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손이 천천히 베일을 걷는 동안 넓은 홀에는 소리 없이 정적이 내려앉았다. 베일 아래로 아이의 고운 얼굴과 눈처럼 깨끗한 은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통 새하얀 옷에 머리까지 새하얀 창백한 피부 빛의 어린아이는 하얗게 빛을 발하는 듯 했다. 베일 아래 눌려있었음에도 정전기조차 일지 않는 긴 생머리, 어린아이답지 않은 초연한 표정은 아이가 사람이기 보다는 신의 사자라는 느낌을 주었다. 작게 뒤척이는 소리마저도 크게 들리는 침묵 속에서 아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반짝이는 흰 속눈썹이 느리게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슈베린은 호기심으로 눈을 크게 뜨고 어린 사제를 바라보았다. 모든 어린아이들이 다 그렇듯이 성별을 구분할 수 없었지만 슈베린은 아이가 남자라고 확신했다. 루니안의 돌연변이, 남성 사제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었지만 천진난만한 황자는 의심도 없이 순수하게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이윽고 사제가 눈을 뜨고 반듯한 시선으로 슈베린을 바라보았다. 

“……?!”
 

짙은 붉은 눈이 혈향血香을 안고 슈베린을 조여 왔다. 슈베린은 몸을 뒤로 뺐지만 황금빛 옥좌에 앉은 그에게는 도망갈 자리가 없었다. 소리만으로 공포심을 자극하는 거대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것이 무어라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슈베린은 와들와들 떨며 고개를 저었다. 몸의 떨림도 움직임도 점차 커져갔다.
순간 슈베린을 옭아매던 붉은 눈이 사라졌다. 

“왜 그래?”
 

샤린이 작은 부채로 입을 가린 체 슈베린을 흘겨보고 있었다. 슈베린의 반응이 어지간히 수상한 것이 아니었던지 평소 슈베린을 두둔하는 일이 없는 샤린의 눈에는 걱정이 묻어있었다. 황제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녀의 장갑 낀 손이 슈베린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격하게 뛰던 황자의 심장이 차츰 평온해졌다.
 

“왜 그러냐니까.”
 

샤린이 대답을 재촉했다. 슈베린은 픽, 콧방귀를 뀌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샤린의 얼굴이 과격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외면하고 슈베린은 어린 사제를 살펴보았다. 그의 눈은 이제 루비처럼 맑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미처 진정되지 못한 심장이 사제의 성스럽기까지 한 분위기를 의심하게 만들고 있었다. 슈베린은 누이의 손을 가볍게 감싸 괜찮음을 알리고 작게 떨리는 손끝을 말아 쥐었다.
재상의 목소리가 홀로 홀 안에 울렸다. 

“이름을 고하시오.”
“하야르 유테입니다.” 

아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지만 단호하고 깨끗했다.
작은 소년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침착하게 다시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꺾어 몸을 낮추는 절이었다. 찰랑거리는 천에 가려져 정확한 동작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듯하게 황실예법에 따른 황제에게 바치는 인사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그리고 형제분들.”
 

소년의 미성에 홀 전체가 술렁였다. 대신들의 속닥임이 황제의 귀에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조용히,’라는 재상의 경고에도 소란은 굼뜨게 가라앉았다. 아실리아의 얼굴에는 변함이 없었다. 여황의 아름다운 얼굴은 사제가 갖추어서는 안 될 예의를 갖춘 것에도 나이어린 소년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내뱉은 것도 다 예상했다는 듯 태연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으니 설명해 주지 않겠소, 사제여.”
 

언제나처럼 느릿하게 이어지는 말에는 진중한 위엄이 실려 있었다. 그 무게는 그녀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융단 위의 사람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게 되어있는 알현실 전체의 구조, 그리고 황제의 옥좌의 높이로 인해 위에서부터 내리누르는 형태로 사람을 압박하게 되어있었다. 짓눌릴 법도 하건만 소년은 조금도 위축됨이 없었다.
 

“그것을 말씀 드리기 위해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소년의 시선이 살짝 이동했다가 다시 황제에게 돌아왔다. 시선만 살짝 이동하는 미세한 변화였기에 대신들과 뒤에 서있던 다른 루니안의 사제들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슈베린은 알았다. 아니, 알 수밖에 없었다. 소년의 시선은 슈베린을 지나갔다. 다시 누이에게 돌아간 소년의 시선을 따라 저도 모르게 옆을 보고 만 슈베린은 또다시 샤린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좌우에서 무엇을 하고 있건 황제와 사제의 대화는 이어졌다. 

“그렇다면 말해보라.”
“이곳에서는 아니 됩니다, 폐하.”
“그럼?”
“제가 며칠 머물러도 되겠는지요.”
“황궁은 넓어서 비는 방이 많지.” 

소년이 엷게 미소 지으며 황제의 앞에 허리를 숙였다. 두 사람은 몇 마디를 더 나누었다. 남는 것은 소년 혼자라는 것과 파티를 간소하게 축소시킨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간단히 이야기가 끝나고 황제의 퇴실 허가 명령에 사제들이 소리없이 조용하게 홀을 나갔다. 첫 세 걸음은 뒷걸음, 그리고 나머지는 그냥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예의지만 지키는 것은 하야르 유테라 이름을 밝힌 소년 하나였다.
관리들에게도 함께 내려진 퇴실 명령이었지만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사제들의 모습이 닫힌 문 너머로 사라지자 제각각 목소리를 높인다. 누이와 리넨이 두서없는 말들을 받아들이고 잘라내고 정리했다. 슈베린은 잠시 그 모양을 바라보다가 양해를 구하고 홀을 빠져나왔다.




성인 남자가 셋은 편히 뒹굴면서 잘 수 있을 듯 보이는 커다란 침대에 걸터앉은 하야르는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주어진 손님방은 호화롭기 짝이 없어서 안 그래도 또래에 비해 작은 아이는 한층 움츠러들어 있었다. 어지간한 서민 집보다 넓은 방 크기도 양 팔을 다 벌려도 두 아름은 남을 듯 한 거대한 샹들리에도 하야르에겐 무섭기만 했다. 제 몸보다 배는 큰 창가에는 몇 발짝 떨어져 구경할 엄두초자 내지 못했다. 창이 큰 만큼 한가득 넘어온 햇빛이 구석구석에 놓인 반짝이는 것들에 부딪혀 눈을 어지럽혔다. 은은한 빛이 감도는 신전에서만 살아온 하야르는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한 번 방안을 훑어보고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의 긴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며 방에 놓인 장신구인 양 희게 빛났다.  

“예쁘네.”
“?!" 

하야르는 화들짝 놀라 눈을 홉뜬 체 굳어버렸다. 소년이 모르는 새 열린 문가에는 흐드러진 금발을 매만지는 슈베린이 서있었다.
 

“그래봐야 나만은 못하지만.”
 

보란 듯이 얼굴 가득 비웃음을 띄운 체였다. 슈베린은 빠르게 말한 기세 그대로 거침없이 방을 가로질러 창가 티 테이블 앞 작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대로 하야르를 향해 차가운 시선이 꽂혔다. 슈베린은 정확히 뭐라고 표현하기는 어려웠지만 굉장히 기분이 나빠 보였다. 강렬한 감정이 얼굴에서도 몸짓에서도 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적의에 하야르는 당황했다. 슈베린은 톡하니 쏘아붙였다.
 

“너 정말 남자야?”
“그럼 아닌 것 같습니까?” 

고운 소년의 아미가 흉하게 일그러졌다. 슈베린은 그런 하야르를 보고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배부른 고양이마냥 나른한, 이겼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였다. 하야르는 그런 슈베린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용건은 그것뿐입니까?”
“기분 나빠?”
“예.”

하야르의 단호한 대답에 슈베린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기분 나쁜 건 난데 왜 네가 화를 내는 건지 모르겠어.”
 

소년의 붉은 눈이 슈베린을 향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것도.” 

그렇게 말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고 슈베린이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하야르는 다시금 인상을 찌푸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푹신한 양탄자가 발소리를 삼켰다. 슈베린이 소리도 없이 나타난 이유를 깨닫게 된 하야르는 안 그래도 불편하기만 하던 호화스런 궁이 더더욱 불쾌하게 느껴졌다.
 

“왜?”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괴고 있던 슈베린이 자신의 바로 앞에 선 하야르를 바라보았다. 의자에 앉아서야 간신히 눈높이가 맞았다. 정면으로 바라보고 선 슈베린에게서 여유가 사라졌다. 하야르는 그 모습이 고소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째서 슈베린이 자신의 행동 사소한 하나하나에 흠칫거리며 반응하는 건지 의문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하고 지레짐작해 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렇게는 보이지 않는다. 잠시 고민하던 하야르는 슈베린이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빨리 나가주셨으면 하는데요.”
“손님이 앉자마자 쫓아내는 건 루니안 교단의 예의인가?” 

처음 이 방에 나타났을 때부터 그랬지만 슈베린의 말에는 시퍼런 날이 서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알 수 없어 당황했지만 마구 휘두르는 칼에 두어 번 스치자 하야르의 얼굴에도 짜증이 새겨졌다.
 

“그럼 초대받지도 않은 곳에 쳐들어가서 화풀이 하는 건 하르미안 황가의 예의입니까?”
 

슈베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가 가늘어졌다. 그의 얼굴에서 희미하게 떠올랐다가 짙어지는 미소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짐작하기 어렵게 만들 뿐이었다. 얼결에 짜증을 내고 주춤거리며 눈치를 보는 하야르를 슈베린은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왕권과 신권은 서로 침해하지 않는 것이 관습이지만 세상은 힘의 논리. 대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다 원하는 대로 정세를 바꿀 수 있는 하르미안의 황실에 밉보인다면 신자도 적고 폐쇄적이라 세가 약한 루니안의 교단은 존속 자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날 때부터 사제로 태어난 총명한 소년은 그런 사실이 현실에 어떻게 적용 되는 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예의가 어떻다고?”
 

~ 2010/03/14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 좋아.”

황태자는 얼굴 가득 사랑스럽게 웃었다. 하야르는 외면했다. 그리고 갑자기 머리카락이 잡아당겨졌다.
 

“……이, 이건 무…!!”
“어린애는 좋구나.” 

슈베린은 하야르의 턱을 잡고 얼굴을 좌우로 돌려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소년은 발버둥 쳤지만 10살짜리가 어른에게 당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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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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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서 뚝, 사람이 떨어졌다. 허둥지둥 팔을 휘저으며. 하늘을 날 줄 아는 생물의 행동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멍하니 생각했다. 놀라운 상황이라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떨어진 그는 한참을 데굴데굴 구르더니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지 무사히 일어났다. 그는 한참 자신의 몸을 살피며 인상을 찌푸린 체 무언가 말을 했지만 뭐라고 하는 지는 몰랐다.
 그리고 다가온다. 에? 

 "안녕, !@$#^$%^$%" 

 인사 외에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말해야할까? 아, 아?
 그가 내 반응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다행히 그는 그대로 가버리지 않고 다시 말을 걸어주었다. ―사실, 도망가고 싶었지만. 사람은, 무섭다. 착해보이는 사람도 착하지 않다. 하지만 그는 하늘에서 떨어졌다. 사람 같지만, 정령일까? 모르겠다. 이 곳까지 데려다준 그녀는 정령인 줄 알았지만 용이었다. 

 "음, 저$(#&*하나?#(@&^*!)#$#&*린! 리그오빠라고 불러주면#$%%^$^!!#$%$%^돼?" 

 대답을 할 수 없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리그오빠는 말했다. 아까보다 더 아픈 얼굴이었다. 괜찮아? 걱정이었다. 

 "이름, 말해주면 안될까?" 

이번에는 알았다. 이름? 내 이름? 뭐였지? 기억해내는데 한참, 그리고 말하는데 한참. 말하는 것은 어렵다. 

 "……에어트…베레."
 "에어트베레? 예쁜 이름이네. 딸기―라고 불러도 돼?" 

 딸기? 딸기? 그 빨갛고 달콤한 것 이름. 왜 딸기지?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다. 상냥하게 말을 건다. 

「네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니?」 

 몰라. 근데 누구야? 풍경이 흐릿하다. 리그오빠가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답해야 해. 

 "응." 

그리고 그 짧은 말을 힘겹게 내뱉는 사이 어렴풋이 떠올랐던 영상은 사라져버렸다. 리그오빠가 웃었다. 같이 살짝 입꼬리가 올라간다. 웃어도 되나? 바짝 앞에 앉아서 눈이 맞았다. 리그오빠는 키가 크다. 

 "그런데 다친 데는 없어? 일단 내가 피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묻는거야." 

 이번에는 조금 천천히. 내가 말을 잘 못한다는 것을 안 것 같다. 친절한 사람. 리그오빠는 친절한 사람. 

 "다친 데? 아니." 

 고개를 젓는다. 

 "없어."
 "없어? 그럼 다행이다." 

 그리고 리그오빠는 활짝 웃었다. 예쁘다. 같이 웃었다. 어쩐지 마음이 편했다. 괜찮아. 리그오빠는 착한 사람이니까 괜찮아. 에, 근데 착한 사람은 뭐였지? 생각하는 사이 리그오빠가 머리를 붙들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괜찮아? 떨어져서 아픈가봐. 아프면 고쳐야돼. 아파? 아! 

 "팔…."
 "응?"
 "팔에, 피나."
 "아아, 괜찮아. $$%$ 튼튼하거든. 건강하고 %$$^^빼면 시체야. 걱정하지마." 

 그의 팔에 긁힌, 아니 긁혔다기엔 커다란 상처가 있었다. 아까 데굴데굴 굴러가면서 생겼다. 뭔가 말하지만, 다 모르겠어. 그치만 아파보여. 아파. 리그오빠는 웃는다. 안 아파? 괜찮아? 시체는 죽은 거잖아. 죽는거야? 

 "치료 해야 돼."
 "괜찮…. 알았어, 알았어. 그럼 저 집에서 치료 받을 테니까 같이 갈래?"
 "같이……?" 

 같이? 같이? 뭐더라? 같이? 리그오빠가 무언가 손짓 발짓으로 설명을 한다. 말은, 거의 못 알아들었다. 미안하다. 

 "#%$^& 갈 데 있다면 #$#% 바이바이 해야겠지만." 

 아냐, 나 갈 데, 없어. 

 "갈 데 없어."
 "그럼 같이 갈래?" 

 아, 같이. 같이. 알았다, 같이. 

 "응."
 "그래. 그러면 가자." 

 같이 가자. 같이 가! 조금 행복해져서, 베시시 웃어서. 얼굴을 숙였다. 못봤나? 리그오빠는 언덕 꼭대기에 있는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가슴이 싸늘하다. 응, 그래도 좋아. 같이 가자.
 문은 닫혀 있었다. 어떻게 해야하지? 문을 열까? 물어보려고 리그오빠를 보았다. 리그오빠는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문을 두드린다. 똑똑, 하고 나무 소리가 난다. 왜 무서워해? 리그오빠의 얼굴이 굳어있다. 무서워? 이 집 무서워? 나오는 사람도 목소리도 없었다. 리그오빠가 무서워보여서 가자고 할까 했는데 뭐라고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어서 옷을 잡아당기려고 리그오빠와 잡고 있는 반대편 손을 들었다. 그런데 리그오빠가 다시 똑똑 소리를 낸다. 왜? 그리고 사람이 나왔다. 

 "음…, 저기…."
 "외부인…?"
 "예? 아, 예에."
 
 집에서 나온 사람은 여자였다. 온통 새카맣다. 머리도 옷도 그리고 뒤에 달린 날개도. 정령인가? 날개. 바람의 정령? 하지만 바람의 정령은 까맣지 않아. 그럼 누구지? 용인가? 하지만 그녀는 까맣지 않았어. 

 "들어오세요. 메리아 어머니, 외부인이 오셨어요." 

 그리고 리그오빠는 여자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난 그 뒤를 따라 간다. 무섭지 않아? 리그오빠 얼굴이 더 꽝꽝 얼었다. 아픈데 무서운 데. 괜찮아? 아픈 것 나빠. 무서운 것도 나빠. 나쁘고 나쁜데 괜찮아?
 집 안에는 아주머니가 계셨다. 안경을 쓰고 숄을 두른 다정한 얼굴의 아주머니. 무서운 곳 아닌가봐. 하지만 모른다. 날 보고 얼굴이 찌그러지고 화를 낼지도 몰라. 리그오빠 뒤에 꼭 붙어있는다. 

 "어서오세요. 외부인이라고 하셨지요. 나는 암룡술사 메리아. 이쪽은 내 보좌룡인 라루카. 그쪽은?"
 "아, 저는 리버그린입니다. 이쪽은 에어트베레.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실례? 에? 실례는 음, 잘못했을 때. 왜 실례? 에? 하지만 리그오빠가 하니까. 해야할 것 같아. 다들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는다. 리그오빠는 허리를 숙이고 실례합니다, 라고 했다. 

 "실례합니다…." 

 들렸을까? 목소리가 작아서 안 들릴 것 같아. 무섭다. 리그오빠 옆에 더 바짝 붙어 선다. 하지만 아줌마 웃는다. 화 안내? 

 "흠, 두 사람 다 좀 씻는 게 좋겠네요."
 "아하하. 좀 그렇긴 하네요." 

 씻어? 씻는 건 물에 씻는 거. 기분 좋아. 그치만 리그오빠 아파. 

 "리그오빠, 팔."
 "어, 나? 아, 맞다, 맞다. 잊어버리고 있었네. 그러고 보니 다쳤었지." 

 리그오빠 웃는다. 말이 빨라서 알아들었나 몰랐나 모르겠는 기분. 리그오빠 상처는 피가 나서 아까보다 아파보인다. 

 "아프지 않아?" 

 사실은 더 물어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말하는 법 배우고 싶어. 리그오빠가 머리를 토닥토닥 해준다. 오빠도 많이 해줬었어. 응? 오빠? 누구지? 몰라. 잘 기억 안나. 그치만 기분 좋다. 곧 아줌마와 여자가 와서 리그오빠 상처를 치료해준다. 다행이야. 안 아플거야. 옆에 꼭 붙어 있으면 아플 것 같아서 얌전히 있었다. 괜찮지? 하얗고 얇은 옷으로 오빠 상처를 감아준다. 상처에도 옷을 입히는구나. 

 "그럼 두 사람 다 이제 씻도록 하세요."
 "예입. 딸기야. 씻고 와―."
 "리그오빠도…." 

 큰 소리로 말을 하는 건 조금 쑥스럽다. 까만 여자를 따라서 간다. 하얀 방. 미끌미끌하다. 어떻게 해야하지? 물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 가만히 있었다. 어떻게 하지? 

 "왜 그래요?" 

 까만 여자가 말을 건다. 이름이? 이름이? 

 "몰라. 어떻게?"
 "…아…." 

 여자는 잠시 나갔다가 오더니 나를 붙들었다. 에? 왜? 혼나? 혼나? 

 "물은 여기. 비누는 여기." 

 비누?
 눈만 깜빡깜빡. 물로만 여자를 보며 조심조심 씻기 시작한다. 그녀는 잠깐 지켜보다가 말한다. 

 "죄송합니다." 

 뭐가? 잘못했어? 그녀는 나를 잡고, 씻겨주었다. 창피하다. 하지만 기분 좋아. 작게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많이 들었던 노래. 익숙한 노래. 흥흥흥, 소리만 있는 노래. 

 "……."
 "……?"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자 그녀가 어느샌가 손을 멈추고 나를 보고 있었다. 노래 부르면 안돼? 조용히 해. 

 "예쁜 목소리." 

 작게 그녀가 중얼거렸다.
 다 씻고 나가니까 리그오빠가 있었다. 아까랑은 다른 옷. 그런데 이상하다. 뭐가 이상하지? 모르지만 이상했다. 재밌어 보인다. 나도 해볼까? 하지만 어떻게 하는 지 모르겠다. 리그오빠와 아주머니는 무언가 얘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잘 모르겠어. 빨라. 

 "딸기야―, 같이 갈래?" 

 다른 건 다 못 알아들었지만 이것만은 알았다. 응! 같이 갈래. 

 "응." 

 리그 오빠의 손을 잡는다. 같이 가자. 어디론가 같이 가자.
 어디선가 노래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다.

「딸기야, 같이 노래할까?」
「응! 노래! 노래해줘!」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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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하늘을 나는 사이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 잠깐 사이 꿈을 꾼다. 분홍빛 하늘을 헤엄치는 꿈. 그 곳에는 천사가 날았고 달콤한 향이 났다. 그 환상 같은 꿈에서 채 깨어나지 못한 아이의 어깨를 감싸 안는 손이 있었다. 

 “괜찮니?”

 상냥한 목소리에 아이는 반짝 눈을 뜬다. 코끝에 아직도 감도는 꿈속의 향기.

 “자는 걸 깨워서 미안해.”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하나도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아이는 그런 것은 제대로 눈치 채지 못한 듯 멍한 얼굴로 여인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입. 아이는 입을 벌려 소리를 내려고 노력한다. 쉽게 되는 일은 아닌 듯 바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 하지만 아이는 포기하지 않고 입을 뻐끔거리다 드디어 소리를 낸다. 여인은 그것을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어차피 날아가는 중이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기는 했겠지만.

 “괜찮아. 안 졸려.”

 더듬거리며 이어지는 말에 여인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렸다. 아이의 목소리는 작고 가늘었지만 카나리아처럼 고왔다. 그녀는 아이를 끌어당겨 머리를 쓸어주었다. 산과 숲에서 혼자 자란 아이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어 붙들고 있는 어깨도 다른 손에 닿은 머리카락도 흙투성이였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지 말 했던가?"

 아이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코세르테르로 가고 있어."
 
 "코세르테르?"

 아이의 흙먼지나는 몸에서 유일하게 맑게 제 빛을 내는 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주목했다. 여인은 웃으며 설명한다.

 "들어본 적 없니?  거기엔 정령들이 있고 수인과 어린 용들, 그리고 선생님인 용술사들이 있지. 사실 나도 가보는 건 이게 처음이야. 코세르테르에 대해서는 인간 세상에서도 전설처럼 전해온다고 하던데."

 아이는 대꾸가 없었다. 전혀 달라진 것 없는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는 아이의 눈빛에서 제촉이 느껴졌다.

 "하긴 넌 모를 수도 있겠구나."
 "용, 이야?"

 응? 하고 여인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앞뒤 설명이 없는 아이의 말을 잠시 알아듣지 못한 여인이었지만 곧 스스로 답을 찾아낸다.

 "나 말이니?"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당황했다가, 이내 웃어버린다.

 "아아, 그러고보니 용을 본 적은 없겠구나."

 그리고는 까르륵 하늘 저 멀리까지 퍼져나갈 웃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아이는 얼굴이 발갛게 되었다.

 "바람 정령―, 이라고 생각했어. 날개 없어서 이상했지만…."
 "그럼 날개 없는 바람의 정령이 어디있니."

 그리고 다시 깔깔거리는 웃음이 이어진다. 그리고 여인의 웃음소리가 이어질수록 아이의 어깨는 움츠러들었다. 한참을 웃다가 서서히 웃음을 멈춘 여인은 아이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아이가 고개를 들자 여인의 은빛 눈과 마주쳤다. 세로로 긴 동공이 인상적이다.

 "그래, 나는 네가 있던 숲 근처에 살던 풍룡이란다. 내가 널 이대로 데리고 살수도 있겠지만―, 역시 인간의 아이를 데리고 사는 건 마을 사람들이 찬성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게 얘기하고 여인은 아이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덧붙였다.

 "그리고 너도 적으나마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게 좋겠지."

 아이는 얼핏 듣고 고개를 갸웃 했지만 여인은 이내 아래를 가리켰다. 저 아래, 벌써 코세르테르가 보인다. 자라고 싶었던 장소, 축복받은 땅. 이 인간의 아이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어린 시절을 가질 수 있을거야. 그녀는 빠르게 땅으로 떨어졌다. 아이가 무서운 지 그녀의 옷자락을 꼭 붙들었다. 가까운 집 앞에 내려주고 이윽고 아이와 작별. 아이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를 붙들지는 않았다. 이름도 묻지 않고 헤어지는 것은 더 정을 붙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짧은 만남에 큰 아쉬움은 너무 슬프니까.

 아이, 에어트베레라는 이름의 소녀가 처음으로 이름을 말할 상대를 만난 것은 그리고 조금 후. 그녀가 떠나간 하늘에서 떨어진 소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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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와 변함없는 하루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잤다.
 언제나와 변함없는 하루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잤다.
 언제나와 변함없는 하루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잤다.

 언제나와 조금 다른 하루였다. 하늘을 날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하늘을 보는 것. 울창한 나뭇잎을 해치고 올라가 막 동이 트기 시작하는 붉은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하루의 시작. 땅에 내려오면 아직 어두운 숲 속을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찾는다. 천천히 걸으면서 구석구석 살피다보면 먹을 것이 있다. 나무 뿌리 사이에 숨은 버섯, 먹을 수 있는 꽃, 나무 열매. 아직 여름이 깊지 않은 때여서 종류만 잘 가리면 풀이나 나뭇잎도 먹을 수 있는 것이 많다.
 낮이 되면 적당히 배를 채운 후 햇볕이 따뜻한 자리에서 노곤노곤 낮잠을 잔다. 요즘은 아직 덥지 않아서 낮에 움직이는 것이 훨씬 먹을 것이 많지만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자는 낮잠을 포기할 수 없다. 이제 여름이 되면 더워서 할 수 없을테니까.

 「일어나, 일어나라니까」

 흔드는 손에 눈을 뜨니 눈앞에는 나무의 정령. 요 몇일 뿌리를 배게삼아 잠들었던 나무의 정령이었다. 그의 옆에는 성인 여자의 모습을 한 바람의 정령이 있었다. 한참 빠르게 말하는 것을 쳐다보고 있으니 나무의 정령이 천천히 말을 걸어왔다.

 「혼자 살지?」

 끄덕 끄덕.

 「사람들하고 같이 살고 싶지 않아?」

 도리 도리.

 「왜? 사람들하고 같이 살면 안 굶어도 되고 편하잖아」

 도리 도리.

 「왜? 힘들면 천천히 말해봐」
 「으…」

 두 정령은 기다려 주었다. 천천히 말을 찾을 수 있었다. ―말한 것이 언제적 일이더라?

 「무서…워」
 「무서워? 사람이?」

 끄덕 끄덕. 무서워. 사람들은 무서워. 그러니까 마을에는 가면 안돼.

 「무슨 일이 있었니?」

 사람들은 침을 뱉고, 때리고, 무서운 눈으로 쳐다본다. 그러니까 무서워. 그렇지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설명을 하려다가 무서워졌다. 정령들은 자기들끼리 빠르게 무언가를 얘기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얘 떨고 있어요」
 「그럼 그만 두죠. 이정도면 괜찮다고 보는데. 이대로 혼자 생활하게 두는 것도 불쌍하니까 데려가 주세요」
 「그러게요. 이런 모습을 보고 이대로 두는 것도 그 나름대로의 죄겠지요」

 그리고 여자가 다가왔다.

 「나랑 같이 가자. 혹시 높은 곳 무서워해?」

 도리 도리.

 「자, 그럼 손 잡고」

 여자의 손은 따뜻했다. 조금 신기하고 어색해서 손을 움츠리자 더욱 세게 잡아왔다. 여자는 나무의 정령에게 인사를 하더니 나와 눈을 맞추고 웃었다. 예쁜 사람이었다.

 「가자」

 하늘을 날았다. 처음으로 가까워진 하늘은 생각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날아갈 수 있다면 금방 닿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하늘은 높고, 또 넓었다. 바람이 시원했고, 꼭 잡은 여자의 손은 따뜻했다. 발 아래 넓은 세상은 아래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숲도 도시도 그저 신기하기만 할 뿐. 그 커다랗던 나무가 내 발보다도 작아보였고 도시의 사람들은 너무 작아서 보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오랜 시간 비행하는 동안 나뭇잎 아래서 보던 것과는 달리 뚜렷하게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높디 높은 산맥을 넘어 도착한 작은 마을에는 상냥한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그 날은 처음으로 행복을 느낀 날이자 처음으로 무섭지 않은 사람을 만난 날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것은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만남이자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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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에 걸리던 그 여고생도 볼 겸 동시에 들리는 타닥, 하는 소리에 문득 뒤를 돌아보니 지하에서 나온 듯한 고양이 한 마리가 아파트 현관문 앞에 등을 보인 체 서있었다. 무언가를 찾는 듯 안쪽을 바라보았다가 바깥쪽을 바라보았다가 하며 고개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고양이 특유의 재빠르면서도 부드러운 움직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 고양이는 굉장히 예뻤다. 단순히 어둠 속에서 아파트 안의 오렌지색 등에 비추고 있는 탓인지도 몰랐지만 고양이는 털이 복슬복슬해서 토실토실해 보일 뿐 아니라 등의 누런 털에서 배 쪽의 하얀 털로 이어지는 그라데이션이 굉장히 부드러워서 여러모로 포근해보였다. 주저앉으며 엉덩이를 감아 말려있던 꼬리도 다른 고양이들보다 둥글넙쩍하니 통통해 보이는 것은 내가 고양이에 대해 잘 모르는 탓일까 아니면 그저 조명의 마법이었을까. 이제 와서 기억을 더듬어봐야 분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고양이의 등에는 흐릿한 줄무늬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 부연 그라데이션은 줄무늬 모양으로 번져있었던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고양이는 잠깐 두리번거리면서 나와 눈을 두어 번 마주치더니 아파트 안쪽을 보고 앉았다. 그리고 가끔 고개를 돌리기는 했지만 대부분 나와 시선을 마주한 체로 앉아있었다. 눈을 맞추고 있었다는 것에 그 고양이가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생각에는 그랬다. 고양이는 얼굴도 온통 누런 노란색이어서 ―예뻤다. 코까지 노란빛. 이것만은 조명 때문이 아닐 것이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솔직히 아파트 조명이래봐야 현관 밖에 있는 고양이에게 제대로 닿는 거리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조명발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 예쁘다고 생각한 것만은 틀림없다. 온통 사랑스러운 누런빛. 예뻤다.
 
아, 그런데 그렇게 눈을 마주보고 있었던 것은 길지 않았다. 나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고양이에겐 반가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누런 고양이의 뒤로 다가온 검은 줄무늬 고양이 한 마리가 누런 고양이의 엉덩이에 코를 들이밀었다. 냐―. 검은 고양이가 소리를 내자 또, 냐, 하고 누런 고양이가 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가버리려나, 생각하니 불이 깜빡하고 꺼져버렸다. 누런 고양이는 검은 고양이와 이야기하다가 일어났다. 그대로 마주본 두 마리 고양이는 이내 소리도 없이 검은 고양이가 나타난 방향의 반대쪽 뒤로 달려가 버렸다.

 나는 계단을 올라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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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데트 홈즈는 어수선한 교실 안을 한번 휘둘러 보았다. 스쳐가는 시선 속으로 검은 두 눈동자가 보였다. 하지만 그대로 스쳐간다. 굳이 그의 의문에 대답해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폰 아르님이라는 성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 혈통은 물려받은 데모닉 오데트는 일련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다른 생각에 잠겼다.
 안젤리크가 쓰러진 이유는 알고 있다. 그녀는 강한 사람이지만 신체의 연약함은 그 정신을 버텨내지 못했다. 오데트는 굳이 안젤리크를 깨울 시도는 하지 않았다. 잠시 잠들어 있어도 좋을 것이다. 본인이 거부한다 하더라도 데모닉의 정신은 방대하여 휴식을 취할 기회는 극히 드무니 이런 기회를 굳이 자신의 손으로 걷어낼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물론 잠들어있는 중에도 절대 생각은 멈추지 않을 테지만.

 "오데트, 오데트 크리스토펠!"

 힐끔 올려다보자 단호한 표정의 루시안이 있었다. 허리에 양 손을 짚은 소년은 오데트의 반응이 평소같지 않아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좋단말이지, 천진난만하다는 건.

 "언니가 쓰러졌잖아. 왜 꼼짝도 안하는 거야."

 잔뜩 노려보는 시선에서 고개를 돌리고 의자에서 뛰듯이 일어섰다. 사뿐사뿐 구름 위를 걷듯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실을 빠져나간다. 뒤에서 버럭거리는 루시안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워. 속으로 말하고 오데트는 언니가 실려나간 경로를 따라갔다. 보리스가 들처업고 나갔겠지. 보지 않아도 환하다. 언니한텐 좋은 일일거야. 안제는 유령을 보는 것을 싫어하니까.

「꼬마 공주님, 무슨 생각해?」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 불쑥 시야 안으로 들이밀어졌다. 오데트는 베, 하고 혀를 내밀곤 그를 제쳤다. 그닥 대화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안젤리크처럼 쓰러지거나 하지는 않지만 오데트 역시 자신이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했다. 한번에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는 자신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오데트의 머릿속에는 그때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불타는 집. 처음만난 알폰스의 목소리. 그 때 있었던 일을 마법같이 그대로 그려낼 수 있었다. 왜 아버지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버지가 아니라 집이 떠오르는 걸까. 이유는 알고 있었다. 그 집이 타버림으로 인해서 안제와 오데트에게 있었던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완전히 사라졌기에. 그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 느껴버렸기에. 아버지, 어머니, 큰언니의 얼굴도 한번씩 떠올려 보았다. 아무런 감흥이 없는 자신이 쓰러지는 안젤리크의 옆모습과 대조된다. 이렇게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면 좀 더 버텨보지 그랬어요. 데모닉이 세운 계획에 이길 수 있을리는 없었겠지만.
 가족들이 참수되는 광경을 어른들은 보여주지 않으려 했지만 오데트는 보았다. 안젤리크는 오데트를 말렸지만 끝까지 붙들지는 않았다. 몰래 숨어들어간 처형대에서 공화정을 쓰러뜨린 주역이 아르님 가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걸 알자마자 곧장 떠올릴 수 있었다. 초상화조차 본 적 없는 데모닉 조슈아의 이름. 아르님 집안이 어린 후계자. 현 아르님의 공작의 이름은 지워버렸다. 그가 그런 책략가가 아니라는 것쯤은 어린 오데트가 배운 극소량의 지식으로도 충분히 판단할 수 있었다. 고작 12살이었지만 오데트는 알고 있었으니까. 자신이 데모닉이라고.
 아르님 집안의 재앙이자 축복 데모닉에 대한 것을 소문으로 듣고 당장에 흥미가 생겼다. 아무도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려주지 않았지만 오데트는 데모닉에 대해 조사했다. 모나 시드 학원에 다니고 있다는 현 데모닉 조슈아에 대한 정보를 주워듣기는 쉬웠다. 아직 안젤리크와 오데트를 어린 아이라고 귀엽게만 생각하는 선생님도 쌍둥이를 그저 총명한 딸들이라고 좋아할 뿐인 부모님이나 언니도 오데트가 궁금하다는 듯 물으면 뭐든지 알려주었다. 이상하다는 생각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걸 오데트는 알고 있었다. 아르님 가문은 본래 공작가로 공화국의 적이다보니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지만 오데트는 그 어렴풋한 정보만을 가지고 사실을 구성해 나갔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웬일이야, 에타스?"
「음? 뭐가?」
 "걱정을 다해주고."

 오데트의 표정이 '정말 궁금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에타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 아가씨를 한대 때려줘야 하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오데트는 헤죽 웃을 뿐이었다.

「연기하지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데트가 대답했다.

 "뭐가 연긴데?"

 에타스는 짜증스레 흥, 하고 콧김을 내뿜었다. 오데트는 그 모습을 보고 성난 물소 같다며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에타스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오데트를 째려보았지만 아이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멀쩡해.」
 "그래?"
「그래. 그냥 정신적인 충격일 뿐이야.」
 "그럼 됐어."

 오데트는 에타스를 내버려두고 퐁퐁 뛰어갔다. 언니가 어디쯤 누워있을까, 라고 흥얼거리는 즐거운 목소리에 걱정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즐거운 아이. 그것이 오데트 크리스토펠, 아니, 오데트 홈즈. 데모닉 오데트. 그녀의 방대한 정신용량은 가벼운 감정의 동요를 모두 집어 삼켜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조금 이상한 여자아이로 보이게 했다. 스스로가 억누를 수 있는 감정의 잔량이 어느 정도일지는 본인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봐야 남의 일이지만. 에타스는 괜히 걱정하고 있는 자신이 짜증나 마음 속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은 후 오데트를 따라갔다. 그녀는 어느샌가 안젤리크가 있는 방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추리해서 찾아낸 건지 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굉장한 속도다. 에타스는 이런 인간말고는 이야기할 상대가 없는 자신이 처량해졌다.
 하지만 그녀라도 있으니까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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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조슈아 폰 아르님은 굉장히 곤란한 상황에 빠져있었다. 아니, 최소한 그렇게 생각되는 상황이었다.

 “왜. 좋잖아. 여자애가 따라다니고. 아, 너한테는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던가?”

 믿고 있지만 이런 일에 있어서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친구는 도움을 청하는 조슈아에게 그렇게 비웃음을 던지고는–,

 “대체 왜 그렇게 조슈아를 따라다니는데.”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다.
 막시민과 눈을 마주친 여자아이는 안 그래도 커다란 금빛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발뒤꿈치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불안정한 자세로 서 있었고, 그 결과 그녀의 놀라울 정도로 풍성한 금빛 곱슬머리가 두 소년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녀가 대답했다.

 “에헷.”
 “…….”
 “…….”

 잠시 후, 조슈아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마에 손을 짚고 자신의 앞으로 돌아온 막시민이 고개를 절래 절래 저으며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항복. 쟤는 못 이기겠다.”
 “…….”
 “왜.”
 “아니, 네가 말싸움에서 지다니 어쩐지 신기해서……."
 “아예 아무 말도 안하는 걸 어떻게 이기라는 거냐!”

 막시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고대로 이어 화풀이하듯 신경질적인 잔소리가 쏟아졌다. 덕분에 조슈아는 갑자기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온 막시민의 말을 받느라 한참 진땀을 빼야했다.

 “사이좋네?”

 막시민이 화가 잔뜩 섞인 발걸음으로 자리를 뜨자마자 들려온 목소리에 조슈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아까와 다를 것 없는 자세로 서서 뒷짐을 지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 있는 소녀는 조슈아가 대답을 하든 말든 상관이 없다는 듯 인형 같은 눈으로 소년을 빤히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결국 대답을 해야했다.

 “그렇지.”

 그리고 덧붙였다.

 “그럴 거야.”

 조슈아의 말을 들은 건지 만 건지 여자아이는 눈만 더 크게 뜨고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잠시 그녀의 말을 기다리던 조슈아가 뭔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가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조슈아는 순간 움찔하고 물러섰다. 그녀의 해맑은 웃음소리는 기억을 일으켰다. 잊을 수 없는 데모닉이 아니더라도 선명히 기억날 풍경. 천진난만한 웃음을 얼굴 가득 머금은 금발의 아가씨. 조슈아 폰 아르님의 누이, 이브노아 폰 아르님. 그녀는 누이와 닮아있었다.
 하지만 그런 조슈아의 상태와는 관계없이 소녀는 제 좋을 때까지 숨이 넘어갈 듯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리고서는 숨도 고르지 않고 갑자기 제자리에서 빙글 돌더니 폴짝 뛰어 조슈아의 발끝에 자신의 발끝을 붙이고 섰다. 고개를 완전히 꺾은 체로 조슈아를 올려다보는 눈이 다시 동그랗게 뜨였다가 사르르 미소 지었다.

 “내 이름은 오데트. 오데트 크리스토펠.”

 의미를 알 수 없는 발언에 조슈아가 뭐라 대답하지 못하자 오데트는 다시 방긋 웃고는 뒤로 한 발짝 가볍게 뛰어 물러섰다. 뭔가 말할 것 같은 얼굴이었으나 오데트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째선지 조슈아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발끝으로 땅을 콩콩 차고 있으니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조슈아는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 놀라고, 또 오데트의 일련의 동작이 자신이 보기에 한 치의 흠도 없었다는 점에 또 놀라고 말았다.

 “잘 부탁해요, 데모닉 조슈아. 절대 잊어버리면 안 돼?”

 수수께끼를 내는 듯한 말투였다. 조슈아가 데모닉인 것을 알고 있다면 잊어버릴 수 없다는 건–. 아, 하긴. 관계자 외에는 잘 모르는 사실이지. 조슈아는 의문을 띄웠다가 스스로 답했다. 이것은 거의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원래 생각이라는 것이 그렇지만 데모닉의 사고속도는 일반인의 그것에 비할 수 없는 것이다. 한데, 이 오데트라는 여자아이는 마치 ‘이제 알았지?’라고 말하는 듯 미소를 띠고 헤헷, 웃었다. 그리고 조슈아가 뭔가 말을 꺼낼 틈도 주지 않고 “안녕! 나중에 또 봐!”하고 등을 돌려 파닥파닥 뛰어가 버렸다. 그런 동작은 마치 아직도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마냥 불안정해서 조슈아는 아까 자신이 본 것이 눈의 착각이었던 것은 아닌지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결코 자신의 눈과 머리를 의심할 수 없는 조슈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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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청년이 황제의 앞에 섰다. 그녀의 지위에 따른 권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화려한 드레스 자락 앞에 허리를 숙이고 담담하게 말을 꺼낸다. 체구에서 짐작할 수 없는 베이스 톤의 목소리가 조용히 집무실의 공기에 녹아들었다.

 “내일 오후 1시쯤 도착한다는 소식입니다.”
 “고맙다. 이만 들어가 쉬도록.”

 전혀 돌아볼 생각도 않는 황제의 뒤에 보이지 않는 인사를 하고 물러나며 살짝 허리를 든 리넨은 이내 허리를 곧게 펴고 말았다. 창밖에서 들어온 밝은 빛에 까맣게 보이는 황제의 뒷모습이 가녀렸다. 그녀는 뛰어난 황제지만 동시에 한 사람의 여인이기도 한 것이다. 황제의 드레스 자락을 밟을 수는 없었기에 어깨에 손을 얹어 끌어당겼다. 황제의 날씬한 어깨는 그다지 체격이 큰 편이 아닌 리넨의 품에도 아무런 부담이 없다. 아찔한 높이의 힐 탓에 리넨보다도 키가 커 보이지만 그렇다고 쓰러져서야 여황제의 보좌로서 가치가 없다.

 “누가 황제의 몸에 손을 대도 좋다고 했지, 리넨 니르안 데 페르샤인?”

 권위 있는 목소리에는 명령을 내리는 사람 특유의 분위기가 여실히 배어 있었지만 이미 신하에서 오랜 친구로 돌아선 리넨은 웃었다. 수많은 장신구 때문에 가볍게 잡은 어깨에만 손을 붙여 그녀를 끌어안은 체 말을 잇는다.

 “매번 느끼지만 옷 정말 무겁다. 이걸 입고 어떻게 하루 종일 서있는 거야?”
 “여자들은 다 해. 네 덕분에 하녀들이 4시간동안 꾸며준 머리가 엉망이 됐잖아.”
 “어차피 더 이상 일정 없잖아. 이러고 있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인데 조금은 놀란다거나 반가워해봐.”

 말하는 중에 어느 샌가 볼멘소리로 바뀐 리넨의 목소리에 아실리아는 풋, 하고 웃고 말았다. 아까보다 편안해진 듯 한 모습에 리넨의 얼굴에도 미소가 돌아왔다. 노리고 만들어낸 상황인 양 보였지만 그것은 그저 두 사람의 일상이었다.

 “힘들 때는 조금 우는소리도 해봐. 넌 너무 강한 척 하려고만 해서 문제야.”
 “너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하다 돌아서서 한꺼번에 징징거리는 건 사양인데.”
 “이봐.”

 아실리아는 리넨의 팔을 톡톡 쳐 포옹에서 벗어났다. 받쳐준다고 해도 무릎을 꺾은 체 서있는 일은 굉장히 힘들었다. 그것도 십일 센티 짜리 힐을 신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그것도 편한 신발이라고 신은 것이지만. 황제는 책상 위에 놓인 거울을 보며 잠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돌아섰다. 그렇게 그 날 하루 중 처음으로 아실리아와 리넨의 눈이 마주쳤다. 뚱한 표정이던 리넨은 그녀의 미소 앞에서 팔짱을 풀고 자세를 바로 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그녀의 신하로서 운명 지어진 리넨에게 저 위풍당당한 얼굴이 위력을 잃는 일은 결단코 없으리라. 아실리아의 영롱한 푸른 눈동자가 리넨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 이름은 아실리아 루 엘 하르미안. 이 하르미안 제국의 황제이자 제국 내 셋 뿐인 소드마스터의 일인.”

 연지를 발라 붉디붉은 입술이 요염한 색을 머금었다.

 “나는 고작 내 신하에게 염려 받을 정도로 약하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리넨 니르안 데 페르샤인 공작?”

 리넨은 한 손을 가슴에 얹고 다시 허리를 굽혔다. 짙은 청색 머리칼이 귀를 넘어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Yes, Her Majesty the Queen Asillia."

 자연스럽게 내민 손을 받아 키스하며 리넨은 다시 한 번 그녀에게의 충성을 다짐했다. 아실리아가 허리를 숙인 리넨을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씩, 장난스럽게 웃었다.

 “물론, 친구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그리고 자기 손으로 리넨을 일으키고는 매달려 안긴다. 리넨은 자신의 목을 꼭 끌어안은 황제의 등을 같이 끌어안아 주었다. 그녀의 등이 작게 떨리고 있는 것은 모르는 척 그렇게.




 하늘하늘, 소년이 발을 뗄 때마다 화사한 적금발이 휘날렸다. 일부러 그렇게 날리라고 해도 나오지 않을 듯한 이상적인 흩날림에 지나던 하녀들의 시선이 흘끔흘끔 모이는 것은 당연했다. 왕궁의 복도를 소년처럼 뛰어다니면 보통은 꾸중을 듣기 마련이지만 그 넓은 제국 안에도 그를 막을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소년의 이름은 슈베린 루이얀 엘 하르미안. 현 황제 아실리아 루 엘 하르미안의 친동생인 황자이다. 올해로 19세. 이리 경거망동했다가는 후에 쏟아질 잔소리가 왕실 창고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남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슈베린의 호기심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재밌는 것이 들어오는 날이었다.
 어릴 적부터 탐험이랍시고 이 잡듯이 돌아다닌 성안을 날듯이 뛰어 알현실로 향하는 코너에 들어섰다. 거대한 알현실의 문이 눈에 들어오자 슈베린의 얼굴에 떠있던 홍조와 미소가 한층 진해졌다. 신나게 달려드는 슈베린을 경비들이 막으려 했으나 한낱 경비의 신분으로 황제가 지극히 아끼는 동생에게 제대로 손을 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슈베린은 간단히 경비들을 제치고 알현실의 문을 양손으로 떠밀고 들어갔다.
 붉은 융단이 문에서부터 황제가 앉은 옥좌가지 길게 이어져 있는 알현실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융단의 좌우로 많은 수는 아니지만 관리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장대한 풍경이었지만 슈베린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고 융단 위를 빠르게 달렸다. 높은 옥좌에 앉은 누이들을 바라보느라  주변 신하들의 당황한 표정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누님, 누님. 지금이지? ‘루니안’의 ‘남자’사제가 온다는 거!”

 슈베린의 반짝이는 두 눈이 아실리아를 향했다. 황제는 얼굴을 굳혔다. 사랑하고 사랑하는 동생이지만 사랑할수록 엄할 때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진작 시종을 보내서 알렸건만 어째서 이제야 온 거니?”

 딱딱한 목소리에 슈베린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고개가 땅으로 꺼지고 시선이 사방을 배회한다.

 “그게……, 잠깐 일정을 벗어나서 시종이 나를 못 찾은 듯 하달까…, 그러니까…….”
 “하여간 어린애라니까. 또 시종들하고 숨바꼭질이라도 한 거겠지. 됐으니까 빨리 비켜. 네가 거기서 그러고 있는 사이에 도착하면 어떻게 할 거야.”

 아실리아의 것 좌우에 조금 낮게 자리한 두 옥좌 중 한 곳에 앉아있던 여인이 고고한 자세로 슈베린을 내리깔아보았다. 아실리아 못지않게 따가운 독설을 내뱉은 여인, 아니 여인이라기엔 소녀 테가 나는 여성은 으르릉 거리며 노려보는 슈베린을 본척만척 입을 가리던 부채를 살며시 흔들었다. 금을 녹여 실을 자은 듯 샛노란 금발을 양쪽으로 여러 가닥 땋아 말아 올린 아이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 선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미묘한 풋풋함을 온몸으로 뽐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샤린 카르센 엘 하르미안. 아실리아 루 엘 하르미안의 동생이자 슈베린 루이얀 엘 하르미안의 쌍둥이 동생. 어릴 적부터 도도한 장미로 이름 높았던 소녀는 이제 곧 그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해 흐드러지게 피어날 터였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슈베린과 샤린은 극도로 사이가 나빴다. 슈베린이 예쁜 입술을 오물거리며 삐죽였다.

 “말 되게 예쁘게 한다. 그래서야 나중에 결혼이나 제대로 하겠어?”
 “걱정 마. 나 좋다는 남자 많아.”

 남매의 독기어린 말싸움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문무백관이 다 집합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벌어진 왕자와 공주의 어린애 같은 싸움질에 아실리아의 짙은 눈썹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황제가 손짓하자 옥좌 뒤에 서있던 리넨이 앞으로 나섰다.

 “자, 자. 두 분. 아랫것들이 보기에 과히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일단 황자님께서도 올라와 앉으시지요. 곧 귀빈들께서 도착하실 시간입니다.”

 샤린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 슈베린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체였지만 싸움을 이어가지는 않았다. 슈베린이 옥좌에 앉고 리넨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자 기다렸다는 듯 경비병의 목소리가 들렸다.

 “달의 여신 ‘루니안’님의 사제 분들의 도착입니다!”

 거대한 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품위 없어.”

 슈베린과 샤린의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손님의 모습이 드러났다. 거리가 워낙 멀어서 인원이 셋이고 모두 하얀 옷을 입었다는 것 외에는 알 수 없었다. 그나마 한 사람이 유난히 키가 작다는 것 정도가 얻을 수 있는 정보의 다였다.

 “에이씨, 융단은 왜 저리 긴 거야.”

 만족스럽게 보이지 않자 짜증스러워진 슈베린의 투덜거림이었다. 샤린도 별말은 없었지만 손님들의 느릿한 걸음이―걸음이 느린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거리가 긴 것이 문제였지만―불만스러운지 부채를 접어 손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솔직한 두 사람의 반응에 리넨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본디는 짧지만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길디 긴 시간이 지나고 세 명의 사제가 옥좌 앞에 섰다. 신을 모시는 몸, 사제들은 허리만을 숙여 인사했다.

 “대 제국 하르미안을 향한 달빛의 가호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달빛의 반짝임이 이곳에 직접 닿음에 감사하오. 갑작스러운 방문에 많은 것을 준비하지는 못했지만 잠시 머무르는 동안 즐겁기를 빌겠소.”

 형식적인 인사가 오갔다. 지금 이 홀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하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었다. 그들은 홀 안을 가득 메워 인간 벽을 이룰 숫자의 신하들에 멋있는 식사에 귀족들이 모두 모일 연회까지 마련하느라 눈코 뜰 새도 없을 것이다. 긴급히 소집된 탓에 이 자리에 집결한 신하들도 절반이 체 못되는 수였다. 새벽에 갑자기 도착한 전갈에 성의 모든 고용인들은 고양이 손이 급할 상황이었다. 피부미용을 위해 오후까지 푹 자야한다는 게으름뱅이 귀족 아가씨들도 오늘만은 아침 해를 보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화려한 하르미안의 수도가 온통 뒤집힌 셈이었다. 이 자리에 선 세 사람을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움직였다.
 한데, 이어진 사제의 말은 기다린 사람들에게는 뜻밖의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씨익 웃는 입술이 베일 아래로 아스라니 비쳐보였다.

 “저희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여신을 모시는 몸, 오래 성지를 떠나있을 수는 없는 것이기에.”

 당황한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샤린의 눈이 동그래졌고 슈베린의 발간 뺨이 부풀었다. 리넨은 티는 내지 않았지만 얼굴에선 놀란 기색이 엿보였다. 침착한 것은 어깨 앞으로 흘러내린 짙은 보랏빛 머리칼을 하얀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고 있던 황제 아실리아 뿐이었다.
 소란에도 불구하고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말을 했던 사제도 황제도 침묵했다. 다들 자기들끼리 소곤거리긴 해도 대뜸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것도 이내 리넨의 제지에 조용해졌다.

 ― 사락.

 얇은 천이 끌리는 소리가 침묵 속에 흐릿하게 들렸다. 이런 소리가 들릴 곳은 단 한 곳뿐이기에 얼핏 들은 사람들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듣지 못한 사람들도 옆 사람을 따라 시선을 고정시켰다. 베일 너머로 빠져나온 가냘픈 손이 마법처럼 주의를 끌었다. 홀 안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그 작은 손이 무슨 기적이라도 되는 양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반 어른들의 절반 정도 밖에 안 되어 보이는 작은 키의 사제가 다른 두 사람의 앞에 섰다. 속삭이는 듯 숨소리가 섞인 고운 목소리였다. 다들 숨조차 죽이고 있지 않았다면 아무도 듣지 못했을 작은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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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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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르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이상하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당연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다른 이들에게 이상하게 생각된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소년은 말가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드높게 펼쳐진 푸른 하늘은 그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처럼 뛰어놀지 못했다. 하늘 아래 서있는 것만으로도 무서웠으니까. 이렇게 그늘에 숨어야지만 간신히 바라볼 수 있었다. 비웃어도 괜찮았다. 하늘보다는 덜 무서웠으니까.
  연녹빛으로 물든 넓은 평야도 무서웠다. 숨을 곳 하나 없이 광활한 대지는 소년에게 사지가 얼어붙는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래서 가끔 어른들이 거래를 위해 산을 내려갈때면 방안에서 창문 밖으로 눈만 내놓고 같이 가게 해달라고 때쓰는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그런 곳이 무에 좋아서 저토록 가고 싶어하는 지 소년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땅의 낮음에 반항하듯 치솟은 산꼭대기도 무섭기만 했다. 70년을 산속에서 살았지만 소년은 사방 막힌 것 하나 없이 세상과 직접 닿을 수 있는 산의 정상에는 단 한번밖에 오르지 못했다. 오른다고 생각만 해도 숨이 가빠올 지경이었다.
  소년은 전방에 뭐가 펼쳐진지도 알 수 없을만큼 울창한 숲이 좋아했다. 그대로 녹아서 숲과 하나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기왕이라면 화인이 아니라 나무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어두움이 안락함이었고 조용한 소란이 자장가가 되어 소년의 발목을 잡는 곳이었다. 그래서 소년은 숲에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 너무 좋아서 무서웠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게 만드는 쓴 것을 좋아했다. 가끔은 씁쓸함이 과해 기침이 났지만 그것도 좋았다. 간식으로 단 과자나 빵 같은 것이 나오면 소년은 근처 숲으로 나와 쓴 풀을 씹었다. 단 것은 냄새만 맡아도 질렸다.

  그래서였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소년을 타겟으로 한 것은. 그녀는 어쩌면 소년의 이런 본질을 한눈에  꿰뚫어 보았을지도 몰랐다.

  그것은 아주 평범한 일상의 어느 날 찾아온 것이었다. 낯선 이가 마을 한복판을 걷고 있었다. 이웃마을―산을 세개쯤 넘어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에서 가끔 찾아오는 다른 화인족이 아니었다. 여인과 아이, 모녀로 보이는 두 사람은 마을 사람들 중 누구도 본 적이 없는 확실한 외부인이었다. 시원하게 틀어올린 머리 탓에 여인의 뾰족하게 솟은 귀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보다도 눈길을 끄는 것은 아이의 등에 달린 새하얀 날개. 걸음에 맞춰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모두들 시선을 빼앗겼지만 아무도 말을 걸지는 못했다. 어른들은 지켜보고 아이들은 주위를 맴돌았다. 10년에 한번도 볼 수 없는 외부인, 그것도 다른 종족에게 면역이 없는 건 어른이나 아이나 똑같았다. 그나마 이럴 때에는 아이들 쪽이 조금 더 대응이 빠른 법이었다.
  한 아이가 용감하게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두 사람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아이들이 뒤를 졸졸 쫓아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지만 부릅 뜬 눈과 마주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주먹을 불끈 쥔 아이의 모양새가 우스웠다.

  "네, 네놈들은 누구냐! 이 마을엔 왜 왔지!"

  아이는 긴장한 듯 목소리는 떨렸지만 말은 분명하게 했다. 아이를 걱정해서였을까 조금씩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잠시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두 이방인 중 한 사람이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뜨리기 전까지는. 발작적으로 웃기 시작한 그녀는 땅바닥을 구를 듯한 기세였다. 아직 조그마한 그녀의 딸이 말렸지만 전혀 그칠 기미가 없었다.

  "푸흐크하하하하하학, 쟤, 쟤, 얼굴, 으하하, 푸크크크크큿, 히히힉."
  "어머니. 그만 하세요. 어머니!"

  작게 한숨을 쉰 소녀는 미소를 띄고 사람들 앞에 허리를 숙였다. 못난 어머니 때문에 죄송합니다, 라고. 그것이 이 작은 산골 마을과 그들 모녀와의 첫만남이었다.

  어미의 이름은 에피, 딸의 이름은 라파엘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오랜 여행에 지쳤을 사람들을 환영하지 못하고 경계한 것에 대한 사과로 할수 있는 한 두 사람을 후하게 대접했고 심지어 한동안 머물 수 있는 방까지 마련해주었다. 그들은 사양하지 않고 2-3일 머물다 가기로 했고 그 사이  두 사람은 마을의 인기인이 되었다. 에피의 세상 이야기는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귀를 기울이는 여흥거리였고 라파엘은 눈에 띄는 흰 날개 덕에 아무 말 없이 서있기만 해도 아이들이 모였다. 그 뿐 아니라 라파엘은 덜렁거리는 어머니를 챙기는 착실한 아이로 어른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산골밖에 모르는 순박한 사람들에게는 사근사근 상냥한 말씨는 세련됨으로 단정한 몸가짐은 귀족적인 품위로 보이기에 무리가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 에피도 털털했지만 도시 사람의 분위기가 풍겼다. 라파엘은 마을 사람들에게 마지막까지 마음 착하고 성실한 아이로 떠나갔다.

  마을 사람들의 부탁으로 모녀가 일주일째 마을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와장창,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모여들었다. 어른 없이 아이들만 잔뜩인 그 곳은 일명 '선생님'의 집이었다. 선생님은 마을에 정착한 외부인으로 밖에서는 무언가의 학자라고 했지만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는 약을 지어주는 의사였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돌발 상황이 닥쳤을 때 조언을 구하러 가는 사람이기도 했다. 낮이면 일에 바쁜 어른들을 도울 수 없는 어린아이들이 그의 집에 모여 옛날 이야기를 듣고 주변 식물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는 했다. 선생님이 자리를 비워도 아이들은 그의 집 주변에 모여 놀았다. 그 날은 선생님이 산을 오르는 날이었다. 즉,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의 집을 한가득 메운 화분 중 서너개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라파엘이 쓰러져 있었다. 그 앞에는 아이들이 모이자 어쩔 줄 몰라 눈만 데록데록 굴리는 소년이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애러랫. 그는 아무 생각없이 숨을 곳을 찾아 발을 떼었다가 화분의 파편을 밟고 주저앉았다. 파악하기 힘든 상황에 웅성거리기만 하던 아이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선생님을 불러와. 개중에서 나이가 많은 아이였다. 그제야 주섬주섬 아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째서 라파엘이 쓰러졌는 알 수 없었지만 화분을 깨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비를 들고와 바닥을 쓸어냈다. 몇몇 여자아이들이 라파엘을 일으켰다.

  "라파엘, 어디 다쳤어?"
  "…응…, 여기…어디."
  "선생님 댁이야. 괜찮아?"
  "머리가 조금 아파. 그치만 아마 괜찮을거야."
  "다행이다, 어디 다친 줄 알았어."
  "화분에 머리를 얻어맞긴 했는데……."
  "히?!"

  아이들이 라파엘의 머리카락을 들춰보고 피가 난다며 야단이었다. 라파엘은 얌전히 앉아 곤란한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라파엘에게 쏠린 사이 애러랫은 잘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숨어 들었다. 낑낑거리며 발에 박힌 화분의 파편을 빼냈다. 흙먼지가 앉은 맨발에 빨간 피가 베어나왔다. 왈칵 눈물이 솟는 것을 소매로 문질렀다. 이정도 아픈 건 당연한 거야. 바보같이 화분이 깨진 곳을 맨발로 걸어다녔는걸.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애러랫은 그대로 웅크린 체 소란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고개를 내밀어 살피기도 무서워 구석에 틀어박힌 체 라파엘과 아이들이 나가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저…, 아까 그 애는 어디로 간거야?"

  조용한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애러랫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왜? 왜 나를 찾지? 아이는 당황해서 더욱 어둠이 깊은 곳으로 기어들어갔다.

  "누구?"
  "애러랫이라면 몰라. 어딘가 숨어있겠지. 맨날 구석에 틀어박혀 있어."
  "좀 이상한 애야, 신경쓰지마."
  "그치만……."

  구석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귀를 틀어막았다. 무슨 말이 이어질지 듣고 싶지 않았다. 라파엘이라는 여자아이는 분명히 마을 사람들 전부의 신뢰를 얻을 만큼 착하고 그냥 보더라도 믿음이 가도록 예뻤지만 어째선지 애러랫은 그녀가 무서웠다. 하늘을 닮은 푸른 두 눈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는 날개 탓일지도 몰랐다.
  이유야 어찌되었 건 애러랫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녀 앞에 서자 몸이 굳었다. 그리고 그런 애러랫을 보고 라파엘은 웃었다. 평소랑 다름없이, 그저 예쁘게. 다가오지도 않고 모른 척하지도 않고 똑바로 바라보며 웃었다. 얼어붙은 애러랫을 앞에 두고 감상하기라도 하듯 상냥하게 웃고만 있었다. 누군가 그녀를 부르기까지 짧은 순간 동안 두 사람은 그렇게 서있었었다.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몇일이나 지났다고 또 그녀와 단 둘이 있어야 했다. 애러랫은 그 사실이 너무 버거웠다. 그래서 눈물을 꾹 참았다. 어째서 그래서인지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눈을 뜨니 석양이 드리운 하늘이 보였다. 애러랫은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어질,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선생님의 침실이었다. 몸이 약한 탓에, 그리고 애러랫이 그나마 친하게 지내는 유일한 사람이 선생님인 탓에 자주 누워있었던 곳이라 금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있었다.
  푸른 하늘을 닮은 눈을 가늘게 뜨며 라파엘이 웃었다.

  "안녕?"

  다정한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평소였다면 은폐물을 찾아 숨을 준비부터 했을텐데 그녀 앞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몸은 움직여지지 않는 대신 와들와들 떨리기만 했다. 저것과 똑같은 얼굴로 자신의 손가락을 화분에서 떼어내던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그 화분은 그대로 떨어져 라파엘의 머리에 맞았었다. 놀란 애러랫이 사다리에서 내려오다 화분을 두개나 더 깼다.

  "왜 그렇게 떠니?"

  걱정스러운 표정에 마찬가지로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 선생님이 들어와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애러랫에게도 몇가지 물어왔지만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라파엘의 눈치를 보았지만, 그녀는 애러랫에 대해 미안한 감정만 비쳤다. 자신의 실수로 애러랫이 화분을 놓쳤노라고 말하고 있었다. 애러랫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선생님이 눈에 띄게 떨고 있는 애러랫을 걱정했지만 그는 그저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 라파엘은 애러랫에게 거듭 사과했다. 선생님은 양쪽 모두 실수일 뿐이니 서로 사과하고 넘어가라며 두사람 사이를 중재했다. 애러랫은 계속 고개만 끄덕였다.
  그 날 밤, 애러랫은 무서운 것 목록에 새로운 것을 추가했다. '상냥한 말씨, 친절한 미소.' 1순위에 올려놓은 그 것이 가까운 곳에 보인다면 바로 도망가자고 몇번씩 다짐했다. 하지만 애러랫은 반년 가까운 시간 동안 단 한번도 그것을 실천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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