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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들지 못한 밤이 벌써 몇일째일까. 눈이 시리고 뻑뻑했다. 소년은 꼿꼿한 자세지만 묘하게 불안정한 걸음으로 발을 내딛었다. 달빛을 받은 바닥이 반짝반짝 빛났다. 소년의 눈동자가 초점없이 흐릿했다. 거의 흰자와 구분이 가지 않는 옅은 회색빛 홍채는 달빛이 꽤나 밝은데도 불구하고 풀어져 동공이 크게 확대돼 있었다. 아무 것도 신지 않은 하얀 발이 닿은 바닥에는 붉은 눈송이가 점점히 박혔다.
  비틀, 소년의 몸이 균형을 잃고 작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무의식 중에 바닥에 댄 손바닥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들려진 손에서 붉은 눈송이가 떨어져 내렸다. 떨어지는 눈송이가 달빛에 반짝하고 빛났다. 몸을 일으킨 소년은 움직이지 않고 잠시 이마에 손을 짚은 체 그 자리를 지켰다.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지만 소년은 느릿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허벅지까지 닿은 소년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하이얀 달빛과 반짝이는 바닥에 대비해 구멍이 뚫린 듯 보였다.

  '오늘은 달이 참 밝다, 그치?'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두 눈이 초점을 찾았다. 몽롱한 표정을 한 소년이 다시 한걸음 한걸음 발을 옮겼다. 눈에 띌 정도로 휘청거리고 있었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점점이 이어지던 붉은 눈송이는 조금씩 커져서 마침내 붉은 발자욱이 되었다. 한발짝 내딛을 때마다 급하게 꺾이는 무릎이 위태로웠다. 비틀, 비틀. 흔들거리며 힘겹게 몸을 옮겼다. 은빛으로 빛나는 길지 않은 길이 끝나고도 몇걸음인가 더 나아간 소년은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소년의 발이 닿은 마지막 자리까지 붉디 붉은 발자욱이 이어졌다. 등은 하얗기만 한 발의 바닥은 온통 붉었다. 붉은 조각이 발바닥을 온통 메웠다. 드디어 감긴 두 눈과 창백한 얼굴은 전혀 고통을 호소하지 않았다. 그대로 깊은 잠에 빠진 작은 소년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응, 둔켈도 행복한 꿈 꾸길. 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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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현은 옷을 벗었다. 목욕하러 들어가야 하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한데 어딘가 불편했다.

 '대체 뭐지.'

 잠시 고민해보았다. 고개를 갸웃하는데 뭔가 시야에 들어왔다. 하현보다 머리 하나는 큰 껑충한 키의 청년. 두 사람의 기장 차이 탓에 하늘하늘한 검은 머리가 덮고 있는 목덜미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미미하게 웃어보였다. 굉장히 기분좋아보이는 표정에 하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변화를 알아차린 휘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오히려 더 짙어졌다. 하현은 코를 통해 흥, 하고 숨을 내뱉고는 남은 하의를 벗기 시작했다. 곧 멈추고 말았지만.

 '옷 안벗어?'

 동작을 멈춘 하현이 휘아를 바라보았다. 말은 커녕 작은 제스쳐도 없었지만 하현 못지 않게 말이 없는 이 친구는 전혀 어색함 없이 그 뜻을 알아들었다. 눈을 한번 감아보이더니 손과 목을 휘감은 악세사리들을 먼저 풀어낸다.

 '하나도 안 벗고 있었잖아.'

 하현은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휘아를 한번 노려보고는 수건만 한장 들고 온천으로 향했다. 휘아가 옷을 벗으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하현도 휘아도 신경쓰지 않았다. 두사람은 25살이나 먹은 남자 대학생. 여고생이 아니니 말이다.

 '좋구나, 온천이란 건.'

 딱히 휴일도 아니고 이른시간인지라 아무도 없는 온천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현은 온천에 앉아 혼자라는 것의 여유로움을 마음껏 즐겼다. 온몸이 노골노골 풀어지는 느낌에 졸음이 밀려왔다. 그래서 살짝 졸음에 취한 체 목만 내놓은 체 탕에 가라앉아 있는데 소리가 들렸다. 맨발이니 딱히 발소리랄 것은 아니었지만 이쪽으로 걸어오는 작은 기척. 탈의실에도 사람은 없었으므로 이것은 틀림없이 휘아의 것이었다. 소리는 문에서 출발해 하현의 바로 뒤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침묵했다.

 "왁."
 "……."

 전혀 발소리를 죽일 생각도 없이 다가와서는 하현의 귓가에 바짝 입을 대고 왁, 이라고 말했다. 놀랄리가 없었다. 하현의 뚱한 시선을 받은 휘아는 하현의 머리카락을 한번 헤집고는 탕 안으로 들어왔다. 수면이 출렁거렸다. 하현은 가만히 휘아가 자리를 잡고 앉아 수면이 잔잔해지길 기다렸다. 휘아는 그런 하현을 흘낏 보더니 물 속에서 손을 휘저었다. 물결이 잠잠해지려다 다시 술렁인다. 수면만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는 하현의 표정이 재미있어서 한번 더 시도해보았다. 조용해지던 물결이 그 세기를 더하자 작게 눈썹이 꿈틀거렸다. 보통 사람은 잡아낼 수 없는 작은 변화지만 휘아와 하현은 자연스럽게 그런 것만으로도 의사소통을 해냈다. 그것이 가능한 사이였고 그것이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장난이 계속 되자 전혀 휘아를 신경쓰지 않고 있었던 하현이 마침내 휘아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뚱한 표정이다. 휘아는 작게 소리내어 웃고는 손을 멈췄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한번 휘아를 바라본 하현은 다시 시선을 물로 돌렸다. 휘아는 바로 고개를 돌려버리는 하현의 행동에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수면이 잠잠해졌다. 하현은 미리 물 밖으로 꺼내 두었던 손을 들었다. 내리치려는 생각이다. 고작 그거 하나를 위해 계속 기다렸다니 유치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하현의 손바닥이 수면에 닿으려는 찰나,

 "……?"

 하현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휘아의 감은 눈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제대로 초점을 맞추기 힘들 정도의 거리.

 '뭐지, 이거.'

 그렇게 생각하고는 고개를 갸웃, 옆으로 기울였다. 그러자 휘아의 손이 하현의 목 뒤로 넘어왔다. 하현의 머리를 받힌 손, 그리고 맞닿은 입술이 어쩐지 뜨겁다.

 '키스, 지?'

 하현은 고민했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하나. 몇일 전, 이름이 기억 안나는 어떤 여학생이 단호하게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이렇게까지 매일 붙어다니다니! 너희 둘은 커플이야! 틀림없이 사귀고 있는 거라고!'

 그 때 하현과 휘아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넘어갔다. 딱히 부정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냥 그렇게 보인다면 그런 거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걸로 두 사람의 관계가 뭔가 바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모두 수업이 없는 휴일, 하현과 휘아는 온천에 왔다.

 '사귀는 사이에 키스 정도는 당연히 하는 건가.'

 하현은 눈을 감았다. 먼저 입을 열기를 청해본다. 아니, 청하려고 했다. 작게 입을 벌리자 바로 시작되는 것은 뜨거운 입맞춤. 조용하고도 격렬한 애정의 확인이 온천의 남탕이라는 공개된 장소에서 시행되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떨어질 때까지 그 공간에 발을 들인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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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쳐다보기만 하는 거, 꼴사나워."
 "응?"

 희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옆에 다가온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심하게 놀란 것 같아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굉장히 많이 놀라서 가슴을 쓸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가 아무런 표현을 하지 못한 것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랐다는 리엑션을 취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떄문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청년을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당신……."
 "할 말이 있는 거 아니야?"
 "뭐?"

 청년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희란이 되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질문을 하고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등을 돌려 성큼성큼 그녀에게서 멀어져 갔다. 희란은 미처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그저 얼떨떨하니 그의 등을 바라볼 뿐이었다. 곧 그렇게 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어이, 할 말이 있대."
 "저요?"

 청년이 희란에게 말을 건 것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그 상대는 그녀가 몇 일째 이 자리에서 계속해서 바라봐온 사람. 희란은 기겁을 하고 청년의 뒤를 쫓았다.

 "자자자자, 잠깐!! 뭐하는거야!"
 "빨리 말 안하면 더는 기회가 없을거야. 그 사람들이 오고 있으니까."
 "하?"

 희란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높낮이 없는 무뚝뚝한 어조로 말하는 청년을 그 사람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연고도 없는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걸어놓고 이게 웬 헛소리라니. 희란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청년과 그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그 사람은 함께 걷던 친구와 함께 청년과 희란에게서 멀어져 갔다. 청년은 그것을 막지 않았고, 희란은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미친 놈이라는 말이 들려왔다.

 "늦었군."
 "에, 에, 예?"

 그리고 청년은 걸음을 옮긴 후 굳은 것처럼 한번도 움직이지 않았던 고개를 돌렸다. 보이는 것은 거리와, 사람 뿐이었지만 그는 어딘가 먼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희란이 아직 당황해있는 사이 말릴 틈도 없이 그는 걸어갔다.

 "아, 저기, 저, 잠깐만요!"

 그 날은 바로 전날까지 따뜻하다가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서 평소보다 더 춥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하지만 바람은 거의 불지 않았고 구름 한점없이 유난히 하늘이 맑았다. 청년, 하현은 이름 모를 상대방이 자신을 따라올 여유가 없을 것이란 것을 알았다. 그녀는 혼령. 세상에 무엇인가 원한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단지 그가 그 길을 지나다닌 일주일 동안 내내 한 장소에 서서 한 남자만을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걸렸을 뿐이다. 그녀가 세상에 있는 목적은 다른 것이리라. 그 것은 분명히 살아있는 사람들의 세상에 해가 되겠지. 그는 조용히 익히 잘 알고 있는 장소로 발을 옮겼다. 어차피 인연이 있는 곳.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만두면 되는 것이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하현은 헐렁해져 별로 기능을 못하고 있는 목도리를 가볍게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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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캐릭터 100제.
자신이 창작한 캐릭터를 그냥 나열하세요.
따로 포스트를 작성해서 세세한 소개를 하거나,
이름만 적고 그 옆에 간단한 소개를 적어도 괜찮습니다.

출처 : http://blog.naver.com/zydn219/120009814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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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잡한 주택가, 좁은 골목을 굽이굽이 돌아가다보면 막다른 길. 좁지만 햇빛이 잘 드는 그 골목에는 카페가 하나 있다. 하얀 벽돌 건물에서 가게만이 오로지 갈빛 목재인지라 한눈에 들어오는 작은 카페. 내부 구조상 문을 열지 않으면 덧문이 달린 그리 크지 않은 창으로만 빛이 들어온다. 180이 넘는 장신의 주인이 간신히 서있을 수 있는 외부도 내부도 아담한 카페. 오너, 시이첸 아라마스는 매일 아침 덧문이 반쯤 열린 창문가에 서서 실눈을 뜨고 옅은 아침 햇빛을 즐기는 걸 좋아했다. 덤으로 이렇게 덧문을 살짝만 열어두면 언제나 감추고 있는 날개도 한번쯤 펴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가개 내부가 너무 좁아서 엉거주춤 펴는 듯 마는 듯 할 수밖에 없지만.

 "미─…."
 "잇삐, 이제 들어왔나요?"
 "냐~"

 까만 민소매 원피스만 한장 걸친 작은 여자아이가 시이의 허리에 머리를 부비며 들어섰다. 샛노란 눈이 어두운 카페안에서 밝게 빛난다. 시이는 아이의 작은 머리를 가볍게 쓸어주었다. 가늘고 긴 손가락 탓에 아이의 머리가 한 손에 잡혔다. 이대로 콱 움켜쥐면 바스러질텐데. 햇빛에 지는 시이 얼굴의 음영이 더욱 짙어졌다.

 "배가 고픈가요?"

 사람의 목소리라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어보이는 갸르릉 거리는 소리로 아이가 응답했다. 제 주인에게만 온갖 애교를 부리며 달라붙는 이 아기고양이가 시이의 유일한 동거인. 그나마 지금은 동거'인'이라 불릴만한 모습을 갖추었지만 본래는 그저 객식구일 뿐인 떠돌이 짐승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이 아이의 인생도 꽤나 많은 면이 뒤바뀌어버린 셈.

 "이런, 이렇게 붙어있으면 움직일수가 없잖습니까. 조금만 떨어져 주시겠어요?"

 그것은 갑자기 나타난 웬 아가씨의 한마디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





 천계와 마계는 태고적에는 하나였다고 한다. 그것이 어찌하여 하나가 되었는지는……, 별로 알 필요 없겠지. 그것에 관련해서는 온갖 전승이 있지만 시이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천계와 마계는 하나가 아니고 서로 적대하고 있으며 시이는 그 경계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는 것 뿐. 어릴 적에 수도없이 들었던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면 시이는 과거에 천계와 마계가 하나였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었다. 시이는 철저하게 자신이 바라보는 것, 자신이 해야하는 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딱히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해본 적도 없었고 별 것도 아닌 것에 열심히 의미를 갖다 붙이는 일에도 흥미가 없었다. 심지어 신에게조차, 관심따위는 없었다. 천사라지만 시이는 말단. 신을 만날 일따위는 평생을 기다려도 없을 것이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마계를 지키는 악마들과 눈싸움을 한다거나 오늘 식사 메뉴라거나 그런 시덥잖은 것들이 시이의 관심사의 전부였다. 요즘은 꽤나 평화롭긴 하지만 가끔 벌어지는 싸움에서 자신과 비슷한 말단 악마들의 머리를 부수는 일은 조금 좋아했다.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그 감각이 좋았다. 조금 위험한 일이었지만 이래뵈도 시이의 전투력은 다른 말단 천사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므로 죽을 걱정따위는 하지 않았다. 물론 죽을지 모른다고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멈출 시이가 아니기도 했지만. 사는 것에도 별 아쉬움은 없는 시이였다. 그리고 약간의 위험은 작은 취미에 스릴을 더해주지 않는가.
 조금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무료했다. 평화로운 나날이 지겨워서 전쟁이라도 일어났으면, 하고 바랐다. 물론 전쟁이 일어나면 당장 군대에 동원되서 대기해야 하므로 귀찮으니 얼른 끝나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겠지만 상관 없었다. 그건 그때가서 귀찮을 일이고.

 "냐아오─."

 고양이가 자신의 발목에 머리를 부비다 못해 지쳐서 울음소리를 냈다. 임무를 설때면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거대한 낫에 기대어 서서 딴생각을 하고 있어서 알아채지 못했다. 평소라면 금방 알아차렸을 텐데 지루하다는 감각에 조금 깊게 빠져버린 모양이었다. 준비해둔 사료를 꺼내주자 늘 그렇듯 냄새를 맡으며 조심스레 주변을 맴돌았다. 2~3일에 한번씩 찾아오면 밥을 주는 이런 일정이 계속 된지 벌써 반년이 다되어가는데 의심이 많은건지 고양이라는 녀석들이 다 그런건지 아니면 그저 이녀석의 습관인지 확인에 확인을 거듭한다. 시이는 그런 고양이의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았다. 경계 근무 중에 딴 곳을 봐도 되는 건가 싶지만 시이가 근무 중에 딴짓을 하는 건 늘 있는 일이고 그렇게 딴짓을 하면서도 결코 사소한 이상 하나 놓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책하지 않았다. 시이는 자신의 임무에 관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실수 하지 않았다.
 갑자기 주변이 술렁거렸다. 시이는 고양이의 사소한 행동을 바라보는 일은 꽤나 즐거워서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았지만 일단 보고는 해야하니 다시 경계임무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시이의 앞에 선 것은,
 여자아이?

 "안녕하세요."

 상냥하게 웃는다. 시이의 가슴께에밖에 오지 않는 여자아이는 그렇게 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갑자기 천계와 마계의 경계에 나타난 소녀는 양 진영을 지키는 수많은 병사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시이의 앞에 섰다. 전선 가까이에 있는 모든 생물체가 두 사람만을 주목하는 듯한 정적이 흘렀다. 마주선 두 사람은 키부터 시작해서 닮은 부분이 하나도 없었지만 둘을 바라보는 이들은 모두 두 사람이 어딘가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전선의 싸이코, 시이첸 아라마스와 저 아름다운 소녀가 닮았다는 건 어쩐지 말이 맞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렇게 보였다. 소녀가 말했다.

 "시이첸 아라마스씨, 맞으시죠?"
 "예. 그렇습니다."

 거의 한사람이 말한 듯이 즉각적으로 대답이 이어진다. 자신을 아리스가와 센쥬라고 소개한 소녀는 그의 대답을 듣고 작게 쿡, 하고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시이 역시 언제나 입가에 매달고 다니는 미소가 조금 짙어진다. 병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서야 간신히 이 사실을 상부에 전달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부산해진 병사들의 심정은 아는지 모르는지 센쥬는 다시한번 시이에게 말했다.

 "저와 함께 가주시겠어요? 마법사님이 당신을 기다리고 계세요."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하얀 빛인 천사의 얼굴이 센쥬의 말에 부드럽게 풀렸다. 그 전에도 분명히 상냥한 표정으로 웃고는 있었지만 더 부드러워 졌다는 느낌. 가늘게 뜬 두 눈이 더 가늘어졌다. 사랑스럽다는 듯 낫을 끌어안은 손 중 하나가 풀어져 나와 그의 가슴 위에서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살짝, 그의 상체가 기울어진다.

 "Yes, miss.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고개를 들어 센쥬와 시선을 맞춘 시이의 눈이 기분 좋게 미소짓고 있었다. 마주한 센쥬도 생긋 웃어보였다. 병사들의 표정이 어떠했을지는 모두의 상상에 맡기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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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정해져있어. 그래서 그대와 나는 운명이지.』

 그 것이 '그'와의 첫만남. 내가 나의, 리히트라는 이름을 잊어버리고 그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그렇게 말했다. 몇번을 더 죽는다 한들 잊을 수 없을 그 말. 나는 감격스러운 첫 만남에서, 감동적이기까지 한 그의 말을 듣고 울음을 터뜨려 버렸었더랬다.





 그것은 정말 갑작스러운 만남이었다. 태어난 곳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처음 보는 낯선 길을 걷다가 30년 전에 연락이 끊어진 친우를 만난다 해도 이토록 놀랍지는 않았으리라. 나는 둔켈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며 앞을 제대로 보지 않고 걷다가 그와 부딪칠뻔 하고는 급히 고개를 숙였었다. 그와 만난 첫날의 기억은,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헤어지기까지의 시간의 앞뒤는 뿌옇게 흐려져 있다. 그의 말대로 그와 내가 운명이기 때문일까? 운명의 사람을 만났다는 진실에 내 기억회로가 충격을 받아 멀쩡하던 앞뒤의 기억을 뒤흔들어놓은 걸지도 모른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맛,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제가 그만 딴데를 보다가……!!"
 "괜찮아?"
 "에, 아, 예. 저…는 괜찮아요…."

 그는 균형을 잃은 날 붙들고 친절하게 빙긋 웃었었다. 그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웃는 입매만큼은 지금도 그릴 듯이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아름다웠다. 나도 모르게 말을 잇지 못할정도로 그렇게 아름다웠다.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그때의 내 시간감각은 완전히 엉망이어서 그게 어느정도였는지는 알수가 없다. 그가 더 행복하게 웃는다고 생각했다. 뭔가 말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멈춰버린 머리 속에서 꺼낸 문장은 어찌보면 흔하고 어찌보면 낯뜨거운 그런 말. 그리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내 귀로 들려온 단 두 문장은 내가 가질 이후의 길디긴 시간 속에 깊숙히 새겨져 영원히 빛이 바래지 않을 찬란한 보석이 되었다.

 "전에, 만난 적이 있나요, 우리?"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미래는 정해져있어. 그래서 그대와 나는 운명이지."
 "……에?"

 종이 울렸다.

 뎅, 뎅, 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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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같은 녀석이다. 이것이 첫 인상이었는지 같은 건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력이 좋지 못한 편인 내가 이렇게 일관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건 역시 저녀석 문제겠지. 뒤통수를 간지럽히는 시선을 느끼며 지내는 것도 벌써 반년째. 이제는 없으면 허전할 정도가 되었다.









 

 

 

   어느 겨울에
     I wrote to congraturations on Hwa-a&Karnomen's 200th day. I love you Dears.


  먼 곳에서 봐도 반짝반짝 빛나는 붉은 머리카락을 쫓기 시작한 지 어언 199일째. 어찌보면 기념할 만한 날이지만 카르노멘은 오늘도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보는 것을 택했다. 화아는 여자애들이 손가락 꼽으며 센 기념일 따위에 신경쓰는 사람도 아니었고 뭣보다 두 사람은 그 긴 시간동안 제대로 대화 한 번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걸 기념 삼기에는 굉장히 애매한 관계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내일이면 두 사람이 만난 지, 아니 정식으로 교제하기로 한 지 200일째라는 말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이해도 못할 것이다.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되물어오는 것을 듣느니 차라리 생각하지 않는 게 나았다. 사실, 그런 걸 말하는 성격도 못되긴 했다.

"카르노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가 카르노멘의 귓가를 맴돌았다. 메세지 마법이 그의 감사실 책상에 있는 작은 거울과 그의 귀에 걸린 귀걸이 하나에 연동되어 걸려있어 카르노멘이 있는 장소, 그의 의사와 관계없이 상대방의 말을 전달해준다. 그 전언에 답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카르노멘의 의지였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대답을 하는 쪽이 감사실의 다른 학생들을 위해 좋았다. 그들은 감사장이 직접 나서서 처리해야하는 일부의 업무를 제외하고는 모든 업무를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유능한 인재들이다. 카르노멘에게 연락이 온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문제가 닥쳤을 때 뿐. 답하지 않아서야 카르노멘도 좋을 게 없었다. 가끔 일방적으로 모든 연락을 끊고 사라질 때가 있기는 했지만.

  "금방 가겠습니다. 잠시만 붙잡아주세요. 매번 고맙습니다, 레엔."
  "그렇게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이만"

  그의 인사와는 별개의 답변이 돌아오고 통신이 끊겼다. 조곤조곤한 어조와는 다르게 결코 레엔은 감정이 담긴 말에 답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신이 내린 저주같은 능력때문에 인간적인 교류를 완전히 끊고 지냈다. 방금 카르노멘이 건낸 것 같은 사소한 감사인사조차 듣지 못한 척 흘려넘겼다. 감사실의 모두는 레엔의 쌀쌀맞음에 적응해있었다. 물론 페레넬에서 조금만 지내다보면 웬만큼 이상한 사람들에는 다 적응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럼 가볼까요."

  그렇게 말하며 모자를 고쳐 쓴 카르노멘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아름다웠다.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동시에 남은 것은 햇빛에 하얗게 반짝이는 엷은 은빛 빛무리 뿐. 아무도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그가 앉아있던 장소는 사람들 눈에 꽤나 잘 띄는 벤치. 페레넬의 이상한 사람들 중에서도 카르노멘이 유별난 축에 든다는 것이 그렇게 놀라운 사실은 아니리라. 하지만 카르노멘마저도 그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 농구공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학생들 중 한 사람이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사라졌다. 처음엔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있는지 혹은 자리를 떠났는지 확인하는 것이 쉬워졌다. 화아가 예민해진 것인지, 그가 허술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서로에게 익숙해졌기 때문이라고 짐작해볼 뿐이다. 소년은 어쩐지 시들해져버린 농구에서 손을 놓고 코트를 빠져나왔다. 게임을 하던 멤버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몸이 안좋아서, 라는 한마디로 가볍게 물리쳐버렸다. 언제나 소리없이 나타나서 조용히 바라만 보다가 또 소리없이 사라져버리곤 했는데 오늘따라 그것이 왜이리 신경쓰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역시 신경쓰여."

  학생 감사실에 찾아가는 것은 조금 거북했다. 이 여자때문이다. 온몸을 가리는 까만 드레스에 베일까지 쓴 보는 것만으로 뭔가 불편해보이는 여자다. 이름이 뭐랬더라. 기억나지 않았다.

  "감사장은 현재 중요한 손님과 대면하고 계십니다. 나중에 다시 찾아와주시겠습니까."

  감사실의 입구를 맡은 그녀는 화아의 말재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사람같지 않은 억양없는 말투에 접근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서 화아는 언제나 최대한 빨리 그녀의 앞을 벗어나고 싶어했고, 그것은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화아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고 도망쳐나왔다. 중요한 손님이라니 얘기가 길어지겠지? 벌써 저녁시간이 가까워 오니 오늘은 패스하고 내일 만나는 게 좋겠다.

  "오랜만에 제대로 일하는 군, 저녀석."

  오늘의 모임 장소는 식당가 입구였던가. 오랜만에 먹는 바깥밥이다. 언제나 손수한 집밥을 먹는 입장에서 사치라고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가끔은 일부러 불량식품을 사 먹는 기분으로 밖에서 밥을 사먹고 싶어진다. 물론 오늘 저녁이 외식이 된 건 단순히 식사담당이 게으름을 피운 탓이겠지만. 간만의 외식이 반갑기도 하지만 외식이라고 생각하면 반드시 가야한다는 의무감이 사라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화아는 멀리 돌아가는 길에 발을 들였다. 귀찮아, 라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유치원 시절부터 몸에 익혀둔 버릇은 알아서 그를 약속 장소로 이동시켰다. 절대로 도망쳤을 때 뒤따라오는 잔소리가 무서워서 가는 것이 아니다. 어릴적부터 철저하게 훈련된 습관일 뿐이다.

  "쳇."

  스스로에게까지 변명해야하는 처지가 제법 한심스럽다. 화아는 괜히 머리를 한번 긁었다. 간지러운 것 같네. 슬쩍 돌아간 고개 탓에 시야도 함께 이동했다. 저건 뭐지. 학생노점상인가. 페레넬은 조건이 되는 사람들 중에서도 재주많은 이들만을 학생으로 받아들여 굉장한 스파르타식의 교육을 시키지만 그 외의 생활에는 거의 무제한적인 자유가 주어졌다. 아주 기본적인 몇가지 규칙만 지키면 학교를 떠나는 순간까지 무슨 짓을 해도 용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페레넬의 학생으로서 모든 생활비를 제공받으며 어떻게든 재산을 불리는, 아니, 정확히는 불리려고 노력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 악착같은 노력의 결과로 학교에 입학할 때는 땡전한푼 없는 빈털털이였는데 졸업할 때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거부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고로, 이렇게 학교 내에서 노점상을 벌여 용돈벌이를 하는 경우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물론 페레넬의 캠퍼스는 커다란 섬 하나를 전부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크기이기 때문에 안에는 식당가도 상점가도 따로 있지만.

  "이거, 귀걸이?"
  "50Dion입니다. 선물하시려고요?"
  "음……."
  "아하핫, 천천히 고르세요."

  그가 집어든 것은 은빛 사슬이 여러가닥 얽혀 있는 귀걸이였다. 다른 장식이 없어 단정하면서도 심심하지 않은 상당히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정작 관심을 보이고 있는 화아가 그런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까울만큼 잘만들어진 귀걸이였다. 그리고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는 화아의 시선은 끝에 매달린 영롱한 푸른빛의 보석에 못박혀있었다.

  "얼마라고요?"
  "50dion입니다, 손님."
  "잠깐만요."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며 화아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단 하나. 귀걸이에 달린 푸른 보석이 카르노멘의 반짝이는 은발에 굉장히 잘어울릴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선물하실 건가요? 그러면 이쪽 상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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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요한 손님=얘기가 길다
2 카르노멘이 다른 감사들한테 떠넘기고 일을 안하는 줄 알고 있음.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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