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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담장이 보인다.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언제나 그랬다. 바깥 풍경은 언제나 삼엄한 철창 너머에 있었다.
출입이 불가능했던 건 아니다. 마리아 루첼라이는 원할 때면 언제든 외출을 하고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가 더 자주 나가기를 원했다. 신전과 공방에 갇힌 듯이 살고 있는 딸이 안쓰러운 탓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창가에 우두커니 앉아 바깥 풍경을 보는 일을 더 좋아했다. …좋아했다.
마리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다. 고요히 앉아있는 모습은 마치 잘 만들어진 인형 같다. 공방에서는 누구보다 바쁘게 일하는 그지만, 집에서는 마치 영혼이 빠진 듯 그렇게 앉아있을 때가 많았다. 바깥 일에 지친 탓이다. 어머니는 그런 딸을 볼 때마다 깊은 시름에 신음하곤 했다. 마리아는 종종 그 고통스러운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나곤 했다.
“마리아.”
루첼라이 부인이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아는 천천히 일어나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괴로워하는 어머니의 뺨에 입을 맞추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미의 무릎에 뺨을 대자 루첼라이 부인의 따뜻한 손이 마리아의 머리 위에 얹혔다. 마리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정적 속에서 시간이 흐른다. 루첼라이 모녀는 그렇게 말 없이 함께 시간을 보냈다.

마리아 루첼라이는 루첼라이 가문의 양녀다. 루첼라이 부인은 제 배 아파 낳지 않은 소녀를 무척이나 아꼈다. 마리아는 그런 어머니를 극진히 따랐다. 교회일도 공방일도 어머니 말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무척이나 순종적인 딸이었고 마음씀씀이가 섬세했다. 루첼라이 부인의 마음이 상할 일은 하지 않았고, 기뻐할만한 일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했다. 불행한 사고로 두 손을 잃지만 않았어도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딸이었으리라.
루첼라이 부인은 종종 마리아의 잃어버린 두 손을 붙들고 오열하곤 했다. 그런 부인을 마리아는 냉랭한 표정으로 바라보곤 했는데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함께 아파하는 것으로 어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섬세한 배려였다. 마리아는 손이 없어도 바느질을 하고 기도를 할 수 있었다. 저에게 아무것도 아닌 일들을 어미가 아파하는 것을 두고 보기 마음 아파 그토록 차갑게 구는 딸이었다. 루첼라이 부인은 때로 그런 마리아의 눈초리에 속상해하곤 했지만 근본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마리아는 병약했다. 곧잘 앓았지만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공들여 분을 칠해 핏기 없는 뺨을 숨겼고 아프고 힘들어도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남 몰래 앓는 소녀의 진정한 모습을 아는 것은 고작해야 어미인 루첼라이 부인이 다였다. 부인은 자존심 강한 딸의 의사를 존중해 바깥으로 마리아가 아프다는 소문이 돌지 못하도록 하인들을 단속했다. 정기적으로 몸상태를 살피러 오는 의사는 신심 깊은 루첼라이 부인이 교회에서 구한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마리아는 어머니의 꼼꼼한 배려 속에서 외부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고 살았다. 루첼라이 부인의 바람대로 정원에 나가 바람을 쐬기는 했다. 외출은 자유로웠으나 나가고 싶지 않았다. 신심 깊은 세르미어의 신자들이 사는 마을에서 피라도 토했다가는 눈도 깜빡하기 전에 소문이 퍼질 터였다. 손이 없는 양녀를 거둔 어머니는 마리아가 몸도 연약하다는 사실에 가여운 시선을 받을 터였다. 자존심 강한 어머니가 그런 소리를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는 자명했다.
처음에는 자상하게 물을 것이다. 어쩌다 밖에서 피를 토했니. 많이 힘들었니. 왜 내게 말해주지 않았니. 마리아는 순종적으로 대답할테지만 그 어떤 대답도 어머니를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에게 뭇 부인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은 너무도 중요해서 조금이라도 나쁜 이야기가 돌면 크게 마음이 상했다. 그럴 때는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었다. 마리아는 침묵을 지키다가 어머니가 조금 진정되면 연신 사죄를 하곤 했다.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 말고는 어떤 행동도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외출을 좋아하지 않았다. 밖에 나가는 것보다 저택에 앉아 평온하게 바깥을 바라보는 것이 훨씬 좋았다.

몇 년 전의 일이다. 마리아 루첼라이는 여신 세르미어의 지팡이이자 재봉사였으므로 때로는 신의 사도다운 일을 해야할 때가 있었다. 시계탑 공방에 앉아 아름다운 옷을 자아내는 것으로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때로는 죽음과 마주해야하는 험한 일을 하기 위해 어머니의 곁을 떠난 적이 있었다. 어머니와 떨어져 지낸 것이 실로 얼마만의 일이었는지 마리아는 알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어머니가 그립지 않았다는 사실 뿐이었다.
험난한 모험이었다. 환자를 치료하다가 피를 쏟기도 하고, 위기 끝에 목숨을 잃을 뻔한 일도 있었다. 죽음이 제 코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마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살아남겠다. 살아남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했다.
왜 그렇게 살고 싶었는지는 몰랐다. 그저 살고 싶었다. 죽음보다 못한 삶일지라도 살아 숨쉬고 싶었다. 아픔이 오히려 살아있다는 감각을 생생하게 일깨워주었다. 어머니 곁에서는 느끼지 못한 삶이었고, 일상 속에서 잊고 있던 생이었다. 살고 싶었다.
거친 바람 탓이었을까. 죽음이 너무 가까워 위기의식이 느껴졌기 때문일까. 아니, 그저 비린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한 가지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주 강렬하고 지극히 단편적이고 의미 없는 기억이었다. 그는 새카만 파도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인지 물인지 분간하기 힘든 거센 폭풍우, 뇌까지 흔들리는 듯한 파도,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입 안을 가득 매운 소금기가 기억이 났다. 그저 그 뿐이었다. 무엇을 하는 도중이었는지, 어째서 배에 올랐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 기억이 아직까지도 떠올랐다. 근 오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었다. 마리아는 당장 배 위에 서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생생한 기억을 곱씹으며 눈을 깜빡였다. 정갈하고 아름다운 세르미어의 화원에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오늘 마리아는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왔다. 주일 예배를 막 마친 참이었다. 사제인 마리아보다도 교회 일에 적극적인 루첼라이 부인이 자리를 비웠고, 마리아는 먼저 집으로 돌아갈지 어머니를 기다릴지 고민하고 있었다. 정원을 산책하기로 한 것은 순전히 바람이 쐬고 싶어서였다. 그러니 마리아가 그 아이를 만난 것은 전적으로 우연의 일치였다.
단아한 세르미어의 정원에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주일이고 루첼라이 모녀가 다니는 이 곳은 세르미어 교단의 총본산으로 근방에서 가장 큰 교회니 당연한 일이었다. 마리아는 인파를 피해 구석진 곳으로 들어갔다. 사람을 피하다보니 정원을 가로질러 건물 뒤쪽 으슥한 곳에 발길이 닿았다. 일꾼들이나 오가는 이런 곳은 인적이 드물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때로 기묘한 상황에 놓이게 되기도 한다. 바로 지금처럼.
“사제님!”
저를 보자마자 울먹이며 달려온 여자아이를 마리아는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짧은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다가온 소녀는 마리아보다 머리 반개는 작았고 앳된 뺨에는 붉은 생기가 감돌았다. 소녀는 동그란 눈 가득 두려움을 일렁이고 있었는데, 마리아는 그런 모습이 불쾌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마리아는 소녀의 애타는 손길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손은 떨리고 있었지만, 옷 위로 전해지는 체온은 따뜻했다. 그 느낌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어머니의 손은 늘 건조하고 차가웠고, 같이 일하는 동료나 환자와 손을 맞잡을 일도 없었다. 마리아에게는 위로를 건낼 손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 정말 토벌대에 끼게 되는 건가요?”
“…….”
“그렇군요. 정말로 용 토벌전에 참가하게 되는 거군요.”
소녀는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마리아는 말 없이 소녀를 바라보았다. 예비 사제에게 주어진 복장을 단정히 갖춘 모습을 보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직 어린아이한테 너무 심한데요.'
'메디치 가문의 일입니다. 저희도 손 쓸 방도가 없군요.'
'자질이 풍부한 아가씨를 이렇게 보내다니….'
루첼라이 부인이 저택을 찾은 사제와 나눈 대화였다. 마리아는 어머니에게 절대 거역하지 않는 딸이었기에 부인은 마리아 앞에서 숨기는 것이 없었다.
린네 그라임스라고 했던가. 마리아는 루첼라이 부인이 언급한 이름을 잊는 법이 없었다. 그것이 어머니의 입에서 다시 나올 이름이건 그렇지 않건 그랬다. 그 이름이 어머니의 입에 올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억할 가치는 충분했다.
저승길에 등을 떠밀린 소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어깨를 떨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는 어깨를 마리아는 말 없이 지켜만 보았다. 자신을 누구로 착각했는지 몰라도 이 아이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운명이란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을.
린네는 그저 서있을 뿐인 마리아의 앞에서 제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여전히 마리아의 팔목을 붙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커다란 초록색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어 보석처럼 빛난다.
“많이 고민했어요. 부모님은 사제 같은 거 그만두라고 하셨거든요.”
린네는 코를 훌쩍였다.
“사실 그렇잖아요. 목숨만큼 중요한 건 없는 거잖아요. 저도 알아요. 제 실력에 가서 도움이 될지도 알 수 없다는 거요.”
마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딱히 할 말도 없었고, 괜히 입을 열었다가 분위기를 망치는 것이 꺼려졌다. 만날 사람이 누구였건 이 아이가 사지로 떠나야한다는 사실은 변할 리 없으니 잠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치만요.”
린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저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마리아도 눈을 깜빡였다. 앳된 소녀의 얼굴이 점멸했다.
“여기서 도망치는 건 제가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것들을 모두 부정하는 것만 같아서 그러고 싶지 않아요.”
“세르미어께서는 늘 말씀하셔요. 배움을 두려워하지 말라. 앎은 곧 선이니. 두려움은 무지에서 오느니라. 저는 앞으로 제게 올 미래를 알지 못해요. 그러니 배워야해요. 앞길에 무엇이 있든, 배우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어요.”
“사악한 용을 물리치고 무지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사제의 일이겠지만, 제게는 아직 그 자격이 없어요. 저는 아마 이 일을 해내지 못할 거예요.”
“죽을 생각은 없어요. 그저 제 힘이 모자랄 뿐이죠.”
“하지만 사제님.”
마리아는 문득 린네의 눈동자가 봄날에 돋아나는 새 이파리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은 여리고 연약하지만, 질기게 성장할 어린 잎사귀.
“저는 악의 위협에 굴복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게 하고 싶어요. 변명하듯 덧붙인 마지막 말은 혼잣말처럼 작았다. 마리아는 그런 린네를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소녀는 헤헤 웃더니 뒤늦게 부끄러워했다.
“아이참. 제가 너무 감상적이었죠.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이만 해야할 일이 남아있어서 가볼게요.”
린네는 새삼스럽게 두 손으로 마리아의 팔목을 꼭 붙들고 몇 번이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마리아는 뛰어가는 린네의 치맛자락을 시야 한 구석에 담으며 제 팔목을 내려다보았다. 화끈거리는 열기가 사라지질 않았다. 귓가에서 바람이 웅웅거렸다.

마리아는 곧 그 일을 잊어버렸다. 시계탑의 일상은 매일 정신없이 바빴고, 마리아는 몸이 좋지 않아서 사소한 일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루첼라이 부인은 린네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마리아가 기억의 바다 속에서 린네의 이름을 재발견한 것은 순전히 시계탑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토벌대에서 발생한 부상자가 시계탑에 실려왔다는 소리다.
“사제님.”
토벌대에서 떨어져나와 시계탑에 눌러앉은 환자는 흰 머리가 제법 근사한 중년의 남자였다. 그는 어디서 들었는지 마리아가 이전 토벌대에서 환자를 돌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꾸만 말을 거는 그를 매번 쫓아내기도 귀찮아서 대충 이야기를 받아주었더니 이제는 마리아를 찾아오는 지경이 되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그게…….”
무어라 떠드는 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수선에 매진하는 마리아의 귀가 익숙한 이름을 잡아냈다.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이번 토벌대는 확실히 지원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어찌나 밥이 맛이 없던지….”
“그거 말고요.”
“네?”
그는 마리아가 반응을 보이자 눈에 띄게 기뻐했지만, 마리아가 무엇에 관심을 보인 건지 몰랐다. 한참을 끙끙거린 끝에 겨우 두 사람은 이야기를 맞춰갈 수 있었다.
“아아, 린네라는 아이 말이군요. 참 귀여운 애였죠. 너무 어려서 걱정했는데 제법 솜씨가 좋더군요.”
“그런가요.”
“어린 여자애가 그런 험지를 돌아다니니 다들 안쓰러워 많이 챙겨줬지요. 불행한 사고만 없으면 살아 돌아올 겁니다.”
그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마리아는 왠지 그 말에 가슴이 일렁이는 묘한 경험을 했다. 환자는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지만 마리아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토벌대가 돌아왔다. 마리아는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토벌대의 귀환을 보기 위해 처음으로 혼자 외출을 했다. 본관 앞 정원은 토벌대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고, 한쪽에선 시계탑과 협력하는 사제들이 환자를 돌볼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마리아는 자연스럽게 시계탑 공방의 사제들과 섞였다. 토벌대는 늦은 저녁에 도착했다. 멀리서부터 소란이 번졌다. 마리아는 이유 모를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환자들이 다른 토벌대원들보다 빠르게 이송되어 왔다. 시계탑의 천막은 분주해졌다. 마리아는 차분하게 환자를 보면서 정문을 흘끔거렸다. 마리아만의 일은 아니었다. 토벌대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는 아마도 모두가 그럴 것이다.
대부분의 응급조치가 끝나갈 무렵, 토벌대 본대가 정원에 들어섰다. 사방에서 우는 소리와 비명 소리, 가족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마리아는 상대적으로 상처가 가벼운 환자를 보면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엄마, 아빠!”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마리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인지 잊지 못한 목소리와 얼굴이 거기 있었다. 울먹이는 소녀가 짐을 내팽개치고 달려갔다. 곱게 차려입은 중년 부부가 마찬가지로 울먹이며 소녀에게 달려들었다. 마리아는 세 가족이 서로를 부둥켜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진찰을 받던 환자가 마리아를 부를 때까지 계속 그랬다.
세 가족은 곧 마리아의 앞을 떠나갔다. 토벌대를 위한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외침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마리아는 그들이 곁을 떠나는 것을 어쩐지 아쉽게 느끼며 환자를 보았다. 린네는 다친 곳이 없는 듯했다. 진찰을 받아보자는 부모의 요청에도 돌아오는 길에 검사를 받았다며 사양했다. 마리아는 왜 가슴이 술렁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만찬이 시작되자 시계탑의 천막은 금방 한가해졌다. 본대까지 걸어올 수 있는 환자 중에 중환자는 없었고, 그나마도 처치를 끝내놓으니 다들 천막을 떠났다. 마리아는 빈 천막에 앉아있었다. 만찬이 끝나고 천막을 걷으면 시계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마리아.”
낯익은, 아니, 친숙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그는 갈등했다. 아까부터 술렁이던 가슴이 폭풍우를 만난 듯 날뛰고 있었다.
“얘, 마리아.”
루첼라이 부인은 그가 제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여겼는지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가 아주 멀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파도가 높게 일고, 바람인지 파도인지 분간하기 힘든 폭풍우가 몰아쳤다. 배가 뒤집히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어서 손에 들고 있는 것이 검인지 총인지도 몰랐다. 바다는 목숨을 탐내 날뛰었고, 그는 살아남기에 바빴다.
“마리아. 대답을 해야지!”
마침내 루첼라이 부인이 소리를 쳤다. 늘 우아하고 차분한 부인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는 그제서야 자신을 부른 것이 루첼라이 부인임을 알아챘다.
아, 그랬다. 루첼라이 부인이었다. 그 날 자신을 건져낸 것은.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비로소 얼굴을 마주한 루첼라이 부인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정신을 빼놓고 있구나. 불렸으면 대답을 하렴.”
그는 침묵했다. 루첼라이 부인의 고운 이마에 주름이 졌다.
“저는 마리아가 아니에요.”
그가 말했다. 루첼라이 부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부인은 당황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무슨 소리니, 얘야.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보구나.”
그는 처음으로 부인 앞에서 인상을 찌푸렸다. 루첼라이 부인, 아니, 자케트 루첼라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래도 네가 많이 아픈가보구나.”
자케트가 말했다. 노부인의 눈빛은 장군과도 같았다. 데일 듯이 뜨겁게 타오르는 눈길을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아니요. 루첼라이 부인. 저는 아프지 않아요.”
“마리아!”
“당신의 마리아는 죽었습니다, 부인.”
그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 떴다. 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석양을 받아 붉게 빛났다.
“나는 이리누슈카(Иринушка). 바다와 겨루고 바다를 다루는 어부입니다.”
바람이 불었다. 파도는 거칠었다. 양손에는 장총과 검의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거대한 괴물이 배 밑에서 맴돌았다. 두려웠다. 그리고 즐거웠다. 바다와의 목숨을 건 사투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리누슈카의 삶이었고, 모든 것이었다. 소녀는 여인이 되었다.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리누슈카는 파도 앞에 섰다. 바다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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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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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시나요? 불편한 곳이 있습니까? 이 광대의 재주에 무슨 문제라도?”
“그런 거 아니야.”
에이치는 피식 웃었다. 와타루가 얼굴을 바짝 들이댄 덕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배려해준 걸까. 조금 마음이 따뜻해진다.
텐쇼인 에이치가 갑작스런 발작으로 입원한지도 벌써 사흘째였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병실을 오갔다.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토리와 유즈루, 반 친구들에 홍차부 후배들까지. 작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인선의 방문객들이 오갔고, 우연히 마주친 이들은 서로 얼굴을 찌푸리거나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귀여운 일학년 후배들이 방문한 날에는 발작이 있어서 지쳐있는 상태였는데, 맑고 명랑한 목소리를 들으니 어찌나 기뻤는지 모른다.
“에이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와타루가 말했다. 언제 움직인 건지 에이치에게 햇빛이 드는 자리에 커튼이 쳐져 있었다. 와타루는 에이치의 허벅지에 팔꿈치를 얹고 호기심 많은 소녀마냥 턱을 괴고 있었다. 의뭉스러운 미소를 띈 그에게서는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도 무슨 기술이겠지 생각하니 신비롭기 짝이 없었다.
“와타루, 널 생각하고 있었어.”
거짓이 아니었다. 병문안을 온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첫날부터 꾸준히 에이치의 곁을 지켜준 것은 와타루였다. 그는 면회 금지 명령을 받고 홀로 쓸쓸히 잠든 에이치의 병실에 몰래 숨어들었다. 새벽녘에 눈을 떠서 어찌나 놀랐는지 다시 발작이라도 일어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의사가 알면 기겁하겠지만, 에이치는 솔직히 와타루의 행동이 기뻤다. 모험을 하는 기분이라 두근거리기도 했다.
“호오, 절 말인가요? 어떤 생각인가요?”
와타루는 동화에 나오는 고양이처럼 고개를 다소 무서울 정도의 각도로 꺾었다. 그 모습을 에이치는 그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와타루의 기예는 끝이 없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랍기보다는 그저 신비로웠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
“황제폐하를 기쁘게 하는 일이야말로 광대의 사명이랍니다. 아프고 힘들때면 외쳐주세요. 히비티 와타루!”
침대 위를 데구르르 굴러 원심력으로 몸을 세우고, 한 발을 곧추세운 채 세 바퀴를 돌아 한 팔을 높이 치켜든 채 아슬아슬한 자세로 선다. 에이치는 와타루의 묘기를 웃으며 감상했다.
“이제 황제가 아니라니까.”
담담하게 덧붙인 말에 와타루가 호들갑을 떤다.
“황제라는 호칭을 싫어하시나요? 이 와타루, 에이치가 황제의 역할을 제법 즐기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한층 흥이 났지요. 역할을 즐기는 배우와 함께하는 무대만큼 즐거운 것은 또 없으니까요.”
옆에 케이토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얼굴을 구겼을 테다. 와타루는 말을 잇는 사이 아무 이유 없이 허공으로 뛰어오르고 빙글빙글 돌며 포즈를 잡았다. 사이사이 놓여있는 기물을 스치지조차 않는 재주가 용했다.
“글쎄.”
에이치는 웃으며 살짝 시선을 내렸다.
“솔직히 말하면 싫지는 않았다고 생각해.”
“추측형이군요?”
“응.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황제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조용히 답하는 에이치는 평소와 같았다. 망가져버린 과거의 계획을 이야기하는 에이치의 표정은 반 아이들의 소란을 구경하며 웃음짓는 그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와타루는 알고 있지? 내가 뭘 꿈 꾸었던 건지.”
“독심술은 할 줄 모릅니다.”
에이치는 킥킥 웃곤 와타루를 쳐다보았다. 겨울철 하늘처럼 여리고 차가운 시선이 와타루의 흐린 보랏빛 눈을 꿰뚫었다.
“감사하고 있어. 너희들의 협조에. 너희가 순순히 협조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틀림없이 마지막까지 버티지 못했겠지.”
“딱히 협조한 것도 아닙니다만.”
에이치는 다시 웃었다. 그런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미움 받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에이치가 와타루의 목소리를 듣고 가졌던 작은 희망일 뿐이었다.
'쉿. 안 돼요. 그런 걸 말하면. 그랬다간 저는 당신을 경멸해버리고 말겁니다.'
아득한 추억 속 와타루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래, 그때도 지금하고 비슷했다. 쓰러져서 보건실에 누워있는 에이치를 남몰래 찾아온 와타루는 어김없이 홀로 쇼를 벌였다. 와타루에게 무대가 아닌 곳은 없었기에. 무대라는 이름이 아닌 무대를 그는 훌륭하게 소화했다.
'저는 그저 악역인 걸로 충분한 건가요?'
그가 물었었다. 완전히 소진된 체력에 시한폭탄까지 안고 있던 에이치는 겨우 눈만 뜬 상태였다. 어쩌다 자신이 여기에 누워있는지, 지금 상황은 어떤지 정리해보는 중이었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에이치는 다시 쓰러질 것처럼 놀랐고, 와타루는 즐거운 듯 짐짓 못마땅한 척을 했다. 그게 그가 자신에게 부여한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배우를 모른척하시면 곤란합니다. 당신이 준비한 무대가 아닌가요. 스스로 주역이 되기 위해 자신만의 무대를 준비하는 적극성이 훌륭합니다. 솔직히 저는 반했다고요. 그런 당신이 절 홀대하면 서운해서 울다가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서운함을 연기하는 그의 목소리는 진지하면서도 장난스러웠다. 어딘가 이것이 단순한 연극이 아님을 시사하는 듯한 우스꽝스러움이 있었다.
'자자, 이제 역할에 충실해지세요. 어설픈 표정은 감추고 가면을 씁시다. 당신에게는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황망한 표정을 애써 감추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에이치는 언제나처럼 우아하고 아름답게, 침착하고 냉정하게 질문한다.
'이런 곳까지 무슨 용건일까, 히비키 군. 내일 라이브에 대해 질문이라도 있어?'
'물론입니다. 아아, 몇 번이나 대본을 훑어도 제 역할을 잘 모르겠어서요. 천재라는 소리까지 들어보았지만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이를 어찌해야하나 고심하다가 연출가이자 주연 배우인 당신에게 질문을 하러 왔답니다.
이 히비키 와타루, 어떤 역할이라도 연기해보일 자신은 있습니다만, 나이프에 찔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악당답게 쓰러져야할지 당신의 품에 안겨 눈물 섞인 키스를 해야할지 모르겠어서요. 혹시라도 잘못된 연기를 했다간 모처럼 큰 무대가 망가져버립니다♪'
'과장이 심하네. 『fine』는 리더가 따로 없지만 나는 특별한 역할이 없는 덤인걸. 나보다는 다른 멤버들에게 묻는 게 어떨까.'
와타루가 오만하게 웃었다. 섬찟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 고소를 머금자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마저도 날카롭게 벼려졌다. 에이치는 따가운 햇살에 눈살을 찌푸렸다.
'바보취급하지 마시지요. 이런 각본이지만 주연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부족한 배우는 아니랍니다. 당신이 적으로 삼은 상대는 만만하지 않아요, 텐쇼인 에이치 군.'
에이치는 그 순간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와타루가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워서? 아니면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른 순간이기 때문에? 어느 쪽이건 와타루는 넋을 잃은 에이치를 향해 연민을 보냈다.
'피곤해보이네요. 하긴 병상이니까요. 쓰러졌다지요?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떠들썩한 걸 좋아해서요.'
그 순간부터의 기억은 흐릿했다. 에이치는, 자신은 뭐라고 대답했더라?
'…힘내주세요. 무대를 연출한 당신에게는 누구보다도 먼저 내일을 그릴 기회가 주어질 거라고요. 놓치면 아깝잖아요?'
“에이치, 에이치.”
누군가 어깨를 흔들었다. 보건실 창문을 뒤로 하고 선 2학년 와타루의 그림자에 병실 창문을 등진 3학년 와타루의 그림자가 겹쳤다. 에이치는 지금 자신이 2학년인지 3학년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와타루는 드물게 진지한 얼굴이었다. 에이치는 조금 당황했다. 정말 위험할 때가 아니고서야 와타루는 그런 표정을 하지 않았다. 어째서? 방금 자신은….
아.
에이치는 웃었다. 자신은 아직 입원 중이었다. 와타루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괜찮아. 조금 피곤한 것뿐이야.”
“에이치.”
“와타루는 은근히 걱정이 많다니까.”
왠지 웃음이 나왔다. 지나간 추억이 떠오르자 왠지 그렇게 되었다. 와타루의 눈빛이 일순 흐려졌다.





와타루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꺼풀 사이로 다소 흐리게 비치는 에이치의 색이 옅었다. 창백하기 짝이 없는 낯이 가슴에 박히는 듯하다.
히비키 와타루는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가진 바 재주가 탁월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었다. 얻고자 하면 얻을 수 없는 것이 없었고, 이루고자 하면 이룰 수 없는 것이 없었다. 주변에는 늘 사람이 따랐다. 대부분 와타루의 요란한 성질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떠나갔지만 그것이 그리 슬프지는 않았다. 와타루에게도 그런 이들은 필요가 없었던 탓이다. 그래서 와타루는 만나는 모든 이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전부 보였다. 그건 시험이었다. 이걸 전부 보고서도 내 곁에 있겠느냐는 메세지였다.
와타루의 메세지는 강렬해서 못 알아듣는 사람이 드물었다. 언제부터인가 와타루의 곁에는 사람이 없었다. 멀리서 동경의 눈빛을 보내는 팬은 수없이 많았으나 스쳐가는 인연일 뿐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바란 바였다.
와타루에게 처음으로 벗이 생긴 것은 작년의 일이다. 그것은 의도치 않은 사고 같은 것이었다. 사고를 일으킨 것은 바로 눈 앞의 이 소년이다.
텐쇼인 에이치.
꿈이 크고 희망을 품지 않는 소년. 천진난만한 얼굴로 누구보다 잔인한 계획을 꾸미는 야심가. 그는 누구보다 원대한 미래를 그렸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꿈의 계단을 올랐다. 비록 그 끝에서 그가 무엇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와타루.'
에이치가 웃었다.
'와타루.'
에이치는 울었고,
'와타루….'
에이치는 절망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악에 받친 사투도 감동의 순간도 보았다. 에이치가 와타루를 적으로 세운 그 순간부터, 와타루는 줄곧 에이치와 함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텐쇼인 에이치의 마음 속에는 커다란 벽이 있었다.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바꾸고자 하는 여린 소년의 마음 속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와타루는 그것을 알기에 에이치와 함께하기로 결심했다. 그건 정말이지 쉬운 결정이었다.

역시 작년의 일이다. 신입생이 들어오고 새학기가 시작되기 조금 전, 오기인 토벌이 끝나고 모든 것이 소강 상태였던 그 시기에, 와타루는 에이치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대단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심심했다.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학교는 학생회가 제도를 개편한다고 바쁜 것 외에는 조용했다. 학생회는 아직 가라앉지 않는 분란과 다툼을 사정을 묻지 않고 잡아들였다. 학생회장이 된 에이치는 와타루와의 경연 이후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부학생회장인 케이토는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학교에 나와 학생회를 움직였다.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삼엄하고 고요해졌다.
와타루는 연극부실에 들어앉아 그 모든 변화를 흘려보냈다. 알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와타루의 길은 연극이었고 업계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는 입장에서 교내 제도에 연연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신경쓰이는 것은 있었다.
'그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요.'
처음엔 그저 사소한 의문이었다. 와타루가 만나본 텐쇼인 에이치는 흥을 탈 줄 아는 사람이었다. 와타루의 요청에 화를 내지 않고 박자를 맞춰준 것만 봐도 그랬다.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에이치의 계획에는 낭만이 가득했다. 그랬기에 와타루는 그가 기획한 무대에 서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좀 더 멋지고 재밌는 미래를 보고 싶었다. 지금처럼 삭막하고 숨 막히는 학교가 아니라 즐길거리가 많고 흥겹게 뛰어놀 수 있는 미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fine』멤버 두 사람이 전학을 갔다고 했던가요.'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마지막 경연에서 보았던 에이치의 유닛은 무너지기 직전의 성이었다. 그때 그 분위기가 반영되어버린걸까. 그런 거라면 실망인데. 파랑새 군의 협조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왔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친구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조금 심술을 부린 것뿐이었는데 이런 결과가 될줄 알았다면 끼어들지는 않았을지도?
'뭐, 재미있긴 했으니까요.'
와타루는 홀로 남은 연극부실 소파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늘상 귀찮게 굴던 호쿠토가 없어서 한가했다. 쫓아내려고 해도 쫓아지지 않는 소년을 와타루는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다. 연기는 못하지만, 어쩌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 와타루도 호쿠토도 연극과가 아니고 이곳은 그저 동아리일 뿐이니까.
'예상치 못한 사고만큼 즐거운 것도 없으니까요.'
와타루는 뺀질뺀질하게 말하고는 히죽 웃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에이치가 왜 학교를 이런 식으로 방치해두는지 궁금하다면 물어보면 된다. 와타루는 폴짝 뛰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치는 입원 중에도 이따금 남몰래 학교에 나타난다. 부잣집 도련님의 취미생활인지 갑갑한 병원 생활의 작은 활력소인지는 모르지만 그랬다. 그리고 남몰래 연습실을 빌리는 것이다. 와타루는 에이치가 주로 사용하는 연습실이 어딘지 알았다.
발걸음도 가볍게 와타루는 그곳으로 향했다. 에이치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가보고 없으면 내일 또 가면 될 일이었다. 지금 와타루는 심심했고, 그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가는 길에 다른 재밌는 일이라도 발견하면 더 좋다.
기웃.
학생회실을 슬쩍 훔쳐보고,
기웃,
에이치의 교실도 한 번 훔쳐보았다. 에이치는 없었다. 와타루는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두군데 모두 들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폴짝거리며 뛰어가는 와타루를 지나가는 학생들이 괴이한 것을 보는 듯이 보았다. 와타루는 그저 설렐 뿐이었다. 에이치가 있을까. 있다면 어떤 상태일까. 이번엔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어떤 역할을 주면 즐거워할까. 오기인 친구들도 잘 맞춰주지 않는 와타루의 장난을 받아준 에이치였다. 설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습실에는 사용중 팻말이 걸려 있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소리를 냈다. 와타루는 소리없이 문을 열었다. 살짝 안을 들여다보고 만약 에이치가 있으면 깜짝 놀래켜줄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이면? 우선 보고 생각하자.
문 틈으로 먼저 머리카락이 들어가고 그 다음으로 하얀 손가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fine』의 곡이 들려왔다. 와타루는 안을 들여다보기 전에 먼저 음악을 즐겼다. 아, 에이치의 목소리다. 키득키득 웃고는 마침내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라?
연습복을 입은 에이치가 연습실 한가운데 서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우두커니. 넋을 잃은 듯한 표정이 거울에 비쳤다. 와타루는 조용히 연습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와타루가 거기 서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이치는 반응이 없었다. 그는 멍하니 서서 거울을 보다가 쓸쓸하게 웃었다. 노래를 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다물고, 다시 입을 벌렸다 다물기를 몇 번. 곧 그는 포기한 듯이 고개를 돌린다.
'반갑습니다, 텐쇼인 군.'
와타루는 양 손을 흔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한층 에이치의 초췌한 얼굴이 잘 보였다. 푸른 눈이 시꺼멓게 죽어있었다. 시체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낯빛이 그가 왜 학생회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는지 설명해주었다.
'히비키 군…?'
에이치가 중얼거렸다. 질문이라기보단 혼잣말이었다. 뒤늦게 그의 눈이 커다래졌다. 와타루는 개의치 않고 성큼성큼 에이치에게 다가갔다.
'이야. 아프다고 들었는데도 연습하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하기사 『fine』는 이제 학교를 대표하는 유닛이니까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fine』는 이제 없어.'
에이치가 속삭이듯 말했다. 와타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산이야. 오기인은 쓰러졌고, 새로운 규칙이 들어서기 시작했는걸. 학생회는 케이토가 맡아주었으니 케이토의 유닛인 홍월이 학교를 이끌어줄거야.'
'그게 무슨 말인가요. 당신은요? 쓰러질 정도로 힘내지 않았습니까. 무대의 주역은 하스미 군이 아니라 당신이었을텐데요.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었습니까?'
'놀리지 마. 전부 실패한 걸 봤잖아.'
에이치는 쓰게 웃고 와타루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한쪽에 놓인 물통을 들어 목을 적시더니 와타루에게 내밀었다.
'마실래?'
'괜찮습니다. 그보다 실패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나는 실패했어. 히비키 군. 감히 너희들 같이 위대한 천재들을 깎아내리려 했던 벌이겠지. 나는 이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에이치는 그제서야 다시 와타루를 보았다. 맑은 겨울날의 하늘 같던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와타루는 순간 말을 잊는다.
'미안해. 너희들에게 악몽을 선사한 건 나야. 마음껏 원망하도록 해.'
생각지도 못한 사과였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와타루로서는 거의 겪어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정말,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그게 답니까?'
와타루는 화가 났다.
'그게 다야. 미안해. 지금은 너희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하지만 사람들 눈에 띄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 줄게. 돈이 제일 좋겠지? 계좌를 불러주겠어? 마음에 찰지는 모르겠지만 원하는 만큼 보상을 할테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와타루는 제가 뭘 하는 건지 몰랐다.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에이치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환자에게,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사람에게 할 행동이 아니었다. 에이치가 신음하는데도 마음이 가라앉기는 커녕 열이 올랐다.
'내가, 우리가 고작 그까짓 보상을 받으려고 당신에게 승복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진심으로? 당신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까?'
'히비키….'
'입 다무세요. 그 입으로 제 이름을 부르지 말란 말입니다.'
와타루가 윽박질렀다. 에이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와타루는 한동안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에이치를 벽에 누르고 서있었다. 너무 화가 나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할 말이 너무 많은데,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와타루는 힘겹게, 정말로 힘겹게 에이치를 놓아주었다.
에이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와타루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건 연극이 아니었다. 와타루는 피에로가 아니었고, 에이치는 배우도 연출자도 아니었다. 그곳은 무대가 아니라 현실의 한복판이었다. 와타루는 고등학교에 입학해 처음으로 역할이 아닌 자신으로 섰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뭔데?'
와타루의 질문에 에이치가 고개를 들었다. 저번 대화가 떠올랐는지 조금은 여유가 돌아온 듯한 모습이었다.
'어째서 학생회가 수행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습니까?'
'그건….'
에이치는 복잡한 낯으로 눈을 감았다.
'미안해. 그것말고는 할 말이 없어.'
'사과하지 마세요. 당신은 사과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에이치는 힘겹게 심호흡을 했다. 다시 눈을 떠 와타루를 바라보는 눈에는 조금쯤 냉정이 돌아와있었다.
'몸이 아파서 참여할 수가 없었어. 나는 아직 입원 상태야. 가끔 외출하는 정도는 문제가 없지만 본격적으로 활동하기엔 무리가 있어. 사실은 외출도 허락을 받을 수 없어서 몰래 나왔으니까.'
'죽으려고 작정한 겁니까?'
'그럴 리 없잖아. 몸이 녹스는 느낌에 좀이 쑤셨을 뿐이야.'
'당신….'
아프다는 변명에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텐쇼인 에이치가 병약하다는 사실은 초반부터 소문이 나있었다. 그저 화가 났다.
'이렇게 쓰러져 있을 거면 대체 왜 사건을 일으킨 겁니까.'
물을 생각은 없었다. 아픈 사람에게 왜 아프냐고 묻는 것만큼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에이치가 아픈 표정을 지었을 때는 함께 마음이 아팠다.
'판단 미스야. 내게 조금 더 체력이 있을 줄 알았거든.'
애써 웃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대사가 틀렸습니다.'
와타루가 말했다.
'체력 같은 건 진작에 계산하고 있었을 겁니다. 처음부터 그것을 고려하지 않았을 리가 없어요. 전교생이 당신이 병약하다는 걸 아는데, 그 정도로 패널티가 큰 문제를 당신이 고려하지 않았을 리가요.'
'그래?'
'당신이 계산하지 못한 건, 당신의 체력이 아니라 우리, 오기인의 능력이겠지요. 틀립니까?'
와타루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광기 어린 삐에로는 어린아이를 겁주는 게 제 일이라는 듯 섬뜩하다.
'슈가 그렇게 쓰러진 건 우리에게도 예상 밖의 일이었습니다.'
'뭐?'
'슈는 오만하고 자존심이 강하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줄곧 경고했습니다. 그에게. 당신을 주의히라고. 고집부리지 말고 대책을 세우라고요.
그가 귀 기울여 듣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막을 필요는 느끼지 못 했지요.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는 처음부터 그리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이어지지 않았을 인연이 오기인이라는 이름 하에 잠시 맺어졌을 뿐이니까요.
우리 다섯을 하나로 묶고자 노력한 것은 슈였습니다. 우리는 그의 노력에 의해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소중하기 여겼지만, 동시에 알지 못했습니다. 어찌 알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는 친구가 아니었는걸요.
슈가 그렇게 무너졌을 때 우리는 당황했습니다. 저도, 레이도, 카나타도 마찬가지입니다. 슈는 오만한만큼 강인해보였기에 우리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괜찮으리라 여겼습니다. 우리가 걱정한 것은 오히려 나츠메 군이었지요. 그는 어리고, 아직 불쾌한 꼴을 당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몰랐던 겁니다. 슈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요.
내 친구들과 있었던 다른 라이브 대결을 기억할 겁니다. 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당신에게 패배한 것에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못마땅해 했을지는 몰라도요. 저와 제 친구들이 아파한 것은 당신에게 패배하고 오명을 뒤집어쓴 탓이 아닙니다.'
그간 쌓인 것들을 쏟아내듯이 한참을 떠들었다. 와타루의 눈에도 울분의 증거가 남아있었다. 에이치가 그것을 홀린듯이 바라보았다. 와타루는 그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겼다.
'우리가 슬퍼한 이유는 친구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었다. 그들은 오만했기에 그토록 어리석었다. 겨우겨우 얻은 친구 하나를 지키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었다. 다른 형들이라도 살려보겠다며 애쓰는 막냇동생의 손발을 묶어또 한 번 상처입힐만큼 어리석었다. 그것이 그들에게 상처라는 것을 알면서도 행할 수 밖에 없을만큼 어리석었다.
와타루도, 레이도, 카나타도 그랬다. 그들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뛰어났으나 제각각의 방식으로 어리석었다.
레이는 자신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 명분임을 알면서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라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느라 제 주변 사람을 챙기지 못했다. 심할 때는 자신의 몸조차 챙기지 못할 때가 많았다.
카나타는 사람의 마음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무엇이든 이루어낼 힘이 있어도 무엇을 해야하는지 모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카나타는 모두를 사랑했지만,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와타루는.
와타루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죄가 이리도 깊었다.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갚을 수 없을 뿐이다. 그것을 에이치가 모르는 게 화가 났다. 말도 안 되는 분노임을 알면서도 화가 났다.
'저는 슈를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누가 어떻게 되더라도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여겼지요. 그저 지금 이 순간 웃고 있으면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무엇이 있어도 상관이 없었어요. 슈는 제 앞에서 웃고 있었고, 저는 그걸로 만족했습니다. 어리석었어요. 슈가 어떤 사람인지, 어째서 그토록 열광적으로 활동하는지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보았어야 했습니다.'
에이치는 무심코 손을 뻗는다. 와타루의 보랏빛 눈동자에서 물웅덩이가 차올라 넘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뺨에 손을 대었다가 불에 댄 듯 놀라 떨어진다.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와타루는 중얼거렸다. 와타루는 그게 에이치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몰랐다.

“슬슬 검진 시간이야.”
에이치가 말했다. 그 말에 와타루도 시계를 쳐다보았다. 곧 의사가 들이닥치면 면허가 금지된 시간에 외부인이 드나들었다는 것을 들키게 된다. 그건 와타루에게도 에이치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경비가 삼엄해져서 들어올 수 없어지면 곤란했다.
“제가 어서 가기를 바라는 겁니까?”
와타루가 휴대폰을 만지며 말했다. 전혀 불만이 없는 듯 그저 장난스러운 목소리였다. 에이치가 피식 웃었다.
“내일도 올거지?”
“물론이죠. 주인의 곁에 있는 것이 광대의 의무랍니다.”
“넉살은.”
와타루는 흘긋 눈을 들어 에이치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에이치가 왜 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와타루는 그저 웃으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몰래 오는 상황에 열기구를 병원 근처에 대어놓을 수는 없어서 조금 먼 곳에 둔 상태였다. 때맞춰 불러오려면 연락을 해야했다. 슬쩍 창밖을 보니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에이치, 아기씨(姫君)가 들떠있던데 무슨 이야기를 했던 겁니까?”
“별 거 아니야.”
“숨겨야하는 건가요?”
“『fine』일정을 조금 알려줬어. 그랬더니 금세 들떠서는 꺄꺄 소리를 지르지 뭐야.”
에이치가 즐거운 듯 웃었다. 와타루의 미소가 얼핏 굳었다.
“순회 공연 이야기였나보네요. 어쩐지 제게는 비밀이라고 큰소리를 치더라니요.”
“그랬어?”
에이치가 키득거렸다. 와타루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창틀에 가볍게 기대었다. 기구가 가까이 날아오고 있었다.
“에이치.”
“응.”
“무리하면 안 됩니다.”
“걱정 마. 그래서 이렇게 얌전히 누워있는 거잖아.”
“쓰러졌던 사람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말이죠.”
와타루는 어깨를 으쓱였다. 에이치는 듣지 못한 것처럼 웃고만 있다.
“내일 봐.”
창밖을 본 에이치가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히.”
와타루는 언제나 그렇듯 우아하게 인사를 했다.
가벼운 몸이 훌쩍 창밖을 날았다. 뚝 떨어지는가 싶더니 창밖을 지나던 열기구가 출렁거렸다. 에이치는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달려갔다. 기구에 연결된 밧줄을 잡은 와타루가 묘기하는 듯한 포즈로 에이치에게 인사를 건냈다. 에이치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내일 꼭 와야해!”
바람에 색이 옅은 머리칼이 살랑살랑 흔들린다. 와타루의 사랑을 담은 인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바람이 서늘하고 햇살이 따뜻한 날이었다. 에이치는 입이 아플만큼 웃었다. 행복한 웃음이었다.

 

 

 


아! 몰라 수정 안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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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급시 폭주하는 신기사를 감금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회의실 지하 공간은 지독히 답답한 공간이었다. 공기는 텁텁하고, 실내에는 기분을 환기시킬만한 물건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지암은 솔직히 이런 곳에서 태연히 잠이나 자고 있는 미캉이 놀라웠다. 역시 가둬둔 거 아니야? 의심이 뇌리를 스친다.

그들, 그러니까 세츠와 지암이 이곳을 알게 된 건 우연한 기회였다. 지암이 누르라는 어린 신기사가 툭하면 회의실로 향하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 것이 시작이었다. 누르는 제법 어린아이가 많은 중앙청에서도 눈에 띄는 신기사였다. 히로와 함께 중앙청 초창기 멤버라는 누르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회의에 끼거나 중앙청 주요 인사들과 어울리는 일이 많았다. 호기심이 많아서 위험한 곳에도 곧잘 자원했고 붙임성도 좋았다.

그런 누르가 특별히 사람이 없는 시간을 골라 회의실에 출입하는 모습은 눈길을 끌었다. 앙투아네트나 안화에게 물어도 수상하게 웃을 뿐이다. 결국 지암은 누르를 직접 붙들고 물어야했다.

「회의실 지하에는 최초의 지휘사가 있다.」

그게 누르에게서 얻은 정보였다. 최초의 지휘사.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자세한 사정을 묻고 싶었지만, 누르는 히로의 부름을 듣곤 쪼르르 달려가버렸다.

지암은 고민 끝에 자신이 알아낸 것을 세츠에게 털어놓았다. 늘 그렇듯 세상에 심각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웃던 세츠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졌다.

“회의실 지하라고?”

“응. 무슨 문제라도 있어?”

“거긴 폭주하는 신기사나 지휘사를 억류하기 위한 장소야. 안화가 만약을 대비해 만들었어. 중앙청에서 오래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아는 장소지만 한 번도 사용된 적은 없을텐데.”

“뭐?”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일어난 것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이 없을 정도로 동시였다.

 

 

그들이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 이야기는 지금 중요하지 않다. 그닥 재미도 없을 것이다. 세츠와 지암은 그저 남몰래 지하실의 문이 열려있다는 것과 그곳에 앳된 얼굴의 여자아이가 잠들어있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니까. 그 사이 중앙청 지키미들과 작은 갈등이 있었지만 누가 그런 것을 궁금해하겠는가.

어쨌든 지암은 지금 회의실 지하에 있었고 최초의 지휘사라던 소녀는 그의 눈 앞에서 본격적으로 다시 꿈나라로 떠나려는 듯했다. 잠깐, 꿈나라?

“이봐. 일어나요.”

지암은 미캉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적당히 성희롱이 되지 않을만한 부위를 콕콕 찔러보았지만 인상조차 찌푸리지 않는다.

“저기요.”

정말로 미동조차 없다. 지암은 고개를 푹 숙였다가 일어나 작은 침대에 엉덩이를 걸쳤다. 작고 답답한 방에는 최소한의 생활을 위한 물건 외에는 놓여있는 게 없었다. 한쪽 구석에는 어린아이라도 몸을 들이밀 수 없을듯한 작은 환풍구가 보였고 테이블과 의자가 보였다. 그게 다였다.

“자려고 나 부른 거예요?”

왜일까. 그게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치겠네, 정말. 결국 지암은 소녀를 깨우기를 포기했다. 그대로 다시 지하실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가지 마.”

간신히 놓치지 않을, 작은 목소리가 발목을 잡아챘다. 지암이 돌아서자 미캉이 이불에 폭 파묻힌 채, 배게에 얼굴을 문지르고 있었다.

“저번에도 찾아왔었지. 왜?”

소녀가 속삭였다. 지암은 간신히 그 말을 알아들었다.

“당신이야말로 왜 이런 데 있는 거예요?”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은 많았다. 하지만 다른 질문은 아직 일렀다. 지암은 어렵싸리 말을 뱉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일련의 사건을 생각해보면 미캉이 이 장소에 갇혀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문은 열려있었고 그는 존중받았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것은 아마도 이 방 안의 풍경이 클 것이었다.

삭막하기 짝이 없는 풍경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공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미캉은 언제나 졸려보였고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랬기 때문에 세츠는 그토록 간절했던 것이다. 오랜 친구에게 불 같이 화를 내고, 소중한 지휘사를 데리고 위험할지도 모르는 곳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지암은 세츠의 심정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상냥함과 자기파괴적인 배려는 지암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캉은 지암과 눈을 맞췄다. 느리게 깜빡이는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양 생기가 없었다.

“너는 새 지휘사지?”

미캉이 말했다. 지암은 잠시 망설였다.

“맞아. 최근에 새로 들어왔어. 어쩌다 들어왔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이름이 뭐야?”

“지암. 너는 미캉이지?”

“나는 이곳에 강제로 들어온 게 아니야.”

미캉은 지암의 말투가 바뀐 것도, 그의 질문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 태도가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지암은 조금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뒤늦게라도 화를 냈을지 모르지만 지암은 아니었다.

“그럼 왜 이런 데서 사는 거야?”

지암은 눈동자를 굴렸다. 다시 봐도 삭막한 방안이 빠르게 스쳐갔다. 미캉은 대답이 없었다.

“졸려.”

돌아눕는 소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자지 말아줘….”

애원하듯 한탄하자 검은 눈동자가 지암을 똑바로 향했다. 표정없는 얼굴에 흐릿한 의문이 지나간다.

“너는 네 삶을 살면 돼.”

미캉은 그렇게 말했다. 제 일에 끼어드는 지암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커다란 눈동자 가득 의아함을 담은 채였다. 지암은 머리를 긁적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건 세츠가 전문인데 하필 자리에 없었다. 부탁 받았으니 대신 힘내봐야지. 에휴.

“널 여기 두고 갈 수는 없어.”

“왜?”

“네가 행복해보이지 않으니까.”

“나는 행복해.”

“이런 방에서 홀로 잠만 자는 게 네 행복이야?”

“응.”

지암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막힘없이 대답이 돌아오니 할 말이 없었다. 고민 끝에 지암은 선택했다.

“?!”

“얌전히 좀 있어봐.”

튼튼한 두 팔로 작은 몸집의 소녀를 번쩍 안아들고 지암은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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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컥. 장전하는 소리가 좁은 회의실 안에 울렸다. 모두가 바짝 긴장한 채였다. 언제 총성이 울릴지 몰랐다. 싸움이 시작되면 그 누가 안전할 수 있을까. 저쪽은 신기사가 셋이고, 이쪽엔 신기사는 하나 뿐이지만 지휘사가 있다. 양쪽 모두 노련한 싸움꾼들 뿐이었다.

“저어, 실례합니다.”

갑자기 갈라선 두 진영 사이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지암을 비롯한 모두의 눈이 커다래지는 것과 동시에 천장에서 조그만 인영들이 날아들었다.

“…….”

대바늘처럼 보이는 은빛 검을 든 인형 하나가 세츠를 향해 제 검을 찔러넣었다. 세츠가 히익,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물러선다.

“조금만 뒤로 물러서줄래? 숙녀 여러분.”

단정하게 수트를 차려입은 소년 인형이 앙투아네트와 에뮤사에게 절을 했다.

“험악한 무기는 좋지 않아요. 대화로 해결해야죠.”

생글생글 웃는 금발의 소녀 인형이 장난스레 말했다.

“죄송해요. 갑자기 놀라셨죠.”

지암의 앞에 서있는 것은 방금 전 처음으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 유약한 인상의 소년 인형이었다.

네 체의 인형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곧장 다툼을 멈추었다. 그 자리의 누구도 진심으로 싸우고 싶지는 않았던 탓이다. 세츠는 눈에 띄게 안도한 기색이었다. 지암도 솔직히 살았다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자신의 보조가 있어도 세츠에게 중앙청의 베테랑 신기사 삼인방과 진검승부를 하라는 건 과도한 주문이었다. 그게 세츠가 바라는 바라고 해도 말이다.

지암은 곧, 굳게 닫혀있던 회의실 문이 열린 것을 알아차렸다. 그 안에는 인형보다 더 인형같은 소녀가 잠들어 있었다. 새카만 머리칼에 창백한 피부, 머리에는 새빨간 리본을 맨 소녀는 어린 시절 동화책에 나오는 백설공주 같았다. 소녀는 졸린 듯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소란의 한가운데를 쳐다보았다. 지암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녀의 눈동자는 공허해서 확신이 들지 않았다.

“시끄러워.”

그는 웅얼거렸다. 정말로, 그저 웅얼거렸을 뿐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들려왔다. 지암은 문득 제 앞에 선 인형이 난처하게 웃는 것을 보았다. 아, 그렇구나.

소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문 앞에 섰다. 지암은 그녀가 짜증을 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동작은 느릿한데도, 어쩐지 느껴졌다. 그렇게 느낀 것은 지암만은 아닌 듯했다. 세츠 역시 멋쩍은 얼굴이었다.

“왜 여기서 소란을 피우고 있어.”

그가 조용히 말했다. 질문보다는 책망에 가까운 어조였다. 세츠가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그럴만도 했다. 중앙청 주요 인사와 마찰까지 빚어가며 이곳에 내려온 것은 세츠의 고집 때문이었으니까.

“오랜만이에요, 미캉.”

앙투아네트는 언제나처럼 은은하게 웃었다. 소녀, 미캉은 앙투아네트의 인사를 들은 채도 하지 않고 똑바로 지암을 쳐다보았다. 지암은 흠칫했다.

“너, 들어와.”

지암이 당황해 자신을 가리켰다.

“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미캉은 답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웅크리는 모양새가 금방이라도 다시 잠들 것 같았다.

“부탁해, 대장.”

세츠가 이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지암은 어이가 없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앙투아네트와 에뮤사가 웃는 낯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안화는 시간이 아깝다는 듯 시계를 보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수습하라는 거지?

원망하듯 세츠를 쳐다보자 그가 지암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내가 믿는 거 알지?”

“어.”

정말이지, 제멋대로인 녀석이다. 지암은 난감스레 지하 회의실 안쪽을 쳐다보았다. 진심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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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린네

드랍 2019. 8. 6. 17:45

멜님 자캐로 쓰던 건데 쓰다보니 귀찮아서 드랍.

뭐든지 완성하려고 하는 쪽이 나한테 더 나쁜 거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쓰다가 지겨워지면 드랍하기로 했음. 그래서 카테고리도 만들었으니 이쪽이 자주 업로드 될 예정. 내가 쓰고 싶어지던지 누가 기다리면 더 쓸 수도 있겠지, 뭐.

 


뒤에서 보자니 무척 새까맣다. 반들반들한 것이 동그랗기까지 하니 만져보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솟았다. 무심코 손이 올라가는 것을 꾹 참았다. 어쩌다 한 번 본 후로 친밀하게 인사 한 번 제대로 나누지 않았는데 머리에 손을 댈 수는 없었다.

시선이 강했던 것일까. 뒤통수 마냥 동그란 한 쌍의 눈이 마리아를 향했다.

"왜 그러세요?"

린네가 물었다. 빠르게 깜빡이는 눈꺼풀 사이로 푸른 눈동자가 싱그럽다.

"그냥. 귀여워서."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머리에 손을 올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손바닥이 닿았을 자리에 뭉툭한 것이 얹어졌다.

"마리아에게는 아직 그렇게 보이는군요."

린네는 불편한 기색도 없이 수줍게 뺨을 붉힌다. 마리아는 욕망을 담아 린네의 머리칼을 살짝 흩뜨렸다. 매끄러운 검은 머리가 마리아의 손길을 따라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 모양을 흡족하게 바라보곤 팔을 내린다.

"아직이라니?"

"아, 그게."

린네는 어색하게 눈을 돌린다. 마리아는 그 순간 린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아차렸다. 먼 곳을 향하는 시선에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실려있었다.

찰랑이는 단발머리를 한 이 어린 숙녀는 경건한 마음가짐을 위해 준비된 예복을 마구 더럽히며 뛰어다니던 철부지 시절부터 마리아를 알았다. 마리아도 아직 오동통한 뺨을 하고 있던 해맑은 여자아이를 기억했다. 몇 년 사이 세상 모든 일을 달콤한 사탕처럼 여기던 소녀는 교단의 핵심 인사로 떠올랐다.

그저 단 한 번의 여행이었다.

그 한 번의 여행이 모든 것을 바꿨다. 그저 조금 착하고 순진한 것 외에는 크게 눈에 뜨일 것 없던 여자아이는 귀한 능력자가 되어 돌아왔다. 희귀한 재능은 기회를 바라는 이들의 시각을 바꿔놓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자 소녀가 받는 대우도 달라졌다. 돈과 권력이 오가는 복잡한 흐름 속에 린네 그라임스라는 이름의 바람이 불었다. 그 변화의 흐름을 타고 무언가를 바꿔보고자 하는 자들이 생겼다. 어느새 교회에는 폭풍우가 불고 있었다. 그런 때였다.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를 타고 린네는 어느샌가 커다란 배의 선장이 되어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발랄하고 천진난만했으나 아무도 그런 모습을 좋게 보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어깨에는 무거운 돌덩어리가 하나씩 얹어졌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린네의 얼굴에서는 차츰 웃음기가 사라졌다.

마리아가 안전한 곳에서 숨을 죽이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동안 린네의 빛나는 눈동자는 침착하고 어질어졌다. 마리아가 제 몸을 보전하기 위해 비굴함을 무릅쓰는 동안 린네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개를 꼿꼿이 들고 서있었다. 마리아가 살아간다는 기쁨을 되찾기를 포기하게 되는 동안 린네는 많은 이들의 삶을 구하고자 백방으로 뛰었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이었다. 마리아는 어째서 이 여자아이가 눈에 밟히는지 몰랐다. 친한 것도 아니고 이렇다할 연이 있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제님."

린네가 마리아를 불렀다. 동그란 눈이 상냥하게 접혔다. 웃는 빈도는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진심으로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진지한 눈빛이 마리아를 향했다.

"기억하세요? 여기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이에요."

수줍게 웃으며 예배당을 둘러보는 린네의 눈빛은 아련한 추억에 젖어있다. 마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억하고 있다.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러나 기억할 이유도 없었다.

선명한 풍경은 아니지만 마리아는 분명 린네가 이 곳에서 개구쟁이처럼 웃던 순간을 기억했다. 어째선지 린네에게도 기억에 남아버린 모양이다. 교회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는 일이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일까요.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린네는 그렇게 말하고는 마리아를 향해 성표를 보였다. 마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받는다. 아무리 유명인사가 되었어도 린네는 아직 평사제였다. 교회의 직급은 능력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닌 탓이다.

뺨을 붉히고 뛰듯이 달려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리아는 살며시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속으로 찬찬히 셋을 센다. 그리고 돌아서 숙소로 향했다. 뒤에서 린네의 목소리가 청명하게 들려왔다.

린네 그라임스는 기분이 좋았다. 남몰래 동경하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것이 즐거웠던 탓이다. 함박웃음이 걸린 소녀의 얼굴을 보곤 동료가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내왔다.

"저 사제님이랑 친해?"

"그건 아니고."

조금 아는 사이야. 린네가 수줍게 대답했다. 소녀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린네는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앉아 책을 펼쳤다. 친구들이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주변의 눈총을 받곤 입을 다문다. 그러거나 말거나 린네는 관심이 없었다.

눈은 책에 두고 린네는 방금 전의 만남을 되짚었다. 독서 시간이 되어 방을 나서는데 문 앞에 마리아가 있었다. 마치 린네를 기다린 듯한 모습이었다. 무슨 일로 여기 계시냐는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고 마리아는 스치듯 걸음을 옮겼다. 그게 마침 같은 방향이었다.

일정을 아무리 되짚어봐도 이쪽에 마리아가 올만한 일이 없는데 무슨 일일까 고민하며 말 없이 걷는데 마리아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어딜 가느냐는 질문이었다. 린네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 뒤에 마리아가 린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곧 헤어졌다. 그게 다였다. 린네는 그게 너무 기뻤다.

어째서 마리아 루첼라이를 존경하느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주제 넘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린네는 진심으로 마리아를 존경했다.

장애 때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것 때문에 시선이 갔으니까. 손이라는 중요한 부위가 없는데도 남들과 똑같이 평범하게 살고 있는 점이 멋있었다. 몇 가지 노동에서 제외되는 점이 멋있게 느껴진 시기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독특한 분위기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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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있다. 하염없이 걷고 또 걷는다. 어디로 가는지도 얼마나 걸어야하는지도 모른 체 그저 걷는다. 경쾌한 발걸음에 맞춰 치맛자락이 나풀거린다. 새하얀 나비처럼 나풀거린다. 나풀나풀. 나풀나풀.
소녀는 해맑게 웃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앞에 펼쳐진 길이 돌아가는 시선에 따라 어지러히 흔들린다. 흐르는 바람, 쏟아지는 햇빛, 멀리서 들려오는 새들의 노래. 그 모든 것이 소녀의 주의를 잡아끈다. 소녀는 아무런 고민도 없는 사람처럼 그저 행복하기만 하고 풍경은 정처없이 방랑하기를 계속한다.
소녀는 무심코 멈춰선다. 무언가 주의를 잡아끌었다고 하기엔 평온한 곳이었다. 방금 전과 별 다름 없이 새가 울고, 해가 빛났다. 소녀는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바라본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빛바랜 푸른 빛이다. 어느샌가 바람은 사라지고 빈 자리를 어디선가 흘러든 생명의 고동이 채운다.
소녀는 주저앉는다. 아무것도 없는 흙바닥. 아니, 어쩌면 방금 개미가 걸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장소. 그대로 드러눕는다. 하늘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새카만 머리칼이 바닥에 흩어진다. 깜빡. 깜빡. 눈을 두어번 감았다 뜬다.
갑자기 나타난 비행기 한 대가 하늘을 반으로 가른다. 장난감처럼 자그만한 그것을 손을 뻗어 잡아본다. 말아쥔 주먹 안에서 그것은 참 쉽게도 빠져나간다.
허망한 손짓은 아쉬움의 불꽃 속에서 서서히 사그라든다. 소녀는 다시 하늘을 본다. 칙칙한 색도화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속삭임과 식어가는 몸이 시간을 알린다.
더는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누워있던 소녀는 마침내 벌떡 일어선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끝 없는 길. 소녀는 끝내 제가 갈 곳을 잃었음을 알았다. 다시 한 번 하늘을 본다. 여전히 하늘은 답이 없다. 소녀는 한참을 그렇게 서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뗀다.
다시 끝을 알 수 없는 여정이 시작된다. 걷고 또 걷다보면 언젠가는 멈추게 될까. 소녀는 이제 행복하지 않다. 가슴에 품고 있던 빛과 함께 마음 속에 흐르던 노래도 사라졌다. 작은 발은 리듬을 잃고 하늘거리던 스커트는 어느샌가 움직임이 편한 바지로 바뀌었다. 언제 그렇게 변했는지도 모르게 소녀는 변해있었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변화가 소녀를 또다시 바꾼다.
생기를 잃은 얼굴엔 우울한 심연이 드리웠다. 팔다리를 잡아당기는 무게가 소녀를 진중하게 했다. 소녀는 어느샌가 여인이 되어 어두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하늘은 더이상 보지 않는다. 바람도 더는 느끼지 않는다. 주저앉는 일도 없다. 무엇을 위해 걷기 시작했는지, 어디에 가려고 했는지 잊은 눈은 더이상 목적지를 찾아 흔들리지 않는다. 그저 걷는 것만이 자신의 일이라는 듯 착실하게 걷고, 내일을 준비한다.
어느샌가 주변을 둘러보면 비슷한 동료가 늘었다. 때로는 이야기를 나누고 드물게 웃거나 우는 일도 생겼다. 함께 길을 걷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건네고 잠자리를 함께한다. 흙바닥에 드러눕는 일은 사라졌다. 엉덩이는 따스하고 밥이 맛있었다.
요즈음의 일상은 퍽이나 유쾌하다. 힘든 일도 아픈 일도 줄어들었다. 추위는 가시고 갑작스러운 사고에 놀라는 일도 줄어들었다. 여인은 이것이 자신이 바랐던 것인가 한다. 드디어 ‘삶’을 배웠노라고 웃음짓는다.
그렇게 걷는 것이 익숙해졌을 때였다. 여인, 바람에 흔들리는 잎새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돌아섰다. 잊었던 노래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홀린 듯이 돌아본 그녀가 웃음 짓는다.
‘안녕?’
상냥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노래가 소리 높여 손을 흔든다. 잎새는 그것이 꽤나 유쾌하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다시 친구들에게로 돌아간다. 팔랑대는 노랫가락이 한때 그녀가 둘렀던 치맛자락처럼 하늘거린다. 그녀는 웃고 울고 조잘대다가 때로 화를 냈다. 걸리적거리는 감각이 낯설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는다. 지나간 시간의 어느 부분에서 그것은 자신의 몸과 같았다.
깨닫고 나니 정말로 낯선 것은 현재의 자신이다. 잎새는 잠시 혼란에 빠진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어디로 가고 있었지?
그러나 그녀는 잊고 있다. 처음부터 목적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최초의 한걸음. 그것은 그저 즐거움이었다.
혼란에 빠진 여인은 다시 소녀가 되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혼란은 지독히 낯설었다.
잠깐의 혼란이 더 큰 혼란을 부르고 소녀는 이번엔 걷는 법을 잊어버렸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해왔던 것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소녀는 주저앉는다. 곧 목놓아 울고 싶어졌다.
오랜만에 다시 하늘을 본다. 하늘은 여전히 창백한 푸른 빛을 띄고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다. 그 사실에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소녀는 지나간 시간 속 어느 때처럼 벌거벗은 흙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곧 드러눕는다. 새카만 머리칼이 바닥에 흩어진다.
제일 먼저 들리는 것은 바람 소리다. 귓가를 스치는 고요한 바람이 고막을 간질이고 지나간다. 소녀는 바람을 대신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연이어 들려오는 것은 장난기 넘치는 옛 노래의 멜로디다. 소녀는 노래와 함께 흥얼거린다. 나풀나풀 나부끼는 노랫가락에 가슴 속을 간질거렸다. 소녀는 제채기한다. 커다란 탄성이 목에서 터져나왔다.
놀란 새들이 조잘거리기를 멈췄다. 소녀는 파하핫 웃음을 터뜨렸다. 한 번 터진 웃음이 멈추지 않아서 한참이나 깔깔거린다. 갑자기 소녀는 행복해진다.
소녀는 한참을 누워있다가 벌떡 일어난다. 이번에는 걸음을 떼는 것이 두렵지 않다. 소녀는 아무런 걱정이 없는 사람처럼 해맑게 웃었다. 발걸음이 경쾌하다.
소녀가 흥얼거리자 옛 노랫가락이 함께 흥얼거렸다. 노래는 어우러져 화음이 되고 소녀는 즐거이 웃는다. 어디로 갈까? 이번엔 어디로 가볼까?
소녀는 더이상 걷는 것이 두렵지 않다. 목적지가 없어도 괜찮아. 어디로든 가볼까. 노랫말이 속삭이고 소녀는 웃었다. 좋아. 어디로든!
발길이 향하는대로 소녀는 걷는다. 새로운 길을 친구 삼아 담소를 나누고 노랫가락과 춤을 춘다. 바람이 소녀의 여정을 기록하고 풀꽃이 소녀를 환영했다.
발이 닿는 곳이 집이고 등이 닿는 곳이 침대인 삶을 살아왔다. 그것은 소녀이자 여인인 자그마한 잎새의 여행. 돌아갈 곳은 있을까? 어쩌면 필요없는지도 모른다.
소녀는 목청을 다해 야호 소리질렀다. 먼 산이 야호 답해온다. 소녀는 실컷 웃고 다음 길에 올라탄다. 이 길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을까.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소녀는 걷고 또 걷는다.
한 소녀가 있었다. 시간이 흘러 여인이 된 그녀는 옛 연인을 찾아 길을 떠났다. 하염없이 이어지는 여행길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도 모르는 채로 그저 걷고 또 걸었다. 그녀는 즐거웠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푸른 잎은 가지를 떠나 낙엽이 되고 낙엽은 썩어 땅이 되는 법. 길이 어디까지 이어지든 자연스러운 순리대로 그녀는 걷는다. 그것이 삶이라는 이름의 생명.
길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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뻑뻑한 눈을 감았다 뜬다. 이른 아침 출근하자마자 도핑하듯 들이키던 커피를 끊은지 어언 한달째에 접어들었다. 건강을 위해 제발 자기가 준비한 야채즙과 비타민제를 먹어달라던 애교 많은 애인의 간청에 버티지 못하고 고행을 받아들인 대가로 요즈음 미스즈는 몸이 제법 가벼웠다. 퇴근할 무렵이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로 겨우 집까지 이동해 기절하는 일상에서 퇴근 길 동무가 되어주는 연인과 차 안에서 담소를 나눌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니 대단한 발전이 아닌가.
수난을 겪은 몸은 아직도 여기저기가 삐걱거리지만 누군가 퇴근길에 마중 나오고, 집이 따뜻하고, 식탁에 따뜻한 일식 식단이 오르는 것에 익숙해졌다. 뼈다귀에 가죽만 씌운 듯 마른 몸에 조금씩 살이 붙고 있었고, 동료들이 안색이 좋아졌다며 웃었다. 스물아홉 인생에 단 한 번도 없었던 변화였다. 지독히 낯설지만 좋은 변화였다.
쯧.
미스즈는 속으로 혀를 찬다. 헤어지면 어떻게 살지 모르겠다는 한탄은 덤이다. 입 밖에 낼 때마다 슬퍼하는 소이치로를 생각해서 되도록 언급은 하지 않으려 하지만 버릇이 어디로 가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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烾㣋㤜: 혼잣말 (작성 중)

2018. 11. 21.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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