 집까지 찾아와 스카웃했다. 스카우터도 아니고 사장이 직접. 돌이켜보면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게 미사키 씨가 회사를 맡은 뒤에 처음으로 열린 오디션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오디션을 참관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설령 참가했다고 하더라도 사장이 직접 스카우트하기 위해 나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미사키 씨.”

 “쉿.”

 퍼부어지는 키스에 놀라서 붙잡아보려 했지만, 간단히 거부당했다. 조금씩 조금씩 상체가 기울어진다. 마침내 키스 공세가 끝난 것은 침대에 완전히 드러누운 뒤였다.

 “자, 잠깐만요.”

 “렌게.”

 귓가에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 나는 직감했다. 이건 피해갈 수 없겠구나.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의 뜻대로 될 것이다. 그렇게 하고 말리라. 나는 두 눈을 감았다. 모든 걸 미사키 씨의 손에 맡기면 파도도 잠잠해질 것이다. 어떻게든 될 것이다. 틀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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