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SS (*59. 춤추는 숲속의 소년) _with DUNKEL

 

 

 

 

 

 

 

 "하하, 하하, 하하하하, 하하하……."

 

 공허한 웃음소리는 멀리 퍼지지도 못하고 흩어진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카만 빛으로 휩싸인 작은 소년은 그저 허탈한 웃음을 뱉어낼 뿐 움직임이 없었다. 소년의 품안에는 반짝이는 금발의 소녀. 하이얀 드레스가 피투성이로 붉게 물들어버렸다. 작디작은 소년의 품안에 역시 작디작은 소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앞으로도 영원히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햇빛이 반짝이며 부서져 내리던 금빛 고수머리도 바람과 함께 춤추던 작은 발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던 고운 입도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기에 있지만 없었다. 소년의 창백한 손이 소녀의 어깨를 끌어안은 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소녀의 손가락이 작게 경련을 일으켰다.

 

 

 

 

 “미엘, 미엘. 계속 잠만 잘 거예요? 그러지 말고 오늘은 다 같이 소풍가요. 시안씨랑 같이 맛있는 샌드위치 만들었단 말 이예요. 네? 같이 가요―."

 “므…우…, 귀찮아. 안아, 이거 저기 버려버리고 와…….”

 “아하하하.”

 

 아침부터 일어난 소동에 언제나처럼 거실 탁자 위에서 곤히 잠들어있던 시엘 마저 무슨 일인지 보러올 지경이었지만 미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수가 있음을 인식한 탓인지 발을 들일 수 없을 만큼 어둡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밝다고는 할 수 없는 방안에서 금빛 고수머리의 소녀는 벌써 몇 시간 째 씨름 중이었다. 사이에 낀 시안은 그저 곤란한 웃음만을 흘릴 뿐 그 어떤 수도 쓸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 모두 고집하나는 끝장나게 세기 때문에 중간 타협점을 받아들이게 할 수가 없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는 오히려 피곤해진다. 두 사람 모두와 긴 시간동안 함께 지낸 경험으로 시안은 그 사실을 눈물 나게 잘 알고 있었다.

 

 “난 잘래.”

 “아, 결정 나면 깨울게.”

 

 졸음에 반쯤, 아니, 거의 감겨있는 소녀의 눈을 보고도 붙들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시안은 일주일쯤 전혀 못 잔 듯 보이는 모습으로 바닥에 웅크려 순식간에 잠든 시엘에게 얇은 이불을 덮어주었다. 마스터인 미엘이 심심하면 아무데서나 쓰러져서 자기 때문에 청소를 하지 않아도 청결함은 물론 온도까지 완벽하게 조절이 되는 방이었으므로 걱정할 것은 전혀 없었다. 단지 이 방에서 자면 앞으로 언제 일어날 지 알 수 없다는 건 문제일까. 미엘의 방은 모든 환경이 잠자기 좋게 조절되어 있어 아무리 잠이 적은 사람이라도 한번 잠들면 일어나기 힘든 곳이었다.

 

 “아우우, 적당히 자고 좀 일어나요! 그렇게 자면 머리 안 아파요?”

 “전혀.”

 “나가자니까―요―!!!!!!”

 “귀찮아…."

 

 두 소녀의―소녀라고 불릴 수 있는 나이같은 건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실랑이를 바라보며 시안은 다시 허탈하게 웃었다. 두 사람이 하는 모양새를 보면 나들이는커녕 오늘 하루 종일 이러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듯 했다. 정 나들이가 가고 싶으면 미엘을 빼고 가면 될 것을 ‘함께’라는 말을 포기할 수 없는 여자아이는 어떻게든 그녀를 바깥으로 데려갈 모양이었다. 마침내 여자아이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미엘을 침대에서 끌어내기 시작했다. 물론 축 늘어진, 그것도 본인보다 덩치가 큰 사람을 끌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서 그녀는 미엘의 팔을 붙든 채로 몇 번이나 헛발질을 했다. 그때였다.

 

 “적당히 일어나주지 그래.”

 

 서늘한 목소리가 조금 장난스러웠던 분위기를 단칼에 잘라내었다. 언제, 어떤 곳에 있어도 한눈에 들어올 새빨간 머리카락이 햇빛을 반사해 자극적으로 빛났다. 어두침침한 방안에서 갑자기 접한 햇빛이 눈부셔 시안은 눈을 가렸다. 스스로 빛을 내는 듯 한 붉은 두 눈이 미엘을 향했다. 여자아이는 자신을 향한 시선도 아니건만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에트리아스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미엘을 바라보며 작게 혀를 찼다.

 

 “어차피 져 줄 생각이라면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는 편이 좋아.”

 “부.”

 “일어나, 얼른.”

 “……칫, 에티는 봐주질 않는다니까. 매정해.”

 “그쪽에서 쓸데없이 고집피우지 않으면 안 그래.”

 “흥, 쳇, 피.”

 “그래서, 어디로 갈 건데?”

 “에, 에?”

 

 갑자기 자신에게 바통이 내밀어지자 금발의 여자아이는 까만 두 눈을 깜빡일 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에트리아스는 창문에 다시 커튼을 치는 미엘을 바라보며 한 번 더 말했다.

 

 “싫으면 말아.”

 

 

 

 

 햇빛이 나뭇잎사이로 광선처럼 한줄기 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맑은 날이었지만 무성한 나뭇잎 아래는 빛이 닿지 않아 아직 어둑어둑했다. 상록수 숲 특유의 촉촉하고 상쾌한 공기가 가득한 오솔길을 조금 기묘한 일행이 걷고 있었다. 선두에는 파티장이라도 나온 듯 화려한 남성용 예복의 여자아이. 콧노래를 흥얼흥얼, 지팡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걸었다. 그녀의 뒤로는 화사한 금발의 소년, 소녀가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웃음꽃을 피웠다. 소년의 가슴 정도밖에 안 오는 작은 소녀는 복슬복슬한 곱슬머리 위에 보닛을 쓰고 하얀 나들이 원피스를 팔랑이며 걸었다. 그녀의 조잘거림에 대꾸하는 소년은 남자아이치고 큰 키가 아니었지만 주변에 온통 고만고만한 키의 여자아이들뿐이었기 때문에 껑충하게 머리가 위로 솟아있었다. 그리고 그런 소년의 뒤에 바짝 붙어 느릿한 걸음으로 전체의 속도를 늦추고 있는 것이 그의 동생. 손가락이 하얗게 될 만큼 소년의 옷을 꼭 쥐고 걸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와 떨어져 같은 일행이라 하기엔 멀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치기엔 애매한 거리에 초록빛 숲속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선홍빛의 소녀가 뒤를 따랐다. 평범하진 않았지만 즐거운 무리. 앞서 걷는 여자아이의 흥얼거림이 뒤쳐진 소녀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햇살은 따스하고 그늘은 서늘한 기분 좋은 나들이.

 

 “마스터, 어디까지 가는 건가요?”

 

 금발의 소년, 시안이 물었다.

 

 “갈 수 있는 곳까지.”

 

 흥얼거리던 박자에 맞추어 선두를 걷던 여자아이, 미엘이 대답했다.

 

 “나 힘들어.”

 

 시안에게 찰싹 붙어 걷던 시엘이 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꽤 머네요.”

 

 흰 원피스 자락이 하늘거렸다.

 

 “적당히 쉬었다 가는 게 어때?”

 

 붉은 입술을 빠끔거리며 에트리아스가 중얼거렸다. 앞서 걷는 다른 일행은 아무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으나 미엘만은 정확하게 알아듣고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안 돼, 안 돼,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엘이 너, 시안이한테 땡깡 피우면 혼난다?”

 “흥.”

 

 시엘은 와락 시안의 팔을 끌어안았다. 시안이 넘어질 뻔하며 작은 소란이 일어났고 소녀의 까르륵하는 맑은 웃음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흥얼흥얼흥얼, 노랫소리와 함께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나무가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하늘 높은 곳까지 가지를 높고 넓게 펼치고 있었다. 나뭇잎이 무성했고, 그 둘레는 평범한 성인 남성 30명이 손에 손을 잡고 둥글게 서도 모자랄 것 같은 굵은 줄기를 가지고 있었다. 하늘을 떠받힌다는 전설 속의 나무처럼 엄청난 크기. 번듯한 집 한체가 안에 들어앉아있대도 믿어버릴 것 같은 나무를 미엘은 살며시 쓰다듬었다. 사랑하는 이를 만지듯 부드러운 손길이 차가운 나무껍질을 스쳤다. 소녀의 입가에 엷게 미소가 스며든다. 그녀는 휙 돌아서 돗자리를 깔고 바구니에 담아온 것들을 펼치기에 바쁜 세 사람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말했는지 모르겠는데 앞으로도 이 이상 넘어가면 안 돼. 다들 기억해둬.”

 “왜?”

 

 모두를 대표해 시엘이 물었다. 나머지 두 사람 역시 묻는 듯한 눈으로 미엘을 바라보았다. 미엘은 대답 대신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그녀의 입에는 어느 샌가 아직 꺼내지도 않은 샌드위치가 물려있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린 시안이 한마디 했다.

 

 “그 것만 꺼내신 거예요? 안을 다 뒤집어놓으신 건 아니죠?”

 “이거 맛있다.”

 “다행히 괜찮아요. 하여간 못 말리는 사람이라니까요.”

 

 금빛 고수머리의 소녀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물론 미엘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그저 깔깔깔 한번 웃어주고는 맛있게 샌드위치를 씹을 뿐이었다. 소녀도 그녀의 미안해하는 모습 같은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지 뾰로통한 표정으로 하던 일을 계속했다.

 

 “에티, 에티도 와서 좀 먹어봐. 맛있어.”

 

 에트리아스는 부산한 다른 일행과는 달리 아직도 멀리 길 위에 서서 홀린 듯 한 표정으로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엘은 즐거워 보이는, 그리고 조금은 오만한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 그녀의 목소리도 듣지 못한 듯 보이는 에트리아스를 지긋이 응시했다. 후後좌左우右에서 조잘거리는 대화를 배경음악삼아 사랑스러운 그녀의 인형을 감상한다. 언제나 싱그러운 푸른색으로 가득한 미엘의 숲에서 흰색과 붉은색으로만 치장된 인형은 이질적이지만 눈부시게 빛이 났다.

 

 ‘아름다워.’

 

 취할 듯 강렬한 풀잎의 향기가 와인의 향을 대신해서 감상에 흥을 더했다. 목으로 넘어가는 매끄러운 감각은 안타깝지만 샌드위치로 대신했다. 향기와 입안에 넣을 것. 미엘이 감상 시 필수로 여기는 두 가지였다. 무엇을 볼 때든 그것만은 잊지 않았다.

 

 “이거, 맛있다.”

 “엘아, 안된다니까!”

 “그렇지만 맛있어.”

 “그냥 다 꺼내놓을까요?”

 “그게 나을지도……, 하하하.”

 

 시안들은 먹느라 정리하느라 소란스러웠다. 샌드위치를 다 먹은 미엘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타박타박 걸어 에트리아스의 앞에 섰다. 그녀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지 시선을 위로만 향하고 있는 에트리아스의 뺨에 손가락을 얹었다. 뺨보다 뜨거운 손의 감촉에 에트리아스가 놀라 시선을 정면으로 떨구었다. 결코 기분좋아보이지는 않는 미소가 에트리아스를 향하고 있었다. 배회하던 시선이 미엘의 그 것과 얽히고, 소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사랑하는 에티. 나의 에트리아스.”

 

 미엘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다물어지며 달콤한 음성을 자아냈다. 범하는 것 같이 뜨겁고 은밀한 시선이 소녀의 온 몸을 훑었다.

 

 ‘미소. 불쾌함이라는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표정.’

 

 미엘의 두 손이 에트리아스의 뺨을 감쌌다. 붉은 미소가 더욱 진해지고 초점을 붙들린 에트리아스의 눈에 미엘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쳤다.

 

 “훅.”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숨결을 불어넣었다. 미엘의 웃음이 베시시 즐거운 듯 변했다. 불쾌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조금은 장난스러운 미소. 미엘의 손이 움찔 떠는 에트리아스의 어깨를 붙들고 혀가 아랫입술을 핥았다. 소녀는 몸을 물리는 에트리아스를 눌러 잡고 그대로 입술을 붙였다. 반항 없이 입술이 벌어지고 미엘의 혀가 에트리아스의 입안을 휘저었다.

 

 “읏.”

 

 피부가 맞닿았다 떨어지며 생기는 츗, 하는 소리가 났다. 미엘이 곤란한 듯 당황한 듯 혼란한 듯 어색한 얼굴의 에트리아스를 끌어안았다. 도닥도닥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다정하기만 했다. 얼어붙은 에트리아스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자, 함께 소풍을 즐겨야지?”

 

 발랄한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어느 샌가 숨이 막힐 듯 강렬한 시선은 사라지고 없었다. 미엘은 방긋 웃으며 얼떨떨한 상태의 에트리아스를 끌고 돗자리로 돌아왔다. 금발의 여자아이가 밝은 목소리로 두 사람을 맞았다. 숨차게 떠드는 소리, 즐거운 웃음소리, 맛있는 간식. 즐거운 소풍이었다. 평소와 같이 즐거운 소풍이었다.

 

 

 

 

 미엘은 아이의 서투른 콧노래가 마음에 드는 지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에트리아스는 굳이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시안과 시엘은 이미 돌아가 자리에 없었다. 남은 것은 금빛 고수머리를 흰 옷자락과 함께 펄럭이며 가볍게 춤을 추고 있는 작은 소녀. 그리고 그 것을 그늘아래서 지켜보고 있는 미엘과 에트리아스 뿐이었다.

 

 “참 용하지 않아, 에티?”

 

 잔뜩 애교를 부린 귀여운 목소리였다. 한껏 기분이 업 되었을 때나 내는 교태어린 목소리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무것도? 그냥 구경중이야. 켈이가 저렇게나 귀여운걸.”

 “…….”

 

 손톱이 길었다면 좋았을걸. 미엘이 중얼거렸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꼭 움켜쥔 에트리아스의 한 손을 어루만지며 한 말이었다. 애매하게 일그러진 발그레한 뺨에 사랑스럽게 키스를 남긴다. 입맛을 다시듯 자신의 입술을 혀로 핥아내는 모습이 지독히도 사랑스러웠다. 천사의 목소리로 노래하던 소년의 어설픈 허밍이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금빛 저녁햇살에 물든 소녀의 하이얀 드레스가 꿈결처럼 아득했다. 그 어느 곳에 있어도 배경과 분리되어 그림자를 드리우던 아이는 그가 좋아하던 소녀와 같이 숲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흑과 백, 색채라고는 보이지 않던 작은 신체는 온갖 빛깔에 둘러싸여―.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어째서?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데.”

 “그런.”

 

 계속 말하려는 에트리아스의 입술에 미엘의 손가락이 가볍게 와닿았다. 쉿, 작게 속삭인 미엘은 너무도 즐거워 보이는 미소를 띄고 있었다.

 

 “분명히 그날 리히트는 죽었어.”

 “…….”

 “하지만 사라진 건 리히트가 아니지.”

 “…….”

 “지금 저기에 리히트가 있잖아.”

 “…….”

 “죽은 사람과 사라진 사람이 언제나 같은 건 아니야. 적어도,”

 

 미엘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이 행복하게 온 얼굴로 방긋 웃었다.

 

 “꿈속에서는 말이지.”

 

 소년은 붉은 노을아래서 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칼을 흩날리며 하얀 원피스 자락을 가녀린 손가락으로 붙든 체 살랑거리는 바람과 함께 춤을 추었다. 흐릿하게 들려오는 음정이 맞지 않는 노래는 사람이 부르는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신비한 목소리로 연주되고 있었다. 눈웃음 치고 있는 오른쪽 눈은 동공의 부재로 까만 유리구슬 같았다. 나무들이 그의 춤에 맞추어 우수수 소리를 냈다. 까르륵 하는 작은 웃음소리가 섞여들었다.

 

 소년과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세상의 사랑을 받아 반짝거렸다. 소년은 그런 소녀를 세상보다 더 사랑했다. 사람이 소녀를 시기해 칼을 들었다. 하늘이 울던 그날 소녀의 심장이 멈추었다. 소년은 자신의 심장을 소녀에게 주기로 했다. 하지만 끊어진 운명의 실은 다시 이어지지 않아서, 소년은 소녀만을 되찾기로 했다. 그래서 소년은 소녀가 되었다.

 그날 소녀는 죽었다. 그날 소년은 사라졌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렇지, 에티?”

 

 에트리아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Posted by fad
,

 걷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부터 걷고 있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난다. 소년은 낯선 거리를 두리번거리다가 끝내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가느다란 두 어깨가 감당하지 못한 옷자락이 팔뚝으로 흘러내렸다. 소년은 무의식 중에 옷을 추스르다가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예쁘게 탄 갈색 피부를 가진 작은 손. 여자아이마냥 예쁜 손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고민하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원래 이랬던가?"

 알고 있던 것 보다 좀 작은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곰곰히 생각을 되짚어 보아도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왜 여기 있는거지? 처음부터 맨발로 걷고 있었나? 이렇게 옷이 컸던가? 여기는 어디지? 아니, 그 전에…

대체 난 누구지?

 놀라운 질문을 떠올린 소년은 잠시 생각을 멈추었다. 당연히 떠올라야 할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조용한 거리는 소년에 맞추어 시간이 멈춘 듯 했다. 출근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새벽의 주택가는 아직도 조용하기만 하다. 소년은 다시 발을 떼었다. 걸음과 함께 생각도 흘러간다. 어쩌지, 기억이 안 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뭘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 그나마 날씨가 따뜻한 때인 것이 다행이지만 이대로 거리에서 노숙을 하는 건 좀―,

 ―쾅.
 "갹!"

 꽤나 장엄한 소리가 조용한 골목을 울렸다. 생각에 잠겨 걷다가 갑자기 열린 대문에 정통으로 해골을 얻어맞은 소년은 머리를 감싸쥐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거의 동시에 부딪친 종아리도 통증을 호소해온다. 울상이 된 소년의 머리 위에 옅게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 미안. 괜찮아?"
 "으으…."

 소년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휘저었다. 아래로 보이는 깨끗한 구두를 보니 출근하는 길일텐데 소년에게 길게 쓸 시간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걱정을 받고 있을 소년이 아니기는 했지만 본인의 머리에서는 계산되지는 않는 것이다. 상대방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다가 소년이 전혀 도움을 받을 생각이 없어보이자 발을 돌려 사라졌다. 소년은 가만히 발소리에 귀를 귀울이다가 상대가 완전히 코너를 돌자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렇게 얼굴도 보지 않고 상대를 보낸 것이 잘한 것인지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낙천적인 소년은 이내 아무렴 어때, 라며 생각을 떨쳐버렸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한다.

 낮은 지붕들과 저 멀리보이는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빠끔이 고개를 내미는 것이 보였다. 찌는 듯한 더위가 시작되겠지. 머리를 묶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 끈이 없네―. 소년은 길디 긴 머리카락을 손에 말아쥐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Posted by fad
,

 "아―라, 도망가버렸다―…."

 검지손가락을 입에 문 체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는 유진을 한번 보고 노엘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 모습에 유진이 발끈 화를 낸다.

 "뭐야, 왜 고개를 저어!"
 "네가 바보 같아서."

 태연자약하게 내뱉는 말이 얄밉다. 유진은 부루퉁한 얼굴이 되어버렸다. 곱슬거리는 금발이 노을 탓에 붉게 빛난다. 아무리 툴툴거려도 자리에 없는 사람은 들을 수 없어서 더더욱 심통이 난다. 불쾌한 것인지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져 있는 하얀 가운의 주인은 아랑곳 없이 어린애처럼 동동 발을 구르며 아쉬운 마음을 토해냈다. 잡으라는 듯 내밀어진 하얀―역시 붉은 하늘 탓에 발갛게 보이는―손이 아니었으면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었을 지 모르는 일이었다. 노엘의 가는 손을 붙잡아 냉큼 몸을 일으키곤 그에게 매달렸다. 비슷한 키 탓에 두 손을 번쩍 들지 않으면 어깨에 양 팔을 얹기는 무리. 하지만 그 덕분에 노엘도 놀라지 않고 유진의 무게를 버텨낼 수 있는 것이리라. 노엘의 어깨에 뺨을 부비자 살짝 머리에 무게가 실렸다. 기대어온 노엘의 머리에 유진도 고개를 기대어 세모꼴을 만들었다. 여전히 후웅―하며 불만스러운 음색을 토해내는 유진을 무시하고 노엘은 두 사람의 가방을 챙겨들며 엘리엇 선생님에게 인사했다.

 "가는 길에 리니아양을 한번 찾아 볼게요. 학교 안은 복잡하지 않으니까 금방 돌아올거라고 생각하지만…."
 "괜찮아, 잠시 기다리면 돌아올거다."
 "그럼 다행이지만요."

 아, 노엘이 웃는 듯 했다. 놀라서 돌아보았는데 뒤에 매달린 터라 보이지 않았다. 유진은 아깝다, 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며 괜히 노엘의 목을 더 꼭 껴안았다. 답답한 지 팔을 당기는 손길이 느껴져도 오히려 힘을 주었다. 노엘은 곧 포기하고 다시 선생님과 대화를 계속했다. 유진은 그것을 벌레가 귀 옆에서 웅웅거리는 소리마냥 듣고 있지만 받아들이지 않으며 생각에 잠겼다. 노엘의 약간 서늘한 체온이 어린아이의 뜨거운 그것과 대비되어 조금 전의 상황을 더욱 선명하게 떠올리게 했다.

 "따뜻했는데."

 댓발 튀어나온 유진의 입은 들어갈 줄을 몰랐다. '좀 더 안고 있을걸,'이라고 투덜거리는 소리에 노엘이 '응?' 하고 반문했지만 유진은 그저 들은 듯 못들은 듯 '아쉬워어―,'라고 했을 뿐이다. 정작 그 대상이 된 사람의 기분은 신경쓰지 않고 손에서 놓친 따스한 온기가 안타까워 그저 떼쓰는 꼬마처럼 칭얼거렸다. 결국 리니아를 찾는 내내 꽁알거리며 노엘에게 매달려있던 유진이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달려가 꼭 끌어안았다는 것은 그 후의 이야기.

'story in my world > famillies's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엘] 나른한 오후  (0) 2009.04.11
[깜짝이벤트] 공주님을 구하자!  (0) 2009.04.10
나란히 낮잠을  (0) 2009.04.07
[노엘] 일상, 바라보다.  (0) 2009.03.31
기묘한 손님  (0) 2008.11.02
Posted by fad
,

 언제 잠이 들었을까. 눈을 뜨고 처음 보는 풍경이 낯설어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금방 잘 아는 장소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더라면 당장 유진에게 전화를 걸 참이었다. 요새 계속 컨디션이 안좋더라니 피로가 쌓이긴 했던 모양이었다. 아픈 것도 아닌데 집이 아닌 곳에서 잠이 들다니. 어지러운 머리를 붙들고―핸드폰을 손에 꼭 쥔 체―시계를 찾는 노엘의 눈에 요 몇일 봐온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 눈에 띄었다.

 "선생님?"

 한숨처럼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매일 같은 유진의 양호실 출입에, 혹은 갑작스런 고열로 시작되는 자신의 감기 몸살 탓에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그동안 봐온 것과는 확연이 다른 지친 듯한 모습으로. 저도 모르게 조심스레 다가가 바라보니 색이 옅은 금발이 곤히 잠든 얼굴 위로 흩어져 있었다. 답답해 보여 치워드릴까 하다가 다른 사람―그것도 자고 있는―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 꺼려져 대신 시선을 돌렸다. 안보면 답답할 것도 없지. 시계는 벌써 다섯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의 빠름에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창틀에 가지런히 놓인 문제집을 돌아본다. 오늘은 거의 못풀었구나. 침대 위에 던져두었던 가방을 집어돌아서는데 문득 방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을 발견했다. 아까까지 앉아있던 의자에 널브러진 자켓은 노엘의 것이 아니었다. 잠들기 전에는 분명히 없었던 것이었다. 앉자마자 곯아떨어져 평소와는 달리 가디건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추워보였던 걸까. 불편하게 잠든 양호 선생의 주변에서는 겉옷이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잠이 덜 깬 몸에는 쌀쌀한 날씨지만 추위를 잘 타는 노엘에게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폐를 끼쳤다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나빠졌다. 자켓을 들어 다시 선생님의 등에 덮어드린다. 출장에서 돌아오셨구나. 양호실에서 공부하기는 무리겠네. 아무래도 신경쓰이는 머리카락을 조심조심 치워드렸다. 이제 가야지. 가방에 문제집만 챙기면 더 망설일 것은 없었다.

 "…누구?"

 순간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천천히 돌아보자 선생님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런, 안경 쓰고 잠들었나."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몸짓의 선생님께 드릴 말씀이 없어 그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있었다.

 "미안한데 지금 몇시지?"
 "다섯시 오분…, 조금 넘었습니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제야 목이 가라앉은 듯 한 선생님께 물이라도 한 잔 드려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양호실에는 컵도 정수기도 모두 비치되어 있기에 급히 따뜻한 물을 건내자 놀란 듯 쳐다보다가 고맙다고 웃으며 받으신다. 웃는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이렇게 따로 대면한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양호 선생님은 굉장히 눈을 끄는 사람이었다. 날이 선 인상이 시원스럽기까지 했다.

 "왜?"

 너무 대놓고 바라보고 있었던 것을 깨닫고 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뇨, 아무 것도."

 어쩐지 이 상황을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유진이 아닌 누군가와 목적도 없이 한 장소에 있는 것은 불편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급히 가방을 챙겼다. 펜 뚜껑을 제대로 닫았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대충 밀어넣었다. 별 것도 아닌데 결국 손을 대고 만 자신의 인내심 부족이 원망스러웠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가던지, 아니면 깨우게 되었더라도 훨씬 침착했을텐데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의 자신은 전혀 자신답지 않다. 당황스러워서 빨리 이 자리에서 달아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 문을 열려는 순간 붙잡듯 들려온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그리 했을 것이다. 남겨진 사람의 생각따위는 아랑곳없이 문을 닫자마자 전속력으로 달려갔을텐데.

 "잠깐만."
 "…예?"

 스스로도 놀랄만큼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려나왔다. 혹시 이상한 눈으로 볼까, 달아나야겠다는 심정이었다는 걸 알았던 걸까. 여러가지 의문에 심장이 죄여왔다. 품에 안은 가방을 꼭 쥐었다.

 "늦었으니 태워줄게. 같이 가자."

 예상 외의 질문에 벙쪄 있다가 집 머니, 라고 물어오는 선생님의 물음에 정신을 차렸다. 아뇨, 괜찮아요. 혼자갈게요. 쥐어짜듯이 말을 내뱉고 급히 돌아서는데 눈앞이 어질, 했다. 고개를 숙인 체 급히 몸을 회전시킨 탓일까, 아니면 너무 긴장해있었던 탓일까.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몸이 바짝 굳어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넘어지면 아픈데. 어쩐지 멍해진 머리로 생각했다.
 확 옷이 잡아당겨졌다. 곧바로 붙들어온 팔 덕분에 몸이 고정되자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심장이 멎는 듯한 감각과 완전히 굳어버린 근육이 생소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긴장하고 있었던 거지.

 "몸이 안좋은데 혼자서 공부하고 있었던 거냐. 적당히 해."

 다정한 충고의 말과 함께 가자는 듯이 잡아당기는 몸에 작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아서 억지로 떠밀고 다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는, 노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소년은 상대방이 작게 중얼거린 그 소리를 알아 들었는지도 모른 체 그 자리에서 달아나듯 양호실을 벗어났다.

'story in my world > famillies's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진] 어리광  (0) 2009.04.11
[깜짝이벤트] 공주님을 구하자!  (0) 2009.04.10
나란히 낮잠을  (0) 2009.04.07
[노엘] 일상, 바라보다.  (0) 2009.03.31
기묘한 손님  (0) 2008.11.02
Posted by fad
,

 옛날 옛날 아주 부유하고 또 부자인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돈 버는 걸 좋아하고 일하기는 귀찮아하는 게으른 여왕님이랍니다. 여왕님은 백성들을 마구 부려먹어서 돈을 많이 벌어들였어요. 그래도 반란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 옛날 이야기라면 반란이라던가 정의로운 용사라던가 나와야 하지 않냐구요? 아아, 기대하는 마음은 알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여왕님은 국민들 사이에 인기가 매우 좋아서 그럴 일은 없어요. 돈 벌어오라고 닥달하긴 하지만 세금은 적정 수준만 걷기 때문에 다들 부자가 되었거든요. 오히려 여왕님 덕분에 부자가 되었다고 감사 인사로 세금도 아닌 보석이나 공물을 한무더기씩 바치곤 한답니다.

 그렇게 모두들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라에 어느날 커다란 초록색 용이 찾아왔어요. 한 발로 마을 두세개쯤은 가볍게 뭉갤 수 있는 커다란 용입니다. 그렇지만 뭐, 별일 있어서 온 건 아니고 그냥 친구집에 놀러가는 중이었대요. 그런데 날아가다가 내려다보니 보석을 잔뜩 실은 마차가 세대씩이나 지나가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용은 순간 눈이 번쩍해서는 보석을 몽창 가져가─려고 했다가 그보다는 더 보석을 많이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어요. 공주님을 납치하는거예요. 엄마가 공주님을 납치하면 보석을 왕창 가져다 준단다, 라고 가르쳐주었거든요. 용은 냉큼 왕궁에 가서 시종들은 구박하고 있는 조그마한 공주님을 납치했어요. 친절하게 쪽지도 남겨주었답니다.

 『 공주를 되찾고 싶다면 보석을 10,000t 바쳐라! 』

 물론 그렇게 짧은 글은 아니고 아래 어떤 보석을 얼마만큼씩 바칠지 상세하게 써놓기도 했어요. 용은 에메랄드를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그 중에 절반은 에메랄드로 채우라고 굵은 글씨에 밑줄까지 쳐서 강조해놓았답니다. 끝에는 이름과 주소를 남겨주었어요. 기왕이면 우체국 택배를 붙여달라는 추신도 덧붙이고요. 용은 늦잠꾸러기라서 정기적으로 같은 시간에 찾아오는 우체국 택배가 아니면 쿨쿨 잠을 자다가 우편물을 분실하기 일쑤였거든요.

 용이 떠나고 나자 시종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공주님이 사라진데다가 공주님이 살던 내궁이 커다란 종이로 덮여버렸거든요. 용은 자기가 쓰기 편한 크기의 종이에 쪽지를 적어서 주고 간거예요. 덕분에 안에 있던 시종들은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는데다가 깜깜해서, 밖에 있던 시종들은 들어갈 수가 없어서 모두 곤혹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웅성웅성 이 일을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소리로 왕궁이 가득 찼어요.

 시끄러운 소리에 여왕님의 동생이자 전속 힐러인 엘리엇 워커가 사무실을 빠져나왔어요. 마침 새로운 약재의 샘플이 들어와서 살피고 있는데 너무 소란스러우니 무슨 일이 생긴건지 확인하러 나온거지요. 사실은 지나가는 시종을 하나 붙잡아서 물어보려고 했는데 다들 바쁜지 뛰어다니는 통에 물어볼 수 없었답니다. 그리고는 황당한 광경에 고개를 하늘로 향한 체 그대로 얼어버렸어요. 사실 그게 당연하지요. 궁전 하나가 종이로 덮혀버리다니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요. 잠시 후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은 엘리엇 워커는 급히 여왕님의 집무실을 향해 달려갔어요. 그리고 외쳤습니다.

 "루비의 궁전이 종이에 잡아먹혔어!"

 다급한 나머지 뒤덮였어, 라는 말이 잘못 나온 것도 깨닫지 못하고 집무실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돌아보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엘리엇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이상하네요. 평소에는 여왕님인 셀린 W.스펜서와 그 보좌관 몇 사람 뿐 인 집무실인데 오늘은 사람이 많았어요. 다들 궁전을 뒤덮은 종이를 처리하기 위해 모인 걸까요. 여왕님 셀린 W.스펜서가 활짝 웃으면서 엘리엇 워커를 향해 두 손을 벌렸습니다.

 "어서오렴, 동생아."
 "뭐가 어서오렴이야!"

 그렇게 여왕님 셀린 W.스펜서의 하나뿐인 외동딸 사루비아 스펜서 구출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뭔가 얼렁뚱땅이라구요? 에이, 신경쓰지 마세요. 원래 옛날이야기라는 게 다 그렇답니다.




 자, 그럼 자랑스러운 용사들을 소개하지요.




 제 1 멤버, 셀린 W.스펜서.
 본래 여왕이지만 심심함에 뒹굴던 와중에 공주가 납치당하다니, 재밌을 것 같아서 용사 놀이를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기껏 모은 보석들 주기도 아깝잖아요. 그리고 사루비아 공주는 어디서라도 잘 지낼 것이 틀림 없어요. 그녀를 당할 만한 사람은 드문걸요. 게다가 훌륭한 방범 아이템도 쥐어주었으니 여왕님은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저 오랜만에 검을 들고 대륙을 횡단할 것을 생각하면 두근거리기까지 합니다. 한동안 쓰지 못했던 마법도 쓸 수 있을 것 같아 더더욱 기대중. 여왕님은 대륙에도 몇 없다는 마검사거든요.

 어딘가에서 "그렇다고 저한테 업무를 전부 떠넘기시면 어쩌라는 겁니까, 으아아악!!!" 라고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지만, 착각이겠죠?

 제 2 멤버, 엘리엇 워커.
 위에서도 소개했지만 여왕님의 동생이자 전속 힐러입니다. 유용할 테니까, 라는 이유로 셀린이 끌고 가는 모양입니다만 사실은 제 손으로 키우다시피 한 조카가 험한 일을 겪지는 않을까, 사랑하는 동생이 여왕님을 따라 다니면서 고생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많은가봐요. 끌고가지 않아도 직접 따라갈 것 같은 모양새입니다. 벌써부터 약초며 아티펙트들을 챙기느라 바쁘네요. 전속 힐러라고는 하지만 사실 엘리엇은 공간마법 같은 복잡하고 어려운 마법에 훨씬 관심이 많아서 그 방면으로도 상당한 전문가랍니다. 공격 쪽에는 셀린보다 못하지만 보조계열 마법은 누구보다도 뛰어나거든요.

 제 3 멤버, 세실 워커.
 여왕님과 엘리엇 워커의 사랑하는 막내동생, 세실 워커입니다. 사랑받는 만큼 이래저래 고생도 많은 모양이지만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지요. 국가 연금술사로는 드물게 조용조용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서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지만, 연금술사입니다. 연금술로서의 재능은 종종 차를 끓이거나 음식을 하는데도 쓰인다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솜씨 좋은 요리사이기도 하고 집안일도 훌륭하답니다. 연금술사로서의 능력은 물론이고 여행 중 일행의 건강과 생활 편의까지 봐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제 4 멤버, 리니아 워커.
 세실 워커의 양딸이자 연금술 조수인 귀여운 꼬마아가씨입니다. 아직 어린 나이에 비해 굉장히 똘똘하고 부지런한데다 책임감 있는 어른스러운 아가씨예요. 아빠를 닮아서 요리도 잘하고 순수하고 착해서 아빠는 물론, 깐깐한 삼촌에게도, 고모인 여왕님에게도, 사촌인 공주님에게서 마저도 사랑을 듬뿍 받고 있습니다. 아빠랑은 달리 사랑받아도 고생하지 않는 것이 다행. 아직 특출나게 잘하는 것은 없지만 분위기 메이커로서 바지런히 돌아다니며 일행의 기운을 북돋아줄 거예요!

 제 5 멤버, 유진 바르비에.
 왕실 멤버들과는 별 관련이 없지만, 공주님을 구출하기 위해 파견된 신전의 기사님입니다. 전사로서도 프리스트로서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기사님. 금발에 하얀 갑옷이 눈부십니다만―이거이거, 너무 덜렁대네요. 어디 용이 있는 곳까지 제대로 걸어가기나 하겠어요? 신나게 뛰다 넘어지고도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만발. 리니아 워커가 마음에 들었는지 하루종일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아버지인 세실 워커도 삼촌인 엘리엇 워커도 표정이 심상치 않지만 눈치채지 못한건지 그저 행복해 보입니다. 이봐요, 용잡기 전에 늑대 사냥하게 생겼어요. 정신차려요.

 제 6 멤버, 노엘 바르비에.
 이 까맣고 하얀 소년은 성기사 유진 바르비에의 동생이자 왕궁의 정원사랍니다. 평소에는 말 없이 꽃 사이에 파묻혀 있기만 하는 조용한 소년이지만 사고뭉치인데다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형 때문에 종종 잔소리꾼이 된답니다. 땍땍거리고 말을 쏟아내면 주변의 정령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립니다. 노엘 바르비에는 주변의 모든 정령들과 대화를 나누고 부탁을 할 수 있는 정령사의 재능을 타고 나서 정령들이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거든요. 깔끔한 성격의 그는 아마도 세실 워커를 도와 일행의 뒷바라지를 도울 수 있을거예요.

 제 7 멤버, 미츠 웨버.
 장난꾸러기 소년 같은 그는 세실 워커의 죽마고우입니다. 한두살 많은 모양이지만 정말 친한 친구 사이에 그런 것은 아무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아요. 호쾌하고 다정한 성격은 모두의 의지가 되어줄 것이 분명해요. 뿐만아니라 상상할 수 없을만큼 섬세한 손재주의 소유자이이기도 합니다. 세밀한 손놀림이 아니면 활솜씨는 전혀 기대할 수 없지요. 저 멀리 날아가는 새도 한번에 맞출 수 있을만큼 훌륭한 궁수랍니다. 그 손재주는 활 뿐만 아니라 수리라거나 자잘한 소품만들기에도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길어질 여행에 큰 도움이 될거예요.




 이 제각각 용사들이 함께 모여서 과연 어떻게 공주님을 구해낼까요. 사루비아 공주님은 편안한 잠자리도, 맛있는 쿠키도, 세실 삼촌과 리니아 언니도 없는 생활에 진저리를 내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공주님을 구해주세요! 늦으면 어떤 보복을 당할 지 몰라요!

'story in my world > famillies's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진] 어리광  (0) 2009.04.11
[노엘] 나른한 오후  (0) 2009.04.11
나란히 낮잠을  (0) 2009.04.07
[노엘] 일상, 바라보다.  (0) 2009.03.31
기묘한 손님  (0) 2008.11.02
Posted by fad
,

 맑은 날이 좋았다. 햇빛이 쨍쨍하고 땀이 줄줄 흘러도―노엘이라면 오분만 있어도 현기증을 일으키겠지만―언제까지고 바깥을 뛰어다닐 수 있는 맑은 날이 좋았다.
 비 오는 날이 좋았다. 하루종일 빗속을 돌아다니다가 노엘에게 혼이 나고 호된 감기에 걸려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메마른 땅과 공기를 촉촉하게 적시는 비 내리는 날이 좋았다.
 흐린 날이 좋았다. 회색 구름이 파란 하늘을 덮으면 풀밭에 드러누워 시간가는 줄도 모른 체 흘러가는 구름을 헤아릴 수 있는 흐린 날이 좋았다.

 그 어떤 날씨도 좋아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은 하늘이 깨끗한 깊은 밤. 유진은 달과 별이 반짝이며 빛나는 어두운 푸른 빛의 밤하늘을 제일 좋아했다. 소중한 것과 닮아 있기 때문일까? 문득 돌아보니 노엘이 서있다. 언제나 눈에 닿는 곳에 있는 사랑하는 동생. 밤 하늘과 같은 빛을 띤 긴 머리칼이 바람에 하늘거렸다. 어쩐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 나 teacher Eli한테 가봐야해. 저번에 우산 빌린 거 안 가져다 드렸다!"
 "그래? 그럼 들렀다 가."

 진홍빛 두 눈이 싱긋 웃었다. 노엘은 엘리 선생님 출장 때 잠시 양호실을 공부방으로 쓰더니 어느샌가 매일같이 양호실에 들르고 있었다. 평소 한 사람과 오래 지내는 일이 없는 노엘이 엘리 선생님과 친해진 것은 형으로써 반갑기도 하고 조금 아쉽기도 하다. 웃으면서 양호실로 향하는 복도. 햇빛이 따뜻했다.




 엘리엇 워커(Eliot Walker)는 지금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어떤 곤란한 상황이냐 하면―,

 "이건, 이건 설마……!!"

 평소 제법 친밀하게 지내고 있는 제자―양호선생과 학생도 사제간이라 칭할 수 있다 가정한다면―가,

 "숨겨둔 딸! 엘리 선생님이 독신인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국가가 아는데! 옛날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을 하더니 '나, 네 딸을 낳았어,'라며 덥썩 애를 떠맡겼다거나!"
 "진정해…."
 "요새 매일매일매일매일 노엘이하고 같이 지내더니 혹시 '나는 차가운 도시남자. 임신 쯤은 아무 것도 아니지,' 라고 노엘이랑 샤바샤바해서 애를 낳았다거나!!! 그런거죠? 그렇죠?!"
 "그만 좀 해, 진아…."

 이렇게 복도에까지 다 울릴 큰 소리로 말도 안되는 오해성 발언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치만 봐봐. 머리색은 너랑 똑같고 지금 찌푸린 표정은 엘리 선생님이랑 꼭 닮았잖아.'라며 유진이 동갑내기 제 동생을 향해 신나게 떠드는 목소리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헛소리도 이 정도 되면 수준급이다. 노엘과 자신의 아이라니, 말이 되는 농담을 해야지. 구제불능 바보는 전용 조련사에게 맡겨두면 알아서 진정이 될테니 내버려두고 대신 엘리엇은 혹여 사랑하는 조카의 교육에 해가 될까 싶어 얼른 아이의 몸을 끌어당겼다.

 "린, 저런 것은 그냥 무시하면 된단다."
 "……."

 아이의 표정이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 걸린 시간 3초. 화가 났달지 뭔가 잔뜩 불만스러워 보이는 리니아는 자신의 말을 못들은 듯 하였다. 어찌해야할까 엘리엇이 고민하는 사이에도 유진의 어쩐지 즐겁게 들리는 음성은 계속 이어진다.

 "요즘 도시 남자는 임신도 할 수 있어. 영화에서 나왔다구!"
 "대체 언제적 영화를 본거야…."

 그러게 말이다. 엘리엇은 머리가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유진을 상대하고 있는 노엘은 이미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표정이었다. 청산유수로 쏟아져 나오는 유진의 말을 어떻게하면 아이가 듣지 못하게 할까 고민하는 새 리니아는 조심스럽게 엘리엇의 팔을 빠져나갔다. 허리에 두 손을 얹은 자세가 당당하기도 하다.

 "엘리 삼촌은 삼촌이지 아빠가 아니야. 제멋대로 오해해서 말을 부풀리지 마!"

 신나게 혼자 떠들던 유진이 말을 멈추고 노엘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선명한 진홍빛 눈 두 쌍이 동시에 바라보면 수그러들만도 한데 아이는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게다가 엘리 삼촌은 남자고 임신 같은 건 못해. 애초에 남자가 어떻게 임신을 해? 오빠 바보지?"

 빠르게 이어지는 말에 잠시 어른들이 말을 잃은 사이 아이는 자신의 말을 마무리 했다.

 "바―보!"

 베, 하고 혀를 내민다. 잠시 후, 양호실에서 발작하듯 커다란 웃음 소리가 터져나와 복도를 지나던 사람들이 놀라 미끄러지거나 물건을 놓친다거나 하는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나 뭐라나.




 밤하늘 빛 머리카락이 굉장히 예쁜 아이였다. 보는 순간 당장에 귀엽다고 생각했다. 엘리 선생님의 딸이 아니냐고 바보같은 소리를 꺼낸 것은 순전히 그 애 탓이었다. 조금 놀려주려는 마음이었다. 엘리 선생님이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닌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냥 아이의 반응이 궁금했다. 뭐, 이렇게 삐져버려서 이름조차 직접 들을 수 없는 상황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결과는 제법 기분이 좋다. 아이는 화가 나서 울그락 불그락 한 얼굴도 귀여웠다.
 삼촌을 기다리는 건지 눈조차 마주치지 않겠다는 의지인지 고집스레 문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를 관찰하고 있자니 시간가는 것이 지겹지 않았다. 아직 12살이랬던가―, 어리다. 조금 더 나이가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자세히 살펴보면 키가 조금 크다 뿐이지 마냥 귀여운 인상이었다. 강아지마냥 커다란 검은 눈에 젖살이 떨어지지 않은 뺨이 아까의 소동으로 발그레하게 물들어 깨물어주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노엘보다는 약간 색이 옅은 듯한 밤하늘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려다 손을 물린 것이 몇번째인지 몰랐다. 자꾸만 시선이 가고 손을 뻗게 되는 것은 노엘과 닮은 머리칼 때문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노엘을 연상시키는 밤하늘 아래 아이의 생동감 넘치는 표정은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노엘이 아이의 반이라도 닮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과 함께가 아니면 한꺼풀 얇은 막을 씌운 듯 표정이 사라지는 노엘을 볼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함께 있어도 언제나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해서 보이지 않으면 사라진 것이 아닐까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곤 했다. 노엘이 자신의 시야 밖에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노엘의 붉은 눈이 이 꼬마처럼 자신을 똑바로 바라봐온다면―,

 "풋."
 "뭐, 뭐야! 왜 웃어!"

 일순, 아까의 상황이 생생하게 떠올라 웃어버린 유진이었다. 털을 곤두세운 고양이마냥 잔뜩 긴장해 있던 아이가 놀랐는지 당장에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아, 뭐야. 역시 귀엽잖아. 정말 귀여워. 와락 껴안아서 부비부비 해주고 싶어!

 "……."
 "…왜 그래?"

 자신의 생각에 질려 머리를 감싸쥔 유진을 향해 아이가 다가왔다. 숙인 시야 아래로 자그마한 손이 들어왔다. 나는 로리콘이 아니야. 마음 속으로 열번씩 외우고 고개를 들었다. 까만 두 눈이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
 "으왓?! 뭐, 뭐하는거야!!"

 아이를 꼭 끌어안고 토닥토닥해주었다. 당황한 듯 바둥거리는 것조차 그저 귀엽다고 하면 정말 변태가 되는걸까.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으로 한숨이 멈추질 않았다.

 그래, 귀여우면 됐지.

 "자장, 자장. 착한 어린이는 잘 시간이야. 자자. 자장자장."
 "뭐?! 아직 5시밖에 안됐다구! 왜 벌써 자! 역시 오빠 바보지?"

 바락 소리를 지르는 것도 귀엽다. 으와아아, 계속 귀엽다는 생각만 하고 있어! 유진은 계속 한숨을 쉬면서도 아이를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해 와락 끌어안고 부빗거리자 아이가 으부부 하며 손을 휘둘렀다. 손이 제법 맵다. 아파―라고 칭얼거리듯 말해보았다. 그러니까 놔, 라며 당장에 땍땍거리는 대꾸가 날아왔지만, 뭐 어떠랴. 성희롱이라고 선생님한테 혼나기 전에 놓아주면 되겠지. 그치만 귀여운 걸―….
 



 "이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집에 가려면 둘 다 깨워야 겠죠?"
 "…그래야지."

 붉은 노을이 하얀 양호실의 침대를 물들인 풍경 속에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잠든 소년과 아이는 분명히 사랑스러웠지만―, 얼굴이 굳어진 선생님의 표정에 어쩐지 뒷일이 걱정되는 노엘이었다.

'story in my world > famillies's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진] 어리광  (0) 2009.04.11
[노엘] 나른한 오후  (0) 2009.04.11
[깜짝이벤트] 공주님을 구하자!  (0) 2009.04.10
[노엘] 일상, 바라보다.  (0) 2009.03.31
기묘한 손님  (0) 2008.11.02
Posted by fad
,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경쾌하게 리듬에 맞춰 뛰었다. 또각 딱 또각 톡톡. 두꺼운 구둣굽이 보도블럭과 부딪쳐 작게 소리를 낸다. 아, 탭댄스용 징이라도 박는다면 더 좋을텐데. 그치만 그랬다간 안그래도 무거운 구두가 더 무거워지겠지~. 안돼안돼, 그러면 발목을 접질리고 말거야. 통통 괜히 폴짝폴짝 뛰었다. 신호가 안바뀌어. 그냥 파다닥 달려가고 싶지만 조금만 참자. 빨간 불 저리가고 초록 불 이리오렴! 흥얼흥얼, 어딘가 음이 미묘하지만 아무려면 어때. 아, 초록색이다! 아까부터 동동거리며 시동을 걸어뒀으니 발진 준비―, 땅! 엄마야!

 "아직 빨간불이랍니다, 체셔고양이님."

 언제나처럼 흐릿하게 웃고있는 시이씨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워와서. 우아아, 깜짝이야. 귀신! 뿌, 해도 그냥 빙글빙글. 웃으면 기분나빠. 오데트는 엄청 놀랐는데. 귀신처럼 소리없이 천사님이 내려온 줄 알았어. 하얗고 하얀 색. 천사님의 색깔. 반짝반짝해. 파닥파닥 흔들자 목이 땡기지 않게 되었다. 맨날 블라우스를 움켜쥐어서는 곤란해요, 천사님. 흥. 아, 진짜 초록불이다! 아까 초록색은 뭐였을까나? 신호등보단 낮았을까나아―. 다음에 찾아봐야지! 초록불보다 진한 초록빛. 나뭇잎인가. 두리번 두리번해도 신호등 옆에 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 대체 뭐였을까나~.

 "길은 알고 가는 겁니까?"

 뒤에서 쿡쿡 웃는 것 같은 목소리로 시이씨가 말했다. 언제나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그렇게 말을 해. 정말로 소리를 내서 웃고 있는걸까? 하고 고개를 돌리면 어느샌가 시치미를 뚝. 못됐어, 천사님. 천사님은 착해야하는데 오데트 짝궁인 하얀 천사님은 심술궂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오데트의 또다른 짝꿍, 또다른 천사님을 만나는 날이다. 다섯살이 되기까지 언제나 함께였던 다른 천사님은 오데트와 천사님이 다섯살이 되는 날 사라져 버렸다. 오데트는 다섯살 생일이 기억나지 않아. 천사님 얼굴도. 사실은 천사님과 함께였다는 시간이 전혀전혀 생각나지 않아. 깜깜한 밤이야. 천사님은 어떻게 생겼을까? 어떤 목소리일까? 뭘 좋아할까? 오데트처럼 인형놀이를 좋아하고 팔랑팔랑 예쁜 드레스에 두꺼운 통굽구두를 신었을까? 오데트랑 천사님은 얼굴은 조금 달랐지만 눈은 다른 색이었지만 정말로 한 쌍 같다고 엄마, 아빠가 그랬어. 그럴까? 오데트랑 천사님 한 짝일까? 원래 한짝이면 바로 알 수 있겠지? 만약 못 알아보면 어떻게 하지? 두근두근, 가슴이 뛴다. 퐁당퐁당 발걸음이랑 같이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어쩐지 태어날 때부터 오데트랑 하나였다는 천사님은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하얀 날개가 달렸을 것만 같아!





 "와아아─!!!!!!!"
 "이런, 뛰지 마세요. 또 넘어지잖습니까."

 하얀 천사님의 잔소리도, 오늘만은 참아줄게!

Posted by fad
,
 소녀는 무슨 일에건 쉽게 적응했다. 놀람과 어색함은 한 순간 뿐이다. 기쁨도 슬픔도 행복도 괴로움도 아주 일시적인 것 뿐이다. 알고 있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다. 그저 이미 한 번은 겪은 괴로움을, 이미 한 번은 느낀 슬픔을 다시 한 번, 더 크게 느낄 뿐이다. 소녀는 생각했다. 기쁜 일도 미리 알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부럽다고 생각했다. 아마쿠사 아키라. 리히트가 자신을 알고 두번째로 사랑한다고 생각한 사람. 모든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 시간 앞에 누구보다도 당당한 사람. 소녀는 울었다. 나도, 기왕 미래를 먼저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거라면 차라리, 행복도 미리 느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내가 살아온 이십 구년, 짧은 인생은 두 배 큰 슬픔이 두 배 많이 찾아와 결국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그런 구조였다. 어째서, 어째서 신은 그리도 가혹하신가. 소녀는 신을 믿고 의지하고 받드는 자였다.

'story in my world > in tokyo & seoul'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긴 꿈.  (2) 2009.06.29
오데트 홈즈Ordet Holmes  (0) 2009.04.05
죽음에 대한 15제 _ 6.자학  (0) 2009.02.01
온통 새하얀 빛의 천사  (0) 2009.01.08
리히트, 아키라. 만남.  (0) 2009.01.08
Posted by fad
,
  사각사각. 연필이 종이에 스치는 소리가 정겨웠다. 손을 멈추면 소리가 멎는 것이 아쉽지만 잠시 고개를 들었다. 방과 후에서 저녁식사 전까지 매일 시간을 보내는 하얀 양호실의 풍경이 노엘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눈부신 오후의 햇살이 창을 건너 흰 커튼에 드리우고 창 옆에 자리한 책상 앞에 앉은 역시 햇빛에 하얗게 빛나는 금발이 보였다. 간간히 밖에서 떠드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종이 넘기는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는 양호실의 풍경은 그림 같았다. 소리를 내는 것이 죄스럽다고 느낀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남몰래 하고 있는 느낌이다.
 다시 손안의 책으로 신경을 돌리는 노엘의 눈에 시계가 들어왔다. 네 시 반. 슬슬 돌아가야 저녁시간에 늦지 않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지만 조금 더 머무를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하는 것은 욕심일까. 노엘의 얼굴에 희미하게 아쉬운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책상에서 고개를 들지 않는 단아한 옆모습을 곁눈으로 훔쳐보고 멀리 둔 가방을 끌어당긴다. 꺼내놓은 책과 필기구를 정리하고 업무에 바쁜 선생님의 곁에 섰다. 

 “차 드실래요?”
 “아아, 고마워.”
 “…….”

 의료계에서는 인지도가 있는 의사인 엘리엇은 학교 양호교사 업무 외에도 이래저래 일이 많았다. 강의며 헬프로 바쁘게 돌아다니는 탓에 노엘은 매일 양호실에서 방과 후를 보내지만 엘리엇이 없는 경우도 잦다. 무슨 일인지 바빠 보이는 엘리엇의 머그컵에는 다 식은 커피가 반쯤 남아있었다.

 ―솨아.

 세면대에서 컵을 씻는 건 몇 번을 해도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된다. 학교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싱크대가 없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교무실에서 일을 돕는 때가 많았던 노엘에게는 가장 큰 불만사항 중 하나였다.

 “선생님―인가.”

 머그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노엘 자신도 이유를 모르는, 갑자기 튀어나온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문득 양호 선생님이 떠올랐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새하얀 백금 발에 흰 가운, 신경질적인 표정을 한 투명한 사람. 저도 모르게 손을 뻗게 되어서 자신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스스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몸을 사리게 된다. 그저 그 곁에 있는 것이 행복해서―.

 “오늘은 레몬밤으로 할까.”

 저 상태면 일을 다 끝낼 때까지는 안 드시겠지, 라고 덧붙였다. 양호실로 돌아가는 발소리가 아무도 없는 복도에 조용히 울렸다.

'story in my world > famillies's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진] 어리광  (0) 2009.04.11
[노엘] 나른한 오후  (0) 2009.04.11
[깜짝이벤트] 공주님을 구하자!  (0) 2009.04.10
나란히 낮잠을  (0) 2009.04.07
기묘한 손님  (0) 2008.11.02
Posted by fad
,
 기억의 시작은 어딘지 알 수 없는 숲이었다. 밤인지 어두침침한 숲은 어딘지 익숙해서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본다. 기억이 있는 듯 없는 듯 하지만 친숙한 곳이다. 앞서 걷던 검은 로브의 누군가는 청년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함께 멈추었다. 발길을 멈추게 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지 쯧, 하고 혀를 찬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일이지만 일단 목소리가 낮은 걸 보아 남자인 듯한 누군가─는 청년의 앞에 되돌아와 팔짱을 꼈다. 가만히 노려는 시선이 검은 로브에 가려 얼굴도 보이지 않는데도 강렬하게 느껴진다. 조금 섬찟하다고 생각하며 청년은 헤죽, 웃었다.

 "안녕?"

 검은 로브에 휩싸여 있는 반응을 정확히 살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불쾌해 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거이거, 뭔가 잘못한건가? 작게 한숨 소리가 난 것도 같았다.

 "귀찮아졌군."

 뭐가 귀찮아졌다는 것일까. 이해는 가지 않지만 청년은 상대방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상대방이 무엇을 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말그대로 '아무것도 알고 있는 것이 없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이곳이 어디인지 하는 문제는 미뤄놓고라도 일단 자신의 이름부터 기억나지 않아서야. 하지만 청년의 앞에 선 그는 그런 사정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조금 빠르게 말했다..

 "내 이름은 게이트(Gate). 다른 세계에서 넘어오는 자들을 안내하기 위한 사자다."
 "여기가 어딘지 궁금하겠지. 이 곳의 이름은 웨버랜드(W.ever Land)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상식이니 기억해두도록."

 에헤. 청년은 다시 히, 하고 웃어보였다. 어찌보면 그냥 바보같아 보이는 표정에 게이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로브 탓에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게이트는 청년도 알아차릴 정도로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죽, 말을 늘어놓았다.

 "그대가 살던 세계는 어떤지 모르나 웨버랜드에는 여러 종족이 있지. 요정족으로 페어리와 드워프, 임프. 그리고 수인족이라 하는 동물과 융합한 사람들이 있다. 요정족의 페어리는 15~25cm정도 되는 작은 키의 소인족으로 밝고 낙천적인 성격에 진지해지질 못하는 소란스러운 종족이지. 동정심이 많아서 사람들 부탁을 잘 들어주긴 하지만 사고체계가 어떻게 된건지 일반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대책을 내놓기 때문에 가능하면 부탁하지 않는 쪽이 좋다. 드워프는 손재주가 굉장히 뛰어난 난쟁이족이다. 평균 키가 120cm정도 밖에 안되지. 다들 수염마니아에 술을 좋아하지. 드워프들이 만드는 것들은 기능성도 내구성도 좋다. 임프는 페어리보다는 조금 크지만 50cm를 넘지 않는다. 작지. 박쥐날개에 푸른색이나 녹색계열 피부색을 가졌다. 위험한 장난을 좋아하니 가능하면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아. 수인족은 말그대로 인간과 동물이 합체된 형태인데 주로 육지형, 조류&파충류형, 해양형으로 분류된다. 이쪽은 대충 들으면 어떤 기준인지 알겠지? 육지형은 육체파, 해양형은 마법파, 조류&파충류형은 그 중간으로 원거리 공격 무기도 선호한다."

 다다다다다다 내뱉어진 긴 설명에 청년의 눈이 크게 뜨였다. 흐에─, 하고 운을 떼더니 한마디 한다.

 "숨 안차?"
 "그래서,"

 청년의 말 뒤로 곧장 즉각적으로 다시 말이 이어진다. 아무래도 그냥 숨을 고른 것 뿐인 모양이었다. 청년은 얼떨떨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서?"
 "지금부터 골라라. 어떤 모습으로 갈 것인가. 네가 이 쪽을 구경하고 고르겠다고 했지만 그냥 지금 하는 게 나을 듯 하다."

 청년은 질문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두 눈을 껌뻑였다. 바보같이 벙찐 얼굴로 쳐다보는 모습에 게이트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네가 원하는 걸 고르면 돼."
 "모르겠는데."
 "…끙."

 게이트는 고민에 잠겼다. 청년이 멀뚱멀뚱 쳐다보고 침묵이 지났다.

 "아."
 "응?"
 "지금 그대로 가는 것도 괜찮다."

 다시 껌뻑껌벅. 청년의 시선에 게이트는 또 끙, 앓는 소리를 했다. 뭔가 설명방법을 찾는 지 말이 없는 게이트를 향해 청년은 툭 한마디 내뱉었다.

 "그냥 갈래."
 "하?"
 "간다구."
 "……좋아, 그럼 됐다."

 푹, 하고 한숨쉬는 게이트를 청년은 의아한 얼굴로 올려다 보았다. 괜히 짜증스레 흥, 하고 콧방귀를 뀐 게이트는 청년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그리고는 잠시 멈춘다.

 "왜?"
 "보기보다도 가늘군."

 헤, 청년이 웃는다.

 "그래?"

 그리고는 자기도 한번 잡아보았다. 오오, 하고 혼자 감탄하는 바보짓에 게이트는 다시 절래절래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이만 보내주지. 하지 마라!"

 신기한 듯 로브를 들춰보는 청년의 손을 탁 쳐내고 게이트는 다시 팔짱을 꼈다. 여전히 싱글거리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기억도 없는 게 너무 당당하잖아.

 "가면 뭐 좋은 거 있어?"
 "모른다."
 "그럼 나 여기 있으면 안 돼?"
 "……."

 게이트의 시선이 얼굴에 곧장 느껴져서 청년은 괜히 어깨를 으쓱하며 시선을 피했다.

 "네 이름은 에스트다. 에스트 아이렌."
 "에?"
 "나이는…원래는 20살이라고 들었던 것 같군. 지금은 17~8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그 정도다."
 "어떻게 알아?"
 "다 방법이 있다."

 부. 청년의 볼이 부었다. 어떤 사정으로 넘어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선한 미소를 가졌던 청년은 자신의 이름을 에스트 아이렌이라고 소개했었다. 장난기 가득한 눈빛이 아니면 표정 탓에 나이가 많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갓 스무살이 넘은 청년이라고 보기엔 너무…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띄고 있었다. 차근히 설명을 듣고 곰곰히 생각한 뒤 대답하는 모습은 누가보아도 믿음이 갈만한 청년이었다.
 완전히 이 곳으로 넘어오자 외양부터 훨씬 가늘어진데다가 이제보니 기억도 잃었지, 하는 짓도 어린애 같아져서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이제 헤어질 시간.

 "웨버랜드가 네게 즐거운 곳이 되길 바라지."
 "될거야."

 자신만만하게 웃는 얼굴은 조금 전과 닮은 것도 같다.

 "이대로 죽 가면 작은 마을이 나온다. 열심히 돌아다녀봐라. 도와줄 사람이 있을테니. 부탁이니 말썽은 부리지 말도록."

 에스트는 그대로 사라지는 게이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쩐지 웃은 것 같은데. 아닌가?"

 고민해 보아도 대답해 줄 사람은 모습을 감추었다. 에스트는 흠, 하고 게이트처럼 팔짱을 끼었다가 발을 땠다.

 "가면 뭔가 있겠지, 뭐."
Posted by fa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