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파생, 자작 스핀오프 마법소녀 테마리☆마기카의 등장인물

 냉정한 이성과 지력을 갖춘 리더, 시이나 미스즈 椎名 みすず


 "거기, 날뛰지 마. 적은 마녀지 건물이 아니니까."



 아키카와 중학교 3학년

 1월 23일생, AB형


 이미지 컬러 라벤더(#B57EDC)


 소원: 돈이 필요해. 평생 쓰고도 넘칠 정도로 많은 돈이!


 좋아하는 것: 공부, 성적표, 시험, 상금

 싫어하는 것: 가족, 특히 부모, 낡은 집, 돈이 없는 것, 사람과 부대끼는 것.


 153cm, 45AAA


 안쓰러울 정도로 바싹 마르고 피부가 거뭇하다. 몸에 비해 과하게 크고 낡은 교복을 입었다. 뼈마디가 드러나는 체형에 광대가 도드라진 넙데데한 얼굴, 찢어진 눈을 가지고 있다. 입술은 계절을 불문하고 항상 터있고, 얼굴에는 기미, 팔뚝이나 다리 같은 곳에 피부염이 보인다. 손톱은 뭉뚝하고 손에서 주부습진이 떠날 때가 없다. 볼품없는 신체에서 눈에 띄는 부분이라곤 허리까지 길러 늘어뜨린 생머리뿐이나 그마저도 관리가 안 되어 부스스하다. 결이 나쁜 편은 아니다. 몸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났다(계약 전). 쌍커풀은 왼쪽은 두 겹, 오른쪽은 세 겹.


 성적표가 나오는 날이나 외부 시험 결과가 나올 때를 제외하고는 학교에서 항상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교문을 나서 마법소녀의 모습이 되면 제법 생기가 돈다. 학교에는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없이 홀로 시간을 죽이지만 마법소녀 후배들에게는 엄격하면서도 상냥하고 너그러운 친구 겸 리더.


 정부의 보조를 받는 가정. 생모는 집에 들어오지 않고 동사무소에 등록도 되어있지 않다. 생부는 장애가 있어 일을 할 능력이 없으나 가끔 나가서 막노동을 한다. 부모가 모두 집안을 전혀 돌보지 않아서 미스즈를 비롯한 삼남매는 전혀 가정의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네살 연상인 미스즈의 남자 형제가 처음부터 가장노릇을 했고 미스즈가 어느정도 사리분별을 할 수 있게 된 소학교 저학년 무렵부터는 미스즈가 살림을 돌봤다. 미스즈가 초등학교 졸업 학년이 되는 해, 즉 미스즈의 오빠는 본인이 고등학생이 되는 해에 곧장 집을 나갔고 다시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미스즈가 가장 노릇을 했다. 계약을 한 건 오빠가 집을 나가고 일년 뒤인 중학교 1학년 때. 장학금을 받아 커트라인 높은 사립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등록금 제출 전에 장학금을 가족이 날려먹었다. 좌절한 미스즈 앞에 나타난 큐베와 계약했다.


 생부는 집에서 놀거나 보조금을 들고 나가는 게 일. 생모는 그가 열렬히 추종하던 창부로 따로 살고 있으며 가족에도 올라있지 않지만 아이는 낳아서 넘겼다. 진짜 생부가 주민등록상의 생부가 맞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생모가 그렇다고 하니 생부는 자기 자식으로 등록했다. 생모는 물장사를 겸하며 식당에서 일을 한다.


 생부는 미스즈가 기억도 하지 못할 무렵부터 형제를 때렸다. 동생들이 지나치게 어린 나이에는 맏이만 맞았으나 미스즈가 열살 무렵, 그러니까 미스즈의 오빠가 덩치가 커 반항이 가능해졌을 때쯤부터는 본격적인 폭력의 대상이 미스즈가 되었다. 당시 일년 가량 미스즈가 기억하는 것만 죽을 고비를 네 번 넘겼으며 실제로는 그보다 심한 일이 두어번 더 있었다. 미스즈는 당시의 기억이 희미하다. 동생은 미스즈보다는 조금 늦게, 소학교 졸업학년 무렵부터 손을 댔다. 상대적으로 자신을 닮았다며 아꼈다.


 오빠가 집을 나간 직후, 분노한 아버지가 옆으로 누워서 자던 미스즈의 등을 걷어찼던 적이 있다. 그때부터 허리에 이상이 생겼다. 당시에는 모르지만 허리 디스크가 된다. 그 외에도 환경이 나쁜 것과 못 먹을 것을 먹고 자란 탓에 나이에 비해 건강이 좋지 않다. 아직은 어리고 고통을 견디는 것에는 이골이 나서 뼈가 부러졌던 자리가 비오면 시리다거나 소화가 잘 안 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크게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아주 어릴 때부터 학습에 특출나게 재능이 있었다. 학교에서 검사한 결과로 아이큐는 183. 심각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부터 두각을 드러냈다. 학교 선생이 안타까워할 정도.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부터 한 번도 일등을 놓쳐본 적이 없다. 노력한 만큼, 어쩌면 그 이상 결과가 나오는 공부에 매달달렸다. 공부에 정을 붙이면서부터 아무 생각 없이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는 것이 소원이었다. 줄곧 책을 들여다본 탓에 점점 시력이 나빠져 최근에는 안경을 써야한다는 충고를 들었다. 고민 끝에 안경을 사는 것보다는 마법으로 시력을 고치는 게 낫겠다고 결정했다. 시력 검사 결과도 마법으로 조작했다.



 아케미家와의 인연

 한창 생부에게 폭행당하던 열살 때, 생모가 찾아와 아이들이 있는 것도 아랑곳 없이 하루종일 성교를 즐기는 부모를 피해 이른 아침부터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던 미스즈는 죽음에 가까워져가던 마리와 만난다. 이후 네 번 정도 마리와 만나 도움을 받으나 마리가 딸의 옷을 입혀 돌려보낸 날, 생부는 본 적 없는 깨끗한 옷을 입고 온 미스즈를 심하게 폭행하고 외출을 막았다. 그 후 마리는 병이 악화되어 병원에 실려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거기서 마리와의 인연은 끝난다. 미스즈는 마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고, 마리는 미스즈를 염려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미스즈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마법소녀가 된 미스즈의 미래

 돈만 많아지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미스즈는 몰랐던 생모의 도박중독으로 미스즈가 삶을 팔아 얻은 재산이 하나 둘 날아간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닌 척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냈다. 많으니까 조금은 써도 된다고 생각했으나 미스즈는 미성년이었고, 그런 미스즈의 통장에 손을 댄 생부가 생모가 원하는대로 재산을 넘겼다. 생전 처음 큰 돈을 만지게 된 생모는 점차 판돈을 불리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바닥을 보게 된다. 미스즈는 큰 충격에 빠져 렌게의 위로도 소용없이 마녀화한다.


 T.R.A.U.M.와의 인연

 - 렌게

 1학년때 같은 반이었다가 2학년 때 갈라졌다.

 1학년 때는 사이가 좋을 리 없었던 다른 세상 사람이어서 데면데면했다. 서로 감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미스즈 입장에선 아이돌 연습생이라고 수업을 빠지는 렌게가 눈꼴시었고, 렌게는 유독 쌀쌀맞게 구는 미스즈가 무서웠다. 사이가 급변한 건 서로가 마법소녀임을 알게 되었을 때. 사는 동네가 멀고 렌게가 연습생으로 지내느라 사이클이 달라서 학년이 거의 끝나갈 때까지 몰랐다. 아직은 미스즈가 날이 많이 서있고 렌게도 소심해서 관계는 개선되었지만 서먹했다.

 2학년이 되어 반이 갈린 후에도 한동안 같은 상황이었지만, 부딪히지 않고 영역과 순찰시간을 지켜 공존했다. 다른 마법소녀가 영역을 침범하면 렌게가 피하고 미스즈가 토벌하는 경우가 많았다. 미스즈가 렌게 영역까지 지켜준 셈. 이후 학교에서 반 외 활동으로 잠시 엮일 기회가 있었는데 마법소녀라는 공통점을 둔 소녀들은 대화를 하다가 각자의 어두운 사정을 알고 급격히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3학년이 되면서 마법으로 반편성을 조작할까 고민도 했으나 운이 좋아 결국 같은 반이 되었다. 친해진 뒤로 둘 다 성격이 많이 바뀌어서 둘 다 겉보기에 많이 부드러워짐. 렌게는 자신감 있게 행동할 수 있게 되었고(훈련의 성과일 뿐이지만) 미스즈는 자기 사정을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생겨 위안이 되었다.

※ 다툴 경우 말이 없어진다. 그러나 어느순간 서로에게 어색하게나마 말을 걸거나 웃음이 터져 화해함.


 - 아이카와 우메

 렌게와 미스즈가 막 친해진 2학년 중반쯤, 갓 계약한 신입 마법소녀인 두 사람을 만났다. 마음이 맞을 것 같아 팀을 꾸렸다.

※ 아이카: 한 번 의견이 갈라지면 양쪽 다 양보하지 않아서 싸움이 크게 난다. 미스즈의 가차없는 발언과 아이카의 인신공격이 어우러져 같이 있는 다른 인원으로서는 최악의 싸움. 자주 의견이 갈리기 대문에 보통은 싸움이 나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가로막거나 미스즈가 양보한다.

※ 우메: 우메가 워낙 과묵해서 의견 충돌 자체가 나지 않는다.


 - 테마리

 미스즈가 중3, 테마리가 중1이던 여름. 웨딩드레스 샵의 쇼윈도를 구경하는 중에 우연히 4인방이 근처에 있었다. 큐베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눈이 동그래진 테마리를 눈치챈 미스즈가 설명해주자 말릴 틈도 없이 계약해버렸다.


 - 호칭

자신(와타시): 테마리쨩, 렌쨩, 아이카쨩, 우메쨩, 아야메상→에리카쨩, 카나쨩, 유사



 마법소녀

 마력 특성은 비행. 무기는 창. 마녀 같은 분장에 어울리게 마치 빗자루처럼 생겼지만 술 안에 날카로운 금속이 숨어있다. 그러나 창으로 공격하기보다는 던져서 꽂아넣고 피뢰침으로 활용해 감전시켜 태워버리는 방식으로 활용한다. 마력은 다섯 중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마법도 강력하다. 빗자루에 올라타 날면서 적을 파악한다.

 변신씬 강조 아이템: 모자, 귀걸이, 망토 리본, 장갑, 반지, 신발


 마녀화

 공부의 마녀, 성질은 분노.


 미스즈(15) 기타 설정

 - 음역대는 소프라노. 노래를 부를 환경이 아닌 것치곤 발성이 좋다. 목소리 톤은 낮은 편.

 - 오메가버스 우성 알파

 - 생일을 자주 까먹는다. 챙기지도 않고 먼저 말하지도 않는다. 너무 기대가 없어서 챙겨주면 깜짝 놀란다.



 무대 뒤 AU

 Mi

 과보호 받으며 자란 귀한 아가씨. 엄마가 갓난이때부터 데리고 다니며 배우로 키웠다. 윤기 흐르는 생머리는 엄마 작품. 어릴 때는 히메컷이었지만 역할이 한정된다는 이유로 지금은 평범한 생머리. 필요한 장면을 잘라서 연기하는 TV 촬영에 익숙하다. 카메라에 적응 못하는 Te를 많이 도와줬다. 고등학생. 심각한 결정 장애에 은근히 소심하고 눈치를 많이 본다. 시키는 일은 잘 함. 성적도 중간쯤, 성격도 중간쯤, 연기도 중간쯤. 미스즈라는 인물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지만 동경해버렸을지도?




 계약하지 않은 미스즈의 미래

 폭력과 생활고에 시달리며 공부에 매진한 끝에 고등학교에 다니던 중 대학에 조기입학했다. 처음에는 마리의 영향으로 사회학과에 진학할 생각이었으나 고등학교 때 선생의 설득으로 이과로 진학했다. 결국 그 선생님의 도움으로 집을 나와 수험공부를 해서 대학에 조기입학하는 데 성공한다. 대학은 항상 전액장학금을 받아서 다녔다.


 특정 분야에 마음이 있는 게 아니다보니 전과를 많이 했다. 그러면서도 결국 대학도 조기졸업한 게 천재 퀄리티. 바로 대학원으로 진학해 공부에 매진했고 미국으로 건너오라는 유혹은 처음부터 있었으나 두살 어린 동생을 염려해 시기를 늦췄다. 집을 나오며 모든 연락을 끊었으나 동생에게만 알려준 연락처로 결국 부모가 찾아와 돈을 구걸하기 시작했고 형편이 되는대로 넘겨주기는 했으나 동생이 성인이 되자마자 미국으로 달아난다. 질릴대로 질린 상태라 동생에게는 이메일만 알려주었고, 그나마도 거의 확인하지 않아 스팸메일이 쌓이고 있다.


 (아케미家와의 두 번째 인연)

 도망치듯 일본을 떠난 터라 그전부터 찾고 있던 마리의 사망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채, 병원으로 실려갔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빈손으로 도착한 미국에서 정착하느라 한동안 일본에 돌아가지 못한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본에 들를 여유가 생긴 건 박사학위를 따고 모 유명 대학(KAL텍)에서 일하며 생활이 자리잡힌 스물아홉. (생화학 박사 학위를 딴 게 스물넷. 학위는 미국에서 땄다.)


 비자 갱신과 마리 추적을 위해 일본에 돌아간다. 희미하던 마리의 성을 기억해낸 미스즈는 친동생이자 주치의였던 아케미 소이치로를 찾아낸다. 소이치로의 도움으로 임종 사실을 확인하고 예정보다 이르게 미국으로 돌아가려던 미스즈를 소이치로가 붙잡았다. 마리를 많이 그리워하고 있던 소이치로는 미스즈에게서 강렬한 끌림을 느꼈고, 미스즈 역시 소이치로에게 이끌려 두 사람은 밤을 함께한다. 이후 연인관계가 되어 잠시 일본에 돌아갔던 미스즈는 본격적으로 휴가를 내고 일본으로 돌아와 한달 가량 함께 지내게 된다.


 그 후 태평양을 사이에 끼고 교류를 계속하던 두 사람은 뜸한 만남에도 불구하고 인연이 계속해 소이치로가 은퇴 후 미국에서 동거하게 된다. 간략히 혼인 신고를 마치고부부의 연을 맺은 두 사람은 큰 다툼 없이 이십여년을 함께 지낸다. 어린 시절의 고생으로 건강이 심히 망가진 미스즈는 소이치로의 극진한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56세에 둘이 함께 떠난 여행길에서 숨을 거두었다.


 미스즈(29) 기타 설정

 - 앞머리는 눈썹 바로 위까지. 눈썹이 보이지 않는다.

 - 지독한 워커홀릭. 쉬는 날에는 집안일을 하거나 병원에 가거나 앓는다. 그 외 짬짬히 여가시간에는 신문이나 잡치를 잃으며 소홀했던 세태 파악에 힘을 기울인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방전된 것처럼 늘어져 티비를 본다.

 - 담배, 술, 마약까지 가끔 한다. 중독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수준이지만 스트레스가 심할 때 되는대로 취한다. 집에서는 보통 아편. 대마도 해보고 담배도 피워보았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간편했다는 모양.

 - 소화불량, 스트레스성 두통, 스트레스성 위염, 역류성 식도염 따위 잔병이 많다. 감기에 한 번 걸리면 최소 이틀을 앓아눕는다. 5년 안에 골다공증이 생길 예정.

 - 소화불량이 심해 평소 음료는 거의 안 마시고 그나마 물. 그것도 지치면 그냥 먹지 않는다. 집안일은 가사도우미를 불러 맡기고 음식은 사람을 시키거나 주문하는 게 반, 요리하는 게 반. 보통은 집에서 먹을 일 자체가 많지 않다.

 - 허리 때문에 굽이 있는 신발은 신지 않는다. 거의 항상 워킹화. 물을 들고 다닌다.

 - 몸에 벤 가난 때문에 옷도 잘 사지 않는다. 유일하게 사치하는 분야는 머리카락 관리. 풀코스로 관리하고 있어서 어릴 때랑 달리 찰랑찰랑 흔들린다.

 - 콘서트는 다니지 않지만 음악을 듣는 건 좋아한다. 즐기는 장르는 메탈 전반.

 - 좋아하는 티비 프로그램 종류는 다큐멘터리지만, 그나마도 볼 기회는 별로 없다.

 - 논문이나 신문은 많이 읽지만 픽션은 전혀 읽지 않는다. 그나마 남은 지식은 전부 학창시절에 읽은 것들.

 - 혼돈-선, INTJ. 이미지에 맞는 동물은 사슴.

 - 과거 연인이 다수 있었으나 본인부터가 성욕을 채울 상대라는 인식이고 사생활에 끼어드는 걸 극도로 꺼려 오로지 성교에만 관심있는 상대를 골랐다. 덕분에 데이트 강간 경험이 많다. 토이를 비롯해 다양한 플레이에도 아는 바가 많다.



 가족 사항

부: 장애가 있어 일을 하지 못하는 경제 무능력자. 가끔 막노동을 하고 보조금을 낭비한다. 집에 있을 때는 자거나 사람을 패거나 돈을 가져갈 때뿐으로 부모로 해야하는 일을 한 건 거의 없다. 아이들 생모로 알고 있는 사람과는 돈을 주고 섹스하던 사이로 간도 쓸개도 빼줄 기세. 보통 집에 오면 눈치 보지 않고 잠자리를 갖는다. 애들이 아주 어릴 때는 그가 찾아와도 애들이 알아서 자리를 피했지만, 그게 당연해지자 직접 내쫓기 시작했다.


모: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물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아이들 생부가 누군지 본인도 잘 모른다. 당장 죽이지 않을 정도로만 키워서 미스즈의 생부에게 떠넘겼다. 서류에는 올라 있지 않다. 심한 도박 중독자.


손윗형제: 4살 연상 남자 형제. 철이 들기도 전부터 아버지에게 얻어맞으며 집안 살림을 하고 동생들을 돌봤다. 중학교를 졸업해 곧장 기술직으로 취직해 집을 떠났다. 막 집을 떠난 직후에는 잠시 미스즈와 연락이 되었으나 한달 안에 연락이 끊어졌다. 살아는 있는지 알 수 없다.


손아래형제: 두살 아래.



해리 포터 AU: 17세 기준 프로필
멀 싱클레어Merle Sinclair (영국인)

생년월일: 1959. 1. 23.
키 / 몸무게: 153cm / 39kg
핏줄: 순수 혈통

기숙사: 레번클로
지팡이: 북가시나무. 불사조 깃털. 8인치. 단단하고 휘어지지 않는다.
패트로누스: 매
보가트: 생부

특이사항: 애칭은 Meryl. 어머니는 프레웻가 출신. 방탕한 부모 탓에 동생이 팔려갈 뻔한 적이 있다. 클라라와는 빚 관련으로 돌아다니던 중에 만났다.

교복은 전체적으로 한 사이즈 크다. 셔츠 단추는 하나 푸르고 타이는 느슨하게. 망토는 여민다. 스타킹에 단화.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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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나 타입 자캐 커미션입니다.





 페리아 파그메의 밤. 지상은 요정의 춤으로 물들고, 창공에서는 달이 축복하는 아름다운 시간. 사람들은 되찾은 풍요에 흥겨워했다. 닷새를 이어진 축제에도 지치는 기색은 보이지 않고, 생기가 넘쳐흘렀다.

 무대의 막이 올랐다. 그것은 벌써 삼십여 년 전의 이야기.

 수도가 아직 눅진한 평화에 물들어 자신을 잃어가고 있던 시절. 아름다운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반짝이는 금발과 장밋빛 뺨을 가진 아주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누구나 그를 보면 사랑에 빠져 온갖 파티에 불려 다니지 않는 곳이 없었다.

 청년에게도 한가지 흠이 있었으니, 얼음장같이 차가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교계의 모든 여인이 그의 마음을 한 줌이라도 얻어볼까 갖은 애를 썼지만, 그는 애타는 갈구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마음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보석처럼 아름다운 청년이 이름은 엘리엇 샬마르크. 그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이야기는 엘리엇이 갓 청년이 되던 데뷔탕트의 무도회장에서 시작된다.

 「저기 있는 저 여인을 보아라. 어쩜 저리 아름다운지.」

 허름한 차림의 인형술사가 나무막대를 흔들자 왕자 인형이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구경하는 아이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왕자 인형 옆에서는 검은 머리에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 인형이 길게 하품을 했다. 곧이어 왕자 인형은 정중하게 여자 인형에게 절을 하고 두 인형은 함께 춤을 추었다.

 「레이디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당신과 혼인하고 싶어요.」

 「오, 엘리엇. 나도 정말 그러고 싶네요.」

 과장되게 간드러진 목소리에 객석에서는 까르르 웃음을 터진다. 마침 옆에서 악단이 연주를 시작해 인형극은 한층 그럴듯해졌다. 시간은 흘러 흘러 엘리엇은 이름 모를 여인을 향한 연심에 불타올랐다. 마침내 청혼을 결심한 엘리엇. 그은 그때까지도 이름을 모르던 여인에게 이렇게 요청했다.

 「사랑하는 여인이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제발 내게 알려줘요.」

 왕자 인형이 무릎을 꿇고 사랑을 고백했다. 여자 인형은 무정하게 돌아섰다. 왕자 인형은 찢어지는 마음에 고개를 푹 떨궜다.

 「내게는 필요한 게 있어. 그대를 사랑할 순 없어요.」

 「그대가 원하는 거라면 내 무엇이든 마련해주겠소.」

 인형술사의 연기는 여전히 우스운 하이톤이었지만, 이제는 웃는 이가 없었다. 지나가던 행인이 인형극을 보고 발을 멈췄다.

 여자 인형이 왕자 인형을 향해 돌아섰다. 왕자 인형은 고개를 들어 여자 인형을 반겼다.

 「그게 정말인가요?」

 「물론이요.」

 「무엇이든?」

 「무엇이든!」

 두 인형이 점차 가까워지며 양손이 맞닿으려는 찰나,

 “어, 줄 끊어졌어요.”

 한 아이가 말했다. 방금까지 멀쩡하던 여자 인형의 머리 쪽 줄이 끊어져 덜렁거렸다. 인형 목이 뜯어져 솜이 보였다. 인형사는 망가진 인형을 집어넣고 새 인형을 꺼냈다. 아주 흡사하지만, 짧고 활동적인 드레스를 입은 인형이었다. 인형사가 손잡이를 붙들자 바닥에 축 늘어져 있던 왕자 인형이 벌떡 일어났다. 인형극은 다시 계속된다.

 금화를 인형사의 가방에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들어가는 길에 눈에 띄어 끝까지 보고 갈 셈이었는데 인형이 망가지는 바람에 흥이 떨어졌다. 반짝이는 동전에 아이들과 인형사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그 눈빛을 즐기며 광장을 떠난다.

 오늘로 이 즐거운 시간도 끝이라고 생각하니 참으로 아쉬웠다. 촉박한 시간을 아껴 굳이 길거리로 나온 건 그런 이유였다. 잠시라도 좋으니 감시에서 멀어지고 싶은 마음 반, 앞으로 최소 일 년은 오지 않을 향락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반. 번쩍이는 수도의 거리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성을 빠져나올 만한 가치가 있었다. 사람들 얼굴에 흐르는 생기는 그 자체로 구경거리였다. 인형 같은 표정을 한 귀족들 사이에 서 있는 건 너무 지루해서 그대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한껏 차려입은 아름다운 아가씨들도 위안이 되지 못했다. 사람이 과자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생기 넘치는 거리가 어떤 보약보다도 좋았다.

 올해의 페리아 파그메는 조금 특별한 축제였다. 길거리는 언제나와 같았지만, 도성은 달랐다. 밖에서도 눈에 띄게 빛나는 홀이 있었다. 한창 일꾼들이 바쁘게 일하고 있을 때였다. 홀에 도착할 때쯤이면 이미 시작하고도 남을 터이다.

 왕의 이름으로 주최되는 가장무도회. 매해 한두 가문은 꼭 빠지던 저녁 만찬과는 다르게 모든 귀족 가문은 반드시 참석하라는 명이 있었다. 디히터가에서는 가주인 플로리안이 참석하는 것으로 진작 결정이 났다. 나는 군더더기이자 들러리, 홀을 장식하는 예쁜 꽃이었다.

 플로리안은 축제 첫날부터 성에 머물렀다. 나는 텔레포탈을 넘자마자 디히터의 위엄을 지키며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그와 조우했다. 플로리안은 집에서 지낼 때보다 혈색이 좋아 보였다. 나는 체면치레가 맞는 인간이 따로 있는 모양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플로리안은 나를 무척 반겼다. 왜 나를 찾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플로리안이 떠나고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롭고 즐거운 한때를 예상하며 몸을 풀던 나를 불러낸 건 플로리안이었다. 반드시 가장무도회에 참석하라고 가문의 문장까지 썼다. 그가 무얼 생각하는지는 짐작이 갔다. 나와 미케일라의 행복한 시간을 방해할 겸, 날 이용해 하나라도 더 지지세력을 끌어모을 셈이었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수였다. 그렇지. 그렇고말고. 아무리 멍청해도 대륙 정반대 편에 있는 귀족이 한 지붕 아래서 휘두르는 칼을 막아주리라 믿지는 않을 거야.

 괜히 웃음이 났다. 그까짓 권력이 뭐라고 목숨을 걸고 칼부림을 하는지. 귀찮기만 한 것을 굳이 지켜내려는 플로리안도, 아득바득 뺏으려는 미케일라도 놀라운 위인들이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마차에 올랐다. 금실이 수 놓인 제복을 입은 마부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무도회장은 눈이 부셨다. 성 밖에서부터 유난히 빛나던 홀은 대낮과도 차이가 없을 만큼 밝았다. 밤하늘을 걷는 양 아름다웠던 밤거리를 비웃듯 무도회장을 꼼꼼히 수놓은 광원은 고작 서민들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 빛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도록 천장에 걸어둔 마법, 가격을 깜박 잊은 듯 홀 곳곳을 장식한 전구들. 거기에 빛이라기보다는 분위기를 위해 세워둔 듯한 촛불이 아른아른 빛났다. 초와 마법이야 기본적인 장식이지만, 마도공학의 정수라 불리는 전구를 한 자리에서 이렇게 많이 보는 건 또 처음이었다.

 홀에 들어섰을 때 개회식은 모두 끝나있었다. 느긋하게 산책을 마치고 도착한 보람이 있어 폐하의 근사한 말솜씨를 견문할 기회는 놓치고 말았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나는 안타까운 마음을 차마 감출 수 없어 촉촉한 눈가를 훔쳤다. 앳된 아가씨 하나가 나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쉿. 회심의 미소는 비밀이에요.

 홀 깊숙이 들어가 사람들 사이에서 목표물을 탐색했다. 비싼 돈을 들여 텔레포탈을 타고 수도까지 날아온 보람을 줄 존재, 바로 오늘의 무도회에 어울리는 향기로운 꽃이 필요했다. 휴식을 방해받은 대가는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아름답게 피어난 아가씨가 없다면 맛 좋은 가십거리도 괜찮다.

 홀을 가득 메운 참가자들은 가장무도회에 걸맞게 짙은 분장이나 화려한 가면으로 자신을 가리고 있었다. 왕이 직접 내리고 실천하는 명령을 함부로 거역하는 간 큰 인사는 몇 없었다. 그는 자신이 푸른 하늘을 먹구름으로 덮으려고 했다는 것을 알까. 가면을 든 손을 살짝 옆으로 기울이자 내 쪽을 훔쳐보던 귀부인이 손 키스를 보냈다.

 마왕이 저지른 오 년간의 악행과 전쟁으로 나라가 한 번 무너졌다. 오백 년의 긴 평화와 풍요는 신기루처럼 바스러졌다. 마왕이 마왕이라고 불리는 것은 마에서 시작된 존재여서가 아니다. 다른 세상에서 온 탓도 아니다. 그건 그가 마왕의 이름을 가지게 된 계기에 지나지 않았다. 마왕이 마왕이 된 것은 전쟁과 학살을 즐기는 잔혹한 성정 탓이었다. 실리도 예법도 무시하고 그저 육체의 즐거움만을 쫓는 무도한 치세 탓이었다. 백성들은 공포와 증오를 담아 그를 마왕이라 일컬었다. 그 이름은 피와 영혼을 싣고 오래도록 전해졌다. 오백 년의 긴 역사가 모든 걸 묻어버리기 전까지는.

 약 오 년간 이루어진 마왕의 치세는 나라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망가진 국토가 너무 넓었다. 잃어버린 사람이 너무 많았다. 기름진 대지에는 붉은 비가 내리고 눈물이 모여 강이 흘렀다. 고작 오 년. 그 오 년 동안 삶이 완전히 망가졌다. 아직도 마왕의 치세를 견딘 이들은 마왕을 향한 두려움에 떨었다. 삼십 년을 잊으려 노력했지만, 악몽이 가시지 않았다. 마왕을 겪지 못한 어린 청년들은 황폐한 땅과 메마른 인심 속에서 공포와 적의를 배웠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마왕의 치세동안 안온히 집을 지켜낸 지방과 그렇지 못한 지방 사이 갈등이 심했다. 삼십 년이라는 절대 짧지 않은 시간은 사랑하는 가족과 충성을 맹세한 주군을 잃은 상실감을 지워주지 못했다. 마왕이 사라지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사라지자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비탄이 찾아왔다. 땅과 집과 가족을 잃은 이들의 원성이 빗발쳤다. 고통은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았다. 온 나라가 통곡했다.

 갓 왕위에 오른 실라나이우스는 갈 곳 잃은 분노를 마왕과 그의 치세를 가져온 반역자들에게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훌륭한 왕이었지만,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왕은 어떤 노력으로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통제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갖은 노력 끝에 많은 아픔이 마왕의 탓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슬픔을 견뎌내기 위해 이웃을 원망했다. 마왕에게 협력한 가문과 세력을 모두 쳐냈지만, 감정의 골은 전혀 좁아지지 않았다. 가장 힘든 순간에 도움을 거부한 이웃과 살아남기만도 벅차 모든 손을 놓아버린 이들이 서로를 원망했다. 살라나이우스의 뒤를 이어 왕관을 물려받은 녹스 E. 네레우스는 선왕이 살린 나라를 안정시키려 부단했다.

 그 결과가 여기 있었다. 나는 웃었다. 우스꽝스러운 가면이 사람들을 실에 꿰인 인형처럼 만들었다. 넓은 홀은 인형극 무대였다. 사방이 옷과 머리에 엄지손톱만 한 큐빅을 덜렁이며 만면에 행복을 그린 인형으로 가득했다. 막이 오르자 일곱 빛깔 보석이 광채를 발하고, 인형들은 일제히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이곳 어딘가에 숨어있을 엘리엇 샬마르크에게 경배를. 비록 멍청한 얼굴을 한 인형이었지만, 눈먼 용기만큼은 존경할 만 했다.

 나는 무대에 선 인형답게 저 멀리 높은 곳에 앉은 광채에게 절한다. 우스꽝스러운 광대놀음에 빠지는 건 예로부터 의자가 높은 자의 특권이지요. 아무리 광대놀음에 눈이 멀고 귀가 먹어도 당신의 발등에 입 맞춘 신하를 잊지 마시길.

 파티장을 느긋하게 돌았다. 음식을 나르는 시종의 접시에서 바질과 캐비어를 얹은 카나페를 집어 든다. 큰 행사를 맞아 화사하게 단장한 여인들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어디 보자.

 벽에 붙어 와인을 홀짝이는 저 소녀는 테샬리트 가주가 사랑하는 꼬마 아가씨다. 듣자 하니 마력은 대단치 않지만, 지력이 뛰어나 마법은 물론 갖은 학문에 능통하단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젊은 남자들이 잔뜩 몰려있다. 사랑을 갈구하는 전도유망한 기사들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 머리 위로 삐죽 솟아 있는 얼굴은 위풍당당하면서도 아름답다. 그녀는 도블링 영지에 속한 사무엘가 출신 검사로 실력이 뛰어나고 아름다웠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팬이 많아 각지에서 팬레터가 날아든단다.

 저녁을 대충 길거리 음식으로 때운 탓인지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배가 고팠다. 나는 시종을 아예 불러 세웠다. 체면도 모르고 연달아 음식을 집어 먹자 경악한 표정을 했다.

 “왔구나, 디트리히.”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식사를 포기했다. 시종은 내 손이 멈추자마자 달아나듯 떠나버렸다. 나는 혀에 남은 카나페의 잔여물을 아쉽게 삼키며 돌아섰다. 천상의 미소가 나를 반겼다. 플로리안은 마치 처음으로 꽃이 피는 순간을 목격한 어린 소녀처럼 맑게 웃었다. 나만큼이나 아름다운 이 미청년은 긴 은발을 말총처럼 늘어뜨리고 짙은 푸른색 코트를 걸쳤다는 것을 제외하면 나와 거의 흡사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와 나의 분위기는 천지 차이로 달랐다.

 “개회식에 보이지 않더구나. 즐거운 일이 있었니?”

 플로리안은 상냥하고 아름답게 웃으며 물었다. 가면에 가려져 있는 형의 얼굴이 눈만 보고도 마음속에 그려졌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바라보는 듯한 다정한 미소는 동생을 향하기에 흠이 없었다.

 “형도 나가보는 게 어때. 올해 같은 페리아 파그메는 또 없을 거야.”

 나는 플로리안 디히터의 꿀이 떨어질 듯한 애틋한 눈빛을 건조한 미소로 받아쳤다. 훔쳐보는 영애들의 안타까운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네가 그렇게 추천할 정도라니 나도 꼭 보고 싶다. 같이 나가볼 걸 그랬어.”

 플로리안은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나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형의 혼신을 다한 역할 수행은 이미 지루함으로 말라붙고 있던 내 마음을 적셨다. 이토록 플로리안이 최선을 다하는데 이 정도도 해주지 못할쏘냐. 나는 마음을 담아 플로리안에게 대답했다. 지금은 볼거리가 많이 줄었겠지만, 형과 함께라면 당장에라도 마차를 준비하겠노라고. 사랑하는 플로리안은 곤혹스레 웃으며 내년에는 꼭 함께 축제를 구경하자는 약속을 남겼다.

 플로리안이 떠나고 나는 또 다른 접시에서 스파클링 와인을 집었다. 달콤한 향을 콧속 깊은 곳까지 빨아들이며 근처에 있는 서랍장에 몸을 기댔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인파 속에는 알아볼 수 있는 인물이 제법 끼어있었지만, 어디에도 즐거운 모임이 없었다. 외로운 아가씨도 없고, 흥겨운 음악도 없었다. 영광스러운 자리를 만들어주신 하늘의 가장 높은 영광이 계시면 인사라도 올려볼 것을. 보아하니 개회식에 지친 몸을 달래느라 자리를 비운 듯했다.

 입술을 적시고 이것저것 음식을 집어 먹다 보니 어느덧 배가 불렀다. 슬슬 움직여볼까 하는 찰나에 음악이 바뀌었다. 잔잔하게 귓가를 간지럽히던 리듬이 흥겨워졌다. 인파를 헤치고 돌아다니던 시종들이 자취를 감췄다. 홀 가장자리로 사람들이 밀려 나왔다. 살과 살을 맞대고 진정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중앙에서 밀려 나온 사람 중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나는 반가움에 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꽉 조인 허리 아래로 한껏 부풀린 스커트는 고귀한 보랏빛. 한 떨기 제비꽃처럼 아리따운 그를 이 팔에 가둬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장에 바람이 든 듯 가슴이 설렜다. 그 이름하여 마하 로즌기프트.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는 장미 향이 매혹적인 여인이었다.

 어두운 자줏빛 레이스 장갑 위로 검은 나비를 붙잡은 그는 어딘가 지친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나와 달리 처음부터 자리를 지켰다면 지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발걸음을 늦췄다. 망상이라고 해도 좋지만, 위화감이 들었다. 마하 로즌기프트가 이 정도 파티에 지칠 사람이던가? 절로 고개가 기울여졌다.

 과거 그와의 만남을 되짚는다. 운명적인 첫 만남은 데뷔탕트였다. 날씬한 허리와 가녀린 팔은 내 마음을 사로잡을 만했다. 지금이니 단언하지만, 나는 그에게 첫눈에 반했다. 누군가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걸 죄악이라 한다. 그러나 내 사랑에는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눈을 가진 이가 아름다움에 빠지는 것은 벌과 나비가 꽃을 찾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다. 갓 성인이 된 꽃다운 그는 낯선 만남에 모두가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 홀로 봄바람이 되어 나부끼는 여인이었다.

 그 후로 나는 그를 찾아 헤매었다. 혹여나 우연이 겹쳐 만나지 않을까 많은 살롱에 참가했다.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무척 즐거웠음은 부정하지 않으리라. 살롱을 꾸리는 부인이란 희귀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생물이고, 나는 그 두 가지 모두였으니 내가 어느 살롱에 가나 환영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말인즉, 나는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내의 안부인과 안면이 있다.

 놀라운 것은 전국의 살롱을 다 돌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조우한 것은 고작 두 번이었다는 점이다. 가끔은 그가 경계해 달아나는 게 아닌가 싶은 순간도 있었다. 안타깝게 만남을 놓친 어느 날에는 쓸쓸함에 술과 시와 노래로 감상적인 밤을 보내기도 했다. 나는 한참을 우울해 있었지만, 다음날 참석한 살롱에서 그가 모임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날은 정말 즐거운 하루였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린 만남이었다. 아주 사소한 것도 잊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와 조우한 것은 사이어드 부인의 소개로 초대받은 티파티에서였다. 테샬리트가의 영애가 새로 맞춘 승마복을 선보이기 위해 준비한 자리였는데, 고르고 골라 어렵게 장만한 승마복처럼 참가자도 아주 까다롭게 골랐기 때문에 영애와 친밀한 사이어드 부인의 살롱이 아니었다면 내게 기회가 돌아오진 않았을 터였다. 그랬으면 나는 한동안 실의에 빠졌을 테지.

 어쨌든 벼르고 별러 조우한 마하는 내 기억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는 충격에 얼어붙었다. 나는 나 말고 아름다움이 성장하는 이를 본 적이 없었다. 마하는 내 미화된 기억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나는 이미 반해 있었지만, 그 순간 내 심장에는 붉은 꽃이 폈다.

 그날의 티파티가 어땠는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수많은 살롱에 참가하며 어떤 손님과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하는 게 특기인 내게는 지금도 생소한 일이다. 기억나는 건 마하가 플로리안과 비슷한 미소를 짓는다는 사실과 그의 굽이치는 검은 머리가 무척 예쁘다는 것뿐이었다. 수많은 아가씨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어본 지금도 나는 마하의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얼굴을 보자마자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온 과거의 기억과 대조된 마하는 한층 기이했다. 지친 마하라. 세 번 만나 두 번 인사한 사이였다. 내가 그를 모르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나는 내 눈을 믿었다. 마하는 여유롭고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왕이 직접 소집한 파티에서 피곤한 모습을 보일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꿀처럼 달콤한 미소 속에 무엇이 숨어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코 웃음을 잃을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드디어 진저리 나는 권태가 떠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심장이 두근두근 소리를 냈다. 이로써 명확해졌다. 마하 로즌기프트, 그는 내 인생을 바꿀 키였다. 못생긴 인형들 속에서 살아 숨쉬는 단 하나의 보석. 나는 거침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이건 그저 호기심이고 못된 장난이었다. 단순히 컨디션이 나쁜 날일 수도 있다. 아주 못생긴 남자를 봤을 수도 있겠지. 마하가 평소와 조금 다르다고 이상한 일이라고 단정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평소와 다른 모습에 끌리는 순간이란 진정한 사랑의 서막 같은 것. 나는 이것이 운명임을 확신하며 안색이 나쁜 마하의 뒤에 그림자처럼 붙었다.

 마하는 막 샬마르크가의 도련님을 떠나보내는 중이었다. 춤 상대를 요청했다가 퇴짜맞은 청년의 어깨가 축 처져있었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마하에게 오늘의 첫 파트너를 부탁하기로 마음먹었다.

 “좋은 밤 되고 계시는지요, 레이디 마하.”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마하는 놀라지도 않고 태연하게 돌아섰다. 형식적인 미소는 역시 어딘가 평소와 다르다. 그가 내 손등에 입 맞추고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마하는 평소처럼 상냥하게, 그러나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미소를 머금고 채 내게 답했다.

 “절 기억하고 계셨군요.”

 “어디 아프십니까? 안색이 안 좋네요. 예쁜 얼굴에 그늘 지면 안 되지요.”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아침부터 줄곧 정장을 하고 있었더니 피로하네요.”

 특별히 귀엽다고 칭찬이 자자한 미소에도 마하는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그림처럼 미소 짓는 그가 원망스러워 괜스레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살롱의 부인들만큼 호락호락하지는 않으리라 예상했지만, 날 이렇게 박대할 수가 있을까. 살며시 내리뜬 하얀 눈꺼풀이 나를 향했다. 마하는 막대 손잡이가 달린 가면을 얼굴로 바짝 들이대며 생긋 웃었다. 벌침처럼 따끔한 미소였다. 거절이 분명한 표정이었지만, 쉽게 물러갈 생각은 없었다.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마하에게 팔꿈치를 내밀었다. 마하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진해졌다.

 “보시다시피 손이 없어서 힘들겠네요. 디히터경께서도 경을 원하는 분과 함께하시는 쪽이 즐거울 테고요.”

 “아리따운 분과 함께라면 어느 때고 즐겁지 않겠습니까. 저는 레이디와 함께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떨리는데요.”

 가면 사이로 그에게 윙크했다. 간지러운 대화를 즐기기 위함이라면 못 이기는 척 팔에 손을 때가 지났음에도 마하는 움직임이 없었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마하를 마주 보았다. 고요한 미소가 차가운 거절을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레이디.”

 다정하게 부르자 마하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나는 성큼 그에게 다가섰다. 한껏 부풀린 스커트가 내 다리를 휘감았다. 반사적으로 뒤로 빠지려는 마하의 어깨를 한 손으로 붙들었다. 가엽게도 가녀린 어깨가 긴장해 있었다.

 “협조하지 않으면 정체를 까발리겠어.”

 협박은 아니다. 생감자인지 익은 감자인지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마하에게서 떨어지며 주변을 살폈다. 이목을 끈 것 같지는 않았다. 마하는 예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다. 아직은 확신할 수 없다.

 “함께 춤추실까요?”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승리를 자축했다.

 손에 들고 있던 가면을 미리 준비한 끈으로 머리에 고정하고 손잡이는 허리춤에 따로 고정했다. 마하는 단장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기껏 단장한 머리를 망가뜨리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마하를 기다리며 무대를 감상했다. 막 시작된 댄스 타임은 가볍고 빠른 템포로 다 함께 추는 곡이었다. 일반적으로 오늘처럼 주최가 또렷한 파티라면 주최자나 그날의 주인공을 선두로 세우지만, 오늘은 참가자들의 화합을 위한 파티다. 어느새 돌아왔는지 의장을 일부 덜어낸 듯한 차림의 왕이 상석에 앉아 홀을 굽어보고 있었다. 무대를 장식한 것은 젊은 청년들이었다.

 시작은 미리 언질을 받았음이 분명한 한 무리의 아가씨들이었다. 마하에게 말을 걸기 전에 그들이 대형을 이루어 춤을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파트너가 필요한 대목에 들어서면서 신사들이 뛰어들었다. 그들 역시 아직 파릇한 나이의 젊은이들인 것을 보아 미리 손을 맞춘 게 틀림없었다. 나는 일사불란한 청년들 속에서 플로리안의 얼굴을 발견하고 웃었다. 마하가 그런 나를 곁눈질했다.

 음악에 맞춰 파트너가 바뀌는 시간이 되자 홀로 지켜보던 이들도 하나둘 대형에 끼어들었다. 점점 커지는 원을 보며 갈등하는 사이 마하가 돌아왔다. 신호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나는 재빨리 마하를 따라잡으며 대형에 끼어들었다. 막 파트너 교체가 끝난 참이었다.

 허리를 감싸 안자 자연스럽게 어깨 위로 마하의 팔이 감겼다.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코르셋의 단단함과 아찔하리만치 가는 허리가 생생했다. 상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둘레였다.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았다. 마하는 숙련된 솜씨로 리듬을 맞춘다. 대형이 고정되어 사람들은 각자의 파트너에게 집중했다. 나는 내 품에 안긴 이의 희고 창백한 피부와 날카로운 턱선, 그리고 무엇보다 붉은 기가 도는 자줏빛 눈에 정신을 빼앗겼다. 웃고 있는 입가와는 정반대로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였다. 은은하게 독한 꽃향기가 났다.

 나도 모르게 새기 시작한 마하의 깜빡임이 열두 번에 이르렀을 때 마하가 말했다.

 “영식에게 사람을 놀리는 취미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제게 장난을 거실 줄은 몰랐네요.”

 레이스처럼 만들어진 검은 가면 너머로 열세 번째와 열네 번째 깜빡임이 보였다. 경쾌한 박자에 맞춰 춤을 추며 말하는 건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 만남이 보통 즐거운 것이었어야지요. 틀림없이 응해주실 줄 알았어요.”

 애교 있게 웃어보았지만, 마하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미소에도 말에도 반응이 없는 그를 상냥하게 지켜보았다. 흐르는 음악에 맞춰 경쾌하게 앞으로 두 번, 뒤로 세 번, 오른쪽으로 두 번을 뛰고 허리를 감싼 팔을 풀었다. 손을 놓고 뒤로 빠져 안무를 하고 돌아오니 이번엔 마하가 손짓으로 안무하며 내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따로 맞추지 않고도 정연한 군무였다.

  “디히터가의 둘째 아들이 상상 이상의 망나니라는 건 유명한 이야기지요. 부인들 사이에서 굉장히 유명하시더군요.”

 다시 마하의 허리를 붙들고 다리를 앞과 뒤로 흔들었다. 마하는 숙련된 댄서여서 이 안무가 있을 때면 으레 생기는 사고가 없었다. 누군가 파트너의 다리를 걷어찼는지 작게 앓는 소리가 들렸다. 호기심이 들었지만, 그보다는 마하의 딱딱한 표정이 걸렸다.

 “반항아로 지낸 세월이 길어 이름을 잊은 건 아니신지요.”

 눈동자가 맑게 빛나고 입술연지를 듬뿍 바른 아가씨들에게 비하면 창백한 얇은 입술이 빙그레 웃었다. 나는 얼굴 근육을 활용해 한껏 아쉬운 표정을 만들어냈다.

 “서운합니다. 그렇게 어리석어 보였습니까? 제가 조금 자유분방하나 아름다운 로즌기프트의 영애를 앞에 두고 본분마저 잊는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레이디의 눈부신 미모를 영접하니 긴장해서 숨이 다 가쁜걸요.”

 나는 과장스레 심호흡하는 시늉을 했다. 마하는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아름다운 분께,”

 한 손을 맞대고 한 걸음 멀어졌다가 빠르게 교차하며 자리를 바꿨다. 마하는 거리가 멀어지자 입을 다물었다. 안무에 맞춰 거리를 좁히면서 평소 춤추면서 보는 걸이보다 가깝게 얼굴을 마주했다.

 “어떻게 그런 실례를 저지르겠습니까.”

 나는 자연스레 자신만만하게 미소 지었다가 마하의 냉랭한 표정에 얼굴을 굳혔다. 안무에 맞춰 바싹 다가붙은 댄서들은 뒤로 한 번 걸음 물러나 파트너와 동시에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당신에 대한 소문은 알고 하는 말인가요?”

 “제 귀는 당신만을 향해 있답니다.”

 다시 허리에 팔을 감자마자 튀어나온 질문에 빠르게 답했다. 마하는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고운 미간에 그늘이 졌다.

 “제 마음을 맞춰보시겠어요?”

 마하는 도발하듯 턱 끝을 치켜들고 눈을 반쯤 내리떴다. 가면의 눈구멍 사이로 긴 속눈썹이 조명을 받아 녹색으로 빛났다. 가면에 날카로운 콧날이 가려진 게 아쉽다. 대형을 맞춰 마하와 함께 빙글빙글 돌았다.

 “디히터씨와 대화하니 즐겁다?”

 “아하?”

 마하는 비뚜름히 미소 지은 입가에 더불어 한쪽 눈썹까지 치켜들었다.

 “디히터씨는 잘생겼다?”

 마하가 코웃음 쳤다. 놀랍게도 마하는 그 소리마저 예뻤다.

 “이것도 아니라면 뭘까요, 이렇게 멋진 사람과 함께 있는데 딴생각을 할 리도 없고.”

 악단의 연주는 주 멜로디를 마치고 다시 후렴구에 들어섰다. 처음 우리가 끼어들었을 때처럼 대형이 다시 원형으로 바뀌었다. 춤을 추던 사람들이 빈자리를 찾아 들어가며 홀이 어수선해졌다, 나는 마하를 이끌고 안쪽의 작은 원에 섰다.

 “힌트 없어요? 다들 나만 보면 뭐라도 더 주고 싶어 하는데 뭔가 알려주고 싶지 않아요?”

 왼쪽 눈을 찡긋거리며 애교를 부려봤지만, 그는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다. 정말로 이 사람에게는 미인계가 먹히지 않는 모양이다. 아쉬워라.

 음악이 흐르고 대형이 완성되자 느긋하게 흐르는 선율에 맞춰 사람들은 파트너의 손을 놓고 원의 안팎으로 벌어져 인사를 했다. 이제 남자가 제자리에서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뒤쪽으로 돌아보듯 스텝을 밟고 왼쪽으로 한 바퀴를 빙글 돌면 그동안 여자가 옆으로 이동해 파트너가 바뀌는 안무였다. 나는 마하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놓지 않았다.

 “직접 졸라주지 않으셔도 제 허리는 이미 코르셋이 단단히 조이고 있어요.”

 마하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속삭였다.

 “아직 답을 듣지 못했어요.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당신만 보고, 당신의 말만 듣고 있답니다.”

 마하의 손에서 힘이 빠지기를 기다려 놓아주었다. 내가 아무 일 없는 듯 안무를 따르자 마하도 안무에 맞춰 추되,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무도회에 익숙한 귀족들은 돌발상황에도 자연스레 자리를 찾아갔다.

 빠른 템포의 음악과 함께 파트너가 한차례 바뀌자 다시 음악이 느려졌다. 사람들은 새로운 파트너와 인사하고 손을 맞잡았다. 물론 내가 잡은 것은 마하의 손이었다.

 “답을 맞힐 자신이 있으니 큰소리를 쳤겠지요?”

 나는 실없이 웃었다. 자신 같은 건 없었다.

 “마하 로즌기프트가 어서 돌아왔으면 좋겠다?”

 마하가 정색했다.

 “농담이 과하군요.”

 “농담에 이끌려온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니지요.”

 “당신의 놀음에 흔들렸다고 생각하나요.”

 “그럴 리가요.”

 원형 대형을 유지하며 안무가 이어졌다. 나는 마하의 가느다란 허리에 깃털만큼이나 가볍게 손을 얹고 있었다.

 “현명한 로즌기프트가의 장녀분이 저 같은 망나니 귀족에게 어디 눈길이나 주시겠습니까. 제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확인하려 하셨겠지요.”

 마하는 싸늘하게 나를 쳐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이번엔 내가 정색할 차례였다.

 “디히터 가는 최근 가주 경쟁이 치열하다더군요.”

 “말 돌리시깁니까?”

 무도회장에서 웃는 얼굴은 무기다. 나는 내 무기를 쉽게 내팽개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알기로는 마하도 그랬고 그게 내가 그에게 느꼈던 동질감이었지만, 대화할수록 느껴졌다. 이 사람은 마하가 아니었다. 마하는 이제 자신이 마하라고 주장하는 것에도 질린 듯했다. 그럼 나는 그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장남이 가주 자리를 물려받기는 하였으나 장녀가 납득하지 못해 소란이 끊이지 않는다는 소문이 로즌기프트의 땅에까지 들려옵니다. 실제로는 들리는 것보다 더하지 않겠어요? 영식께서는 어떻게 건강히 지내고 계시는지요?”

 나는 매일 거울 앞에서 한 번쯤은 지어보는 그대로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살롱에서 만난 부인과 영애들이 항상 보아왔던 바로 그 미소였다. 내가 웃으면 대체로 여인들은 혼이 나간 듯 넋 나간 표정을 했다.

 “겪어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형제간 다툼이라는 게 그렇지요. 제 누이가 보통내기가 아니어서요.”

 마하, 아니, 이름 모를 그는 지금껏 그래왔듯이 내 미소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미소는 가시 돋친 장미보다도 아름답다.

 “세력 싸움에 낀 차남 디트리히는 숨도 못 쉬고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 바쁘다던가.”

 그는 농담처럼 가볍게 읊조렸다.

 “하나뿐인 목숨인데 귀히 여겨야지요.”

 시작을 열었던 경쾌한 음악이 끝나고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곧 상대적으로 템포가 느린 잔잔한 음악이 시작된다.

 “제 누이가 그러더군요. 그 가문에서 가장 능구렁이는 차남 디트리히 디히터일 거라고.”

 마하의 얼굴을 한 그는 평소보다 약간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나는 그제야 마하의 동생을 떠올렸다. 이름이 네만이라고 했던가. 네만 로즌기프트. 그래, 마하에게는 동생이 있었다. 무척이나 사이가 좋은 꼭 닮은 자매라는 소문이 흘러 흘러 들어왔다. 그 존재가 의심될 정도로 목격한 이 하나 없는 동생이었다. 나는 내면의 놀라움이 겉으로 새어 나올까 활짝 웃었다.

 “드디어 제 매력을 알아주셨군요. 제가 보통 뛰어난 게 아니지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대형은 서서히 흐트러졌다. 춤을 추던 사람들은 파트너를 끌어안고 춤을 출 자리를 찾기도 하고, 인사를 하고 헤어지기도 했다. 대형이 흐트러지자 사람이 빠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빈자리가 생기자 느긋하게 파트너와 춤을 즐기고 싶었던 이들이 새로 중앙으로 들어왔다.

 “당신의 누이도 당신을 똑 닮아 아름다운 분이시죠.”

 그가 코로 웃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네만으로 추정되는 내 파트너는 매혹적으로 미소하며 능숙하게 스탭을 밟았다. 그는 정말 춤을 잘 췄다.

 “개와 닭이 지붕을 사이에 두고 다투는데 고양이가 담장을 넘나들며 개도 닭도 이길 수 없도록 이간질을 하고 있다더군요. 덕분에 개는 제대로 대장 노릇을 하지 못한다고요.”

 나는 하하 소리 내 웃었다.

 “과찬이십니다.”

 그는 내 팔 안에서 투명한 보석 같은 눈을 빛내며 우아하게 웃었다. 본디도 키가 크고 자세가 곧은 여인이었다. 나는 나보다 반 뼘이 높은 그와 눈높이를 맞추고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제가 누구라고요?”

 “마하 로즌기프트, 로즌기프트가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후계자이십니다.”

 나는 기쁘게 선언했다. 네만은 눈부시게 웃고 내 팔을 놓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홀 바깥을 향해 걸어갔다. 우리가 춤을 추던 자리에는 다른 연인이 흘러든다. 나는 다급히 그를 따라갔다.

 “그래서 이름은 안 알려주실 겁니까?”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네만이 쏘아붙였다. 홀을 빠져나가려는지 문을 향해 곧장 걸어가는 그의 뒤를 따르며 커튼이 쳐진 발코니의 위치를 확인했다.

 “당신 입으로 말해주지는 않으실 겁니까?”

 “생각해보죠.”

 나는 잠시 고민하고 그대로 네만의 손목을 낚아챘다. 휘둥그레진 눈에 기뻐할 새도 없이 네만을 끌고 발코니로 다가가 커튼을 붙들었다. 이대로 놓치면 결코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당신 입으로 말했지요. 디트리히 디히터는 디히터 가문에서 가장 능구렁이라고. 자, 내가 당신을 놓칠까요? 맞춰보세요.

 “어떠십니까, 레이디. 제게 당신의 소중한 것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움켜쥔 네만의 팔을 느슨히 잡고 커튼을 반쯤 들어 올렸다. 예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나를 바라보던 네만은 곧 손목을 비틀어 빼내고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했다. 어느새 새침하게 돌아온 표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했다. 네만이 발코니로 다가서기에 손을 더 높이 들어 사람 하나가 드나 들만한 공간을 만들었다. 네만은 발코니 앞에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앞으로는 품위 있게 행동하세요.”

 그날 네만의 구두 소리를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으리라.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페리아 파그메의 밤은 아침까지 이어졌다. 가면무도회는 아침까지 이어졌다. 나는 그날 살아생전 다시는 볼 수 없을 밤하늘을 보았다. 가장 크고 빛나는 별이 떨어진 밤하늘은 다시는 세상을 그토록 아름답게 비추지 못했다.

 왕자 인형은 끈이 떨어진 여자 인형을 무대 뒤에 몰래 숨겼다. 망가져 쓸모를 잃은 여자 인형은 다시는 무대에 설 수 없었지만, 연모하던 왕자 인형과 하나가 되었다. 무대에서는 이야기가, 무대 뒤에서는 현실이 우스꽝스럽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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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2편

3편






 유하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뭐라 말을 걸어볼 여유도 없이 음식이 나왔다. 회전율이 좋은 가게답게 입가심을 위한 전채 요리는 거의 대기시간이 없었다. 정성스럽게 플레이팅된 핑거푸드는 작품처럼 예뻤고 다시마 말이와 연어가 들어간 월남쌈은 비린내 없이 담백했다. 괜찮은 음식점이었다. 유하가 간단히 코스 설명을 대신했다. 메인 요리를 해치우기까지 우리는 거의 대화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유하는 식사 중에 말이 없는 편이었다. 광어 캐비어, 샐러드, 밤으로 만든 수프, 흑마늘 갈비찜과 봄나물로 만든 김치, 송로버섯이 들어간 대보름 밥으로 이어지는 코스가 차례차례 지나갔다. 맛있는 음식을 먹다 보니 불편한 기분도 차츰 나아졌다.

 차츰 배가 불러오자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유하는 내 섣부른 고백과 사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대화는 평소와 다름이 없어서 나는 완전히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디저트가 나왔을 때쯤에는 아까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거의 잊어버렸을 정도였다.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잠시 소재가 떨어져 이야기가 멈춘 사이, 유하는 뜬금없이 그렇게 말했다. 상황을 잊어가던 나는 깜짝 놀랐지만, 유하는 담담하기만 했다.

 “연우 씨가 제게 사랑한다고 한 게 무슨 의미인지, 방금 한 사과가 무엇인지 솔직히 모르겠어요.”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느낌이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까.

 “가족으로서 정을 말씀하신 게 아니라면, 저는 남자입니다. 연우 씨도 마찬가지고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목적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하실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하는 시선을 내려 테이블을 보았다. 일반적으로 예쁘고 귀엽게 꾸며지는 디저트와 달리 시커먼 덩어리가 있다. 접시를 들고 온 점원이 으깬 고구마에 팥앙금을 묻힌 거라고 설명한 음식이었다. 유하는 자기 잔에 차게 식힌 오미자차로 입술을 적혔다.

 “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 말에 나는 제일 먼저 안도하고 말았다. 저 입에서 남자라는 말이 나왔을 때, 부드러운 거절이라고 확신하고 있던 탓이었다. 유하는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었다. 어쩌면 나는 현명한 판단을 했던지도 몰랐다. 시간은 걸렸지만, 이 정도로 부드러운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래. 급하게 생각하지 마.”

 나는 바로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유하는 내 눈을 들여다보았고, 나 역시 그랬다. 우리는 말 없이 서로의 심정을 눈에서 읽었다. 곧 유하가 나직하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나는 괜찮다고 답했다.

 그대로 일어나기엔 아직 남은 음식이 있어 우리는 테이블에서 시간을 더 보내야 했다. 대화는 일상으로 옮겨갔고, 자연스럽게 연아와 세하 이야기가 나왔다. 결과적으로 유하와 나를 이어준 두 사람이었다. 내 동생 지연아와 유하의 쌍둥이 동생 임세하는 대학 진학 후 각자 집에서 독립해 동거 중이었는데, 동생 걱정이 많은 형이기는 나나 유하나 마찬가지라 우리 대화에 두 사람이 빠지는 일은 드물었다. 유하가 정기적으로 들러 상황을 봐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으면 허락하지도 않았을 동거였다.

 연아는 독립심이 어찌나 강한지 가족끼리 만나도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유하에게 많은 부분을 의탁하고 있었다. 유하와 세하가 어떤 사인지는 모르지만, 유하가 그 집에 자주 들르는 건 확실했다. 어떤 면으로는 연아와 한집에 살 때보다 유하에게서 듣는 연아 이야기가 더 많은 것 같기도 했다. 유하는 연아가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 잠버릇과 좋아하는 색과 음악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일부는 나도 알고 있었지만,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유하가 나도 모르는 사실을 알아오는 건 놀라웠다.

 유하는 아무리 바쁜 와중에도 항상 두 사람의 집에 들렀다. 집안일을 돕고 생활편의를 챙기는 모양이었다. 가끔 만난 세하가 불평하는 걸 들어보면 굉장히 세심한 부분에까지 유하의 손길이 닿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게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나 회복 중인 연아를 위해 따로 음식이나 한약을 챙겼다. 과한 참견이 아닌가 싶으면서도 마음이 고마웠다.

 오늘도 유하는 연아가 동아리에 가입했으며 성실하게 참가하고 있다는 완전히 새로운 소식을 가져왔다. 한 달은 지난 일이란다. 유하는 내가 모르는 쪽을 신기해했다. 연아는 정말로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연아는 회화동아리에 들어가 처음으로 그림을 배우며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에 사로잡혀있었다. 나는 조만간 연아에게 좋은 그림 도구를 선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유하가 계산을 하는 사이 나는 먼저 밖에 나와 기다렸다. 저녁이 다 된 길거리에는 사람이 많아졌다. 공간이 없어 사람과 자주 부딪혔다. 유하와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반소매 아래로 맨살이 닿을 때마다 끈적한 느낌이 들었다. 괜히 유하 표정을 살폈다. 특별히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스쳐 가는 간판에는 하나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우리는 이르게 거리를 빠져나왔다. 유하는 음주를 전혀 하지 않아서 시간이 늦으면 갈 곳이 없었다. 일자리에서 어쩔 수 없이 입에 대는 것 외에는 식사에 곁들이는 와인도 거의 하지 않았다. 다음날을 위해 이르게 헤어지거나 집에 들어가서 담소를 나누다 헤어지는 게 통이었다.

 주차장 입구 간판에도 불이 들어왔고 자리는 꽉 차서 만석이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바로 차를 찾았다. 서로 들어온 위치와 앉을 좌석이 맞지 않아서 자리를 바꿨다. 안전띠를 매는 동안 다시 한번 팔뚝이 스쳤다. 유하가 닿은 쪽 팔을 자기 쪽으로 당겼다. 의식한 동작인지 의식하지 않은 동작인지 알 수 없었다. 유하는 평소처럼 무덤덤한 표정이었고, 나는 굳어버렸다.

 차 키를 꽂고 시동을 걸 때까지 나쁜 생각에 사로잡혔다. 완곡한 불쾌함의 표현인지 자연스러운 동작인지 알 수 없었고, 여름철 무더위로 인한 불쾌함인지 나와 살이 닿은 것에 대한 불쾌함인지도 알 수 없었다. 유하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너무 의식하고 있는 거라고 자신을 타일렀다. 나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거의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내가 조용하니 유하도 말이 없어서 귀갓길은 아주 조용했다. 우리는 짧은 인사로 만남을 끝냈다. 나는 올라가다 말고 서서 유하가 탄 차가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뒤를 지켜보았다.

 근 반년이 지났다. 유하와 나는 그 이후로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 유하가 바쁘기도 했고, 나 역시 공부에 매진해야 할 때였다. 게다가 내가 마음이 불편해서 만나자고 하기가 힘들었다. 유하도 만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연락은 꾸준히 주고받았다.

 󰡔오늘 애들 보러 가요󰡕

 󰡔안부 전해줘. 특히 세하한테. 연아 울리면 각오하라고󰡕

 󰡔그럴게요󰡕

 유하의 메시지는 담백하다. 잡담을 거의 하지 않았다. 사진이나 일상 이야기도 없어서 평소에는 거의 내가 먼저 보낸 메시지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하루에서 이틀 간격으로 갱신되던 메시지가 일주일에서 한 달 간격으로 변한 것은 반년쯤 전부터였다.

 나는 아직도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하지 못했고, 유하는 말이 없었다. 나는 나대로 공부에 매달리고 유하는 회사 일로 바빴다. 유하는 한가할 때가 별로 없었다.

 덕분에 충실한 하반기를 보내며 나는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순조롭게 챕터를 넘어가며 가끔 아버지 회사에 들러 일을 도왔다. 돈이 필요했다. 일하면 할수록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내 소유가 될 회사, 넘겨받을 때가 되었다.

 며칠 전 연아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정기적으로 만나 함께 저녁을 먹는 날이었다. 나는 졸음에 취한 상태로 스마트폰을 들었다. 연말이 가까우니 저녁을 취소하고 조만간 다 같이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미리 써놓고 아침에 맞춰 보낸 예약 문자 같았다. 뺀질거리며 웃는 세하의 얼굴이 떠올라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연아를 차지한 건 물론이요, 만만치 않은 성격도 있어 예뻐하기 힘든 녀석이었다. 나는 콧방귀를 한 번 뀌고 수긍하는 답변을 보냈다. 연아가 곧 날짜와 함께 집으로 찾아오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미리 정해놓고 인제야 통보하는 티가 났다. 유하는 참석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일이 있어 늦을 예정이란다. 그 말은 유하에게도 먼저 말을 했다는 소리다. 연아가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게 나라니 기분이 상했다. 그래도 티는 내지 않고 알았다고 답했다.

 세하와 연아의 집으로 향하기 전에 먼저 이맘때쯤 만나면 교환하는 연말 선물을 챙겼다. 연아 선물을 최우선으로 고르고, 유하와 세하 선물도 골랐다. 연아 것은 붓 세트, 유하에겐 커프스단추와 넥타이, 세하를 위해선 전부터 고민하던 새 마이크를 샀다. 거기에 먹고 마실 걸 사니 짐이 제법 많았다. 나는 차를 탈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어서 와.”

 내가 마련해준 맨션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자 연아가 나왔다. 나는 연아에게 음식이 짐을 떠넘겼고, 연아는 물건을 들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보이는 실내는 하얀 톤으로 깨끗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민무늬 벽이었다. 벽지를 선택한 건 연아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쭉 병실 같다고 생각했지만, 연아에게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연아가 좋으면 됐지 병실 같은 게 무슨 상관일까.

 “뭘 이렇게 가져왔어.”

 세하가 내가 가져온 간식과 주류를 들고 말했다. 시선이 백 안에 고정된 걸 보니 반가우면서 하는 소리였다. 나는 세하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함께 사는 멘션은 적당한 개조를 거쳐 현관에서는 집안이 보이지 않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두어 발짝 안으로 들어갔을 뿐인데 시야가 탁 트였다. 전체적으로 하얀 색조에 가구가 적어 남는 공간이 많은 집이었다. 그래도 가구는 전보다 늘었다.

 한쪽 구석에 창을 등지고 서 있는 건 누가 어느 모로 보나 명백한 캔버스였다. 연아가 그림을 배운 뒤로 들여놓은 물건이었다. 위가 천으로 덮여 있어 뭘 그리다 말았는지는 보이지 않았고, 옆에는 그림 도구가 가지런히 정리된 서랍장이 있었다. 거기서 연아의 행복이 느껴졌다.

 책장도 몇 개 늘어났는데 책장마다 책이 꽉꽉 채워져 있었다. 두꺼운 전공 서적이 반, 취미 삼아 모아놓은 것 같은 책과 CD가 반이었다. 제목을 훑고 헤드폰이 같이 걸려있는 걸 확인했다면 이게 세하의 물건이라는 걸 놓칠 수가 없었다.

 입구 근처, 현관을 열지 않으면 아예 보이지 않는 사각에 들어간 부엌에는 사람을 불러 시킨 게 분명한 음식이 예쁜 무늬가 수 놓인 덮개에 가려져 있었다. 매년 비슷한 행사를 거치니 다들 요령이 생기고 있었다.

 집안을 대충 살피고 거실로 향하자 연아와 세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연아는 세하에게 허리를 붙들려 몸을 밀착한 채로 속삭이듯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자세가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러워서 머리가 아팠다.

 “피곤하진 않아?”

 “아무것도 안 했잖아.”

 “그래도 힘들면 말해.”

 “응.”

 연아와 달리 세하는 가까이 다가온 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씩 웃으며 연아에게 입을 맞추는 게 얄미웠다. 솜털 같은 키스였지만, 입술에 남기는 입맞춤이 이성간 교제의 말하는 건 명백했다. 화가 나고 동시에 우스웠다. 어이가 없어 웃어버리니 세하는 곧 포옹을 풀었다. 연아는 조금 느리게 세하의 몸에서 떨어져나왔다. 아쉬운 듯한 동작이었다.

 “요즘 어때. 유하랑 안 만난다며.”

 세하가 말했다. 나를 의식하긴 하고 있었나 보다.

 “유하가 바쁘잖아. 나는 공부하니까.”

 “시험은?”

 “아슬아슬하게 과락. 올해는 분위기 볼 겸 본 거니까 내년에 잘해야지.”

 세하와 잠깐 밀린 이야길 나누는 사이 연아가 쟁반에 물과 쌀과자를 담아왔다. 당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담백한 과자에 꽃봉오리 같은 찻잔에 물을 마시며 우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림은 할 만해?”

 내가 물었다. 그러고 보면 연아가 자기 입으로 그림 그리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벌써 반년이 넘게 그리고 있으면서 한마디도 제대로 해주지 않는 게 서운했다.

 “재밌어. 이런 게 재밌을 줄 몰랐어.”

 연아는 천으로 덮어놓은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요즘은 정말 그럴듯해. 성적도 괜찮고.”

 “전공 바꿔보는 건 어때? 하고 싶으면 해도 돼.”

 “그 정도는 아냐. 취미 생활 정도가 좋아.”

 허락을 구하고 캔버스를 열어보자 거기엔 풍경화가 있었다. 어디인지 모를 쓸쓸한 들판이었다. 사람도 나무도 동물도 없고 잔디와 땅에서 흔들리는 빛나는 풀꽃만 빛나는 밤 들판. 땅에서 오른 솜뭉치 같은 빛이 하늘의 별이 되고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 적막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어디야?”

 연아는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있는 풍경이 아니었다. 사진 모작으로 시작한 연아의 풍경화는 상상 속의 풍경을 그려내는 단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매진했다고 하나 겨우 반년. 연아에게 그림의 재능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내가 말을 잃은 사이 세하와 연아는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연아가 그리는 풍경을 놓고 몇 번이나 한 것 같은 대화였다.

 “여행 가자. 가서 보고 그리는 거야.”

 “괜찮아.”

 “가보고 싶은 곳 없어?”

 연아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연아와 변변찮게 놀러 가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에는 너무 어려서 멀리 나갈 수 없었고, 나이를 먹은 뒤로는 서먹해졌다. 같이 여행을 가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려면 다 같이 가야지. 둘이선 안 돼.”

 “요즘 세상에 누가 보호자랑 여행을 가.”

 “내가.”

 “괜찮은데…….”

 세하와 둘이서 여행을 둘이 보내느냐 다 같이 가느냐로 말다툼하는 사이, 현관 벨이 울렸다. 말없이 앉아있던 연아가 가장 먼저 일어났지만, 세하가 연아를 막았다. 세하가 유하를 마중 나가면서 소소한 다툼도 일단락이 났다.

 “늦는다더니?”

 “금방 끝났어.”

 세하가 유하의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가방만 봐도 유하가 회사에 들렀다가 바로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하는 정장 차림에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모습으로 나타났다. 세하는 유하의 가방을 한쪽에 내려놓고 식탁 위에 덮어두었던 천을 걷었다. 유하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았다.

 연말의 시작이었다.

 네 사람이 연말에 자리를 함께하게 된 건 이것으로 세 번째. 연아와 세하가 만난 지는 거의 오 년이 흘렀다. 고마운 일도 원망스러운 일도 있었다. 재작년에 세하를 봤을 때는 몹시 화가 났다. 처음에는 연아를 다치게 만든 게 세하라고 오해했고, 그다음엔 갈 곳 없는 분노를 쏟아낼 곳이 세하 밖에 없었다. 보호자로 자처하고 나선 유하는 가여웠지만, 나는 쉽게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형제와 나 사이의 골은 꽤 깊게 새겨졌다.

 겨우 되찾은 즐거운 연말은 다행히 분위기가 괜찮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유하와 어색하지는 않을까 염려한 것이 무색했다. 우리는 근사한 와인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둘러앉아 간식을 먹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겨워지면 게임을 꺼냈고 게임이 지겨우면 영화를 틀었다. 밤이 지나고 태양이 오를 때까지 그렇게 보냈다.

 파티 끝난 건 첫차가 출발하기 한 시간쯤 전이었다. 나와 유하는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섰다. 연아와 세하가 차를 세운 주차장까지 마중을 나왔다.

 “조심해서 들어가. 들어가면 연락하고.”

 “들어가. 갈 테니까.”

 “본격적으로 배워보고 싶으면 꼭 말해. 지원해줄게.”

 “괜찮아.”

 유하가 끌고온 차를 내가 운전했다. 유하는 아직도 와인의 여파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저녁 이후로 술은 전혀 입에 대지 않았는데도 피곤해 보였다. 단순히 그동안의 피로가 터진 여파일 수도 있지만, 유하에게 맡기긴 위험했다. 저번에 얻어먹은 게 있으니 그 대가라며 유하를 뒤로 밀었다. 유하는 뒷자리를 거부하고 조수석에 앉았다.

 유하는 조수석 의자 등받이를 뒤로 기울이고 등을 기대자마자 눈을 감았다. 저렇게 피곤한 얼굴을 하고선 무슨 운전을 하겠다고. 세하와 연아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시동을 걸었다.

 “저번에 말씀드린 거 있잖아요.”

 유하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 무대 감독 일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유하가 찾아와 털어놓은 사연이었다. 꼭 환심을 사둬야 하는 유명 무대 감독이 자길 건드린다는 이야기. 갑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연유가 짐작이 갔다.

 차는 부드럽게 굴러 주차장을 나왔다. 나는 큰길을 향해 핸들을 꺾었다. 날은 아직 어슴푸레하고 어두워서 전조등을 켰다. 밝기만 보면 완전히 밤이었다.

 “성희롱으로 고소당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동안 조용했는데 누가 피해자를 모았나 봐요. 수가 꽤 된다네요.”

 유하는 내게 하는 말인지 혼잣말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나직하게 말했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

 “그런데 듣자 하니 고소 준비에 들어간 게 올 팔월이라고 하던데요.”

 앞에 보이는 신호가 빨간 등으로 바뀌었다. 나는 고민 끝에 액셀을 밟았다. 좌우에는 사람이 없었고, 이 길은 한 번 신호에 걸리면 벗어날 때까지 쭉 신호에 걸리게 되어있었다. 시야가 시원하게 흘러갔다.

 “타이밍이 안 좋았구나. 너무 속상해하지 마.”

 유하는 잠이 들었는지 말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자라고 말을 아꼈다. 다음 신호등은 파란색이었다.

 “괜찮아요.”

 유하는 그렇게 말하고 집에 도착하기까지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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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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