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주택가, 좁은 골목을 굽이굽이 돌아가다보면 막다른 길. 좁지만 햇빛이 잘 드는 그 골목에는 카페가 하나 있다. 하얀 벽돌 건물에서 가게만이 오로지 갈빛 목재인지라 한눈에 들어오는 작은 카페. 내부 구조상 문을 열지 않으면 덧문이 달린 그리 크지 않은 창으로만 빛이 들어온다. 180이 넘는 장신의 주인이 간신히 서있을 수 있는 외부도 내부도 아담한 카페. 오너, 시이첸 아라마스는 매일 아침 덧문이 반쯤 열린 창문가에 서서 실눈을 뜨고 옅은 아침 햇빛을 즐기는 걸 좋아했다. 덤으로 이렇게 덧문을 살짝만 열어두면 언제나 감추고 있는 날개도 한번쯤 펴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가개 내부가 너무 좁아서 엉거주춤 펴는 듯 마는 듯 할 수밖에 없지만.

 "미─…."
 "잇삐, 이제 들어왔나요?"
 "냐~"

 까만 민소매 원피스만 한장 걸친 작은 여자아이가 시이의 허리에 머리를 부비며 들어섰다. 샛노란 눈이 어두운 카페안에서 밝게 빛난다. 시이는 아이의 작은 머리를 가볍게 쓸어주었다. 가늘고 긴 손가락 탓에 아이의 머리가 한 손에 잡혔다. 이대로 콱 움켜쥐면 바스러질텐데. 햇빛에 지는 시이 얼굴의 음영이 더욱 짙어졌다.

 "배가 고픈가요?"

 사람의 목소리라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어보이는 갸르릉 거리는 소리로 아이가 응답했다. 제 주인에게만 온갖 애교를 부리며 달라붙는 이 아기고양이가 시이의 유일한 동거인. 그나마 지금은 동거'인'이라 불릴만한 모습을 갖추었지만 본래는 그저 객식구일 뿐인 떠돌이 짐승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이 아이의 인생도 꽤나 많은 면이 뒤바뀌어버린 셈.

 "이런, 이렇게 붙어있으면 움직일수가 없잖습니까. 조금만 떨어져 주시겠어요?"

 그것은 갑자기 나타난 웬 아가씨의 한마디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





 천계와 마계는 태고적에는 하나였다고 한다. 그것이 어찌하여 하나가 되었는지는……, 별로 알 필요 없겠지. 그것에 관련해서는 온갖 전승이 있지만 시이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천계와 마계는 하나가 아니고 서로 적대하고 있으며 시이는 그 경계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는 것 뿐. 어릴 적에 수도없이 들었던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면 시이는 과거에 천계와 마계가 하나였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었다. 시이는 철저하게 자신이 바라보는 것, 자신이 해야하는 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딱히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해본 적도 없었고 별 것도 아닌 것에 열심히 의미를 갖다 붙이는 일에도 흥미가 없었다. 심지어 신에게조차, 관심따위는 없었다. 천사라지만 시이는 말단. 신을 만날 일따위는 평생을 기다려도 없을 것이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마계를 지키는 악마들과 눈싸움을 한다거나 오늘 식사 메뉴라거나 그런 시덥잖은 것들이 시이의 관심사의 전부였다. 요즘은 꽤나 평화롭긴 하지만 가끔 벌어지는 싸움에서 자신과 비슷한 말단 악마들의 머리를 부수는 일은 조금 좋아했다.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그 감각이 좋았다. 조금 위험한 일이었지만 이래뵈도 시이의 전투력은 다른 말단 천사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므로 죽을 걱정따위는 하지 않았다. 물론 죽을지 모른다고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멈출 시이가 아니기도 했지만. 사는 것에도 별 아쉬움은 없는 시이였다. 그리고 약간의 위험은 작은 취미에 스릴을 더해주지 않는가.
 조금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무료했다. 평화로운 나날이 지겨워서 전쟁이라도 일어났으면, 하고 바랐다. 물론 전쟁이 일어나면 당장 군대에 동원되서 대기해야 하므로 귀찮으니 얼른 끝나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겠지만 상관 없었다. 그건 그때가서 귀찮을 일이고.

 "냐아오─."

 고양이가 자신의 발목에 머리를 부비다 못해 지쳐서 울음소리를 냈다. 임무를 설때면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거대한 낫에 기대어 서서 딴생각을 하고 있어서 알아채지 못했다. 평소라면 금방 알아차렸을 텐데 지루하다는 감각에 조금 깊게 빠져버린 모양이었다. 준비해둔 사료를 꺼내주자 늘 그렇듯 냄새를 맡으며 조심스레 주변을 맴돌았다. 2~3일에 한번씩 찾아오면 밥을 주는 이런 일정이 계속 된지 벌써 반년이 다되어가는데 의심이 많은건지 고양이라는 녀석들이 다 그런건지 아니면 그저 이녀석의 습관인지 확인에 확인을 거듭한다. 시이는 그런 고양이의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았다. 경계 근무 중에 딴 곳을 봐도 되는 건가 싶지만 시이가 근무 중에 딴짓을 하는 건 늘 있는 일이고 그렇게 딴짓을 하면서도 결코 사소한 이상 하나 놓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책하지 않았다. 시이는 자신의 임무에 관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실수 하지 않았다.
 갑자기 주변이 술렁거렸다. 시이는 고양이의 사소한 행동을 바라보는 일은 꽤나 즐거워서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았지만 일단 보고는 해야하니 다시 경계임무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시이의 앞에 선 것은,
 여자아이?

 "안녕하세요."

 상냥하게 웃는다. 시이의 가슴께에밖에 오지 않는 여자아이는 그렇게 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갑자기 천계와 마계의 경계에 나타난 소녀는 양 진영을 지키는 수많은 병사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시이의 앞에 섰다. 전선 가까이에 있는 모든 생물체가 두 사람만을 주목하는 듯한 정적이 흘렀다. 마주선 두 사람은 키부터 시작해서 닮은 부분이 하나도 없었지만 둘을 바라보는 이들은 모두 두 사람이 어딘가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전선의 싸이코, 시이첸 아라마스와 저 아름다운 소녀가 닮았다는 건 어쩐지 말이 맞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렇게 보였다. 소녀가 말했다.

 "시이첸 아라마스씨, 맞으시죠?"
 "예. 그렇습니다."

 거의 한사람이 말한 듯이 즉각적으로 대답이 이어진다. 자신을 아리스가와 센쥬라고 소개한 소녀는 그의 대답을 듣고 작게 쿡, 하고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시이 역시 언제나 입가에 매달고 다니는 미소가 조금 짙어진다. 병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서야 간신히 이 사실을 상부에 전달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부산해진 병사들의 심정은 아는지 모르는지 센쥬는 다시한번 시이에게 말했다.

 "저와 함께 가주시겠어요? 마법사님이 당신을 기다리고 계세요."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하얀 빛인 천사의 얼굴이 센쥬의 말에 부드럽게 풀렸다. 그 전에도 분명히 상냥한 표정으로 웃고는 있었지만 더 부드러워 졌다는 느낌. 가늘게 뜬 두 눈이 더 가늘어졌다. 사랑스럽다는 듯 낫을 끌어안은 손 중 하나가 풀어져 나와 그의 가슴 위에서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살짝, 그의 상체가 기울어진다.

 "Yes, miss.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고개를 들어 센쥬와 시선을 맞춘 시이의 눈이 기분 좋게 미소짓고 있었다. 마주한 센쥬도 생긋 웃어보였다. 병사들의 표정이 어떠했을지는 모두의 상상에 맡기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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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정해져있어. 그래서 그대와 나는 운명이지.』

 그 것이 '그'와의 첫만남. 내가 나의, 리히트라는 이름을 잊어버리고 그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그렇게 말했다. 몇번을 더 죽는다 한들 잊을 수 없을 그 말. 나는 감격스러운 첫 만남에서, 감동적이기까지 한 그의 말을 듣고 울음을 터뜨려 버렸었더랬다.





 그것은 정말 갑작스러운 만남이었다. 태어난 곳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처음 보는 낯선 길을 걷다가 30년 전에 연락이 끊어진 친우를 만난다 해도 이토록 놀랍지는 않았으리라. 나는 둔켈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며 앞을 제대로 보지 않고 걷다가 그와 부딪칠뻔 하고는 급히 고개를 숙였었다. 그와 만난 첫날의 기억은,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헤어지기까지의 시간의 앞뒤는 뿌옇게 흐려져 있다. 그의 말대로 그와 내가 운명이기 때문일까? 운명의 사람을 만났다는 진실에 내 기억회로가 충격을 받아 멀쩡하던 앞뒤의 기억을 뒤흔들어놓은 걸지도 모른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맛,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제가 그만 딴데를 보다가……!!"
 "괜찮아?"
 "에, 아, 예. 저…는 괜찮아요…."

 그는 균형을 잃은 날 붙들고 친절하게 빙긋 웃었었다. 그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웃는 입매만큼은 지금도 그릴 듯이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아름다웠다. 나도 모르게 말을 잇지 못할정도로 그렇게 아름다웠다.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그때의 내 시간감각은 완전히 엉망이어서 그게 어느정도였는지는 알수가 없다. 그가 더 행복하게 웃는다고 생각했다. 뭔가 말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멈춰버린 머리 속에서 꺼낸 문장은 어찌보면 흔하고 어찌보면 낯뜨거운 그런 말. 그리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내 귀로 들려온 단 두 문장은 내가 가질 이후의 길디긴 시간 속에 깊숙히 새겨져 영원히 빛이 바래지 않을 찬란한 보석이 되었다.

 "전에, 만난 적이 있나요, 우리?"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미래는 정해져있어. 그래서 그대와 나는 운명이지."
 "……에?"

 종이 울렸다.

 뎅, 뎅, 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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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그럼, 시작할까요? _with RIMIEN SIARTE
02. 웃을 수 밖에 없는 가면
03. 낙원이라 불리는곳.
04. 들리지 않는 인어의 노래
05. 가시 철창속의 하얀 새
06. 눈이 내리지 않는 나라
07. 작은새가 인도해준 길
08. 인형의 숲
09. 아빠,어디계세요?
10. 아름다운 천사의 노래
11. 그 곳에서 잃은 아이
12. 달이 먼지가 되어 사라지던 날 밤
13. 이브의밤
14. 검은구두
15. 피투성이 작은 소녀
16. 짓밟힌 민들레꽃씨
17. 길을 따라가면
18. 지평선너머로 바라본세계
19. 신에게 바칠 제물
20. 어둠에게 잡아먹힐 것 같아요
21. 엄마, 아파요.
22. 그렇게 예쁜 미소 짓지 말아요
23. 바다밑에서들리는 아름다운 소리
24. 종소리울리는밤에
25. 파란색 나비,파란색 장미,파란색 하늘,빨간색 나.
26. 잘라진 분홍빛날개
27. 비오는날. 파란우산의 요정
28. 귀여운 나의 아기
29. 가족과 함께한 마지막 저녁식사
30. 조심하세요. 어두운 곳이랍니다.
* 31. 죽음이라는 이름의 무희가 춤을 춘다 _with Licht
* 32. 손에 피가 묻었어 _with Re―Miel―Siarte
33. 울지않았다. 웃지못했다. 울 수 없었다.
34. 혼자서 울고있었어요.
35. 마른 나뭇가지 위의 하얀 나비
36. 그냥 그대로의 표정으로
37. 마리아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38. 나비날개를 단 악마
39. 그 때, 하늘은 나에게 분노했죠
40. 비가내려요. 하늘에서 비가내려요.
41. 그림속에 있는남자
42. 검은색 무지개
43. 파란물고기
44. 이중으로 걷는자(도플갱어)
45. 천사. 심판을 받다.
46. 보라색 안개를 뒤집어쓴 못난이
47. 꿈속의 레퀴엠
48. 아득한 기억속 오르골이 연주한 피의 자장가
49. 끝나버린 멜로디
50. 은으로만든 빨간 십자가목걸이
51. 눈이 내리는 날의 장례식
52. 하얀 구두를 신고 춤추는 붉은 머리의 소녀
53. 크리스마스에 내리는 비
54. 앨리스의 나라
55. 당신을 파티에 초대합니다.
56. 산타클로스는 언제 죽었나요?
57. 나는 그 때 하늘의 분노를 느꼈죠.
58. 피로물든 드레스
* LOSS (59. 춤추는 숲속의 소년) _with DUNKEL
60. 들리지않고 보이지않고 말할수 없는 천사
61. 나의 휴식처가 되어주세요.
62. 푸른색 나무그늘 아래에서
63. 생일선물을 받았어요,아주 예쁜
64. 하늘에서 내리는 붉은 비와 붉은 우산과….
65. 카프리치오(광상곡)
66. 엄마를닮은 인형
67. 유리성의 겨울
68. 축제의 마지막날
69. 장미화관에 찔렸다.
70. 악마와의 교환으로얻은 목소리
71. 어릿광대의 가면
72. 눈물을 버리다.
73. 열어서는 안되는 방
74. 소녀를 죽인것은 칼이 아니에요,관이죠.
75. 환상. 무엇을보고있는가.
76. 눈. 내리는마을
77. 지옥에서 온 초대장
78. 단지 나만을 위한 파티
79. 영원히 계속되는 13일의 금요일
80. 장미덩쿨 미로
81. 가면무도회
82. 누구나 가면을 쓰고있죠.
83. 공중정원
84. 허상속의 소녀
85. 순수한 아이의 세계
86. 소녀만의 작은 비밀의정원
87. 함께 밤을 기다려주세요.
88. 축제의 마지막밤
89. 운명을 믿으세요?
90. 귓가에맴도는 겨울멜로디
91. 교회에 있는 소녀
92. 웃음짓는 아빠, 웃음짓는 엄마, 웃음짓는 아기. 어디에도 나는 없어요
93. 망령이 지배하는 나라
94. 자비로운미소. 추악한 소녀
95. 아무도 나를 바라봐주지 않아
96. 벌거벗은채 쫓겨난 아이
97. 이제 나는 나쁜아이인가요?
98. Good Bye - My little girl.
99. 신을 사랑한 이에게 내린 비극
100. 이제 끝내볼까요?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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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같은 녀석이다. 이것이 첫 인상이었는지 같은 건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력이 좋지 못한 편인 내가 이렇게 일관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건 역시 저녀석 문제겠지. 뒤통수를 간지럽히는 시선을 느끼며 지내는 것도 벌써 반년째. 이제는 없으면 허전할 정도가 되었다.









 

 

 

   어느 겨울에
     I wrote to congraturations on Hwa-a&Karnomen's 200th day. I love you Dears.


  먼 곳에서 봐도 반짝반짝 빛나는 붉은 머리카락을 쫓기 시작한 지 어언 199일째. 어찌보면 기념할 만한 날이지만 카르노멘은 오늘도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보는 것을 택했다. 화아는 여자애들이 손가락 꼽으며 센 기념일 따위에 신경쓰는 사람도 아니었고 뭣보다 두 사람은 그 긴 시간동안 제대로 대화 한 번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걸 기념 삼기에는 굉장히 애매한 관계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내일이면 두 사람이 만난 지, 아니 정식으로 교제하기로 한 지 200일째라는 말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이해도 못할 것이다.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되물어오는 것을 듣느니 차라리 생각하지 않는 게 나았다. 사실, 그런 걸 말하는 성격도 못되긴 했다.

"카르노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가 카르노멘의 귓가를 맴돌았다. 메세지 마법이 그의 감사실 책상에 있는 작은 거울과 그의 귀에 걸린 귀걸이 하나에 연동되어 걸려있어 카르노멘이 있는 장소, 그의 의사와 관계없이 상대방의 말을 전달해준다. 그 전언에 답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카르노멘의 의지였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대답을 하는 쪽이 감사실의 다른 학생들을 위해 좋았다. 그들은 감사장이 직접 나서서 처리해야하는 일부의 업무를 제외하고는 모든 업무를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유능한 인재들이다. 카르노멘에게 연락이 온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문제가 닥쳤을 때 뿐. 답하지 않아서야 카르노멘도 좋을 게 없었다. 가끔 일방적으로 모든 연락을 끊고 사라질 때가 있기는 했지만.

  "금방 가겠습니다. 잠시만 붙잡아주세요. 매번 고맙습니다, 레엔."
  "그렇게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이만"

  그의 인사와는 별개의 답변이 돌아오고 통신이 끊겼다. 조곤조곤한 어조와는 다르게 결코 레엔은 감정이 담긴 말에 답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신이 내린 저주같은 능력때문에 인간적인 교류를 완전히 끊고 지냈다. 방금 카르노멘이 건낸 것 같은 사소한 감사인사조차 듣지 못한 척 흘려넘겼다. 감사실의 모두는 레엔의 쌀쌀맞음에 적응해있었다. 물론 페레넬에서 조금만 지내다보면 웬만큼 이상한 사람들에는 다 적응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럼 가볼까요."

  그렇게 말하며 모자를 고쳐 쓴 카르노멘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아름다웠다.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동시에 남은 것은 햇빛에 하얗게 반짝이는 엷은 은빛 빛무리 뿐. 아무도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그가 앉아있던 장소는 사람들 눈에 꽤나 잘 띄는 벤치. 페레넬의 이상한 사람들 중에서도 카르노멘이 유별난 축에 든다는 것이 그렇게 놀라운 사실은 아니리라. 하지만 카르노멘마저도 그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 농구공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학생들 중 한 사람이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사라졌다. 처음엔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있는지 혹은 자리를 떠났는지 확인하는 것이 쉬워졌다. 화아가 예민해진 것인지, 그가 허술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서로에게 익숙해졌기 때문이라고 짐작해볼 뿐이다. 소년은 어쩐지 시들해져버린 농구에서 손을 놓고 코트를 빠져나왔다. 게임을 하던 멤버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몸이 안좋아서, 라는 한마디로 가볍게 물리쳐버렸다. 언제나 소리없이 나타나서 조용히 바라만 보다가 또 소리없이 사라져버리곤 했는데 오늘따라 그것이 왜이리 신경쓰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역시 신경쓰여."

  학생 감사실에 찾아가는 것은 조금 거북했다. 이 여자때문이다. 온몸을 가리는 까만 드레스에 베일까지 쓴 보는 것만으로 뭔가 불편해보이는 여자다. 이름이 뭐랬더라. 기억나지 않았다.

  "감사장은 현재 중요한 손님과 대면하고 계십니다. 나중에 다시 찾아와주시겠습니까."

  감사실의 입구를 맡은 그녀는 화아의 말재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사람같지 않은 억양없는 말투에 접근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서 화아는 언제나 최대한 빨리 그녀의 앞을 벗어나고 싶어했고, 그것은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화아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고 도망쳐나왔다. 중요한 손님이라니 얘기가 길어지겠지? 벌써 저녁시간이 가까워 오니 오늘은 패스하고 내일 만나는 게 좋겠다.

  "오랜만에 제대로 일하는 군, 저녀석."

  오늘의 모임 장소는 식당가 입구였던가. 오랜만에 먹는 바깥밥이다. 언제나 손수한 집밥을 먹는 입장에서 사치라고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가끔은 일부러 불량식품을 사 먹는 기분으로 밖에서 밥을 사먹고 싶어진다. 물론 오늘 저녁이 외식이 된 건 단순히 식사담당이 게으름을 피운 탓이겠지만. 간만의 외식이 반갑기도 하지만 외식이라고 생각하면 반드시 가야한다는 의무감이 사라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화아는 멀리 돌아가는 길에 발을 들였다. 귀찮아, 라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유치원 시절부터 몸에 익혀둔 버릇은 알아서 그를 약속 장소로 이동시켰다. 절대로 도망쳤을 때 뒤따라오는 잔소리가 무서워서 가는 것이 아니다. 어릴적부터 철저하게 훈련된 습관일 뿐이다.

  "쳇."

  스스로에게까지 변명해야하는 처지가 제법 한심스럽다. 화아는 괜히 머리를 한번 긁었다. 간지러운 것 같네. 슬쩍 돌아간 고개 탓에 시야도 함께 이동했다. 저건 뭐지. 학생노점상인가. 페레넬은 조건이 되는 사람들 중에서도 재주많은 이들만을 학생으로 받아들여 굉장한 스파르타식의 교육을 시키지만 그 외의 생활에는 거의 무제한적인 자유가 주어졌다. 아주 기본적인 몇가지 규칙만 지키면 학교를 떠나는 순간까지 무슨 짓을 해도 용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페레넬의 학생으로서 모든 생활비를 제공받으며 어떻게든 재산을 불리는, 아니, 정확히는 불리려고 노력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 악착같은 노력의 결과로 학교에 입학할 때는 땡전한푼 없는 빈털털이였는데 졸업할 때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거부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고로, 이렇게 학교 내에서 노점상을 벌여 용돈벌이를 하는 경우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물론 페레넬의 캠퍼스는 커다란 섬 하나를 전부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크기이기 때문에 안에는 식당가도 상점가도 따로 있지만.

  "이거, 귀걸이?"
  "50Dion입니다. 선물하시려고요?"
  "음……."
  "아하핫, 천천히 고르세요."

  그가 집어든 것은 은빛 사슬이 여러가닥 얽혀 있는 귀걸이였다. 다른 장식이 없어 단정하면서도 심심하지 않은 상당히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정작 관심을 보이고 있는 화아가 그런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까울만큼 잘만들어진 귀걸이였다. 그리고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는 화아의 시선은 끝에 매달린 영롱한 푸른빛의 보석에 못박혀있었다.

  "얼마라고요?"
  "50dion입니다, 손님."
  "잠깐만요."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며 화아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단 하나. 귀걸이에 달린 푸른 보석이 카르노멘의 반짝이는 은발에 굉장히 잘어울릴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선물하실 건가요? 그러면 이쪽 상자가……."

============================
1 중요한 손님=얘기가 길다
2 카르노멘이 다른 감사들한테 떠넘기고 일을 안하는 줄 알고 있음.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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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일이었다. 그 것은, 평화로운 일상을 깨는 일종의 ‘폭탄투하’?

따뜻한 코코아를 받았다. 겨울, 이라서일까. 그냥 손님접대일까. 눈만 이리저리 굴려 분주하게 일하는 중인 엘리엇씨를 관찰했다. 코코아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김이 코끝을 데운다. 아, 슬슬 뜨거워, 손가락.
잠시 코코아를 따라 뜨겁게 달궈진 머그잔을 무릎에 내려놓고 손을 식혔다. 우유는 막이 생길 정도로 뜨거운 게 좋아. 하지만 뜨거워. 마시다가 혀를 데일 때도 많았다. 코코아도 뜨거운게 좋아. 평소 손이 차가워서 늘 옷 밖으로 손을 꺼내지 않는 나로서는 뜨거운 쪽이 들고 있기에도 좋다. 하지만 변온동물인걸까. 금방 뜨거워져서 이렇게 손가락을 호호 불게 된다. 너무 오래 잡고 있었는지, 손가락 끝이 조금 아프다…….

푸른빛 도는 은빛 머리카락이 의자등받이를 넘어 바닥에 닿는다. 코코아가 든 머그잔을 무릎에 내려놓은 소년은 손가락을 불기에만 바빠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했다. 조금 맹해보이는 눈빛의 소년은 손을 식힌다 코코아를 마신다 바쁘게 손을 움직이면서도 눈만은 줄곧 한 곳에 못박고 있었다. 하얀 가운에 눈매가 날카로운 하얀 피부의 청년. 대체 뭐가 그렇게 재밌어서 바라보는지 신기할 정도로 소년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마치 그를 바라보는 것이 평생의 숙명인듯 집요하게. 계속해서 그만 바라보며 호르륵 코코아를 마시고는 뜨거운 듯 혀를 내밀어 헥헥 거린다. 그리곤 놀라서 맺힌 눈물에 반짝거리는 눈으로 계속해서 청년을 바라보았다.

"루야야 여기있니?"

노크도 없이 덜컹 열린 문 너머로 한 여성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방 안에 있던 세 사람의 시선이 모두 그 쪽으로 쏠린다. 청년과 소년, 그리고 청년의 손님. 그는 의사이므로 정확히는 환자라 해야 맞겠다. 청년은 숨을 훅 내쉬더니 대답했다.

"여기 있으니까 ‘제발’ 데려가."

잠시 셀린을 바라보더니 그새 다시 엘리에게 시선을 복귀시킨 루사나는 전혀 나갈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아니 그의 말을 듣기는 한 걸까. 소년은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듯 했다. 오로지 엘리,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는. 셀린은 전혀 무반응인 루사나를 보며 고개를 휘휘 젓더니 성큼성큼 진료실 안으로 들어와 루사나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코코아─……,’ 하고 중얼거리는 소년의 목소리는 들은 척 만척 흘려넘기며 그를 잡아 끌었다. 셀린의 손길에 의해 의도치 않게 걷게 된 루사나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그녀를 뒤따랐다. 진료실 문이 닫히기까지 엘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소년의 모습에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진료실 문이 닫히자 꼬리내린 강아지 같은 모습이 되어 시무룩하니 그녀를 뒤따르는 소년의 모습에 셀린은 조금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엘리가 그렇게 좋아?"

신기해서 물은 셀린의 질문에 소년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너무도 순진한 눈동자를 앞에 둔 탓에 뭔가 더 따져물을 기운도 나지 않았다. 그저 ‘엘리, 너 잘못걸렸구나,’ 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그의 행복을 빌어줄 뿐. 셀린이 그렇게 생각에 빠져있는데 무언가 그녀의 소매를 잡아당긴다. 내려다보니 소년의 손이 옷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어디 가는 거예요?"
"간식 먹으러."
"간식?"
"딱 시간이 간식 시간이잖아. 눈사람 모양 브리오슈, 먹어본 적 있어?"
"으응─."
"네가 있을 땐 만든 적이 없었던가. 달아, 맛있어. 단 거 좋아하지?"

살짝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의 모습에 셀린은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애가 이리 솔직한지 한번씩 웃음이 터진다. 보통 단 걸 좋아한다거나 하는 것, 이 또래 남자애들은 숨기지 않나? 어리둥절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루사나의 머리를 쓱쓱 쓸어주고는 셀린은 앞서 식당으로 재게 걸었다. 코코아를 마시며 천천히 따라오던 루사나의 ‘같이 가요,’라는 소리는 한귀로 흘려넘겼다. 아직도 꽤 많이 남은 코코아를 엎을까봐 빨리 걷지 못하는 소년을 복도의 코너에서 기다리며 셀린은 피식 웃었다. 난로가 없는 복도의 공기는 꽤나 차갑기 때문에 벌써 거의 식었을 텐데 못 마시고 조심조심 들고오는 모습이 재밌다.
루사나의 걸음에 맞춰 느릿하게 도착한 식당에는 낯선 사람이 있었다. 화사한 금발에 여유로운 미소가 눈에 띄는 남자다. 가늘어보이는 손목에 걸린 얇은 팔찌가 찰랑하고, 소리를 내었다. 찻잔을 들어올려 입에 대고 내려놓기까지의 일체의 과정에는 몸에 벤 품위가 엿보인다. 쓸데없는 동작은 전혀 없었다. 걸치고 있는 옷의 재질은 꽤나 고급이다. 정장은 아니지만 격식에 어긋난 것도 아니었다. 괜찮군. 눈이 마주친 아주 잠깐동안 낯선 이를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본 후 점수를 매겨본 셀린은 식당에 들어서며 눈빛으로 사랑하는 동생, 세실에게 질문을 던진다. ‘누구야.’

"루사나군을 찾던데? 누님도 모르는 사람이야?"
"루야한테?"
"응. 루사나군은? 데리러 갔던 거 아니었어?"
"아까까지 잘 쫓아왔으니까 이제 들어올……, 루야?"

안그래도 하얀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렸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하게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소년은 누군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바닥에 조심스레 머그컵을 내려두고 그대로 뒤로 한발짝 내딛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뭐지?"
"글쎄."
"아, 루오빠 갔어? 브리오슈 내가 구운건데……."

과자를 예쁘게 담은 접시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나오던 린이 울상을 지었다. 세실이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 수 없지. 다음에 오면 또 굽자."
"응!"

부녀는 마주보며 생글거리고 셀린은 고개를 저었다. 둘 다 못말려, 정도로 해석하면 될까. 린은 자기 머리보다 커다란 접시를 식탁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루오빠 그냥 가버렸지만, 같이 과자 먹고 가요."

방긋 웃는 아이의 얼굴에 웃음으로 대응한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아이의 앞에 내민 하얀 종이에는 그린 듯이 예쁜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감사합니다만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이는 아쉬운 눈길로 쪽지를 받아들었다. 뭔가 싶어서 쪽지를 들여다본 셀린이 세실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질문 없이 바로 대답이 나온다. 아니, 정확히는 이번에도 쪽지. 셀린이 세실에게 전해받은 쪽지를 읽는 동안 세실은 손님을 붙잡았다.

"기왕 구운건데 같이 드시죠. 어차피 같이 먹으려고 했던 루사나군도 가버렸으니까요."
"응응, 같이 먹어요!"
"린이도 이렇게 바라고 있으니까요."

청년의 친절한 말에 손님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앉았다. 세실은 차를 내오러 잠시 부엌으로 들어가고 셀린은 손님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셀린은 쪽지를 옆에 내려두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 쪽지대로라면 말을 하지 못하시는 거군요."

그는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숙여보였다. 불편하군, 이거. 그나저나… 딱히 할말이 없네. 셀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쿠키를 하나 집었다. 일단 먹고보자.

"오빠는 루오빠의 친구─인거죠? 이름이 뭐예요?"

그러고보니 이름도 몰랐구나. 아이의 질문에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는 미리 준비해서 늘 가지고 다니는 듯 품 속에서 꺼낸 종이 한장을 아이에게 건냈다.

「루아인Ruain」

"에…, 그럼 아인오빠라고 불러도 될까요?"

끄덕끄덕. 아아, 화기애애하군.

"뭐야, 그 녀석은 어디갔어?"
"엘리 삼촌!"

갑작스런 목소리에 돌아보니 그새 진료가 끝난 건지 식당 문 앞에 피곤한 얼굴의 엘리엇이 서있었다. 때마침 찻잔을 든 세실이 나오며 그를 반겼다.

"환자분은 돌아가신거야? 먼저 앉아있어. 한잔 더 따라올게."
"고마워."
"삼촌, 오늘 브리오슈 린이가 구웠어요!"
"어쩐지. 오늘따라 냄새가 더 좋더라. 잘했어."
"에헤헤."

쪼르르 달려나가 그의 옆에 매달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엘리가 식탁에 앉고 세실은 찻잔을 각자의 앞에 내려둔 후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이가 아빠를 외치며 따라들어가는 것을 잠시 바라보던 엘리가 식탁 위에 뭔가를 올려놓았다.

"뭐야, 왠 나뭇잎?"
"몰라. 당신한테 전해달라는군요."

그 것은 방금 가지에서 딴 듯 파릇한 나뭇잎 한 장. 엘리는 그것을 아인을 향해 내밀었다.

"어쩐지 전혀 안 놀라더라. 누가?"
"그것도 몰라. 이 쪽으로 오는데 누가 창문을 두드려서 봤더니 주던데. 린이보다 작은 남자애. 키만 봐서는 10살이 안됐으려나."
"헤에."

오늘은 묘한 손님이 많네, 셀린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 묘한 손님 중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니, 보려고 했다. 이미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남아있는 것은 이번에도 하얀 종이쪽지와 구슬을 꿰어 만든 어린아이 손목에나 들어갈 듯한 팔찌 하나.

"어라, 손님은 가신거야?"
"그런 모양인데."
"에?"
"또 가버렸다…."
"자, 린이 네 거. 맛있는 과자에 대한 보답이라는데?"
"왓, 예쁘다~!"
"근데 이거 루비 아냐? 이건 사파이어…, 전부 진짜 보석같은데?"
"에이, 설마."
"내가 이런 거 한두번 보겠어? 확실해. 일단 전문가한테 한번 보여야겠지만 이거 전부 진짜 보석이야. 대체 뭐지, 그 녀석?"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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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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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그럼 시작할까요 _with RIMIEN SIARTE

 “안아.”

 

 그녀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안아, 안 자?”

 “벌써 여섯시인걸요. 아침이에요.”

 

 얇은 베일처럼 겹겹이 깔린 어슴푸레한 새벽의 어둠이 가볍게 흔들렸다. 거의 걷혀가는 새벽의 자취가 이 공간의 지배자에게 보일 수 있는 유일한 경외의 표시였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정작 경배를 받은 그녀 본인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섯시? 우, 그럼 한참 꿈나라에서 헤엄치고 있을 시간이잖아.”

 

 그녀는 잠에 취해 비틀거리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한손으로는 늘 그녀의 침대에 뒹굴고 있는 강아지 인형을 끌어안고 나머지 한손으로는 눈을 가리고 있는 상태였다. 정오가 되어도 한밤중처럼 캄캄한 그녀의 방에 비하면 이미 하루가 시작된 이 곳, 거실은 눈이 부신 것이 당연했다. 나는 읽던 책을 내려두고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럼 다시 방으로 가요. 좀 더 자고 이따가 일어나세요.”

 “우우.”

 

 그녀는 투정부리듯 고개를 흔들었지만 달래면서 한 발짝 내딛자 눈앞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환하게 빛이 들어오던 거실이었는데 지금은 어둑한 복도에 자리한 그녀의 방문 앞이었다. 집안의 다른 이들에겐 열리지 않는 비밀의 문 정도로 알려져 있는 방이지만 사실은 그녀의 침실. 그것도 지금같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는 물론 그녀가 본체로 돌아갔을 때도 편히 쉴 수 있도록 준비해둔 특별한 장소였다. 문이 열리자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공간인 듯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어둠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깜깜하네요.”

 “졸려-.”

 

 나는 바로 방의 윤곽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워서 방이 아니라 문 너머로 구멍이 뚫린 듯한 그곳에 차마 발을 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거리낌 없이 자연스럽게 문턱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고, 그녀가 내 손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나 역시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방안은 말 그대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태. 문에서부터 그녀의 침대까지 이르는 긴 직선상에 부딪칠만한 물건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면서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저 이만 가볼게요.”

 “싫어, 옆에 있어.”

 

 거의 잠에 빠져든 상태인 듯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내 손을 더욱 끌어당겨 아예 인형과 함께 품에 안았다. 난 완전히 침대위에 걸터앉게 되어버렸다. 놓아달라는 의미로 그녀의 손을 톡톡 두드려보았지만 그녀는 모르는 척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었다.

 

 “자는 척이라니, 어린애처럼 굴지 마세요, 마스터.”

 

 조용히 불러 보아도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괜히 웃음이 나왔다.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머리를 찾아 침대를 더듬었다. 그녀가 자면서 신경 쓰이지 않도록 얼굴을 덮은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마를 쓸어 넘기는데 갑자기 강한 힘으로 손을 붙들고 있던 팔이 느슨해졌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끝까지 소매에서 떨어지지 않는 손을 조심스레 잡아 그녀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이따가 낮에 일어나면 다시 손 잡아드릴게요. 그러니까 지금은 참으세요.”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남기고 방을 나왔다. 언제나 그랬지만 이 방은 빠져나갈 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은은한 빛이 나갈 길을 비추어 주었다. 마치 어느 누구의 접근도 반갑지 않다는 듯 들어오는 이에겐 인색하고 나가는 이에겐 후한 방이었다.

 

 

 

 

 시안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방안의 풍경이 바뀌었다. 문과 문턱이 맞닿고 ‘잘각’하는 소리로 바깥 공간과 완전히 격리되었음을 깨달은 방이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방의 크기가 변하거나 벽지, 가구가 바뀌는 등의 큰 변동은 아니다. 방안에서 변한 것은 단 한 가지. 갑자기 나타난 것인지 단순히 커튼에 가려 있었는데 너무 어두워서 눈치 채지 못한 것인지 모를 작은 창문이 나타났을 뿐이었다. 창밖의 풍경은 집안의 다른 장소와는 다르게 한밤중이었다. 어두운 푸른 하늘에 달과 별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맑고 깨끗한 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갖가지 잡동사니로 가득한 수납장을 비추었다. 무대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지듯 곧은 직선을 그리며 들어온 달빛이 가장 환하게 빛나는 방의 구석에 ‘그녀’또래로 보이는 한 소녀가 서있었다.

 

 소녀는 달빛을 받아 붉고 시리게 빛났다. 붉었다. 소녀의 선명한 선홍색 머리카락은 귀를 덮고 좁고 가녀린 어깨를 만나 갈라졌지만 남은 머리숱만으로도 풍성해 어깨마저 덮고 빈약한 가슴과 등을 타고 흘러내려 통통한 엉덩이와 허벅지, 종아리를 지나 마침내는 바닥에 흩어져버렸다. 어둠 속에서 보아도 눈이 아플 만큼 자극적인 붉은색이 달빛을 받아 소녀의 전신을 감싸고 반짝였다. 가만히 달을 응시하는 그녀의 동그란 두 눈, 그것을 감싼 풍성한 속눈썹과 눈 위의 곧고 짙은 눈썹도 같은 빛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밀랍인형 만큼이나 창백한 그녀의 피부 위에도 머리카락만큼이나 붉은 곳이 있었다. 화장기라곤 전혀 없는 소녀의 양 뺨은 한눈에 띌 만큼 발그스름했고 앙다문 입술은 립스틱을 바른 아가씨의 입술보다도 붉었다. 붉은 빛에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는 여린 몸뚱아리엔 소녀의 피부만큼이나 하얀 민소매 원피스 한 장만이 걸쳐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소녀의 붉음이 더욱 붉어 보이도록 배경으로 깔아놓은 흰 도화지 같았다.

 

 건조한 무표정과 미세한 움직임조차 없는 모습은 소녀를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닌 것처럼 느끼게 했다. 얼핏 보기엔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느린 박자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댕-. 댕-. 댕-.”

 

 창 너머 먼 곳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댕-. 댕-. 댕-.”

 

 느릿하게 퍼지는 종소리의 여운은 이미 깊은 잠에 빠진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듯 방안을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댕-. 댕-. 댕-.”

 

 종소리 사이로 뭔가 다른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숨소리 같은 속삭임.

 

 “댕-. 댕-. 댕-.”

 “지금이야.”

 

 마지막 종이 울리자마자 들린 것은 조금 전의 환청 같은 소리와는 달랐다. 들릴락 말락 작게 속삭이는 것은 같았지만 분명 방안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시작했다.”

 

 붉은 빛의 소녀였다. 소녀의 작은 입술이 달싹였다.

 

 “계속 자고 있을 건가.”

 “움…….”

 

 그녀가 몸을 뒤척이더니 옆으로 돌아누웠다. 소녀에게 등을 보이는 방향이었다. 그녀는 뭔가 불편한 듯 얼굴을 찌푸린 체 강아지 인형을 꼭 껴안았다.

 

 “그렇군.”

 

 

 

 

 소녀는 사라졌다. 처음 나타나서 내내 그림같이 한자리에 서 있던 소녀는 말을 끝내자 아무런 낌새도 없이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방안의 풍경은 붉고 커다란 점이 사라졌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바뀐 것이 없었다. 어느 샌가 창에는 속이 비치는 얇은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녀는 조금 더 어두워진 방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행복한 미소를 띠고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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