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소란스러웠던 것 같은데 이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어떻게 된 거지. 뻔뻔한 생각이 들었다. 알고 있었다. 모두 불타버렸다. 불타지 않은 자는 뜯어먹혔다. 무덤에서 기어올라온 마물이 산자의 살을 물어뜯는다. 역병이 돌 것이다. 탁기가 사방에 가득했다. 공기가 푸르게 물들어있었다.
언제나 복잡하던 머릿속이 청소라도 된 것처럼 맑았다. 하늘이 붉었다. 피비린내와 살이 타는 냄새가 뒤섞였다. 평소였으면 구역질을 하고도 남았을 역한 냄새를 아무렇지 않게 맡으며 씻고 싶다고 생각했다. 결국 벌어지고 말았다.
알고 있었다. 결국은 일어날 일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을 아는 건 자신 뿐이었다. 그래서 단휼은 홀로 남았다. 상관은 없었다. 딱히 가족의 품이 그립다거나 하지는 않을 터였다.
멍하니 앉아있는 것도 지겨워져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옷차림을 점검한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깨끗한 차림이었다. 검푸른 불꽃은 넓은 저택을 모조리 불태웠지만 단휼의 옷자락은 건드리지 못했다. 불꽃을 뚫고 단휼을 건드릴 수 있는 자도 없었다. 광활한 대지가 단휼의 통제 하에 있었다. 단휼은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불태우기를 택했다.
졸렸다. 옷이 말끔한 것을 확인하자 어서 이 지저분한 장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지독한 냄새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기분 나쁜 살점이나 시체로부터도.
저택은 너무 넓어서 걸어도 걸어도 밖이 보이지 않는다. 단휼은 저택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쪼그려앉아 훌쩍인다. 짜증나. 경공을 써서 날아가면 되겠지만 그것마저 귀찮았다. 단휼은 말 한 마리 남겨두지 않은 몇 시간 전의 자신을 원망했다.
조금 울고 나니 개운해졌다. 내력을 모아 발끝에 집중하고 가볍게 발을 구르자 순식간에 지면이 멀어졌다. 빙글 돌아 바람을 탔다. 하늘을 날아 저택의 담장을 넘는다.
평소라면 마을까지 그대로 날아갔겠지만, 오늘은 어쩐지 눈에 띄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마을이 보이는 곳에서 땅으로 내려앉는다. 덥수룩하게 기른 금발이 팔락거리며 노을처럼 반짝였다.
다시 한 번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소년은 큰 길로 나선다. 제 눈이 평소보다 선명한 붉은 빛으로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새빨간 눈동자가 주변을 훑자 수풀에 숨어있던 들짐승이 놀라 달아났다.
인적 없는 길거리를 서성이며 사람을 기다렸다. 졸음이 어깨를 무겁게 눌렀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침내 인기척이 들렸다. 단휼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시커먼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웠다. 그 어떤 목석이라도 넘어오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던 미소를 머금고 그에게 뛰어들었다.
“얘, 나랑 자자.”
졸렸다. 얼굴도 모르는 나그네는 단휼의 작은 몸을 가뿐하게 안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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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단휼烾㣋㤜. 그 아이를 처음 만난 것은 ‘그것’과 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말간 얼굴에 생글거리는 미소를 띄운 예쁘장한 소년이 나를 보자마자 뛰어들듯이 품에 안겨들었다.
“얘. 나랑 자자.”
가느다란 팔을 허리에 감아온다. 지나치게 익숙한 감촉에 놀라서 굳어있는 내 배에 얼굴을 부비며 소년은 졸음 가득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얼른. 나 졸려.”
칭얼대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조그만 몸을 안아든 것은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품에 안겨드는 가느다란 팔다리를 달가우면서도 낯설게 받아들이며 나는 속으로 멍청한 자신에게 혀를 차고 있었다.
결국 머물지도 확실치 않았던 마을에서 이른 저녁부터 방을 잡고 소년을 침대에 눕히고 나서야 나는 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을지 고민에 빠졌다. 단휼은 잠시 꾸물거리며 잠드는 듯 하더니 곧 깨어나 인상을 찌푸렸다.
“추워. 이리와.”
슬슬 정신이 돌아온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 애는 내 표정 따위는 관심도 없는 듯했다. 반복되는 제촉에 못 이긴 내가 그의 곁에 접근하자 소년은 당연하다는 듯이 내 목을 끌어안고 이불 속으로 끌어당겼다.
“이봐.”
처음으로 손길을 거부하려는 순간 단휼이 입을 맞춰왔다. 꽃에서 추출한 달큰한 향내와 피와 연기의 냄새가 났다. 몇 시간 안에 살을 태운 연기에 휩싸인 몸이 아니면 날 수 없는 냄새였다. 본능적으로 긴장감이 들었다. 단휼은 얼어붙은 나를 침대에 눕히고 졸음에 취한 눈으로 내 상체 위에 걸터앉았다. 가느다란 다리가 가슴을 조여온다.
바싹 마른 가녀린 몸이었다. 거친 일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희고 고운 손으로 내 얼굴을 붙든 체 키스에 열중하는 소년의 예쁘장한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촛점을 맞추기 힘들 정도의 지근거리에서 금빛 속눈썹이 흔들린다. 무심코 허벅지에 손을 대자 바른 것도 없이 빨간 입술에서 낮은 한숨이 흘렀다. 움찔거리는 허리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허벅지도 허리도 한손에 움켜쥘 수 있을 것 같이 가늘다. 나는 그때까지도 소년에게서 나는 향이 무엇인지 사정을 추측하느라 사고가 마비된 상태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단휼의 작은 몸이 내 허리 위에서 달뜬 신음을 뱉고 있었다. 나는 본능인지 습관인지 분간하기 힘든 행위를 소극적으로 계속하며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몽롱한 표정이었다. 아침 식사를 해치우듯 권태로운 성교였다. 단휼은 혼자서 열락을 즐기곤 내 사정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 내 몸 위로 쓰러졌다. 맨 가슴에 닿는 여린 살과 꽃향기와 탄내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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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슬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그날은 드물게도 아르시니가 컨디션이 좋았고, 땅에서는 풀 내음이 났으며 바람이 거의 불지 않고 선선했다. 마샤는 그날 아르시니와 걸었던 스콜로프 저택의 정원을 기억했다. 짧은 봄이 시작되어 장미가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정원에 심은 것치고는 특이하게도 송이가 작은 품종이었다. 장미는 산책로의 주인이 아니라 다른 꽃과 어우러져 주변을 화사하게 밝히고 있었다. 정원사의 솜씨가 돋보이는 배치였다. 소박한 장미를 고른 것도 정원사의 요청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르시니는 우산을 들어주겠다는 마샤의 청원을 끝끝내 거절하고 제가 우산을 들었다. 아직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래서 마샤는 어린 동생의 어리광을 기꺼이 받아주었다. 공국을 이끄는 위대한 네 마법사 가문 중 하나의 주인이 이런 잡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말을 해보았지만, 우산을 드는 정도야 숙녀를 에스코트하는 예우라고 태연하게 대꾸할 뿐이다. 그런 동생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도 이제는 어색한 나이였다.

 남매는 정원을 한 바퀴 돌고 유리로 벽을 세운 정자에 마주 앉았다. 사용인이 미리 준비해둔 찻주전자에서 김이 올라왔다. 날이 따뜻해졌다지만, 비가 오고 기온이 높지 않은 날이었다. 마샤는 아르시니를 보았다. 소년은 앳된 얼굴에 어른스러운 미소를 띤 채 비 내리는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기 걸리겠다. 숄을 두르렴.”

 “과보호야, 마샤.”

 아르시니는 낮게 웃었다. 마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빗줄기는 아주 가늘었다. 유리 벽 한쪽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도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처럼 가늘었다. 비는 고이지 못하고 땅을 가볍게 적셨다. 꽃과 이파리가 촉촉한 공기를 한껏 빨아들여 싱그러웠다.

 “마샤는 내가 언제까지 살았으면 좋겠어?”

 아르시니가 물었다.

 “안 죽었으면 좋겠다.”

 마샤는 대답했다. 아르시니가 키득거렸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마샤야말로 항상 위험한 곳을 돌아다니잖아. 죽으면 안 돼. 내 장례식에 와줄 가족은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백작님이 슬퍼하신다.”

 “마샤만 비밀로 해주면 돼.”

 아르시니는 태연하게 말하며 찻잔을 들었다. 미지근해진 물을 버리고 차를 따랐다. 꽃과 풀에서 나는 싱그러운 냄새와 비, 비에 젖은 흙냄새를 뚫고 새콤달콤한 향기가 뜨거운 물에서 퍼져 나왔다. 마샤도 잔을 비우고 차를 따랐다. 아르시니는 눈을 감고 향을 맡고 있었다.

마샤는 동생의 낯선 모습에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스콜로프 저택에 들어간 이후로 하루하루 귀족적인 품위를 갖추어 가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침착한 성정은 타고난 것이며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은 마법사의 특성인지라 별로 달라졌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저 만날 때마다 무럭무럭 자라는 것이 놀라웠다. 점점 고상해지는 몸짓이며 말씨도 그저 좋은 교육을 받았구나 생각했다.

 “장례식 하니까 말인데.”

 마샤가 생각에 잠긴 사이 아르시니는 운을 떼었다. 입속을 감도는 차향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부드러운 미소가 감도는 채였다.

 “내가 죽으면 마샤가 첫 번째로 꽃을 주면 좋겠어.”

 “그건 직계 가족이나 가능한 거지.”

 “마샤가 내 가족이잖아.”

 아르시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소년의 노란 눈동자가 좁은 틈새로 반짝였다. 마샤는 할 말이 없어 허탈하게 웃었다.

 “유언장을 쓸 거야. 사실 지금도 쓰고 있어. 이건 마샤가 가면 적을 거야.”

 “백작 부인이 서운해하실 거다.”

 아르시니는 마샤의 말을 한 귀로 흘려버렸다. 못 들은 척 찻잔을 들어 올리는 손가락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마샤의 책망하는 눈을 마주하고 아르시니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춥다.”

 그렇게 말하고는 시선을 내린다. 영악한 소년은 누나의 잔소리를 틀어막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마샤는 문득 오렌지가 먹고 싶어졌다. 그래서 아르시니가 찻잔을 내려놓는 순간 옆에 있는 숄을 집어 던졌다. 기겁한 아르시니가 얼굴을 뒤덮은 숄을 허둥지둥 끌어 내렸다. 곱게 단장한 머리가 다 흐트러졌다. 아르시니가 골난 소리를 냈다. 마샤는 그런 아르시니를 비웃어주었다. 아무리 나이를 먹고 덩치가 커졌어도 고작해야 말을 타고 정원을 도는 게 다인 도련님이 사관학교를 졸업한 직업 군인을 이길 수는 없었다.

 

 *

 「마샤 알렉산드라 스미노르바양에게,

갑작스러운 편지를 받고 적잖이 놀라셨으리라 예상합니다. 봄을 맞이하여 새 단장을 하던 중, 미처 손길이 닿지 않았던 곳에서 귀인의 물건을 발견하였습니다. 구리로 테를 두른 카드 상자입니다. 어머니께서는 귀인을 그리워하여 상자를 스콜로프 저택에서 보관하길 바라셨지만, 상자의 연식과 상태를 보아 스미노르바양과의 추억의 물건으로 사료됩니다. 반환을 원하신다면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스콜로프 저택은 언제나 귀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새로운 계절에 어울리는 새로운 행복을 기원하며, 나탈리야 스콜로프 드림.」

 근 일 년 만에 찾은 스콜로프 저택은 여전히 중후한 맛이 있는 멋진 건물이었다. 정원은 완전히 갈아버렸는지 아르시니가 허둥지둥 달려 나오던 길은 모양만 겨우 남았을 뿐 완전히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정원사가 바뀌었던지, 단단히 마음을 먹고 정원을 새로 꾸민 모양이었다.

 마샤는 정문을 지키는 문지기의 정중한 인사를 받아가며 스콜로프 저택에 발을 들였다. 수도 안에 있는 저택이지만, 스콜로프의 이름이 무색하지 않은 크기와 웅장함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평민 출신 신입 장교가 발을 들이밀기엔 너무 멋진 곳이었지만, 마샤는 긴장하지 않았다. 마샤에게 있어서는 두 번째 집 같은 곳이었다. 적어도 죽는 순간에 스콜로프의 이름을 댈 수 있을 정도로는 사랑하는 곳이었다.

 건물에 도착하자 하인이 문을 열고 마샤를 맞아들였다. 모자와 겉옷을 벗어 건네자 공손히 고개를 숙인다. 안에서 나온 하녀가 마샤를 안내했다.

 봄맞이 새 단장을 했다는 이야기는 진짜였다. 마샤는 작년과는 딴판으로 달라진 실내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묵직하고 우아한 색조로 꾸며져 있던 복도는 선명한 파란색을 기조로 시원하게 바뀌어 있었다. 벽에는 못 보던 그림이 많아져 있었다.

 훈훈한 날씨 탓인지 응접실은 활짝 열려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연한 바닐라 색 드레스 자락을 끌고 스콜로바의 여주인, 엘리자베타 스콜로바가 나타났다. 사르륵 비단 천 자락이 양탄자를 스쳤다.

 “매정한 아이야. 한 번쯤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그리도 들지 않았니.”

 곱게 주름진 얼굴로 눈웃음치며 엘리자베타가 말했다. 마샤는 마주 웃었다.

 “그래서 편지를 보냈잖아요.”

 “내가 보고 싶어 할 거라곤 생각도 안 했지? 아르시니 그 애도 그렇고, 너희 남매는 너무 매정해.”

 엘리자베타는 소파에 궁둥이를 붙이며 투덜거렸다. 비단 스커트가 마샤의 초라한 구두 끝을 스쳤다.

 “잘 지냈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요즘은 나탈리야도 쌀쌀맞고 집안이 쓸쓸하게 느껴지지 뭐니. 그래서 봄을 맞아 산뜻하게 꾸며보았단다.”

 엘리자베타가 호호, 웃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마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화사한 실내는 마샤가 알던 스콜로프 저택의 장엄한 분위기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오래전부터 엘리자베타가 바라던 모습이었다. 이곳에 들를 때마다 엘리자베타가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읊던 계획을 알고 있는 마샤로서는 드디어 꿈이 이루어졌다는 느낌이었다.

 “아주머니, 치사해요.”

 곧이어 티 트레이를 끌고 나타난 것은 베네라였다. 아르시니에게는 사촌 누나가 되는 베네라 스콜로프는 엘리자베타를 대신해 마샤에게 차를 대접했다. 본래라면 주인인 엘리자베타가 준비할 일이나 마샤는 이미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인 데다 일개 군인 신분인지라 적당히 양보한 것이다.

 엘리자베타와 베네라는 기품 있고 상냥한 귀부인이었다. 변방을 돌다 보니 도시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마샤가 대화에서 겉돌지 않도록 챙겨주면서도 이야기가 끊겨 어색해지지 않도록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마샤는 아르시니가 있을 때와 다름없이 편안한 기분으로 스콜로프 저택에서의 티타임을 즐겼다. 두 사람은 옷과 실내장식, 음악과 연극에 관해 이야기하고, 때로 두려워하며 요마와 오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멀쩡한 생물도 오염을 뒤집어쓰면 요마로 변한다면서요?”

 “네. 그래서 부상자나 사망자가 생기면 긴급히 호송 조치합니다.”

 “무서워라. 그럼 우리가 아는 사람이 요마가 될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요.”

 베네라는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을 모아쥐며 진저리쳤다. 마샤는 웃으며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수도에까지 그런 일이 생길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저희가 싸우는 거니까요.”

 “하지만, 마샤. 네가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야.”

 “맞아요. 마샤, 그런 위험한 일은 그만두고 수도로 올라오는 게 어때요?”

 엘리자베타와 베네라의 시선을 받고 마샤는 그저 웃었다. 죽음을 옆에 끼고 있다는 자각은 있다. 매 순간, 그것을 자각하지 않고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마샤는 그들의 걱정 어린 시선에서 사랑만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살기 위해 몸을 사리고 있어요. 마샤 스미노르바, 쉽게 죽지 않습니다.”

 마샤는 두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 있게 미소지어 보였다. 엘리자베타도 베네라도 그것으로는 진정이 되지 않는지 착잡한 얼굴이었지만, 더는 말이 없었다. 짧은 침묵이 지나고,

 “어머, 나도 참. 잠시만 기다리렴.”

 엘리자베타가 짐짓 발랄하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네라가 웃으며 빈 티팟을 정리하고 하녀를 불러 자리를 정돈하게 했다.

 “이렇게 이야기한 것도 오랜만인데 좋은 소식은 없나요?”

 베네라는 참으로 다정한 여인이었다. 마샤는 그런 다정함이 부담스러웠다.

 “군인이 연애할 시간이 어딨어요.”

 “앞날이 창창한 젊은 청년들과 함께 보내고 있잖아요. 마샤도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은 피가 끓을 나이 아니던가요.”

 그렇게 묻는 베네라는 마샤보다 어리다. 나이가 한참이나 떨어진 아르시니와 비슷한 나이였다. 하지만 베네라는 혼기가 차자마자 집안에 걸맞은 남편을 찾아 결혼한 귀부인이었다. 마샤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르시니도 살아있었다면, 살 가능성이 있었다면 결혼했을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유부남과 꼬맹이 사이에서 혼사를 생각할 수가 없더라고요. 저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젊은 혈기로 밤을 보내는 일도 줄어들었어요.”

 베네라가 안타깝다는 듯 한마디를 덧붙이려 할 때 엘리자베타가 돌아왔다. 뒤따라오는 하녀가 편지에 언급된 상자를 들고 있었다.

 “즐거운 나머지 그만 중요한 걸 잊었지 뭐니. 마샤는 이걸 위해서 온 건데 말이야.”

 엘리자베타는 하녀에게서 상자를 받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하녀가 뒤돌아 나가고 연이어 다른 하녀가 들어오며 간단한 다과상을 차렸다.

 구리로 테를 두른 작은 고동색 상자였다. 손때가 타 반질거리는 상자는 카드텍 하나가 들어가면 딱 맞을 크기다. 액세서리를 담기에는 투박하고, 값싼 소재로 되어있었다.

 엘리자베타는 구리로 된 모서리를 손끝으로 어루만지다가 이내 마샤 쪽으로 상자를 밀어주었다. 마샤는 이 상자를 알고 있다. 남매의 생모, 알렉산드라가 어린 시절 마샤에게 선물해준 카드 상자였다. 항상 자기를 대신해 어린 아르시니를 돌보는 마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며 사준 것이었다.

 “받으렴. 이 집에 남은 마지막 물건이야.”

 엘리자베타의 목소리가 먹먹했다. 상자에서 눈을 들어 바라보자 아름다운 눈동자에 눈물이 어린 것이 보였다. 고운 귀부인의 마음에 이 물건이 얼마나 큰 것인지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샤는 천천히 손을 들어 상자를 집었다.

 송구하게도 마샤는 엘리자베타에게 상자를 선뜻 선물할 수가 없다. 이것은 아르시니의 유품이자 어머니 알렉산드라의 유품이었다. 마샤는 문득 가족이 모두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떠올렸다.

 “고맙습니다.”

 엘리자베타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구나. 네게도 소중한 물건일 텐데, 내가 욕심을 내고 말았어.”

 “그만큼 아르시니를 아껴주셨으니까요.”

 마샤도 따라 고개를 저었다. 엘리자베타는 결국 손수건을 들어 눈가를 훔쳤다.

 “아르시니도 너도 내게는 자식이란다. 그 사실만큼은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구나.”

 마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티타임은 머지않아 끝났다. 엘리자베타가 슬픔에 젖어 더는 대화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베네라는 엘리자베타를 달래느라 마중을 나오지 못하고, 마샤는 혼자서 응접실을 나왔다.

 안내 없이 걸으며 복도를 다시 한번 찬찬히 둘러보았다. 청량한 색으로 꾸며진 실내는 엘리자베타답게 소박하면서도 화사한 장식을 둘러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귀엽다고 자랑하는 아르시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스미노르바양.”

 생각에 잠긴 마샤의 뒷덜미를 당기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문을 바로 앞에 둔 참이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엄숙한 드레스를 갖춰 입은 소녀가 마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탈리야였다. 아르시니보다도 어린 앳된 소녀는 전신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듯한 드레스를 입고 딱딱한 표정으로 마샤를 바라보았다. 전신에 철갑을 두른 듯, 차갑고 절도있는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마샤는 가볍게 묵례했다. 나탈리야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아버지께서 뵙기를 원하십니다.”

 마샤는 나탈리야의 뒤를 따랐다.

 나탈리야는 마샤를 정원 쪽으로 이끌었다. 전부터 저택의 다른 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화려했던 탓인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마샤는 괜히 아르시니와 걸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는 비가 오고 있었다.

 “들어가시지요.”

 나탈리야는 온실 앞에서 멈춰섰다. 마샤는 나탈리야의 안내에 따라 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유리문 너머로 나탈리야가 자리를 떠나는 것이 보였다.

 풀과 나무 사이로 멀리 보이는 테이블과 그 앞에 앉은 남자가 보였다. 그는 마샤가 기억하던 것보다 많이 늙어있었다. 아주 피곤해 보였고, 쇠약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로만.”

 마샤가 바로 옆에 다가갈 때까지도 로만은 못 박힌 듯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꽃은 붉게 핀 장미였다. 탐스럽고 송이가 컸다. 비싼 장미다. 마샤는 아르시니는 그런 장미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로만 옆에 섰다.

 “앉으렴.”

 로만이 말했다. 마샤는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치마를 추스르는 사이 로만은 마샤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아르시니의 유품이 나왔다고 하더구나.”

 “네. 그걸 받으러 왔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로만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테이블에는 차도 커피도 없었다. 와인병과 로만의 잔이 놓여있을 뿐이었다. 로만이 말을 않자 마샤도 말을 할 수 없었다. 사람이 입을 다물자 다른 소리들이 자리를 찾듯 주변을 메웠다. 온실을 유지하는 기계장치가 돌아가는 소리, 온실 밖에서 하인들이 대화하는 소리, 나뭇가지에 오른 새소리까지. 로만은 한참을 아무 말이 없었지만, 마샤는 기다렸다. 대기하는 것은 익숙했다.

 “벌써 석 달이나 지났구나.”

 로만이 말했다.

 “그렇게 되었군요.”

 마샤는 맞장구쳤다. 로만은 그제야 마샤를 돌아보았다. 깊게 팬 주름이 석 달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마샤는 이렇다 저렇다 말을 붙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너와의 인연도 제법 오래되었지.”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게 어디 네가 할 말이더냐. 다 늙은이들의 업보인 것을.”

 로만은 마샤에게 와인을 권하려다가 말고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네. 나탈리야에게 전권을 위임한 뒤로 예전 같지가 않아.”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와인을 따르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로만 대신 마샤가 일어났다. 로만은 손을 휘저었다.

 “나탈리야가 아르시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건 알고 있나?”

 로만은 와인으로 목을 축이고 다시 장미를 한 번 보았다가 마샤를 쳐다보았다. 마샤는 고개를 저었다.

 “내게도 형이 있었지. 마법사였고, 평민 출신이었네. 아르시니와도 비슷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어. 항상 밝고,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지. 어쩌면 마법사란 모두 그런 종족인지도 몰라.”

 마샤는 당황했다. 로만이 꺼낸 것은 오랜 마법사 집안의 치부라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나탈리야가 마법사가 아니기에 로만이 아르시니를 들였듯, 로만의 부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린 로만은 그것이 참을 수가 없었다.

 위대한 가문의 적자 태어나 가주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평범한 상인으로 태어나 길러진 마샤로서는 그게 어떤 기분인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마샤는 언제나 가족과 함께 살아남는 것만을 생각했고, 이제는 가족조차 없기에 자신의 생존 말고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로만은 달랐으리라. 나탈리야도 다를 것이다. 마샤는 나탈리야가 자신을 적대하는 이유를 몰랐으나 로만의 이야기에 그 답이 있었다.

 자신의 것이었어야 마땅한 권리이자 영광인 가주의 자리는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자랐는지도 모를 아이에게 돌아간다. 가주에 적합한 교육도 받지 않았고, 그만한 품위도 없는 아이다. 후계자로 교육받은 로만이나 나탈리야 같은 적자는 그들과 함께 교육받으며 그 아이들의 어설픔과 야만스러움을 지겹도록 보고 듣고 익혔다. 경멸하지 않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 아이들이 가주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은 채 성인이 되기도 전의 일이다. 마법사의 수명이 짧기 때문에, 그들은 하는 일도 없이 가주라고 불리며 대대로 가문을 이어온 적손의 섬김을 받는다. 그것은 귀족으로, 남을 다스리는 자로 살아온 마법사 가문의 혈통이라면 누구나 져야 하는 굴욕이었다.

 로만은 증오의 대상이었던 가주가 하루하루 쇠약해지다가 결국은 죽고 말았던 날을 기억했다. 어린 마음은 크게 상처 입었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유난히 가주에게 다정했던 부모님이 미웠고,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이 미웠다. 그래서 로만은 자신이 부모의 입장이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준비하지 못했다.

 결국, 아르시니를 입양하기로 결정이 났을 때부터 로만은 줄곧 스미노르바 남매를 피해왔다. 가끔 마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후견인으로서 만남을 가진 것뿐이었다. 아르시니에게는 한층 더 냉랭했고, 나탈리야에게도 다정하게 대하지 못했다. 전쟁과는 먼 곳에서 살아왔지만, 죽음은 로만의 삶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명랑하기 짝이 없는 마법사라는 생물의 짧은 삶이 흉터가 되었다. 로만은 아르시니를 제대로 마주하지도, 그렇다고 아껴주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 어린 소년의 죽음은 로만은 늙게하고 말았다. 마샤는 그 부산물이었다. 그래서 로만은 마샤에게 허물이 없었다.

 마샤는 아르시니가 로만이 무섭다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마샤에게는 한없이 자상해 마치 아버지가 있다면 이런 사람이 아닐까 싶은 사람이었기에, 아르시니의 그 말이 스콜로프 저택에 적응하는 중에 생긴 고충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마샤는 새삼 늙어버린 로만의 얼굴을 살폈다. 후회로 찌들어버린 얼굴이었다.

 “멀리하면 괜찮을 줄 알았지. 죽어도 신경 쓰이지 않을 줄 알았어. 그거 아는가? 나는 아르시니를 한 번도 내 자식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네. 그런데도 이렇게 마음이 아파.”

 로만은 끝내 눈물을 보였다. 마샤는 아버지 같은 로만의 등을 감싸 안았다.


 *

 스콜로프 저택에서 내준 마차를 타고 마샤는 좁은 방으로 돌아왔다. 아직 해가 질 시간이 아닌데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

 마샤는 오랜만에 입은 낡은 드레스를 벗어 걸어놓고, 편안한 차림으로 갈아입었다. 비로소 자신의 자리에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스콜로프 가문의 사람들이 마샤의 가족과 같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지만, 마샤는 스콜로프 저택의 일원이 아니었다.

 카드 상자를 옆에 던져두고 솜도 없이 삐걱거리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눈을 감자 하루 동안 두 번이나 보고 만 눈물이 떠올랐다.

 ‘마샤는 내가 언제까지 살았으면 좋겠어?’

 마샤는 대답했다.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아르시니가 죽은 뒤로 마샤는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마침 비가 내리는 날이었기에 하늘이 대신 울어주는구나 싶었을 뿐이다. 무덤에 들어간 아르시니의 비석을 보고서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짧은 삶이었구나 싶었을 뿐이다.

 허전했다. 이제 마샤에게는 어머니도, 동생도 없었다. 없어도 살아가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본래도 있는 듯 없는 듯한 삶이었다. 편지를 보낼 곳이 하나 줄어들었을 뿐이다. 비록 아르시니가 가장 자주 편지를 주고받는 대상이었다고는 하지만, 편지 보낼 곳이 하나 줄어들었다고 먹고 사는 것에는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특별히 아르시니와의 편지가 즐거웠던 것도 아니다. 그저 일기를 쓰듯이 일상을 보고해왔을 뿐. 아르시니도 크게 다르진 않았을 터였다.

 마샤는 마음으로 편지를 썼다.

 하늘에 있는 아르시니, 내가 울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해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나보다 많은 사람이 널 위해 울어주고 있지 않니. 너는 정말 괜찮은 삶을 살았다. 사랑받지 않았느냐. 나도 널 사랑한단다. 보고 싶다. 아르시니.

 마샤는 눈을 번쩍 떴다.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아르시니가 없어도 마샤는 괜찮았다. 그런데 눈물이 났다.

 아르시니, 나는 네게 정말 좋은 누나였니? 결국, 첫 번째로 꽃을 주지 못했어.

 뺨을 타고 눈물방울이 굴러떨어졌다. 창밖에서는 아르시니와 정원을 걸었던 그 날처럼 가느다란 보슬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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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을 뛰어넘을거야.”

 단이 말했다. 길가메시는 한쪽 눈썹을 치켜든다. 그런 길가메시를 곁눈으로도 쳐다보지 않았다. 담담한 선언이었다. 길가메시는 잘못 들었겠거니 생각하고 흘려넘겼다. 그러자 단은 길가메시를 쳐다보았다.

 “당신을 뛰어넘을 거야.”

 다시 한 번 내뱉은 말은 조용하지만 단호했다. 의지가 느껴지는 말에 길가메시는 찌푸린 체 소녀를 돌아본다. 현재 길가메시를 담당하고 있는 마스터, 단은 작은 몸집의 소녀였다.

 당돌하다 못해 건방지기까지 한 말에 길가메시는 그저 웃고 만다. 처음 만났을 때는 패기라곤 없어서 이딴 게 자길 소환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작던 여자아이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이 자라있었다. 생기 넘치는 눈빛과 곧게 편 등, 눈이 마주쳐도 피하지 않는 곧은 시선까지. 마치 사람이 달라진 듯한 변화였다.

 “그렇다면 짐은 네놈을 죽여야겠군.”

 길가메시는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게 뱉어진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좀 더 고압적으로, 좀 더 분노를 담아 했어야 하는 말이었다. 연약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화가 났다.

 “그러지 않을 거잖아.”

 단은 웃었다. 으레 그러듯 연약하고 부서질 것 같은 미소였다. 어리석은 잡종 같으니. 저런 표정으로 누굴 뛰어넘겠다고?

 성장이야 하고 있었다. 타고난 재능만이라면 길가메시가 기나긴 세월을 겪으며 만나본 수많은 마술사 중에서도 상위권에 드는 소녀는 처음 만났을 당시 평범한 수준의 마술 밖에 쓰지 못했다. 오죽하면 재능이 마력에만 미치고 그 외의 부분에는 미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다. 그러던 것이 눈빛이 살아나는 것에 더불어 마술이 발전하더니 함께 지낸 시간이 길지 않음에도 이제는 어지간한 마술사에게선 손도 대지 않고 항복을 받아낼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고작해야 마술 능력이 조금 향상된 것이다. 한 나라의 왕이자 장군이고 무인이었던 길가메시와 비견할 바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길가메시가 아니라 단, 미천한 인간 본인이리라.

 단은 저가 길가메시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다. 눈치를 보는 것은 몸에 벤 습관일지 몰라도 길가메시를 향한 선망의 눈빛은 감출 수 없었기에 길가메시는 언제나 이 작은 소녀의 꿈과 심경을 단번에 꿰뚫을 수 있었다. 단은 길가메시 앞에서 늘 말을 조심했고(비록 대화술은 엉망진창이었어도), 무엇이든 따라하며(어설픈 흉내일 뿐이었지만), 어떻게든 길가메시에게 어울리는 마스터가 되고자 했다. 그런 점이 귀여워 살려두지 않았던가.

 “왜 널 살려둬야하지?”

 “모르겠어. 하지만 당신이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단은 또 수줍게 길가메시의 눈치를 살폈다. 길가메시는 언제나처럼 고개를 치든 채 정수리가 제 코끝에 오는 여자아이를 내려다보았다. 평온한 말과는 다르게 불안한 듯 꼼지락거리는 손끝이 하찮기 짝이 없다.

길가메시는 갈색 머리칼 위에 손을 얹었다. 단이 흠칫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건방진 말을 하고 싶으면 적어도 떨지는 않게 연습해오도록.”

 조그만 머리통이 움직여 팔과 몸이 이루는 각도가 살짝 작아졌다. 노력할게. 단이 중얼거렸다. 길가메시는 콧방귀를 뀌곤 휙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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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였다. 무릎꿇은 마미의 뒤에서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가 터져나온 것은.

 “그렇게 슬픈 말씀하지 마세요, 언니.”

 뛰쳐나온 에리카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커다란 눈에 물기가 어려 반짝거렸다. 마미가 고개를 들지 않자 에리카는 하얀 손을 살며시 마미의 등에 얹었다.

 “언니 곁에는 언제나 제가 함께 있잖아요. 마미 언니에게 저는, 에리카와 함께 보낸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었나요?”

 “에리카.”

 “언니.”

 겨우 고개를 든 마미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에리카의 눈에서 또르륵, 한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안해, 에리카. 맞아. 에리카가 언제나 곁에 있어주었는걸. 나는 그것도 잊어버리고 혼자라고 생각해버리고 말았어.”

 “괜찮아요. 이제라도 기억해주셨는걸요. 언니에겐 제가 있으니까 외롭지 않지요?”

 “그럼. 물론이야.”

 “함께 무찔러요. 저런 마녀같은 건 마미 언니에겐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에리카가 언니 곁을 지킬게요.”

 “응. 고마워. 에리카.”

 두 사람은 서로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마미의 소울젬에서 빛이 나더니 풀렸던 마법이 돌아왔다. 금빛의 잔상을 두른 마미가 분연히 일어선다.

 “가자.”

 “뒤따를게요.”

 마미가 한걸음 내딛는다.

 에리카는 양손으로 받쳐든 소울젬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소울젬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완전히 기운을 되찾은 마미의 뒤로 눈부신 하얀 빛이 터졌다. 에리카의 그림자가 뒤로 길게 뻗어나갔다. 환한 빛만큼이나 짙고 커다란 그림자는 밑도 끝도 없이 바닥을 점령하고 퍼져나가다 그 가운데서 피어오른 하얀 꽃송이가 뿜어내는 빛에 이지러졌다. 크고 순결한 꽃잎이 벌어지며 은빛으로 휘감긴 에리카가 기지개를 폈다. 하품하듯 손으로 입가를 막았던 에리카의 눈이 살갑게 미소짓는다. 소녀는 폴짝 꽃송이에서 뛰어내렸다. 펑. 꽃잎이 다물리더니 봉오리가 빛과 함께 터졌다. 십자형 메이스를 바닥에 짚은 에리카가 생긋 웃었다.

 “걱정 마세요. 마미 언니는 제가 지킬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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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여름,
“거기 뭔가 있나요?”
“…아니.”
소이치로가 미스즈를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지만 아직 경칭은 떨어지지 않은(呼び捨て) 어느 날의 일이었다.
무심코 멈춰선 미스즈를 따라온 소이치로가 푸른 잎이 늘어진 플라타너스 가지 사이를 기웃거렸다. 미스즈의 주의를 끈 것이 궁금했던 모양이지만 그곳에는 이미 날벌레 한 마리 날아다니지 않는다.
미스즈는 저보다 스무해는 더 살아놓고 아직도 어린애 같은 남자의 등을 떠밀었다. 깡마른 미스즈에 비하면 건장해보일 정도로 건강하고 적당히 군살(나잇살이라고도 한다)이 붙은 남자의 등은 무더위에 녹아 눅눅하게 젖어있었다.
아, 덥다.
더운 날이었다. 헛것을 본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는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미스즈는 약한 어지러움을 미간 한 번 찌푸리는 것으로 흘려보내고 소이치로와 팔짱을 꼈다. 눅진거리는 피부 감촉이 불쾌했다.
*
밤이 되어 선선해진 탓일까. 미스즈는 서늘한 바람을 막아보려 팔을 감싸안았다. 시원한 소재로 만들어진 여름 유카타는 공기의 흐름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얇았다. 소이치로가 겉옷을 벗어 미스즈를 감싸안는다.
“추워요?”
미스즈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바람을 막은 것만으로도 한결 따뜻했다. 소이치로의 손은 따스하고, 마른 팔을 완전히 감쌀만큼 크다. 미스즈는 소이치로를 올려다보고 추위를 느끼는 것은 자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디찬 자조가 입가를 맴돌았다.
소이치로와 함께 찾은 축제는 지면으로만 접한 여름이라는 계절의 풍취를 한껏 머금고 온 몸으로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좁은 거리에 몰려든 인파 탓에 사람들 사이에 끼어다니며 미스즈는 인파 따위 딱 질색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지치지 않는 것은 달아난 청춘이 학창시절에도 즐겨보지 못한 축제를 이제야 찾아온 미스즈를 동정한탓일지도 몰랐다.
축제 음식을 사먹고, 사격, 고리던지기, 금붕어 건지기 따위 게임에 참가하고, 불꽃놀이를 기다리는 시덥잖은 일에 열중하는 사이 시간은 잘도 흘러간다. 하늘이 새카맣게 물들어 소이치로는 집에 갈채비를 하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어깨에 걸쳐진 그의 겉옷이 미스즈를 지켰다. 옷은 계속 미스즈가 걸치고 있었지만 아직도 따뜻한 기운이 돌았다.
축제의 여파는 길거리에도 넘쳐흘렀다. 사람들은 어두워진 거리에 아직도 남아 웅성웅성 떠들었다. 미스즈는 소이치로의 차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며 플라타너스 아래 서있었다. 그 플라타너스였다. 낮에 보았던 커다랗고 우거진 나무. 미스즈는 무심코 아까 그 자리를 찾아보고 만다. 커다란 가지 두 개가 갈라진 곳으로부터 수직으로 이미터가량 위쪽에서 무언가 번뜩거리던 것을 분명 보았다.아무 것도 없어 곤충 날개가 강렬한 햇빛을 반사한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 자리에 일렁이는 빛이 있었다.
미스즈는 그 자리에서 사로잡혔다. 흔들리는 빛무리가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고민도 없이 뒤를 따르고 만 것은 그 빛이 누군가를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었다.
아른거리는 빛. 그 기이한 장소에서 보았던 빛이다. 구석 자리에 덩그마니 앉아있던 조그만 소녀에게 내리쬐는 인공 햇살과 햇빛을 받아 반짝이던 그의 금발머리. 병원에서도 보았다. 행복하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병실은 빛이 잘 드는 커다란 창이 있었다. 미스즈는 혹시라도 빛을 잃어버릴까 길도 둘러보지 않았다. 어깨에 걸쳤던 겉옷은 한 손에 움켜쥔 채였다.
마침내 도착한 그곳에서, 가로등 불빛을 스포트라이트처럼 받으며 서있는 늘씬한 뒷태를 미스즈는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마음 한구석에서 이게 현실일 리 없다는 속삭임이 들렸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자신을 다독였지만 그럴 리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미스즈는 희망을 모르고 자랐고, 그는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태였다.
“릴리.”
천천히 그가 돌아본다. 어린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키차이가 난다. 그때도 충분히 크기는 했지만….
달이 지구를 한바퀴 돌자 그리운 얼굴이 눈 앞에 있었다. 미스즈는 이것이 거짓이라고 확신하며 손을 뻗는다. 닿지 마라. 닿지 마라. 주문을 외웠다. 아, 릴리.
손가락이 닿자마자 흩어지는 자리에 하얀 실타래가 흐트러진다. 그렇구나. 어쩐지 납득해버린다.
세상에는 요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미스즈는그런 허무맹랑한 것은 믿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쯤은 믿어도 될 것 같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 마주한 아스라한 미소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렇게 소쨩은 미스즈를 미아로 신고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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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가미 나츠미는 부자였다. 넓은 집에 고용인을 두고 살았다. 재화는 언제나 넉넉해서 원하는 것이 생기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세상에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은 많지만, 돈이 있으면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릴 수 있었다. 나츠미는 돈과 그에 따라오는 권력을 사랑했다. 무엇이든 마음 내키는대로 휘저을 수 있는 힘이 그에게는 있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은 나츠미를 이루는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지배하고, 거머쥐고, 휘두르는 사람이었다. 나츠미는 그 사실이 언제나 만족스러웠다. 그에 실증이 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사람이 필요하면 사람을 사고, 권력이 필요하면 권력을 산다. 나츠미는 살아오며 모자란 게 없었다. 누군가는 그의 삶을 보고 불행하다 하겠지만, 코웃음이 나올 뿐이다. 세상에 작은 불행 하나 없는 이가 누가 있겠으며, 흠없는 완전한 행복이란 존재하는가. 나츠미는 제 불행을 그 정도의 수준 낮은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불행에 취해있는 건 취향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유쾌하고 천진난만한 지상 낙원의 주인이었다.

 나츠미는 생각했다. 불행이란 그저 우스운 말장난일 뿐이라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자기 처지를 서술하기 위해 만들어낸 단어일 뿐이노라고.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이었을까? 그는 반문한다.


 내려앉은 금빛 속눈썹이 붉은 눈동자를 반쯤 가렸다. 침잠한 시선이 아래로 꽂혔다. 창에서 흘러들어오는 빛을 받아 반짝이는 유리관 속에 오색 꽃송이가 만발했다. 흐드러진 꽃잎 사이로 단정한 얼굴의 청년이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아직은 살아있는 이였다. 느리게 가슴이 오르내리고, 꿈을 꾸는 듯 이따금 표정이 바뀌었다. 그가 잠든 것이 벌써 몇시간 전인지 몰랐다. 나츠미는 그의 곁에 앉아 단정하고 고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깔끔하게 빗어도 금세 삐쳐나가는 억센 검은 머리는 꽃속에 파묻혀 있었고, 하얀 얼굴은 평온하게 잠들었다. 저 분홍빛 입술에 키스한 적이 몇 번이더라. 지금이라도 끝까지 채워진 셔츠 단추를 풀어헤치고 키스를 남기고 싶다.

 바라보면 볼수록 마음도 몸도 기울어진다. 나츠미는 어느새 유리관에 달라붙어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우스운 일이다. 사랑하는 그를 잠재워 유리관에 가둔 것은 자신일진데 만질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깨끗한 유리에 덕지덕지 묻어나는 지문이 시야를 방해해 황급히 소매로 닦는다.

 아직은 안 된다. 나츠미는 자신을 추슬렀다. 조금 더 잠재워둬야 했다. 당장이라도 그를 일으키고 싶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됐다. 이 손이 닿으면 그는 저 먼 곳으로 가버릴 터였다. 공주, 사랑스러운 이여. 나츠미는 웃어버렸다.

 츠키모토 히메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아이는, 나츠미에게 처음으로 그림자를 알려준 이였다. 모자란 것 하나 없이 언제나 자신의 눈부심에 취해있던 나츠미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이였다. 과정 하나하나 달콤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거부할 수조차 없는 악랄한 함정을 들이민 이였다.

 히메를 만나고부터, 나츠미는 자신의 연약함을 알았다. 누군가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감정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지킬 것이 생겼다. 함부로 내어줄 수 없는 무언가가 차가운 가슴 깊은 곳에 돋아났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깊이 뿌리를 내려 있었다. 그저 달콤한 케이크인 줄 알았던 것이 저주의 씨앗이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입맞추고 싶다. 나츠미는 또 생각했다. 유리관은 던져버리고 뜨거운 혀를 섞고, 매끄러운 살갗을 더듬어 잠을 깨우고 싶다. 아, 안 돼. 그래서는 안 돼. 한 번 드러난 약점은 반드시 또다시 공격당한다. 지금 없애두지 않으면. -않으면?

 등 뒤에서부터 냉기가 느껴졌다. 나츠미는 차츰 파고드는 차가운 감촉을 떨쳐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붙잡은 유리관에서도 바닥에서도 냉기가 피어올랐다. 마른 공기에 뿌옇게 김이 끼기 시작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손바닥이 유리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공포가 심장을 조여온다.

 나츠미는 삐걱거리는 관절을 억지로 잡아당겼다. 추위에 얼어붙은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더듬거리며 보물처럼 유리관을 끌어안는다. 지켜야하는 것인지 버려야하는 것인지도 구분할 수 없는 것을 소중히 끌어안고 새하얗게 바래버린 머릿속을 어떻게든 되살리려 노력한다. 없애버리면 간단한 것을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어리석고 또 어리석어서 그저 웃음이 난다.

 이럴 때면 항상 옆에서 도닥여주던 손길은 유리관 너머에서 고이 잠들어 있다. 저 손이 머리를 쓸고, 등을 보듬을 때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았던가. 자신의 연약함을 처음으로 깨닫게 만든 손이었다. 원망을 했던가? 아니, 그런 건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는 언제까지나 나츠미의 곁에 있겠다고 했지만, 그를 떼어낸 것은 나츠미였다.

 멍청하게도 없애버리면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처음처럼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던 그 때로 돌아갈 수 있어야했다. 아버지는 적어도 그런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어. 하지만 아버지 따위 무슨 상관이지? 그 인간이 내 인생에 참견할 자격이 있나? 물론이다. 아버지는 나츠미의 오너였으니까.

 그래, 그랬다. 나츠미는 이 사태의 원인을 알았다. 무엇이 되었든 그에게서 빼앗아가는 게 문제이지 않은가. 내것을 내가 가지고 있겠다는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나츠미는 옳았다. 츠키모토 히메는 카가미 나츠미의 것이었고, 카가미 마나부가 카가미 나츠미에게 얼마만큼의 지분을 가지고 있건 거기에 손대는 것은 옳지 않았다. 지분을 가지고 있기는 했던가? 옳던, 옳지 않던, 무엇이 누구의 소유이건 사실 그게 무슨 상관이겠냐만서도.

 나츠미에게 중요한 건 단 한 가지였다. 자신의 것을 지키는 것.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게 하는 것. 뭐든지 내 마음대로 할 것. 그래서 이 손으로 끝내려고 했다. 곤란해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 손으로 그 목숨을 거두고자 했다. 닿지 않는 곳까지 멀리 보내느니, 제 입으로 떠나겠다는 선언을 듣느니 그게 나으리라 여겼다.

 나츠미는 어리석었다. 냉정하고 똑똑하던 그는 벌써 십년도 더 전에 사라진지 오래였다. 무슨 판단을 해야 옳았을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아무것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했으므로, 그렇게 될 것이었다.

 붉은 눈이 번쩍이며 불길한 빛을 띄었다.





~~~

감 찾으려고 가볍게 쓴 조각글. 어째 남 보여줄 게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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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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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의 기후와 영국 문화에 밝지 않습니다. 원작 설정과도 동떨어진 부분이 있습니다.



 런던에는 오늘도 비가 내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런던 시민의 친구 같은 것인지라 세실은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날씨가 제법 달가웠다. 굳이 따지자면 좋아하는 것은 맑은 날이다. 밖에 나가서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도 있고, 따뜻한 볕을 쐴 수 있는 것도 좋다. 하지만 비에서는, 그것도 이토록 답답한 비에서는 런던의 냄새가 난다. 비록 그것이 달가운 것은 기분이 좋을 때 한정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날씨야 어쨌건 세실은 기분이 좋았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는 벽난로의 불꽃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음악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날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해도 거짓이 아닐 것이다.

 팬케이크 접시를 한 손에 끼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커피잔을 들고 벽난로 앞 안락의자에 자리를 잡자 오웬이 혀를 찼다. 그 소리를 한 귀로 흘려버리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형제는 달칵거리는 소리와 벽난로의 나지막한 흐느낌을 공유했다. 코끝을 물들이는 커피 향. 타오르는 불꽃이 습기를 잡아 뺨에 닿는 공기는 그다지 눅눅하지 않았다.

 “여자에게 데이트를 청해본 적이 있느냐.”

 오웬은 마치 자기가 질문을 받은 것처럼 물었다. 한껏 당황해있었다는 소리다. 짙고 곧은 아미를 찌푸리며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이 마치 해선 안 될 일이라도 하는 것 같아 세실은 웃어버렸다.

 “그럼 물론이지. 이 나이까지 데이트 한 번 해본 적 없는 사람은 드물걸.”

 오웬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인연이 그렇게 가볍게 다루어도 되는 것이 아니다.”

 “교제하자는 게 아니잖아. 데이트 정도는 누구나 해. 식사 한 끼, 차 한 잔. 어려울 것 없잖아.”

 “하지만…….”

 “왜, 데이트하고 싶은 상대라도 있어?”

 여상하게 질문을 던졌다. 명백히 오웬을 위한 행동이었다. 자신이 이런 화제로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를 낯설어하고 있는 청년에게 베푸는 사소한 친절이었다.

 “그런 게 아니다!”

 그마저도 과했는지 오웬이 버럭 소리를 쳤다. 세실은 픽 웃고 벽난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세실이 침묵하자 오웬은 입술을 깨물었다. 언성을 높인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못마땅한 것이라도 있는 듯 잔뜩 찌푸려진 얼굴이 오웬의 당황을 설명했고, 꽉 쥐어진 주먹이 긴장을 호소했다. 세실은 그저 웃고 만다. 그의 형제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순진했고, 지나치게 우직한 나머지 세상의 모든 부드러움을 적으로 삼아버린 듯했다.

 세실은 그저 오웬이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오웬은 불편한 듯 거친 숨을 몇 번 들이키고 입술을 두어 번 떼었다가 붙이고는 마침내 나직이 말했다. 미안하다. 세실은 무심히 흘려넘겼다. 스큅이라는 이유로 본가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자신보다 부모님 밑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는 오웬이 더 힘들게 사는 것은 성격 탓이다. 사서 고생하는 것도 죄라고 세실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누구야?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이유.”

 오웬은 점잖게 헛기침을 하려다가 사레가 들려 콜록거렸다. 세실은 웃으며 물을 떠다 주었다. 오웬은 겨우 두어 모금을 마시고서야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이름은 에리카 그라우플뤼겔이라고 한다.”


 호그와트 마법학교에는 남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마돈나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카리나 벨리니. 아름다울 뿐 아니라 공명정대하여 그야말로 헬가 후플푸프의 환생이 아니냐는 소문마저 도는 소녀였다. 물론 소문은 어디까지나 소문이어서 벨라 혼혈인 카리나가 후플푸프의 환생이라고 진지하게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소문에 감히 반박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아름다웠고, 또 뛰어난 실력과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은 벨리니양의 스케줄이 비어있을까?”

 “다음 주까지 약속이 꽉 차 있다고 하던데.”

 학기 중이라면 남학생들끼리 이런 이야기를 속닥이는 것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밀려드는 데이트 신청에, 여학우들과 친목을 도모하고 여러 소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는 카리나는 비는 시간이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였다.

 그런 카리나에게는 누구보다 절친한 친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에리카 그라우플뤼겔양이다. 윤기 흐르는 긴 생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조곤조곤 사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그녀가 바로 오웬의 사랑하는 그대 되시겠다.

 미모로는 카리나와 비교해 모자란 것이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다운 에리카였으나 그녀는 친구와 달리 조용하고 소극적인 성격이었다. 에리카는 여자 친구들끼리의 모임에는 자주 참석했으나 남학생들 사이에는 잘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그나마도 잠시 얼굴을 보이는가 싶으면 데이트 신청을 하는 남학생들에게 둘러싸이기 마련이었다.

 개중에는 꿩 대신 닭이라고 카리나를 대신해 에리카에게 대시하는 남학생도, 어떻게든 카리나와 가까워지기 위해 에리카에게 접근하는 남학생도 있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남학생들은 종종 카리나와 에리카를 놓고 누가 더 아름다운지 목소리를 높여 토론하곤 했다. 어디까지나 두 사람의 추종자에 한하는 일이기는 했다.

 당연하게도 세실의 형제 오웬은, 성실하다 못해 꽉 막혀 인생의 재미를 느끼고는 있는지 의문스러운 오웬은 그런 무리에 끼어본 적이 없다. 그저 먼 발치에서 몇 번 바라보고, 친구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을 뿐이다.

 실제로 데이트 신청을 받는 횟수는 카리나양보다 에리카양이 훨씬 많다거나 그만큼 승낙이 쉽게 난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


 “잠깐만.”

 세실은 오웬의 이야기를 끊었다. 오웬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세실은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는 오웬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이미 좋아하는 거야?”

 오웬은 눈을 깜빡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불길이 안정되어 조용해진 벽난로의 장작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렇군.”

 세실은 고개를 주억거리곤 마저 이야기하라며 손짓했다.


 그랬다. 오웬 허츠는 이미 옛날에,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의 언젠가부터 연심을 품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오웬 본인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입학식에서 모자를 쓴 에리카를 처음 보았을 때였던가? 아니면 처음으로 기숙사 대표가 되어 퀴디치 시합을 뛰다가 하늘에서 관객 사이에 섞여 있는 에리카를 발견했을 때? 어쨌든, 시작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오웬은 에리카를 연모했으나 한 번도 데이트를 신청하거나 추종자 무리에 끼지 않았다. 그저 에리카는 눈부시게 아름다우니 지금 소란스러운 인원 말고도 자신 같이 마음을 숨기고 있는 이가 많으리라 짐작했을 뿐이다.

 그런 오웬이 이제 와서 갑자기 데이트 신청을 생각하게 된 것은 아주 사소한 계기였다. 아니, 사랑에 빠진 이에게 사소하다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실이 아는 대로 오웬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야만 움직이는 신중한 청년이었고, 그에게는 에리카의 고운 두 손에 꽃다발을 안겨야만 하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결투를 했다.”

 “뭐?”

 오웬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세실은 황당했다. 머글 사회에서 결투가 사라진 게 몇 년 전이던가. 마법사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일찌감치 그들과 떨어져 살아온 세실은 그런 말이 형제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나온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입으로 에리카양의 명예를 더럽히는 학우가 있기에 혼내주었지.”

 차마 당황한 표정을 채 감추지 못한 세실을 향해 오웬이 한쪽 눈썹을 들어 보였다. 세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었다. 차마 하고픈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걱정 말아라. 이겼으니까.”

 오웬은 당시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긴 탁자를 두고 전교생이 거대한 홀에 모여앉는 호그와트의 식사시간은 마치 성 전체가 함께 식사하는 중세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식탁에 앉은 학생들은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호화로운 음식과 세련된 식사예절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여앉은 이들의 대화가 근처로 흘러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웬은 언제나처럼 이른 시간에 식사를 마치고 남들보다 약간 이르게 일어나려는 참이었다. 오웬의 주변에는 친구들과 다른 학년 학생들이 뒤섞여 있었다. 남학생과 여학생 자리를 구별하지 않고 섞여 앉을 수 있었지만, 대개는 친구들끼리 뭉쳐 앉으므로 여학생 자리는 멀었다.

 테이블은 진수성찬이 넉넉하게 놓일 정도로 넓었지만, 건너편과 대화를 나누기에 불편한 넓이는 아니었다. 옆 테이블, 혹은 건너편에 앉은 친구와 대화하며 시끄러운 학생은 언제나 있었다. 그날은 마침 같은 그리핀도르 학생이었다.

 오웬보다 한 학년 어린 남학생이었다. 오웬은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알고 있는 듯했다. 그 남학생은 오웬에게 바로 목소리가 들릴만한 자리에 있지는 않았지만, 친구들과 무슨 이야기를 하는 도중이었는지 그만 기세가 올라 큰 소리로 말하고 말았다.

 “그라우플뤼겔하고 친해지면 벨리니가 데이트를 받아준단 말이야?”


 세실은 진지하게 그 말이 결투할 정도의 말이었는지 고민했다. 기분 좋은 말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결투는 대개 목숨을 거는 일이며, 목숨을 잃지 않더라도 크게 다칠 가능성이 높았다. 어떻게 들어도 에리카보다는 카리나를 모독하는 말이 아닌가. 에리카를 향한 연심으로 나설 일이 맞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세실은 제 형제가 애정은커녕 원수라 할지라도 부당한 명예훼손에는 분개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행히 시간이 이른 탓인지 카리나와 에리카는 보이지 않았다. 오웬은 그 자리에서 결투를 신청했고, 결투가 행해진 것은 그다음 날 오전이었다. 오웬은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말했다.

 “내가 이겼다.”

 세실은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그 일은 오웬에게 기폭제가 되었다. 에리카와 그녀의 친구에게 이런 종류의 소문이 도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에 분노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녀들의 친지와 가족들이어야 했다. 그래서 잠자코 있었으나 이렇게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도 네가 못 보았을 뿐 비슷한 일은 있었을 거야.”

 “알고 있다. 하지만 보지 못했으면 모를까 보고 묵과할 수는 없는 법이야.”

 “그거랑 데이트가 무슨 상관인데?”

 “친구가 되면 내가 그라우플뤼겔양의 이름을 대신해 싸울 수 있어.”

 오웬은 대답했다. 세실은 픽 웃었다. 친구로 지내는 게 가능하기만 하다면 훌륭한 생각이다.

 “친구가 되려는데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잖아.”

 “하지만 상대는 숙녀야.”

 세실은 말을 목구멍 너머로 꿀꺽 삼켰다. 세상 어느 남자가 여인과 친구가 되기 위해 선물과 꽃다발을 준비한단 말인가. 놀랍게도 이 선물이라는 것은 세실에게 찾아오기도 전에 오웬이 마련했다.

 많은 이야기를 해봐야 한 단어도 들어가지 않을 테니 말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세실은 그저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믿었다.


 크리스마스 연휴가 막 시작한 다음 날이었다. 느긋하게 기숙사를 떠나려는 에리카에게 꽃과 편지가 날아들었다. 집요정의 힘을 빌렸는지 어느샌가 침대 곁에 내려앉은 편지봉투를 발견한 에리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편지 아래에는 벨벳으로 장식된 고풍스러운 보석함이 놓여있었다. 뚜껑을 열자 조명을 받은 투명한 보석이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하늘과 땅이 당신의 빛깔로 물들었습니다. 그대와 함께 이 풍경을 보고 싶습니다. 언제라도 좋으니 원하시는 시간을 정해 상자 아래 놓아주세요. 당신의 마음은 집요정이 전해주기로 했습니다. 원치 않으신다면 무시하셔도 좋습니다.


당신을 사모하는 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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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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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 똑. 똑.

 맑은 물방울이 붉디 붉은 속눈썹에 뭉쳐있다가 흘러내렸다. 물기를 머금고 파르라니 떨리는 길고 곧은 그것은 너무나도 깨끗한 순홍(純紅)이었다. 색이 없는 물방울이 붉게 물들었다가 투명한 빛으로 굴러떨어졌다.

 똑. 똑. 똑.

 고인 물방울이 넘치고, 넘친 물줄기는 좁은 길을 따라 흘렀다. 소녀의 하얀 무릎, 가느다란 종아리, 굳은 살 하나 없는 발을 넘어 새하얀 바닥에는 보이지 않는 길이 있었다. 푸른 언덕 위에 세워진 저택 가장 깊은 곳에서 숲 건너 평야를 지나 바다까지 이어지는 좁고도 넓은 길이었다.

 굽이굽이 이어지며 점차 거세지는 흐름은 숲에 생명을 불어넣고 힘차게 달려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간다.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꿈을 찾아 주인이 바라는 대로 이야기를 주워담는다. 그것이 제 뜻인양. 마치 처음부터 이것을 원했다는 듯이. 그렇게. 그렇게.

 언덕을 타고 내려온 숲은 본디 그렇게 만들어진 것처럼 광활한 땅을 차지하고 드러누워 있었다. 사람보다 동물이 많고 동물보다 식물이 많은 곳. 수많은 삶이 한데 뒤엉킨 이곳에서 사람이 손댈 수 있는 건 너무 적었다. 사람들은 쫓긴 끝에 숲 언저리에 마을을 세우고 인생을 빚어 땅에 뿌렸다. 인생은 슬픔과 만나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고 사람들은 그 열매로 다음 생을 준비한다.

 아이는 열매를 땄다. 초라한 차림은 먼지를 뒤집어써 엉망이다. 머리는 산발을 하고 얼룩덜룩하게 때가 탔다. 완전히 지친 표정이지만 음식을 쥔 손아귀는 힘이 넘친다. 아이는 입을 한껏 벌려 열매를 통째로 입안에 욱여넣었다. 씹기도 힘든 부피에 턱이 빠질 것 같지만 부지런히 씹는다. 어디서 고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이는 고요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허리를 숙였다. 재빠른 손놀림으로 익은 열매를 골라 잡아당겼다. 거친 손놀림에 과육이 튀었다.

 열매는 양 주머니를 가득 채우고 앞치마에도 모였다. 아이는 정말로 누군가 고함을 지르기 전에 후다닥 달음질을 쳤다. 요령 없는 아이의 손길에 밭 한 구석이 엉망으로 망가졌다. 아이는 그런 것을 모른다. 그저 수로를 따라 숲으로 달려갈 뿐이다.

 사람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이르러서야 아이는 겨우 숨을 돌린다. 모아쥔 앞치마를 펼치고 허겁지겁 입에다 열매를 쑤셔넣는다. 때로 떫거나 신 것이 있는지 오만상을 하면서도 먹기를 멈추지 않았다.

 간신히 허기를 달래고 아이는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밑창이 달랑거리는 가죽신으로 길도 없는 숲을 헤매며 아이는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걷다가 걷다가 자리에 주저앉는다.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아이는 끙끙 앓으며 바닥을 살피지도 않고 나무에 기대 엉덩이를 붙였다. 서러움에 눈물이 났다.

 이전에 아이는 이토록 꾀죄죄하게 돌아다닌 적이 없었다. 늘 깔끔해 옅은 색 원피스를 입어도 혼날 때가 없었다. 엄마는 늘 아이가 얌전하고 어른스럽다고 했다. 아빠는 아이가 뭘 해도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이는 이웃 어른들에게도 칭찬을 받았고 친구들은 선망했다. 아무도 아이를 업신여기지 못했다.

 아이가 좋아하던 옅은 새싹 빛깔의 원피스는 진흙에 범벅이 되었고 생일에 선물받기로 한 새 구두는 요원해졌다. 항상 달고 다니던 귀여운 빨간 리본은 어딘가로 사라졌고 머리는 봉두난발이었다.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는지 몰랐다.

 아이는 정말로 몰랐다. 아이의 집은 이 숲 가장자리에서 멀지 않은 마을에 있었다. 아이가 서리한 밭은 친구네 집에서 가꾸는 것이었고, 아이가 먹은 열매는 매년 이맘때면 식탁에 오르는 단골 메뉴였다. 아이의 부모님은 지금쯤 식탁에 둘러 앉아 저녁을 먹고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잦아들던 눈물이 도로 눈꺼풀을 비집고 나왔다.

 아이는 울면서도 배가 아파 앓았다. 고통에 눈물이 들어갈 듯하다가 서러움에 도로 터지고 다시 고통이 밀려들어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러기를 몇 번 하니 아이는 아파서 우는지 서러워서 우는지 모르게 되었다. 어쨌든 아이는 펑펑 울었고, 한없이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을 배를 끌어안고 주저앉아 있었다.

 작은 동물들이 기웃기웃 아이의 주변을 맴돌았다. 설치류 한 마리가 아이가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과육이 터진 열매를 훔쳐 달아났다. 아이는 앓으면서도 치마를 여며 과실을 숨겼다. 작은 짐승을 따라 크고 무서운 것들이 올까 무서웠지만 일어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더니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아이는 여전히 배가 아팠고, 움직일 자신이 없었다. 이대로 해가 저물면 무서운 짐승이 나타나 아이를 물어갈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아이는 얼어죽을 것이다. 가을 밤이었다. 아이에게는 밤이슬을 피할 수 있는 지붕도 추위에서 몸을 지킬 이불도 없었다. 아이는 또 눈물을 똑똑 흘렸다. 이미 많은 눈물을 흘려보낸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저히 못 일어날 것 같았지만 아이는 일어났다. 코를 훌쩍이며 마을을 향해 걸었다. 노을은 빠르게 사그라들고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으니 숲에서 계속 있을 순 없었다.

 아이는 걸음이 느렸다. 주저앉고 싶었지만 끝까지 버텼다. 마을 안에 들어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대신 첫번째 건물에 도착하자마자 무너졌다.

 벽에 기대 색색 숨을 뱉는다. 아이는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가 눈을 떴다. 아직은 좀 더 걸어야한다. 이곳은 아이의 집이 아니었다.

 땅과 숲을 기반으로 사는 마을은 집과 집 사이의 거리가 멀었다. 아이는 느릿느릿 집들을 거쳐 그리운 곳으로 향했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이가 잠들던 곳. 아이의 방이 있고, 아이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아이는 제 집이 보이는 곳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췄다. 계속 움직이니 배앓이도 조금은 덜해진 것 같다. 하지만 더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이는 저가 무엇하러 이곳에 왔는지 몰랐다. 그저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아이는 휘청거리다 주저앉았다. 길 한복판이었지만 더는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쳤고 배앓이가 끝난 것도 아니었다. 아이는 거기서 사랑하는 집을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그리움을 가득 담았다.

 그곳은 아이와 부모님의 보금자리였고, 아이의 세상 전부이던 곳. 그러나 이제는 아이의 자리가 없었다. 아이는 어제 넘어다 본 풍경을 떠올렸다. 행복하게 웃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아이보다 훨씬 작은 아기가 있었다. 아이가 없는데도 엄마와 아빠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슬퍼하지도 않는다. 아이는 나흘도 넘게 밖에서 잠을 잤는데 엄마와 아빠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기는 며칠 전 엄마의 뱃속에서 태어났다. 아이는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엄마의 출산을 지켜보았다. 엄마 배를 가르고 나온 아기. 시뻘건 고깃덩이 같은 아기. 아이는 너무 징그러워서 저도 모르게 찌푸렸다. 동생이 생겨 기뻐했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날 아이는 남몰래 못된 짓을 꾸몄다.

 엄마 몰래 아빠 몰래 아기를 버리자. 나는 이렇게 못생긴 동생은 싫어요. 곱게 머리를 빗기고 예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놀러나가려고 했단 말이야.

 엄마는 아프고 아빠는 바쁜 사이 아기를 버리자. 어른들은 몰라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걸.

 아이는 못난 아기를 품에 안고 달렸다. 좁고 깊은 길을 달렸다. 어른들은 모르는 길. 아이들만의 길.

 길 끝에는 작은 아지트가 있다. 조그만 나무판자와 나뭇가지로 만들어진 집. 아이는 친구들과 만든 작은 세계에 아기를 버렸다. 미안해. 조그맣게 사과의 말도 속삭여본다. 너는 착하니까 용서해 줄거지? 아기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이는 활짝 웃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간다.

 집안은 조용했다. 갓 낳은 아기가 사라진 것도 아이가 자리를 비운 것도 마치 없는 일인양했다. 아니, 엄마가 아기를 낳은 것 자체가 없는 일 같았다. 출산에 불려온 아주머니들도 동동거리며 집앞에서 발을 구르던 아빠도 없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집으로 달려간다.

 엄마가 지르던 무시무시한 비명과 새빨간 핏덩어리가 아이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엄마는 어디갔지? 아기를 낳으면 많이 아프니까 맛있는 걸 먹고 푹 쉬어야 한댔는데. 아주머니들이 맛있는 걸 해줄테니 기다리랬는데.

 ‘엄마!’

 아이는 외쳤다. 힘껏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엄마가 깨끗한 모습으로 아이를 반긴다. 아마색 앞치마에 젖은 손을 문지르며 조용히 웃는 것은 어여쁜 아이의 엄마다.

 ‘벌써 왔니? 친구들이랑 안 놀았어?’

 ‘엄마 괜찮아?’

 아이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꼭 붙들었다. 엄마는 다정하게 아이를 끌어안아주었다. 언제나 그랬듯 따뜻한 품이었다.

 포근한 감촉과 달콤한 냄새에 아이는 눈을 감는다. 응, 우리 엄마다. 엄마는 괜찮아. 아이는 사랑스런 미소를 머금고 엄마를 꽉 끌어안았다. 엄마는 간지럽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고 아이는 엄마에게 칭얼거렸다.

 ‘엄마, 나는 동생 같은 거 필요 없어. 아주 예쁜 동생이 아니면 없어도 돼.’

 ‘얘도. 뭐라는 거니?’

 엄마는 아이가 우습다며 꺄르륵 소녀처럼 웃었다. 아이는 엄마의 품에 안겨 뺨에 뽀뽀를 했다. 엄마는 내 엄마다. 엄마, 사랑해요. 엄마는 아이가 어리광쟁이가 되었다며 장난스레 이마를 콩 쥐어박았다.


 사랑스럽다는 말 외에 그 무엇으로 칭하랴. 그렇다. 그들은 참으로 사랑스러운 가족이었다. 서로를 어여삐 여기고 항상 다정한 말을 나누었다. 아이는 금슬 좋은 부부의 품에서 행복했다. 부부가 아이에게 쏟아내는 애정, 아이가 느끼는 행복. 그 모두가 아이의 자랑이었다. 아이는 그의 가정을 사랑했다. 실로 사랑할만한 가정이었다.

 그리하여 아이는 기어코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동생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는 것이 좋았으며 있지도 않았노라고.

 이 모든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은 아이가 저지른 끔찍한 죄 탓이었을까 아니면 부부의 숨은 욕심 탓이었을까. 이유야 어찌되었건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어느 날부터였을까. 아이는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어리고 순진한 아이에게는 벅찬 꿈이었다. 아이는 매일밤 아기를 만났다. 제가 버린 아기는 마지막 모습 그대로 잎새로 햇빛이 내리쬐는 나무 그늘에 누워 새근새근 잠들어있고 아이는 그걸 바라보며 홀로 소꿉놀이를 하는 꿈이었다. 무엇이 그리 무서운지는 아이도 몰랐다. 하지만 너무 무서워서 아이는 잠에 들지 못했다.

 가장 이상하고 무서운 건 그 다음이었다.

 아이는 엄마에게 매달려 울었다. 숲에 버리고 온 동생이 자꾸만 꿈에 나온다고 두려워하며 울었다. 엄마는 자다 깨서 졸음에 겨운 상태에서도 방긋방긋 웃었다.

 ‘우리 아가 배고프구나. 맘마 먹을까?’

 ‘그런 게 아니야, 엄마. 내 말을 좀 들어줘요.’

 엄마는 밤이면 아이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엄마, 어제 왜 그랬어요?’

 ‘무어가? 아유, 예뻐. 역시 내 딸이네.’

 엄마는 낮이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엄마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서 아이는 아빠를 찾았다. 아빠는 예쁜 딸애가 품에 엉기자 일에 쫓기면서도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아빠, 아빠. 엄마가 이상해요.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나봐.’

 ‘밤에?’

 아빠가 물었다. 아이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밤에요.’

 ‘우리 예쁜 딸. 시끄러워서 깼나 보구나.’

 아빠는 아이를 번쩍 안아들었다.

 ‘아니야. 어제는 조용했어.’

 ‘우리 애기가 언제 이렇게 다 컸을까. 아빠는 기쁘구나.’

 ‘아빠 이상해.’

 ‘부끄러워할 것 없어요. 아기는 어려서 밤에도 계속 먹어야해. 그래서 시끄러운 거예요.’

 아기요?

 아이는 되물었다. 아빠는 무슨 오해를 했는지 아이가 착한 언니라고 칭찬했다. 아이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악몽은 계속 되었다. 아기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아이가 노는 것을 구경했다. 새카만 눈은 맑고 깨끗했다. 아이는 가끔 아기를 데려다 역할을 주었다. 엄마랑 아빠, 그리고 아기가 있는 세 가족의 아기 역할이었다.

 아이는 아침이 다가오면 이게 꿈이란 것을 깨달았다. 꿈 속에서는 대개 소꿉놀이 중 아기에게 밥을 먹이는 순간이었다. 흙을 한 스푼 크게 퍼서 나뭇잎을 올리고 호호 불어 아기에게 먹였다. 꿈속의 아기는 신기하게도 그것을 받아 먹었다.

 아이는 아기와 노는 꿈속의 자신에게 목이 터져라 함께 놀지 말라고 외쳤다. 하지만 꿈속의 아이는 아이의 말을 듣지 못했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아이는 끔찍함에 소리 지르며 깨어나곤 했다.

 아이가 비명을 질러도 엄마와 아빠는 듣지 못했다. 이웃에 사는 친구들도 몰랐다. 아이는 무서워서 매일 울었다. 아지트에는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친구들이 아무리 놀러가자고 해도 아이는 가지 않았다.

 ‘언니랑 놀고 싶어.’

 아기가 말했다. 갑자기 들려온 말소리에 꿈속의 아이가 깜짝 놀랐다. 아기는 새카만 눈을 커다랗게 뜨고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꿈속의 아이는 입술을 댓발 내밀고 투덜거렸다.

 ‘무슨 짓이야. 깜짝 놀랐잖아. 아-, 해야지.’

 아기는 조그만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흙으로 만든 수프를 받아 먹었다. 아기는 뭔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꿈속의 아이가 혼을 냈다.

 ‘음식을 입에 물고 말하면 안 돼.’

 ‘잘못했어요.’

 아기는 아주 착한 동생이었다.

 다음 날도 아이는 같은 꿈을 꾸었다. 이번에도 아기가 이야기했다.

 ‘나 언니랑 놀고 싶어.’

 ‘안 돼. 하루종일 놀 수는 없어.’

 꿈속의 아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 놀면 되잖아.’

 ‘매일 놀고 있잖아. 더 놀면 혼날거야.’

 ‘나랑 놀면 안 혼나.’

 ‘아니야. 혼나.’

 ‘내기할래?’

 ‘싫어. 그런 건 못된 애들이나 하는 거랬어.’

 두 번이나 거절당한 아기는 매우 침울해졌다.

 그 다음 날에도 아이는 꿈속에서 아기와 소꿉놀이를 했다. 아이는 혼자서 아빠와 엄마 역할을 모두 했다. 아빠일 때는 나무가 엄마였고, 엄마일 때는 나무가 아빠였다.

 ‘여보, 오늘은 조금 늦을 거예요.’

 ‘저녁까진 들어와요?’

 ‘힘들 것 같아요.’

 ‘일찍일찍 들어와요. 아기가 기다려요.’

 ‘흐아암.’

 아기가 하품을 했다. 꿈속의 아이는 화를 냈다.

 ‘바보야. 거기서 하품을 하면 어떡해. 그러면 아빠가 집에 빨리 들어오지 않잖아.’

 ‘그치만 졸린걸.’

 ‘그럼 그냥 자. 하품 같은 거 하지 마.’

 꿈속의 아이는 아기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기는 숨이 막혀 바둥거렸다.

 그 다음 다음 날에 꿈속의 아이는 혼자 있었다. 아기가 없어도 소꿉놀이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 자리에 거의 아기만한 매끈매끈한 돌멩이가 있었다. 꿈속에서 아이는 그걸 아기 삼아 놀았다. 아기가 어디로 갔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아기가 없어서인지 무섭지도 않았다.

 그날 아이는 행복한 꿈을 꾸었다. 아이는 오랜만에 기분 좋은 잠을 잤다.

 눈을 떴을 때는 이른 새벽이었다. 아이는 추위에 떨며 몸을 감싸안았다. 아이는 숲에서 눈을 떴다. 머리 위로 나뭇가지가 펼쳐져 밤하늘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꿈속에서처럼 연한 새싹빛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는 빨간 리본이 달려 있었다.

 이상하다.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얀 스타킹에 학교 갈 때 신는 가죽 신발. 아이는 아직도 꿈을 꾸나 싶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날씨와 시간이었지만 꿈이 틀림없었다.

 아이는 한달음에 집으로 향했다. 달리자 바닥의 찬 기운이 조금은 멀어졌다. 아이는 콩콩 문을 두드렸다.

 콩콩. 콩콩콩. 콩콩콩콩.

 엄마와 아빠는 깊이 잠들었는지 집은 조용했다. 까만 밤하늘이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아이는 자꾸만 문을 두드렸다.

 콩콩콩콩. 콩콩콩콩. 콩콩콩콩.

 아이의 언 손이 아파올 때쯤 문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아빠였다.

 ‘누구세요?’

 ‘아빠, 나예요!’

 ‘누가 이 새벽에 장난질이야.’

 아빠는 짜증내며 멀어졌다. 아이는 놀라서 문에 달라붙었다. 아빠가 내 목소리를 못 들었나봐.

 ‘아빠! 아빠! 나예요. 아빠!’

 아이는 문을 쾅쾅 두드리고 발을 동동 굴렀다. 아빠. 나예요. 아빠. 문 열어줘요.

 마침내 아빠는 문을 열고 나왔다. 아이는 아빠에게 답싹 매달렸다. 아빠가 아이를 뻥 걷어찼다.

 ‘아빠!’

 ‘이 자식이 새벽부터 미쳤나.’

 아빠는 화를 내며 몇 번이나 발길질을 했다. 아이는 숨도 쉬지 못하고 꺽꺽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그날부터였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도 아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이는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더 걷어차이고 다시는 사람들 집에 접근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했다. 가고 싶지 않아도 배가 고파서 그럴 수가 없었다. 아이는 쓰레기통도 뒤지고 밭에서 작물을 훔쳤다. 그러다가 또 얻어맞았다. 너무 서럽고 무서웠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집에서 아이는 보았다. 제가 버린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있었다. 아빠도 엄마도 행복했다. 아기는 보드라운 크림색 강보로 몸을 감싸고 새카만 눈을 데록데록 굴렸다. 그것밖에 할 줄 모르는 아기였다.

 아이는 엄마가 아이가 어릴 적에 쓰던 거라며 보여준 크림색 강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창 너머로 아기가 아이를 쳐다보았다. 방긋방긋 웃으며 입을 빠끔거린다. 아이는 도망쳤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아기의 입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언니. 같이 놀자.’

 날이 지고 아이는 까마득히 멀어지는 시야를 힘겹게 붙잡았다.

 고꾸라진다. 억울한 마음도 이제는 없다. 그저 이 상황이 싫었다. 아이는 엄마와 아빠가 그리웠고 따뜻한 집이 그리웠고 맛있는 식사가 그리웠다. 아픈 것도 추운 것도 싫었다. 길 한가운데 웅크리고 있으면 누군가 또 걷어찰지도 모른다. 아픈 건 싫다. 아이는 기어서 길가로 이동했다. 밤이슬에 축축한 풀이 아이의 맨살과 치맛자락을 적셨다.

 눈물이 퐁퐁 흐른다. 아이는 그저 슬펐다. 작은 몸을 꼭 끌어안고 웅크렸다. 아이는 그저 살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도 아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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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아름다운 고백은 아니었다. 그는 겨우 침상을 떨치고 일어나 억지로 음식을 삼키고 있는 내게 고백했다.
“결혼하자, 미스즈.”
뜬금없는 소리에 황당했던 기억이 난다. 기가 막혀 그를 살피자 소이치로가 답잖게 초췌한 안색이었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만큼 항상 생기 넘치고 살가운 사람이 피곤한 기운을 두르고 있으니 색다른 미모가 되었다.
“농담도.”
나는 그렇게 웃고 넘겼다. 진지하게 생각할 기운이 없어 그랬다. 그가 화를 낼 줄은 몰랐다.
“농담이 아니야. 내가 너무 나이가 많고 네게 모자란 사람이라는 거 알아. 하지만 네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싫어.”
그는 침착하고 상냥했지만, 말 속에는 분노가 숨어있다. 그 마음이 날 향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소름이 끼쳤다.
“생각해볼게.”
“미스즈!”
“피곤해. 잘래.”
숟가락을 던지듯이 내려놓고 일어났다. 소이치로가 재빨리 상을 정리한다. 그 모습을 뒤로 하고 침대로 몸을 던진다. 머리가 아파와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생각하기 싫어.
고통에 정신이 혼미할 때 계속 들려왔던 목소리가 떠오른다. 절박하고 간절하게 나를 바라던 외침. 미스즈 일어나봐. 미스즈 제발 눈을 떠. 미스즈 죽으면 안 돼.
병원에 실려간 것도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다. 병실에서 그가 누군가와 실랑이를 했다. 이렇게 아픈데 보호자인지 아닌지가 무슨 상관입니까! 멍청이. 본인도 의사니 그게 어떤 절차인지 잘 알고 있으면서 그런 걸 따졌다. 내게 돌아와 오열하던 음색이 생생하다. 제발 버텨. 죽지마. 너 없이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뭔가 꿈을 꾼 것 같기도 하다. 식은땀을 흘렸는지 축축했다. 소이치로가 수건으로 내 몸을 닦았다.
“소이치로.”
“응.”
“결혼하고 싶어?”
부드러운 수건이 잠시 멈칫하더니 침대가 출렁였다. 옆으로 몸이 쏠린다.
“응. 결혼해서 널 살리고 싶어.”
“내가 살았으면 좋겠어?”
“내 평생을 걸게. 살아줘. 부탁이야.”
이마에 와닿는 체온. 그가 울고 있었다.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서 예쁜 얼굴이 가려졌다. 그게 싫어서 눈물을 닦아주었는데 아예 고개를 돌리고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한다. 우는 걸 달래는 재주는 없는데 어떡하지.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를 끌어안는다. 그는 펑펑 울면서도 나를 마주 안았다. 그냥 시간을 보낸다. 그대로도 좋다. 그대로도 좋은데 소이치로에겐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럼 바라는대로 해줄까.
아무래도 상관 없지.
나는 눈을 감고 소이치로의 체온을 즐겼다. 그는 따뜻하고 크고 포근하다. 기분 좋은 살결. 속살이 보고 싶어졌다. 안은 팔은 놓고 싶지 않아서 입으로 단추를 풀어보려다가 실패했다. 그대로 밀어서 침대에 눕혔다. 소이치로는 엉망이 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의 위에 올라타 단추를 풀어 가슴을 열고 목덜미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대로 그 위에 늘어진다.
“미스즈?”
그는 조심스럽게 나를 다시 감싸안았다. 그것도 좋다. 무겁지 않게 도닥이는 것도 무게가 얹히는 것도 좋다. 그냥 그대로가 좋다.
“하고 싶으면 해.”
할 수 없이 나오는 말은 그게 다였다. 그래도 그는 기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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