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166건

  1. 2017.02.19 텟님 커미션 (1)
  2. 2017.02.16 오리아나 커미션(15.10.11)
  3. 2016.02.15 H.H.
  4. 2016.01.09 사랑은 불꽃이 되어 타오른다. 02.
  5. 2016.01.02 에리카나
  6. 2015.12.29 사랑은 불꽃이 되어 타오른다. 01.
  7. 2015.12.08 DN(nGRnG) 낙서 3
  8. 2015.12.08 DN(nGRnG) 낙서 2
  9. 2015.12.05 사랑은 불꽃이 되어 타오른다. 00.
  10. 2015.12.04 DN(nGRnG) 낙서 1

에리카타입 자캐 커미션이었습니다.






 아이카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노을지는 태양과 훈훈한 바람이 어우러져 사색에 잠기기 좋은 날이었다. 좋아하는 카페 야외 테이블에 앉아 한가로이 아이스티를 저으며 생각에 잠긴 유우키 아이카. 사랑스러운 풍경이었다.


 아이카가 눈을 깜빡이자 돌돌 말려 올라간 긴 속눈썹이 함께 흔들렸다. 정성들여 티나지 않을 정도로만 마스카라를 바른 결과물이었다. 파운데이션으로 피부톤을 정리하고 가볍게 볼터치도 했지만, 아이카는 또래 중학생 여자아이들이 그렇듯이 엄마 화장품을 빌려 소꿉놀이라도 한 듯 부자연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한듯 안 한듯 자연스러운 내추럴 메이크업으로 곱게 단장한 아이카는 아이돌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예뻤다.


 외모에 자신을 가지는 것은 타고난 재능 없이는 힘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카는 행운아였다. 아름다운 얼굴, 중학생 같지 않은 늘씬한 몸매, 거기에 넉넉한 재력과 스스로를 가꿀 스킬까지 갖춘 아이카는 어딜가도 시선을 받는 예쁜 소녀였다.


 지금도 그랬다. 카페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 날이 좋아 야외 테이블을 찾아 나온 사람들이 한 번씩 아이카를 곁눈질했다. 자신을 보며 소곤거리는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아이카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아이카는 제 미모가 주는 뿌듯함에 젖어 취한 듯한 기분으로 저 멀리 길 건너편으로 시선을 던졌다. 학원 수업이 끝나면 함께 돌아가기로 한 친구가 슬슬 나올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카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두 명의 소녀가 있었다. 한 아이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음꽃이 활짝 피었고, 다른 아이는 고개를 돌리고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허리까지 닿는 긴 생머리가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 옆모습이 시선을 떼기 힘들만큼 아름다웠다.


 아.


 아이카는 무심코 아름답다고 생각해버린 자신의 멍청함에 화가 났다. 아름답다니. 대체 무얼 보고 그런 생각을 해버린 건지.


 정정한다. 두 소녀는 아주 예뻤다. 제 미모에 눈이 높아져 함부로 예쁘다는 평가를 내리지 않는 아이카가 인정할 정도로 충분히 예뻤다. 키가 조금 작고, 웃는 얼굴이 귀여운 쪽은 좀 더 다듬어줄 필요가 있어보였지만―아이카는 소녀의 크고 순한 눈망울을 돋보이게 할 아이라인을 생각하다가 제 허벅지를 꼬집었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남의 얼굴을 장식해서 뭐에 쓰려고?―키가 조금 더 크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을 한 소녀는 또래―소녀들은 미타키하라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교복이 예뻐서 기억하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삼십분도 넘게 가야하는 곳이었지만―라는 것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자세한 건 좀 더 가까이 와봐야 알겠지만 일단 몸매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조그만 얼굴에 오밀조밀 수놓인 이목구비는 굳이 화장품을 댈 필요도 없어보였다. 이미 화장을 한 건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그것대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아이카는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카는 문득 자신이 건널목 쪽으로 상체를 한껏 내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고작 남을 쳐다보기 위해 창피한 모습을 보이다니 스스로를 믿을 수 없다. 아이카는 의식적으로 자세를 바로하고 앉아 얼음이 녹아 밍밍해진 아이스티를 빨아들였다. 그런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조금은 속상함이 가셨다.

 아이카가 쳐다보건 말건 두 소녀는 건널목을 건너서 아이카가 앉아있는 카페로 다가왔다. 아이카는 모른 척했지만, 다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다가올수록 사람들의 시선의 방향이 쏠리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들이 카페에 들어가려고 한다는 것을 확신했을 때, 아이카는 호기심에 지고 말았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마치 그저 친구가 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것처럼 시선을 돌려 소녀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


 아이카는 멍청하게도 못 박히고 말았다. 가까이서 보니 무표정하던 소녀는 딱딱하다기보다는 그저 멍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매가 날카로워 힘을 풀고 있어도 차갑게 보이는 모양이다. 깨끗한 피부 어디에서도 화장품 냄새는 풍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콧날이며 선명한 입술색이 맨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세워도 괜찮겠다 싶었다.


 “여기 키위 주스가 맛있대. 전부터 꼭 먹어보고 싶었어. 카나도 그렇지? 에리카랑 같이 나눠 마시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카가 예의를 잊고 만 것은 소녀의 미모 탓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아이카는 스스로도 이유를 몰랐다. 어렵게 시선을 떼어 컵을 내려다보니 아직도 반 이상 남은 아이스티가 보였다. 얼음이 녹아서 양이 불어있었다. 버려야지. 아이카는 생각했다.


 “오늘 메뉴는 딸기스무디네. 나 이거 먹고 싶어. 좋아. 그럼 카나가 키위 주스고 에리카가 딸기 스무디야.”


 아까부터 웃는 얼굴로 쉼없이 뭔가를 말하던 아이가 조잘거렸다. 다소 코맹맹이 소리가 나기는 하지만, 이정도는 애교있는 수준임에도 아이카는 짜증이 났다. 애먼 빨대만 손톱으로 자근자근 구겼다.


 “있잖아, 카나.”


 그 말을 끝으로 소녀들은 유리문 너머의 세계로 사라졌다. 아이카는 겨우 자신을 다잡고 입술을 삐죽이 내밀었다. 아직도 오지 않은 친구가 원망스러웠다.


 “아이카.”


 놀라서 돌아보니 젖은 머리카락을 제대로 말리지 않았는지 착 달라붙은 머리를 한 친구, 우메가 서있었다. 아이카는 볼멘소리로 왜이렇게 늦었냐고 불평했다.


 “안 늦었는데? 끝나자마자 나온거야. 그러는 너야말로 답장 안했잖아.”


 그렇게 말하며 우메는 옆 의자에 가방을 놓았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문자 메세지가 세개나 와있었다.


 『나 끝났어. 금방 갈게』

 『어디야?』

 『보인다. 갈게』


 아이카는 할 말이 없어졌지만, 여전히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아이카에게는 길게만 느껴진 시간이 우메에게는 잠깐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치만 굳이 면박 줄 필요는 없잖아. 아이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입 넣어. 못 생겨보여.”


 우메가 말했다. 아이카는 반사적으로 입술을 양쪽으로 당겼다. 그건 우메가 삐친 아이카를 움직이게 하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스스로 움직여놓고도 아이카는 불만스런 소리를 냈다. 우메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가자. 밥 먹어야지. 배고파.”


 우메는 잠깐 앉을 생각도 않고 아이카를 제촉했다. 아이카는 투덜거리며 일어났다. 우메가 기다리는 동안 물이나 다름 없어진 아이스티를 버리려고 카페에 들어왔다가 아이카는 또다시 아까 그 소녀들을 발견했다. 창가에서 약간 떨어진 자리에 앉은 그들은 여전히 한 사람이 말하고 한 사람은 듣기만 하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아이카는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본 과거는 잊고, 참 희안한 애들이라고 생각하며 돌아섰다. 그들의 테이블에는 반쯤 빈 딸기스무디와 겨우 맛만 본 것 같은 키위주스가 놓여있었다.


 “카나는 미타키하라 교복이 정말 잘 어울린다. 귀여워.”


 흥. 아이카는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 학교 교복이 훨씬 예쁘거든?

'the other world > commiss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텟님 커미션 (3)  (0) 2017.03.28
피피님 커미션 (2)  (0) 2017.03.10
텟님 커미션 (2)  (0) 2017.03.04
피피님 커미션 (1)  (0) 2017.02.24
오리아나 커미션(15.10.11)  (0) 2017.02.16
Posted by fad
,

목말라.


무심코 물을 찾아 고개를 들었다. 케일의 등에서 그림자가 늘어져 오리아나를 가렸다. 키는 훌쩍 크지만 넓지는 않은 소년의 어깨가 며칠사이 듬직하게 변해있었다.


처음 겪는 일이 너무 많아서 집을 떠나온 지 한 달은 된 것 같았다. 언젠가는 내 일이 될지도 몰라서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일들이 차례차례 현실이 되는 것은 신기한 느낌이었다. 본 적도 없는 좋은 음식을 대접받으며 어린 동생의 뺨보다 부드러운 옷을 입고 알록달록 기상천외한 사람들 사이를 내달렸다. 마치 동화 속 공주님이나 용감한 기사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오리아나는 어쩌면 캐피톨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헝거 게임에 참가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며, 그 우승자는 판엠의 영웅일지도 모른다고. 적어도 그 환상적이고 놀라운 도시에서는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리아나는 그런 생각이 자신의 느긋한 환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리아나를 쳐다보는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울고, 어떤 것은 웃고, 또 어떤 것은 화를 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말은 모두 하나였다.


‘너는 곧 죽을 거야.’


오리아나는 눈동자 하나하나에 대답해주었다.


‘그래도 좋아. 이걸로 가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그걸로 좋아.’


무시무시한 날붙이를 휘두르는 사람도 굶주린 사냥개처럼 눈을 빛내는 사람도 있었다. 공동훈련에서는 정말로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가르쳤다. 배울 생각은 없었지만 케일을 따라다니며 주워들은 살인 기술은 요리를 위해 고기를 손질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리아나와 똑같이 웃고, 울고,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그랬다.


요리에 대해 생각하자 엄마가 떠올랐다. 오리아나가 엄마를 도와 부엌에 서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병으로 쓰러지신 뒤로는 더욱 그랬다. 엄마는 발전소를 쉬는 대신 집안일은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했지만 오리아나는 차마 엄마가 창백한 안색으로 불 앞에 서있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다.


엄마를 생각하자 연달아 아빠와 동생들 얼굴이 떠올랐다. 오리아나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케일.”


오리아나가 부르자 앞서가던 소년의 등이 움찔거렸다.


“우리 엄마랑 아빠 얼굴 기억해요? 동생들도.”


평화롭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케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걸음은 그대로. 조금도 느려지거나 빨라지지 않았다. 잠시라도 멈추었다가는 등 뒤에서 칼이 날아올 것이다.


“당연히 기억하지.”


내키지 않는 듯 퉁명스럽게 케일이 대답했다. 오리아나는 산들바람처럼 상쾌하게 웃었다. 케일이 불편해하는 기색이 등으로 전해졌다. 웃음은 금세 기가 죽었다. 배가 고프니 웃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넌 우리 부모님 얼굴 기억하냐. 형이나 동생 놈들도?”


웃음이 누그러지자 케일이 물었다. 방금 전과는 확연하게 톤이 달랐다. 잠긴 것처럼 낮아진 목소리였다. 먹먹하게 공기가 젖어들었다.


“물론이죠.”


오리아나는 활짝 웃었다. 케일이 우울해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곧 죽을 거라면 마지막까지 행복하길 바랐다. 어딘가에서 그들을 바라볼 카메라를 향해서도 웃어보였다. 틀림없이 지켜보고 있을 가족에게 전하고 싶었다.


‘나는 괜찮아요.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오리아나를 보면 엄마는 울어버릴 테지만 아빠도 있고 동생들도 있으니 괜찮다. 오리아나는 엄마를 위해 웃었다. 엄마도 똑같이 웃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케일이 그런 오리아나를 보고 투덜거렸다. 오리아나는 케일을 향해 다시 한 번 웃었다. 만약 케일이 살아남는다면 오리아나를 웃는 얼굴로 기억해주었으면 했다. 케일이라면 가족에게도 전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오리아나는 사랑하는 엄마, 아빠와 동생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있어서 기뻤다고, 위대한 헝거 게임의 우승자로 돌아가 오리아나를 잃고 슬퍼하는 오리아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위로해줄 것이다. 그런 믿음이 있었다.


오리아나는 케일에게 맡기기로 했다. 미래를,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을 향한 마음을. 오리아나가 겪어온 케일이라면 자기 자신보다 소중하게 지켜줄 게 틀림없다.


“나 참.”


케일이 툴툴거렸다.


“하여간 실없는 소리는 잘도 해요.”


오리아나는 멋쩍게 눈을 돌리는 소년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기도했다. 케일이 살아남기를.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기를.


안온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곳은 영예로운 헝거 게임장. 침묵과 평화는 사신을 소환하는 제물이었다.


폭발이 일었다. 지척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케일은 식은땀을 흘리며 오리아나를 잡아끌었다. 깡마르고 단단한 손 안쪽이 축축하게 젖었다.


“야, 등신아. 봤지? 그만 처웃고 가자.”


케일의 목소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어디에 붙었는지 무시무시하게 불길이 올랐다. 화염은 두 사람이 있는 자리까지 날아들었다. 곧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대포 소리였다. 헝거 게임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별똥별 대신 대포가 하늘을 달린다. 오리아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케일이 이끄는 대로 달린다. 어디를 얼마나 달렸는지 몰랐다. 숲 속에서 눈을 감고 달리니 발을 헛디디기 일쑤였다.


“씨발! 미친. 미친놈. 미친 건 알았는데. 미쳤잖아.”


미친, 미친하는 케일의 혼잣말이 노래 같다. 시야는 붉고 어두웠다. 감은 눈꺼풀 너머로 불타는 코뉴코피아가 떠올랐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걸음, 어눌한 발음.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곧 그는 붉은 화염 속에 시커먼 잿덩이가 되어버린다. 약에 의존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소년에게는 죽음이 구원이었을까. 눈물 한 방울이 기어코 눈꺼풀을 비집고 흘러내렸다.


“등신아, 울긴 왜 울어.”


언제 그만큼 달렸는지 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알 수 있는 것은 달려서 뜨거워진 체온과 차고 축축한 케일의 손, 헐떡이는 것이 숨소리인지 훌쩍임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얼굴을 감싼 손에 물기라곤 없었다.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없는 몸에 눈물은 메마른지 오래였다.


“케일.”


거친 손을 다정하게 붙들었다. 집에서는 일하느라, 이곳에 와서는 흙을 해치느라 쉬어본 적이 없는 손이었다.


“징그럽게 왜 이래?”


케일이 기겁했다.


준비팀이 정성들여 씻긴 보람도 없이 삼일동안 야생에서 뒹군 오리아나의 얼굴은 시커멓고 지저분했다. 환한 미소 위로 눈물길이 트였다. 씰룩이는 뺨을 따라 꿈틀꿈틀 춤을 춘다. 오리아나는 꿈지럭거리는 케일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차가운 손가락에 온기가 돈다.


흙먼지에도 색이 바래지 않은 푸른 눈이 살풋 휘어졌다. 오리아나는 공장에서 술래잡기 하던 때를 떠올렸다. 케일은 체력이 좋고 달리기도 빨라서 오리아나가 술래일 때 케일을 잡아본 적은 거의 없었다.


“바보바보 케일 리거!”


심하게 싸운 다음날이었다. 점심 식사 후 아이들끼리 가지는 놀이 시간, 오리아나는 누구보다 먼저 케일을 발견했다. 머뭇거리는 사이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케일 생각만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술래가 되어있었다. 아이들이 일제히 오리아나에게서 멀어졌다. 그 순간 케일이 눈앞에 있었던 건 우연이었을까. 있는 힘껏 손을 뻗으니 케일이 잡혔다.


케일은 그때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불퉁하게 부은 볼에 찌푸린 눈썹, 어딘가 안심한 듯한 눈빛.


“뭐야,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오리아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피 헝거 게임, 케일. 확률의 신이 언제나 케일 편이길 바라요.”


“……야, 등신아. 너 지금…….”


“나 물마시고 싶어요.”


오리아나는 나무에 기대섰다. 빛이 드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카메라가 있다면 저쪽이리라. 마지막까지 웃는 얼굴로 잡아주세요. 속으로 빌었다. 케일이 신경질적으로 ‘뭐야?’하고 물었다.


“뛰다가 발목을 삐끗했어요. 잠깐 쉬면 괜찮을 것 같은데 목이 너무 말라요.”


땅으로 떨어지는 고개를 억지로 들어 케일과 눈을 맞췄다. 케일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잘 숨어있을게요. 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다리가 떨리는 정도는 틀림없이 케일에게도 보일 것이다. 케일의 얼굴은 투명한 호수처럼 소년의 머릿속을 훤히 비춰주었다. 오리아나는 쓰게 웃었다.


“조금만 기다려.”


대답을 듣자 더는 마주보고 있을 힘이 없었다. 오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땅을 쳐다보았다. 다리가 볼썽사납게 후들거렸다.


“등신아, 잘 숨어 있어. 훤히 보이는데 서있지 말고 앉아서!”


오리아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서 있을 기운도 없어요.


케일이 멀어지는 소리가 났다.


오리아나는 눈을 감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일을 할 때 친구들과 함께 부르던 노래였다. 지루하고 힘든 일을 함께 이겨낼 수 있게 도와주는 노래였다. 나뭇가지에 쓸린 팔꿈치와 등이 따가웠다. 쓰러지지 않고 주저앉는 것만도 힘에 겨웠다. 아까는 나지 않았던 눈물이 이번에는 나올 것 같기도 했다.


사박사박 풀을 밟는 소리가 났다. 나뭇가지 하나 부러지지 않는다. 오리아나는 그게 그녀가 잘 훈련받은 덕인지 몸무게가 가벼운 덕인지 궁금했다.


“기다렸니?”


간신히 오리아나가 볼 수 있는 자리에 그녀가 있었다. 또렷한 시선이 지친 오리아나를 후벼 판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삼일을 숲속에 있었던 건 그녀도 마찬가지일 텐데 오리아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말끔한 모습이다.


“안녕하세요, 이브.”


인형처럼 무표정하던 얼굴이 피어나는 꽃처럼 화사해졌다. 오리아나는 마주 웃으며 그녀를 맞았다. 이브, 첫 번째 여인. 죄의 희생자인 그녀는 오리아나의 사신이었다.



강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렇게 불안한지. 케일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서있던 오리아나가 눈에 밟혔다. 대포 소리가 울릴 때마다 서럽게 울던 소녀는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물기 하나 없는 얼굴에 흙먼지로 그려진 우는 표정은 잘못 만들어진 피에로처럼 기괴했다. 웃는 얼굴이 절규하는 것처럼 보였다.


두 걸음에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폭발 속에서 오리아나가 그랬던 것만큼 발을 헛디뎠다. 이대로는 자신마저 움직일 수 없게 될지 몰랐다. 케일은 돌아보기를 그만두었다.


강에 도착했는데 물을 뜰 그릇이 없었다. 그릇을 만들려고 했더니 재료가 보이지 않았다. 겨우 나뭇잎을 모아오니 빨리 걸을 수가 없었다.


“더럽게 차갑네.”


나뭇잎 그릇은 작아서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물이 넘쳤다. 오리아나에게 돌아가는 길이 멀고 멀었다. 씨발, 씨발. 욕을 해도 흘러넘친다.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빨리. 마음만큼 발은 빠르질 않다. 하늘에는 어느 샌가 노을이 졌다. 강물도 붉게 물든다. 찰랑찰랑 흘러넘친다.


‘안녕, 케일. 꼭 살아남아야 해요.’


태양은 사뿐사뿐 떨어진다. 먼 별에 사는 조그만 생명들이 살고 죽고 울부짖는 것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발걸음이 가벼웁다.

'the other world > commiss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텟님 커미션 (3)  (0) 2017.03.28
피피님 커미션 (2)  (0) 2017.03.10
텟님 커미션 (2)  (0) 2017.03.04
피피님 커미션 (1)  (0) 2017.02.24
텟님 커미션 (1)  (0) 2017.02.19
Posted by fad
,

 태양 빛이 사그라드는 오후였다. 침대는 커다란 창문 건너편에 놓여있다. 너머로는 아마 빛 테라스와 초록으로 물든 이파리 위에 울긋불긋 수 놓인 꽃들이 보인다. 멀리 펼쳐진 성벽 위로 부쩍 가까워진 태양이 차츰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는 직각삼각형에서 빗변을 제외한 두 변의 비율이 삼 대 사일 경우 빗변의 값은 오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괄호 열고. 사실 자신의 업적인지 제자들의 업적인지, 아니면 선대의 지식인지 불명확하다.”

 “베이유.”

 낭랑한 목소리를 끊고 소년이 말했다. 베이유는 고개를 든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걸까.”

 베이유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소년은 눈을 똑바로 뜨고 베이유를 바라본다. 베이유는 소년이 당황스러운 질문을 던질 때면 언제나 그렇듯 어색하게 웃는다. 소년은 베이유가 당황할 때면 언제나 그렇듯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갑자기 방안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소년은 계절이 바뀌면 열한 살이 된다. 곧은 등과 넓은 어깨는 열세 살은 족히 되어 보였다. 또랑또랑 커다란 눈에 우뚝한 코, 굳게 닫힌 입술은 서너 살 더 먹은 형들보다도 어른스럽다. 헐렁한 셔츠 사이로 드러난 앙상한 팔뚝만 아니라면 근사한 청년으로 자라나리라 기대가 되는 얼굴이다.

 소년은 하얀 피부에 볼이 붉었다.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으니 포동포동 살이 올라야 하건만 젖살이 남은 뺨을 빼고는 살이 없다. 덩치가 크고 또래보다 어른스럽기는 하지만 가여울 만큼 볼품이 없었다.

 분명 또래보다 커다란데도 어딘가 작아 보이는 것은 소년의 형 탓이다. 생일이 같은 소년의 형, 하시르라는 이름을 가진 동갑내기 소년은 똑같이 열 살인데도 벌써 열다섯은 먹은 양 키가 크다. 어깨는 떡 벌어지고 아버지를 닮아 매서운 눈에 검술에 재능을 보여 기사들과 함께 훈련했다. 겨울나무처럼 마른 소년과 달리 팔다리에는 힘이 있어서 엔간한 어른은 팔씨름으로도 이기지 못한다. 쾌활하면서도 점잖은 성격은 아버지를 쏙 빼닮아 차기 영주 자격이 충분하다고 하며, 어린아이답지 않은 남성적인 모습이 근사하다며 하녀들은 성마른 입방아를 찧었다.

 남들보다 큰 키에 큰 골격을 타고났어도 하시르 곁에 서면 소용이 없다. 단둘 밖에 없는 형제와 함께 서면 소년은 언제나 조그만 동생이었다. 잘 웃는 형과 비교해 어두운 아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사교적인 형과 달리 친구도 없었다.

 소년은 거기에 불평하지는 않았다. 곧 죽을 거라는 시중인들의 뒷얘기도 말없이 들어넘겼다. 상냥한 백작 부인 앞에서는 어머니와 어울려주는 착한 아들이었고, 호방한 백작 앞에서는 귀여운 막내 노릇을 했다. 형이 밖에서 돌아와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떠들면 줄곧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도 쳤다. 유모는 몸은 약해도 말썽부리지 않는 작은 도련님을 끔찍이 아꼈다.

 소년은 서재를 좋아했지만 먼지가 많아 오래 있지는 못했다. 대신 책을 빌려와 오늘처럼 글을 읽을 줄 아는 하인에게 낭독을 부탁했다. 처음에는 몇 번이나 사람이 바뀌었지만 베이유에게 낭독을 시킨 후로는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베이유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빵입지요.”

 소년의 반듯한 이마가 대번에 구겨졌다.

 “먹어야 살지 않겠습니까. 빵이 없어서 당장 굶어죽는 사람이 거리에 나가면 수두룩합니다.”

 소년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깊이 생각에 잠길 때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베이유는 글씨를 짚으며 어디까지 읽었는지 찾아냈다.

 “계속해.”

 소년이 말했다. 베이유는 다시 큰 소리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자신의 업적인지 제자들의 업적인지, 아니면 선대의 지식인지 불명확하다. 괄호 닫고. 현대의 공식으로 표현하면 삼십이 더하기 사십이는 오십이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빵만 있으면 사람은 살 수 있을까?”

 소년이 말했다. 베이유는 다시 책을 내려놓았다.

 “빵만으로는 안 되죠. 집도 있고 옷도 있어야 됩니다.”

 베이유는 대답했다. 소년은 입꼬리를 당겨 입술을 한일자로 만들었다가 흠, 하고 불편한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돌렸다.

 “왜 그러십니까?”

 베이유가 물었다.

 “아냐. 아무것도.”

 소년은 대답했다.

 유리창을 넘어온 노을이 방안을 붉게 물들였다. 소년의 빨간 눈동자는 창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소년의 마른 가슴이 작게 부풀었다 내려앉았다. 베이유는 다시 책을 들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이 대발견을 기념해 황소 한 마리, 괄호 열고, 일백 마리라고도 함, 괄호 닫고, 를 신의 제단에 바쳤다고 한다. 그러나 기쁨은 잠깐이었다. 만일 빗변을 제외한 두 변의 비율이….”

 태양은 성벽에 반쯤 걸쳐 있었다. 소년은 둥그런 선을 눈으로 따라 그렸다. 베이유는 막힘없이 책을 읽어나갔다.

Posted by fad
,

※ 센티넬버스 설정을 차용한 19금 요소와 BL 요소가 포함된 시리즈입니다. 19금 요소가 들어가면 비밀번호가 걸립니다.




 마차에서 내리자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엘리자베스는 잠시 눈을 감고 온기를 즐기다가 양산을 펼쳐 들었다.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났다. 민가의 굴뚝에서 나던 연기가 성에서도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함빡 웃었다. 집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즐거운 여행 되셨습니까.”

 마차에서 내리는 걸 도우려 메리엔델에게 뻗은 손을 거절당한 집사 엘리엇이 인사했다. 훌쩍 뛰어내린 메리엔델 뒤로 흐트러지는 표정을 언뜻 목격한 엘리자베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는 거라도 있나요?”

 메리엔델이 물었다.

 “아뇨.”

 엘리자베스는 배를 움켜잡고 키득거렸다. 엘리엇은 엄격하게 훈련받은 집사답게 엄숙한 표정으로 등을 곧게 펴고 있었다. 메리엔델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한껏 행복한 기분에 젖어 홱 돌아섰다. 푸른 드레스 자락이 넓게 펼쳐진다. 경쾌하게 성을 향해 걸음을 내딛자 메리엔델이 자연스럽게 엘리자베스 뒤로 따라붙었다.

 “점심이 준비되어있을 거예요. 이 냄새라면 틀림없이 우리 요리사가 자랑하는 렌틸콩 스튜곘죠. 메리엔델도 먹어본 적 있나요? 엘프들은 채식 요리를 좋아하죠?”

 “스튜가 푹 익혀서 물과 함께 졸인 요리였죠? 아뇨. 아누 아렌델 전통 요리에 채소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먹지는 않아요.”

 “잠시만요.”

 엘리자베스는 메리엔델의 말을 막고 엘리엇을 불렀다. 두 사람의 뒤를 따라오던 집사는 곧 엘리자베스 옆에서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다.

 “페더는? 이 시간쯤에 도착할 거라고 미리 사람을 보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어?”

 “시씨라면 어젯밤에 도착해서 쉬고 있습니다.”

 “회의가 아직 안 끝났나?”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공주님!”

 집사 뒤에 서 있던 하녀 하나가 갑자기 머리를 조아렸다. 긴 치마자락을 정돈할 여유도 없이 흙바닥에 이마를 찧은 처녀는 가여울 정도로 떨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엘리엇이 꾸짖었다.

 “제발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쟈넷. 일어나거라.”

 “공주님께서 꼭 아셔야 합니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

 “들어가죠, 메리엔델.”

 “공주님!”

 쟈넷이 비명을 질렀다. 치켜든 이마에 누런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다시 성을 향했다. 메리엔델이 한 박자 늦게 엘리자베스의 뒤를 따랐다.

 “따라와.”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설마 내가 옷 갈아입는 것도 못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나는 네가 도와줬으면 싶은데.”

 돌아선 엘리자베스의 하얀 뺨은 한껏 광대가 솟았고 꽃잎처럼 싱그러운 분홍빛 입술은 좌우로 당겨져 근사한 곡선을 그렸다. 커다란 푸른 눈이 쟈넷을 향하더니 이내 웃어버린다.

 “그전에 네가 먼저 옷을 갈아입어야겠네. 내 몇 없는 드레스를 망칠 게 아니라면 말이야.”

 쟈넷이 황망하니 눈만 껌뻑이는 사이 엘리자베스는 메리엔델과 함께 빠르게 멀어져갔다. 조신한 공주님 답지 않은 거침없는 걸음이었다.

 "마차가 갑갑하진 않았어요? 이렇게 긴 시간 탄 건 처음이죠?"

 "아. 그러네요. 괜찮았어요. 처음에는 조금 불편했지만 왜 인간들이 애용하는지 알겠던걸요. 말을 탈 때보다 공기는 갑갑해도 대화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쟈넷은 하얀 에이프런이 흙먼지에 더러워지는 것도 모르고 엎드려 있었다. 엘리엇이 헛기침을 했다.

 “일어나라. 공주님께서 기다리신다.”

 “아, 네.”

 쟈넷은 허둥지둥 방으로 향했다.




* 시씨는 Sissie라는 이름입니다T^T

Posted by fad
,

에리카나

the other world 2016. 1. 2. 18:49

 아야메 에리카는 행복하다. 작금의 상황에 이 명제를 부정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에리카는 요즘 행복의 방에서 살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비유일 뿐이고 요즘 에리카에게 즐거운 일이 많이 일어난 것뿐이지만 사실 여부야 아무려면 어떤가. 어쨌든 요즘 에리카는 매우 행복했다.

 행복은 놀랍게도 소꿉친구의 죽음에서 시작되었다. 에리카의 유일무이한 친구이자 단 하나의 소중한 인연인 아오이 카나의 죽음이다. 그 비극적인 사건―시각에 따라서는 경사라고 표현해야 할는지도 모른다―이 일어난 것은 에리카와 나들이를 나간 여름방학 중 어느 날의 일이었다.

 “이쪽이야!”

 카나는 천사처럼 반짝이는 미소로 에리카를 불렀었다. 어머니가 타지 말라고 씌워준 챙 넓은 모자 위로 뜨거운 여름 햇살이 작열하듯 떨어졌다. 자잘한 꽃무늬가 그려진 단순한 원피스가 나이에 맞지 않게 성숙한 몸에 근사하게 어울렸다. 성숙한 여인과 어린아이가 한 몸에 들어있었다. 바람도 불지 않는 더운 날씨에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마저 아름답다.

 에리카는 바로 그 순간이 닥치기 전까지의 순간순간을 찰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먼저 선로를 넘어간 카나가 에리카를 불렀고, 에리카는 주저주저 뒤를 따라갔다. 에리카는 자기가 남들보다 느리다는 건 알고 있었다. 카나는 늘 남보다 앞서가는 아이였다. 에리카는 항상 카나 뒤를 따라갔다. 그건 언제나 있는 일이었고 특별할 것 없는 한걸음이었다. 그 한걸음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끔찍한 사건을 만들었고, 에리카는 그 순간을 다시없을 재앙이라 평했다.

 전철이 오는 걸 눈치챈 건 두 사람이 선로를 넘어가 한참 놀며 긴장을 놓고 있던 저녁이었다. 카나는 뭔가 곤충을 잡고 있었을 것이다. 에리카는 다리가 아파 쪼그려 앉아 있었다. 전철이 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걸 피해야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따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원래 에리카가 그렇게 둔하고 느린 아이였을 뿐이었다.

 “에리카!”

 카나가 날카롭게 외치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도 에리카는 고개를 들었을 뿐이었다. 왜? 그런 건 없다. 에리카는 그저 최선을 다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난 뒤였다. 카나는 완전히 망가졌다. 보석처럼 매끈하던 검은 머리는 끔찍한 붉은 액체가 뒤엉겨 더러웠다. 얼굴은 땅에 처박혀 보이지 않았다. 어깨 한쪽과 다리 한쪽이 완전히 으스러졌다. 그때 신음 비슷한 걸 들은 것도 같지만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그 날 카나가 죽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너무 놀라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넋을 잃고 바라보았던 것 같다.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기 전까지는 일어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때 밀쳐지면서 발목을 삔 것도 몰랐다.

 “소원이 있구나.”

 시루떡같이 하얗고 동글동글한 인형이 있었다. 움직이고 말도 하는데 살아있는 생물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귀여운 생김에 절로 눈이 갔다. 살랑거리는 꼬리가 매력적이었다.

 “이게 네 소원일까? 울지 않는구나.”

 요정인지 뭔지 모를 그것이 으스러진 카나 곁에 내려앉았을 때 비로소 눈물이 났다. 에리카는 서럽게 울었다. 왜 우는지 슬프기는 한지도 모른 채로 서럽게 울었다.

 “나는 소원을 들어줄 수 있어.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도 말이지. 바라는 게 있는 거지? 친구를 살리고 싶다면 나와 계약해서 마법 소녀가 되어줘!”

 신기한 목소리였다. 그렇게 울고 있는데도 마음속에 직접 말을 거는 것처럼 들려왔다. 에리카는 소리 내 엉엉 울다가 차츰 눈물을 멈췄다. 빌고 싶은 소원이 있었다. 에리카는 카나가 꼭 필요했다.

'the other world' 카테고리의 다른 글

ff14 기반. 전사x학자 콤비.  (0) 2017.09.21
커미션 불발. 아케미 마리씨 이야기  (0) 2017.04.03
DN(nGRnG) 낙서 3  (0) 2015.12.08
DN(nGRnG) 낙서 2  (0) 2015.12.08
DN(nGRnG) 낙서 1  (0) 2015.12.04
Posted by fad
,

※ 센티넬버스 설정을 차용한 19금 요소와 BL 요소가 포함된 시리즈입니다. 19금 요소가 들어가면 비밀번호가 걸립니다.




 마차는 쉼 없이 덜컹덜컹 흔들렸다. 엘리자베스는 창 너머로 흘러가는 풍경을 눈으로 좇았다. 어느샌가 익숙해진 향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긴 여정에 몸은 노곤하게 늘어지는데 마음만 둥실둥실 가볍다. 돌아갈 집이 있고 거기서 기다리는 가족이 있었다. 그것만으로 무겁던 어깨가 한결 가뿐했다.

 페더와의 약혼이 정해졌을 때, 엘리자베스는 지금까지 수없이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수많은 시선 한가운데에 섰다. 엘리자베스를 걱정하는 소서리스들의 울분 섞인 잔소리, 꼴좋다며 고소해 할 형제들의 비웃음, 아무것도 모르면서 엘리자베스의 이야기를 안줏거리 삼아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어린 시절부터 수도 없이 겪어온 일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상처받지 않았다.

 공주를 영원불멸한 보석의 이름으로 부르는 나라에서 홀로 꽃의 이름을 받은 열일곱 번째 공주는 언제부턴가 밟아도 밟아도 다시 일어나는 강인한 생명력을 안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은사이자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돌보아준 소서리스 라파에게 말했다.

 「두고 봐. 이번엔 저쪽이 실수한 거니까.

 그 말은 진심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인생을 걸고 도박을 했다. 엘리자베스를 둘러싼 모두가 입을 모아 불씨에 뛰어드는 불나방 꼴이라고 말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라파가 노심초사하는 것을 알면서도 흘려 넘겼다.

 “도착했나 봐요.”

 메리엔델이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가 상대가 메리엔델이라는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가지런히 정돈된 금발 아래 고요히 감긴 두 눈은 날 때부터 잠들어있었다. 보지 않고도 보이는 사람보다 더 기민하게 움직이는 메리엔델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고된 훈련을 거쳤을지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하물며 아무리 보여주기 위한 싸움이었다지만 대륙 최강의 기사 페더와 대등하게 싸운 활 솜씨는 사실은 보이는데 안 보이는 척하는 게 아닐까하는 의심마저 들게 했다.

 “맞아요. 지금 성문을 지나가고 있어요. 언제 봐도 대단하네요, 메리엔델은.”

 마차는 덜그럭거리며 도개교를 건넜다. 푹신한 쿠션 덕분에 진동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눈이 보이지 않는 만큼 다른 감각이 예민하니까요.”

 메리엔델은 잔잔하게 웃었다. 담담한 목소리에는 뿌듯함이 묻어있다.

 “그런 점이 대단한 거예요.”

 엘리자베스도 웃으며 대꾸했다.

 “뭐가 말인가요?”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거요. 메리엔델도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을 거 아니에요?”

 “물론 그래요. 하지만 그게 대단한가요?”

 엘리자베스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점에서는 메리엔델도 페더도 한결같았다. 놀랍도록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이들이 죽도록 노력해서 얻은 결과인데도 그것을 뽐내지 않는다. 자신들이 이룬 경지가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소서리스로서 특출하지는 않았지만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는 안다. 어릴 때는 그렇게 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메리엔델이…….”

 똑똑.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마차가 멈췄다. 정중한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따 얘기해요.”

 쉿. 입술 앞에 손가락을 세우고 엘리자베스와 메리엔델은 쿡쿡 웃었다.

Posted by fad
,

DN(nGRnG) 낙서 3

the other world 2015. 12. 8. 16:05

DN(nGRnG) 낙서 2에서 이어집니다.


5.

"사랑하는 건 어떤 느낌이야?"

 제레인트가 물었다. 루비나트는 먼 곳에 시선을 준 채 반응이 없었다.

 "이봐."

 습격을 피해 도주를 시작한 것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제레인트는 처음으로 온전하게 자신이 혼자라고 느꼈다. 줄곧 바라던 혼자라는 감각이 낯설기만 했다. 제레인트는 불안했고, 살짝 정신이 나간 것 같은 루비나트가 신경 쓰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제레인트는 안중에도 없었던 루비나트였지만 그래도 괜찮았던 건 그 녀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음 착한 모험가. 아르젠타에 이어 제레인트와 함께 있 어준 솔직한 녀석.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마도 유일한 알테이아의 영웅.

 "루비나트."

 반응이 없는 것도 지쳤다. 제레인트는 생각했다. 그 녀석이 곁에 있었다면 말해주지 않았을까.

 '제레인트 잘못이 아니에요.'

 한낱 인간이 이렇게 그리울 만큼 약해지고 말았다. 아니, 그건 거짓말이다. 제레인트는 처음부터 그 녀석이 좋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마음 착하고, 아르젠타를 좋아하고, 남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참견하는 모험가가 좋았다. 제레인트는 조금쯤은 옛날의 자신을 이해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이렇게 마음이 든든해지는 존재라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아도 데리고 다닐만할지도 모른다.

 보고 싶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6.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뱉는다. 허파가 꽉 막힌 듯 숨쉬기가 힘들었다. 미스트랜드에 도착한 후 수십년을 멈추지도 않고 계속되던 증상이었다. 다른 일에 잠시 집중하면 괜찮아졌다가 여유가 생기면 다시 돌아왔다. 다행히도 해야 할 일은 아주 많았다.

 살아남아야 했다. 오염된 보옥에서 태어났지만 루비나트는 알테이아의 생명이었다. 긴 세월 살아남을 각오를 다졌다. 모노리스의 문은 닫혔다. 그러나 한 번 열린 문은 다시 열릴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지만 혹시라도 벌어진다면 루비나트는 돌아가야 했다.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혼란 속에 남겨진 페더를 위해 돌아가야 했다. 연고도 없는 곳에서 숨을 거둔 탓에 안식을 얻지 못하고 한 줌 모래로 흩어진 메리엔델을 위해 돌아가야 했다.

 루비나트는 돌아가기 위해 공부했다. 미스트랜드에 대해, 그리고 베스티넬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아야 했다. 갓 태어난 갓난아이처럼 듣고 손을 뻗었다. 잡히는 것은 수도 없이 많았다. 정보를 모으고, 익히고, 가리는 것에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알테이아에 갇힌 채 모노리스에 대해 꿈만 꾸던 나날과 마찬가지로 시간은 충분했다.

 루비나트는 느리게 걸었다. 시간은 빠르게 루비나트를 스쳐 갔다. 루비나트는 동면하는 개구리처럼 웅크리고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지난 세월이 얼마였는지는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문이 열렸다. 루비나트는 깨어났지만, 곧장 알테이아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베스티넬의 새로운 군대만큼 알테이아가 준비되어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알테이아가 없어지면 돌아갈 곳도 없었다. 루비나트는 하루에 한 번 먼지를 털 때를 제외하면 신경조차 쓰지 않게 된 유골함을 한 번 쳐다보았다.

 문을 만들었다. 베스티넬의 군대가 아우성거리는 소리는 유쾌했다. 어렴풋이 이제 일어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들어?"

 새로운 지성과 기적, 온기가 루비나트를 찾아왔다.

'the other worl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커미션 불발. 아케미 마리씨 이야기  (0) 2017.04.03
에리카나  (0) 2016.01.02
DN(nGRnG) 낙서 2  (0) 2015.12.08
DN(nGRnG) 낙서 1  (0) 2015.12.04
fine  (0) 2015.11.20
Posted by fad
,

DN(nGRnG) 낙서 2

the other world 2015. 12. 8. 14:57
DN(nGRnG) 낙서 1에서 이어집니다.


4.

 "있잖아."

 벗은 상체가 빼빼 말라서 굽힌 등으로 갈비뼈가 보인다.

 "…루비나트."

 이 꼬맹이, 이름으로 불렀던가.


 호수는 수풀에 묻혀 있었다. 인가와는 한참 떨어져 그야말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무법지대다.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루비나트는 드래곤이고 제레인트 역시 미스트랜드의 독기에 얌전히 죽어줄 생각은 없었다. 괜찮겠지 생각하면서도 손에 힘이 풀리지 않았다. 제레인트는 안절부절 발을 굴렀다. 그런 줄도 모르고 루비나트는 태평하기만 했다.

 며칠을 씻지 못하고 달렸는지 옷이고 몸이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호수를 발견하자마자 기뻐 뛰어든 것은 제레인트였다. 루비나트는 어슬렁어슬렁 뒤따라오더니 옷을 입은 채로 물에 잠겼다. 그 상태로 수면에 떠다닌 게 벌써 한 시간이다.

 "안 갈 거야?"

 대답이 없다.

 "야, 케이어스. 안 가냐니까…요!"

 삼십 분 전에는 이렇게 부르면 대답을 했고  십분 전까지만 해도 손을 휘저었는데 이제는 반응이 없다. 제레인트는 덜컥 겁이 났다. 물에 빠져 죽은 시체는 위로 뜬다던데.

 "자냐?"

 겁먹은 목소리가 된 것이 불만스럽지만, 지금은 그보다 루비나트가 걱정이었다. 물속에 드래곤에게 치명적인 독을 가진 물고기라도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제레인트는 나뭇가지에 널어놓은 옷을 만져보았다. 아직 축축하긴 하지만 제법 말랐다. 그러고 보니 빨래하는 걸 보던 루비나트가 말려준다고 했던 것 같다.

 "옷 말려준다며. 뭐하는 거야."

 말꼬리가 못내 흐려졌다. 루비나트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제레인트는 손끝을 깨물다가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빨리 안 나오면 용서 안 할 거야?"

 어린애가 떼를 부리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그 녀석이라면, 알테이아에서 만난 바보같이 착한 모험가라면 이 말에 움직여주었을 것이다. 루비나트가 신경쓸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말해버린 것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역시나 루비나트는 반응이 없다.

 이쯤 되니 정말로 심장이 두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두 번, 세 번 서있는 자세를 바꿨다가 조그맣게 이름을 불러보았다. 이번엔 들리지도 않았을 테지만 대답이 없는 게 불길했다.

 "루비나트!"

 풍덩. 호숫물이 넘쳐 땅을 적셨다. 물결이 일파만파 퍼져나간다. 제레인트는 적을 향해 날아갈 때처럼 빠르게 헤엄쳤다. 수면 위에 동동 뜬 빨간 머리카락의 주인을 낚아챈다.

 "야, 루비나트!"

 마구 흔드니 물이 얼굴 위로 튀었다. 시체처럼 창백한 눈꺼풀 위로 물방울이 맺혔다.

 "일어나. 바보야. 언제까지 잘 거야. 계속 여기 있으면 안 된다며!"

 마음이 급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다. 주먹을 꽉 쥐고 휘두르려는 찰나,

 "그 손 치워라."

 루비나트가 눈을 떴다.

 "시체도 팰 놈이네! 알았으니까 놔. 그 주먹도 치우고."

 한숨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뭔가 말하는 것 같았지만 웅얼거려서 내용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제레인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벌써 이렇게 됐나. 나가자, 꼬맹이… 울어?"

 훌쩍훌쩍. 눈물이 나는 게 바보 같고 서러웠다. 약한 모습 보이면 안 된댔는데. 아르젠타가 강해지라고 했는데. 타락한 케이어스 따위 죽어버려도 상관없는데.

 "안 울어. 누가 너 같은 거 때문에…."

 훌쩍. 눈가에서 떨어지는 건 호숫물이 틀림없었다.


DN(nGRnG) 낙서 3로 이어집니다.

'the other worl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리카나  (0) 2016.01.02
DN(nGRnG) 낙서 3  (0) 2015.12.08
DN(nGRnG) 낙서 1  (0) 2015.12.04
fine  (0) 2015.11.20
If I was there  (0) 2015.09.06
Posted by fad
,

※ 센티넬버스 설정을 차용한 19금 요소와 BL 요소가 포함된 시리즈입니다. 19금 요소가 들어가면 비밀번호가 걸립니다.




 ‘누군가 도와주세요!’

 쟈넷은 비명을 질렀다. 아니, 지르려고 했다. 있는 힘껏 내지른 목소리는 누군가의 손에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막혀버렸다. 붉게 물든 얼굴 위로 글썽글썽 눈물이 맺혔다. 어쩌지, 어쩌지.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이 일이 묻혀선 안 된다는 조바심이 쟈넷을 견딜 수 없게 했다.

 “쉿. 조용히.”

 속삭이는 목소리가 기묘할 정도로 익숙했다. 쟈넷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발버둥을 멈췄다. 붉게 달아올랐던 뺨이 서서히 식는다. 열기가 가라앉자 못 보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연노랑 색을 띈 넓은 소매. 전 대륙을 뒤져도 한 벌밖에 없을 독특한 의복이 눈에 띄었다.

 “진정됐어? 놓아줄 테니까 소리 지르지 마. 알았으면 끄덕여봐.”

 고개를 끄덕이자 단단히 턱을 붙들고 있던 손이 느슨해졌다. 쟈넷은 그에게서 도망치듯 떨어져 나왔다. 해도 뜨지 않아 어슴푸레한 회의실에서도 짙은 푸른색 옷과 타오르듯 빨간 머리카락은 한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도망치면 내가 범죄자 같잖아.”

 날렵한 턱이 씰룩거리며 난처한 미소를 띠웠다. 언제 봐도 근사한 얼굴이라며 동료들과 재잘거리던 것이 떠올랐다. 쟈넷의 주근깨 낀 얼굴이 다시 빨갛게 익었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보니 갑자기 부끄러워진 탓이었다.

 “나도 지금까지 여기 있고 싶지 않았거든? 그러니까 우리 조용히 해결하자. 알았지?”

 쟈넷은 하얗게 비어버린 머릿속에 어서 주인, 엘리자베스에게 알려야한다는 생각만 가득 채운 채 얼떨떨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Posted by fad
,

DN(nGRnG) 낙서 1

the other world 2015. 12. 4. 13:23

1.

 "하여간 멍청한 꼬맹이 에인션트 같으니. 원래 이런 건 말이야. 분위기가 중요한 거야."

 홍염의 드래곤은 히죽히죽 웃었다. 매끈한 얼굴, 붉은 눈동자에 빠져들었다. 아찔해 눈을 감았다. 낯선 감촉과 함께 알싸한 황금주 향이 혀끝으로 전해졌다. 


 훗날 제레인트는 회상했다. 그 날 그 장소에 루비나트가 말했던 분위기따윈 없었다. 감시의 눈을 피해 숨어든 지저분한 은신처에는 안심하고 등을 기댈 장소조차 없었고 냄새가 지독했다. 먹을 거라고는 루비나트가 챙겨온 황금주뿐이었으며, 잔뜩 취한ー진짜 취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ー루비나트는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지금 돌이키면 최악이라고 평가해도 별다르지 않은 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진하던 그 날의 제레인트는 그것이 그렇게 좋았더랬다. 

 아. 루비나트. 

 얕은 탄식이 혀밑으로 샌다.


2.

 "너 진짜 드래곤 맞아?" 

 제레인트는 루비나트를 노려보았다. 푸른 옷에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이다. 어디선가 본 것 같다고 줄곧 생각했는데 책에서 본 홍사등롱(紅紗燈籠)과 똑같다. 괜히 웃음이 나려는 걸 억지로 입가를 굳혔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네." 

 언제나처럼 시큰둥한 대답에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솟아올랐다. 제레인트는 도전적으로 뱉었다. 

 "사랑을 하는 드래곤 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어. 너 진짜 드래곤 맞아?" 

 번쩍.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제레인트는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바깥 날씨를 살피러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붉은 눈이 빛나고 있었다. 루비나트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 제레인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미스트랜드로 넘어와서 루비나트가 제레인트와 눈을 맞춘 건 처음이었다. 

 "꼬맹이가 좋게좋게 넘어가니까 못하는 말이 없네." 

 기억났다. 제레인트는 등을 꼿꼿이 폈다. 그때도 이런 눈빛이었다. 알테이아에서 케이어스의 사념체가 정체 모를 술법으로 제레인트의 힘을 봉인했을 때도이랬다. 저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무릎을 굽혀 무게중심을 낮춘다.

 "…왜요." 

 제레인트가 듣기에도 제 목소리는 불퉁했다. 

 "한 번만 더 그딴 소릴 함부로 지껄이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루비나트는 어딘가 김이 샌 것 같았다.


3.

 취해서 쓰러진 꼴이 우습다. 루비나트는 피식 웃었다. 흙바닥에 널브러져 금발이 지저분해진 것도 모르고 제레인트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두개골 깊숙한 곳까지 찌르르 울리는 냄새는 얼큰하게 들이킨 황금주의 발자취였다. 약해진 자신보다도 제레인트가 먼저 취해버렸다. 믿기지 않을 만큼 인간 꼬맹이 같다. 루비나트는 빈 술병으로 제레인트의 뺨을 눌렀다. 

 "이봐, 꼬맹이." 

 미동도 없다. 루비나트는 습관적으로 술병을 기울였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한 방울도 고이지 않았다. 

 루비나트는 제레인트를 바라보며 좁은 공간에서 보다 편하게 자리 잡기 위해 다리를 뒤틀었다. 제레인트가 대자로 뻗어 있어서 어떻게도 되지 않는다. 루비나트는 발로 밀어 제레인트를 유선형으로 꺾어놓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녀석 드래곤이 맞긴 한가? 둘이서 지내면서 몇 번이고 그런 생각을 했다. 알테이아에서도 미스트랜드에서도 한결같이 짜증스러운 꼬맹이기는 하지만, 뭔가 다르다. 아이오나도 울보에 꼬맹이에 겁쟁이였지만 제레인트와는 달랐다. 아이오나는 완성된 드래곤이었다. 케이어스의 기억을 가지고, 지켜야 할 사명을 가지고, 변치 않는 드래곤이었다. 

 "한 번 죽었던 녀석이랬지." 

 인간을 동경했다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이게 가능한가?" 

 루비나트는 빙빙 도는 머리를 잡고 생각을 정리해보려다가 이윽고 눈을 감았다. 모르겠다. 축축하고 차가운 벽에 직접 닿자 머리가 찌르르 울렸다. 아오! 신경질 내며 몸을 앞으로 당겼다. 또 제레인트와 부딪힌다. 루비나트는 낮게 신음했다. 진짜 모르겠다. 

 "네가 자초한 거다." 

 깨면 시끄럽겠군. 루비나트는 제레인트의 뺨을 쭉 잡아당겼다.



DN(nGRnG) 낙서 2로 이어집니다.

DN(nGRnG) 낙서 3로 이어집니다.


'the other world' 카테고리의 다른 글

DN(nGRnG) 낙서 3  (0) 2015.12.08
DN(nGRnG) 낙서 2  (0) 2015.12.08
fine  (0) 2015.11.20
If I was there  (0) 2015.09.06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7일이라는 시간  (0) 2015.06.05
Posted by fa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