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잠이 들었을까. 눈을 뜨고 처음 보는 풍경이 낯설어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금방 잘 아는 장소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더라면 당장 유진에게 전화를 걸 참이었다. 요새 계속 컨디션이 안좋더라니 피로가 쌓이긴 했던 모양이었다. 아픈 것도 아닌데 집이 아닌 곳에서 잠이 들다니. 어지러운 머리를 붙들고―핸드폰을 손에 꼭 쥔 체―시계를 찾는 노엘의 눈에 요 몇일 봐온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 눈에 띄었다.

 "선생님?"

 한숨처럼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매일 같은 유진의 양호실 출입에, 혹은 갑작스런 고열로 시작되는 자신의 감기 몸살 탓에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그동안 봐온 것과는 확연이 다른 지친 듯한 모습으로. 저도 모르게 조심스레 다가가 바라보니 색이 옅은 금발이 곤히 잠든 얼굴 위로 흩어져 있었다. 답답해 보여 치워드릴까 하다가 다른 사람―그것도 자고 있는―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 꺼려져 대신 시선을 돌렸다. 안보면 답답할 것도 없지. 시계는 벌써 다섯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의 빠름에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창틀에 가지런히 놓인 문제집을 돌아본다. 오늘은 거의 못풀었구나. 침대 위에 던져두었던 가방을 집어돌아서는데 문득 방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을 발견했다. 아까까지 앉아있던 의자에 널브러진 자켓은 노엘의 것이 아니었다. 잠들기 전에는 분명히 없었던 것이었다. 앉자마자 곯아떨어져 평소와는 달리 가디건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추워보였던 걸까. 불편하게 잠든 양호 선생의 주변에서는 겉옷이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잠이 덜 깬 몸에는 쌀쌀한 날씨지만 추위를 잘 타는 노엘에게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폐를 끼쳤다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나빠졌다. 자켓을 들어 다시 선생님의 등에 덮어드린다. 출장에서 돌아오셨구나. 양호실에서 공부하기는 무리겠네. 아무래도 신경쓰이는 머리카락을 조심조심 치워드렸다. 이제 가야지. 가방에 문제집만 챙기면 더 망설일 것은 없었다.

 "…누구?"

 순간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천천히 돌아보자 선생님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런, 안경 쓰고 잠들었나."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몸짓의 선생님께 드릴 말씀이 없어 그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있었다.

 "미안한데 지금 몇시지?"
 "다섯시 오분…, 조금 넘었습니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제야 목이 가라앉은 듯 한 선생님께 물이라도 한 잔 드려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양호실에는 컵도 정수기도 모두 비치되어 있기에 급히 따뜻한 물을 건내자 놀란 듯 쳐다보다가 고맙다고 웃으며 받으신다. 웃는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이렇게 따로 대면한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양호 선생님은 굉장히 눈을 끄는 사람이었다. 날이 선 인상이 시원스럽기까지 했다.

 "왜?"

 너무 대놓고 바라보고 있었던 것을 깨닫고 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뇨, 아무 것도."

 어쩐지 이 상황을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유진이 아닌 누군가와 목적도 없이 한 장소에 있는 것은 불편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급히 가방을 챙겼다. 펜 뚜껑을 제대로 닫았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대충 밀어넣었다. 별 것도 아닌데 결국 손을 대고 만 자신의 인내심 부족이 원망스러웠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가던지, 아니면 깨우게 되었더라도 훨씬 침착했을텐데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의 자신은 전혀 자신답지 않다. 당황스러워서 빨리 이 자리에서 달아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 문을 열려는 순간 붙잡듯 들려온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그리 했을 것이다. 남겨진 사람의 생각따위는 아랑곳없이 문을 닫자마자 전속력으로 달려갔을텐데.

 "잠깐만."
 "…예?"

 스스로도 놀랄만큼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려나왔다. 혹시 이상한 눈으로 볼까, 달아나야겠다는 심정이었다는 걸 알았던 걸까. 여러가지 의문에 심장이 죄여왔다. 품에 안은 가방을 꼭 쥐었다.

 "늦었으니 태워줄게. 같이 가자."

 예상 외의 질문에 벙쪄 있다가 집 머니, 라고 물어오는 선생님의 물음에 정신을 차렸다. 아뇨, 괜찮아요. 혼자갈게요. 쥐어짜듯이 말을 내뱉고 급히 돌아서는데 눈앞이 어질, 했다. 고개를 숙인 체 급히 몸을 회전시킨 탓일까, 아니면 너무 긴장해있었던 탓일까.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몸이 바짝 굳어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넘어지면 아픈데. 어쩐지 멍해진 머리로 생각했다.
 확 옷이 잡아당겨졌다. 곧바로 붙들어온 팔 덕분에 몸이 고정되자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심장이 멎는 듯한 감각과 완전히 굳어버린 근육이 생소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긴장하고 있었던 거지.

 "몸이 안좋은데 혼자서 공부하고 있었던 거냐. 적당히 해."

 다정한 충고의 말과 함께 가자는 듯이 잡아당기는 몸에 작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아서 억지로 떠밀고 다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는, 노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소년은 상대방이 작게 중얼거린 그 소리를 알아 들었는지도 모른 체 그 자리에서 달아나듯 양호실을 벗어났다.

'story in my world > famillies's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진] 어리광  (0) 2009.04.11
[깜짝이벤트] 공주님을 구하자!  (0) 2009.04.10
나란히 낮잠을  (0) 2009.04.07
[노엘] 일상, 바라보다.  (0) 2009.03.31
기묘한 손님  (0) 2008.11.02
Posted by fad
,

 옛날 옛날 아주 부유하고 또 부자인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돈 버는 걸 좋아하고 일하기는 귀찮아하는 게으른 여왕님이랍니다. 여왕님은 백성들을 마구 부려먹어서 돈을 많이 벌어들였어요. 그래도 반란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 옛날 이야기라면 반란이라던가 정의로운 용사라던가 나와야 하지 않냐구요? 아아, 기대하는 마음은 알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여왕님은 국민들 사이에 인기가 매우 좋아서 그럴 일은 없어요. 돈 벌어오라고 닥달하긴 하지만 세금은 적정 수준만 걷기 때문에 다들 부자가 되었거든요. 오히려 여왕님 덕분에 부자가 되었다고 감사 인사로 세금도 아닌 보석이나 공물을 한무더기씩 바치곤 한답니다.

 그렇게 모두들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라에 어느날 커다란 초록색 용이 찾아왔어요. 한 발로 마을 두세개쯤은 가볍게 뭉갤 수 있는 커다란 용입니다. 그렇지만 뭐, 별일 있어서 온 건 아니고 그냥 친구집에 놀러가는 중이었대요. 그런데 날아가다가 내려다보니 보석을 잔뜩 실은 마차가 세대씩이나 지나가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용은 순간 눈이 번쩍해서는 보석을 몽창 가져가─려고 했다가 그보다는 더 보석을 많이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어요. 공주님을 납치하는거예요. 엄마가 공주님을 납치하면 보석을 왕창 가져다 준단다, 라고 가르쳐주었거든요. 용은 냉큼 왕궁에 가서 시종들은 구박하고 있는 조그마한 공주님을 납치했어요. 친절하게 쪽지도 남겨주었답니다.

 『 공주를 되찾고 싶다면 보석을 10,000t 바쳐라! 』

 물론 그렇게 짧은 글은 아니고 아래 어떤 보석을 얼마만큼씩 바칠지 상세하게 써놓기도 했어요. 용은 에메랄드를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그 중에 절반은 에메랄드로 채우라고 굵은 글씨에 밑줄까지 쳐서 강조해놓았답니다. 끝에는 이름과 주소를 남겨주었어요. 기왕이면 우체국 택배를 붙여달라는 추신도 덧붙이고요. 용은 늦잠꾸러기라서 정기적으로 같은 시간에 찾아오는 우체국 택배가 아니면 쿨쿨 잠을 자다가 우편물을 분실하기 일쑤였거든요.

 용이 떠나고 나자 시종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공주님이 사라진데다가 공주님이 살던 내궁이 커다란 종이로 덮여버렸거든요. 용은 자기가 쓰기 편한 크기의 종이에 쪽지를 적어서 주고 간거예요. 덕분에 안에 있던 시종들은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는데다가 깜깜해서, 밖에 있던 시종들은 들어갈 수가 없어서 모두 곤혹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웅성웅성 이 일을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소리로 왕궁이 가득 찼어요.

 시끄러운 소리에 여왕님의 동생이자 전속 힐러인 엘리엇 워커가 사무실을 빠져나왔어요. 마침 새로운 약재의 샘플이 들어와서 살피고 있는데 너무 소란스러우니 무슨 일이 생긴건지 확인하러 나온거지요. 사실은 지나가는 시종을 하나 붙잡아서 물어보려고 했는데 다들 바쁜지 뛰어다니는 통에 물어볼 수 없었답니다. 그리고는 황당한 광경에 고개를 하늘로 향한 체 그대로 얼어버렸어요. 사실 그게 당연하지요. 궁전 하나가 종이로 덮혀버리다니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요. 잠시 후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은 엘리엇 워커는 급히 여왕님의 집무실을 향해 달려갔어요. 그리고 외쳤습니다.

 "루비의 궁전이 종이에 잡아먹혔어!"

 다급한 나머지 뒤덮였어, 라는 말이 잘못 나온 것도 깨닫지 못하고 집무실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돌아보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엘리엇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이상하네요. 평소에는 여왕님인 셀린 W.스펜서와 그 보좌관 몇 사람 뿐 인 집무실인데 오늘은 사람이 많았어요. 다들 궁전을 뒤덮은 종이를 처리하기 위해 모인 걸까요. 여왕님 셀린 W.스펜서가 활짝 웃으면서 엘리엇 워커를 향해 두 손을 벌렸습니다.

 "어서오렴, 동생아."
 "뭐가 어서오렴이야!"

 그렇게 여왕님 셀린 W.스펜서의 하나뿐인 외동딸 사루비아 스펜서 구출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뭔가 얼렁뚱땅이라구요? 에이, 신경쓰지 마세요. 원래 옛날이야기라는 게 다 그렇답니다.




 자, 그럼 자랑스러운 용사들을 소개하지요.




 제 1 멤버, 셀린 W.스펜서.
 본래 여왕이지만 심심함에 뒹굴던 와중에 공주가 납치당하다니, 재밌을 것 같아서 용사 놀이를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기껏 모은 보석들 주기도 아깝잖아요. 그리고 사루비아 공주는 어디서라도 잘 지낼 것이 틀림 없어요. 그녀를 당할 만한 사람은 드문걸요. 게다가 훌륭한 방범 아이템도 쥐어주었으니 여왕님은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저 오랜만에 검을 들고 대륙을 횡단할 것을 생각하면 두근거리기까지 합니다. 한동안 쓰지 못했던 마법도 쓸 수 있을 것 같아 더더욱 기대중. 여왕님은 대륙에도 몇 없다는 마검사거든요.

 어딘가에서 "그렇다고 저한테 업무를 전부 떠넘기시면 어쩌라는 겁니까, 으아아악!!!" 라고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지만, 착각이겠죠?

 제 2 멤버, 엘리엇 워커.
 위에서도 소개했지만 여왕님의 동생이자 전속 힐러입니다. 유용할 테니까, 라는 이유로 셀린이 끌고 가는 모양입니다만 사실은 제 손으로 키우다시피 한 조카가 험한 일을 겪지는 않을까, 사랑하는 동생이 여왕님을 따라 다니면서 고생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많은가봐요. 끌고가지 않아도 직접 따라갈 것 같은 모양새입니다. 벌써부터 약초며 아티펙트들을 챙기느라 바쁘네요. 전속 힐러라고는 하지만 사실 엘리엇은 공간마법 같은 복잡하고 어려운 마법에 훨씬 관심이 많아서 그 방면으로도 상당한 전문가랍니다. 공격 쪽에는 셀린보다 못하지만 보조계열 마법은 누구보다도 뛰어나거든요.

 제 3 멤버, 세실 워커.
 여왕님과 엘리엇 워커의 사랑하는 막내동생, 세실 워커입니다. 사랑받는 만큼 이래저래 고생도 많은 모양이지만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지요. 국가 연금술사로는 드물게 조용조용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서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지만, 연금술사입니다. 연금술로서의 재능은 종종 차를 끓이거나 음식을 하는데도 쓰인다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솜씨 좋은 요리사이기도 하고 집안일도 훌륭하답니다. 연금술사로서의 능력은 물론이고 여행 중 일행의 건강과 생활 편의까지 봐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제 4 멤버, 리니아 워커.
 세실 워커의 양딸이자 연금술 조수인 귀여운 꼬마아가씨입니다. 아직 어린 나이에 비해 굉장히 똘똘하고 부지런한데다 책임감 있는 어른스러운 아가씨예요. 아빠를 닮아서 요리도 잘하고 순수하고 착해서 아빠는 물론, 깐깐한 삼촌에게도, 고모인 여왕님에게도, 사촌인 공주님에게서 마저도 사랑을 듬뿍 받고 있습니다. 아빠랑은 달리 사랑받아도 고생하지 않는 것이 다행. 아직 특출나게 잘하는 것은 없지만 분위기 메이커로서 바지런히 돌아다니며 일행의 기운을 북돋아줄 거예요!

 제 5 멤버, 유진 바르비에.
 왕실 멤버들과는 별 관련이 없지만, 공주님을 구출하기 위해 파견된 신전의 기사님입니다. 전사로서도 프리스트로서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기사님. 금발에 하얀 갑옷이 눈부십니다만―이거이거, 너무 덜렁대네요. 어디 용이 있는 곳까지 제대로 걸어가기나 하겠어요? 신나게 뛰다 넘어지고도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만발. 리니아 워커가 마음에 들었는지 하루종일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아버지인 세실 워커도 삼촌인 엘리엇 워커도 표정이 심상치 않지만 눈치채지 못한건지 그저 행복해 보입니다. 이봐요, 용잡기 전에 늑대 사냥하게 생겼어요. 정신차려요.

 제 6 멤버, 노엘 바르비에.
 이 까맣고 하얀 소년은 성기사 유진 바르비에의 동생이자 왕궁의 정원사랍니다. 평소에는 말 없이 꽃 사이에 파묻혀 있기만 하는 조용한 소년이지만 사고뭉치인데다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형 때문에 종종 잔소리꾼이 된답니다. 땍땍거리고 말을 쏟아내면 주변의 정령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립니다. 노엘 바르비에는 주변의 모든 정령들과 대화를 나누고 부탁을 할 수 있는 정령사의 재능을 타고 나서 정령들이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거든요. 깔끔한 성격의 그는 아마도 세실 워커를 도와 일행의 뒷바라지를 도울 수 있을거예요.

 제 7 멤버, 미츠 웨버.
 장난꾸러기 소년 같은 그는 세실 워커의 죽마고우입니다. 한두살 많은 모양이지만 정말 친한 친구 사이에 그런 것은 아무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아요. 호쾌하고 다정한 성격은 모두의 의지가 되어줄 것이 분명해요. 뿐만아니라 상상할 수 없을만큼 섬세한 손재주의 소유자이이기도 합니다. 세밀한 손놀림이 아니면 활솜씨는 전혀 기대할 수 없지요. 저 멀리 날아가는 새도 한번에 맞출 수 있을만큼 훌륭한 궁수랍니다. 그 손재주는 활 뿐만 아니라 수리라거나 자잘한 소품만들기에도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길어질 여행에 큰 도움이 될거예요.




 이 제각각 용사들이 함께 모여서 과연 어떻게 공주님을 구해낼까요. 사루비아 공주님은 편안한 잠자리도, 맛있는 쿠키도, 세실 삼촌과 리니아 언니도 없는 생활에 진저리를 내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공주님을 구해주세요! 늦으면 어떤 보복을 당할 지 몰라요!

'story in my world > famillies's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진] 어리광  (0) 2009.04.11
[노엘] 나른한 오후  (0) 2009.04.11
나란히 낮잠을  (0) 2009.04.07
[노엘] 일상, 바라보다.  (0) 2009.03.31
기묘한 손님  (0) 2008.11.02
Posted by fad
,

 맑은 날이 좋았다. 햇빛이 쨍쨍하고 땀이 줄줄 흘러도―노엘이라면 오분만 있어도 현기증을 일으키겠지만―언제까지고 바깥을 뛰어다닐 수 있는 맑은 날이 좋았다.
 비 오는 날이 좋았다. 하루종일 빗속을 돌아다니다가 노엘에게 혼이 나고 호된 감기에 걸려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메마른 땅과 공기를 촉촉하게 적시는 비 내리는 날이 좋았다.
 흐린 날이 좋았다. 회색 구름이 파란 하늘을 덮으면 풀밭에 드러누워 시간가는 줄도 모른 체 흘러가는 구름을 헤아릴 수 있는 흐린 날이 좋았다.

 그 어떤 날씨도 좋아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은 하늘이 깨끗한 깊은 밤. 유진은 달과 별이 반짝이며 빛나는 어두운 푸른 빛의 밤하늘을 제일 좋아했다. 소중한 것과 닮아 있기 때문일까? 문득 돌아보니 노엘이 서있다. 언제나 눈에 닿는 곳에 있는 사랑하는 동생. 밤 하늘과 같은 빛을 띤 긴 머리칼이 바람에 하늘거렸다. 어쩐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 나 teacher Eli한테 가봐야해. 저번에 우산 빌린 거 안 가져다 드렸다!"
 "그래? 그럼 들렀다 가."

 진홍빛 두 눈이 싱긋 웃었다. 노엘은 엘리 선생님 출장 때 잠시 양호실을 공부방으로 쓰더니 어느샌가 매일같이 양호실에 들르고 있었다. 평소 한 사람과 오래 지내는 일이 없는 노엘이 엘리 선생님과 친해진 것은 형으로써 반갑기도 하고 조금 아쉽기도 하다. 웃으면서 양호실로 향하는 복도. 햇빛이 따뜻했다.




 엘리엇 워커(Eliot Walker)는 지금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어떤 곤란한 상황이냐 하면―,

 "이건, 이건 설마……!!"

 평소 제법 친밀하게 지내고 있는 제자―양호선생과 학생도 사제간이라 칭할 수 있다 가정한다면―가,

 "숨겨둔 딸! 엘리 선생님이 독신인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국가가 아는데! 옛날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을 하더니 '나, 네 딸을 낳았어,'라며 덥썩 애를 떠맡겼다거나!"
 "진정해…."
 "요새 매일매일매일매일 노엘이하고 같이 지내더니 혹시 '나는 차가운 도시남자. 임신 쯤은 아무 것도 아니지,' 라고 노엘이랑 샤바샤바해서 애를 낳았다거나!!! 그런거죠? 그렇죠?!"
 "그만 좀 해, 진아…."

 이렇게 복도에까지 다 울릴 큰 소리로 말도 안되는 오해성 발언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치만 봐봐. 머리색은 너랑 똑같고 지금 찌푸린 표정은 엘리 선생님이랑 꼭 닮았잖아.'라며 유진이 동갑내기 제 동생을 향해 신나게 떠드는 목소리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헛소리도 이 정도 되면 수준급이다. 노엘과 자신의 아이라니, 말이 되는 농담을 해야지. 구제불능 바보는 전용 조련사에게 맡겨두면 알아서 진정이 될테니 내버려두고 대신 엘리엇은 혹여 사랑하는 조카의 교육에 해가 될까 싶어 얼른 아이의 몸을 끌어당겼다.

 "린, 저런 것은 그냥 무시하면 된단다."
 "……."

 아이의 표정이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 걸린 시간 3초. 화가 났달지 뭔가 잔뜩 불만스러워 보이는 리니아는 자신의 말을 못들은 듯 하였다. 어찌해야할까 엘리엇이 고민하는 사이에도 유진의 어쩐지 즐겁게 들리는 음성은 계속 이어진다.

 "요즘 도시 남자는 임신도 할 수 있어. 영화에서 나왔다구!"
 "대체 언제적 영화를 본거야…."

 그러게 말이다. 엘리엇은 머리가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유진을 상대하고 있는 노엘은 이미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표정이었다. 청산유수로 쏟아져 나오는 유진의 말을 어떻게하면 아이가 듣지 못하게 할까 고민하는 새 리니아는 조심스럽게 엘리엇의 팔을 빠져나갔다. 허리에 두 손을 얹은 자세가 당당하기도 하다.

 "엘리 삼촌은 삼촌이지 아빠가 아니야. 제멋대로 오해해서 말을 부풀리지 마!"

 신나게 혼자 떠들던 유진이 말을 멈추고 노엘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선명한 진홍빛 눈 두 쌍이 동시에 바라보면 수그러들만도 한데 아이는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게다가 엘리 삼촌은 남자고 임신 같은 건 못해. 애초에 남자가 어떻게 임신을 해? 오빠 바보지?"

 빠르게 이어지는 말에 잠시 어른들이 말을 잃은 사이 아이는 자신의 말을 마무리 했다.

 "바―보!"

 베, 하고 혀를 내민다. 잠시 후, 양호실에서 발작하듯 커다란 웃음 소리가 터져나와 복도를 지나던 사람들이 놀라 미끄러지거나 물건을 놓친다거나 하는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나 뭐라나.




 밤하늘 빛 머리카락이 굉장히 예쁜 아이였다. 보는 순간 당장에 귀엽다고 생각했다. 엘리 선생님의 딸이 아니냐고 바보같은 소리를 꺼낸 것은 순전히 그 애 탓이었다. 조금 놀려주려는 마음이었다. 엘리 선생님이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닌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냥 아이의 반응이 궁금했다. 뭐, 이렇게 삐져버려서 이름조차 직접 들을 수 없는 상황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결과는 제법 기분이 좋다. 아이는 화가 나서 울그락 불그락 한 얼굴도 귀여웠다.
 삼촌을 기다리는 건지 눈조차 마주치지 않겠다는 의지인지 고집스레 문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를 관찰하고 있자니 시간가는 것이 지겹지 않았다. 아직 12살이랬던가―, 어리다. 조금 더 나이가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자세히 살펴보면 키가 조금 크다 뿐이지 마냥 귀여운 인상이었다. 강아지마냥 커다란 검은 눈에 젖살이 떨어지지 않은 뺨이 아까의 소동으로 발그레하게 물들어 깨물어주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노엘보다는 약간 색이 옅은 듯한 밤하늘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려다 손을 물린 것이 몇번째인지 몰랐다. 자꾸만 시선이 가고 손을 뻗게 되는 것은 노엘과 닮은 머리칼 때문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노엘을 연상시키는 밤하늘 아래 아이의 생동감 넘치는 표정은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노엘이 아이의 반이라도 닮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과 함께가 아니면 한꺼풀 얇은 막을 씌운 듯 표정이 사라지는 노엘을 볼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함께 있어도 언제나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해서 보이지 않으면 사라진 것이 아닐까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곤 했다. 노엘이 자신의 시야 밖에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노엘의 붉은 눈이 이 꼬마처럼 자신을 똑바로 바라봐온다면―,

 "풋."
 "뭐, 뭐야! 왜 웃어!"

 일순, 아까의 상황이 생생하게 떠올라 웃어버린 유진이었다. 털을 곤두세운 고양이마냥 잔뜩 긴장해 있던 아이가 놀랐는지 당장에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아, 뭐야. 역시 귀엽잖아. 정말 귀여워. 와락 껴안아서 부비부비 해주고 싶어!

 "……."
 "…왜 그래?"

 자신의 생각에 질려 머리를 감싸쥔 유진을 향해 아이가 다가왔다. 숙인 시야 아래로 자그마한 손이 들어왔다. 나는 로리콘이 아니야. 마음 속으로 열번씩 외우고 고개를 들었다. 까만 두 눈이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
 "으왓?! 뭐, 뭐하는거야!!"

 아이를 꼭 끌어안고 토닥토닥해주었다. 당황한 듯 바둥거리는 것조차 그저 귀엽다고 하면 정말 변태가 되는걸까.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으로 한숨이 멈추질 않았다.

 그래, 귀여우면 됐지.

 "자장, 자장. 착한 어린이는 잘 시간이야. 자자. 자장자장."
 "뭐?! 아직 5시밖에 안됐다구! 왜 벌써 자! 역시 오빠 바보지?"

 바락 소리를 지르는 것도 귀엽다. 으와아아, 계속 귀엽다는 생각만 하고 있어! 유진은 계속 한숨을 쉬면서도 아이를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해 와락 끌어안고 부빗거리자 아이가 으부부 하며 손을 휘둘렀다. 손이 제법 맵다. 아파―라고 칭얼거리듯 말해보았다. 그러니까 놔, 라며 당장에 땍땍거리는 대꾸가 날아왔지만, 뭐 어떠랴. 성희롱이라고 선생님한테 혼나기 전에 놓아주면 되겠지. 그치만 귀여운 걸―….
 



 "이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집에 가려면 둘 다 깨워야 겠죠?"
 "…그래야지."

 붉은 노을이 하얀 양호실의 침대를 물들인 풍경 속에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잠든 소년과 아이는 분명히 사랑스러웠지만―, 얼굴이 굳어진 선생님의 표정에 어쩐지 뒷일이 걱정되는 노엘이었다.

'story in my world > famillies's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진] 어리광  (0) 2009.04.11
[노엘] 나른한 오후  (0) 2009.04.11
[깜짝이벤트] 공주님을 구하자!  (0) 2009.04.10
[노엘] 일상, 바라보다.  (0) 2009.03.31
기묘한 손님  (0) 2008.11.02
Posted by fad
,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경쾌하게 리듬에 맞춰 뛰었다. 또각 딱 또각 톡톡. 두꺼운 구둣굽이 보도블럭과 부딪쳐 작게 소리를 낸다. 아, 탭댄스용 징이라도 박는다면 더 좋을텐데. 그치만 그랬다간 안그래도 무거운 구두가 더 무거워지겠지~. 안돼안돼, 그러면 발목을 접질리고 말거야. 통통 괜히 폴짝폴짝 뛰었다. 신호가 안바뀌어. 그냥 파다닥 달려가고 싶지만 조금만 참자. 빨간 불 저리가고 초록 불 이리오렴! 흥얼흥얼, 어딘가 음이 미묘하지만 아무려면 어때. 아, 초록색이다! 아까부터 동동거리며 시동을 걸어뒀으니 발진 준비―, 땅! 엄마야!

 "아직 빨간불이랍니다, 체셔고양이님."

 언제나처럼 흐릿하게 웃고있는 시이씨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워와서. 우아아, 깜짝이야. 귀신! 뿌, 해도 그냥 빙글빙글. 웃으면 기분나빠. 오데트는 엄청 놀랐는데. 귀신처럼 소리없이 천사님이 내려온 줄 알았어. 하얗고 하얀 색. 천사님의 색깔. 반짝반짝해. 파닥파닥 흔들자 목이 땡기지 않게 되었다. 맨날 블라우스를 움켜쥐어서는 곤란해요, 천사님. 흥. 아, 진짜 초록불이다! 아까 초록색은 뭐였을까나? 신호등보단 낮았을까나아―. 다음에 찾아봐야지! 초록불보다 진한 초록빛. 나뭇잎인가. 두리번 두리번해도 신호등 옆에 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 대체 뭐였을까나~.

 "길은 알고 가는 겁니까?"

 뒤에서 쿡쿡 웃는 것 같은 목소리로 시이씨가 말했다. 언제나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그렇게 말을 해. 정말로 소리를 내서 웃고 있는걸까? 하고 고개를 돌리면 어느샌가 시치미를 뚝. 못됐어, 천사님. 천사님은 착해야하는데 오데트 짝궁인 하얀 천사님은 심술궂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오데트의 또다른 짝꿍, 또다른 천사님을 만나는 날이다. 다섯살이 되기까지 언제나 함께였던 다른 천사님은 오데트와 천사님이 다섯살이 되는 날 사라져 버렸다. 오데트는 다섯살 생일이 기억나지 않아. 천사님 얼굴도. 사실은 천사님과 함께였다는 시간이 전혀전혀 생각나지 않아. 깜깜한 밤이야. 천사님은 어떻게 생겼을까? 어떤 목소리일까? 뭘 좋아할까? 오데트처럼 인형놀이를 좋아하고 팔랑팔랑 예쁜 드레스에 두꺼운 통굽구두를 신었을까? 오데트랑 천사님은 얼굴은 조금 달랐지만 눈은 다른 색이었지만 정말로 한 쌍 같다고 엄마, 아빠가 그랬어. 그럴까? 오데트랑 천사님 한 짝일까? 원래 한짝이면 바로 알 수 있겠지? 만약 못 알아보면 어떻게 하지? 두근두근, 가슴이 뛴다. 퐁당퐁당 발걸음이랑 같이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어쩐지 태어날 때부터 오데트랑 하나였다는 천사님은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하얀 날개가 달렸을 것만 같아!





 "와아아─!!!!!!!"
 "이런, 뛰지 마세요. 또 넘어지잖습니까."

 하얀 천사님의 잔소리도, 오늘만은 참아줄게!

Posted by fad
,
 소녀는 무슨 일에건 쉽게 적응했다. 놀람과 어색함은 한 순간 뿐이다. 기쁨도 슬픔도 행복도 괴로움도 아주 일시적인 것 뿐이다. 알고 있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다. 그저 이미 한 번은 겪은 괴로움을, 이미 한 번은 느낀 슬픔을 다시 한 번, 더 크게 느낄 뿐이다. 소녀는 생각했다. 기쁜 일도 미리 알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부럽다고 생각했다. 아마쿠사 아키라. 리히트가 자신을 알고 두번째로 사랑한다고 생각한 사람. 모든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 시간 앞에 누구보다도 당당한 사람. 소녀는 울었다. 나도, 기왕 미래를 먼저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거라면 차라리, 행복도 미리 느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내가 살아온 이십 구년, 짧은 인생은 두 배 큰 슬픔이 두 배 많이 찾아와 결국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그런 구조였다. 어째서, 어째서 신은 그리도 가혹하신가. 소녀는 신을 믿고 의지하고 받드는 자였다.

'story in my world > in tokyo & seoul'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긴 꿈.  (2) 2009.06.29
오데트 홈즈Ordet Holmes  (0) 2009.04.05
죽음에 대한 15제 _ 6.자학  (0) 2009.02.01
온통 새하얀 빛의 천사  (0) 2009.01.08
리히트, 아키라. 만남.  (0) 2009.01.08
Posted by fad
,
  사각사각. 연필이 종이에 스치는 소리가 정겨웠다. 손을 멈추면 소리가 멎는 것이 아쉽지만 잠시 고개를 들었다. 방과 후에서 저녁식사 전까지 매일 시간을 보내는 하얀 양호실의 풍경이 노엘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눈부신 오후의 햇살이 창을 건너 흰 커튼에 드리우고 창 옆에 자리한 책상 앞에 앉은 역시 햇빛에 하얗게 빛나는 금발이 보였다. 간간히 밖에서 떠드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종이 넘기는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는 양호실의 풍경은 그림 같았다. 소리를 내는 것이 죄스럽다고 느낀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남몰래 하고 있는 느낌이다.
 다시 손안의 책으로 신경을 돌리는 노엘의 눈에 시계가 들어왔다. 네 시 반. 슬슬 돌아가야 저녁시간에 늦지 않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지만 조금 더 머무를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하는 것은 욕심일까. 노엘의 얼굴에 희미하게 아쉬운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책상에서 고개를 들지 않는 단아한 옆모습을 곁눈으로 훔쳐보고 멀리 둔 가방을 끌어당긴다. 꺼내놓은 책과 필기구를 정리하고 업무에 바쁜 선생님의 곁에 섰다. 

 “차 드실래요?”
 “아아, 고마워.”
 “…….”

 의료계에서는 인지도가 있는 의사인 엘리엇은 학교 양호교사 업무 외에도 이래저래 일이 많았다. 강의며 헬프로 바쁘게 돌아다니는 탓에 노엘은 매일 양호실에서 방과 후를 보내지만 엘리엇이 없는 경우도 잦다. 무슨 일인지 바빠 보이는 엘리엇의 머그컵에는 다 식은 커피가 반쯤 남아있었다.

 ―솨아.

 세면대에서 컵을 씻는 건 몇 번을 해도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된다. 학교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싱크대가 없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교무실에서 일을 돕는 때가 많았던 노엘에게는 가장 큰 불만사항 중 하나였다.

 “선생님―인가.”

 머그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노엘 자신도 이유를 모르는, 갑자기 튀어나온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문득 양호 선생님이 떠올랐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새하얀 백금 발에 흰 가운, 신경질적인 표정을 한 투명한 사람. 저도 모르게 손을 뻗게 되어서 자신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스스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몸을 사리게 된다. 그저 그 곁에 있는 것이 행복해서―.

 “오늘은 레몬밤으로 할까.”

 저 상태면 일을 다 끝낼 때까지는 안 드시겠지, 라고 덧붙였다. 양호실로 돌아가는 발소리가 아무도 없는 복도에 조용히 울렸다.

'story in my world > famillies's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진] 어리광  (0) 2009.04.11
[노엘] 나른한 오후  (0) 2009.04.11
[깜짝이벤트] 공주님을 구하자!  (0) 2009.04.10
나란히 낮잠을  (0) 2009.04.07
기묘한 손님  (0) 2008.11.02
Posted by fad
,
 기억의 시작은 어딘지 알 수 없는 숲이었다. 밤인지 어두침침한 숲은 어딘지 익숙해서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본다. 기억이 있는 듯 없는 듯 하지만 친숙한 곳이다. 앞서 걷던 검은 로브의 누군가는 청년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함께 멈추었다. 발길을 멈추게 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지 쯧, 하고 혀를 찬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일이지만 일단 목소리가 낮은 걸 보아 남자인 듯한 누군가─는 청년의 앞에 되돌아와 팔짱을 꼈다. 가만히 노려는 시선이 검은 로브에 가려 얼굴도 보이지 않는데도 강렬하게 느껴진다. 조금 섬찟하다고 생각하며 청년은 헤죽, 웃었다.

 "안녕?"

 검은 로브에 휩싸여 있는 반응을 정확히 살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불쾌해 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거이거, 뭔가 잘못한건가? 작게 한숨 소리가 난 것도 같았다.

 "귀찮아졌군."

 뭐가 귀찮아졌다는 것일까. 이해는 가지 않지만 청년은 상대방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상대방이 무엇을 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말그대로 '아무것도 알고 있는 것이 없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이곳이 어디인지 하는 문제는 미뤄놓고라도 일단 자신의 이름부터 기억나지 않아서야. 하지만 청년의 앞에 선 그는 그런 사정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조금 빠르게 말했다..

 "내 이름은 게이트(Gate). 다른 세계에서 넘어오는 자들을 안내하기 위한 사자다."
 "여기가 어딘지 궁금하겠지. 이 곳의 이름은 웨버랜드(W.ever Land)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상식이니 기억해두도록."

 에헤. 청년은 다시 히, 하고 웃어보였다. 어찌보면 그냥 바보같아 보이는 표정에 게이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로브 탓에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게이트는 청년도 알아차릴 정도로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죽, 말을 늘어놓았다.

 "그대가 살던 세계는 어떤지 모르나 웨버랜드에는 여러 종족이 있지. 요정족으로 페어리와 드워프, 임프. 그리고 수인족이라 하는 동물과 융합한 사람들이 있다. 요정족의 페어리는 15~25cm정도 되는 작은 키의 소인족으로 밝고 낙천적인 성격에 진지해지질 못하는 소란스러운 종족이지. 동정심이 많아서 사람들 부탁을 잘 들어주긴 하지만 사고체계가 어떻게 된건지 일반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대책을 내놓기 때문에 가능하면 부탁하지 않는 쪽이 좋다. 드워프는 손재주가 굉장히 뛰어난 난쟁이족이다. 평균 키가 120cm정도 밖에 안되지. 다들 수염마니아에 술을 좋아하지. 드워프들이 만드는 것들은 기능성도 내구성도 좋다. 임프는 페어리보다는 조금 크지만 50cm를 넘지 않는다. 작지. 박쥐날개에 푸른색이나 녹색계열 피부색을 가졌다. 위험한 장난을 좋아하니 가능하면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아. 수인족은 말그대로 인간과 동물이 합체된 형태인데 주로 육지형, 조류&파충류형, 해양형으로 분류된다. 이쪽은 대충 들으면 어떤 기준인지 알겠지? 육지형은 육체파, 해양형은 마법파, 조류&파충류형은 그 중간으로 원거리 공격 무기도 선호한다."

 다다다다다다 내뱉어진 긴 설명에 청년의 눈이 크게 뜨였다. 흐에─, 하고 운을 떼더니 한마디 한다.

 "숨 안차?"
 "그래서,"

 청년의 말 뒤로 곧장 즉각적으로 다시 말이 이어진다. 아무래도 그냥 숨을 고른 것 뿐인 모양이었다. 청년은 얼떨떨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서?"
 "지금부터 골라라. 어떤 모습으로 갈 것인가. 네가 이 쪽을 구경하고 고르겠다고 했지만 그냥 지금 하는 게 나을 듯 하다."

 청년은 질문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두 눈을 껌뻑였다. 바보같이 벙찐 얼굴로 쳐다보는 모습에 게이트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네가 원하는 걸 고르면 돼."
 "모르겠는데."
 "…끙."

 게이트는 고민에 잠겼다. 청년이 멀뚱멀뚱 쳐다보고 침묵이 지났다.

 "아."
 "응?"
 "지금 그대로 가는 것도 괜찮다."

 다시 껌뻑껌벅. 청년의 시선에 게이트는 또 끙, 앓는 소리를 했다. 뭔가 설명방법을 찾는 지 말이 없는 게이트를 향해 청년은 툭 한마디 내뱉었다.

 "그냥 갈래."
 "하?"
 "간다구."
 "……좋아, 그럼 됐다."

 푹, 하고 한숨쉬는 게이트를 청년은 의아한 얼굴로 올려다 보았다. 괜히 짜증스레 흥, 하고 콧방귀를 뀐 게이트는 청년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그리고는 잠시 멈춘다.

 "왜?"
 "보기보다도 가늘군."

 헤, 청년이 웃는다.

 "그래?"

 그리고는 자기도 한번 잡아보았다. 오오, 하고 혼자 감탄하는 바보짓에 게이트는 다시 절래절래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이만 보내주지. 하지 마라!"

 신기한 듯 로브를 들춰보는 청년의 손을 탁 쳐내고 게이트는 다시 팔짱을 꼈다. 여전히 싱글거리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기억도 없는 게 너무 당당하잖아.

 "가면 뭐 좋은 거 있어?"
 "모른다."
 "그럼 나 여기 있으면 안 돼?"
 "……."

 게이트의 시선이 얼굴에 곧장 느껴져서 청년은 괜히 어깨를 으쓱하며 시선을 피했다.

 "네 이름은 에스트다. 에스트 아이렌."
 "에?"
 "나이는…원래는 20살이라고 들었던 것 같군. 지금은 17~8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그 정도다."
 "어떻게 알아?"
 "다 방법이 있다."

 부. 청년의 볼이 부었다. 어떤 사정으로 넘어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선한 미소를 가졌던 청년은 자신의 이름을 에스트 아이렌이라고 소개했었다. 장난기 가득한 눈빛이 아니면 표정 탓에 나이가 많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갓 스무살이 넘은 청년이라고 보기엔 너무…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띄고 있었다. 차근히 설명을 듣고 곰곰히 생각한 뒤 대답하는 모습은 누가보아도 믿음이 갈만한 청년이었다.
 완전히 이 곳으로 넘어오자 외양부터 훨씬 가늘어진데다가 이제보니 기억도 잃었지, 하는 짓도 어린애 같아져서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이제 헤어질 시간.

 "웨버랜드가 네게 즐거운 곳이 되길 바라지."
 "될거야."

 자신만만하게 웃는 얼굴은 조금 전과 닮은 것도 같다.

 "이대로 죽 가면 작은 마을이 나온다. 열심히 돌아다녀봐라. 도와줄 사람이 있을테니. 부탁이니 말썽은 부리지 말도록."

 에스트는 그대로 사라지는 게이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쩐지 웃은 것 같은데. 아닌가?"

 고민해 보아도 대답해 줄 사람은 모습을 감추었다. 에스트는 흠, 하고 게이트처럼 팔짱을 끼었다가 발을 땠다.

 "가면 뭔가 있겠지, 뭐."
Posted by fad
,

光峨 美哀 01


무엇을 위해

written by. 我捐

 

 

 


이름만 들어온 사막이라는 곳을 찾았다. 사막마저 당연하다는 듯이 존재하는 도원에 조금 감사한 마음을 가져본다. 공격하듯 내리쬐는 강렬한 햇볕과 숨 막히는 더위에 고스란히 노출되자 마치 그 안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뜨거운 바람이 온 몸을 옭아매는 것 같았다.

“이런 곳이구나.”

어쩐지 즐겁다. 소리 내어 웃어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몸에 밴 겸양이 누가 보기라도 하듯 머리를 긁적이게 했다. 코만 마르지 않는다면 계속 여기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마르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냄새에 둔해지는 생소한 감각이 재밌었다.

“덥다.”

산책을 하듯 사막을 걷는다. 모래 속에 발이 푹푹 빠지고 숨쉬기조차 어려운 메마른 공기에 빠르게 지쳐가는 것이 느껴졌다. 무의식중에 혀를 내밀었다가 모래를 한바가지 씹었다.

‘물을 가져올 걸 그랬나.’

처음 찾은 사막인데다 시간감각 없는 것은 어디서도 마찬가지여서 미애는 지금 자신이 얼마를 걸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발자국이라도 남아있으면 얼마나 왔는지 짐작이라도 해보련만. 거센 바람에 지형이 바뀌는 곳에서 걸어온 흔적을 되짚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확실한 것은 슬슬 한계가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본래 개이기 때문에 땀이 적은 편인데도 온몸이 물기로 축축했다. 뜨거운 태양열에 현기증이 일었다.

“돌아가야 하려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째서인지 돌아갈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앞을 뚫어져라 바라보아도 거리가 가늠되지 않는다. 모래바람이 시야를 가려 그나마 가까운 거리도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코는 바싹 말라 마비된 지 오래였다. 앞으로 더 간다고 뭔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가고 싶은 곳은 없었고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에서 목적지가 있다한들 도착할 수 있을 리도 없었지만……,

“돌아가야지.”

그리고 걸었다. 보통은 한걸음 내딛으면 풍경이 바뀌는데 변하지 않는다. 이상하다. 의아하긴 했지만 계속 걷는다. 언젠간 바뀌겠지.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몸은 그리 느긋한 상황이 아닌 모양이었다. 목이 타는 것도 열을 받아 온몸이 뜨거운 것도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듯 했지만 생각대로 현실이 바뀌어주진 않았다. 세상이 흔들렸다.

“어?”

얼굴에 닿은 모래가 뜨겁다. 쓰러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의식이 까맣게 꺼져 들어가는 때였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낯선 천장. 일어나려는 것을 제지당했다.

“누워있어. 아직 어지러울 거다.”

베이스 톤의 낮은 목소리와 함께 이마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눈만 돌려 바라보자 시원스러운 미소의 청년이 눈에 들어온다. 미애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정확히는 일어나려다 다시 막혔다.

“어허, 안된다니까.”

여전히 기분 좋게 웃는 얼굴에 전혀 개의치 않는 다는 말투였지만 어쩐지 거역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미애는 일어나기를 포기하고 조용히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폐를 끼친 모양이네요.”

그러자 청년이 어이없다는 듯 허, 하고 웃었다.

“제일 먼저 하는 말이 그런 거야?”
“뭔가 잘못됐나요?”

보통 저런 질문을 할 때는 당황이라거나 호기심이라거나 하는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눈앞의 뻣세 보이는 하얀 머리칼의 청년은 여전히 싱글싱글 웃고만 있다. 독특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미애는 웃었다. 그러자 청년의 입 꼬리가 더 올라간 것 같았다. 미묘한 변화라 확실하진 않았다.

“보통은 여기가 어디냐는 질문이 먼저 아닌가? 내가 누구냐, 던 가.”

그 말에 미애가 오히려 웃었다. 아, 물론 아까부터 웃고 있었다. 다만 조금 진심이 되었을 뿐이다.

“그렇습니까.”
“그렇지.”

보통은 그렇다는데 할 말은 없다. 그리고 청년 쪽에서는 말이 없었다. 대화의 흐름을 끊어버린 것 같아 조금 당황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어 미애는 화제를 바꾸었다.

“죄송합니다, 물 좀 주실 수 있을까요?”
“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내미는 물 컵에 잠시 대꾸할 말을 잃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다시 웃는다.

“일어나겠습니다.”

상체를 일으키는 순간 머릿속이 핑글 돌았지만 무시하고 그가 내민 컵을 받아 쥐었다. 깔깔하던 목에 미지근한 물이 넘어가자 조금 긍정적인 기분이 되는 것도 같다. 물 좀 마신다고 그렇게 된다면 살아오며 지금까지 한 모든 쓸모없는 일은 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테지만. 한 모금씩 꼴깍꼴깍 마시는 것을 참을성 있게 지켜본 청년은 미애가 절반정도 마시고 더 이상 컵을 입에 댈 기미가 안보이자 곧장 컵을 빼앗아 가더니 미애의 어깨를 잡았다. 똑같이 웃는 표정인데 뭔가 단호하다.

“자, 도로 눕자?”

이런,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미애의 난처한 표정은 못 본건지 못 본 척 하는 건지 청년은 컵과 수건을 적시던 대야를 들고 방을 나가버렸다.

“나가면―, 혼나려나.”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는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돌아섰다. 보내도 되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본인이 안 내켜 하는 것을 붙잡을만한 핑계가 없었다.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서휘도 처음 보는 영물을 끝까지 챙겨줄 정도로 그저 맘씨가 좋진 않다.

“아.”
“왜 그래?”

가볍게 으쓱하고 돌아선다.

"이름 물어보는 걸 깜빡했어."
"뭐?"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지만 상대방의 분위기에 휩쓸린 모양이라고 생각하니 말이 된다. 따로 상기를 시켜주었는데도 그런가요, 라며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다음에 또 만나겠지, 뭐."

유휘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이 시야 안에 들어왔지만 휘휘 넘겨버린다. 거기에 해줄 말은 없는지 그저 고개를 젓고는 긍정의 말을 남긴다.

"그래, 도원에 머무르는 한 곧 보게 될거다."
"그런거지."

유휘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가자 시선이 따라왔다.

"은휘한테 갈건데, 같이 갈래? 아니, 같이 가자."
"질문이 아니네."
"너한테 질문을 하느니."
"너무한데."
"준비…해서 나올테니 기다려."
"그래."

준비하고 나오라고 하려다가 따로 준비가 필요없음을 깨닫고는 말을 바꾸었다. 이 곳이 인간세상과는 달리 태평스럽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또 잊고 있었다. 얼마나 지나면 적응하려나. 수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가도 전혀 변함이 없는 서휘의 뒤로 햇빛이 하얗게 드리웠다.

Posted by fad
,

야야야, 뭐하는 짓이야, 비켜.

으르릉, 해보았지만 지나치게 서로에게 익숙한 파트너는 그런 지아의 반항을 완전히 무시하곤 빠르게 옷을 걷어 올렸다. 방심한 사이에 어느 샌가 긴 머리카락을 잡아매고 있던 끈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공들여 관리해온 머리카락이 사락사락 사방으로 흩어졌다.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손에 감고 키스를 해오는 바람에 거부할 틈도 없이 입술이 맞닿았다. 고개를 흔들며 밀어내어도 막무가내로 몸을 붙여왔다.

이자식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애인 있다며, 잣샤!!!!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수법이 뻔하다. 입을 여는 순간 혀가 밀고 들어올 것이 당연했다. 힘으로 밀쳐내야 하건만 오랜만에 다른 사람의 손길을 접한 몸은 흐믈흐믈해져선 힘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되는데, 안되는데.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은 이미 뒷수습을 어떻게 하나, 까지 가있다. 적당히 욕구를 풀어줬어야 하는 건데, 하고 후회해보아도 이미 늦었다. 집요하게 지아의 예민한 부분을 공략하는 손길에 반쯤 눈이 풀릴 지경이었다. 그대로 끝까지 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안 돼, 라고 마지막으로 이성의 끈을 당겨 손을 들었다. 더듬더듬 올라간 손끝에 털 뭉치같이 보들보들한 감촉이 닿자 망설임 없이 잡아당겼다.

“윽.”
“정신이 드냐, 인마.”

헉헉, 작게 숨을 몰아쉬는 지아의 얼굴을 화아는 마치 처음 본다는 듯이 말가니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이 녀석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아는 숨도 고를 겸 한숨을 포옥 내쉬고는 발로 화아를 걷어내고 일어났다. 화장실에 가야한다. 이대로는 내가 덮치고 말거야. 혼자 고개를 휘휘 저으며 한걸음 옮기는데 다시 허리를 잡혔다. 퀭한 눈으로 생각에 잠긴 듯 앞만을 응시하던 화아가 매달리듯 붙어있었다. 부쩍 말라서 안쓰러운 형상의 화아가 그러고 있으니 전처럼 밟아주고 외면할 수가 없는 지아였다.

“야, 놔봐.”
“화장실 좀 가자.”
“야.”
“어이.”

대답한마디 없다. 이걸 어쩌나. 머리를 토닥토닥 쓸어주며 떨어져라, 라고 속으로 주문을 외워도 그대로다. 이걸 어쩌나. 오늘의 화아는 뭔가 평소와 달랐다. 물론 이렇게 병든 닭 몰골을 하고 있는 것부터가 평소와는 많이 달랐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뭔가 지아가 함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다. 대체 뭐지.
머릿속으로는 이것저것 고민을 해보면서 일단 화아를 달고 침대에 가서 앉았다. 질질 끌려오는 폼이 영락없이 떼쓰는 어린애. 방에 들어오자마자 덤벼들어서 떨어지지 않는 꼴을 보아하니 이 녀석도 욕구불만인가 싶다. 곤란한데.

“야.”
“기분 좋게 해줄 테니까 좀 놔봐.”

어떻게? 라고 묻는 얼굴로 곁눈질 한다. 아아―, 그래서 이상했구먼. 언제나 질린다 싶을 정도로 똑바로 눈을 마주쳐오던 화아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지아의 눈을 보지 않았다. 얼핏 스치지 조차 않았다. 아니, 그전에 얼굴이나 똑바로 봤던가? 지아는 잠시 눈을 크게 뜨고 화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어떤 심정의 변화가 있으면 이런 본능적인 행동이 바뀔까. 화아는 지아의 표정이 변하자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일단은 이 녀석 기분을 풀어주는 게 먼저겠지. 후, 하는 숨과 함께 생각을 날려버리고 팔을 잡아당겼다.

“일어나, 이 녀석아.”
“왜.”

고집 피우는 중에는 단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는 화아지만 어째서인지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지아의 얼굴은 바라보지 않는다. 지아는 조금 생각을 바꿔보았다. 혹시 나한테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안타깝게도 이번역시 대답을 스스로 내릴 수 있었다. 자꾸 다른 곳을 쳐다보긴 해도 아예 고개를 돌리고 외면할 화아는 아니다. 지아는 정말 이대로 화아를 붙들고 대체 무슨 일이냐고 심문하듯 다그쳐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그저 가슴 한구석에 묻어둔 체 조용히 화아의 바지버클을 끌러낼 뿐이었다. 화아는 그 손길을 전혀 거부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았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문득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 이번만큼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지아에게는 강렬하게 인식되었지만 그것은 화아로서는 불가능한 게 아닌가 싶었을 던 맑고 평범한 시선이었다.

“시우야.”
“?!”

나직한 목소리에 지아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놀라 고개를 드니 처음 보는 표정의 화아가 있었다. 요즘의 화아는 새로움의 연속인지라 딱히 더 놀랄 일도 없다고 생각했건만 실수였다. 서글서글한 표정의 화아라니. 저건 대체 누구야. 본명을 부른 것에 한번 놀라고 화아의 표정에 놀라고 나니 지아로서는 더 이상 뭘 해야 할 지 모를 심정이었다. 그렇게 눈을 마주친 체 잠시간의 정적이 지났다.

―덜컹.

갑작스런 소리와 싸늘한 찬바람이 두 사람을 덮쳤다.

“힉?!”

저도 모르게 파다닥 화아에게서 떨어진 지아와

“카르노멘.”

묘하게 침착한 화아. 평소와 닮은 듯 전혀 다른 풍경에 낯선 얼굴이 들어섰다. 아니, 지아에게 이 사람을 낯설다고 할 수 있을까. 분명히 자주 본 사람은 아니지만 강렬한 기억의 한 귀퉁이에 남아있는 얼굴이다. 지아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그리고 지아가 파래지는 만큼 더더욱 강렬해지는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세찬 바람에 정신없이 팔락거렸다. 언제나 의미모를 미소를 띠고 있는 예쁘장한 얼굴이 오늘만큼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뿐이랴. 살기 띈 시선을 받은 지아는 ‘죽었다,’는 느낌이었다. 속으로는 온갖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밖으로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물러서고 싶은데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으아, 큰일 났다.’

물론 위기 상황에도 생각만큼은 천연덕스러운 것이 지아의 특징이긴 하다. 하지만 몸은 바짝 긴장해서 얼어있는데 머릿속이 태연한 괴리감 가득한 상황은 전혀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상황정리에만은 도움도 되었지만.

‘제발 긴장 좀 하자, 나님. 그나저나 이걸 어쩐다. 아니, 그 전에 이 인간은 대체 왜 남의 방 창문을 넘어와서 분노해 있는 거야. 어, 잠깐. 진짜 그러네. 대체 왜지?’

아무리 태연하게 생각을 이어간 다해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 법이다. 여전히 살벌하다 못해 눈빛으로 바퀴벌레도 잡을 듯 한 카르노멘이 다가오고 있었고, 몸은 안 움직였고, 화아는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러고보니 아까……,

“힉?!”

저도 모르게 파다닥 화아에게서 떨어진 지아와

“카르노멘.”

묘하게 침착한 화아.

설마, 설마하니 사귄다는 게……?’

지아의 곁눈질을 못 본건지 화아의 시선은 카르노멘 붙박이였다. 카르노멘이 어떤 모습으로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는 신경 쓰이지 않는 걸까. 정말 신경 안 쓰이니, 화아?! 분위기는?! 걸음도 점점 빨라지는데?! 잠시 울고 싶은 기분이 된 지아였다. 걸어오며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들자 무슨 장치가 되어있는 건지 무언가 쏘아져 나왔다. 동체시력도 운동신경도 좋은 지아지만 바짝 얼어 있다가 바로 움직이는 것은 무리. 반사적으로 피하려고 움직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약간 빗나간 탓인지 엄청나게 아팠다.

“으갹!”

정확히 무슨 용도의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덕분에 얼굴근육 빼곤 움직일 수 없어진 지아는 눈물만 찔끔, 짜냈다. 어쩐지 놀란 표정의 화아가 눈에 들어왔다. 쟨 또 왜 저래. 뭐 별일은 없는 모양이니 다행, 이라고 생각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눈빛이 무서웠다. 힐끔, 눈치를 보고 있자니 다시 지팡이의 끝이 같은 곳을 향해왔다. 설마, 또?! 질린 지아의 표정에 보답하듯 뭔가가 날아왔다.

‘보이는 데 못 피하니 미칠 노릇이군.’

괜히 헛생각을 하며 현실도피 해보았다. 당연히 아팠다. 맞은 데만 아픈 게 아니라 맞는 순간 온몸을 관통하는 통증에 저도 모르게 끄아악, 비명을 지르며 침대 위를 구르게 되었는데도 지아의 딴생각은 그치지 않았다. 그래, 심지어 이런 장면을 생중계로 포착해내고 놀라워 할 정도로. 그것이 비록 고통을 외면하기 위한 필사적인 딴생각일지라도 그렇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화아가 눈물을 흘린다. 즉, 울고 있었다.

크게 뜨인 두 눈, 작게 벌어진 입, 놀란 기색이 역력한 화아의 얼굴에 두 줄기 눈물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카르노멘은 지아에게 집중한 나머지 보지 못한 듯 했다. 좀 보라고 하고 싶었는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괴성뿐이어서 화가 나는 지아였다.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다. 울지 마, 라고 구박해줄 수 없어서 답답했다.

“그만.”

작은 목소리에 반듯이 정장을 차려입은 신사가 뒤돌아섰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담긴다. 지아도 몇 번 본 기억이 없는 화아의 눈물이라니, 놀라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도, 두 사람이 ‘연인戀人’이라면 절대로 놀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기왕이면 난 좀 보내주고 놀라면 더 좋겠지만.’

본인도 이상한지 뺨을 감싸는 화아의 눈에 자꾸만 자꾸만 물기가 차올랐다. 차다 못해 자꾸만 바깥으로 넘치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그렇다고 막지도 못하는 손은 그저 이마나 뺨을 더듬으며 자리를 잡지 못했다. 뭔가 말을 할 듯 입을 벌렸다가 다물고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이는 꼴이 어지간히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흐…….”
“화아.”

작게 들려오는 신음소리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저도 모르게 눌러 삼킨 것일 테다. 카르노멘의 입에서 나직이 화아의 이름이 읊어졌다. 뭐라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카르노멘은 화아의 앞에 앉았다. 잔뜩 움츠린 화아의 어깨에 한손을 얹고 얼굴로 손을 뻗었다. 카르노멘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화아의 뺨에 닿자 놀란 듯 확 얼굴이 물러났다. 하지만 곧바로 어깨를 붙든 손이 힘을 주어 화아의 몸을 끌어당겼다. 별로 힘을 주고 있지 않았던 화아는 카르노멘의 강한 손에 끌려가버렸다. 물기어린 뺨에 엷은 냉기를 머금은 정장칼라가 닿았다. 빠져나가려 몸부림치는 화아를 카르노멘의 양손이 꼭 붙들었다. 꼭 껴안긴 형상이 되어버린 화아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자꾸만 눈물이 아니라 울음이 터지려고 했다. 카르노멘을 마주 안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벗어나지도 못한 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화아는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았다. 손을 잡자 팔이 떨려오고 떨림은 온몸으로 번져서 어느 샌가 화아는 펑펑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싫은지는 한마디 언급도 없이, 싫었노라고, 정말 싫었노라고 계속해서 되뇌고 또 되뇌며 짜내듯 터뜨리듯 카르노멘의 가슴에 울분섞인 눈물을 토해내었다. 카르노멘은 한마디 대꾸도 없이 그저 화아의 등을 쓸고 또 쓸어주었다. 그렇게 저녁은 밤이 되고 있었다.




 

Posted by fad
,
  불안하다. 좀처럼 표정이 굳지 않는 지아의 얼굴이 심각했다. 눈앞에는 작게 미간을 찌푸린 모습으로 화아가 널부러져 있었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붉은 머리칼은 아직 그 빛을 잃지 않았지만 결은 푸석했다. 안그래도 하얀 얼굴은 어느샌가 창백하게 색이 빠져 병색이 완연했다. 눈밑이 검게 물들고 입술은 마른데다 전과는 다르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을만큼 말라버렸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화아가 원체 고민하는 일이 없어 신경쓰지 않았던 것이 함정이었다. 세상에 무심해 어느 것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화아였기에 표현이 적다해서 세심하게 돌봐주지 않아도 되었었다. 어디서부터 틀어진 걸까.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지아는 자신을 탓해보았다. 이렇게 티날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땀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어주고 싶었지만 그것마저도 힘겹게 든 수면에 방해가 될까 시도할 수 없었다. 지아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입술을 깨물고 지켜보는 것 뿐이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인지는 몰랐다. 평소와 똑같이 먹고 똑같이 나가서 똑같이 들어왔기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화아가 먹은 것을 단 하나도 소화시키지 못하고 전부 토하고 있다던지, 매일같이 침대에 누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던지. 그것도 아니면 평소 같았으면 쉬지않고 공을 튀기고 있을 시간에 태양 아래 죽은 듯이 늘어져있다는 것까지도. 심지어 부르러 가지 않아도 꼬박꼬박 제시간에 들어온다는 사실까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연아마저도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무엇이 문제인지는 깨닫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아끼는 한가족이라 여기는 친구들이었는데. 화아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다른 칠인의 정령아들은 각자 충격에 빠져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창을 통해 드는 바람에 지아는 정신을 차렸다. 안그래도 약해진 몸이라 감기 들기 쉬울 터인데 창문을 열어놓고 잠들다니. 지아는 작게 고개를 젓고 발소리를 죽여 창가에 섰다.

  "……ㅡ노멘…?"
  "미안. 깨웠네."

  전혀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화아가 목소리를 냈다. 지아가 창문을 닫는 사이 화아는 부시시 몸을 일으켰다. 지아는 위태로워보이는 화아를 붙들었다.

  "좀 더 자둬."
  "됐어."

  지아는 자신을 밀어내고 창을 여는 화아를 보며 결국 들었던 손을 내리는 수 밖에 없었다. 결코 따뜻한 날씨가 아닌데 화아는 절대 창문을 닫으려 하지 않았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화아를 향해 화도 내보고 얼러도 보았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무엇이든 정령아들의 한마디면 투덜거리긴 해도 어기지 않는 화아였지만 이번만은 고집을 피웠다. 곁에 누군가 붙어있는 것조차 거부했다. 창문을 열고는 지아를 방밖으로 끌어낸다. 단호한 손길을 지아는 떨쳐내지 못했다. 닫힌 문에 기대어 지아는 참았던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다 기운 빠지는 느낌이야……."





  화아는 침대에 걸터앉아 허공을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창 밖이지만 촛점이 맞지 않는 화아의 눈은 하늘을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기다리면 올 것이다. 그는. 분명히. 알고 있는데 어째서 이렇게 목을 매고 기다리게 되는 것일까. 반드시 그는 올 것인데. 기다리지 않으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안달하게 되었다. 어째서지, 어째서 이렇게 불안한 것일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온몸에서 힘을 빼자 상체가 풀썩 침대 위로 쓰러졌다.

  친구들은 이래저래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사실 화아는 어째서인지 먹은 것을 소화시킬 수 없다는 점을 빼고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가끔 견딜 수 없이 불안하고 화가 났지만 그것은 그 나름대로 견딜만 했다. 갑자기 눈물이 나는 때도 헛구역질이 올라올 때도 화아는 그냥 몸에 뭔가 문제가 있겠거니 했다. 아무 생각 없이 허공을 보고 있는 중에 일어나는 일이니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병원을 가보긴 해야겠지만 조금 미뤄도 큰 문제가 생길 병은 아니겠거니 생각했다.

  카르노멘의 얼굴을 보면 반가웠다. 그저 무뚝뚝하게 맞을 뿐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시간. 언젠가부터 그 이후에는 허전함이 찾아왔지만 그런 것쯤은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행복이었다. 커다란 대가가 뒤따랐지만 그럼에도 놓을 수가 없었다. 마주친 두 눈이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어도 다른 곳에 넘겨줄 수는 없었다. 은빛 속눈썹에 그늘진 은보라빛 눈이 싱긋 미소짓고 있었다.

  "카르노멘."
  "안색이 많이 안좋아. 병원, 아니면 양호실에라도 가봐야 하는 것 아니야?"
  "조만간 갈거야."

  웃으며 머리를 쓸어넘기는 카르노멘의 손에 살짝 머리를 부볐다가 몸을 일으켰다. 상체를 일으키자마자 입술을 부딪쳐 들어간다. 짧은 입맞춤으로 밀착된 몸을 더더욱 붙이며 속삭였다.

  "하자."
  "안 돼. 곧 가봐야해."
  "잠깐만이라도."

  말하는 중에도 손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카르노멘의 교복 상의 자켓은 이미 반쯤 벗겨져 있었다. 카르노멘의 손이 화아의 손목을 붙들었다. 화아의 얼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왜."
  "안된다니까."

  사탕뺏긴 꼬마처럼 꽁해진 얼굴을 쓰다듬으며 카르노멘이 웃었다. 어린아이를 어르는 투로 속삭이며 화아를 떼어놓는다.

  "주무실 땐 창문을 닫아 둬. 감기들라."
  "올거잖아."
  "잠궈도 들어올 수 있어."
  "그래도 싫어."
  "어린애구나."
  "그러니까 하자."
  "안 돼."
  "……."

  더이상 말하진 않았지만 화아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카르노멘은 그의 어깨를 도닥도닥 두드려주곤 몸을 일으켰다.

  "잠깐 짬이 생겨서 왔을 뿐이니까. 이제 가야해."

  '가까이서 상태를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지. 병원에 가라고 한다고 들을 것 같지는 않고 따로 의사를 부르는 편이 나을 것 같군.'

  카르노멘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화아에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고 그대로 사라졌다. 또 방에 혼자 남은 화아는 퀭한 눈으로 카르노멘이 서있던 자리를 바라보다가 다시 침대 위로 쓰러졌다. 붉은 머리카락이 하얀 시트 위로 흐트러졌다.





  처음 그와 '만난' 것은 봄날이었다. 변덕스러운 날씨 중에서 유난히 포근하고 따뜻하던 그 날, 화아는 봄의 한복판에서 '겨울'을 보았다. 한 겨울의 메마른 눈이 그곳에 흩날리고 있었다. 말도 안되는 환상같은 풍경에 화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계속해서 쫓아다니던 시선도 신경쓰였지만 그 때의 행동은 단순히 본능이었다. 있을 수 없는 것이지만 아름다워서 놓칠 수 없다는 본능적인 움직임. 엷게 깔린 가루눈, 별 없는 밤의 하현달.

  온기어린 물방울이 뺨을 타고 떨어져 머리카락 속으로 스며들었다. 하얀 천장이 눈이 시려 옆으로 돌아 누웠다. 있지도 않은 손톱이 손바닥에 배길만큼 주먹을 꽉 쥐었지만 물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흐릿해지는 시야가 분해서 화아는 눈을 있는대로 부릅떴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화아의 눈물을 닦아줄 하얀 손도 그의 곁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윽."

  아무리 자존심을 세워봐도 흐르는 눈물은 멎지를 않아서 화아는 결국 웅크리고 말았다. 터질 듯한 마음에게서 등을 돌리고 숨죽인 울음을 삼키다가 체해 밭은 기침을 토하며 침묵 속에 침잠해간다.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Posted by fa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