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기이한 만남은 더위에서 시작되었다. 갈수록 종잡을 수 없어지는 이상기후들 속에서 배신하지 않는 명제가 있다면 여름은 뜨겁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전보다 더 뜨겁고 더 길어진 여름 어느날. 하루는 보았다.
눈을 의심한 것은 맨 눈으로 나다니기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따가운 햇빛 아래였던 탓도 있었다. 그것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 짧은 순간 보였다가 사라졌다. 눈부심과 혼란 속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뜨는 짧고도 긴 시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몰랐다. 하루는 당황 속에서 두어번 눈을 감았다 떴다.
눈 앞에 선 것은 키가 그리 크지 않은 하루의 시야에 정수리가 훤히 보이는 조그마한 여자아이였다. 여자아이라고 확신한 것은 유난히 작은 덩치와 같은 학교 교복, 그리고 덥수룩하게 보이는 단발머리 탓이었다. 대낮 중 유난히 해가 잘 드는 위치라 여름이면 사람이 거의 찾지 않는 교내 벤치 쪽이었다. 고등학교가 다 그렇듯 시야를 가릴 것도 없으나 건물 배치 탓에 사람이 오가는 길목에서는 약간 외지게 느껴지는 장소였다. 달리 말하자면, 하루도 의도한 건 아니었다.
“어…….”
안녕하세요, 를 입에 담기도 전에 여자아이가 튀어나가듯 자리를 박찼다. 그렇게 서두르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엄청난 속도였다. 체육대회 반대표 정도는 쉽게 할 것 같다. 하루는 눈을 꿈뻑였다. 잠깐 사이 일어난 일에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였다.
그 애가 사라지고 하루가 무얼 하러 어디로 가다가 그 자리에 섰는지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쯤 종이 쳤다. 하루는 멍하니 생각했다. 방금 그게 뭐였지.

선생님의 꽁무니를 쫓듯 교실에 다다라 아슬아슬하게 자리에 안착한 하루는 핀잔을 주는 선생님의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아까 본 광경을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이한 장면이었다. 대체 내가 뭘 본 거지?
그 좁은 자리에 휘몰아치던 바람. 흩날리는 머리칼. 이리저리 흔들리는 옷자락과 바람에 실려 휘도는 이파리, 모래, 자갈들. 그 중심에 서서 바닥에서 한 뼘은 떠올라 있었던, 조그만 여자아이.
꿈 같은 풍경이었다. 벌써 이 년 넘게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낯설다고 느껴지는 풍경을 목격한 게 얼마만인지 몰랐다. 진행 중인 수업이 흘러나갔다. 낯익은 정경에 특별히 눈길을 준 적이 없기는 하지만 오늘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날도 없었다. 언제 수업이 끝났는지 어떻게 친구들과 헤어져 교실을 나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루의 눈은 아직도 점심 시간에 보았던 벤치와 휘몰아치는 바람을 보고 있었다.
어느샌가 하루는 우두커니 서있었다. 정확히 아까 그 자리였다. 지나가다보면 곁눈으로 벤치가 흘깃 보이는 구석자리. 정확히 같은 각도로 같은 장소를 바라보았다. 조용했다.
넋을 놓고 선 하루를 지나가던 친구들이 한대씩 툭툭 쳤다. 하루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말을 걸어보려는 친구가 두엇 있었으나 하루의 무심한 대응에 금세 멀어졌다. 하루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썰물처럼 학교를 빠져나가는 학생들의 물결이 사그라들고 나서야 하루는 움직였다.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벤치로 다가선 것이다. 정오가 지나고 햇빛이 사그라들자 겨우 사람이 머물만해진 벤치는 아직 열이 오른 채였다. 햇살이 완전히 물러간 것도 아니었다. 하루는 삐질삐질 흘러나온 땀을 한 손으로 훔쳤다.
말을 거는 사람도 지나치는 사람도 사라지자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하루는 생각했다. 잘못 봤겠지.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하루는 마지막으로 여자아이가 서있던 곳, 그러니까 떠있는 소녀의 발이 닿았을 법한 곳에 섰다. 그 아이와 제 키차이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 줄은 모르나 내려다보인 것을 생각하면 그 아이의 눈길이 닿았던 곳이 지금 하루가 보는 곳과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하루는 나무 앞에 섰다. 바람에 휘감긴 소녀가 바라보던 나무였다.
그건 그냥 나무였다. 특별한 것도 없었고, 눈에 띄는 것도 없었다. 하루는 눈 앞의 나무 줄기를 유심히 뜯어봤으나 그 애가 무얼 보고 있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굵은 가지가 갈라져 있었다. 먼지가 쌓였다. 나무껍질은 울퉁불퉁 거칠게 생겼다. 가끔 까진 자리가 있다. 이파리는 조금 위쪽에 있는 잔가지에 있어서 여기엔 정말 볼 게 없었다. 힘이 쪽 빠졌다.
하루는 콧방귀를 한 번 뀌었다. 흥.
훽 돌아섰다. 그대로 학교를 빠져나갔다.

수험생의 하루는 온종일 실내에서 흘러간다. 책상 앞에 오래 앉아있을수록 대학을 잘 간다는 믿음은 수험생의 일상을 일종의 종교 수행처럼 만든다. 진리를 쫓는 구도자 같은 자세로 줄줄이 앉은 아이들을 잔뜩 실은 채로 수업은 둥실둥실 흘러갔다.
하루는 그날 끝내 공부에 집중하지 못 했다. 그러면서도 수험생의 자격에 대한 의문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머릿속은 점심 시간의 일로 가득하다. 잘못 본 걸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하지 않았다. 그런 착각을 하기엔 그 순간이 너무나 선명했다.
그 애는 대체 누구였을까. 교내에서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으니 같은 학교인 건 분명하고,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같은 학년일 가능성은 적었다. 유난히 조그만 것을 보면 일학년일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워낙 자그마하니 그럴 것만 같았다. 순간적으로 보였던 얼굴은 선명하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색소가 엷은 인상이었다는 것만은 기억이 났다. 크게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만, 뭔가 느낌이 그랬다.
건널목 앞에 서서 뺨을 간질이는 바람만으로도 그 애 생각이 났다. 바람이 엄청나게 불기는 했지만, 그 애가 떠올랐던 게 정말 바람 탓이었을까? 바람이 사람을 그렇게 안정적으로 띄우는 게 가능한 일일까? 가벼운 몸에 날개를 넓게 펼칠 새들마저도 기류를 타야만 날 수 있는데 바람이 그런 식으로 사람을 공중에 띄울 수는 없지 않을까.
그럼 역시 잘못 본 걸까? 그럴 리는 없었다. 하루가 하루 스물 네시간 안에 가장 정신이 또렷했던 게 그 순간이었다. 잘못 본 거라면 그게 더 이상했다.
하루종일 그 애 생각을 한 탓인가. 옆에 선 사람이 그 애처럼 보였다. 교복은 아니었지만 조그만 몸집이나 부스스한 머리모양이 꼭 닮았다. 그 애면 좋겠다고 하루는 무심히 생각했다.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고 그 애를 닮은 사람이 앞서 걸었다. 날씬한 등을 지켜보던 하루는 갑자기 어떤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대로 발뒤꿈치를 강하게 찼다.
“잠깐만요.”
분명 점심에 본 광경은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는 일도 평범한 일은 아니다. 인간 은하루는 결코 처음 보는 사람의 팔을 덥썩 잡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은 벌어졌고 붙들린 사람이 고개를 돌린 순간, 하루는 어떤 벼락 같은 감각이 온몸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아마도 환희라고 불릴 감정이었다.
“찾았다!”
하루는 외쳤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이쪽으로 쏠린 건 어쩔 수 없었다. 횡단보도 한 중간에서 멈추어버린 탓에 뒤늦게 신호를 따라 달려야 했음은 물론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엔 중요하지 않았다. 하루의 만면에 웃음꽃이 피었다. 잔뜩 들뜬 목소리로 하루가 말했다.
“너를 찾고 있었어.”
바람이 불었다. 그 애의 단발머리에서 삐져나온 잔머리들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다행히 그 애는 하루의 손을 뿌리치고 달아나지는 않았다. 그저 조그맣게 말했을 뿐이다.
“놔줘.”
거의 동시에 빠앙하고 경적 소리가 울렸기에 하루는 손을 놓기보다는 붙들고 달렸다. 그래도 강한 힘은 아니었다. 빼내려면 얼마든지 빼낼 수 있었지만 그 애는 얌전히 하루를 뒤따라왔다.
길 건너에 이르러 자연스럽게 손이 풀렸다. 대신 하루는 그 애를 마주볼 수 있었다. 그 애는 말이 없었지만 대신 눈을 똑바로 뜨고 하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감이 들 정도로 오롯한 시선이었다.
하루는 말했다.
“난 하루야. 은하루. 점심에 봤지?”
그 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는 벙긋 웃었다. 그 애가 자길 기억하는 게 하염없이 기분 좋았다.
자기 소개도 했겠다, 그 애의 이름도 물으려 했다. 그런데 그때 그 애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어리둥절해 눈만 껌뻑이자 그 애가 여전히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이쪽.”
그리고는 앞서 걷는 것이다. 집에 가야한다는 생각과 어서 따라가야한다는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하루는 재빨리 걸었다. 그 애의 작은 등을 쫓아서였다.
길을 가며 하루는 몇 번이나 말을 걸었다. 대답은 하나도 듣지 못 했다. 그 애는 하루가 말을 걸 때마다 하루를 바라보았지만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루는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끝까지 따라갔다가 장기라도 팔리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걸음을 늦출 생각은 들지 않았다.
타박타박 걸어서 도착한 곳은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골목이었다. 사람 대신 바람이 소란스러운 곳. 그 곳에 선 아이가 마침내 걸음을 멈추고 하루를 돌아보았다.
“바람, 좋아해?”
그 애가 물었다. 하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뭐라고 말해야할지 몰라 대답할 수 없었다.
“얘들은 네가 좋대.”
그 애가 웃었다. 배시시 작게 시작되어 만면 가득 피어나는 웃음이었다. 눈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활짝 웃는 낯으로 그 애가 말했다.
“나도 네가 마음에 들어.”
하루. 은하루. 그 애가 속삭였다. 시끄러운 바람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리는 게 이상했다.
“나는 잎새야. 잘 부탁해.”
잎새가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고는 하루를 향해 날아왔다. 마치 바람에 떠밀리는 듯한 움직임으로.
“잘 부탁해.”
윙윙 바람이 불었다. 귓가가 소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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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상하다면 캐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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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송태원은 침잠한 눈을 무의미하게 들었다. 아롱거리는 빛무리가 시선을 현혹하려 들었다. 그것을 어렵지 않게 무시하며 똑바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본다. 연한 갈색 눈이 장난스레 휘어졌다.
“언제까지 그렇게 딱딱하게 있을거야. 좀 쉬라니까.”
“지금이 편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그의 시선은 한 손에 든 와인잔을 향해 있다. 은은하게 밝혀둔 조명 탓에 검게도 붉게도 보이는 와인을 가는 눈으로 바라보며 기분 좋게 웃는다. 어지간히도 기분이 좋은가보다. 하기사 그렇겠지. 그야 늘 그랬으니까.
송태원은 그저 위험분자를 지켜보아야한다는 의무감으로 그를 주시했다. 눈빛은 무심하다. 흔들리지 않는 것은 기술이다. 폭풍우 속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똑바로 서는 것과 같다. 세상은 어지러히 출렁여 멀미가 나는 정도라면 훌륭한 선원이 될 수 있었다.
다행히. 다행히도.
송태원은 타고난 선원이었다. 그는 갑판에서 떨어져나가는 승객을 붙들어 아래층으로 내려보낼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말아쥐었나보다. 눈치채는 것과 동시에 금빛 사슬이 목을 노리고 있었다.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흥을 돋구는 것도 좋겠지.”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성현제는 와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취하지도 않을 술을 마시며 멋을 부리는 낭비를 즐기는 자였다.
“잠시 딴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
재미없다는 듯 그가 실망한 낯을 했다. 한없이 가볍다. 경거망동한다. 그것이 싫었다. 싫지 않았다.
송태원은 눈을 짧게 감았다 떴다. 사슬이 존재감을 감추었다. 무척이나 무료하고 나른한 표정을 한 남자가 고급스러운 호텔에 반쯤 벗은 차림으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이런 장소에 서있는 것도 이제는 익숙했다.
“꼭 조각상이랑 같이 있는 것 같군 그래.”
성현제가 한탄하듯 말했다.
“제가 돌아가겠습니다.”
“그건 안 되지.”
느물거리는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반쯤 떨어졌던 엉덩이가 도로 붙었다. 그가 저리 반응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송태원은 그렇게 했다.
“보고만 있어도 갑갑한 정장은 정말 어떻게 안 되나?”
“제가 나가면 보지 않아도 되실 겁니다.”
“내가 사준다니까.”
“법에 저촉됩니다.”
“까짓거 금액 맞춰주지.”
이번엔 참지 못 했다. 저도 모르게 기분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성현제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길게 눈을 감았다 뜬다. 다시 평온을 찾는다.
“맞출 수 있어. 못할 것 같나? 최소한 색이라도 바꿔보지. 당장 장례식에서 상주를 설 법한 옷만 입지 말자고.”
“더이상 상주 설 일은 없으니 상관없습니다.”
“매일 서고 있는 게 아니고?”
몹쓸 농담이다.
송태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말 없는 비난에 성현제가 어깨를 으쓱한다.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말하지 마십시오.”
“그걸 자네가 책임질 필요는 없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설득할 필요도 없고 설득할 이유도 없었다. 설득한다고 들어줄 상대도 아니었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그 때는 아직, 그래도 조금은, 적어도 지금보다는 그가 연약하고 파괴적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속이 답답해졌다.
그리고 멍청한, 아니, 철없는, 아니, 상냥한 남자는 그런 송태원의 기색을 세심하게 알아차린다. 가만히 닿아있는 시선이 마치 쓰다듬는 듯하다. 송태원은 닿지 않은 온기를 외면하듯 눈길을 돌렸다. 시야에서 남자가 사라지기 전에 그가 일어나 다가온다. 반쯤 외면한 고개를 부드러운 손길로 감싸 돌린다. 손은 그리 따듯하지 않지만,
…….
“송태원.”
“왜 그러십니까.”
아주 조금의 틈새도 들켜선 안 된다. 하지만 틈새가 있다면 어디든 들어오고 마는 것이다. 어두운 새벽의 달빛. 어스름하지만 섬세한. 철저하게도 가냘픈.
갈색 눈동자가 반쯤 가려진다. 그 눈이 살풋 휘었다.
“스읍, 하. 스읍, 하.”
“……뭐하시는 겁니까.”
“어허, 따라해야지. 스읍, 하아. 스읍 하아.”
“떨어지십시오.”
하하. 꾸며낸 기색을 숨기지 않는 웃음소리와 함께 그가 견딜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활짝 웃었다. 뺨을 감싼 손에 약간 힘이 들어간다.
태원아.
귀엽기도 하지. 그런 속삭임이 귓가를 스친다. 못 들은 걸로 쳤다.
“놓지 않으시면 가만히 있지는 않겠습니다.”
“그래?”
그럼 뭘하게? 성현제가 히죽거렸다. 나랑 싸울건가? 도심 한복판에서? 빌딩 24층인데?
안 될 것도 없지. 속으로 생각하며 그저 뒤로 한발짝 물러섰다. 정확하게 동시에 성현제가 한발짝 다가온다. 송태원의 미간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적당히 하십시오.”
“싫은데?”
그가 이죽거렸다. 불쾌한 건지 즐기는 건지 분간하기 힘들다. 둘 다겠거니 하며 조금 빠르게 이번엔 세발짝 물러선다. 역시나 같은 속도로 성현제가 따라붙는다. 뺨에 늘어붙은 손바닥도 그대로였다. 슬슬 맞닿은 피부에서 온기가 전해져온다.
“저도 화낼 줄 압니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가소롭다는 듯 성현제가 비웃었다. 송태원은 답하지 않는다. 그래서? 답할 말은 없었다. 직접 채운 자신의 족쇄. 사랑하는, 나의 무게추.
그저 조금 더 가라앉을 뿐이다.
말이 없어진 송태원을 보고 성현제가 보란 듯이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손이 떨어진다. 미지근한 온기가 뺨에 남았다. 치가 떨리는, 따스한, 손.
규칙적으로 숨을 쉰다. 성현제가 다시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이 되어 휙 돌아선다. 그대로 두어발짝 걷는가 싶더니 번개같이 덮쳐온다. 옷깃이 잡아당겨지고, 몸뚱아리가 맞부딪히고, 뜨거운 체온이 전해진다. 굵은 손마디가 남자의 목을 쥐었다. 박동하는 생명이었다. 명줄을 붙잡힌 남자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놔.”
“…….”
숨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아주 찰나였다. 지독하게 길었다. 천천히 손을 내려놓았다. 손바닥이 화끈거린다. 그가 으르렁거리더니 갑자기 얼굴이 가까워졌다. 무심코 피하는 것을 그가 따라왔다.

하아.

뜨거운 숨이.
얼굴을.
어디를?
깜빡.

세상이 가볍게 멈추었다.

*
입을 맞댄 채로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체감상으로는 영원이 흐른 것만 같았다. 송태원은 그대로 입술을 벌리려다, 그러니까 말을 하려다, 입 속으로 파고든 것에, 그러니까, 뜨거운 열기에, 아.
사고가 얼어붙었다.
그것은 유린의 경험이었다. 갑작스러운 재해에 당황한 사이 해집어놓는다. 그것은 축축하고, 뜨거웠고, 그리고,
싫다.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이곳이 어딘지, 상대가 누군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한 채로 그를 밀어냈다. 전력이었다.
남자의 손이 미련처럼 송태원을 붙들고 있다가 떨어지고, 몸이 하늘을 날고, 창문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비산했다. 황금빛 사선이 차르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뻗었다. 콰드득거리는 소리. 남자의 몸이 다시 튕기듯 돌아왔다. 생각이란 걸 할 겨를도 없이 몸을 피했다. 무너진다. 비명소리. 그제서야 제가 저지른 것을 깨닫고 만다.
파하하하.
그가 웃고 있었다. 기뻐 죽겠다는 듯이. 환희에 찬 얼굴이 빛난다. 송태원의 얼굴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거침없는 공격을 피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의 것과는 완전히 달라진, 괴물의 반사신경.
붕괴는 이제 시작이었다.
송태원의 무딘 뇌가 고민을 거듭하는 사이에도 주먹이 쏟아졌다. 주먹과 사슬만이 오가는 것으로 보아 남자도 진심은 아니었으나….
늦었다.
송태원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그 자리에 엎드렸다. 남자의 주먹도 사슬도 피하지 않았다. 더는 호텔이라고 부를 수 없는 돌더미 위에 납작 엎드렸다. 쇄도하던 강맹함이 그에게 닿기 직전에 멈추었다. 미풍 같은 것이 그의 곰 같은 거죽에 닿았다. 송태원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 했다.
“죄송합니다.”
“……이런 결말이군.”
그 목소리는 마치 실망한 것처럼 들렸다. 그런 거였을까? 송태원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들을 구해주십시오.”
“나는 성자가 아니야.”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영웅도 아니고.”
“괴물이 되지 말아주십시오.”
“사람보다는 괴물에 가깝지 않나?”
“부탁입니다.”
“…….”
달각거리며 돌이 굴러 떨어진다. 남자의 발에 채인 것일 터였다. 그가 다가와 송태원의 머리맡에 섰다. 그걸 느낄 수 있었다.
바로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
툭. 머리 위로 손이 얹어졌다. 힘없는, 어쩌면 다정한 손이었다.
“일어나주지 않겠나?”
슬픈 것도 같다. 비참하도록 외로운 괴물의 음성. 그것이 너무 쓸쓸해서 송태원은 그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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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이것은 자신의 목숨과 바꿔서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자 했던 누군가의 기록이다. 자신의 위대함에 가려져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의 기록이기도 하다. 모자란 내 글솜씨로 담아내기에는 복잡하고 수수께끼 같은 구석이 많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시도하지 않으면 이 일은 시간 속에 묻혀버릴 것이 분명하기에 미진한 솜씨나마 글쓰기에 매진해본다. 이 글을 읽는 이가 부디 이 기록이 사건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평생 음악만을 바라보고자 했던 내 글솜씨는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어 도무지 전말을 제대로 전할 자신이 없다.

 

*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백지를 두고 오랜 시간 고민을 거듭했다. 나는 이 일의 직접적인 관계자도 아닐 뿐더러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정렬하는 데에 애를 먹고 있다. 그렇다고 시간 순으로 있었던 일을 나열할 뿐이라면 이 사건에 얽힌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겪었고, 얼마나 서로를 아끼고 있으며, 서로를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지 전달되지 않겠지. 그래서는 이 기록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 내게 선택지는 하나 뿐이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낮이면 쥐죽은 듯 고요해지는 사쿠마 저택에 손님이 찾아왔다. 깨어있는 이가 없어 그 손님은 뙤약볕 아래 오랜 시간을 서있었다. 어찌나 더웠는지 줄줄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다가 끝내는 잠시 자리를 비우기까지 했다. 두어시간 후 나타난 그의 손에는 얼음으로 꽉 채운 일회용 컵이 들려있었다. 찰랑이는 것은 붉은 기운이 도는 투명한 액체다. 그는 높은 대문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한 번 침착하게 초인종을 눌렀다. 집 안에서 종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전자기기가 내보내는 음이라기엔 지나치게 고전적이고 으스스한 소리였다.

이번에도 기척은 없었다. 손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찰나, 그제서야 집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딸깍하고 문이 열린다. 다른 집에 비해 두 배는 넓은 현관 위 차양이 길게 그늘을 드리웠다. 현관 문을 열고 나오는 이의 팔이 창백했다. 먼저 튀어나온 것은 검은 양산이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낮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새카만 어둠 속에서, 붉은 빛이 번쩍 빛났다.

손님은 순간 놀라 눈을 부빈다. 천천히 문이 닫히며 짙은 어둠이 물러갔다. 여전히 그늘 아래 선 이는 등지고 있는 어둠과 비견될만한 검은 머리칼을 어깨 위에 흩어놓은 채 양산을 폈다. 검은 양산이 펼쳐지며 그 주인을 가렸다가 올라갔다. 머리 위에 그늘을 얹고 그가 다가왔다. 붉은 눈동자가 똑바로 앞을 향한다. 철창 너머에 선 손님은 꿀꺽 침을 삼켰다. 이슬 맺힌 컵을 다른 손으로 바꿔쥔다.

“어서오시게나. 이렇게 이른 시간에 손님이 찾아올 줄은 몰라 실례를 범했구려.”

살풋 휘어진 눈꼬리가 야살스럽다. 기이한 분위기를 버티지 못 하고 손님은 뒷목을 더듬는다. 분명 더위 탓에 맺힌 땀방울이 싸늘했다. 붉은 입술이 저주인지 유혹인지 모를 속삭임을 뱉어낸다.

“보아하니 본인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인 듯 한데, 무슨 일인고? 이 사쿠마 레이에게 남몰래 구하고 싶은 조언이라도 있는가? 보아하니 우리 리츠를 찾은 건 아닌 듯하고.”

얇은 입술 사이로 빨간 혀가 튀어나왔다. 슥 훑는다.

“이 몸에게 피라도 바칠 요량으로 찾아왔는가?”

히죽. 웃는 모양새가 아찔하리만치 매혹적이었다.

 

그, 아니 그것은 지독하게도 향이 진하다. 낯선 이가 그 자 앞에서 완전히 굴복하고 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그를 동정한다. 나 역시 사쿠마 레이 앞에 서본 일이 있기에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자 앞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틀림없이 많은 것을 각오하고 준비했겠지만, 사쿠마 레이라는 마성은 모든 각오와 준비를 무용하게 한다. 나를 믿어라. 나는 그 자 밑에서 몇 년을 굴렀다. 세상 어느 누구도 사쿠마 레이가 무심히 흘리는 한 마디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손님, 아니, 이제는 제대로 이름을 불러주자. 다카기 사토시는 그 날 처음으로 사쿠마 레이를 보았다. 희고 창백한 메마른 소년. 무성한 소문으로 이루어져 있던 사쿠마 레이라는 존재의 실체였다. 짙은 어둠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요괴 같기도 하고 그저 평범한 또래의 소년 같기도 한 그가 거기 있었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희고 창백한 몸체에 붉은 눈과 입술이 선명했다.

반기는 듯도 하고 경계하는 듯도 한 오묘한 미소가 철창 바로 건너편에 섰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다카기는 순간 빈 손을 움켜쥐었다. 충동적으로 올라가는 손을 거머쥐고서야 겨우 입을 뗀다.

“잠깐 시간을 내…줘.”

어물어물 목소리가 작아졌다. 이렇게 얕보이려 온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선을 빨아들이는 요물 앞에서 어떤 머리가 제정신을 차릴 수 있으랴. 다카기는 순간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러 왔는지조차 잊을 뻔했다는 사실을 깨닫곤 깜짝 놀랐다. 입이 구걸한 것은 그와 보내는 시간이었다. 사쿠마 레이라는 환상종의 요괴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 것은 몸인가 마음인가. 분명한 것은 이렇게 흘러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다카기는, 아직 성인이 되기엔 너무 앳된 소년은 남몰래 혀를 깨물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꼭 전해야할 말이 있어. 날 들여보내줘.”

흘긋. 주변을 살피는 눈길이 초조하다. 붉은 눈이 그 모양을 가만 지켜본다. 얄궂게도 매혹적인 시선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다카기의 전신을 훑었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가늘고 섬세한 것이 훑어내리는 듯한 감각에 그가 부르르 떨었다. 사로잡힌 듯 옴쭉달싹할 수 없다. 식은땀과 이슬로 눅눅해진 홀더 너머로 녹은 얼음이 무너지며 작은 파도가 일었다.

“그럼세. 학우를 문전박대할 수야 없지.”

활짝 웃는 얼굴이 꽃처럼 화사했다. 붉은 눈동자, 그 붉고도 아찔한 시선 위로 검은 속눈썹이 드리웠다. 흐읍. 다카기는 헐떡였다.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숨이 찼다. 검은 양산이 느리게, 어쩌면 그저 그렇게 느껴질 뿐인지도 모르지만, 사쿠마 레이의 얼굴을 감췄다. 희고 날카로운 턱과 가느다란 목이 검은 차양막 아래로 사라진다. 검은 셔츠 아래로 하얀 팔이 늘어졌다. 골반께에서 주름진 티셔츠 아래로 조그만 엉덩이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무엇하는가. 들어오지 않고.”

붉은 입술이 웃고 있었다. 언제 열렸는지도 모를 대문 너머로 발을 뻗는다. 보이지 않는 선을 넘는 순간 다카기는 깨달았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버렸다.

무심코 돌아보았다. 햇살이 따가웠다.

 

*

분명히 언급해둔다. 나는 이 일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모든 상황에 함께하지도 못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을 남기는 것은 이 일이, 그의 희생이 알려져야 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내게는 사쿠마 레이, 그가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는지 알려야만 하는 의무가 있다.

 

사쿠마 저택은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만큼 어두웠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모조리 차단되어있는 탓이라고 그가 설명했다.

“거동하기 쉽지 않겠지. 미안하네. 빛을 들일 수가 없어. 이 이상 소란을 피웠다가는 모두의 잠을 깨우게 될 게야. 자네도 소란을 원치 않는 듯하니 양해 부탁함세.”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의 하얀 손 밖에 없고 들리는 것이라고는 그의 목소리 뿐이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울렸다. 제 귀 밖으로 나갈 리 없는 소리임에도 조마조마하다. 그가 키득키득 웃었다.

“이거 곤란하구만.”

목소리에 숨결이 섞여있었다. 하아. 옅게 퍼지는 숨소리에 뒷목이 바짝 당겼다.

“진정하게.”

숙녀를 에스코트하는 점잖은 신사처럼 가볍게 받치고 있던 손이 갑자기 다카기의 손을 덮었다. 차고 메마른 손이었다. 긴장으로 달아오른 손의 열기를 앗아가듯 위아래로 싸늘한 냉기가 서렸다.

“혈기왕성하구만.”

분명 다카기에게 한 말은 아니었다. 그는 마치 할머니가 손주에게 하듯 한 손으로 부드럽게 다카기의 손등을 쓸어내렸다. 다독이듯 다정한 손길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희미하게 들리는 건 어쩌면 입맛을 다시는 소리일까.

차가운 손가락이 팔목을 타고 올라왔다. 서늘한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다카기가 몸을 움츠리자 그가 웃는다. 바로 옆에서 웃음 소리가 들렸다. 뱉어진 숨이 귓가를 때렸다.

“그렇게 심장을 울리지 말아주게. 일족이 모조리 피냄새를 맡고 깨어나면 자네한테도 좋을 게 없지 않겠나.”

깊게 숨을 들이켰다. 보이지 않는 그를 똑바로 바라본다.

“장난치지 마. 이럴 시간 없어.”

손등을 쓰다듬던 손이 멈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재미없기는.”

묘하게 투덜거리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그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둠이 이어졌다.

 

사쿠마 저택에는 나도 가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내가 보았던 풍경과 다카기가 보았던 풍경은 다르리라 확신한다. 내가 그 집을 찾은 건 저녁이 한참 지난 시각이었고, 그 시간대의 사쿠마 저택은 여느 현대인의 저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내부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시대를 착각한 듯한 복장을 하고 거무죽죽한 얼굴을 하고 있기는 해도 말이다.

 

후.

일렁인다.

붉은 것이 아릿하게 눈 속을 파고들었다. 흔들리는 것은 시선일까 불꽃일까. 다카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촛불 하나는 이토록 밝은 것이었나. 낯선 눈부심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손님을 접대하기에는 변변치 않지만 용서해주게나. 손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집일세.”

다카기를 앉혀두고 어딘가로 사라졌던 레이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투명한 컵에 붉은 액체가 출렁였다. 다카기는 잔을 질린 듯이 바라보았다. 흡혈귀의 일족이라는 명성이야 익히 들어왔지만 도가 지나친 게 아닌가 생각하고 만다.

“그런 표정하지 말게.”

레이가 웃었다. 그는 소리 없이 다카기와 제 앞에 잔을 내려두고 쟁반을 거두었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료라네. 아무리 나라도 외부인에게 피를 내놓지는 않아.”

씩 웃는 입술이 너무 붉어서 다카기는 차라리 잔을 내려다보았다. 같은 붉음에 같은 촛불 아래인데도 홀로 유난히 더 생기 넘쳐보이는 입술이 기이했다.

살짝 손을 뻗어 잔을 들어올린다. 시원한 유리가 손끝에 달라붙었다. 손목을 돌리자 액체가 함께 빙글 돈다. 잔을 입에 댄다. 입술에 시원한 기운이 퍼졌다. 가만히 내려놓았다.

“토마토로군.”

“마음에 드는가? 내 가장 좋아하는 음료수라네.”

어느새 등받이에 몸을 푹 파묻고 다리를 꼰 레이가 다카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세가 실로 오만하다. 다카기는 잠시 그와 눈을 맞추고 의미없는 눈씨름을 했다. 레이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저 재밌다는 듯 상냥한 눈빛으로 다카기를 어루만질 뿐이었다.

갑자기 잔을 움켜쥔 다카기가 주스를 들이킨다. 농밀한 액체가 목구멍을 넘어가며 머리를 울린다. 싸늘한 한기가 목을 타고 내려가 심장을 관통했다. 잔을 탕하고 내려놓았다. 꿀렁이는 울대와 목덜미를 집요하게 담아내던 시야에 소년의 물기 어린 얼굴이 들어찼다. 마치 야수같은 눈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다카기가 말했다.

“무얼?”

레이가 물었다. 시뻘겋게 불이 붙은 눈동자가 시선을 살랐다.

“날 도와라, 사쿠마 레이.”

흡혈귀의 입가에 짙은 핏물이 베어든다. 사르르 녹아내린 눈가가 제게 쏘아진 불을 머금었다. 아니다. 그것은 불이 아니었다. 나무에 열린 채 과숙되어 끝내는 썩어버린 토마토의 악취였다. 썩어문드러진, 검게 물든, 존재를 상실한 것.

“애송이가 제법 패기가 있구나.”

그것이 말했다. 입가는 여전히 둥글린 채다. 가느다란 상체를 굽혀 잔을 집어든다. 하얀 손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유리잔 표면에 맺힌 이슬이 스며들어 영롱하기까지 하다. 일렁이는 불빛. 흔들리는 초상. 목이 타 잔을 찾았다가 빈 것을 깨달았다.

“어디 말이라도 해보게나. 귀 기울일 가치가 있는지는 들어보고 판단하도록 하지.”

섬찟할 정도의 위압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디선가 풍겨오던 썩은 내가 사라지고, 어지럽게 흔들리던 시야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고요해졌다. 다카기는 숨을 크게 들이켠다. 소리라도 날까 조심스런 심호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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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린네  (0) 2019.08.06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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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 쿠키 말이지.”
문득 집중이 깨질 때가 있다. 그때가 그런 때였다. 갑자기 귀에 들려온 마들렌맛 쿠키의 목소리에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얼굴이 구겨졌다.
“사인 좀 해줬다고 어찌나 매달리던지. 지저분한 손으로 옷을 붙들고 늘어지는 바람에 크게 고생했었어.”
가벼운 한숨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왜 하필 이 길을 택했을까.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짜증을 눈썹에 담아 꾹꾹 눌렀다. 기분 나쁘게도 뺀질거리는 얼굴이 눈 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 작은 왕국에 발이 묶인 뒤로 저 망할 쿠키를 너무 자주 본 탓이 틀림없었다. 공화국과 달리 이곳은 인구가 너무 적었다.
물론 마을도 좁았다. 이렇게 지나가다 마주치면 피해갈 길이 별로 없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빠른 걸음을 따라 마들렌맛 쿠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렇게 기분 나쁘진 않았어.”
바로 앞에 있는 골목에서 유쾌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목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지금이라도 발을 돌려 다른 길을 거칠까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이 길을 포기하면 내 슈가코팅 도넛은?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입이 빼족해졌다. 마들렌맛 쿠키가 기분 좋게 껄껄 웃는 소리가 점차 잦아지고 있었다. 누군가 마들렌맛 쿠키에게 물었다. 아니, 그렇게 집요하게 구는데 괜찮았다고?
정확히 그 순간이었다. 건물 사이로 달콤한 설탕크림과 푸른 망토가 나타났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혹여 눈이라도 마주칠라 고개를 틀었다.
“그야 물론이지.”
마들렌맛 쿠키가 말했다.
“가난하고 지저분한 쿠키가 나같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쿠키를 동경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나.”
무심코 시선이 돌아간 것은 결단코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그 순간 자신의 얼굴이 어땠는지 확신할 수 있었다. 가소로운 것을 보는 듯한, 어리석은 멍청이를 향한 경멸. 실제로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어이가 없어서 무심코 발걸음을 멈추고 만 터였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지금까지 충분히 참아왔다고 생각했다. 공화국에서는 그가 워낙에 영향력이 크니 무시할래도 무시할 수가 없었고, 이 작은 왕국에서도 실은 내색을 했을지언정 협력을 완전히 거부한 적은 없었다. 효율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이 왕국 쿠키들에게 마들렌맛 쿠키와 함께하는 것의 무용함을 설명할 시간과 기력이 아까운 탓이 컸다. 함께 행동할 일 자체가 많지 않아 일일히 따지고 들 필요도 크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어쩔 수 없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마들렌맛 쿠키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웃음기가 사라지고 순식간에 불쾌한 기색이 어렸다.
“할 말이라도 있나?”
툭 던지듯 내뱉는 어조는 평소 마들렌맛 쿠키의 말버릇이 아니다. 심기가 불편한 것을 드러내듯 짜증섞인 음색에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고개를 휙 돌려 시선을 피했다가 비뚠 미소를 머금고 다시 그와 눈을 마주했다.
“그럴 리가요.”
가볍게 던지듯 말하고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다시 발을 옮겼다. 때로는 백 마디의 말보다 별 것 아닌 행동 하나가 강렬한 법이다. 마들렌맛 쿠키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겁이라도 먹었나? 비겁하군.”
예전 같았으면 지나쳤을 말이 왜 가슴에 꽂혔는지 몰랐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그 자리에 멈췄고, 건물에 가려 더는 보이지 않는 마들렌맛 쿠키를 노려보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슈가코팅 도넛을 샀다. 집을 떠나 여행을 하는 동안 식이 조절을 못해서 두꺼워진 몸이 신경쓰이던 터라 최근 식단을 조절하고 있는 중이었지만 이번엔 참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이것도 전부 머리에 잼도 안 들었을 게 분명한 멍청이 쿠키 때문이다. 스트레스성 군살이잖아, 이게 다!
커피를 입에 머금자 진한 향기가 입에서 코로, 코에서 온 몸으로 퍼졌다. 향기가 밀어낸 공기가 긴 한숨이 되어 입술 새로 빠져나갔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엉덩이를 등받이에 깊게 들이밀고 길게 몸을 폈다. 이 맛에 살지. 잠시 기분 좋은 온기를 즐기다가 다시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이번에는 커피향이 입에서 흩어지기 전에 도넛을 입에 문다. 음, 좋아. 좀 더 두꺼워지면 집을 떠나기 전에 맞춰온 새 아이싱 정장이 갈라질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은 잠시 잊기로 했다. 행복은 현재에 집중할 때 생기는 거니까.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만남 같은 것은 이 슈가코팅 도넛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커다란 행복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간식이 있는데 골 빈 무식쟁이들이 어떻게 사는지가 무에 중요하겠는가.
하. 떠올리니 다시 화가 나기는 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가슴 속에서 부풀어오르는 옛 기억들을 내려놓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야, 찌질이. 가서 내 가방 좀 가져와라.’
무의식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손에 들고 있던 슈가코팅 도넛이 찌그러졌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그것을 입에 넣고 전투적으로 씹었다. 무식한 놈들하고는 역시 상종을 말아야한다.
분노에 차서 도넛을 씹다보니 어느새 그릇이 비어있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멈칫했다. 이렇게 맛도 모르고 먹으려던 게 아니었는데…. 이것도 전부 망할 쿠키 때문이었다. 헤유. 어쩌겠나. 한숨을 꾹꾹 누르며 그릇을 치우고 새 커피를 끓였다. 순식간에 휴식 시간이 끝나버렸으니 일을 해야지. 아직 보고서도 안 썼고, 왕국 건설 계획에 내놓을 의견서도 작성이 덜 끝났다. 여기에 커피 마법 개선식까지 짜고 있으니 할일이 산더미였다.
“나 왔어~.”
막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원고를 펼치던 중, 노크조차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어휴, 커피향 진한 거 봐. 또 에스프레소 마셨구나? 에스프레소도 좋지만 말이지, 가끔은 라떼 어때? 그렇게 커피만 마시다가는 잼이 삭아버릴 거야~.”
듣는 쿠키는 안중에 없다는 듯 혼자서도 말이 많은 쿠키였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고개도 들지 않고 답했다.
“나가십쇼.”
“어머, 오자마자 축객령이야?”
침입자가 까르르 웃었다. 맑은 웃음소리가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사무실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고집스레 시선을 서류에 고정했다.
“누구씨 때문에 매번 일이 쌓여서 말이죠~. 당신 같이 한가한 쿠키랑 다르게 저는 할 일이 많거든요.”
“얘도 참.”
불청객 라떼맛 쿠키가 재밌다는 듯 깔깔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딜 가든 재수없다는 말을 듣는 에스프레소맛 쿠키였지만, 라떼맛 쿠키에게는 도무지 먹히지가 않았다. 오히려 아는 사람이 변함없는 게 반갑다는 듯 더욱 접근해와서 곤란했다. 그가 왕국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맛있는 커피와 고요한 아침을 보낼 수 있었는데 이제 그렇게 조용한 아침은 손에 꼽게 드물어졌다.
“오늘 들었는데 네가 마들렌맛 쿠키랑 같이 왕국에 들어왔다면서?”
라떼맛 쿠키가 의자를 끌어와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건너편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잘 구워진 갈색 팔이 책상 위에 괴어지자 아무리 에스프레소맛 쿠키라도 더는 시선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마음으로 욕설을 몇 마디 뱉은 후 고개를 들었다.
“뭡니까.”
“심지어 너랑 마들렌맛 쿠키가 같이 극장을 세우는 일에 협조했다면서?”
“네. 뭐…. 맞게 들으셨군요.”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대놓고 기분 나쁘다는 얼굴을 했다. 물론 라떼맛 쿠키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걸 신경쓰는 쿠키였다면 에스프레소맛 쿠키 옆에 다가올 리도 없었다.
“어머나~.”
아. 예감이 불길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 그동안 많이 부드러워졌구나. 나는 네가 여지껏 잼 한 스푼도 넣을 수 없을만큼 속좁고 깐깐한 줄로만 알았지.”
이 쿠키가 지금 욕을 하는 건가?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생각했다. 짜증나게도 그런 기색은 없었다. 라떼맛 쿠키는 진심으로 감격한 표정이었다. 급기야 손까지 잡혔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털어내듯 라떼맛 쿠키의 손을 떨쳐냈다. 두 쿠키의 손이 맞닿아 미세한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한쪽에 놓아둔 우유를 헝겊에 묻혀 책상을 닦아냈다.
“할 일을 했을 뿐이죠. 그보다 용건은 뭐죠. 바쁩니다.”
“매정하기는.”
라떼맛 쿠키가 입술을 삐죽였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당장 말하고 꺼지지 않으면 쫓아내겠다는 의사를 눈빛으로 쏘아냈다. 결국 라떼맛 쿠키는 입술을 3자로 만들고 말았다.
“이번에 내 제자가 여기로 왔잖아. 알지? 슈크림맛 쿠키라고.”
“본 것 같군요.”
“걔가 정말 유망주인데 커피 마법에도 관심이 많더라고. 우리가 처음에는 같이 연구를 했지만, 내가 라떼 마법으로 빠진 뒤로는 서로 거의 교류를 하지 않았잖아? 그래서 슈크림맛 쿠키의 질문에 대답해줄 수 없는 부분이 있어. 너랑 만나고 싶어하는데 시간 좀 내줘.”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못마땅하게 라떼맛 쿠키를 바라보다가 달력을 꺼냈다. 빽빽하게 적힌 일정표에서 빈 자리를 찾는다.
“이번달은 빈 시간이 없고, 다음달 말….”
“아, 좀~! 너도 쉬어야할 거 아니야. 이게 다 뭐니?”
라떼맛 쿠키가 냅다 달력을 빼앗아갔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픽 웃으며 팔짱을 낀다. 라떼맛 쿠키는 하나하나 일정을 확인하며 경악으로 얼굴을 물들여갔다.
“세상에. 이게 쿠키 사는 꼴이니?”
그러더니,
“당장 나가자!”
라며 에스프레소맛 쿠키를 잡아 끌었다.
“싫습니다. 싫거든요?!”
자칫 끌려나갈 뻔한 에스프레소맛 쿠키였다. 정말이지 방심할 수가 없다니까!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몰랐다. 차라리 라떼맛 쿠키와 나가는 게 나았을 거란 사실을.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었으면 망설임 없이 그때 함께 나갔을텐데. 내가 왜 그랬을까!
머리를 부여잡은 에스프레소맛 쿠키를 보고 마들렌맛 쿠키가 말했다.
“뭐하나?”
“알 거 없습니다. 사라져주시죠.”
“하하, 거 농담도 재밌게 하는군!”
마들렌맛 쿠키는 아침에 있었던 일은 안중에도 없는 듯 유쾌해 보였다. 역시 기억을 유지시킬 최소한의 장치가 없는 게 분명했다.
“대체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사실 에스프레소맛 쿠키라고 마들렌맛 쿠키를 그냥 들여보내준 건 아니다. 막아보려고 했다. 힘으로는 도무지 저 무식한 놈을 이길 수 없었을 뿐이었다. 저놈은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닫히는 문을 당당하게 손에 들고 있던 방패로 밀어내버리고 들어왔다. 왕국이고 뭐고 버리고 떠날까? 소울잼을 찾아서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집 구경하러 왔지.”
마들렌맛 쿠키가 씩 웃었다. 불쾌하다.
“제 집은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나가십쇼.”
“동료끼리 서운하게 하는군 그래!”
그렇게 웃으며 마들렌맛 쿠키가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기력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이 감각, 낯설지 않다. 학창시절에 지겹도록 겪어본 쿠키상이었다.
“누가 동룝니까. 꺼지쇼.”
“동료지, 그럼. 함께 소울잼을 찾아 돌아가기로 하지 않았나. 안그래도 내 그동안 얼마나 서운했는지 아는가? 길 떠나자마자 ‘이제부터는 따로 행동하기로 하죠.’ 하고 가버리지 않았어. 내가 언제 자네를 서운하게 한 적이라도 있냐 말이야. 우리 임무가 시작되기 전엔 거의 얼굴도 마주한 적 없는 사이였지 않나!”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얼굴에 아련한 미소가 번졌다. 말이 안 통하는 쿠키가 한둘은 아니지만 저 놈은 명물이었다. 그날 자기가 떤 진상을 하나도 기억을 못 한단 거지. 할 말이 없으니 그저 웃지요.
“그나저나 참 썰렁하게 해놓고 사는군. 이런 삭막한 집에서 어떻게 잠을 자나?”
“잘만 잡니다.”
“거울 없나? 하긴 이런 배경에서는 내 미모도 멋져보이기 힘들겠어. 이렇게 우중충할 줄이야.”
“당신 얼굴보단 제 집이 훨씬 근사하군요.”
“이건 대체 뭔가? 커피 마법에 쓰는 거라고? 허, 정말 일만 하고 사나보군. 이렇게 살다간 순식간에 상해버릴 걸세.”
“여지껏 그렇게 살아왔지만 아직 안 상하고 멀쩡하군요.”
마들렌맛 쿠키는 파괴신이었다. 지나는 곳마다 그 거대한 방패와 망토로 쓸고다녔다. 그가 가는 자리마다 잘 세워놓은 물건이 떨어져서 나뒹굴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그 뒤를 쫓아 집안을 정리해야했다. 있는대로 집어던져서 쫓아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이곳은 에스프레소의 집이었다. 살림살이를 던져서 손해보는 건 자기 자신 뿐이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손에 집어든 자명종을 힘주어 쥐며 말했다.
“이제 다 봤으니 나가십쇼.”
“응? 여긴 또 뭔가.”
눈 앞이 아찔했다. 아니, 기분 탓이 아닌가?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몸이 기울어졌다.
“에스프레소맛 쿠키!”
마들렌맛 쿠키가 후다닥 달려오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앞이 흐려졌다.

다시 깨어났을 때 눈 앞에 보인 것은 마들렌맛 쿠키(끔찍했다)와 용감한 쿠키, 그리고 연금술사맛 쿠키였다.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깨어났어!”
“몸은 좀 어때?”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
“저걸 쫓아내주시면 좋겠군요.”
연금술사맛 쿠키는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끄덕였다.
“그렇대. 나가줘, 마들렌맛 쿠키.”
“왜 나한테만 그러나!”
“환자잖아. 안정이 필요하니까 나가있어.”
연금술사맛 쿠키가 말했다. 동그란 안경이 그렇게 믿음직스러울 수 없다.
“자자, 나가자. 나가자~.”
용감한 쿠키의 명랑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마들렌맛 쿠키가 몇 마디 투덜거렸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나갔으니까.
“또 며칠째 잠을 안 잔거지?”
연금술사맛 쿠키가 물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태연하게 눈만 꿈뻑였다.
“연구도 좋지만 적당히 해. 뒤치다꺼리는 질색이라고.”
연금술사맛 쿠키는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리고 일어샀다.
아, 그리고.
“마들렌맛 쿠키가 에스프레소맛 쿠키와의 일화를 연극으로 만들었대. 궁금하면 저녁에 나와봐.”
새침한 목소리만 남기고 문이 닫혔다.

언질해두건대 절대로 마들렌맛 쿠키가 구상했다는 연극이 궁금해서 나온 게 아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괜히 옷깃을 바짝 세워 얼굴을 가렸다. 저 멍청이가 내 이야기를 썼다니 대체 무슨 짓을 해놨는지 궁금해서 보러가는 거야. 내 명예가 걸린 일이잖아?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생각했다. 완벽한 이유군.
극장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연극이 한창이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혹여나 다른 쿠키의 눈에 뜨일까봐 극장 주변을 빙 돌아 뒤쪽으로 다가갔다. 왕국 쿠키의 과반수가 이 자리에 모인 것 같은 인파였다. 마들렌맛 쿠키의 하얀 머리칼이 예상대로 무대 바로 앞에 붙어있었으므로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마음 편히 뒤쪽 빈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쿠키를 빼닮은 인형들이 조그만 무대에서 꼼지락거렸다.
「도와줘, 에스프레소맛 쿠키!」
마들렌맛 쿠키로 보이는 인형이 외쳤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당황했다. 다른 쿠키도 아니고 마들렌맛 쿠키가 내게 저런 말을 한 적이 있던가? 설령 한 적이 있다고 해도 그가 저런 대사를 극장에 올릴 위인이던가?
언제나 푸른 망토를 펄럭이며 걸어다니는 마들렌맛 쿠키는 사실 기사라고 해주기에도 부끄러운 인사였다. 고국에서 그를 볼 때마다 밑에 있는 기사들이 얼마나 불쌍했는지 모른다.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제 멋부림 말고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는 멍텅구리를 상사로 모셔야하는 입장이었다면 차라리 기사를 그만두고 말았을터였다. 다행히 경험상 대부분의 기사들은 마들렌맛 쿠키와 별 차이 없는 단순무식 멍청이였으니 양쪽 모두 그다지 괴롭지는 않을 것이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로서는 언젠가 함께 싸워야할 전력이라고 생각하면 불안해서 밤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에스프레소맛 쿠키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짙은 갈색 빛깔 인형이 수풀에 뛰어들었다. 무대가 바뀌고, 홀로 선 마들렌맛 쿠키(인형)가 수십마리의 케이크 들개와 맞서고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물론 수십마리의 케이크 들개는 한두마리를 제외하곤 배경 그림으로 대체됐다.) 에스프레소맛 쿠키(인형)는 지체없이 마법을 시전했다.
「물러나라. 사악한 마물아!」
음.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걸렸다. 못 보겠다.
되돌아나가려는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어깨를 누군가 붙들었다.
“어디가나? 끝까지 봐야지.”
잡힌 순간 깨달았다. 돌아보지 말아야지.
결심은 아무 소용 없었다. 이 무례한 쿠키는 남의 몸에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는 예의를 모르 듯이, 남을 함부로 잡아당기면 안 된다는 상식도 없었다.
“우리의 모험담이잖나. 같이 봐야지. 모두가 만들어준 연극인데.”
“대체 무슨 헛소리를 했기에 저딴 연극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를 끌어들이지 말아주시죠.”
완곡하게 돌려 말한 ‘내 얘긴 빼라’였다. 물론 마들렌맛 쿠키는 알아듣지 못 했다. 이 똥멍청이는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도 몰랐다.
“그냥 우리가 함께 온 길에서 있었던 모험을 말해줬을 뿐이야. 그들이 우리 업적이 영웅에 필적한다 하여 연극으로 상영해준다 했지. 자랑스럽지 않나?”
“여기까지 오는 길에 모험이라고 할만한 일은 없었습니다만.”
“그게 무슨 소린가! 방금 자네도 봤지 않나. 우리가 함께 오십마리의 케이크 들개를 해치운 다음에…….”
더는 듣고 싶지가 않았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탁 소리가 나도록 마들렌맛 쿠키의 손을 쳐냈다.
“돌아가 보겠습니다.”
펄럭.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망토가 가볍게 흩날렸다. 마들렌맛 쿠키의 황당한 시선이 등 뒤에 꽂혔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신경쓰지 않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
어째 썰푼 거하고 내용이 소소하게 달라졌는데, 큰 흐름은 같이 갈 겁니다. 혹시나 하고 추가해두자면 에스프레소 왕따 당하거나 삥 뜯긴 거 아니고요. 설령 그랬어도 열배로 갚아줬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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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한 일이었다. 공화국의 모든 쿠키가 저를 보고 수군거리는 것도, 점잖기로 유명한 총독에게 뜨거운 커피를 맞은 것도 모두.

사건은 시작된 것은 그곳, 바로 신생 바닐라 왕국에서였다.
그들이 전설 속의 보물을 찾아 떠난 길에 만난 그곳은 과거 바닐라 왕국의 발자취를 뒤쫓는 이들이 세운 작은 나라였다. 목적지가 같아 잠시 협력을 구하려던 것이 꽤나 긴 시간을 체류하게 되는 바람에 그들은 그 새로운 왕국의 시작에 상당한 족적을 남기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나라의 핵심 인사들은 갓 오븐에서 탈출해 쿠키대륙의 실정을 전혀 모르는 어리숙한 인사들로 구성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공화국 의회에서 활약하던 젊은 지식인 에스프레소맛 쿠키와 빛의 신을 따르는 공화국의 검 마들렌맛 쿠키의 재주는 지극히 귀한 것이었다.
떠돌이들이 모여 피운 작은 모닥불이 하나의 나라가 되기까지의 역사를 이곳에서 읊는 것은 지나치게 비효율적인 행위이니 생략하도록 하자. 여기서 알아야할 것은 하나 뿐이다. 집정관을 몇 번이고 배출한 것은 물론 현재 총독 자리 마저 거머쥐고 있는 위대한 ____ 가문의 __대 독자 마들렌맛 쿠키가 뛰어난 마법사로 학계에서 인정받고는 있다고 하나 외지에서 들어와 아직도 의회에서 입지를 확보하지 못한 평민 출신 의원 에스프레소맛 쿠키에게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다는 것. 신생 바닐라 왕국이 땅을 다지고 건물을 세우며 그들만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동안, 에스프레소맛 쿠키와 마들렌맛 쿠키 사이에서도 역사가 흐르고 장대한 드라마가 펼쳐졌음은 물론이다. 그 결과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끝내 자신이 마들렌맛 쿠키의 애정공세에 넘어가버리고 말았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가진 거라곤 실력과 자존심(그리고 외모)뿐인 서민 쿠키로서는 뼈아픈 패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도둑고양이 같으니. 외지인 주제에 어딜 순진한 마들렌맛 쿠키를 꼬여내느냐! 의회에서의 열정적인 활동을 보아 그래도 공화국에 해를 끼칠 자는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같은 소리를, 바로 그 공화국의 총독께서 부스러기를 튀겨가며 열렬하게 외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말끝마다 외지인, 외지인. 우습지도 않다. 그가 시민 자격을 가지고 이 나라에 정착한 게 벌써 __ 년째인데 아직도 외지인 소리를 듣는 게 지겨웠다. 당신 자식을 해친다고 공화국에 해가 되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빈정거리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커피가 방울방울 맺혀 흘러내리는 코팅을 털어내었다. 동그란 손이 커피에 젖어 짙게 물들었다.
“진정하시지요.”
“진정하라고? 이 놈이 그래도!”
“소리만 지르지 말고 잠시 제 이야기를….”
“에스프레소맛 쿠키 괜찮나!”
하아아.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눈을 감고 긴 한숨을 토해내었다. 끝내 참지 못하고 쳐들어온 마들렌맛 쿠키가 그의 주위를 맴돌며 누군가 딸기를 훔쳐간 케이크 개처럼 안달을 했다.
“왜 평소보다 더 까맣지? 젖기라도 한 건가? 커피를 흘렸나? 하지만 한 모금도 안 마신 것 같은…, 아버지!”
이걸 수습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웃었다. 정말. 귀찮다.

정말로 케이크 들개라도 된 양 짖기를 멈추지 않는 마들렌맛 쿠키와 그의 아버지 ____맛 쿠키를 겨우 뜯어말린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조용히 선언했다.
“들어오는 길에 이미 혼인신고는 마쳤습니다. 허락을 받든 받지 않든 저와 마들렌맛 쿠키는 법적 부부란 의미지요.”
“뭐, 뭐라고?”
____맛 쿠키가 휘청거렸다. 평소라면 잽싸게 달려가 부축했을 마들렌맛 쿠키는 잔뜩 삐친 표정으로 외면할 뿐이었다. 다행히 마들렌맛 쿠키 못지 않게 강건한 면이 있는 ____맛 쿠키는 금세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 도둑고양이…!”
“에스프레소맛 쿠키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이…, 이 천둥벌거숭이야!”
버럭 소리를 지른 ____맛 쿠키가 어지러운 듯 이마를 짚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그런 ____맛 쿠키를 보고 빙긋 웃었다. 제가 수도 없이 느낀 답답함을 남이 겪는 걸 보고 있으니 그리 속시원할 수가 없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쿠키가 아닌 파이였다면, 진작에 속이 터져 파이의 몰골이 아니었으리라.
“진정하신 것 같으니 이야기를 해도 되겠군요.”
그러니까 그만 좀 싸우라는 말이야. 에스프레소는 메세지를 담아 보기 좋게 웃어보였다. 학회나 의회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제 말을 막아서는 쿠키를 향해 내보이곤 하는 미소였다.
“공화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마들렌맛 쿠키가 제게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한데 그 약조를 들어줄 수 있는 것은 마들렌맛 쿠키가 아니라 총독님, 당신이더군요. 그래서 이리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비록 커피를 맞기는 했지만요.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앙심 같은 건 없다는 듯 활짝 웃었다. 물론 진심으로 그렇게 보이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네 녀석 대체 무슨 약속을….”
“별 거 아닙니다. 들어보세요.”
잽싸게 끼어든 마들렌맛 쿠키가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말을 가로챘다. 또다, 또.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진절머리가 났지만 이 쿠키에게 품위를 언급하며 화내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진작에 깨달은 바였다. 게다가 어쩌면,
‘저런 면이 사랑스러운지도 모르고.’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왠지 텁텁한 입을 커피로 씻었다. 내가 어쩌다 이러고 있는건지. 한숨이 절로 났다. 총독이 뒤집어씌운 커피가 제 커피잔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이미 커피가 몸속으로 꼼꼼하게 스며든 뒤의 일이었다.
“……니까 결국 에스프레소맛 쿠키에게 후원하면 마법사들을 공화국으로 더 끌어올 수 있을 겁니다. 그건 절대 손해가 아니에요.”
“마법 학회에는 충분히 투자하고 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커피 마법의 1인자입니다. 저는 커피 마법의 위력을 눈으로 확인했어요. 그에게 하는 투자는 곧 이 나라를 위한 투자가 될 겁니다.”
“마법사만으로 군대를 구성할 수는 없어.”
“커피 마법사를 군대에 투입할 수 있다면, 군부대의 규모를 줄일 수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이득을 보는 투자예요.”
“당장 예산을 어디서….”
“ー자, 자. 두 분이 의견을 충분히 나눈 것 같은데 이만 제 이야기도 들어보는 게 어떠신지요.”
동시에 그를 돌아보는 두 쌍의 푸른 눈동자가 꼭 닮아있었다. 가족이라고 해서 쿠키끼리 닮는 것은 아닌데도.
“우선.”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작게 헛기침했다.
“예산을 어디서 끌어올지는 제가 이미 생각해두었습니다.”
총독 ____맛 쿠키가 눈을 부라렸다. 어디 말해보라는 듯 팔짱을 낀다.
“마법학회에 배정된 예산 중에 놀고 있는 예산이 있습니다. 매년 남은 예산을 소비하기 위해 아카데미 정원을 갈아엎으면서도 정작 필요한 학과에는 충분한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고 있죠. 제가 원하는 건, 그 남아도는 예산입니다.”
그걸 위해서 아까운 연구 시간과 개인 수련을 포기해야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높으신 분들에게 그걸 하소연해서 어디에 쓸까. 하물며 마들렌맛 쿠키는 그 긴 이야기를 듣고도 깔끔하게 잊어버린 얼굴인데 말이다.
“대학에 예산 분배를 새로 요청했지만 관습이라는 말로 얼버무리더군요. 그들에게 예산을 요청하는 입장인 제 말로는 설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총독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겸사겸사 마들렌맛 쿠키의 생활비에서도 연구비를 받아갈 거라는 이야기 역시 하지 않았다. 마들렌맛 쿠키의 개인 사정이니 굳이 그 아버지가 알아야할 필요는 없겠지.
총독은 예산을 추가로 분배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마음이 흔들리는 듯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의회에서 늙다리 의원들을 상대할 때 종종 그리했듯이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비웃음을 부드러운 미소로 대체하곤 대화를 이어나갔다.

수도 안에 마들렌맛 쿠키와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혼인이 알려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들의 신고를 받아준 구청 직원의 입에서 시작된 소문은 바로 다음날 지역 신문에 실릴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번져있었다. 두 쿠키의 유명세라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라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신문을 넘겼다.
“아무렇지 않은가보군.”
건너편에 앉아있던 마들렌맛 쿠키가 말했다. 그의 시선은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난 그들의 결혼 기사에 꽂혀있었다.
“예상한 일입니다. 호들갑 떠는 쪽이 이상하죠.”
“그렇긴 하지만….”
착잡한 표정으로 신문을 응시하던 마들렌맛 쿠키는 제 앞에 놓인 향기로운 꽃차를 한모금 들이켰다. 그리곤 답지 않게 긴 한숨을 내쉰다.
“결국 이렇게 되었어.”
“네. 계획대로군요.”
“식은 이번달 안에 올리도록 준비할거야.”
“그리하시죠.”
마들렌맛 쿠키는 착잡한, 정말이지 그 답지 않은 표정이었다!, 얼굴로 에스프레소맛 쿠키를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너는…, 아무렇지 않은 건가?”
그제서야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신문에서 눈을 떼었다. 붉은 빛을 띈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마들렌맛 쿠키는 우물쭈물 눈을 돌렸다.
“뭐가 말입니까?”
“우리가 부부가 되었다는 사실 말이야.”
“동요해야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어차피 계획대로인데 뭐가 그리 문제입니까?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눈으로 물었다. 아니…. 마들렌맛 쿠키는 무엇이 그리 불만인지 우물거리다가 입을 다문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다시 신문을 치켜들었다.
“한가하게 그러고 앉아있을거면 나가서 훈련이라도 하시죠.”
그 말에 마들렌맛 쿠키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신문 너머로 보이는 그의 납작한 얼굴이 묘하게 쓸쓸해보인다고 생각했다. 성가셔라.
“마들렌맛 쿠키.”
“응?”
“식은 아직이지만 우리는 부부입니다.”
“그렇지?”
“부부끼리 아침 식사 후 가볍게 산책을 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요. 식을 올리지 않았으니 신성한 화덕에 반죽을 올리는 건 무리겠지만요.”
“……뭐?”
“아침 식사하고 함께 산책을 하도록 하죠. 저도 돌아오자마자 연구실에 틀어박힐 수는 없으니까요.”
할 일도 많고.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그렇게 말하곤 커피로 입가심을 했다. 말을 많이 해서 입이 말랐다.
“다시 말해봐.”
마들렌맛 쿠키가 무서운 얼굴을 하곤 벌떡 일어났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지금, 반죽이라고—.”
아.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피식 웃었다. 비웃음인지 그냥 미소인지 애매한 웃음이 입술을 덮었다.
“지금은 부부라고 해도 다들 실감이 나지 않을 겁니다. 아직은 신성한 화덕에 반죽을 올리기 적절한 시기가 아니죠.”
“그 얘긴, 설마, …설마.”
“예, 말씀하시지요.”
“나와 반죽을 만들어주겠다는 건가?”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코웃음쳤다. 그 재수없는 표정에도 마들렌맛 쿠키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도 많이 봐서 감흥이 떨어진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지금 하는 이야기가 그에게 워낙 중요한 것이어서 그랬다.
“예, 뭐. 당신 집안에 후계자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혼자 만드셔도 상관 없고요.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중얼거렸다. 마들렌맛 쿠키가 달려와 덥썩 에스프레소맛 쿠키를 끌어안았다. 악. 작게 비명이 울렸다.
“부스러집니다. 부스러기 떨어지는 거 안 보입니까!”
“미안하네. 미안해! 하하, 하하핫!”
“내려놓으십시오!”
결국 산책을 나갈 수 있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나마도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접근금지령으로 인해 나란히 걸을 수는 없었지만, 마들렌맛 쿠키는 기분이 좋아보였고, 그런 그들의 모습은 소문을 한층 무성하게 만들었다.

식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어차피 사용인들과 마들렌맛 쿠키가 알아서 처리할 일이었기에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마음껏 자기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의회와 아카데미에 복귀 신고를 하고, 연구실을 청소했으며, 그 사이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마들렌맛 쿠키가 제대로 된 보고서를 작성할 리는 없었으니 자신이라도 멀쩡한 보고서를 제출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작업했다.
식은 예상보다 빠르게 잡혔다. 이 주 뒤였다. 덕분에 이 주 안에 공화국 총독 자식의 결혼 연회를 준비해야하는 일꾼들만 바빠졌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예복을 맞출 때를 빼고는 식장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마들렌맛 쿠키는 아주 신이 난 것 같았고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결혼식이 마들렌맛 쿠키의 기운을 빼놓는 것이 반가웠다. 결혼식 준비가 시작되면서 만날 때마다 귀찮게 들러붙는 일이 줄어들었던 것이다.
총독과 직접 담판한 보람이 있는지 아카데미에서 그에게 배정하는 예산이 제법 넉넉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앞으로의 연구 계획을 세우며 희희낙낙했다. 총장은 넉넉해진 예산의 대가로 그에게 수업을 더 배치하려고 했으나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터무니없는 수업 계획서로 응대했다. 예산 나올 구석도 생겼는데 아카데미따위 확 그만둬버릴까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ー, 그의 의회에서의 입지가 아카데미와 학회에 기반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래선 안 된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입을 삐죽였다.
그래도 마들렌맛 쿠키와 총독이라는 뒷배가 크기는 했다. 의회에서 그를 보는 시선이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게 느껴졌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쓸모없다고 마들렌맛 쿠키를 비난하지는 않기로 했다. 어쨌든 도움은 되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결혼식이었다. 마들렌맛 쿠키가 화려하고 성대한 연회를 준비했으리라는 것은 예상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에게도 기꺼운 일이었기에 특별히 참견하지 않았다. 마들렌맛 쿠키는 천둥벌거숭이 소리를 들을 정도로 철없는 도련님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었으니 체면을 구길 걱정은 하지 않았다. 성가신 것은 미래를 위해서라면 견딜 수 있었다. 지긋지긋한 외부인 소리와 떨어질 수 있다면, 더는 학회에서 줄을 잘 타려고 억지 미소를 짓지 않아도 된다면 이까짓 것 못 참을까. 다만 진짜 문제는…,
“에스프레소맛 쿠키, 시간 괜찮은가? 내가 우리의 새 반죽을 구상해봤는데!”
그래. 이 녀석이었다. 정말 도움이 안 되는 쿠키다. 빛의 신이시여. 이 녀석 안 거둬가시고 무엇 하십니까. 아니, 거둬가면 곤란하긴 하지만서도.
“그런 건 식을 올린 이후에 의논하면 안 되겠습니까?”
“하지만, 하지만 이런 것은 정성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지 않나!”
“맞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정신없을 때가 아니라 둘 다 차분하게 머리를 맞댈 수 있을 때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그래도는 뭐가 그래돕니까.”
부스러기가 튈 정도로 이를 갈자 그제서야 입을 다무는 마들렌맛 쿠키였다. 기가 죽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주고 돌아선다.
“그럼 결혼식을 올린 후에는 상의해주겠지?”
“물론입니다. 그때까진 참으십시오.”
그거면 될 줄 알았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성대한 결혼식이었다. 연회에는 수도의 유력인사가 대부분 참가했고, 거리에까지 음식을 돌렸다. 꽃과 음식을 든 작은 쿠키들이 그들에게 축하를 건냈다. 식을 올리고 춤을 추고 축사를 주고받다보니 하루가 훌쩍 갔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기진맥진해 침대에 늘어졌다. 마시멜로 매트리스가 허공에 던져진 몸을 부드럽게 받쳐주었다.
“지쳤습니다.”
“하하, 나도 그래.”
마들렌맛 쿠키가 말했다. 그는 정말 기분이 좋아보였다. 지쳤다고 말하는 마들렌맛 쿠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기력도 좋다고 생각하며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그에게 등을 돌렸다.
“저는 좀 자겠습니다. 나중에 뵙죠.”
“잠깐!”
“뭡니까.”
마들렌맛 쿠키의 하얀 손이 에스프레소맛 쿠키를 붙들었다. 인상을 찌푸린 에스프레소맛 쿠키에게 마들렌맛 쿠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직 자면 안 되네!”
“네, 네. 말씀하시지요.”
결국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다시 몸을 바로 눕혀 눈을 감았다. 적당히 대답해주다 자면 되겠지.
“우리 반죽 말일세!”
“네?”
“반죽에 대해 의논해야하네. 오늘 하자고 하지 않았나.”
“제가요? 언제요?”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소리람.
“결혼식 이후에 말하자고 했잖은가.”
그가 당당하게 웃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미간이 마구 구겨졌다.
“내일 하시죠.”
다시 돌아누웠다. 다시 막혔다.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지 아나. 할 이야기가 잔뜩 있어.”
“전 없습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 너를 닮은 쿠키였으면 좋겠어. 커피를 꼭 넣어야한다고 생각해.”
“내일 합시다.”
“하지만 완전히 자네만 닮아서는 아버지가 노발대발 하실 게 틀림없어. 그러니 어느정도는….”
“아, 내일 하자고요!”
“들어보게!”
“싫습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
“마들렌맛 쿠키!”
밤은 길었다. 결국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그날 한시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연구를 위해 세워둔 수면계획은 완전히 엉망이 됐다.
“아아아악! 당장 떨어지란 말입니다!”
“하지만 들어봐. 이게 제일 중요하단 말이야!”
사용인들은 예감했다. 지금까지의 평화는 그저 폭풍 전의 고요였음을. 갓 탄생한 신혼부부는 정말이지, 사이가 심히 좋았다.

——————
모든 설정은 100% 날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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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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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시 드림

the other world 2020. 2. 5. 12:16

날이 개었다. 수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하늘은 맑고 창창하기만 했다. 그것이 너무 이상해서 미캉은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돌아갈 거야?”
아라시가 물었다. 언제나 건강하고 활달하던 소년의 목소리는 어딘가 풀이 죽어있었다. 미캉은 그것이 아라시의 본심이라는 걸 알았다.
중앙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소년이 얼마나 안절부절 못했는지 미캉은 알고 있었다. 기쁜 일에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하고 자신이 떠나가버릴까 노심초사하는 것을 알았다. 아라시는 매사에 솔직하고 직설적인 아이였지만 어쩐지 애정표현에만큼은 서투른 면이 있었다.
“남아있길 바라?”
미캉이 물었다. 아라시가 움찔 하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상관없어. 가고 싶으면 가던가.”
미캉은 희미하게 웃었다.
“연화가 있잖아. 넌 혼자가 아니야.”
“딱히 외롭다거나 가지 않길 바란다거나 하는 건 아니거든!”
아라시는 씩씩거리더니 투덜거렸다.
“네가 있든 없든 우리는 잘 살 수 있어. 집도 있고 돈도 충분하고. 우리는 아무것도 모자라지 않단 말이야. 동방거리 사람들과도 친해졌으니 같이 놀 사람도 있어.”
어째서일까. 아라시는 말을 하면 할수록 시무룩해졌다. 고개는 땅으로 떨어지고 입꼬리가 쳐졌다. 늘 기세등등한 소년의 낯이 밤하늘처럼 어둡게 물들었다. 며칠 보지 않았지만, 미캉은 그것이 얼마나 큰 슬픔의 표현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입을 열고 말았다. 입에 담지 않으려고 줄곧 고생했던 말이었다.
“동방거리로 이사하는 건 어때.”
“싫어!”
과연. 즉답이 돌아왔다. 미캉은 왠지 그것이 기꺼워 또다시 작게 웃고 말았다. 아라시와 함께 있으면 반쯤 죽었다고 생각한 감정이 일부 돌아온다. 아라시는 정말이지 에너지가 넘치고 활달한 소년이었다. 그가 가진 에너지는 옆에 있는 사람마저 산자의 생기로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을만큼 크고 강렬했다.
'네가 산 사람이 아니라는 게 이상한 일이지.'
미캉은 생각했다.
“동방거리 사람들은 좋아.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줬고, 누나도 받아들여줬으니까. 나도 그들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좋고, 좀 더 자주 만나고 싶어. 그러기에 항구 도시가 먼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아라시는 잠시 우물거린다.
“나랑 누나는 이 집이 마음에 들었단 말이야. 이곳은 무척 정답고 아름다워. 동방거리를 다 둘러봐도 이곳 같은 집은 없었어.”
속상한 듯 말하는 아라시의 눈빛에는 옅게 물기가 어려있었다. 그가 동방거리에서 집을 찾은 것은 미캉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함께 돌아다니기도 했으니 모를 리 없었다. 아라시는 정말로 동방거리에 살고 싶어했고, 동방거리 식구들도 그랬다. 하지만 지금 사는 그 집만큼 아라시의 마음을 흔든 곳은 없었다. 미캉은 그것을 보고 집이 때로는 고향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라시.”
미캉이 말했다.
“내겐 의무가 있어.”
“알아.”
아라시가 침통하게 대답했다. 그는 이제 반쯤 울고 있었다.
“알고 있어. 누나도 그렇게 말하면서 시집을 갔는걸.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의무를 가지고 있어. 누리는 것만큼 책임을 다해야한다고, 사부님도 말씀하셨어.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
미캉은 고민했다. 일렁이는 소년의 눈가를 손으로 훔쳐주고 싶었다. 눈물은 흘러넘쳐 거의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자신이 이런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낯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지휘사는 세상을 구하고, 황실의 여인은 시집을 가는 게 의무일까? 그럼 나는? 내가 가진 의무는 뭐지? 난 이제 살아있지도 않아. 신기사가 되었으니 세상을 구해야할까? 누나나 미캉, 네가 위험해진다고 해도? 그런 게 의무인 거야?”
고민하는 사이, 아라시의 붉은 눈동자에서 붉은 것이 뚝 떨어졌다. 곧 색을 잃은 그것은 바닥에 부딪혀 부서진다.
“그게 옳은 일이겠지.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정말 모르겠어. 의무가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지켜야하는 것이라면, 사람은 대체 무얼 위해 사는 거야?”
“아라시.”
언제 열렸는지 문이 열려 있었다. 그 자리에 서있던 전통복 차림의 고운 여인의 손이 떨렸다. 찻잔이 놓인 쟁반이 달그락거렸다. 연화는 서둘러 방안의 탁자에 쟁반을 올렸다.
“아라시.”
죽은 자는 눈물이 많아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연화의 눈에도 어느샌가 눈물방울이 데롱데롱 매달려있었다. 미캉은 조용히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누나. 누나. 울먹이는 소년의 목소리가 발목을 잡아 끌었다. 그 목소리에 떠밀리듯 방을 나왔다. 문을 닫고도 한참이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미캉은 얼어붙은 듯 문 앞에 서서 남매의 울음에 귀를 기울였다.

그날 이후, 아라시는 종종 중앙청을 찾았다. 때로는 맛있는 음식을, 때로는 예쁜 옷과 장신구와 함께였다. 가끔은 연화가 동행하기도 하고 동방거리 사람들을 동원할 때도 있었다. 목적지는 언제나 같았다. 중앙청 회의실 지하였다. 이름 없는 공헌자는 그곳에서 아라시를 맞아 때로는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다투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긴 시간을 함께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제법 사이가 좋았고, 함께 있는 것을 기꺼워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아라시는 그의 친구가 밖으로 나오기를 바랐지만,
글쎄. 때로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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