光峨 美哀 01


무엇을 위해

written by. 我捐

 

 

 


이름만 들어온 사막이라는 곳을 찾았다. 사막마저 당연하다는 듯이 존재하는 도원에 조금 감사한 마음을 가져본다. 공격하듯 내리쬐는 강렬한 햇볕과 숨 막히는 더위에 고스란히 노출되자 마치 그 안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뜨거운 바람이 온 몸을 옭아매는 것 같았다.

“이런 곳이구나.”

어쩐지 즐겁다. 소리 내어 웃어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몸에 밴 겸양이 누가 보기라도 하듯 머리를 긁적이게 했다. 코만 마르지 않는다면 계속 여기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마르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냄새에 둔해지는 생소한 감각이 재밌었다.

“덥다.”

산책을 하듯 사막을 걷는다. 모래 속에 발이 푹푹 빠지고 숨쉬기조차 어려운 메마른 공기에 빠르게 지쳐가는 것이 느껴졌다. 무의식중에 혀를 내밀었다가 모래를 한바가지 씹었다.

‘물을 가져올 걸 그랬나.’

처음 찾은 사막인데다 시간감각 없는 것은 어디서도 마찬가지여서 미애는 지금 자신이 얼마를 걸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발자국이라도 남아있으면 얼마나 왔는지 짐작이라도 해보련만. 거센 바람에 지형이 바뀌는 곳에서 걸어온 흔적을 되짚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확실한 것은 슬슬 한계가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본래 개이기 때문에 땀이 적은 편인데도 온몸이 물기로 축축했다. 뜨거운 태양열에 현기증이 일었다.

“돌아가야 하려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째서인지 돌아갈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앞을 뚫어져라 바라보아도 거리가 가늠되지 않는다. 모래바람이 시야를 가려 그나마 가까운 거리도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코는 바싹 말라 마비된 지 오래였다. 앞으로 더 간다고 뭔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가고 싶은 곳은 없었고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에서 목적지가 있다한들 도착할 수 있을 리도 없었지만……,

“돌아가야지.”

그리고 걸었다. 보통은 한걸음 내딛으면 풍경이 바뀌는데 변하지 않는다. 이상하다. 의아하긴 했지만 계속 걷는다. 언젠간 바뀌겠지.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몸은 그리 느긋한 상황이 아닌 모양이었다. 목이 타는 것도 열을 받아 온몸이 뜨거운 것도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듯 했지만 생각대로 현실이 바뀌어주진 않았다. 세상이 흔들렸다.

“어?”

얼굴에 닿은 모래가 뜨겁다. 쓰러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의식이 까맣게 꺼져 들어가는 때였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낯선 천장. 일어나려는 것을 제지당했다.

“누워있어. 아직 어지러울 거다.”

베이스 톤의 낮은 목소리와 함께 이마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눈만 돌려 바라보자 시원스러운 미소의 청년이 눈에 들어온다. 미애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정확히는 일어나려다 다시 막혔다.

“어허, 안된다니까.”

여전히 기분 좋게 웃는 얼굴에 전혀 개의치 않는 다는 말투였지만 어쩐지 거역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미애는 일어나기를 포기하고 조용히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폐를 끼친 모양이네요.”

그러자 청년이 어이없다는 듯 허, 하고 웃었다.

“제일 먼저 하는 말이 그런 거야?”
“뭔가 잘못됐나요?”

보통 저런 질문을 할 때는 당황이라거나 호기심이라거나 하는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눈앞의 뻣세 보이는 하얀 머리칼의 청년은 여전히 싱글싱글 웃고만 있다. 독특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미애는 웃었다. 그러자 청년의 입 꼬리가 더 올라간 것 같았다. 미묘한 변화라 확실하진 않았다.

“보통은 여기가 어디냐는 질문이 먼저 아닌가? 내가 누구냐, 던 가.”

그 말에 미애가 오히려 웃었다. 아, 물론 아까부터 웃고 있었다. 다만 조금 진심이 되었을 뿐이다.

“그렇습니까.”
“그렇지.”

보통은 그렇다는데 할 말은 없다. 그리고 청년 쪽에서는 말이 없었다. 대화의 흐름을 끊어버린 것 같아 조금 당황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어 미애는 화제를 바꾸었다.

“죄송합니다, 물 좀 주실 수 있을까요?”
“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내미는 물 컵에 잠시 대꾸할 말을 잃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다시 웃는다.

“일어나겠습니다.”

상체를 일으키는 순간 머릿속이 핑글 돌았지만 무시하고 그가 내민 컵을 받아 쥐었다. 깔깔하던 목에 미지근한 물이 넘어가자 조금 긍정적인 기분이 되는 것도 같다. 물 좀 마신다고 그렇게 된다면 살아오며 지금까지 한 모든 쓸모없는 일은 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테지만. 한 모금씩 꼴깍꼴깍 마시는 것을 참을성 있게 지켜본 청년은 미애가 절반정도 마시고 더 이상 컵을 입에 댈 기미가 안보이자 곧장 컵을 빼앗아 가더니 미애의 어깨를 잡았다. 똑같이 웃는 표정인데 뭔가 단호하다.

“자, 도로 눕자?”

이런,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미애의 난처한 표정은 못 본건지 못 본 척 하는 건지 청년은 컵과 수건을 적시던 대야를 들고 방을 나가버렸다.

“나가면―, 혼나려나.”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는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돌아섰다. 보내도 되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본인이 안 내켜 하는 것을 붙잡을만한 핑계가 없었다.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서휘도 처음 보는 영물을 끝까지 챙겨줄 정도로 그저 맘씨가 좋진 않다.

“아.”
“왜 그래?”

가볍게 으쓱하고 돌아선다.

"이름 물어보는 걸 깜빡했어."
"뭐?"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지만 상대방의 분위기에 휩쓸린 모양이라고 생각하니 말이 된다. 따로 상기를 시켜주었는데도 그런가요, 라며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다음에 또 만나겠지, 뭐."

유휘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이 시야 안에 들어왔지만 휘휘 넘겨버린다. 거기에 해줄 말은 없는지 그저 고개를 젓고는 긍정의 말을 남긴다.

"그래, 도원에 머무르는 한 곧 보게 될거다."
"그런거지."

유휘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가자 시선이 따라왔다.

"은휘한테 갈건데, 같이 갈래? 아니, 같이 가자."
"질문이 아니네."
"너한테 질문을 하느니."
"너무한데."
"준비…해서 나올테니 기다려."
"그래."

준비하고 나오라고 하려다가 따로 준비가 필요없음을 깨닫고는 말을 바꾸었다. 이 곳이 인간세상과는 달리 태평스럽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또 잊고 있었다. 얼마나 지나면 적응하려나. 수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가도 전혀 변함이 없는 서휘의 뒤로 햇빛이 하얗게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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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야야, 뭐하는 짓이야, 비켜.

으르릉, 해보았지만 지나치게 서로에게 익숙한 파트너는 그런 지아의 반항을 완전히 무시하곤 빠르게 옷을 걷어 올렸다. 방심한 사이에 어느 샌가 긴 머리카락을 잡아매고 있던 끈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공들여 관리해온 머리카락이 사락사락 사방으로 흩어졌다.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손에 감고 키스를 해오는 바람에 거부할 틈도 없이 입술이 맞닿았다. 고개를 흔들며 밀어내어도 막무가내로 몸을 붙여왔다.

이자식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애인 있다며, 잣샤!!!!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수법이 뻔하다. 입을 여는 순간 혀가 밀고 들어올 것이 당연했다. 힘으로 밀쳐내야 하건만 오랜만에 다른 사람의 손길을 접한 몸은 흐믈흐믈해져선 힘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되는데, 안되는데.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은 이미 뒷수습을 어떻게 하나, 까지 가있다. 적당히 욕구를 풀어줬어야 하는 건데, 하고 후회해보아도 이미 늦었다. 집요하게 지아의 예민한 부분을 공략하는 손길에 반쯤 눈이 풀릴 지경이었다. 그대로 끝까지 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안 돼, 라고 마지막으로 이성의 끈을 당겨 손을 들었다. 더듬더듬 올라간 손끝에 털 뭉치같이 보들보들한 감촉이 닿자 망설임 없이 잡아당겼다.

“윽.”
“정신이 드냐, 인마.”

헉헉, 작게 숨을 몰아쉬는 지아의 얼굴을 화아는 마치 처음 본다는 듯이 말가니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이 녀석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아는 숨도 고를 겸 한숨을 포옥 내쉬고는 발로 화아를 걷어내고 일어났다. 화장실에 가야한다. 이대로는 내가 덮치고 말거야. 혼자 고개를 휘휘 저으며 한걸음 옮기는데 다시 허리를 잡혔다. 퀭한 눈으로 생각에 잠긴 듯 앞만을 응시하던 화아가 매달리듯 붙어있었다. 부쩍 말라서 안쓰러운 형상의 화아가 그러고 있으니 전처럼 밟아주고 외면할 수가 없는 지아였다.

“야, 놔봐.”
“화장실 좀 가자.”
“야.”
“어이.”

대답한마디 없다. 이걸 어쩌나. 머리를 토닥토닥 쓸어주며 떨어져라, 라고 속으로 주문을 외워도 그대로다. 이걸 어쩌나. 오늘의 화아는 뭔가 평소와 달랐다. 물론 이렇게 병든 닭 몰골을 하고 있는 것부터가 평소와는 많이 달랐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뭔가 지아가 함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다. 대체 뭐지.
머릿속으로는 이것저것 고민을 해보면서 일단 화아를 달고 침대에 가서 앉았다. 질질 끌려오는 폼이 영락없이 떼쓰는 어린애. 방에 들어오자마자 덤벼들어서 떨어지지 않는 꼴을 보아하니 이 녀석도 욕구불만인가 싶다. 곤란한데.

“야.”
“기분 좋게 해줄 테니까 좀 놔봐.”

어떻게? 라고 묻는 얼굴로 곁눈질 한다. 아아―, 그래서 이상했구먼. 언제나 질린다 싶을 정도로 똑바로 눈을 마주쳐오던 화아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지아의 눈을 보지 않았다. 얼핏 스치지 조차 않았다. 아니, 그전에 얼굴이나 똑바로 봤던가? 지아는 잠시 눈을 크게 뜨고 화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어떤 심정의 변화가 있으면 이런 본능적인 행동이 바뀔까. 화아는 지아의 표정이 변하자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일단은 이 녀석 기분을 풀어주는 게 먼저겠지. 후, 하는 숨과 함께 생각을 날려버리고 팔을 잡아당겼다.

“일어나, 이 녀석아.”
“왜.”

고집 피우는 중에는 단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는 화아지만 어째서인지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지아의 얼굴은 바라보지 않는다. 지아는 조금 생각을 바꿔보았다. 혹시 나한테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안타깝게도 이번역시 대답을 스스로 내릴 수 있었다. 자꾸 다른 곳을 쳐다보긴 해도 아예 고개를 돌리고 외면할 화아는 아니다. 지아는 정말 이대로 화아를 붙들고 대체 무슨 일이냐고 심문하듯 다그쳐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그저 가슴 한구석에 묻어둔 체 조용히 화아의 바지버클을 끌러낼 뿐이었다. 화아는 그 손길을 전혀 거부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았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문득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 이번만큼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지아에게는 강렬하게 인식되었지만 그것은 화아로서는 불가능한 게 아닌가 싶었을 던 맑고 평범한 시선이었다.

“시우야.”
“?!”

나직한 목소리에 지아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놀라 고개를 드니 처음 보는 표정의 화아가 있었다. 요즘의 화아는 새로움의 연속인지라 딱히 더 놀랄 일도 없다고 생각했건만 실수였다. 서글서글한 표정의 화아라니. 저건 대체 누구야. 본명을 부른 것에 한번 놀라고 화아의 표정에 놀라고 나니 지아로서는 더 이상 뭘 해야 할 지 모를 심정이었다. 그렇게 눈을 마주친 체 잠시간의 정적이 지났다.

―덜컹.

갑작스런 소리와 싸늘한 찬바람이 두 사람을 덮쳤다.

“힉?!”

저도 모르게 파다닥 화아에게서 떨어진 지아와

“카르노멘.”

묘하게 침착한 화아. 평소와 닮은 듯 전혀 다른 풍경에 낯선 얼굴이 들어섰다. 아니, 지아에게 이 사람을 낯설다고 할 수 있을까. 분명히 자주 본 사람은 아니지만 강렬한 기억의 한 귀퉁이에 남아있는 얼굴이다. 지아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그리고 지아가 파래지는 만큼 더더욱 강렬해지는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세찬 바람에 정신없이 팔락거렸다. 언제나 의미모를 미소를 띠고 있는 예쁘장한 얼굴이 오늘만큼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뿐이랴. 살기 띈 시선을 받은 지아는 ‘죽었다,’는 느낌이었다. 속으로는 온갖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밖으로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물러서고 싶은데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으아, 큰일 났다.’

물론 위기 상황에도 생각만큼은 천연덕스러운 것이 지아의 특징이긴 하다. 하지만 몸은 바짝 긴장해서 얼어있는데 머릿속이 태연한 괴리감 가득한 상황은 전혀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상황정리에만은 도움도 되었지만.

‘제발 긴장 좀 하자, 나님. 그나저나 이걸 어쩐다. 아니, 그 전에 이 인간은 대체 왜 남의 방 창문을 넘어와서 분노해 있는 거야. 어, 잠깐. 진짜 그러네. 대체 왜지?’

아무리 태연하게 생각을 이어간 다해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 법이다. 여전히 살벌하다 못해 눈빛으로 바퀴벌레도 잡을 듯 한 카르노멘이 다가오고 있었고, 몸은 안 움직였고, 화아는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러고보니 아까……,

“힉?!”

저도 모르게 파다닥 화아에게서 떨어진 지아와

“카르노멘.”

묘하게 침착한 화아.

설마, 설마하니 사귄다는 게……?’

지아의 곁눈질을 못 본건지 화아의 시선은 카르노멘 붙박이였다. 카르노멘이 어떤 모습으로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는 신경 쓰이지 않는 걸까. 정말 신경 안 쓰이니, 화아?! 분위기는?! 걸음도 점점 빨라지는데?! 잠시 울고 싶은 기분이 된 지아였다. 걸어오며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들자 무슨 장치가 되어있는 건지 무언가 쏘아져 나왔다. 동체시력도 운동신경도 좋은 지아지만 바짝 얼어 있다가 바로 움직이는 것은 무리. 반사적으로 피하려고 움직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약간 빗나간 탓인지 엄청나게 아팠다.

“으갹!”

정확히 무슨 용도의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덕분에 얼굴근육 빼곤 움직일 수 없어진 지아는 눈물만 찔끔, 짜냈다. 어쩐지 놀란 표정의 화아가 눈에 들어왔다. 쟨 또 왜 저래. 뭐 별일은 없는 모양이니 다행, 이라고 생각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눈빛이 무서웠다. 힐끔, 눈치를 보고 있자니 다시 지팡이의 끝이 같은 곳을 향해왔다. 설마, 또?! 질린 지아의 표정에 보답하듯 뭔가가 날아왔다.

‘보이는 데 못 피하니 미칠 노릇이군.’

괜히 헛생각을 하며 현실도피 해보았다. 당연히 아팠다. 맞은 데만 아픈 게 아니라 맞는 순간 온몸을 관통하는 통증에 저도 모르게 끄아악, 비명을 지르며 침대 위를 구르게 되었는데도 지아의 딴생각은 그치지 않았다. 그래, 심지어 이런 장면을 생중계로 포착해내고 놀라워 할 정도로. 그것이 비록 고통을 외면하기 위한 필사적인 딴생각일지라도 그렇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화아가 눈물을 흘린다. 즉, 울고 있었다.

크게 뜨인 두 눈, 작게 벌어진 입, 놀란 기색이 역력한 화아의 얼굴에 두 줄기 눈물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카르노멘은 지아에게 집중한 나머지 보지 못한 듯 했다. 좀 보라고 하고 싶었는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괴성뿐이어서 화가 나는 지아였다.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다. 울지 마, 라고 구박해줄 수 없어서 답답했다.

“그만.”

작은 목소리에 반듯이 정장을 차려입은 신사가 뒤돌아섰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담긴다. 지아도 몇 번 본 기억이 없는 화아의 눈물이라니, 놀라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도, 두 사람이 ‘연인戀人’이라면 절대로 놀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기왕이면 난 좀 보내주고 놀라면 더 좋겠지만.’

본인도 이상한지 뺨을 감싸는 화아의 눈에 자꾸만 자꾸만 물기가 차올랐다. 차다 못해 자꾸만 바깥으로 넘치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그렇다고 막지도 못하는 손은 그저 이마나 뺨을 더듬으며 자리를 잡지 못했다. 뭔가 말을 할 듯 입을 벌렸다가 다물고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이는 꼴이 어지간히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흐…….”
“화아.”

작게 들려오는 신음소리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저도 모르게 눌러 삼킨 것일 테다. 카르노멘의 입에서 나직이 화아의 이름이 읊어졌다. 뭐라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카르노멘은 화아의 앞에 앉았다. 잔뜩 움츠린 화아의 어깨에 한손을 얹고 얼굴로 손을 뻗었다. 카르노멘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화아의 뺨에 닿자 놀란 듯 확 얼굴이 물러났다. 하지만 곧바로 어깨를 붙든 손이 힘을 주어 화아의 몸을 끌어당겼다. 별로 힘을 주고 있지 않았던 화아는 카르노멘의 강한 손에 끌려가버렸다. 물기어린 뺨에 엷은 냉기를 머금은 정장칼라가 닿았다. 빠져나가려 몸부림치는 화아를 카르노멘의 양손이 꼭 붙들었다. 꼭 껴안긴 형상이 되어버린 화아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자꾸만 눈물이 아니라 울음이 터지려고 했다. 카르노멘을 마주 안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벗어나지도 못한 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화아는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았다. 손을 잡자 팔이 떨려오고 떨림은 온몸으로 번져서 어느 샌가 화아는 펑펑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싫은지는 한마디 언급도 없이, 싫었노라고, 정말 싫었노라고 계속해서 되뇌고 또 되뇌며 짜내듯 터뜨리듯 카르노멘의 가슴에 울분섞인 눈물을 토해내었다. 카르노멘은 한마디 대꾸도 없이 그저 화아의 등을 쓸고 또 쓸어주었다. 그렇게 저녁은 밤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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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하다. 좀처럼 표정이 굳지 않는 지아의 얼굴이 심각했다. 눈앞에는 작게 미간을 찌푸린 모습으로 화아가 널부러져 있었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붉은 머리칼은 아직 그 빛을 잃지 않았지만 결은 푸석했다. 안그래도 하얀 얼굴은 어느샌가 창백하게 색이 빠져 병색이 완연했다. 눈밑이 검게 물들고 입술은 마른데다 전과는 다르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을만큼 말라버렸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화아가 원체 고민하는 일이 없어 신경쓰지 않았던 것이 함정이었다. 세상에 무심해 어느 것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화아였기에 표현이 적다해서 세심하게 돌봐주지 않아도 되었었다. 어디서부터 틀어진 걸까.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지아는 자신을 탓해보았다. 이렇게 티날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땀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어주고 싶었지만 그것마저도 힘겹게 든 수면에 방해가 될까 시도할 수 없었다. 지아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입술을 깨물고 지켜보는 것 뿐이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인지는 몰랐다. 평소와 똑같이 먹고 똑같이 나가서 똑같이 들어왔기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화아가 먹은 것을 단 하나도 소화시키지 못하고 전부 토하고 있다던지, 매일같이 침대에 누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던지. 그것도 아니면 평소 같았으면 쉬지않고 공을 튀기고 있을 시간에 태양 아래 죽은 듯이 늘어져있다는 것까지도. 심지어 부르러 가지 않아도 꼬박꼬박 제시간에 들어온다는 사실까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연아마저도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무엇이 문제인지는 깨닫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아끼는 한가족이라 여기는 친구들이었는데. 화아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다른 칠인의 정령아들은 각자 충격에 빠져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창을 통해 드는 바람에 지아는 정신을 차렸다. 안그래도 약해진 몸이라 감기 들기 쉬울 터인데 창문을 열어놓고 잠들다니. 지아는 작게 고개를 젓고 발소리를 죽여 창가에 섰다.

  "……ㅡ노멘…?"
  "미안. 깨웠네."

  전혀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화아가 목소리를 냈다. 지아가 창문을 닫는 사이 화아는 부시시 몸을 일으켰다. 지아는 위태로워보이는 화아를 붙들었다.

  "좀 더 자둬."
  "됐어."

  지아는 자신을 밀어내고 창을 여는 화아를 보며 결국 들었던 손을 내리는 수 밖에 없었다. 결코 따뜻한 날씨가 아닌데 화아는 절대 창문을 닫으려 하지 않았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화아를 향해 화도 내보고 얼러도 보았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무엇이든 정령아들의 한마디면 투덜거리긴 해도 어기지 않는 화아였지만 이번만은 고집을 피웠다. 곁에 누군가 붙어있는 것조차 거부했다. 창문을 열고는 지아를 방밖으로 끌어낸다. 단호한 손길을 지아는 떨쳐내지 못했다. 닫힌 문에 기대어 지아는 참았던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다 기운 빠지는 느낌이야……."





  화아는 침대에 걸터앉아 허공을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창 밖이지만 촛점이 맞지 않는 화아의 눈은 하늘을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기다리면 올 것이다. 그는. 분명히. 알고 있는데 어째서 이렇게 목을 매고 기다리게 되는 것일까. 반드시 그는 올 것인데. 기다리지 않으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안달하게 되었다. 어째서지, 어째서 이렇게 불안한 것일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온몸에서 힘을 빼자 상체가 풀썩 침대 위로 쓰러졌다.

  친구들은 이래저래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사실 화아는 어째서인지 먹은 것을 소화시킬 수 없다는 점을 빼고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가끔 견딜 수 없이 불안하고 화가 났지만 그것은 그 나름대로 견딜만 했다. 갑자기 눈물이 나는 때도 헛구역질이 올라올 때도 화아는 그냥 몸에 뭔가 문제가 있겠거니 했다. 아무 생각 없이 허공을 보고 있는 중에 일어나는 일이니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병원을 가보긴 해야겠지만 조금 미뤄도 큰 문제가 생길 병은 아니겠거니 생각했다.

  카르노멘의 얼굴을 보면 반가웠다. 그저 무뚝뚝하게 맞을 뿐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시간. 언젠가부터 그 이후에는 허전함이 찾아왔지만 그런 것쯤은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행복이었다. 커다란 대가가 뒤따랐지만 그럼에도 놓을 수가 없었다. 마주친 두 눈이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어도 다른 곳에 넘겨줄 수는 없었다. 은빛 속눈썹에 그늘진 은보라빛 눈이 싱긋 미소짓고 있었다.

  "카르노멘."
  "안색이 많이 안좋아. 병원, 아니면 양호실에라도 가봐야 하는 것 아니야?"
  "조만간 갈거야."

  웃으며 머리를 쓸어넘기는 카르노멘의 손에 살짝 머리를 부볐다가 몸을 일으켰다. 상체를 일으키자마자 입술을 부딪쳐 들어간다. 짧은 입맞춤으로 밀착된 몸을 더더욱 붙이며 속삭였다.

  "하자."
  "안 돼. 곧 가봐야해."
  "잠깐만이라도."

  말하는 중에도 손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카르노멘의 교복 상의 자켓은 이미 반쯤 벗겨져 있었다. 카르노멘의 손이 화아의 손목을 붙들었다. 화아의 얼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왜."
  "안된다니까."

  사탕뺏긴 꼬마처럼 꽁해진 얼굴을 쓰다듬으며 카르노멘이 웃었다. 어린아이를 어르는 투로 속삭이며 화아를 떼어놓는다.

  "주무실 땐 창문을 닫아 둬. 감기들라."
  "올거잖아."
  "잠궈도 들어올 수 있어."
  "그래도 싫어."
  "어린애구나."
  "그러니까 하자."
  "안 돼."
  "……."

  더이상 말하진 않았지만 화아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카르노멘은 그의 어깨를 도닥도닥 두드려주곤 몸을 일으켰다.

  "잠깐 짬이 생겨서 왔을 뿐이니까. 이제 가야해."

  '가까이서 상태를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지. 병원에 가라고 한다고 들을 것 같지는 않고 따로 의사를 부르는 편이 나을 것 같군.'

  카르노멘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화아에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고 그대로 사라졌다. 또 방에 혼자 남은 화아는 퀭한 눈으로 카르노멘이 서있던 자리를 바라보다가 다시 침대 위로 쓰러졌다. 붉은 머리카락이 하얀 시트 위로 흐트러졌다.





  처음 그와 '만난' 것은 봄날이었다. 변덕스러운 날씨 중에서 유난히 포근하고 따뜻하던 그 날, 화아는 봄의 한복판에서 '겨울'을 보았다. 한 겨울의 메마른 눈이 그곳에 흩날리고 있었다. 말도 안되는 환상같은 풍경에 화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계속해서 쫓아다니던 시선도 신경쓰였지만 그 때의 행동은 단순히 본능이었다. 있을 수 없는 것이지만 아름다워서 놓칠 수 없다는 본능적인 움직임. 엷게 깔린 가루눈, 별 없는 밤의 하현달.

  온기어린 물방울이 뺨을 타고 떨어져 머리카락 속으로 스며들었다. 하얀 천장이 눈이 시려 옆으로 돌아 누웠다. 있지도 않은 손톱이 손바닥에 배길만큼 주먹을 꽉 쥐었지만 물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흐릿해지는 시야가 분해서 화아는 눈을 있는대로 부릅떴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화아의 눈물을 닦아줄 하얀 손도 그의 곁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윽."

  아무리 자존심을 세워봐도 흐르는 눈물은 멎지를 않아서 화아는 결국 웅크리고 말았다. 터질 듯한 마음에게서 등을 돌리고 숨죽인 울음을 삼키다가 체해 밭은 기침을 토하며 침묵 속에 침잠해간다.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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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들지 못한 밤이 벌써 몇일째일까. 눈이 시리고 뻑뻑했다. 소년은 꼿꼿한 자세지만 묘하게 불안정한 걸음으로 발을 내딛었다. 달빛을 받은 바닥이 반짝반짝 빛났다. 소년의 눈동자가 초점없이 흐릿했다. 거의 흰자와 구분이 가지 않는 옅은 회색빛 홍채는 달빛이 꽤나 밝은데도 불구하고 풀어져 동공이 크게 확대돼 있었다. 아무 것도 신지 않은 하얀 발이 닿은 바닥에는 붉은 눈송이가 점점히 박혔다.
  비틀, 소년의 몸이 균형을 잃고 작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무의식 중에 바닥에 댄 손바닥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들려진 손에서 붉은 눈송이가 떨어져 내렸다. 떨어지는 눈송이가 달빛에 반짝하고 빛났다. 몸을 일으킨 소년은 움직이지 않고 잠시 이마에 손을 짚은 체 그 자리를 지켰다.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지만 소년은 느릿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허벅지까지 닿은 소년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하이얀 달빛과 반짝이는 바닥에 대비해 구멍이 뚫린 듯 보였다.

  '오늘은 달이 참 밝다, 그치?'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두 눈이 초점을 찾았다. 몽롱한 표정을 한 소년이 다시 한걸음 한걸음 발을 옮겼다. 눈에 띌 정도로 휘청거리고 있었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점점이 이어지던 붉은 눈송이는 조금씩 커져서 마침내 붉은 발자욱이 되었다. 한발짝 내딛을 때마다 급하게 꺾이는 무릎이 위태로웠다. 비틀, 비틀. 흔들거리며 힘겹게 몸을 옮겼다. 은빛으로 빛나는 길지 않은 길이 끝나고도 몇걸음인가 더 나아간 소년은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소년의 발이 닿은 마지막 자리까지 붉디 붉은 발자욱이 이어졌다. 등은 하얗기만 한 발의 바닥은 온통 붉었다. 붉은 조각이 발바닥을 온통 메웠다. 드디어 감긴 두 눈과 창백한 얼굴은 전혀 고통을 호소하지 않았다. 그대로 깊은 잠에 빠진 작은 소년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응, 둔켈도 행복한 꿈 꾸길. 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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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현은 옷을 벗었다. 목욕하러 들어가야 하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한데 어딘가 불편했다.

 '대체 뭐지.'

 잠시 고민해보았다. 고개를 갸웃하는데 뭔가 시야에 들어왔다. 하현보다 머리 하나는 큰 껑충한 키의 청년. 두 사람의 기장 차이 탓에 하늘하늘한 검은 머리가 덮고 있는 목덜미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미미하게 웃어보였다. 굉장히 기분좋아보이는 표정에 하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변화를 알아차린 휘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오히려 더 짙어졌다. 하현은 코를 통해 흥, 하고 숨을 내뱉고는 남은 하의를 벗기 시작했다. 곧 멈추고 말았지만.

 '옷 안벗어?'

 동작을 멈춘 하현이 휘아를 바라보았다. 말은 커녕 작은 제스쳐도 없었지만 하현 못지 않게 말이 없는 이 친구는 전혀 어색함 없이 그 뜻을 알아들었다. 눈을 한번 감아보이더니 손과 목을 휘감은 악세사리들을 먼저 풀어낸다.

 '하나도 안 벗고 있었잖아.'

 하현은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휘아를 한번 노려보고는 수건만 한장 들고 온천으로 향했다. 휘아가 옷을 벗으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하현도 휘아도 신경쓰지 않았다. 두사람은 25살이나 먹은 남자 대학생. 여고생이 아니니 말이다.

 '좋구나, 온천이란 건.'

 딱히 휴일도 아니고 이른시간인지라 아무도 없는 온천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현은 온천에 앉아 혼자라는 것의 여유로움을 마음껏 즐겼다. 온몸이 노골노골 풀어지는 느낌에 졸음이 밀려왔다. 그래서 살짝 졸음에 취한 체 목만 내놓은 체 탕에 가라앉아 있는데 소리가 들렸다. 맨발이니 딱히 발소리랄 것은 아니었지만 이쪽으로 걸어오는 작은 기척. 탈의실에도 사람은 없었으므로 이것은 틀림없이 휘아의 것이었다. 소리는 문에서 출발해 하현의 바로 뒤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침묵했다.

 "왁."
 "……."

 전혀 발소리를 죽일 생각도 없이 다가와서는 하현의 귓가에 바짝 입을 대고 왁, 이라고 말했다. 놀랄리가 없었다. 하현의 뚱한 시선을 받은 휘아는 하현의 머리카락을 한번 헤집고는 탕 안으로 들어왔다. 수면이 출렁거렸다. 하현은 가만히 휘아가 자리를 잡고 앉아 수면이 잔잔해지길 기다렸다. 휘아는 그런 하현을 흘낏 보더니 물 속에서 손을 휘저었다. 물결이 잠잠해지려다 다시 술렁인다. 수면만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는 하현의 표정이 재미있어서 한번 더 시도해보았다. 조용해지던 물결이 그 세기를 더하자 작게 눈썹이 꿈틀거렸다. 보통 사람은 잡아낼 수 없는 작은 변화지만 휘아와 하현은 자연스럽게 그런 것만으로도 의사소통을 해냈다. 그것이 가능한 사이였고 그것이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장난이 계속 되자 전혀 휘아를 신경쓰지 않고 있었던 하현이 마침내 휘아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뚱한 표정이다. 휘아는 작게 소리내어 웃고는 손을 멈췄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한번 휘아를 바라본 하현은 다시 시선을 물로 돌렸다. 휘아는 바로 고개를 돌려버리는 하현의 행동에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수면이 잠잠해졌다. 하현은 미리 물 밖으로 꺼내 두었던 손을 들었다. 내리치려는 생각이다. 고작 그거 하나를 위해 계속 기다렸다니 유치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하현의 손바닥이 수면에 닿으려는 찰나,

 "……?"

 하현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휘아의 감은 눈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제대로 초점을 맞추기 힘들 정도의 거리.

 '뭐지, 이거.'

 그렇게 생각하고는 고개를 갸웃, 옆으로 기울였다. 그러자 휘아의 손이 하현의 목 뒤로 넘어왔다. 하현의 머리를 받힌 손, 그리고 맞닿은 입술이 어쩐지 뜨겁다.

 '키스, 지?'

 하현은 고민했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하나. 몇일 전, 이름이 기억 안나는 어떤 여학생이 단호하게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이렇게까지 매일 붙어다니다니! 너희 둘은 커플이야! 틀림없이 사귀고 있는 거라고!'

 그 때 하현과 휘아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넘어갔다. 딱히 부정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냥 그렇게 보인다면 그런 거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걸로 두 사람의 관계가 뭔가 바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모두 수업이 없는 휴일, 하현과 휘아는 온천에 왔다.

 '사귀는 사이에 키스 정도는 당연히 하는 건가.'

 하현은 눈을 감았다. 먼저 입을 열기를 청해본다. 아니, 청하려고 했다. 작게 입을 벌리자 바로 시작되는 것은 뜨거운 입맞춤. 조용하고도 격렬한 애정의 확인이 온천의 남탕이라는 공개된 장소에서 시행되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떨어질 때까지 그 공간에 발을 들인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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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쳐다보기만 하는 거, 꼴사나워."
 "응?"

 희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옆에 다가온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심하게 놀란 것 같아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굉장히 많이 놀라서 가슴을 쓸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가 아무런 표현을 하지 못한 것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랐다는 리엑션을 취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떄문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청년을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당신……."
 "할 말이 있는 거 아니야?"
 "뭐?"

 청년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희란이 되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질문을 하고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등을 돌려 성큼성큼 그녀에게서 멀어져 갔다. 희란은 미처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그저 얼떨떨하니 그의 등을 바라볼 뿐이었다. 곧 그렇게 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어이, 할 말이 있대."
 "저요?"

 청년이 희란에게 말을 건 것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그 상대는 그녀가 몇 일째 이 자리에서 계속해서 바라봐온 사람. 희란은 기겁을 하고 청년의 뒤를 쫓았다.

 "자자자자, 잠깐!! 뭐하는거야!"
 "빨리 말 안하면 더는 기회가 없을거야. 그 사람들이 오고 있으니까."
 "하?"

 희란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높낮이 없는 무뚝뚝한 어조로 말하는 청년을 그 사람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연고도 없는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걸어놓고 이게 웬 헛소리라니. 희란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청년과 그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그 사람은 함께 걷던 친구와 함께 청년과 희란에게서 멀어져 갔다. 청년은 그것을 막지 않았고, 희란은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미친 놈이라는 말이 들려왔다.

 "늦었군."
 "에, 에, 예?"

 그리고 청년은 걸음을 옮긴 후 굳은 것처럼 한번도 움직이지 않았던 고개를 돌렸다. 보이는 것은 거리와, 사람 뿐이었지만 그는 어딘가 먼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희란이 아직 당황해있는 사이 말릴 틈도 없이 그는 걸어갔다.

 "아, 저기, 저, 잠깐만요!"

 그 날은 바로 전날까지 따뜻하다가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서 평소보다 더 춥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하지만 바람은 거의 불지 않았고 구름 한점없이 유난히 하늘이 맑았다. 청년, 하현은 이름 모를 상대방이 자신을 따라올 여유가 없을 것이란 것을 알았다. 그녀는 혼령. 세상에 무엇인가 원한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단지 그가 그 길을 지나다닌 일주일 동안 내내 한 장소에 서서 한 남자만을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걸렸을 뿐이다. 그녀가 세상에 있는 목적은 다른 것이리라. 그 것은 분명히 살아있는 사람들의 세상에 해가 되겠지. 그는 조용히 익히 잘 알고 있는 장소로 발을 옮겼다. 어차피 인연이 있는 곳.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만두면 되는 것이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하현은 헐렁해져 별로 기능을 못하고 있는 목도리를 가볍게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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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캐릭터 100제.
자신이 창작한 캐릭터를 그냥 나열하세요.
따로 포스트를 작성해서 세세한 소개를 하거나,
이름만 적고 그 옆에 간단한 소개를 적어도 괜찮습니다.

출처 : http://blog.naver.com/zydn219/120009814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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